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린 뒤
성당 문이 열리자, 바깥의 흐린 빛이 먼저 들어왔다.
그 뒤에 서윤이 있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의 얼굴에 아주 많은 것을 남긴다. 눈가의 작은 선, 입술을 다무는 습관, 낯선 사람 앞에서 몸을 지키는 방식. 그러나 어떤 것들은 이상할 만큼 변하지 않는다. 비에 젖은 코트 자락을 한 손으로 붙잡는 버릇, 계단을 오르기 전 잠깐 숨을 고르는 모습, 무언가 깨진 것을 발견했을 때 눈빛이 먼저 조용해지는 방식.
준오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영의 오후 네 시를 떠올렸다. 푸른 유리 조각 위로 돌아오던 빛. 비를 맞은 온실의 냄새. 그리고 자신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한 문장.
성당 안에는 녹음기의 빨간 불빛이 작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불빛을 본 서윤의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녀는 들어오다 말고 문가에 섰다. 바깥에서 묻어온 빗소리가 문틈을 따라 성당 안으로 낮게 번졌다.
"또 녹음하고 있었네요."
그녀의 첫마디였다.
준오는 대답해야 했다. 오랜만이야. 미안해. 잘 지냈어. 그런 말들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러나 성당은 너무 조용했고, 그의 입안에서는 오래된 말들이 모두 낡은 종이처럼 부스러졌다.
"습관이 됐어."
겨우 그렇게 말했다.
서윤은 천천히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구두 밑에서 젖은 흙이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준오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썼다. 더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계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들어야 했다.
그는 몸을 돌려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빛이 꺼졌다.
서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고, 체념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따뜻한 표정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어요."
"뭐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목소리가 당신 테이프 안에 들어가 있었던 거."
그 말이 성당의 푸른 창 아래에 내려앉았다. 준오는 손끝이 천천히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억은 이상했다. 잊었다고 믿은 것은 자주 거짓이었고, 정말 잊은 줄 알았던 장면은 누군가의 한마디에 너무 쉽게 문을 열었다.
서윤의 목소리가 들어간 테이프.
통영의 여름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테이프 속에 남은 목소리
준오가 그 테이프를 서윤에게 들려준 것은 유리온실에 다녀온 지 사흘쯤 지난 오후였다.
공방은 손님이 뜸했고, 임 선생은 뒤쪽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선풍기는 고장 난 날개처럼 덜컹거리며 돌아갔고, 바깥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문 채 뛰어다녔다. 통영의 여름은 모든 것을 조금씩 녹였다. 얼음, 아스팔트, 사람의 경계,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까지.
준오는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라디오국에서 아직 이런 걸 써요?"
서윤이 물었다.
"아니요. 이건 제 거예요."
"취미로 테이프를 만들어요?"
"가끔요. 파일로 들으면 너무 쉽게 넘겨버리니까."
그는 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 뒤로 잠깐의 공백이 생겼다. 그리고 비가 들렸다.
유리온실의 비였다.
깨진 지붕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잎사귀에 고였다가 흙바닥으로 떨어지는 물, 녹슨 철골을 타고 미끄러지는 빗줄기. 공방에 앉아 있었는데도 서윤은 다시 그 온실 안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축축한 식물 냄새와 먼지, 젖은 유리의 차가운 빛이 귓속으로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테이프 속에서 준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혼자 들으면 이 소리가 오늘 같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다음, 자신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약속해요. 언젠가 다시 여기서 만나자고.
서윤은 얼굴이 뜨거워져 곧바로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준오가 놀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테이프가 멈췄다. 공방 안에는 선풍기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만 남았다.
"왜요?"
"내 목소리도 녹음됐잖아요."
"그때 녹음기가 켜져 있었으니까요."
"말해줬어야죠."
"미안해요. 현장에서는 자주 놓쳐요. 녹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대답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솔직해서 서윤은 더 당황했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를 듣는 일이 낯설었다. 사람은 거울 속 얼굴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만, 기계 속 자기 목소리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한다. 테이프 속의 그녀는 실제의 자신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들떠 있었으며, 어쩐지 더 믿고 있는 사람처럼 들렸다.
그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기뻤다.
