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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푸른 유리의 계절

사라지는 소리를 기록하는 사람

Views 60약 10분생성형 AI 활용
Summary

마지막 상영관의 새벽

해성극장의 철거는 오전 여섯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보다 두 시간 먼저, 이준오는 극장의 객석 한가운데 서 있었다. 관객이 사라진 극장은 바다에서 물이 빠져나간 뒤의 갯벌처럼 넓고 낯설었다. 빨간 벨벳 의자는 등받이가 닳아 속살을 드러냈고, 천장 한가운데 매달린 샹들리에는 오래전에 전기가 끊겨 빛 대신 먼지만 품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지만, 흰 천은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준오는 기다림의 얼굴들을 잘 알았다. 문 닫은 다방의 유리문, 폐교된 초등학교의 운동장, 마지막 손님이 떠난 여관의 복도. 사람은 떠났는데 사물만 남아 있는 장소에는 묘한 긴장이 있었다. 모두가 끝났다고 말하는 곳에서, 끝났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이 아주 작은 소리로 버티고 있었다.

그는 검은 가방에서 마이크를 꺼냈다. 하나는 객석 뒤편, 하나는 스크린 아래, 또 하나는 영사실 문 앞에 세웠다. 마이크 받침대의 다리를 펼 때마다 금속이 낮게 울렸다. 그 소리는 넓은 극장 안을 천천히 굴러가다가 벽에 닿아 돌아왔다. 준오는 헤드폰을 썼다. 오른쪽 귀에는 세상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어왔고, 왼쪽 귀에는 언제나 한 겹의 안개가 끼어 있었다.

왼쪽 귀가 나빠진 뒤로 그는 사람의 말보다 공간의 잔향을 더 믿게 되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자주 방향을 잃었다. 오른쪽에서 부른 이름이 왼쪽에서 들리는 것 같았고, 가까운 말이 멀리서 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면 문장들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뒤엉켰다. 하지만 공간은 달랐다. 빈 극장의 웅웅거림, 지하상가의 낮은 공기, 시장 천막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박자. 그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벽의 높이, 바닥의 재질, 오래 닫힌 문의 무게를 자기 방식으로 들려주었다.

준오는 녹음기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작은 불빛이 켜졌다. 녹음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말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그는 대체로 침묵했다. 침묵해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지 못할 만큼 작고, 기록될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 더 빨리 사라지는 소리들. 바람이 찢어진 포스터 끝을 건드리는 소리, 오래된 의자 스프링이 저 혼자 꺼지는 소리, 천장 틈에서 떨어진 먼지가 나무 바닥에 닿는 소리.

영사실 안쪽에서 아주 희미한 진동이 들렸다. 준오는 고개를 들었다. 전기가 끊겼는데도, 기계가 아직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영사실 문을 열었다. 문은 예상보다 쉽게 열렸고, 그 안에는 낡은 영사기 한 대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필름 릴은 비어 있었고, 렌즈에는 손가락으로 문지른 듯한 흐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준오는 마이크 하나를 영사기 곁에 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영사실에서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면들이 들렸다. 팝콘 봉지가 구겨지는 소리, 마지막 줄에서 누군가 조용히 훌쩍이던 소리, 영화가 끝났는데도 바로 일어나지 못하던 두 사람의 숨소리. 어쩌면 그런 소리는 이곳에 실제로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래된 공간의 잔향은 늘 현재의 소리와 과거의 기척을 함께 데리고 왔다.

준오는 그 사이를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사라진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 사이. 잊힌 것과 잊으려 애쓰는 것 사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서, 오히려 소리로만 남는 마음들 사이.

새벽 네 시 이십칠분, 극장 밖에서 트럭이 멈추는 소리가 났다. 곧 철거업체 직원들의 발소리가 들어올 것이다. 그는 헤드폰 너머로 그 소리를 들으며 녹음기의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삼십 분쯤 남아 있었다.

삼십 분이면 충분했다.

어떤 장소의 마지막 숨을 담기에는, 때로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라지는 소리를 기록하는 사람

왼쪽 귀에 고인 침묵

준오의 왼쪽 귀는 비 오는 날 더 먼저 닫혔다.

