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가장 얇은 문
루아딘은 정원에 짐승의 발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도, 그럴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네룬의 깊은 홀에서 그는 여러 모습을 떠올렸다. 풀숲을 기어가는 검은 짐승, 나무껍질 속에 숨은 벌레, 밤의 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새, 혹은 안개 너머에서 두 눈만 빛나는 낯선 형상. 그런 모습들은 두려움을 만들기에 좋았다. 두려움은 문을 빠르게 연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열린 문은 오래 열려 있지 않는다. 겁먹은 마음은 도망치거나 도움을 부른다. 루아딘이 원하는 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자기 발로 문턱에 오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낮은 길을 택했다. 칼보다 가늘고, 손보다 부드러우며, 이름보다 먼저 귀에 닿는 길. 그는 꿈을 골랐다. 꿈은 외부에서 침입한 군대처럼 보이지 않는다. 꿈은 안에서 피어난 꽃처럼 느껴진다. 누가 그 씨앗을 놓았는지 알기 어렵다. 깨어 있는 동안 들었던 물소리, 낮에 말하지 못한 질문, 서로의 눈빛 사이에 남은 작은 서운함, 그런 것들이 밤이 되면 제멋대로 뿌리를 내린다. 루아딘은 바로 그 어둡고 따뜻한 흙을 기다렸다.
에나르의 두 번째 밤, 서하는 나율보다 늦게 잠들었다.
그날 그들은 정원의 남쪽을 걸었다. 남쪽에는 붉은 열매가 낮은 가지마다 무겁게 달려 있었고, 햇빛을 오래 받은 바위들은 손바닥을 대면 살아 있는 짐승의 등처럼 따뜻했다. 서하는 새로운 열매를 먼저 따고 싶어 했고, 나율은 처음 보는 잎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 했다. 둘은 자주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손을 놓는 일이 곧 잃어버리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러나 손을 놓을 때마다 서하의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작은 울림이 생겼다. 나율이 다른 꽃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그는 혼자 높은 가지에 올라 먼 안개를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율이 보지 않는 서하도 서하인가. 나율이 부르지 않는 동안에도 자기 이름은 자기 안에 남아 있는가.
그 생각은 아직 말이 되지 못했다.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은 밤에 더 쉽게 목소리를 얻는다.
잠든 나율은 큰 나무의 뿌리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숨은 고르고 따뜻했다. 서하는 그 숨을 듣다가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낮의 색들이 눈꺼풀 안쪽에서 어른거렸다. 붉은 열매, 흰 꽃, 물에 젖은 돌, 나율의 웃음. 그러다 색들이 천천히 물러가고, 어둠 한가운데에서 물소리만 남았다.
그 물소리는 흐르지 않았다.
고요한 물이었다. 거울의 샘이었다.
꿈속에서 서하는 샘가에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자기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꿈은 언제나 현재의 얼굴을 하고 온다. 샘 둘레의 나무들은 낮보다 높았고, 그늘은 더 깊었다. 별들이 물 위에 비쳤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서하는 혼자였다. 그 사실이 처음에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넓었다. 곁에 아무도 없으니 자기 숨소리가 크게 들렸고, 자기 발밑의 흙이 오직 자기 발만 받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낮은 잎사귀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물밑에서 올라오지도 않았다. 멀리서 명령처럼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서하의 가슴 안쪽,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방에서 들려왔다. 너무 가까워서 낯설지 않았다. 너무 닮아서 남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루아딘은 서하의 꿈속에서 서하의 목소리를 빌렸다.
"서하."
서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곳이 없었다.
"서하."
그는 자기 이름을 들으며 가슴을 만졌다. 나율이 부를 때의 이름은 바깥에서 와서 그를 감싸지만, 이 이름은 안에서 솟아 그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는 작게 대답했다.
"서하."
목소리가 웃었다. 그 웃음은 친절했다. 친절하지 않았다면 서하는 깨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 있었던 생각이 드디어 말을 배운 것처럼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너는 네 이름을 누구에게서 받았느냐?"
서하는 생각했다. 자기 입에서 처음 나왔고, 나율의 입에서 돌아왔다. 그러므로 대답은 하나가 아니었다.
"서하가 말했어. 나율이 불렀어."
"그렇다면 나율이 잠들면 너는 줄어드느냐?"
