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책에 포함된 노트재의 정원에 부는 새벽

침묵의 손이 남긴 약속

Views 57약 10분생성형 AI 활용
Summary

돌 앞에서 말하는 사람

아란은 무덤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루가 묻힌 흙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둘레를 둥글게 눌렀고, 그 가운데 새로 덮인 흙만은 이상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마치 땅이 죽은 아이를 삼킨 것이 아니라 품고 있는 듯하였다. 아무도 그 흙 위에 함부로 손을 얹지 못했다. 묻는다는 일이 처음이었으므로, 그들은 무엇을 해야 예의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바람은 낮게 불었다. 정원에서 불던 바람과 달랐다. 그 바람은 잎을 흔들기 전에 먼저 사람의 뺨을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서하는 그 차이를 아직도 매번 새롭게 배웠다. 낙원에서는 바람이 먼저 향기를 데려왔고, 그 다음에 소리를 데려왔으나, 이곳에서는 먼지와 추위를 먼저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야 아주 늦게, 사라진 것들의 냄새를 남겼다.

사람들은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작은 돌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북쪽 샘으로 가는 길에서 주운 검푸른 돌이었다. 돌의 한쪽 모서리에는 마른 피가 조금 남아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 사람들은 묻지 않았다. 이미 모두가 알았다.

아란은 입술을 열었으나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의 목 안쪽에서 말들이 서로 밀치며 쓰러지는 듯했다. 그는 한 번 숨을 삼켰고, 다시 삼켰다. 그때 이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이마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늙어 있었다. 아이 하나를 잃는 동안, 한 사람의 얼굴은 한 계절을 건너뛰기도 했다.

"말하라."

이마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낮아서, 땅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란은 그 말을 듣고서야 무릎을 꿇었다.

"내가 막았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북쪽 샘으로 가는 길을 내가 숨겼습니다. 물이 모자라면 사람들이 내 말을 들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먼저 보고, 내가 먼저 정하고, 내가 나누어 주면……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말이 오히려 가장 멀리 갔다. 사람들의 눈이 흔들렸다. 어떤 이는 분노로 입을 벌렸고, 어떤 이는 너무 지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란은 손에 든 돌을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

"루가 물을 찾으러 갔을 때, 나는 그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했더라면…… 그 아이는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마가 눈을 감았다. 그 눈꺼풀 위로 빛이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서하는 그 빛을 보며 오래전 정원의 낮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처음이던 때, 이름을 부르면 생명이 대답하던 때, 나율이 웃으며 아직 뜻을 모르는 손짓을 하던 때. 그러나 이제 이름은 대답을 보장하지 않았다.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이 생겼다.

한 사내가 아란에게 달려들려 했다. 나율이 그 앞을 막았다. 나율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막는 자의 손은 단단했으나, 그 단단함은 용서에서 온 것이 아니라 더 큰 파멸을 두려워하는 데서 온 것이었다.

"그를 치면," 나율이 말했다. "루가 돌아오는가."

그 말은 사람들의 가슴에 떨어져,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오래 울렸다.

아란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나를 내쫓으십시오. 샘을 보았던 눈을 가리십시오. 내 손에서 물그릇을 빼앗으십시오. 그러나 길은…… 길은 모두에게 말하겠습니다."

그제야 서하는 알았다. 어떤 고백은 죄를 작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죄가 숨어서 더 많은 그림자를 낳지 못하게 할 뿐이다. 고백은 상처의 끝이 아니라, 썩은 곳을 처음으로 공기 앞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네 죄가 내 아이를 묻었다."

아란은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네 죄만이 내 아이를 묻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서로의 목마름을 보지 않은 것도 묻었다. 우리가 물을 가진 자를 두려워하고, 물 없는 자를 부끄러워하게 만든 것도 묻었다."

이마는 무덤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흙을 한 줌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흙은 마르고 거칠었다. 아이의 몸을 덮기에 너무 가난한 흙이었다.

"이 흙이 루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기억해야 한다. 북쪽 샘은 한 사람의 입으로 닫히지 않는다. 한 사람의 손으로도 열리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가야 열린다."

그날, 사람들은 아란을 돌로 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곧장 용서하지도 않았다. 용서라는 말은 아직 그들 가운데 너무 밝아서,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아란에게 길을 말하게 했다. 북쪽으로 굽어지는 바위, 새벽이면 푸른 그림자가 지는 언덕, 가시나무 사이로 숨어 있는 낮은 틈, 그 틈 아래에서 오래된 물소리가 들리는 곳. 아란은 모두 말했다.

그리고 말할수록 작아졌다.

그를 작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증오가 아니었다. 자기 안에서 왕처럼 앉아 있던 거짓이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사람들은 처음으로 루의 무덤 앞에 빈 그릇을 놓았다. 물을 담지 않은 그릇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왜 비워 두느냐고. 이마가 대답했다.

"우리가 잊을 때마다, 이 빈자리가 우리를 부르게 하려고."

서하는 그 빈 그릇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릇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어둠이 고요히 담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는 이상하게도 부재가 아니라 기다림을 보았다.

침묵의 손이 남긴 약속

오래된 씨앗을 꺼내다

밤이 깊어 사람들의 불이 하나둘 낮아졌을 때, 서하는 홀로 깨어 있었다.