맑은 날에는 낮은 주파수의 소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버스가 지나갈 때의 둔한 진동, 지하철이 터널을 빠져나오기 전의 떨림, 가까이 선 사람이 깊게 숨을 들이마실 때 생기는 작은 압력. 그러나 비가 오면 세상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물방울들이 지붕과 유리, 아스팔트와 나뭇잎을 동시에 두드리기 시작하면 왼쪽 귀는 먼저 항복했다. 사람들의 말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물흐물해졌고, 그는 상대의 입술을 보며 뒤늦게 문장을 맞추곤 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고, 소리는 그의 세계에서 배경에 가까웠다. 셔터음, 필름을 감는 소리, 암실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사고 이후, 왼쪽 귀가 영영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날부터 그는 이상하게도 소리 쪽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의사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손상된 청력은 복구가 어렵다고. 더 나빠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편이 현실적이라고. 준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병원 밖으로 나온 뒤였다. 횡단보도 신호음이 오른쪽에서만 들렸다. 누군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는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세상이 틀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듣는 방식이 틀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몸으로 밀려왔다.

그날 이후 준오는 사람들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이 어려워졌다. 정확히는, 믿는 일이 어려워졌다. 어떤 말은 반쯤만 들렸고, 어떤 말은 듣고도 들은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설명을 요구했고, 그는 설명을 미뤘다. 미루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망가졌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말을 버리고 소리를 택했다.

사람의 말이 사라진 뒤에도 공간에는 무언가 남았다. 누군가 떠난 방에는 문이 닫힐 때의 속도가 남고, 오래 사랑받은 가게에는 컵과 접시가 부딪히던 박자가 남았다. 아이들이 사라진 놀이터에는 그네 쇠사슬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남았다. 공간은 사람보다 오래 참았다. 말하지 않는 대신, 끝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드러냈다.

준오는 그 흔적을 찾아다녔다.

다큐멘터리 음향감독이라는 직업명은 그를 설명하기에 그럴듯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터뷰보다 현장의 바닥음을 더 오래 녹음했다. 바닥음이란 어떤 장소가 가만히 있을 때도 품고 있는 기본적인 소리였다. 냉장고의 낮은 전기음, 멀리서 섞여 들어오는 차 소리, 창틀을 스치는 바람, 사람의 말과 말 사이를 채우는 미세한 공기.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때로 그에게 물었다.

"이런 소리가 꼭 필요해요?"

준오는 대답했다.

"나중에 이 장면을 믿게 만드는 건, 대사보다 이런 소리일 때가 많습니다."

그 말은 일에 관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그의 삶에 관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사람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자신이 했던 말조차도.

해성극장에서 녹음을 마치고 나왔을 때,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철거업체 직원들은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준오는 정확히 듣지 못해 고개만 숙였다. 장비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는 동안 극장 간판의 네온 일부가 바람에 흔들렸다. 한때 붉게 빛났을 글자들은 이제 검은 철골만 남아 있었다.

해성.

바다처럼 별처럼, 과장된 이름을 가진 극장은 이제 먼지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오는 녹음기를 꺼내 마지막 파일을 확인했다. 파형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록 장치 안에서는 이렇게 가느다란 선으로 남았다. 그는 그 선을 볼 때마다 안도했다. 사라지는 것들도 아주 잠깐은 붙잡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나 붙잡는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 닫는 시장의 낮

그날 오후, 준오는 동쪽 시장으로 갔다.

동쪽 시장은 이름과 달리 도시의 남쪽 끝에 있었다. 오래전 행정구역이 바뀌며 방위도, 주소도, 사람들의 동선도 모두 달라졌지만 시장 이름만은 그대로 남았다. 시장은 이달 말 폐쇄될 예정이었다. 시에서는 안전 문제와 재개발 계획을 이야기했고, 상인들은 임대료와 보상금과 갈 곳 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준오는 그 사이에서 말보다 먼저 사라질 소리들을 찾았다.

시장 입구에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감사라는 말은 너무 반듯해서, 그 아래의 표정들을 다 담지 못했다. 생선가게 주인은 얼음을 깨고 있었고, 떡집 아주머니는 찜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반찬가게 앞에서는 고무장갑 낀 손이 스테인리스 그릇을 빠르게 옮겼다. 그 모든 소리가 천장 낮은 아케이드 아래에서 섞이고 튕기며 시장만의 리듬을 만들었다.