이 질문은 이상했다. 서하는 잠든 나율을 떠올렸다. 그녀가 잠든 동안에도 자기는 깨어 있었다. 물을 마실 수 있었고, 별을 볼 수 있었고, 마음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율이 깨어 자신을 바라볼 때와 같은 서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
"모른다는 것은 문이다."
목소리가 말했다.
"문?"
"알고 싶다는 뜻이니까."
서하는 샘을 바라보았다. 물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오래 바라보게 했다. 흐르는 물은 손을 넣으면 얼굴을 깨뜨렸지만, 이 물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한 번 본 것을 끝까지 붙들어 줄 것 같았다.
"너는 사랑받고 있느냐?"
목소리가 물었다.
서하는 곧장 대답하려 했다. 좋은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정원은 열매를 주었다. 나율은 그의 상처에 입김을 불어 주었다. 그는 사랑받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먼저 속삭였다.
"너라서 사랑받느냐,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기 때문에 사랑받느냐?"
그 순간 꿈의 공기가 조금 차가워졌다.
서하는 그 차가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질문은 칼처럼 찌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손처럼 그의 안쪽을 만졌다. 그러나 그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전에 없던 빈틈이 생겼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목소리는 모든 것을 주었고, 하나를 말렸다. 홀로 얼굴을 비추지 말라. 왜였는가. 그들의 얼굴은 혼자 알도록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따뜻했다. 그런데 지금 꿈속에서 다시 들으니, 그 따뜻함 아래 아주 얇은 그늘이 생겼다.
혹시 사랑은 문을 주면서 동시에 자물쇠를 주는 것인가.
혹시 순종은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첫 말인가.
서하는 그 생각에 놀랐다. 생각이 자기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는 누가 자신을 밀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손목을 잡고 샘으로 끌지 않았다. 물은 가만히 있었고, 목소리는 속삭였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발은 샘 쪽으로 조금 가까워졌다.
"보아라."
목소리가 말했다.
"혼자?"
서하가 물었다. 그 말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있었다.
"혼자라는 말이 왜 두렵지?"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혼자 있는 것이 나쁘다면, 너는 너로 있는 동안에도 나쁜 것이냐? 나율이 곁에 없을 때 네 숨은 허락받지 못한 숨이냐? 네 안에서 태어나는 생각들은 모두 누군가의 눈을 지나야만 살아도 되는 것이냐?"
질문들은 서로를 밀며 들어왔다. 어느 하나도 완전히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위험했다. 서하는 자기 가슴을 두 손으로 눌렀다. 그 안에서 작은 새가 날개를 치는 것 같았다.
"나는…… 서하."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 너는 서하다. 이제 네가 네 입으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꿈속에서 서하는 물 위로 몸을 숙였다.
그러나 얼굴이 닿기 직전, 나율이 잠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하……"
꿈의 샘이 흔들렸다. 목소리가 멀어졌다. 서하는 눈을 떴다. 밤은 아직 나무 사이에 남아 있었고, 나율은 그의 곁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서하의 팔에 닿아 있었다. 그 작은 온기가 꿈의 물보다 강했다. 서하는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이렌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루아딘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밤의 공기가 아주 잠깐 네룬의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칼을 떠올렸고, 곧 칼을 잊으려 애썼다. 꿈의 문은 바깥에서 부순 문이 아니었다. 안쪽에서 흐려진 문이었다. 그는 서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질문을 지울 수 없었다. 질문을 지우는 일은 위험을 막을 수는 있어도, 인간을 작게 만들 것이다.
이렌은 서하의 잠 깬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아직 죄가 없었다. 다만 전에는 없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늘 악한 것은 아니다. 빛을 받는 모든 것은 그림자를 갖는다. 그러나 그 밤 서하의 그림자는 자기 발밑이 아니라 자기 눈 안쪽에서 처음 생겨났다.

사랑받는 것과 만들어진 것
아침이 왔지만 서하는 곧장 웃지 않았다.
나율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말이 많지 않은 아침도 있고, 물을 마시기 전까지 몸이 무거운 아침도 있다는 것을 이미 배웠다. 그러나 서하의 침묵은 그런 것과 달랐다. 그는 자꾸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등, 손바닥, 손가락의 마디, 손톱 밑에 낀 흙. 마치 자기 손이 자기 것인지 처음 확인하는 사람처럼 오래 들여다보았다.