나율은 잠든 아이들 곁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루가 묻힌 뒤로 자주 잠에서 울었다. 죽음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돌아오지 않는 발소리의 빈틈은 이해했다. 나율은 그들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아주 오래전 정원에서 부르던 노래를 낮게 흥얼거렸다. 그 노래는 이제 예전처럼 맑지 않았다. 중간중간 끊겼고, 어떤 음은 기억나지 않아 숨으로만 지나갔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불완전한 노래에 몸을 맡겼다. 완전한 노래보다 곁에 있는 목소리가 더 필요할 때가 있었다.

서하는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쪽 깊은 곳, 찢어진 천 조각에 싸여 있는 것이 있었다. 오래전 정원을 떠나던 날, 나율이 품에 넣었던 씨앗들 가운데 하나였다. 많은 씨앗은 이미 심어졌다. 어떤 것은 싹이 나지 않았고, 어떤 것은 작은 풀로 자라 염소 같은 들짐승의 입에 사라졌고, 어떤 것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계절에 결국 갈아 먹었다. 그것을 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서하는 알지 못했다. 굶주림은 때때로 미래의 이름을 현재의 입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 씨앗 하나는 남아 있었다.

왜 남겨 두었는지 서하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는 마지막 남은 정원의 증거를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물이 넉넉하고 아이들이 웃으며 흙을 파는 날이 오면, 그때 심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종종 희망을 가장 좋은 날을 위해 아껴 둔다. 그러다가 좋은 날이 오지 않으면, 희망도 함께 늙어 버린다.

씨앗은 작고 단단했다. 손바닥에 올리자 별이 식어 남긴 조각처럼 보였다. 그 표면은 빛나지 않았으나, 어둠 속에서도 형태를 잃지 않았다.

서하는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땅은 차갑고, 계절은 싹을 기다리는 계절이 아니었다. 낮에는 서리가 하얗게 남아 있었고, 바람은 아직 겨울의 이빨을 버리지 않았다. 씨앗을 심는다면 모두가 그를 어리석다 할 만한 밤이었다.

그는 루의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무덤 바로 곁은 아니었다. 죽은 아이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멀지도 않았다. 기억이 자라려면, 슬픔과 완전히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그는 느꼈다.

흙을 파려 하자 손끝이 곧 아파 왔다. 땅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서하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흙을 긁었다. 가지 끝이 부러졌다. 그는 다시 손으로 팠다. 손톱 밑으로 흙이 들어가고, 얼어 있던 작은 돌들이 살갗을 찔렀다. 피가 맺혔다.

그때, 그는 아주 오래전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

정원에서 나율이 물은 적이 있었다. "왜 씨앗은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하지?"

그때 서하는 웃으며 대답했었다. "흙이 품어야 하니까."

그 대답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때는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흙은 부드러웠고, 무엇이든 넣으면 생명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은 그의 가슴을 찔렀다. 씨앗이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흙이 착해서만이 아니었다. 씨앗은 자기 모습의 단단함을 잃어야만 다른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다. 씨앗에게 싹은 영광이기 전에 파열이었다.

서하는 작은 구덩이에 씨앗을 내려놓았다.

"나는 네게 좋은 때를 주지 못한다."

그는 씨앗에게 말했다. 말하고 나서, 자신이 씨앗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러나 우습지 않았다. 이 땅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게 말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무덤에게, 불에게, 빈 그릇에게, 잠든 아이의 이마에게.

"나는 비옥한 흙도, 따뜻한 계절도 주지 못한다. 네가 나온다 해도 바람이 세고, 물은 멀고, 사람들은 자주 서로를 다치게 한다. 그러니 나오지 않아도 너를 탓하지 않겠다."

그는 흙을 덮었다.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 순간 어디선가 아주 희미한 바람이 불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것은 정원의 향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꽃도, 익은 과일도, 맑은 물소리도 없었다. 다만 오래전에 들었던 목소리의 가장자리 같은 것이 있었다. 말은 아니었다. 대답도 아니었다. 그러나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하는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새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래."

그가 중얼거렸다.

"늘 이런 식이지."

그 말에는 원망이 있었고, 피로가 있었고, 이상하게도 안도도 있었다. 만약 하늘이 그 자리에서 열리고, 빛나는 손이 내려와 씨앗을 감싸고, 땅이 즉시 갈라져 푸른 잎이 솟았다면 그는 엎드려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워했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모든 것이 위에서 결정되어 버리는 일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서하는 자신이 심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그는 그것을 품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율은 아직 깨어 있었다. 그의 손에 묻은 흙과 피를 보고도 묻지 않았다. 다만 자기 겉옷 한쪽을 찢어 서하의 손가락을 감아 주었다.

"무엇을 했어요?"

잠시 뒤, 나율이 물었다.

서하는 대답하려다가 멈추었다. 예전 같으면 숨겼을 것이다. 희망을 숨기는 버릇도 두려움에서 나왔다. 실패하면 함께 아플까 두려워서, 혹은 성공하면 빼앗길까 두려워서.

"씨앗을 심었어."

나율은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지금."

나율은 밖의 어둠을 보았다. 그리고 서하의 손을 다시 보았다.

"싹이 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알아."

"그래도 심었어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율은 오래 침묵했다. 그러더니 그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럼 내일 물을 가져가요."

서하는 그 말에 목이 막혔다. 내일. 그것은 작은 말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절망의 한가운데서 내일을 말할 때, 그 말은 하늘의 어떤 문보다 무거웠다.

꿈에 나타난 길

그 밤, 서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다시 정원에 있었다. 그러나 정원은 기억 속의 정원처럼 빛나지 않았다. 나무들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잎마다 뒷면이 보였고, 꽃들은 향기를 잃은 채 닫혀 있었다. 샘은 고요했다. 물결이 없었다. 그 고요함이 너무 완전하여, 서하는 그것이 물이 아니라 유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거울의 샘 앞에 서 있었다.

