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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푸른 유리의 계절

포르투의 푸른 방

Views 31약 11분생성형 AI 활용
Summary

낯선 도시가 문을 닫는 방식

포르투에 도착한 날, 서윤은 도시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비 때문이었다. 공항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젖어 있었고, 오래된 벽은 물을 머금은 종이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붉은 지붕들은 비에 눌려 낮아 보였고, 강 쪽으로 내려가는 골목들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도 태연히 걸었고, 차들은 돌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오직 서윤만이 자기 인생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사람처럼 숨을 고르지 못했다.

숙소는 오래된 건물의 삼층이었다. 복도에는 나무 냄새와 눅눅한 석회 냄새가 섞여 있었고, 계단은 밟을 때마다 다른 음으로 삐걱거렸다. 주인 여자는 빠른 말로 방의 규칙을 설명했다. 서윤은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지 못해도 살아야 했다. 그때의 그녀는 이미 그런 일에 익숙했다.

방 문이 닫히자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졌다.

작은 침대 하나, 낡은 책상 하나, 푸른 타일이 붙은 세면대, 그리고 골목을 향한 긴 창. 방은 생각보다 좁았지만, 벽 한쪽에 붙은 타일 때문에 물속처럼 보였다. 짙은 파랑과 흰색이 반복되는 무늬였다. 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파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타일 곳곳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어떤 것은 모서리가 깨져 있었고, 어떤 것은 오래된 얼룩을 품은 채 빛을 잃고 있었다.

서윤은 가방을 내려놓고 그 타일을 한참 바라보았다.

깨졌는데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워서 더 슬펐다.

그녀는 젖은 코트를 벗지도 못한 채 침대 끝에 앉았다.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공항에서 한 번 켜보았지만 준오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그가 편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받았지만 대답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대답할 말이 없어 침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차례로 왔다. 생각은 비처럼 쉬지 않았다.

서윤은 침대 위에 손을 올렸다. 낯선 나라의 침대는 낯선 사람의 손등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그 차가움 속에서 통영역의 플랫폼을 떠올렸다. 비에 흐려진 유리창, 뛰어오르던 숨, 끝내 보이지 않던 준오의 얼굴. 그리고 역무원에게 건넨 편지.

기다리지 말아요.

그 문장을 쓴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거짓말이었는지, 아니면 진심과 거짓말이 너무 오래 섞여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창밖에서 누군가 포르투갈어로 크게 웃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웃음은 이상하게도 더 외롭게 들렸다. 서윤은 그제야 코트를 벗고, 스케치북을 꺼냈다. 첫 장에는 통영의 유리온실이 있었다. 여름의 빛, 깨진 유리, 그 아래 서 있던 남자의 뒷모습.

그녀는 연필을 들고 그 그림 위에 아주 작은 선을 하나 더 그었다. 유리창에 비가 흘러내리는 선이었다.

그날 밤, 서윤은 거의 잠들지 못했다.

비는 새벽까지 내렸다. 빗방울이 창틀을 치는 소리는 한국에서 듣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견디기 어려웠다. 먼 곳으로 오면 어떤 소리는 달라질 줄 알았는데, 비는 여전히 비였다. 사람을 가장 오래된 기억 앞으로 데려다 놓는 방식도 같았다.

아침이 되자, 방의 푸른 타일 위로 흐린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통영의 온실에서 보던 푸른빛과 달랐다. 더 차갑고, 더 묽고, 더 오래된 색이었다. 마치 누군가 오래전의 슬픔을 물에 풀어 벽에 발라놓은 것 같았다. 서윤은 그 빛을 보며 생각했다.

여기서는 울지 말자.

아무도 나를 모르니까.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서윤에게 그것은 슬픈 자유였다.

포르투의 푸른 방

아줄레주 사이에 남은 손끝

복원 학교의 첫 수업은 오래된 성당에서 시작되었다.

성당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골목 끝에 갑자기 나타나는 회색 건물이었다. 정면은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비와 바람을 맞아 표정을 잃은 사람처럼 묵묵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푸른 타일 때문이었다.

아줄레주라고 했다. 유약을 입혀 구운 장식 타일. 흰 바탕 위에 푸른 그림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서 보면 하나의 큰 이야기처럼 보였다. 성인들의 손, 배의 돛, 물결, 기도하는 얼굴, 포도나무 잎사귀. 가까이 다가가면 수백 장의 조각이었고, 멀어지면 하나의 장면이었다. 서윤은 그것이 사람의 기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서 보면 깨진 조각뿐인데, 멀리서 보면 비로소 한 시절의 풍경이 되는 것.