나율이 다가와 물었다.
"서하 아파?"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아."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생각…… 있어."
생각이라는 말은 전날 낮에 태어났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몸 안에서도 무언가 걸어 다닌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생각이라 불렀다. 생각은 손으로 잡을 수 없었으나, 입으로 부르면 조금 선명해졌다.
나율은 그의 곁에 앉았다.
"말해."
그 말은 예전 같으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하는 처음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작은 충격이었다. 말이란 서로에게 가는 길이라고만 여겼는데, 어떤 말은 길이 되기 전에 자기 안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생각을 숨기려는 자신에게 다시 놀랐다.
"나율."
"응."
"우리는…… 사랑?"
나율은 웃으려다 멈추었다. 서하가 장난처럼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손으로 정원을 가리켰다.
"물 줘. 나무 줘. 좋은 것 있어. 나율, 서하 좋아. 서하, 나율 좋아."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든 것은 참이었다. 참인데도 그의 안쪽에서는 다른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좋게 하면 사랑? 우리가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 사랑?"
나율의 얼굴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거울의 샘을 떠올렸다. 홀로 얼굴을 비추지 말라던 목소리. 함께 보아도 좋다고 했던 대답. 그녀는 그때 그 말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좋은 것이 말했어."
나율이 말했다.
"우리를 가두려고 아니야. 우리를 함께 두려고."
"함께 좋은 것."
서하가 말했다.
"그런데 서하 혼자 있으면? 나율이 자면? 서하 생각 혼자 있으면?"
나율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이미 혼자 있는 순간을 알았다. 서하가 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따려고 애쓸 때, 그녀는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며 다른 세계를 보았다. 풀잎의 뒷면, 개미들이 흙 속으로 사라지는 길, 자기 손목에 얹힌 햇빛. 그때 그녀는 서하 없이도 무언가를 알았다. 그리고 그 앎을 나중에 서하에게 말하고 싶었다. 혼자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에게 가져갈 것을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울의 샘 앞에서 말해진 홀로는 달랐다. 그 홀로에는 돌아올 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있었다.
나율은 조심스럽게 서하의 손을 잡았다.
"혼자 생각해도, 돌아와 말해. 그러면 함께 돼."
서하는 그 말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동시에 부족하다고 느꼈다. 부족하다고 느낀 자기 마음이 부끄러웠다. 나율의 손은 따뜻했고, 그의 마음은 그 손을 사랑했다. 그런데 마음의 한쪽은 자꾸 손이 닿지 않는 방을 원했다. 그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다.
그는 나율의 손을 놓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주 작은 손 하나를 빼냈다.
"나율."
"응."
"우리는 만들어졌어?"
나율은 하늘을 보았다. 만들어졌다는 말은 아직 무거웠다. 그들은 흙에서 깨어났고, 숨을 받았으며, 이름을 서로에게서 들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응. 흙에서. 숨으로."
"그럼 우리는 우리 것 아니야?"
이 질문은 아침의 빛을 잠시 얇게 만들었다.
나율은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무서운 말을 했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깊은 물가에서 자기 발이 닿지 않는 곳을 발견한 듯 보였다. 그녀는 그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도 물속을 보고 있었다.
우리 것.
그 말은 처음이었다. 우리라는 말은 함께의 따뜻한 집이었다. 그런데 서하가 말한 우리 것은 그 집의 문에 빗장을 거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율은 긴 침묵 끝에 말했다.
"서하, 나율…… 선물."
"선물?"
"응. 받은 것. 그런데 받은 뒤에…… 안고 있어. 그래서 우리."
서하는 생각했다. 열매도 받으면 손에 쥘 수 있다. 물은 받으려 해도 흘러나간다. 이름은 받으면 다른 이가 불러야 다시 따뜻해진다. 자신은 어느 것과 닮았을까. 열매인가. 물인가. 이름인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정원의 새들은 여전히 노래했다. 짐승들은 물가로 내려왔고, 바람은 풀밭을 지나며 익은 향기를 옮겼다. 에나르는 겉으로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서하와 나율 사이에는 처음으로 질문 하나가 앉았다. 그것은 작은 짐승처럼 조용했다. 공격하지도 않고,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둘이 말을 멈출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사랑받는 존재인가.
순종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인가.