물속에는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얼굴은 하나가 아니었다. 젊은 서하, 부끄러움을 처음 알던 서하, 나율을 의심하던 서하, 정원 밖에서 아이들을 안고 떨던 서하, 루의 무덤 앞에 서 있던 서하가 겹겹이 있었다. 각각의 얼굴은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네가 먼저. 네가 숨겼다. 네가 두려워했다.

서하는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꿈에서는 눈이 감기지 않았다.

그때 샘 건너편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렌이었다.

이렌은 예전과 같으면서도 같지 않았다. 그의 빛은 천상의 전쟁 때 보았던 날카로운 빛이 아니었다. 검을 들고 검은 유리를 가르던 불꽃도 아니었다. 그는 마치 오래 접어 둔 새벽처럼 희미했다. 그러나 희미함 속에 닳지 않는 결이 있었다.

서하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말해 주시오."

서하가 외쳤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말해 주시오. 당신들은 길을 보지 않소? 당신들은 우리보다 높지 않소?"

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서하는 분노했다. 오랜 세월 쌓인 질문들이 꿈속에서 한꺼번에 깨어났다.

"왜 늘 늦게 오는가. 왜 우리가 망친 뒤에야 흔적만 남기는가. 왜 한마디면 될 일을 바람과 꿈과 우연 속에 숨기는가. 우리가 어린 것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자주 속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서로를 다치게 하다가 결국 무덤을 만든 것이 보이지 않는가."

샘의 얼굴들이 그의 말을 따라 흔들렸다.

이렌은 여전히 침묵했다. 대신 손을 들어 샘의 물을 가리켰다.

물속의 얼굴들이 사라지고,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아침의 길이었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틈. 그 틈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란, 이마, 그리고 이름 없는 어린 소녀. 소녀는 빈 물그릇을 들고 있었다. 이마는 아란을 바라보지 않았고, 아란도 이마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서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나율이 아이들에게 물을 나누고 있었다. 먼저 자기 아이에게 주지 않았다. 가장 열이 높은 아이의 입술을 적셨다. 자기 아이는 옆에서 기다렸다. 기다림을 배운 아이의 얼굴은 슬펐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또 장면이 바뀌었다. 서하가 밤에 심은 씨앗의 자리. 아무것도 나지 않은 흙. 그 위로 서리가 내렸다. 서리는 흰 천처럼 땅을 덮었다. 서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죽었군요."

그가 말했다.

이렌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으로 움직임이 대답이 되었다.

그는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하는 그 빈손을 보았다. 천사의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명령도, 무기도, 빛나는 두루마리도 없었다.

이렌은 빈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킨 뒤, 다시 서하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물러났다. 샘의 유리 같은 표면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은 소리 없이 퍼졌고, 그 틈으로 물이 아니라 흙냄새가 올라왔다.

서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다. 불씨는 거의 꺼져 있었다. 밖에서는 누군가 조심스럽게 걷는 소리가 났다. 서하는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 보니, 한 소녀가 물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꿈에서 본 그 소녀였다. 그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마루. 루와 함께 자주 뛰놀던 아이였다.

"왜 깨어 있니?" 서하가 물었다.

마루는 놀라 그릇을 품에 안았다.

"물을 가져가려고요."

"어디로?"

소녀는 루의 무덤 쪽을 바라보았다.

"이마가 빈 그릇을 두었잖아요. 비어 있으면 루가 추울 것 같아서요."

서하는 한동안 말하지 못했다. 아이의 생각은 틀렸고, 그래서 더 참되었다. 죽은 자가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산 자가 빈 그릇을 그냥 두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같이 가자."

그가 말했다.

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어둠 속을 걸었다. 루의 무덤에 도착하자 빈 그릇 안에는 밤새 내려앉은 먼지가 조금 있었다. 마루는 가져온 물을 그릇에 부었다. 물은 적었다. 그릇 바닥을 겨우 적실 만큼이었다. 그러나 물이 닿자 먼지가 움직이고, 작은 원을 그리며 맑아졌다.

그때 서하는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씨앗의 자리를 보았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흙은 그대로였다. 서리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낙심하지 않았다. 꿈속 이렌의 빈손이 떠올랐다. 답을 주지 않는 손. 대신 누군가의 손을 비워 두지 않게 만드는 손.

그는 마루의 그릇을 받아, 남은 물 한 방울을 씨앗의 자리에 떨어뜨렸다.

"거기도 누가 있어요?"

마루가 물었다.

서하는 잠시 생각했다.

"아직은 없어."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이 있어."

보이지 않는 손들의 일

북쪽 샘으로 가는 길은 다음 날 열렸다.

열렸다고 해서 갑자기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 길은 여전히 험했고, 가시나무는 옷과 살을 붙들었으며, 바위틈은 한 사람씩 몸을 낮추어야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길을 아는 자가 한 사람에서 여러 사람이 되자, 길은 달라졌다. 길은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 나뉘어 들어가야 비로소 길이 되었다.

아란이 앞장섰다. 그의 뒤를 이마가 걸었다. 사람들은 그 둘 사이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았다. 그 거리는 공동체가 아직 건너지 못한 강처럼 보였다.

샘은 낮은 바위 아래 숨어 있었다. 물은 많지 않았으나 맑았다. 오래 침묵한 목소리처럼, 가까이 귀를 대야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차례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다. 누구도 크게 웃지 않았다. 기쁨은 죄책감과 함께 올 때 조심스러워진다.