"또 왔네, 이 감독."

건어물 가게의 노인이 그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준오는 헤드폰을 한쪽만 벗고 웃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조금 더 녹음하려고요."

"우리 같은 늙은이들 말고 이런 걸 왜 녹음해. 새로 생기는 쇼핑몰이나 찍어. 거긴 번쩍번쩍하잖아."

"번쩍이는 건 다른 분들이 많이 찍으니까요."

"그럼 우리는 뭐가 있는데?"

준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의 등 뒤로 마른 멸치 상자가 보였고, 천장에 매달린 전구가 낮에도 희미하게 흔들렸다. 바닥은 수십 년 동안 물과 발자국과 비닐봉지에 닳아 반질반질했다. 그는 마이크를 손에 쥔 채 말했다.

"여기는 오래 버틴 소리가 있어요."

노인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봉지 하나를 찢어 작은 멸치를 한 줌 집더니 그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녹음하려면 배고프면 안 돼."

준오는 멸치를 입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짠맛이 혀끝에 번졌다. 오래된 바다 냄새가 났다. 잠깐, 통영이 떠올랐다. 항구의 비린내, 여름의 습기, 유리온실의 녹슨 문. 그는 얼른 마이크의 전원을 켰다.

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소리로 먼저 움직였다. 칼이 도마를 치는 소리, 비닐봉지가 벌어지는 소리, 동전이 플라스틱 접시에 떨어지는 소리, 저울의 바늘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며 수없이 많은 말을 나누었지만, 준오는 그 말들을 전부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을 들었다. 웃음이 끝난 뒤의 숨, 흥정이 실패한 뒤의 짧은 침묵, 단골손님이 "이제 어디로 가세요"라고 묻고 난 뒤 생기는 대답 없는 공기.

그 공기 속에는 이별이 있었다.

누구도 울지 않았지만, 시장은 이미 천천히 울고 있었다.

준오는 가게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를 오래 녹음했다. 낡은 철판이 홈을 따라 내려올 때 생기는 거친 마찰음, 마지막에 바닥과 부딪히며 나는 둔한 소리. 하루의 끝을 알리는 평범한 소리였지만, 곧 이곳에서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될 소리였다. 그는 같은 소리를 세 번 녹음했다. 가까이서 한 번, 멀리서 한 번, 그리고 시장 중앙에 마이크를 세워두고 한 번.

소리는 거리마다 다른 얼굴을 가졌다. 가까이서 들으면 물질의 결이 느껴졌고, 멀리서 들으면 공간의 감정이 드러났다. 준오는 그 차이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결국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들.

자신이 지키지 못한 것들의 친척 같은 것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 시장 천장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위로 빗소리가 번졌고, 시장 안의 모든 소리가 한 순간 낮아졌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준오는 왼쪽 귀에 손을 가져갔다. 비가 오면 늘 그랬다. 소리들이 한쪽으로 쏠리며 오래전의 한 장면이 함께 밀려왔다.

유리 지붕을 두드리던 비.

옆에 서 있던 서윤의 어깨.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데,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던 순간.

그는 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고, 서윤은 잠깐 웃었다. 나중에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지 못했다. 당시에는 시간이 많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언젠가 다시 들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어리석게도 그렇게 믿었다.

준오는 녹음기의 시간을 멈췄다.

빗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열지 못한 엽서

밤이 되어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어두웠다.

준오의 작업실은 오래된 인쇄소 건물 3층에 있었다. 계단은 가파르고 난간은 흔들렸다. 1층에는 간판 제작소가 있었고, 2층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사무실이 있었다. 3층 복도 끝, 작은 철문 안쪽이 그의 작업실이었다. 그는 이곳을 '스튜디오'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이름을 붙이기엔 방이 너무 좁고, 창이 너무 작았다. 그러나 이 방에는 그가 지난 십 년 동안 모은 거의 모든 소리가 있었다.

벽 한쪽에는 외장 하드들이 날짜별로 꽂혀 있었다. 철거 전 극장, 폐쇄된 수영장, 사라진 달동네, 마지막 운행을 앞둔 시외버스터미널, 문 닫는 시장. 라벨들은 작은 묘비 같았다. 각각의 묘비 안에는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부였던 소리가 들어 있었다.