스테인드글라스는 제단 뒤쪽에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납선이 유리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있었다. 붉은색은 이미 조금 검게 변해 있었고, 초록은 먼지 때문에 빛을 잃었다. 푸른 유리 몇 조각에는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자 그 금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왔다.

수업을 맡은 엘레나 선생은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회색 머리를 짧게 묶었고, 손가락에는 늘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녀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복원은 새것처럼 만드는 일이 아니에요. 살아남은 시간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통역을 통해 들은 말이었지만, 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처음 며칠 동안 그녀가 한 일은 아주 사소했다. 타일 표면의 먼지를 닦고, 깨진 모서리를 관찰하고, 유리의 균열을 확대경으로 확인하고, 기록지에 날짜와 상태를 적었다. 하루 종일 한 벽 앞에 서서 손바닥보다 작은 부분만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몸은 금방 지쳤다. 눈은 따갑고, 허리는 아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씩 고요해졌다.

깨진 것을 오래 들여다보면, 사람은 자기 안의 깨진 곳을 덜 무서워하게 된다.

타일 한 장을 떼어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무리하게 힘을 주면 더 크게 깨졌다. 오래 붙어 있던 것을 떼어낼 때는 먼저 주변을 살펴야 했다. 어디가 약한지, 어디까지 금이 갔는지, 무엇이 그것을 아직 붙들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엘레나는 늘 말했다.

"상처는 중심보다 가장자리에서 먼저 말합니다."

서윤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떠올렸다. 그녀의 중심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척했다. 학교에 나가고, 기록을 쓰고, 장갑을 끼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가장자리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비가 오면 손끝이 떨렸고, 역 근처를 지나면 숨이 막혔다. 누군가 한국에서 왔냐고 물으면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다루는 날은 더 조심스러웠다. 유리는 타일보다 솔직했다. 금이 가면 숨길 수 없었고, 빛이 닿으면 아픈 곳이 먼저 드러났다. 작은 조각 하나를 들어 올릴 때도 두 손을 모두 써야 했다. 서윤은 유리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창 쪽으로 들어 보았다. 푸른 유리가 흐린 햇빛을 통과시키자, 그녀의 손금 위로 바다 같은 색이 번졌다.

그 순간, 그녀는 통영의 유리온실을 떠올렸다.

준오가 녹음기를 들고 서 있던 오후. 비가 유리 지붕을 두드리던 소리. 그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 그때 그녀는 유리가 빛을 통과시키는 물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포르투의 성당에서 그녀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유리는 빛을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는다. 자신이 견딘 시간과 상처와 색을 통과시켜, 빛의 성격을 바꾼다.

사람도 그럴지 모른다.

사랑을 통과한 사람은 이전과 같은 빛을 내지 못한다. 더 어두워질 수도 있고, 더 깊어질 수도 있다. 때로는 금이 간 자리에서만 보이는 색이 생기기도 한다.

서윤은 그날 작업 일지 맨 아래에 한국어로 적었다.

빛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번역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한 줄을 더 썼다.

나는 아직 준오 씨의 침묵을 번역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생기는 속도

포르투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빨리 일정한 모양을 갖추었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세면대의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빵집에서 가장 싼 빵과 커피를 샀다. 여덟 시 반까지 성당에 도착해 장갑과 마스크를 챙기고, 오전 내내 타일의 균열을 기록했다. 점심에는 성당 뒤 작은 광장에서 동료들과 샌드위치를 먹었다. 오후에는 유리 조각을 분류하거나 납선의 부식 상태를 확인했다. 저녁에는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하고, 수업 자료를 읽고, 알아듣지 못한 단어들을 노트에 베껴 썼다.

반복은 사람을 살린다.

아주 천천히, 서윤은 그 사실을 배웠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날에도 아침은 오고, 일은 기다리고, 누군가는 그녀에게 붓을 건넸다. 슬픔은 거대한 파도처럼 사람을 한 번에 삼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컵 가장자리에 묻은 얼룩처럼 하루하루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상은 그 얼룩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해도, 더 번지지 않게 붙들어주었다.

친구들도 생겼다.