이마는 자기 그릇에 물을 담아 아란에게 내밀었다.

아란은 받지 못했다.

"마시라."

이마가 말했다.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먼저 마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는 것이다."

아란이 그를 보았다. 이마의 눈에는 용서가 완전히 있지 않았다. 그러나 복수도 완전히 있지 않았다. 그 사이의 낯선 땅에, 어떤 새 길이 나려 하고 있었다.

"네가 마셔야 한다. 그래야 네가 살아서 기억한다."

아란은 그릇을 받았다. 물을 마셨다. 물은 목을 타고 내려갔으나, 그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오지 않았다. 어떤 물은 갈증을 풀면서도 더 깊은 갈증을 드러낸다.

그날부터 사람들은 물을 나누는 법을 새로 정했다. 가장 힘이 센 자가 먼저가 아니었다. 가장 크게 요구하는 자가 먼저도 아니었다. 어린아이, 병든 자, 먼 길을 다녀온 자, 그리고 다음 길을 찾아 나설 자에게 먼저 주었다. 이것은 완전한 정의가 아니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서운했고, 누군가는 몰래 더 마시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규칙은 사람의 마음을 대신 거룩하게 만들지 못해도, 마음이 무너질 때 붙잡을 낮은 울타리는 되어 주었다.

서하는 이 모든 일을 보며 자주 꿈을 생각했다. 이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는 어떤 표지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우연들이 이어졌다.

한 아이가 길을 잃었다가, 예전에 아란이 바위에 남겨 두었던 흠집을 발견해 돌아왔다. 나율이 잃어버린 불씨를 찾지 못해 밤을 두려워하던 때, 늙은 여인이 자기 옷자락 안에 묻어 두었던 작은 숯덩이를 내놓았다. 이마는 루의 무덤 곁에서 자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서 잠든 마루를 발견하고 아이를 업어 돌아왔다. 그 뒤로 그는 밤마다 무덤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아이들의 잠자리도 살폈다.

누군가는 그것을 우연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죽은 루가 돕는다고 말했다.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보이지 않는 손이 반드시 하늘에서 곧장 내려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었다. 어떤 손은 꿈속에서 빈손으로 나타나고, 어떤 손은 아이의 물그릇이 되고, 어떤 손은 원수의 입에 물을 대어 주는 떨리는 손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변화를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면, 사람들의 불빛 바깥에서 다른 시선이 움직였다. 그것은 인간의 눈보다 오래되었고, 짐승의 굶주림보다 차가웠다. 루아딘은 바위 그림자에 기대어 그들을 보았다.

그는 인간들이 절망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절망이 너무 깊어져 아무 움직임도 만들지 못할 때, 그는 곧 지루해졌다. 그가 진정으로 즐기는 것은 무너짐 자체가 아니라, 무너지는 자가 자기 무너짐에 이유를 붙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버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도 버린다." "나는 다쳤다." "그러므로 다치게 한다." 그런 문장들이 그의 궁전의 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 하나가 죽었다. 물은 숨겨졌고, 죄가 드러났으며, 공동체는 갈라질 모든 이유를 가졌다. 루아딘은 그 밤 사람들 사이로 분노의 불씨를 불어 넣었다. 아란을 치라고, 이마의 고통을 왕좌로 삼으라고, 서하에게 네 침묵이 이 모든 일의 뿌리라고 속삭였다. 속삭임은 여러 귀에 닿았다. 몇몇 손은 정말로 돌을 쥐었다.

그러나 돌들은 던져지지 않았다.

루아딘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새벽마다 루의 무덤 곁을 걸었다. 무덤은 그에게 불쾌했다. 죽음은 그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죽음 곁에 빈 그릇을 놓고, 이름을 부르고, 물 한 방울을 나누었다. 그들은 죽음을 끝으로만 두지 않고 기억의 장소로 바꾸고 있었다. 루아딘에게 그것은 도둑질처럼 느껴졌다. 그가 세운 어둠의 집에서 창문을 내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하가 밤에 심은 씨앗의 자리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하찮게 여겼다. 작은 흙의 부풀음. 피 묻은 손가락 자국. 물 한 방울의 희미한 흔적. 그는 웃었다. 인간은 어리석었다. 잃고 나면 묻고, 묻고 나면 심고, 심고 나면 기다렸다. 기다림이 배신할 때마다 또 울면서도, 다시 기다렸다.

루아딘은 몸을 낮추었다. 그의 손가락이 흙 위에 닿았다. 그러자 흙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그 안의 씨앗을 느꼈다. 아직 터지지 않은 단단한 침묵. 죽은 것처럼 웅크리고 있는 작은 것.

"너도 결국 썩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흙속으로 스며들었다. 씨앗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아딘은 손을 거두었다. 지금은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싹이 나지 않는 희망은 절망을 더 오래 끌고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서하가 매일 와서 흙을 보고, 아무것도 없는 표면 앞에서 조금씩 지쳐 가기를 원했다. 희망이 천천히 굶어 죽는 모습은 갑작스러운 파멸보다 오래 즐길 만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림은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계절을 착각한 싹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하는 매일 아침 씨앗의 자리로 갔다. 나율은 물을 조금씩 아껴 그에게 주었다. 어떤 날은 마루가 먼저 와 있었다. 아이는 흙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혼잣말을 했다. 서하는 무엇을 말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기도는 어른의 귀에 들어오면 자주 부끄러워진다.