준오는 컴퓨터를 켜고 해성극장 파일을 옮겼다. 파형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헤드폰을 쓰고 방금 녹음한 소리를 들었다. 영사실의 침묵, 트럭의 도착, 객석 아래 어딘가에서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 왼쪽 채널은 오른쪽보다 약간 낮게 조정되어 있었다. 그는 늘 그렇게 작업했다. 자신의 귀가 놓치는 부분을 기계가 대신 붙잡아주도록.

그러나 어떤 소리는 아무리 좋은 장비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책상 아래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는 오래된 필름 통과 녹슨 열쇠,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나무 상자의 뚜껑은 자주 열지 않아도 손때로 반질해져 있었다. 준오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열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아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엽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십 년 동안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버리지 못한 엽서였다. 모서리는 조금 닳았고, 뒷면의 글씨는 햇빛을 오래 보지 않았는데도 희미해져 있었다. 엽서 앞면에는 낡은 유리온실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정확히 그곳은 아니었다. 통영의 온실이 아니라, 어느 외국 식물원의 기념엽서였다. 하지만 유리 지붕과 녹슨 철골, 안쪽에서 무성하게 자란 식물들 때문에 서윤은 그 엽서를 보자마자 웃었다.

"이거 우리 온실 닮았다."

우리.

그녀는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준오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두 사람에게 실제로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낡은 온실만큼은 잠깐 그들의 것이 된 것 같았다.

엽서 뒷면에는 서윤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준오에게.

네가 말한 '다시 오는 빛'을 오늘 봤어. 오전엔 분명 없던 빛이 오후 네 시쯤 같은 유리 조각 위에 돌아오더라. 완전히 같은 빛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같은 빛이라고 믿기로 했어. 가끔은 믿는 쪽이 더 정확할 때도 있으니까.

다음에 비가 오면 다시 가자. 그때는 네가 사진 찍는 동안 내가 유리 조각 하나쯤 몰래 훔쳐올지도 몰라.

서윤.

준오는 그 문장들을 눈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그는 이 엽서를 받은 날을 기억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었다. 서윤은 잠든 척하다가, 역에 도착하기 직전 가방에서 이 엽서를 꺼내 그의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나중에 봐"라고 말했던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확실하지 않았다. 사람은 가장 소중한 장면마저 완벽하게 보존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자주 꺼내 보고, 더 자주 망가뜨린다.

준오는 엄지손가락으로 마지막 이름을 가만히 눌렀다.

서윤.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혼자 있을 때도 그는 그 이름을 아꼈다. 이름은 부르는 순간 현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윤을 현재로 데려올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난 십 년 동안은 그랬다.

그는 엽서를 상자에 다시 넣지 못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채 의자에 기대었다. 창밖에서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빗물은 작은 창을 타고 흘러내렸고, 가로등 빛이 그 위에서 흔들렸다. 그는 문득 오래전 서윤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유리는 빛을 통과시키지만, 빛을 그대로 보내주지는 않아. 색을 입혀서 내보내."

그때 준오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사람도 그런가?"

서윤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응. 어떤 사람을 통과한 기억은 색이 달라져."

그 말은 그날엔 아름다웠고, 지금은 아팠다. 준오를 통과한 서윤의 기억은 어떤 색이 되었을까. 분노의 색일까. 체념의 색일까. 아니면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면 금이 보이는 색일까.

그는 책상 위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놓여 있었다. 사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쯤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당의 푸른 창이 해체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안쪽에 숨겨진 작은 필름이 발견될 가능성도 알고 있었다.

가능성.

그는 그 비겁한 단어 뒤에 오래 숨어 있었다.

필름을 그곳에 남겨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한 용기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웠다. 직접 전하지 못해 숨겼고, 버리지 못해 남겼다. 언젠가 서윤이 그 창을 만지게 된다면, 언젠가 그녀가 그 푸른 유리를 열어보게 된다면, 그때는 자신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언젠가라는 말은 자주 비겁한 사람들의 기도였다.

준오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분이라는 이름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발신자는 권성재였다. 도시기억재단의 프로젝트 매니저. 나이는 준오보다 몇 살 어렸지만 늘 지나치게 정중했고,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일을 정확히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준오는 잠시 화면을 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기 너머에서 빗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마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 다음에 권성재의 목소리가 왔다.