미겔은 성당 근처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이었다. 손재주가 좋았고, 무엇이든 고치려 들었다. 의자가 삐걱거리면 점심을 먹다 말고 뒤집어 보았고, 누군가의 연필깎이가 고장 나면 마치 유서 깊은 유물을 복원하듯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는 서윤의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해 처음에는 "수윤"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루스"라고 불렀다. 빛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네스는 늘 검은 옷을 입는 학생이었다. 웃을 때는 입을 크게 벌렸고, 화가 나면 말이 빨라졌다. 그녀는 서윤에게 포르투갈어 욕부터 가르치려다가 엘레나에게 혼났다. 그러고는 대신 장보기 단어를 가르쳤다. 빵, 물, 소금, 비, 창문. 서윤은 그 단어들을 하나씩 외웠다. 낯선 언어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들이 결국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토마스는 사진을 찍었다. 그는 복원 과정을 기록하는 담당이었는데, 사람보다 빈 의자나 벽의 그림자를 더 자주 찍었다. 어느 날 그는 서윤이 푸른 유리 조각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찍고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서윤의 얼굴은 반쯤 푸른빛에 잠겨 있었다.

"너는 늘 빛이 들어오는 쪽에 서 있어."

토마스가 말했다.

서윤은 사진을 보며 웃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빛이 들어오는 쪽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오는 곳을 등지고 버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돌아보면 무너질 것 같아서. 돌아보면 통영의 여름이, 준오의 목소리가, 역에 남겨둔 편지가 한꺼번에 자신을 덮칠 것 같아서.

그래도 친구들은 그녀를 천천히 현실로 끌어냈다.

금요일 저녁이면 그들은 강가로 내려갔다. 두루 강 위로 해가 지면 물결은 금빛과 잿빛 사이에서 흔들렸고, 다리 위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관광객들의 웃음소리,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잔을 부딪치는 소리, 골목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목소리. 포르투는 낡았지만 멈춰 있지 않았다. 모든 오래된 것들이 자기 방식대로 계속 살아 있었다.

서윤은 그 점이 좋았다.

오래된 도시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자신에게도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타일이 깨져도 벽은 남아 있었고, 유리의 색이 바래도 빛은 들어왔다. 사람도 그럴 수 있을까. 사랑이 끝나도, 아니 끝났다고 믿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계속될 수 있을까.

그러나 비가 오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포르투의 비는 자주 예고 없이 내렸다.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골목의 빨래들이 허둥지둥 창 안으로 사라지고, 카페 앞 의자들이 실내로 들어갔다. 비가 돌바닥을 적시면 도시 전체가 푸르게 가라앉았다. 그 푸른 젖음 속에서 서윤은 어김없이 통영의 유리온실을 떠올렸다.

온실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

준오가 녹음기를 켜던 손.

"비 소리는 같은 곳에 떨어져도 늘 조금씩 달라요."

그가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 서윤은 그 말이 낭만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포르투에서 비를 맞으며 그녀는 알았다. 같은 비가 다른 도시에서 내리면,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어떤 거리는 비행기로 건너왔어도 마음으로는 한 발도 떠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 오는 날이면 친구들은 서윤이 조금 말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네스는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농담을 했고, 미겔은 그녀에게 뜨거운 커피를 건넸다. 토마스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함께 침묵했다. 그들의 다정함은 직접 묻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서윤은 그것에 고마웠다.

그러나 고마운 마음과 기대고 싶은 마음 사이에는 늘 두려움이 있었다. 누군가의 친절에 익숙해지는 순간, 언젠가 그 친절이 사라졌을 때 또 무너질까 봐. 그녀는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웃고, 밥을 먹고, 함께 일하고, 이름을 부르지만, 더 깊이는 가지 말자.

사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보호가 오래되면, 그것은 점점 작은 감옥이 된다.

서윤은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보내지 못한 편지들

서윤은 준오에게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이메일을 쓰려 했다. 제목 칸에 그의 이름을 적고, 본문에 "잘 지내요?"라고 입력했다. 그러나 그 두 단어가 너무 태연해 보여 지웠다. "편지는 받았나요?"라고 썼다가 그것도 지웠다. 받았다면 왜 답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았고, 받지 못했다면 그녀 혼자 너무 멀리 와버린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종이는 보내지 않아도 되니까. 보내지 않을 편지는 사람이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곳이니까.

첫 번째 편지는 포르투에 도착한 지 열흘 만에 썼다. 방의 푸른 타일 아래, 밤늦은 책상 앞에서였다. 창밖에서는 누군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고, 비는 그친 뒤였다. 그녀는 연필로 천천히 적었다.