사람들 가운데 몇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먹을 것도 모자란데, 나지 않을 씨앗에 물을 버리는군."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서하는 변명하지 않았다. 다만 물을 아주 조금만 주었다. 손가락 끝에 적신 물을 흙 위에 떨어뜨릴 뿐이었다.

하루는 나율이 말했다.

"당신은 그 씨앗에서 무엇을 기다려요?"

서하는 오래 생각했다. 열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씨앗이 어떤 나무의 씨앗인지조차 이제 확실하지 않았다. 그늘이라고 말하기에도 이른 일이었다. 정원의 회복이라고 말한다면 거짓이 될 것이다. 하나의 씨앗이 잃어버린 낙원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건 아닌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그럼요?"

"내가 아직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 같아."

나율은 그 말을 듣고 흙을 바라보았다. 그날 그는 서하보다 먼저 물을 떨어뜨렸다.

밤에는 서리가 내렸다. 새벽이면 흙은 하얗게 굳었다. 낮에는 바람이 먼지를 몰고 왔다. 계절은 싹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북쪽 샘을 오가며 겨우 살아갔다. 아란은 가장 험한 길을 맡았다. 그는 자주 넘어졌고, 손바닥이 갈라졌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게 고마움을 쉽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고마움을 받을 자격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망가뜨린 길을 자기 발로 다시 익히기 위해 걸었다.

그리고 어느 아침, 세상이 아직 회색일 때, 마루가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놀라 달려왔다. 이마가 가장 먼저 아이를 붙들었다.

"무슨 일이냐?"

마루는 말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씨앗의 자리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흙과 서리와 작은 돌들뿐이었다. 그러나 마루의 손끝이 떨리는 곳을 따라 모두가 몸을 낮추자, 거기에 아주 가느다란 틈이 보였다. 흙이 안쪽에서 밀려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믿기 어려울 만큼 작은 초록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싹이었다.

너무 작아서 바람 한 번이면 사라질 것 같았다. 너무 연해서 손가락 그림자에도 눌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흙 위에 있었다. 계절을 잘못 안 것처럼, 혹은 계절에게 묻지 않기로 한 것처럼.

서하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기쁨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그는 손을 뻗지 못했다. 만지면 사라질 것 같았다.

나율이 그의 곁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 작은 초록을 보았다. 오래전 정원에서 그들은 거대한 나무와 빛나는 열매와 넘치는 물을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풍요가 이 작은 싹보다 더 놀라운 적은 없었다. 풍요 속의 생명은 당연해 보였지만, 척박함 속의 생명은 약속처럼 보였다.

이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루의 무덤과 싹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가 심은 것이냐?"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심었다."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오래전 받은 씨앗이었다."

"왜 여기에 심었습니까?"

서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유들은 너무 작거나 너무 컸다. 그때 마루가 대신 말했다.

"기다리는 것이 있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아이를 보았다. 마루는 부끄러워 이마 뒤로 숨었다.

이마는 싹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손으로 흙을 만지지 않았다. 다만 자기 몸으로 바람을 조금 막았다.

"그럼 기다리자."

그가 말했다.

그날 사람들은 싹 둘레에 낮은 돌들을 놓았다. 짐승의 발과 사람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아란은 멀리서 돌을 날라 왔다. 그는 가장 마지막에 다가와, 다른 돌보다 조금 낮은 돌 하나를 놓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났다.

"낮아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빛을 가리면 안 됩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돌은 그대로 두었다.

그 뒤로 싹은 공동체의 일이 되었다. 아직 아무 열매도 주지 않은 것, 그늘도 만들지 않은 것, 배고픔을 해결하지도 못한 것이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뛰다가 그 근처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물을 나누는 자는 그날 남은 한 방울을 생각했다. 다투던 사람들도 싹 가까이 오면 목소리를 낮추었다.

희망은 때때로 큰 깃발처럼 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작아서 모두가 몸을 굽혀야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왔다. 그리고 몸을 굽히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뻣뻣하게 서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꺾으려는 자

루아딘은 그 싹을 보았을 때 웃지 않았다.

그는 새벽의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인간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고, 불씨는 붉은 눈처럼 낮게 타고 있었다. 싹 둘레의 돌들은 어설펐다. 손가락 하나면 흩을 수 있을 만큼 약했다. 그 안의 초록은 더 약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것이 왜 그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지.

그는 내려갔다.

그가 지나가자 서리가 검게 변했다. 풀의 마른 줄기들이 소리 없이 부러졌다. 그는 싹 앞에 멈추었다. 작은 잎은 아직 펴지지도 못했다. 줄기는 빛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 빛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흐린 새벽을 향해.

"너를 두고 그들이 무엇을 꿈꾸는지 아느냐."

루아딘이 속삭였다.

"그들은 너를 보고 자신들이 버림받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죄의 결과를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작은 초록 하나로 자신들의 무덤을 덮으려 할 것이다."

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루아딘을 더 화나게 했다. 그는 창조자의 침묵을 미워했다. 그 침묵이 자신을 몰아냈다고 믿었다. 자신이 질문했을 때 즉시 답하지 않았고, 자신이 빛의 중심을 원했을 때 그 욕망의 이름을 친절히 불러 주지 않았고, 자신이 떨어질 때도 붙들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침묵을 부재라 불렀고, 부재를 고발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작은 싹 앞에서 그는 다른 종류의 침묵을 느꼈다.