이 두 질문은 서로 원수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같은 어둠의 두 눈이었다. 서하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다.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나율
나율은 서하를 지키고 싶었다.
지킨다는 말도 그날 태어났다. 높은 가지에서 떨어질 뻔한 작은 새를 그녀가 두 손으로 받아 풀숲에 놓아 주었을 때, 서하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나율 뭐 해?"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켜." 그 말은 손바닥의 모양을 닮았다. 감싸되 부수지 않는 모양. 붙들되 삼키지 않는 모양.
그날 이후 나율은 서하의 얼굴에서 꿈의 그늘을 볼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다. 지켜. 그러나 사람을 지키는 일은 작은 새를 손에 받는 일과 달랐다. 새는 날개가 마르면 날아갔다. 서하는 곁에 있으면서도 마음의 어딘가로 자꾸 걸어갔다.
나율은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안에도 다른 방향의 길이 있었다.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낮은 안개가 늘 둘러 있었다. 첫날에는 그것이 하늘이 땅에 내려와 쉬는 것처럼 보였고, 둘째 날에는 부드러운 울타리처럼 보였다. 셋째 날이 되자 나율은 안개 너머가 궁금해졌다. 안개는 막지 않았다.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젖어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을 들여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길이 아니라는 것을 몸이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주 그곳을 바라보았다.
서하가 물가에서 돌을 쌓고 있을 때, 나율은 북쪽의 안개 가까이 갔다. 그곳에는 키 낮은 꽃들이 있었다. 꽃잎은 희고, 가운데는 아주 옅은 푸른빛이었다. 그녀는 꽃을 만지려다 멈추었다. 안개 너머에서 바람이 왔다. 정원 안의 바람과 조금 달랐다. 더 넓고, 더 비어 있었으며, 아직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냄새를 품고 있었다.
나율의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
그녀는 뒤돌아 서하를 보았다. 서하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돌 하나를 다른 돌 위에 올려 균형을 맞추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나율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동시에 답답했다. 왜 세계는 저 돌들이 닿는 곳에서 끝나야 하는가. 왜 정원은 아름답기 때문에 충분해야 하는가. 아름다운 것 안에 살면서도 그 너머를 궁금해하는 마음은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인가.
그녀는 안개를 향해 속삭였다.
"너머."
말이 입에서 나오자 너머는 더 선명해졌다. 말은 없는 것을 만들지는 않지만, 흐릿한 것을 부른다. 나율은 그 말이 두렵고 좋았다.
그때 뒤에서 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율."
그녀는 놀라 돌아섰다. 서하는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있었다. 나율은 자신이 들킨 것처럼 느꼈다. 무엇을 들킨 것인지는 몰랐다.
"나율, 어디 가?"
"안 가."
그녀는 곧장 대답했다. 대답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서하는 안개를 보았다.
"너머 보고 싶어?"
나율은 그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거짓말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마음과 입이 다른 방향으로 걷는 느낌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율은 그의 침묵을 두려워했다.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볼까 봐. 좋은 것의 말을 잊은 존재처럼 볼까 봐. 그러나 서하의 눈에는 꾸짖음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 질문을 알아보는 빛이 있었다.
"서하도."
그가 말했다.
나율은 숨을 들이켰다.
"샘?"
서하는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대답보다 뚜렷했다.
나율은 그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서하, 혼자 안 돼."
"왜?"
그 질문은 그를 아프게 할 생각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율은 아팠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안개 앞에서 같은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왜 안 되는가. 왜 아직 아닌가. 왜 좋은 것은 기다리라고 하는가. 기다림은 사랑의 모양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갇힘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대답을 찾았다. 정원은 조용했다. 좋은 목소리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이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침묵을 들었다. 그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매번 그랬듯, 그의 사랑은 말의 문턱에서 멈추어야 했다.
나율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작은 진실을 말했다.
"혼자 가면…… 나율이 서하를 못 불러."
서하는 그녀를 보았다.
"부르면 들으면 돼."
"아니."
나율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마음은 알고 있었다.
"샘에서 혼자 보면, 서하가 서하만 들을까 봐."
서하는 그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화라는 말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 씨앗은 잠시 그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는 그것을 삼켰다. 나율이 자신을 작게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자기 목소리만 들으면 돌아오지 못할 존재라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았다. 나율의 두려움은 사랑에서 나왔다. 사랑에서 나온 말도 때로는 사슬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 배웠다.