누군가 자신이 무심코 흘린 말을 붙잡아두었다는 사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라질 뻔한 목소리가 작은 검은 테이프 안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얻었다는 사실. 서윤은 그 기쁨을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날카롭게 말했다.
"지워요."
준오는 테이프 위에 손을 올린 채 그녀를 보았다.
"정말요?"
"네. 이상하잖아요. 내가 너무…"
그녀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가벼워 보인다고 말하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고, 진심처럼 들린다고 말하기엔 아직 그 진심을 인정할 수 없었다.
준오는 잠시 기다리다가 낮게 말했다.
"좋아서 안 지웠어요."
서윤은 그를 보았다.
"뭐가요?"
"목소리가요."
그 말은 칭찬이라기보다 발견에 가까웠다. 예쁜 목소리라거나 듣기 좋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좋다는 말. 너무 단순한 문장은 때로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
서윤은 시선을 피했다. 작업대 위에는 푸른 유리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빛을 받은 유리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짝였다.
"내 목소리는 어떤데요?"
그녀는 묻고 나서 곧 후회했다. 그러나 준오는 이번에도 쉽게 웃어넘기지 않았다.
"처음엔 멀리 있는 사람 같았어요."
"지금은요?"
"가까이 오고 싶은데, 어디까지 와도 되는지 모르는 사람 같아요."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목소리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도 알았고, 준오도 아마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동안 테이프를 다시 틀지 않았다.
공방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 문 위의 종이 작게 울렸다. 그 소리는 테이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서윤은 훗날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그 작은 종소리까지 함께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준오는 종종 테이프를 만들었다. 항구의 새벽, 공방의 오후, 유리온실의 비, 시장 골목의 저녁. 테이프의 라벨에는 늘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윤은 한 테이프 옆면에 작게 적힌 글씨를 보았다.
푸른 유리. 서윤 웃음. 4:17.
그녀는 못 본 척했다.
못 본 척하는 동안, 기쁨이 아주 천천히 그녀 안에서 번졌다.
스케치북의 푸른 창
서윤의 스케치북을 준오가 본 것은 우연이었다.
둘은 항구 근처 오래된 분식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준오는 녹음 장비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며 콘센트가 있는 구석자리를 골랐고, 서윤은 얼음이 잔뜩 든 보리차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그날은 바람이 거의 없었다. 바다는 반짝였지만, 그 반짝임마저 더워 보였다.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 서윤은 스케치북을 두고 나왔다.
준오가 그것을 들고 뒤따라왔을 때, 스케치북은 고무줄이 풀려 있었다. 몇 장의 종이가 바람에 젖은 새의 날개처럼 살짝 벌어져 있었다. 준오는 보지 않으려 했지만, 보지 않을 수 없는 페이지가 있었다.
푸른 창문.
그 페이지에도, 그 다음 페이지에도, 또 그 다음 페이지에도 푸른 창문이 있었다. 모양은 조금씩 달랐다. 어떤 창은 성당의 높은 창 같았고, 어떤 창은 오래된 여관의 작은 창 같았으며, 어떤 창은 유리온실의 깨진 지붕을 세로로 세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두 닫혀 있었다. 손잡이가 없거나, 손잡이가 있어도 안쪽으로만 열릴 것 같았다.
준오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서윤은 골목 끝에서야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보았다. 그가 스케치북을 내밀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봤어요?"
"조금요."
"남의 스케치북을 왜 봐요."
"바람이 먼저 봤어요."
"지금 농담할 상황 아니거든요."
준오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서윤은 그가 자신의 그림을 비웃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더 견디기 어려웠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가리키는 마음이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골목의 벽에는 소금기가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고, 빨래줄에 걸린 셔츠들이 햇빛에 바삭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늘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준오가 먼저 말했다.
"왜 전부 창이에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은 없고."
"문은 열어야 하잖아요."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너무 쉽게 나와서, 서윤은 자신이 방금 무엇을 고백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준오는 걸음을 늦췄다.
"창은 안 열어도 돼요?"
"창은 그냥 볼 수 있잖아요. 밖을."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요?"
서윤은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가는 데도 돈이 들어요."
그 말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준오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그 시선이 싫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빈 방까지 보려는 사람 같았다.