싹은 그를 반박하지 않았다. 위협하지 않았다. 빛나지도 않았다. 다만 자라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만든 문장 하나를 지우고 있었다. 끝났다. 늦었다. 버려졌다. 소용없다. 그가 인간의 밤마다 심어 둔 말들이, 이 작은 줄기 앞에서 조금씩 힘을 잃었다.

루아딘은 손을 뻗었다.

그 손은 한때 별들의 노래를 조율하던 손이었다. 빛의 회랑에서 두 번째 선율을 엮던 손, 검은 유리의 전쟁에서 불타는 칼을 들던 손, 심연의 왕국에서 추락한 자들의 왕좌를 세우던 손. 그 손이 이제 작은 싹 하나를 꺾기 위해 내려왔다.

그는 줄기를 잡았다.

그 순간, 아무 빛도 터지지 않았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이렌이 검을 들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인간들은 잠들어 있었다. 창조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루아딘은 비웃었다.

"역시."

그가 줄기를 꺾으려 힘을 주었다.

그러나 싹은 꺾이지 않았다.

그것은 강해서가 아니었다. 줄기는 너무 약해서 힘을 주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손아귀 안에서 그것은 이상하게 빠져나갔다. 나무처럼 버틴 것이 아니라, 물처럼 붙잡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뿌리째 뽑으려 흙을 파고들었다. 흙은 차갑고 가난했다. 뿌리는 아직 실보다 가늘었다. 그러나 그 실 같은 뿌리는 땅속 어디론가 이어져 있었다.

루아딘은 더 깊이 손을 넣었다.

그는 뿌리의 끝을 찾으려 했다. 작은 싹의 뿌리는 당연히 가까운 곳에서 끝나야 했다. 그러나 손을 넣을수록, 그는 흙 아래에서 다른 것들을 만졌다. 서하의 피 한 방울. 마루가 떨어뜨린 물. 나율의 찢어진 옷자락에서 풀린 실. 아란이 낮게 놓은 돌의 그림자. 이마가 바람을 막기 위해 꿇었던 무릎의 온기. 루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의 숨.

그는 깨달았다. 이 싹은 씨앗 하나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씨앗 하나에서 나왔으나, 그 씨앗은 이제 홀로 있지 않았다. 기다린 자들의 행위가 그 둘레에 보이지 않는 흙을 만들었다. 한 방울의 물, 고백 뒤의 침묵, 던지지 않은 돌, 먼저 마시지 않은 입술, 원수에게 건넨 그릇, 아이의 어설픈 기도. 이런 것들은 힘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뿌리가 붙잡을 수 있는 깊이를 만들고 있었다.

루아딘은 분노하여 어둠을 불러냈다. 그의 뒤에서 검은 바람이 일어났다. 싹 둘레의 작은 돌들이 흔들렸다. 불씨가 꺼지고, 멀리 잠든 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의 구름이 낮아졌다.

그때 누군가가 깨어났다.

마루였다.

아이는 잠결에 밖으로 나왔다. 루아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인간의 눈은 아직 그런 어둠을 온전히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는 싹 쪽으로 가는 검은 바람을 느꼈다. 그는 겁에 질렸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달려가 작은 몸으로 돌 울타리 앞을 막았다.

"안 돼."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바람 소리에 묻힐 만했다.

그러나 루아딘은 들었다.

그는 아이를 보았다. 이 작은 흙의 딸이 무엇을 안다고 막는가. 그는 한 걸음 다가갔다. 아이의 몸은 떨렸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 돼."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그 소리에 나율이 깨어났다. 이어 서하가 일어났다. 이마가, 아란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마루가 싹 앞에서 울고 있고, 차가운 바람이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친다는 것만 보았다.

서하는 달려가 마루를 안았다. 나율은 겉옷을 벗어 싹 위쪽 바람을 막았다. 아란은 돌들이 흩어지지 않게 양손으로 눌렀고, 이마는 빈 그릇에 남아 있던 물을 들고 와 흙 위에 부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루아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정확히 그를 가로막았다.

루아딘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이 약속은 물건이 아니었다. 싹 하나를 부순다고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제된 기적도 아니었고, 인간의 공로로 세운 탑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다림 속에 놓인 가능성이었다. 누군가 자유롭게 물을 주고, 누군가 자유롭게 막아서고, 누군가 자유롭게 돌을 낮추어 놓을 때마다 다시 몸을 얻는 약속이었다.

그는 그것을 미워했다.

힘으로 부술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그를 모욕했다.

"너희는 다시 실패할 것이다."

루아딘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이번에는 몇몇 사람이 희미하게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서하의 얼굴이 굳었다. 나율은 마루를 더 꼭 안았다.

"너희의 아이들은 또 싸울 것이다. 물은 또 모자랄 것이다. 사랑은 또 소유가 되고, 기억은 또 자랑이 되며, 규칙은 또 칼이 될 것이다. 이 작은 잎이 너희를 구하지 못한다."

서하는 어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차분했다.

"우리는 다시 실패할지도 모른다."

루아딘은 그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인간은 보통 반박하거나 무너졌다. 그러나 서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것을 지키겠다."

나율이 그의 곁에 섰다.

"오늘은 물을 나누겠다."

이마가 말했다.

"오늘은 죽은 아이의 이름으로 산 아이를 버리지 않겠다."

아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늘은 길을 숨기지 않겠다."

그들의 말은 위대한 맹세처럼 울리지 않았다. 짧고 서툴렀다. 내일을 모두 책임지겠다는 오만도 없었다. 다만 오늘 하나의 선택을 하겠다는 낮은 결심이었다.