"이 감독님,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말씀하세요."

"한서윤 선생님이 오늘 필름을 찾으셨습니다."

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는데도, 막상 말이 되어 들려오자 심장 한쪽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는 오른쪽 손으로 책상 끝을 잡았다. 오래된 나무가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권성재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작업 후 내려가시는 길에 제가 연락드렸습니다. 감독님이 남기신 안내대로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성당에서 찾으신 물건에 대해 전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요."

"그분이 남기셨다고 했습니다."

준오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분. 참 편리한 호칭이었다.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가리킬 수 있고, 책임을 미루면서도 비밀을 지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는 지난 십 년 동안 그런 말들 뒤에 숨어 살아왔다. 지금은 그 말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외투처럼 느껴졌다.

"제 이름을 말했습니까?"

"아니요. 다만…"

권성재가 잠시 망설였다.

"한서윤 선생님이 먼저 물으셨습니다. 이준오 씨입니까, 라고요."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니, 원래도 조용했지만 이제는 그 조용함이 형태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준오는 헤드폰을 벗었다. 왼쪽 귀 쪽으로 빗소리가 희미하게 밀려왔다. 오른쪽 귀에는 권성재의 숨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라고 했습니다."

준오는 눈을 감았다.

그 장면이 떠올랐다. 성당 언덕의 젖은 길, 전화기를 든 서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창. 그는 그곳에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는 소리. 숨을 삼키는 소리. 오래 닫아둔 이름이 안쪽에서 깨어나는 소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권성재는 잠시 침묵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감독님, 어차피 곧 공식 미팅에서 만나셔야 합니다. 익명으로 끝낼 수 있는 단계는 지난 것 같습니다."

준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권성재의 말이 맞았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되었다. 폐쇄된 서울 성당을 문화 공간으로 복원하는 일. 푸른 스테인드글라스의 보존과, 그 성당이 품었던 시간의 소리를 아카이브로 남기는 일. 재단은 '빛과 소리의 복원'이라는 문구를 제안했고, 준오는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아름답고, 그래서 너무 잔인했다.

빛을 맡은 사람은 한서윤.

소리를 맡은 사람은 이준오.

그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준오는 일을 거절하려 했다. 이름을 보자마자 손끝이 차가워졌고, 오래전처럼 도망칠 변명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일정이 맞지 않는다. 지방 촬영이 있다. 귀 상태가 좋지 않다. 다른 음향감독을 추천하겠다. 얼마든지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의뢰서 맨 아래, 성당의 사진이 있었다.

비에 젖은 푸른 창.

그 창을 보는 순간 그는 알았다. 어떤 일들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피하는 동안 더 오래 기다릴 뿐이다.

"미팅은 언제입니까."

준오가 물었다.

권성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두 시입니다. 성당 현장 사무실에서요. 한서윤 선생님도 참석하십니다."

준오는 책상 위의 엽서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비가 오면 다시 가자. 십 년 전의 문장이 지금의 방 안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다시 가게 될까. 비가 오는 곳으로. 깨진 유리와 오래된 소리가 함께 있는 곳으로.

"알겠습니다."

"감독님."

권성재가 그를 불렀다.

"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냐는 질문은 이상했다. 괜찮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자주 건네지는 말이었고, 괜찮지 않다고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말이었다. 준오는 창밖을 보았다. 비는 이제 조금 굵어져 있었다. 유리창을 때리는 물방울들이 서로의 길을 지우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괜찮아야죠."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대답이 거짓이라는 것을 전화기 양쪽의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숨어든다

전화를 끊은 뒤, 준오는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컴퓨터 화면 속 파형은 멈춰 있었고, 책상 위 엽서는 작은 창처럼 놓여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자신의 귀가 나빠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만약 그날 서윤의 말을 정확히 들었다면. 만약 그녀가 묻던 질문에 제대로 대답했다면. 만약 떠나기 전, 설명할 수 없다는 문자 대신 설명하려는 용기를 냈다면.

인생은 너무 많은 만약으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그 방 안에 오래 있으면 사람은 현재의 문을 찾지 못한다.