준오 씨, 여기는 비가 자주 와요. 이상하게도 비 냄새는 통영과 달라요. 돌이 젖는 냄새가 먼저 나고, 그다음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나요. 당신이라면 이 소리를 녹음했을까요. 창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아래층 식당의 접시 소리를 따로 분리해서 들었을까요. 나는 아직도 소리를 들으면 당신이 먼저 생각나요. 그래서 가끔은 귀를 닫고 싶어요.

그녀는 거기까지 쓰고 종이를 접었다. 봉투에는 넣지 않았다.

두 번째 편지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처음 분해한 날 썼다.

오늘 유리 조각 하나를 손에 올려놓았어요. 푸른색이었어요. 빛이 내 손을 통과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유리가 빛을 바꾸고 있었겠죠. 나는 당신을 지나오면서 어떤 빛이 되었을까요. 더 어두워졌을까요. 아니면 당신이 보기에는 처음부터 어두웠을까요.

그 문장을 쓰고 서윤은 오랫동안 멈췄다. 너무 비겁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대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은 안전했다. 안전해서 비겁했다. 그녀는 종이를 찢으려다 그만두었다. 찢어버리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까 봐 무서웠다.

세 번째 편지는 비 오는 일요일에 썼다.

그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친구들은 강가의 시장에 가자고 했지만 서윤은 몸이 좋지 않다고 거절했다. 사실 몸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빗소리가 방의 타일을 타고 오래 울렸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통영역 대합실의 젖은 바닥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도망친 걸까요.

그렇게 시작한 편지는 길어졌다.

그때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를 위해서, 내 미래를 위해서,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 와서 생각하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게 정말 당신이었는지 아니면 내 자존심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가난하다는 말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당신 앞에서 꺼내면, 당신 눈빛이 달라질까 봐 무서웠어요. 동정받는 것이 싫었어요. 아니, 사실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걸 구분할 자신이 없었어요.

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방 안이 너무 조용했다.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을 읽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준오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이제야 너무 정확해지는 것이 억울했다. 사람은 왜 늘 혼자 남은 뒤에야 말을 잘하게 되는 걸까. 왜 마주 보고 있을 때는 가장 필요한 문장이 목 안에서 돌처럼 굳는 걸까.

그녀는 편지들을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서랍 안에는 점점 보내지 못한 편지가 쌓였다. 어떤 편지는 한 장뿐이었고, 어떤 편지는 네 장이나 되었다. 어떤 편지에는 준오의 이름이 있었고, 어떤 편지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이름을 쓰지 않으면 그리움이 줄어들 줄 알았지만, 이름 없는 편지가 오히려 더 아팠다. 누구에게도 도착하지 못할 마음은 주소를 잃은 채 더 오래 떠돌았다.

가끔 서윤은 우체국 앞까지 갔다.

봉투에 한국 주소를 적고, 줄을 서고, 차례가 가까워지면 다시 빠져나왔다. 우표를 사면 정말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보내면 답을 기다리게 될 것 같았다. 답이 오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확실하게 버려진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편지를 품에 넣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답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켰다.

그러나 답을 받지 않는 사람은 동시에 어떤 가능성도 잃는다. 오해가 풀릴 가능성, 사과할 가능성, 다시 상처받더라도 진실을 알 가능성. 서윤은 그 모든 가능성을 서랍 속에 접어 넣었다.

그녀가 가장 오래 붙들었던 편지는 겨울 초입에 쓴 것이었다.

준오 씨, 당신이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기다렸다고 생각해도 견딜 수 없어요. 전자는 내가 버려진 사람이 되는 일이고, 후자는 내가 당신을 버린 사람이 되는 일이니까요. 나는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아서 매일 다른 생각을 해요. 오늘은 당신이 나를 잊었을 거라고 믿고, 내일은 당신이 나를 기억할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하루씩 건너가요.

그 편지는 끝까지 쓰지 못했다.

마지막 줄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한 선택은 도망이었을까요, 보호였을까요.

그 질문 아래에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연락은 어느 새벽에 왔다.

포르투는 아직 어두웠고, 방 안은 차가웠다.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서 오래 진동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서윤은 받기 전부터 알았다. 어떤 전화는 울리는 방식부터 다르다. 아직 아무 말도 듣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무너질 준비를 한다.

병원이었다.

간호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어머니의 호흡이 많이 나빠졌고, 가능하면 가족이 곁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서윤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올라왔다.