그 낮음이 루아딘을 더 견디기 어렵게 했다.

높은 탑은 무너뜨리기 쉽다. 왕좌는 빼앗기 쉽다. 그러나 낮게 엎드린 사람들의 오늘은, 매번 새로 선택되어야 하므로 한 번에 정복할 수 없었다.

루아딘은 검은 바람을 거두었다. 새벽의 첫빛이 구름의 가장 얇은 부분을 밀었다. 빛은 약했다. 그러나 어둠이 자기 이름을 잃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사라지기 전, 서하는 어둠 속에서 한때 아름다웠던 얼굴의 윤곽을 본 듯했다. 분노와 슬픔이 너무 오래 엉겨 붙어, 이제 스스로도 풀 수 없게 된 얼굴이었다.

서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아직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미움만으로는 그 얼굴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다.

루아딘은 그 느낌까지도 증오하며 물러났다.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바람이 잦아든 뒤, 사람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싹은 살아 있었다. 잎 끝이 조금 찢어졌고, 줄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졌지만, 뿌리는 땅에 남아 있었다. 나율은 손바닥으로 바람을 막은 채 울고 있었다. 마루는 자신이 무엇을 막았는지 다 알지 못하면서도, 큰일을 겪은 아이처럼 서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마는 빈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물은 모두 흙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그 빈 그릇을 보다가 루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릇을 다시 무덤 앞에 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무덤 앞에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울었다.

아란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직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가 그날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해가 조금 더 올라왔을 때, 싹의 찢어진 잎 위에 빛이 닿았다. 그 빛은 상처를 없애지 않았다. 찢어진 자리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가장자리를 투명하게 비추었다. 상처도 빛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날 처음 본 듯했다.

서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열린 틈은 좁았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는 답을 요구했을 것이다. 왜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했느냐고. 왜 막지 않았느냐고. 왜 잃은 뒤에야 작은 싹을 보이느냐고.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질문의 날이 조금 무뎌졌다.

그는 생각했다. 침묵은 늘 빈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침묵은 도망친 자의 등이고, 어떤 침묵은 무관심한 하늘의 닫힌 문일 수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침묵은 누군가의 선택을 빼앗지 않으려는 오래 참음일 수 있다. 답을 대신 살아 주지 않기 위해 물러나 있는 손. 강제로 무릎 꿇리지 않고, 스스로 몸을 낮출 때까지 기다리는 깊은 인내.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서하는 이제 확신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만으로도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 움직였다.

그날 밤, 그는 다시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 오래전의 기억이 찾아왔다. 정원을 떠나던 날이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돌아보았던 순간. 닫혀 가는 빛의 문 앞에서,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율이 품에 씨앗을 넣고 있었다. 그는 왜 그런 것을 가져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슬픔이 너무 커서 작은 행동을 볼 수 없었다.

이제야 그는 보았다.

그날, 좋은 목소리는 그들을 붙잡아 정원 안에 가두지 않았다. 죄를 없던 것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길을 막지도, 바깥의 고통을 지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빈손으로 보내지도 않았다. 씨앗은 명령이 아니었다. 보증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심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고, 굶주림 속에 먹어 버릴 수도 있는 것.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작고 단단한 미래.

그 미래가 이제 척박한 땅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서하는 깨어나 나율을 보았다. 나율도 깨어 있었다.

"당신도 잠을 못 잤어요?" 그가 물었다.

나율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두렵지 않아서요."

"두렵지 않다고?"

"아니, 두려움은 있어요. 물도 모자라고, 아이들은 약하고, 저 싹은 너무 작아요. 그런데……"

나율은 말을 찾았다.

"두려움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서하는 그 말을 마음속에 오래 놓아두었다. 두려움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낙원을 되찾았다는 말보다 더 인간적인 희망이었다. 두려움이 사라진 세계가 아니라, 두려움 옆에 다른 것이 함께 앉는 세계.

아침이 오자 사람들은 싹 곁에 모였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왔다. 한 사람은 작은 가지들을 엮어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한 사람은 물을 담을 얕은 홈을 팠다. 한 사람은 아이들에게 그 근처에서 뛰지 말라고 가르쳤다. 마루는 루의 무덤 앞 빈 그릇을 닦았다. 아란은 북쪽 길로 떠나기 전 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마는 한참 뒤에야 말했다.

"이 나무가 자라면, 그늘이 생기겠지."

"아직 나무도 아닙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마는 싹을 보았다.

"그래서 더 잘 보아야 한다."

그 말은 사람들 사이에 남았다.

그날부터 그들은 싹을 루의 나무라고 부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렇게 부르고 싶어 했다. 죽은 아이의 이름을 붙이면 슬픔이 조금 덜 외로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마가 고개를 저었다.

"루는 루로 기억하자. 이 싹은 우리에게 온 것이니, 아직 이름을 서두르지 말자."

서하는 그 말에 깊이 동의했다. 이름을 서두르는 것은 때로 소유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들은 싹이 무엇이 될지 아직 알지 못했다. 열매 맺는 나무가 될지, 키 작은 덤불이 될지, 첫 폭풍에 쓰러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이 더 이상 저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른다는 것은 기다릴 자리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겨진 약속

며칠 뒤, 이렌은 먼 언덕 위에서 그들을 보았다.