그녀의 스케치북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풍경은 있었지만 사람이 없었고, 의자는 있었지만 앉은 사람이 없었고, 창은 있었지만 그 창을 여는 손은 없었다. 준오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알아차려주었다.
그날 저녁, 공방으로 돌아온 서윤은 새 페이지를 펼쳤다. 처음에는 또 푸른 창을 그리려 했다. 익숙한 선이었다. 세로로 긴 사각형, 납선처럼 나뉜 격자, 물에 젖은 듯 번지는 파란색. 그런데 손이 멈췄다.
그녀는 창 아래에 아주 작은 사람의 그림자를 그렸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뒷모습이었다. 검은 배낭을 멘 사람. 한 손에 녹음기를 든 사람.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머물러 있는 사람.
그 그림을 그리고 나서 서윤은 오래도록 페이지를 덮지 못했다.
누군가가 자기 그림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그건 마음이 이미 문을 조금 열었다는 뜻이었으니까.
불 꺼진 해성극장
통영에는 해성극장이 있었다.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좁은 골목 안쪽, 간판의 별 모양 전구가 절반쯤 나간 오래된 극장이었다. 낮에는 문이 닫힌 것처럼 보였고, 밤이 되면 겨우 살아 있다는 듯 매표소 불이 켜졌다. 최신 영화보다 철 지난 영화와 재상영작을 더 많이 틀었고, 상영 시간표는 늘 손글씨로 바뀌었다.
준오는 그 극장을 좋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극장 안의 소리가 좋다고 했다.
"영화 소리 말고요?"
서윤이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소리요. 사람들이 조용해지는 소리."
"조용해지는 소리도 있어요?"
"있어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자기 목소리를 내려놓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 서윤은 그와 함께 밤 상영을 보러 갔다.
그날 밤은 유난히 습했다. 하늘에는 비가 올 듯 말 듯한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극장 안은 오래된 천과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관객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앞줄에는 손을 꼭 잡은 노부부가 앉았고, 뒤쪽에는 고등학생 둘이 과자 봉지를 나누고 있었다. 서윤과 준오는 가운데보다 조금 뒤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붕 위로 낮게 번지는 정도였지만, 곧 세차게 쏟아졌다. 스크린 속 인물들의 대사는 빗소리와 섞여 자주 흐려졌다. 준오는 그때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 끝으로 박자를 세듯 움직였다. 서윤은 영화보다 그의 손을 더 자주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불이 나갔다.
스크린은 하얗게 멈췄고, 영사기 소리가 끊겼다. 객석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휴대전화 불빛을 켰고, 극장 주인이 손전등을 들고 들어와 말했다.
"전기가 잠깐 나갔습니다. 금방 복구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금방은 오지 않았다. 비는 더 세졌고, 관객들은 하나둘 환불권을 받아 밖으로 나갔다. 노부부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등학생들은 오히려 신난 얼굴로 뛰어나갔다. 결국 객석에는 서윤과 준오만 남았다.
극장 주인은 둘을 보고 웃었다.
"나가셔도 됩니다. 오늘은 틀렸어요."
준오가 물었다.
"잠깐만 있어도 될까요?"
"왜요?"
"소리 좀 녹음하고 싶어서요."
극장 주인은 이상한 사람을 본다는 얼굴을 했지만, 폭우 속에서 굳이 내쫓을 힘도 없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불 켜질 때까지만 있어요. 문 잠그기 전에는 나가고."
그가 나가자 극장은 진짜 어두워졌다. 비상등의 희미한 초록빛만 벽 아래쪽에 낮게 붙어 있었다. 스크린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는데도, 어둠 속에서 이상하게 밝아 보였다. 준오는 녹음기를 켰다. 빨간 불빛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작게 떠올랐다.
서윤은 속삭였다.
"이런 것도 녹음해요?"
"응."
그는 어느 순간부터 반말과 존댓말을 섞었다. 서윤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불 꺼진 극장 소리."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조금 기다리면 들려."
정말 그랬다. 처음에는 빗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곧 다른 소리들이 떠올랐다.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 낡은 의자가 습기를 머금고 아주 작게 삐걱이는 소리, 영사실 어딘가에서 기계가 식어가며 내는 금속의 숨. 영화가 멈춘 뒤에도 극장은 쉽게 침묵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때 처음으로 어둠이 무섭지 않다고 느꼈다. 옆에 준오가 있어서가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이 어둠을 억지로 밝히려 하지 않아서였다. 그는 어둠을 듣고 있었다. 서윤은 그런 사람이 처음이었다.