준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 위의 오래된 카메라를 꺼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필름 카메라였다. 가죽은 손때로 부드러워졌고, 셔터 버튼은 예전보다 조금 뻑뻑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창가로 갔다. 비 내리는 밤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쥐면, 한때 자신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했는지 아주 잠깐 기억할 수 있었다.

서윤은 빛을 믿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빛이 남긴 흔적을 믿었다. 그녀는 깨진 유리를 보면서도 무너진 것이 아니라 견딘 것부터 보았다. 금이 간 방향, 유리 가장자리의 색, 납선이 오래 품은 먼지. 그녀의 손끝은 늘 조심스러웠지만,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의 조심스러움이었다.

준오는 그 조심스러움을 사랑했다.

한때는 자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사랑한다고. 그러나 그 말은 그들이 함께 있던 시간 안에서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한 걸음씩 물러섰다. 너무 흔한 말 같아서, 너무 무거운 말 같아서, 혹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하면 그 침묵이 가장 큰 오만이었다.

말하지 않은 마음은 저절로 전달되지 않는다.

소리도 그렇다. 녹음하지 않은 소리는 사라진다. 아무리 간절히 기억하려 해도, 공기 중에서 한 번 흔들린 파동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남는 것은 대략의 느낌뿐이다. 높았는지 낮았는지,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 웃음이 섞여 있었는지 울음에 가까웠는지. 준오는 평생 그 대략의 느낌을 붙잡고 살아왔다.

서윤의 목소리도 그랬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십 년 전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방향으로 소리를 고친다. 너무 날카로운 말은 둥글게 만들고, 너무 다정한 말은 더 다정하게 꾸민다. 준오가 기억하는 서윤의 목소리 역시 실제의 그녀보다 조금 더 젖어 있고, 조금 더 빛나며, 조금 더 멀리 있을지 몰랐다.

다음 주 수요일, 그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왼쪽 귀 깊은 곳이 미세하게 울렸다. 통증은 아니었다. 오래전 멈춰버린 시계가 갑자기 한 칸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준오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새 프로젝트 폴더를 만들었다.

폴더 이름을 입력하는 칸에 커서가 깜빡였다.

처음에는 공식 제목을 쓰려 했다. 서울 성당 복원 사운드 아카이브. 그러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이름을 적었다.

푸른 창의 잔향.

엔터를 누르자 새 폴더가 생겼다. 아무 파일도 들어 있지 않은 빈 폴더였다. 앞으로 그 안에는 성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 발자국이 바닥을 건너가는 소리, 깨진 유리 조각을 내려놓는 소리, 서윤이 숨을 고르는 소리까지 들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을까. 기록해도 되는 것일까.

준오는 한참 동안 빈 폴더를 바라보았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어딘가로 숨어든다. 벽의 결, 나무의 틈, 사람의 몸, 오래된 기억의 가장 어두운 쪽. 그리고 어느 날 비슷한 공간, 비슷한 계절, 비슷한 이름을 만나면 다시 울린다.

오늘 서윤에게 울린 것은 필름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울린 것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성당으로 가는 제안서

다음 날 아침, 준오는 재단 사무실에서 보낸 최종 제안서를 다시 열었다.

문서는 지나치게 깔끔했다. 성당의 역사, 복원 목적, 전시 계획, 관람 동선, 예산표. 모든 것이 표와 문장 안에 정돈되어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 품고 있는 냄새와 습기, 깨진 창 아래 고인 빛,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공간의 적막 같은 것은 문서 안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행정은 늘 세계를 반듯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반듯해진 세계에는 사람이 다치며 만든 울퉁불퉁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준오는 사운드 아카이브 항목을 읽었다.

성당 내외부의 현재 음환경 기록. 복원 전후의 공간 잔향 비교. 과거 신도 및 지역 주민 인터뷰. 전시 공간에 활용할 사운드 설치물 제작. 사라지는 장소의 기억을 청각적으로 보존하는 장기 프로젝트의 첫 사례.

문장들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위험한 단어가 숨어 있었다.

복원 전후.

전과 후 사이에는 늘 누군가의 상처가 있었다. 건물은 고쳐지고, 전시는 열리고,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들이 있었다. 먼지 속에 숨은 편지, 납선 안쪽의 필름, 오래전 말하지 못한 이름. 준오는 그 모든 것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섭다는 이유로 물러나기엔 너무 오래 물러나 있었다.