그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의 발 아래 새벽빛이 얇게 고였지만, 인간들의 눈에는 닿지 않았다. 그는 서하가 싹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율이 아이들에게 물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이마가 무덤 앞 빈 그릇을 닦고, 아란이 북쪽 길의 날카로운 돌을 치우는 것을 보았다. 모두 작은 일들이었다. 천상의 회의에서 논할 만한 장엄한 사건도 아니고, 별들의 운행을 바꿀 만한 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렌은 알았다. 세계는 때때로 이런 작은 일들 위에서 방향을 바꾼다.

그의 곁에 낮은 빛 하나가 머물렀다. 오래전 전쟁에서 상처 입은 동료였다. 그가 물었다.

"왜 말해 주지 않습니까?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말로. 저들은 아직 너무 어립니다."

이렌은 인간들의 마을을 바라보았다.

"어리기 때문에 말해 줄 수 없는 것도 있다."

"침묵이 그들을 더 아프게 합니다."

"그렇다."

이렌의 대답에는 변명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답을 우리가 들려주면, 그들의 선은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들은 명령을 수행한 자가 될 뿐, 사랑한 자가 되지 못한다."

낮은 빛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이렌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창조자의 침묵은 천사들에게도 쉬운 신비가 아니었다. 그들도 때로 답을 원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한마디로 막을 수는 없었는지, 루아딘이 처음 질문했을 때 더 밝은 설명을 줄 수는 없었는지, 인간이 거울의 샘 앞에 섰을 때 손을 뻗어 돌이킬 수는 없었는지.

그러나 이렌은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랑은 강제로 실패를 막는 힘만이 아니었다. 사랑은 실패한 자가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 두는 힘이기도 했다. 그 자리는 너무 넓어 보일 때가 있었다. 그 넓이 안에서 죄가 자라고, 죽음이 들어오고, 아이가 묻혔다. 이렌은 그 사실 앞에서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저 아래, 작은 싹이 있었다.

강제되지 않은 손들이 그 둘레에 모여 있었다.

이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보낸 인사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깊이를 향한 경외였다. 침묵 속에서 일하는 손, 손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넓고 오래된 뜻, 부재처럼 보이면서도 자유가 죽지 않도록 기다리는 인내를 향한 것이었다.

그때 바람이 언덕을 지나 마을로 내려갔다.

서하는 싹 곁에서 그 바람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오래전 꿈속의 빈손이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그 손에 명령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흙이 묻고, 상처가 남고, 완전하지 않은 손.

그 손으로 그는 싹 둘레의 흙을 아주 조금 다독였다.

"오늘도 여기 있구나."

그가 말했다.

그 말은 싹에게 한 말이었고,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고, 어쩌면 침묵하는 하늘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루의 무덤 곁에서 식사를 나누었다. 예전 같으면 무덤 가까이에서 먹는 일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죽은 자를 잊기 위해 먹지 않았고, 죽은 자 곁에서 살아 있음을 모욕처럼 느끼지도 않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먹었다. 아이들이 먼저 받았다. 이마는 마루의 그릇에 조금 더 담아 주었다. 마루는 그것을 보다가 자기 몫의 작은 조각을 루의 빈 그릇 옆에 놓으려 했다.

이마가 아이의 손을 막았다.

"그는 먹지 못한다."

마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마는 그 조각을 다시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니 네가 먹고 기억해라."

마루는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먹었다. 그것은 작은 일이었으나, 서하는 그 장면에서 어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죽은 이를 위해 산 자가 굶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살아서 죽은 이를 기억하는 법. 그것도 회복의 한 모습이었다.

밤이 내려왔다.

별이 조금 보였다. 아주 조금이었다. 구름 사이에 난 틈으로 몇 개의 빛이 떨렸다. 사람들은 불가에 둘러앉았다. 아무도 큰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율이 낮게 시작한 노래에, 아이 하나가 음을 얹고, 늙은 여인이 잊힌 가사를 더듬어 붙였다. 노래는 자주 끊겼다. 어떤 음은 맞지 않았다. 그래도 노래는 이어졌다.

서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싹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싹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낮은 돌 울타리와 작은 바람막이만 희미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땅속에서는 뿌리가 아주 느리게 길을 찾고 있을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위로 자라기 위한 첫 번째 순종인 것처럼.

그는 문득 창조자의 침묵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떨어지는 대답이 아니라, 아래에서 뿌리가 길을 찾도록 허락하는 침묵. 서두르지 않는 침묵. 그러나 결코 잊지 않는 침묵.

그 생각이 참인지 아닌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밤, 서하는 처음으로 알지 못함 속에서도 잠들 수 있었다.

멀리 심연의 어둠에서 루아딘은 그 노래를 들었다. 그는 그것을 비웃으려 했다. 그러나 노래가 너무 작아서 비웃음이 크게 울리지 않았다. 작은 것들은 때때로 조롱을 헛되게 만든다. 그는 왕좌에 앉아 손을 펼쳤다. 손가락 사이에 아직 흙이 묻어 있었다.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흙이었다.

그는 그 흙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그 말은 위협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 말은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둠의 선언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희망의 문장이기도 했다.

마을에서는 불씨가 낮게 남았다. 루의 빈 그릇에는 별빛이 조금 고였다. 싹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침묵의 손이 남긴 약속은 인간의 자유로운 손들을 기다리며 아주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책 목록

재의 정원에 부는 새벽

전체 목차 보기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

틸노트는 사용자가 AI를 활용해 노트를 쉽게 작성하거나 편집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AI 스퀘어 단톡방에 함께해요

AI 활용과 틸노트 사용 팁을 나누는 오픈채팅방입니다. 입장 비밀번호는 tilnote입니다.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