"지금 비행기를 알아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곧 자신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깨달았다. 항공권은 비쌌고,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도 시간이 걸렸다. 학교 일정, 장학금 조건, 여권, 공항까지 가는 길. 현실적인 것들이 잔인하게도 순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죽음은 순서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날 서윤은 처음으로 작업을 빠졌다.

엘레나는 전화 내용을 듣고 그녀의 어깨를 짧게 감싸주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전화해요." 그 한마디만 했다. 서윤은 성당 옆 작은 사무실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친척의 목소리가 들렸고, 병실의 기계음이 멀리 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잠깐 의식이 돌아왔다고 했다.

서윤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엄마."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산소가 흐르는 소리, 누군가 침대 주변을 정리하는 소리,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한 숨소리만 있었다. 서윤은 다시 불렀다.

"엄마, 나야. 서윤이야."

한참 뒤, 아주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비 오니?"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응. 조금."

거짓말이었다. 그날 포르투는 맑았다. 창밖에는 약한 햇빛이 성당 벽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서윤은 어머니가 왜 비를 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먼 나라는 늘 비가 오는 곳이었다. 딸이 혼자 젖어 있을까 봐 걱정되는 곳.

"밥은 먹고?"

"먹었어."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서윤은 그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주 낮게 웃은 것 같았다. 웃음인지 숨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거짓말도… 나 닮았네."

서윤은 그 말에 결국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러나 울면 어머니가 더 힘들어할까 봐, 소리를 삼켰다. 목 안에서 울음이 다친 새처럼 퍼덕였다.

"엄마, 나 갈게. 비행기 알아보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서윤은 초조하게 전화기를 눌러 잡았다.

"엄마."

"오지 마."

그 말은 너무 작았지만 분명했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전화기 너머의 어머니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갈게."

"네가… 거기까지 갔잖아."

"엄마 때문에 간 거 아니야. 엄마 두고 도망친 거야. 나 그런 거야."

처음으로 그녀는 그 말을 입 밖에 냈다. 도망. 그 단어가 방 안에 떨어지자, 오랫동안 묶여 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풀려나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도망도… 살아야 하는 사람이 하는 거야."

서윤은 숨을 멈췄다.

"살려고 간 거면… 됐다."

그 말 뒤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서윤은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었다. 어린 시절 밤마다 들었던 소리였다. 세탁소 일을 마치고 돌아와 좁은 방에 누우면, 어머니는 늘 먼저 잠들었다. 서윤은 그 숨소리를 들으며 숙제를 했고, 울고 싶은 밤에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가 잠에서 깰까 봐. 그 숨소리가 아직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버틴 밤들이 있었다.

이제 그 숨소리가 너무 멀었다.

"엄마."

"서윤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누구한테든… 기대도 돼."

그 말이 서윤의 가슴을 세게 때렸다. 그녀가 평생 듣고 싶어 했으나 가장 듣기 두려워했던 말이었다.

"혼자 다 들고 가면… 허리 굽는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엄마처럼."

서윤은 결국 울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어깨가 떨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는 그것을 알아챈 듯 아주 희미하게 말했다.

"창문… 열어."

그것이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들은 문장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서윤은 비행기표를 예매했지만 장례식 첫날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공항 대기실에서 친척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미 입관을 마쳤다는 말, 사람들이 왔다 갔다는 말,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딸 걱정을 했다는 말. 그 모든 말이 공항의 밝은 조명 아래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서윤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여행 가방을 끌고 지나갔다. 아이가 울었고, 안내 방송이 여러 언어로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는 면세점 봉투를 들고 웃었다. 세상은 한 사람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너무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가장 잔인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얼굴은 이미 조용했다.

서윤은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 친척들은 그녀가 기력이 다 빠져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 서윤은 울 수 없었다. 울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상복의 소매는 낯설게 컸고, 향 냄새는 목에 오래 남았다. 사람들은 "네가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네 자랑을 많이 했다"고도 했다. 그런 말들은 위로였지만, 서윤에게는 죄처럼 들렸다.

어머니를 보내고 다시 포르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서윤은 결심했다.

이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겠다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말과 정반대의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서윤에게는 그것이 어머니를 잃고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기대면 잃는다. 사랑하면 떠난다. 마음을 맡기면 어느 날 너무 먼 곳에서 마지막 전화를 받게 된다. 그러니 기대지 말자. 누구에게도 내 무게를 나누어주지 말자. 누군가의 무게도 함부로 받지 말자.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오랫동안 그녀를 지켰지만, 동시에 천천히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다.