제안서 마지막 페이지에는 참여자 명단이 있었다.

총괄 기획 권성재.

건축 보존 자문 박명호.

스테인드글라스 보존 한서윤.

사운드 아카이브 이준오.

두 이름이 한 페이지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준오는 그 부분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서윤. 이준오. 종이 위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이름들처럼 보였다. 과거도, 이별도, 변명도, 미안함도 없이 그저 맡은 일을 표시하는 글자들. 그러나 그 두 이름 사이에는 십 년이 있었다. 통영의 여름과 서울의 겨울, 보내지 못한 편지와 받지 못한 설명,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필름과 숨겨두었다가 발견된 필름.

준오는 출력된 제안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녹음 장비를 점검했다. 성당 같은 공간에서는 잔향 시간이 중요했다. 잔향 시간이란 소리가 멈춘 뒤에도 공간 안에 남아 서서히 사라지는 시간을 뜻한다. 쉽게 말해, 손뼉을 한 번 쳤을 때 그 소리가 얼마나 오래 울리다가 사라지는지를 재는 것이다. 돌과 유리, 높은 천장을 가진 성당은 소리를 오래 품는다. 누군가의 한숨도, 발걸음도, 낮은 목소리도 예상보다 멀리 번진다.

그 사실이 준오를 더 긴장하게 했다.

성당에서 서윤을 만나면, 어떤 말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늦게 돌아올 것이다. 그녀가 왜 이제야 왔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기둥 사이를 여러 번 부딪히며 더 오래 남을 것이다. 침묵조차도 그곳에서는 소리가 될 것이다.

그는 가방을 닫다가 멈추었다. 나무 상자에서 엽서를 꺼내 제안서 사이에 끼웠다.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두고 가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과거를 집에 숨겨두고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현재에 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엽서를 다시 빼려다가 결국 그대로 두었다.

준오는 코트를 입고 작업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1층 간판 제작소에서 아크릴을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밖으로 나오자 비는 그쳐 있었고, 도로에는 밤새 내린 물이 얇게 남아 있었다. 자동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물빛이 낮게 흔들렸다.

그는 차에 오르기 전,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락처 검색창에 한참 동안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다. 서윤의 번호를 알고 있지 않았다. 알고 있다고 해도 누를 수 있었을까. 그는 메시지 앱을 열고 새 문장을 썼다.

서윤아.

세 글자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는 다음 문장을 쓰지 못했다. 오래 걸렸어. 미안해. 설명하고 싶어.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떤 말은 늦으면 사과가 아니라 소음이 된다.

그는 문장을 지웠다.

빈 화면만 남았다.

준오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자 엔진의 낮은 진동이 오른쪽 귀와 왼쪽 귀에 서로 다르게 들어왔다. 그는 그 차이를 느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성당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릴 것이다.

아직 공식 미팅까지는 며칠이 남았지만, 그는 먼저 가보기로 했다. 사람이 없는 시간의 공간을 들어야 했다. 복원이 시작되기 전, 서윤의 손길이 더 깊이 닿기 전, 푸른 창이 완전히 열리기 전의 성당을 기록해야 했다. 어쩌면 그것은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장소를 먼저 만나보고 싶었다. 그곳이 자신을 얼마나 꾸짖을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울릴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가 도로로 나섰다. 흐린 하늘 아래 도시가 젖은 채 이어졌다. 철거를 기다리는 건물들, 새로 올라가는 유리벽, 문 닫은 가게의 셔터, 출근길 사람들의 굳은 얼굴. 준오는 그 모든 소리가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들으려 했다.

그러나 오늘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소리는 따로 있었다.

한서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혹은 부르지 않는 침묵.

푸른 창 앞에서

성당은 언덕 위에 있었다.

아침의 빛은 흐렸고, 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유리처럼 차가웠다. 준오는 차를 언덕 아래에 세우고 장비 가방을 들었다. 길가의 풀잎마다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젖은 흙이 신발 밑에서 낮게 눌렸다. 그는 녹음기를 켜지 않았는데도 이미 듣고 있었다. 멀리서 지나가는 버스, 전선 위의 새, 언덕 아래 공사장의 금속음, 그리고 성당 쪽에서 내려오는 깊은 침묵.