나율은 그의 표정을 보고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나도 알고 싶어."
서하는 눈을 들었다.
"나율도?"
"응. 안개 너머. 샘 깊이. 좋은 것이 왜 말했는지. 다 알고 싶어. 그런데……"
그녀는 말을 찾았다.
"같이 알고 싶어."
서하는 고개를 숙였다.
같이 알고 싶다는 말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꿈속 목소리는 다른 말을 남겼다. 네가 네 입으로 알아야 한다. 나율의 눈을 지나지 않고, 좋은 목소리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자기 안의 방을 열어야 한다. 그 방이 정말 있다면, 그는 들어가 보고 싶었다.
이렌은 그들의 곁에서 나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는 나율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그녀를 축복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서하의 침묵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지도 보았다. 사랑의 말은 모든 유혹을 한 번에 이기지 못한다. 때로 사랑은 씨앗을 심을 뿐이고, 그 씨앗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린다. 열매가 열리기 전에 폭풍이 오면, 씨앗은 아직 연약하다.
그날 저녁, 서하와 나율은 손을 잡고 거울의 샘 가까이를 지나갔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물을 보았다. 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것은 때때로 부르는 것보다 더 크게 부른다.
샘이 기다리는 방식
루아딘은 서두르지 않았다.
네룬의 왕좌에 앉은 그는 성급함이 얼마나 많은 일을 망치는지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그는 빠르게 외쳤고, 빠르게 칼을 들었으며, 빠르게 돌아갈 다리를 불태웠다. 그때 그는 속도를 용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추락한 뒤, 그는 더 느린 악이 더 깊이 들어간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서하의 마음에 한 번 속삭인 뒤 물러났다. 유혹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 명령이 된다. 명령이 되면 들키기 쉽다. 좋은 유혹은 상대가 스스로 다음 문장을 완성하게 해야 한다. 루아딘은 기다렸다. 서하가 낮 동안 자기 손을 바라보기를, 나율의 사랑을 고마워하면서도 그 사랑 안에서 작은 답답함을 느끼기를, 거울의 샘을 지나치면서도 지나쳤다는 사실을 오래 기억하기를.
검은 유리의 홀에서 사하르는 인내하지 못했다.
"왜 그들을 흔들지 않습니까? 꿈을 다시 보내십시오. 샘으로 끌어내십시오. 인간은 약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루아딘은 왕좌의 팔걸이를 천천히 쓸었다. 검은 유리는 그의 손끝에 어두운 광채를 돌려주었다. 그 속에서 그는 잠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보이는 얼굴은 고요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오래된 굶주림이 이를 갈고 있었다.
"약한 것은 세게 밀면 부서진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부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기 안의 문을 발견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하르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전쟁은 아직도 칼의 언어였다. 그러나 멜리온은 홀의 기둥 그늘에서 그 말을 듣고 몸을 떨었다. 그는 루아딘이 인간을 얼마나 정확히 보고 있는지 두려웠다. 루아딘의 말에는 악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찰이 있었다. 통찰은 선한 손에 있으면 치유가 되지만, 원한의 손에 들어가면 수술칼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멜리온은 낮게 물었다.
"그들이 질문한다고 해서 반드시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루아딘은 그를 보았다.
"물론이다. 질문은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그 길을 어둡게 만듭니까?"
루아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나갔다.
"나는 어둠을 만들지 않는다, 멜리온. 나는 그들이 보지 못한 그늘을 가리킬 뿐이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늘도 있지 않은가. 위의 성채는 그늘을 죄라 부르고 감추려 했다. 나는 그것에 이름을 준다."
멜리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에도 일부 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의 일부는 전체 거짓을 가장 잘 숨기는 옷이다.
루아딘은 다시 균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원의 맥박이 들려왔다. 서하의 잠, 나율의 걱정, 샘의 고요함, 안개 너머를 향한 호기심.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실처럼 느꼈다. 그리고 가장 가느다란 매듭을 골랐다.
그날 밤, 꿈은 서하에게 다시 오지 않았다.
대신 낮에 왔다.