아름다움에 매달리는 사람

어머니의 죽음 이후, 서윤은 더 많이 일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성당에 남아 기록을 정리했고, 주말에는 복원실의 도구를 닦았다. 엘레나가 쉬라고 하면 그녀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은 가장 쉽게 배운 거짓말이었다.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서툰 포르투갈어로도 그녀는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러나 괜찮지 않은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것에 더 집요해진다.

서윤은 타일의 파란색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푸른 안료가 어디에서 더 진해지고, 어디에서 물처럼 희미해지는지 기록했다. 깨진 선과 원래 그려진 선을 구분하려 애썼다. 아주 작은 붓으로 유실된 무늬를 보강할 때면 숨을 거의 멈췄다. 손끝이 조금만 흔들려도 전체의 리듬이 달라졌다.

그녀는 그 집중 속에서만 슬픔을 잊었다.

아니, 잊은 것은 아니었다. 슬픔이 잠시 형태를 바꾸었다. 어머니의 빈자리와 준오의 침묵은 너무 크고 무거워 감당할 수 없었지만, 깨진 타일의 모서리나 유리 조각의 균열은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측정할 수 있었고, 기록할 수 있었고, 아주 조금은 고칠 수 있었다.

사람은 고칠 수 없는 것을 잃었을 때, 고칠 수 있는 것들에 매달린다.

서윤에게 아름다움은 사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난간이었다. 성당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 강가의 붉은 지붕, 비에 젖은 아줄레주 벽, 빵집 유리창에 비친 낯선 자신의 얼굴. 그녀는 매일 그것들을 붙잡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반응할 수 있었다. 아직 무언가를 보고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엘레나는 서윤을 제단 뒤쪽 작은 방으로 불렀다.

그곳은 복원한 유리 조각들을 임시로 보관하는 방이었다. 좁은 창이 하나 있었고, 오후가 되면 벽 전체가 푸르게 물들었다. 서윤이 처음 살던 숙소의 세면대 타일과 비슷한 색이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 방을 장난처럼 "푸른 방"이라고 불렀다.

엘레나는 작업대 위에 놓인 유리 조각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교체하지 않을 거예요."

서윤은 유리를 들여다보았다. 가운데에 긴 금이 가 있었다.

"금이 너무 길어요. 나중에 더 벌어질 수도 있어요."

"맞아요. 그래서 보강해야죠. 하지만 없애지는 않을 거예요."

"왜요?"

엘레나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다정했지만 쉽게 위로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런 어른들의 눈빛을 신뢰했다. 세상에는 너무 빠른 위로가 있고, 그 위로는 때로 상처를 덮어 썩게 만든다. 엘레나의 말은 느렸고, 느린 만큼 정확했다.

"이 금은 이 창의 역사예요. 없애면 깨끗해 보이겠지만, 진실하지는 않죠."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원은 상처를 지우는 일이 아니에요. 상처가 더는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돕는 일이에요."

그 말이 서윤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상처를 지우지 않아도 된다.

더는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게만 하면 된다.

그날 이후 서윤은 푸른 방에 자주 남았다. 작업이 끝난 뒤에도 의자에 앉아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빛이 유리를 통과하면 방 안의 먼지들이 작은 별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그 먼지들을 보며 편지를 썼다. 준오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어머니에게 더는 보낼 수 없는 편지, 그리고 미래의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

나는 오늘도 무너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문장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얼마나 큰 문장인지 알게 되었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웃는다는 뜻도, 잊는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고, 작업장에 가고,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고, 밤에 다시 돌아와 신발을 벗는 일. 그런 작고 반복적인 일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아름다움에 매달렸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녀를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매일 조금씩 붙들어주었다.

구원은 어쩌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지나 내일까지 가는 것. 깨진 유리를 버리지 않고 빛 앞에 다시 세우는 것.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서, 자기 자신에게 조용히 말하는 것.

아직 끝나지 않았어.

기대지 않겠다는 맹세

시간이 지나자 서윤은 포르투에서 제법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포르투갈어 실력은 조금씩 늘었고, 시장에서 값을 물을 수 있게 되었으며, 자주 가는 카페 주인은 그녀가 설탕을 넣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했다. 성당 근처의 고양이는 그녀가 점심으로 먹다 남긴 빵 조각을 기다렸다. 이네스는 주말마다 서윤을 불러냈고, 미겔은 그녀의 고장 난 스탠드를 고쳐주었다. 토마스는 여전히 그녀가 빛이 들어오는 쪽에 선다고 말했다.