한참 뒤, 준오가 말했다.
"나는 어릴 때 형이 있었어."
서윤은 그를 보았다. 어둠 때문에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들어야 했다.
"나보다 여섯 살 많았는데, 말이 별로 없었어. 사진 찍는 걸 좋아했고. 내가 처음 카메라 잡은 것도 형 때문에였고."
준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빗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형이 갑자기 죽었어. 사고였어. 별로 극적인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어느 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 다음부터 집 안의 소리가 완전히 달라졌어."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로의 말은 너무 쉽게 부서질 것 같았다.
"엄마는 한동안 라디오를 계속 켜놨어. 아무 방송이나. 집이 조용해지는 걸 못 견뎠던 것 같아. 나는 그때 처음 알았어. 사람이 사라지면, 목소리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있던 공간의 소리도 같이 바뀐다는 걸."
준오는 손안의 녹음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녹음해. 사라지는 걸 붙잡고 싶어서라기보다, 사라지기 전에 한 번은 제대로 들어주고 싶어서."
서윤은 그의 말을 오래 들고 있었다. 그가 공방에서 했던 말이 이제야 조금 더 깊이 이해됐다. 사라진 뒤에 그리워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 그 말은 멋있는 문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오래된 상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서윤이 입을 열었다.
"나는 집에 창문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낮았다.
"우리 집은 반지하였거든요. 창이 있긴 했는데, 길바닥 높이에 붙어 있었어요. 사람들이 지나가면 발목만 보였고, 비 오는 날에는 물이 창틀까지 차올랐어요. 엄마는 늘 수건을 말아 막았고, 나는 그 옆에서 숙제를 했어요."
준오는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빚을 남기고 집을 나갔어요. 나쁜 사람이라고만 말하기엔 복잡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많은 걸 망가뜨린 사람이었어요. 엄마는 세탁소에서 일했고, 나는 장학금 떨어질까 봐 늘 계산하면서 살았어요. 물감 하나 사는 것도, 서울에서 버스 한 번 더 타는 것도."
서윤은 손가락을 맞잡았다. 손톱 밑에 유리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창을 그렸나 봐요.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정말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나가면 돌아와야 할 집이 무너질까 봐."
준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빈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중간에 위로하지도, 불쌍해하지도, 괜찮아질 거라고 서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서윤은 그 침묵 때문에 처음으로 조금 울고 싶어졌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었다. 빛이 있었다면 숨겼을 표정들, 농담으로 덮었을 문장들, 아무렇지 않은 척 삼켰을 상처들이 어둠 속에서는 천천히 자리를 얻었다.
그날 그들은 손을 잡지 않았다.
입을 맞추지도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윤은 나중에야 알게 된다. 어떤 고백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먼저 오고, 더 깊이 박힌다는 것을. 서로의 상처 앞에서 도망치지 않은 그 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가장 조심스러운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전기가 돌아온 것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극장 천장의 낡은 등이 하나둘 켜졌고, 스크린은 다시 흰빛을 되찾았다. 너무 밝아서 서윤은 눈을 찡그렸다. 준오는 녹음기를 껐다. 빨간 불빛이 사라지자, 방금 나눈 말들이 갑자기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비는 그쳐 있었다. 골목 바닥에는 물이 얇게 고여 있었고, 간판의 꺼진 별들이 그 물 위에서 흔들렸다.
준오가 말했다.
"서울에 돌아가도, 계속 볼 수 있을까."
서윤은 그 말을 들었지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엄마의 굽은 어깨, 밀린 병원비, 복학 등록금, 장학금 심사 서류, 그리고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준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쉬웠다. 아니, 쉽지는 않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 보자는 말은 다른 문제였다. 그 말에는 시간과 돈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자신의 불안한 삶 안으로 초대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서윤은 그 용기가 없었다.
"모르겠어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준오는 웃으려 했다.
"그래요."