정오의 빛이 가장 높이 올라 모든 그림자를 짧게 만들었을 때, 서하는 개울가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율은 멀지 않은 곳에서 익은 열매를 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직 완전한 노래는 아니었다. 몇 개의 말과 몇 개의 웃음, 그리고 말이 되지 못한 음들이 섞여 있었다. 서하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바로 그 좋아함 때문에 자신이 붙들려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개울물에 손을 넣었다. 흐르는 물은 손가락을 지나갔다. 물속의 얼굴은 또 깨졌다가 돌아왔다. 그는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 얼굴은 늘 깨진다. 나율이 보는 얼굴도 움직인다. 좋은 목소리가 아는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그 모든 얼굴들 아래에, 아무도 깨뜨리지 못하는 서하가 있을까.
그때 물소리 사이로 아주 낮은 말이 섞였다.
"있다."
서하는 놀라 주위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율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열매나무 쪽에서 들렸다.
"누구?"
그가 물었다.
대답은 밖에서 오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갑자기 선명한 모양을 얻은 것처럼, 말이 안에서 일어났다.
"너는 이미 묻고 있었다."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샘은 네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목소리가 말했다.
"얼굴 아니야?"
"흐르는 물도 얼굴을 보여 준다. 나율의 눈도 얼굴을 보여 준다. 그러나 거울의 샘은 더 깊은 것을 비춘다."
서하는 숨을 멈추었다.
"무엇?"
"네가 갖고 싶은 나라."
그 말은 서하에게 너무 크고 낯설었다. 나라라는 말은 아직 배운 적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뜻은 먼저 왔다. 자기 발이 닿는 곳, 자기 이름이 울리는 곳, 자기 말이 돌아오지 않고 곧장 이루어지는 곳. 나무가 그의 손짓을 기다리고, 물이 그의 목마름보다 먼저 고이고, 짐승들이 그의 눈빛을 보고 길을 비키는 곳. 그리고 나율조차 그를 바라보며 묻는 곳. 서하, 무엇을 원해?
그 상상은 두려웠다. 동시에 달콤했다.
"에나르…… 우리."
서하가 말했다.
"그렇다. 너희의 정원이다."
목소리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왔다.
"하지만 너희의 것이라는 말 안에서, 너의 자리는 어디에 있느냐? 함께라는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함께 안에서 너만의 중심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늘 나율과 나란히 서야만 너인가? 너는 좋은 목소리가 허락한 만큼만 넓어지는가?"
서하는 일어섰다. 가슴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만."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만이라는 말은 목소리를 향한 것인지, 자기 안에서 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멈추었다.
그 침묵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이제 질문들은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루아딘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깊은 유혹은 유혹자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말한다.
서하는 나율을 보았다. 그녀는 열매를 품에 안고 오고 있었다.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서 흩어졌다. 그녀는 서하를 보자 웃었다.
"서하, 먹어."
서하는 그 웃음에 마음이 무너질 뻔했다. 그는 달려가 그녀를 안고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있었다. 꿈의 목소리, 낮의 속삭임, 샘이 비춘다는 이상한 나라. 나율은 놀라겠지만 그의 손을 잡아 줄 것이다. 함께 생각하자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질문은 다시 작아질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가능성이 그를 멈추게 했다.
작아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마음의 어떤 것을 나율의 사랑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나율에게서 자신을 지키다니. 사랑하는 이의 손이 상처를 줄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손이 자기 안의 어둠을 너무 빨리 밝힐까 봐 두려운 마음. 그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미 따르고 있었다.
"나중에."
서하가 말했다.
나율은 멈추었다.
"서하?"
"물 보고 올게."
"같이 가."
나율이 곧장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급했다.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물."
그는 개울을 가리켰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물가에 있었다. 그러나 나율은 그의 말과 마음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을 느꼈다. 그 거리는 아직 너무 얇아 이름 붙일 수 없었지만, 발을 헛디디기에는 충분했다.
그날 오후, 서하는 나율 곁에 있었다. 열매를 먹고, 짐승의 새끼가 처음 걷는 것을 함께 보고, 바람에 떨어진 잎들을 모아 물 위에 띄웠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한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거울의 샘은 기다리고 있었다.
샘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얼굴로 기다렸다. 그것은 명령하지 않았다. 물은 언제나 그렇게 위험하다. 손을 뻗으라 하지 않으면서도, 손을 뻗으면 받아 준다.
자기만의 왕국
그날 저녁은 유난히 길었다.