서윤은 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웃음과 회복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한 문 하나를 달았다. 누군가 다정하게 다가오면 그 문 앞에서 멈추게 했다. 친구들이 가족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어머니 이야기를 짧게만 했다. 누군가 사랑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는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질문이 올 것 같으면 먼저 다른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점점 능숙해졌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 있는 법에.

한 번은 이네스가 물었다.

"너는 왜 힘들 때 우리한테 말하지 않아?"

서윤은 대답을 고르느라 조금 늦었다.

"말하면 더 진짜가 되는 것 같아서."

이네스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서윤은 웃었다.

"괜찮아. 그냥 내 습관이야."

습관.

그 단어는 편리했다. 오래된 상처도 습관이라고 부르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도, 준오와의 오해도, 통영역에서 놓친 순간도 모두 습관 뒤에 숨겼다. 혼자 해결하는 습관. 늦게 말하는 습관. 괜찮다고 먼저 말하는 습관.

그러던 어느 비 오는 저녁, 미겔이 푸른 방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작은 종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안에는 따뜻한 에그타르트가 들어 있었다. 서윤이 점심을 거른 것을 알고 사온 것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상자를 내밀었다.

"먹어. 안 먹으면 엘레나가 나를 혼낼 거야."

서윤은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너무 사소한 친절이었다. 그런데 그 사소함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누군가 자신이 점심을 거른 것을 알아차리고, 비를 맞고, 따뜻한 것을 사오는 일. 그런 일은 사람이 기대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상자를 받았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 말고 먹어."

미겔은 웃으며 돌아섰다. 서윤은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푸른 방 안에 혼자 남아 상자를 열었다. 따뜻한 김이 작게 올라왔다. 달콤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서윤은 한입 베어 물고 나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울 이유가 없는 친절 앞에서 우는 사람은, 이미 너무 오래 참은 사람이다.

서윤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날 밤, 준오에게 가장 짧은 편지를 썼다.

오늘 누군가 내게 따뜻한 것을 사다 주었어요. 나는 그게 무서웠어요. 내가 아직도 누군가의 다정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이어 썼다.

당신에게 기대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 마음을 들키면 당신이 도망갈까 봐 무서웠고, 내가 먼저 도망갔어요. 그래서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나를 지킨 건지, 우리를 망친 건지.

그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서윤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맹세는 이제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다고 결심할 수는 있지만, 혼자만으로는 따뜻해질 수 없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더 열심히 일했다. 더 정확하게 기록했고, 더 오래 유리를 닦았다. 누구도 그녀를 걱정하지 않도록, 걱정할 틈이 없을 만큼 반듯하게 살았다. 장학금 과정이 끝난 뒤에는 포르투에 남아 작은 복원 스튜디오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학교의 추천이 있었고, 엘레나의 도움이 있었다. 서윤은 감사 인사를 했지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오래 불편해했다.

엘레나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도움을 받는다고 약해지는 건 아니에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믿을 수 없었다.

믿는 일에는 늘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사랑보다 더 긴 시간이.

푸른 방의 창가에서

포르투에서 두 번째 겨울이 왔을 때, 서윤은 푸른 방의 창을 복원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작은 창이었다. 성당의 화려한 제단 창에 비하면 누구도 오래 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그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방 전체를 푸르게 만들었다. 서윤은 그 창을 좋아했다. 주목받지 않지만, 방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는 창.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빛.

창에는 오래된 푸른 유리 조각 여덟 개가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금이 깊었고, 하나는 모서리가 빠져 있었다. 납선은 약해져 있었지만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윤은 며칠 동안 창을 기록했다.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하고, 손상된 부분을 표시했다. 그리고 어느 오후, 조심스럽게 창을 떼어냈다.

창이 빠진 자리에 임시 판자가 덧대어지자 방은 갑자기 평범해졌다.

푸른빛이 사라진 방은 그저 좁고 낡은 작업실일 뿐이었다. 서윤은 그 변화를 보며 이상한 상실감을 느꼈다. 방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창이 사라진 뒤에야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방을 지탱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 곁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이 내 삶의 색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떠난 뒤에야 방이 평범해지고, 벽이 차가워지고, 하루의 빛이 달라진다.

그날 밤 서윤은 오래된 편지들을 모두 꺼냈다.