그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 서윤은 그 변화를 알아차렸지만,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몰랐다. 설명해야 했다.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고. 네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도 감당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지금 내 미래는 늘 빚과 책임과 가족의 얼굴로 먼저 오기 때문에, 그 안에 너를 넣는 일이 두렵다고.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젖은 골목을 나란히 걸었다. 멀리 항구에서 배의 경적이 울렸다. 서윤은 그 소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했다. 바로 옆에 있는 준오에게 닿기에도, 자신에게 돌아오기에도.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 밤 이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졌다는 말은 이상했다. 손을 잡은 적도 거의 없고, 서로의 이름을 특별한 방식으로 부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전보다 더 깊은 침묵이 생겼다. 아무 말 없이 걸어도 각자의 생각이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같은 풍경을 보고 서로 다른 것을 떠올려도, 결국 비슷한 곳에 닿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서윤은 준오가 좋아하는 소리들을 구별하게 되었다. 그는 비가 막 시작될 때보다 그치기 직전의 소리를 더 좋아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항구보다 새벽의 빈 부두를 좋아했고, 새 유리보다 오래된 유리의 가장자리를 좋아했다. 준오는 서윤이 좋아하는 빛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정오의 완벽한 빛보다 오후 늦게 기울어지는 빛을 좋아했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빛보다, 일부를 감춰주면서도 색을 살려내는 빛을 좋아했다.
둘은 서로를 그런 방식으로 배웠다.
서윤은 테이프 속에서 자기 웃음소리를 듣고도 더 이상 지워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말했다.
"그 부분은 방송에 쓰지 마요."
그러면 준오는 대답했다.
"방송에는 안 써요."
"그럼 어디에 써요?"
"그냥 둬요."
"왜요?"
"나중에 들으려고."
그 말에 서윤은 매번 아무렇지 않은 척 컵을 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주 작은 불빛이 켜졌다. 나중에. 두 사람 사이에 그 단어가 놓일 때마다, 서윤은 잠깐씩 미래를 상상했다. 서울의 겨울, 좁은 작업실, 창가에 놓인 카세트 플레이어, 준오가 들려주는 여름의 소리. 그런 상상은 너무 다정해서, 그녀는 곧바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다정한 미래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라고, 그녀는 오랫동안 믿어왔다.
준오도 그 무렵부터 자주 묻기 시작했다.
"서울 올라가면 어디서 지내요?"
"전에 살던 데요."
"학교 근처?"
"학교랑은 좀 멀어요. 월세가 싸서."
"작업은 계속할 거예요?"
"해야죠."
"힘들면…"
준오는 거기서 자주 말을 멈췄다. 힘들면 연락해요. 힘들면 내가 갈게요. 힘들면 같이 방법을 찾아요. 그런 문장들이 그의 입안에서 맴도는 것을 서윤은 느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 전에 그녀는 먼저 웃거나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잘 몰랐다. 기대는 순간, 상대가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배웠다. 그리고 떠난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더 오래 비용을 치른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서윤은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한 걸음 물러섰다.
준오는 그 한 걸음을 보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움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침묵이 거절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늘 기다리는 쪽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형이 돌아오지 않은 날 이후, 집 안에서 기다림은 슬픔의 다른 이름이었다. 엄마가 라디오를 켜놓고 현관 쪽을 바라보던 저녁들, 아무도 오지 않는 계단 소리에 귀를 세우던 밤들. 준오는 마음을 내주면 결국 기다리게 된다고 믿었고, 기다림은 언젠가 반드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서윤의 침묵은 차갑게 닿았다.
사실 서윤은 거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약속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엔 그들은 너무 어렸고, 서로를 너무 아꼈으며,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늦게 배우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준오의 녹음 일정도 마무리되었다. 공방 앞 골목에는 가을 햇빛이 아주 조금 섞이기 시작했고, 시장에서는 햇전어 이야기가 나왔다. 임 선생은 서윤에게 서울로 돌아갈 날짜를 물었고, 서윤은 대답을 미뤘다. 그러나 미룬다고 계절이 멈추지는 않았다.
떠나기 전날, 준오는 공방 뒤 마당에서 테이프 하나를 서윤에게 건넸다.
"이건 뭐예요?"
"통영 소리요."
"전부?"