해가 산 너머로 내려가면서도 빛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풀밭 위로 늘어났고, 짐승들은 하나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서하와 나율은 큰 나무 아래 앉았다. 나율은 낮에 모은 열매를 둘 사이에 놓았다. 서하는 하나를 집어 들었지만 먹지 않았다. 그는 열매의 붉은 껍질을 엄지로 문질렀다. 껍질 아래에는 달콤한 살이 있을 것이다. 손으로 누르면 쉽게 터질 것이다. 그는 갑자기 자기 마음도 그런 열매와 닮았다고 느꼈다. 겉은 온전하지만, 안쪽은 이미 익어 갈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율이 물었다.
"서하, 꿈?"
서하는 손을 멈추었다.
"무슨 꿈?"
"밤에. 서하 무서워했어."
"무섭지 않았어."
그 말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무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점이 문제였다. 꿈은 그를 끌어당겼다.
나율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하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얹었다. 서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여기 빨라."
서하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이 따뜻했다. 그는 그 손을 붙잡고 싶었다. 동시에 밀어내고 싶었다. 두 마음이 서로 부딪히자,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나율은 다 알아야 해?"
말이 나오자 둘 다 놀랐다.
나율의 눈이 커졌다. 서하는 곧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말은 공기 속에 놓였다. 말은 열매와 달라서 다시 가지에 붙일 수 없다.
나율은 아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아니."
그녀가 말했다.
그 한마디가 서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녀가 화를 내거나 붙잡았으면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율은 물러났다. 그 물러남 속에는 상처와 사랑이 함께 있었다.
"나율 다 몰라도 돼. 그런데 서하 멀어지면…… 나율 불러도 돼?"
서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졌다.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에게 기대지 않고 잠들었다. 아니, 잠들려 했다. 나율은 눈을 감았으나 쉽게 잠들지 못했다. 서하의 등은 가까이 있었지만, 그 사이에 낮에 태어난 말이 누워 있었다. 나율은 안개 너머를 떠올렸다. 자신도 알고 싶었다. 자신도 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서하를 막는 것은 그를 지키려는 마음뿐 아니라, 그가 먼저 알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 깨달음에 그녀는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질투라는 말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그 작은 어둠은 이미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숨을 쉬었다.
서하는 나율이 잠든 줄 알았다.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갔다. 잎들이 흔들렸다. 먼 물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지 않는 사랑은 때로 떠나려는 발을 더 무겁게 한다. 그러나 그 밤 서하의 발은 마침내 움직였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나율이 잠든 척한 눈꺼풀 아래에서 그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그녀는 그를 부르고 싶었다. 서하. 그 한마디면 그는 멈출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 안의 다른 마음이 속삭였다. 그가 무엇을 보는지 알고 싶다. 그가 돌아오면 물어볼 수 있다. 혹은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 따라가도 된다.
사랑은 그 순간에도 그를 붙잡고 싶었다. 호기심은 사랑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이렌은 서하가 일어서는 순간을 보았다.
그는 나무 사이에서 한 걸음 나왔다. 에나르의 밤이 그의 보이지 않는 형상 둘레에서 잠시 밝아졌다. 그는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율을 깨울 수 있었다. 샘가의 돌을 미끄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혹은 서하의 길에 사나운 짐승을 보내 두려움으로 되돌릴 수도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은 그가 싸운 어떤 전쟁보다 어려웠다. 그의 안에서 오래된 전사의 본능이 울부짖었다. 막아라. 지금 막아라. 그러나 더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랑이 말했다. 그가 자기 발로 걷지 못하게 하면, 돌아오는 길도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이렌은 손을 움켜쥐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서 빛이 흘렀다가 사라졌다.
서하는 샘으로 갔다.
거울의 샘은 밤에도 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맑아서 어둠까지 비추었다. 별들이 물 위에 있었고, 그 아래에는 별보다 더 깊은 빈 공간이 있었다. 샘가의 바위는 차가웠다. 서하는 발바닥의 차가움에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마지막 경고처럼 지나갔다.
그는 뒤돌아보았다.
나율은 보이지 않았다. 큰 나무의 그림자만 멀리 있었다. 정원은 넓었고, 그 넓음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완전히 혼자였다.
"서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는 놀라지 않았다. 목소리가 자기 안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루아딘은 그 이상 바라지 않았다.
"보아라."