책상 위에 편지들이 쌓였다. 포르투에 도착한 첫달의 편지, 성당에서 쓴 편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쓴 편지, 비 오는 날마다 쓰다 만 편지. 종이는 조금씩 색이 달라져 있었다. 어떤 것은 눅눅했고, 어떤 것은 모서리가 말려 있었다.

서윤은 편지들을 하나씩 읽었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붙들었던 모든 문장이 있었다. 미안함, 원망, 그리움, 자존심, 죄책감, 사랑. 그 모든 감정은 서로 모순되었지만, 동시에 모두 진짜였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사랑한다고 해서 떠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떠났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기다리지 말라고 썼다고 해서 기다려주지 않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서윤은 빈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편지의 첫 줄을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준오 씨.

그녀는 천천히 썼다.

나는 오늘 푸른 방의 창을 떼어냈어요. 창이 사라지자 방이 갑자기 낯설어졌어요. 그제야 알았어요. 어떤 것은 없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많은 빛을 바꾸고 있었는지 드러난다는 걸.

펜 끝이 잠시 멈췄다.

당신도 그랬어요.

그 한 문장을 쓰고 서윤은 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은 고백이었다. 그러나 늦었다고 해서 거짓은 아니었다.

나는 포르투에서 잘 지내요. 잘 지낸다는 말이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잘 지낸다는 건 슬픔이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슬픔과 함께 밥을 먹고, 슬픔과 함께 일하고, 슬픔이 잠든 밤에는 조심스럽게 창을 여는 일이에요.

창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윤은 펜을 멈추고 빗소리를 들었다. 포르투의 돌바닥을 적시는 비. 통영의 온실 지붕을 두드리던 비. 성당 창을 타고 흐르는 비. 모든 비가 같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주 먼 시간의 아래쪽으로.

그녀는 다시 썼다.

나는 당신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떠났어요. 당신의 삶에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내 삶의 어두운 방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과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일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걸. 그걸 그때 알았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요.

그 질문 뒤에 서윤은 더 쓰지 못했다.

달라졌을까.

그 답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나간 시간은 복원할 수 있어도 되돌릴 수는 없다. 유리창의 금을 보강할 수는 있지만, 금이 없던 처음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금이 간 채로 빛을 통과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

서윤은 편지를 접었다.

이번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보낼 때가 아니라고 느꼈다. 처음으로 그녀는 침묵이 도망이 아니라 기다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기다림이 준오를 향한 것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푸른 방의 창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금이 간 유리 조각은 교체되지 않았다. 대신 아주 가는 보강선이 뒤쪽에서 그것을 받치고 있었다. 모서리가 빠진 부분은 새 유리로 채웠지만, 원래의 색과 완전히 같게 만들지는 않았다. 가까이서 보면 새로 고친 부분이 보였다. 엘레나는 그것이 좋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척하면 거짓말이 되니까요."

창을 다시 끼운 오후, 햇빛이 들어왔다.

푸른빛이 방 안을 천천히 채웠다. 이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금이 간 부분에서 빛은 조금 다르게 꺾였고, 새 유리 조각은 미세하게 밝았다. 그러나 방은 다시 푸르게 물들었다. 아니, 이전보다 더 깊은 푸른색이 되었다.

서윤은 그 빛 속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푸른 선들이 내려앉았다. 오래전 통영의 유리온실에서 보았던 빛과 닮았지만, 같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는 어머니의 죽음이 있었고, 보내지 못한 편지들이 있었고, 낯선 도시에서 혼자 삼킨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한 지금의 서윤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사람도 아니었다. 깨진 부분을 가진 채 더 깊은 색을 갖게 된 사람. 누군가를 사랑했으나 말하지 못했고, 누군가를 잃었으나 살아남았고, 아름다움에 매달려 겨우 하루씩 건너온 사람.

비가 그친 뒤, 성당 밖에서는 종이 울렸다.

서윤은 창가에 서서 아주 오래 그 소리를 들었다. 준오라면 이 종소리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생각했다. 종의 첫 울림보다 사라지는 끝부분을 더 오래 들었을 것이다. 골목을 돌아 강 쪽으로 흘러가는 잔향까지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덜 아팠다.

그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리움이 더 이상 그녀를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지 않았다. 어떤 그리움은 오래 지나면 무게가 아니라 방향이 된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아주 희미한 빛처럼.

서윤은 푸른 방의 책상으로 돌아가 작업 일지를 펼쳤다.

그날의 기록 끝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복원 완료. 균열은 남아 있음. 빛은 통과함.

그리고 잠시 뒤, 아주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덧붙였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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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유리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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