"전부는 아니고, 내가 좋아한 것들."
서윤은 테이프를 받아 들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흰 라벨이 붙어 있었다. 준오의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름. 푸른 창. 말하지 않은 것들.
서윤은 라벨을 오래 보았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뭐예요?"
그녀가 물었다.
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보았다. 그 시선 안에는 너무 많은 문장이 들어 있었다. 서윤은 그 문장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자신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 마당의 빨래가 흔들렸다. 먼 항구에서 쇠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공방 안에서는 임 선생이 유리 조각을 상자에 담는 소리가 들렸다.
준오가 낮게 말했다.
"서윤 씨는 나랑 있으면 불편해요?"
"아니요."
대답은 바로 나왔다.
"그럼 왜 자꾸 멀리 가요?"
서윤은 테이프 케이스를 두 손으로 쥐었다. 플라스틱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멀리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럼?"
"그냥…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말은 그녀에게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준오에게는 가장 애매한 거절처럼 들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준오 씨."
"응."
그가 반말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 반말이 그 어느 때보다 멀게 들렸다.
서윤은 다시 말해야 했다. 모르겠다는 건 싫다는 뜻이 아니라고. 나는 네가 좋다고. 네가 내 스케치북 안으로 들어온 뒤로, 내가 그리는 창의 색이 달라졌다고. 네 테이프에 내 목소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기쁘고, 그래서 자꾸 도망치고 싶어진다고.
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못했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선명하지 않다. 오히려 오래 남는 것은 그 순간을 지나치며 하지 못한 말들이다. 잡을 수 있었던 손을 잡지 않은 일. 설명할 수 있었던 침묵을 그냥 둔 일. 상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자기 두려움이 더 커서 한 발 물러선 일.
그날 서윤은 준오를 붙잡지 못했다.
준오도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아끼는 방식으로 서로를 조금씩 다치게 했다.
현재의 성당에서
성당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서윤은 푸른 창 아래 놓인 작업대를 바라보았다. 필름이 나왔던 자리에는 임시로 붙인 흰 천이 있었고, 그 옆에 준오의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꺼진 빨간 불빛은 이상하게도 아직 켜져 있는 것처럼 눈에 남았다.
"그 테이프," 서윤이 말했다. "아직 있어요?"
준오는 대답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있어."
"내 목소리도?"
"응."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가운 얼굴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자신의 일부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준오는 그녀를 보았다.
"많이 말했어."
"중요한 말은 안 했죠."
그 문장이 성당의 높은 천장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준오는 그것이 다시 내려오기 전에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침묵을 거절로 착각했던 그 여름의 자신에게, 이제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어야 했다.
"나도 안 했어."
서윤이 그를 보았다.
십 년 전 해성극장의 불 꺼진 객석에서, 공방 뒤 마당에서, 비 오는 온실에서, 정류장 처마 밑에서 그들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단어가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놓였다. 사랑. 너무 흔해서 쉽게 말할 수 없었고, 너무 무거워서 더더욱 말할 수 없었던 말.
그러나 지금도 그들은 그 말을 곧바로 꺼내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준오는 도망치지 않았고, 서윤도 문가에 서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같은 성당 안에, 같은 푸른 빛 아래에 서 있었다. 깨진 유리와 꺼진 녹음기와 십 년 동안 숨겨져 있던 필름이 그들 곁에 있었다.
서윤이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녹음하지 말아요."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대신 들어요."
그 말은 부탁이기도 했고, 경고이기도 했고, 오래 늦은 약속이기도 했다.
준오는 녹음기에서 손을 떼고 서윤을 바라보았다. 성당 밖에서는 다시 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빗방울이 푸른 창을 두드리자, 금이 간 유리들이 아주 작게 떨었다. 그 떨림은 소리라기보다 빛에 가까웠고, 빛이라기보다 오래 참아온 마음에 가까웠다.
사랑이 시작된 순간보다, 말하지 못한 순간들이 더 오래 남는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다.
하지만 늦게 배운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깨달음은 아주 늦게 도착해서야 비로소 사람을 살린다. 마치 오후 네 시의 빛처럼,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같은 자리에 다시 와 닿는 것처럼.
서윤은 푸른 창을 올려다보았다.
준오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두 사람 모두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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