닫힌 성당은 멀리서 보면 버려진 배 같았다. 흰 벽은 젖어 회색으로 보였고, 창들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중 성가대석 위쪽의 푸른 스테인드글라스만 희미하게 빛났다. 서윤이 어제 손댄 자리일 것이다. 필름이 나왔던 자리. 그의 오래된 비겁함이 마침내 발견된 자리.

준오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십 년 전, 그는 이 성당을 한 번 찾은 적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방문이었다. 당시 성당은 이미 폐쇄되어 있었고, 그는 사라지는 종교 건축물에 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도와 이곳에 왔다. 그때 그는 통영에서 사라진 필름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윤에게 돌려주어야 했지만 돌려주지 못한 것. 버리려 했지만 버리지 못한 것. 지니고 있을수록 변명이 커지는 것.

그는 그 필름을 푸른 유리 안쪽에 남겨두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젠가 발견되기를 바랐을까. 영영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사람은 가장 간절한 마음을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숨길 때가 있다. 준오는 그 사실을 자기 삶으로 증명한 사람 같았다.

성당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재단에서 받은 임시 열쇠를 꺼냈다. 열쇠가 자물쇠 안으로 들어갈 때 금속이 짧게 울렸다. 그 소리만으로도 성당 안쪽 공기가 반응하는 것 같았다. 문을 밀자 오래된 나무가 낮게 신음했다.

안은 어두웠다.

준오는 문을 닫지 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바깥의 흐린 빛이 등 뒤에서 들어와 바닥에 길게 놓였다. 성당 안의 냄새가 천천히 다가왔다. 눅눅한 나무, 먼지, 식은 돌, 오래된 기도. 그는 가방에서 작은 마이크를 꺼내 바닥에 세우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빛이 켜졌다.

성당의 침묵이 녹음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헤드폰을 쓰자 공간이 열렸다. 천장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빈 양동이에 닿았다. 멀리 어딘가에서 나무가 수축하며 작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깨진 틈을 지나며 아주 낮은 숨을 만들었다. 준오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소리는 천장으로 올라갔다가, 벽을 돌아, 성가대석 아래에서 조금 늦게 돌아왔다. 길고 서늘한 잔향이었다. 성당은 아직 소리를 품는 법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떠났고 종은 울리지 않았고 기도는 멈췄지만, 공간은 여전히 한 번 들어온 것을 쉽게 보내지 않았다.

준오는 푸른 창 아래로 걸어갔다.

서윤의 작업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번호가 붙은 유리 조각 상자, 임시 지지대, 흰 천으로 덮인 작업대. 모든 것이 단정했다. 그는 그 단정함이 서윤답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숨길 때조차, 그녀는 도구를 정확한 자리에 놓는 사람이었다.

그는 작업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창을 올려다보았다. 필름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어둠이 얇게 고여 있었다. 그 빈틈을 통해 흐린 빛이 들어왔다. 완전하지 않은 빛이었다. 그래서 더 오래 보게 되는 빛이었다.

준오는 낮게 말했다.

"서윤아."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러나 성당은 그 이름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소리는 푸른 창 아래에서 부딪히고, 벽을 타고 올라갔다가, 조금 늦게 그의 귀로 돌아왔다.

서윤아.

오른쪽 귀에는 선명하게, 왼쪽 귀에는 거의 물속처럼 흐리게.

그는 그 잔향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십 년 동안 부르지 못한 이름은 한 번 입 밖으로 나오자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전부터 그 안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성당 밖에서 자동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준오는 눈을 떴다. 녹음기는 여전히 빨간 불빛을 켜고 있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깥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젖은 흙 위를 밟는 발소리. 망설임 없이, 그러나 빠르지 않은 걸음.

그는 그 발소리를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사람의 걸음마저 바꾸어놓았을 테니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알 것 같았다. 조심스럽지만 물러서지 않는 발소리. 깨진 것을 만질 때처럼 신중하고, 끝내 피하지 않는 사람의 걸음.

준오는 헤드폰을 벗었다.

왼쪽 귀의 침묵과 오른쪽 귀의 현실 사이에서, 성당 문이 천천히 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적어도,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녹음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성당은 두 사람이 아직 만나기 전의 마지막 고요를,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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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유리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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