서하는 물가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볼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물은 얼굴을 먼저 보여 주지 않았다. 샘의 표면이 깊어지더니, 그 안에서 정원이 다시 태어났다. 에나르였다. 그러나 지금의 에나르와 달랐다. 나무들은 더 높고 질서 있게 서 있었고, 물길은 더 곧게 흐르고 있었다. 짐승들은 서로를 밀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바람은 가지들을 한꺼번에 흔들어 하나의 소리를 냈다.
그 중심에 서하가 있었다.
물속의 서하는 지금보다 크지 않았다. 왕관도 쓰지 않았고, 손에 칼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그를 향해 있었다. 나무들은 그의 눈길이 닿는 쪽으로 꽃을 열었다. 열매들은 그가 배고프기 전에 익었다. 물은 그가 목마르기 전에 고였다. 새들은 그가 듣고 싶은 높이로 울었다. 심지어 빛도 그의 얼굴을 가장 먼저 찾아왔다.
그리고 나율이 있었다.
물속의 나율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멀었다. 그녀는 서하 곁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기보다 그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하가 말하면 그녀는 웃었고, 서하가 침묵하면 그녀도 침묵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물속의 나율은 다치지 않았으나 작아져 있었다.
서하는 숨을 들이켰다.
"이건…… 아니야."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샘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나율은 이렇게 아니야."
"그렇다. 이것은 나율이 아니다."
목소리는 또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더 깊은 곳을 가리켰다.
"이것은 네가 나율에게 바라는 모든 것 중, 네가 스스로 보지 못했던 한 조각이다."
서하는 물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샘은 외모를 비추지 않았다. 샘은 그의 마음속 가장 밝은 말 뒤에 숨어 있던 작은 왕좌를 비추었다. 함께라는 말 뒤에서 혼자 중심이 되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다는 말 뒤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고, 요구하지 않아도 채워지고, 부르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추악하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슬퍼 보였다. 오래 기다린 아이처럼, "나도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작은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서하는 그것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마음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기보다 먼저 연민을 느꼈다. 나도 나를 가지고 싶다. 나도 내 안에서 왕처럼 앉아 보고 싶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만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나 혼자서도 충분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 갈망이 물속에서 빛났다.
루아딘은 그 빛을 보며 네룬의 왕좌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서하에게 자기의 분노를 억지로 넣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아직 죄가 되지 않은 결핍들이 있었다. 사랑받고 싶음, 알려지고 싶음, 자기만의 자리를 갖고 싶음. 그 결핍들은 선의 품 안에서 자라면 기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홀로 오래 바라보면 왕국이 된다. 루아딘은 그 변화의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샘 속의 정원은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서하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모든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세계가 반응했다. 돌은 돌이 되었고, 물은 물이 되었고, 짐승들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자기 자리를 얻었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좋은 목소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비어 있으니 조용했고, 조용하니 넓었다.
서하는 그 넓음에 현기증을 느꼈다.
"이게 나?"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대답했다.
"이것은 네가 될 수도 있는 너다."
"좋은 것 없이?"
"좋은 것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율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네 안에도 중심이 있음을 알면 된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흙이 아니다. 너는 네 이름의 첫 주인이다."
첫 주인.
그 말이 서하의 가슴 안에서 오래 울렸다. 그는 자기 이름을 처음 말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나율이 불러 주었기 때문에 이름이 몸에 붙었다. 그 기억은 따뜻했다. 그러나 이제 다른 가능성이 생겼다. 내가 먼저였다면? 나율의 부름이 나를 완성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나를 확인했을 뿐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물속에서 그의 얼굴이 마침내 떠올랐다.
그 얼굴은 잘생기거나 못생기지 않았다. 외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얼굴은 서하를 바라보았다. 나율의 눈도 아니고, 흐르는 개울도 아니고, 좋은 목소리의 따뜻한 침묵도 아니었다. 서하가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낯설 만큼 차가웠고, 차가운 만큼 선명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앎은 빛처럼 오지 않았다. 그것은 어두운 새벽처럼 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데 모든 사물의 윤곽이 분명해지는 시간.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함께 있는 시간. 서하는 그 속에서 떨었다.
"나는……"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기다렸다.
"나는 서하."
이 말은 전에도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전에는 이름이 관계 속에서 울렸다. 나율이 부르고, 그가 대답하고, 정원이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이름이 물속에서 자기에게 돌아와 닫혔다. 원이 되었다. 그 원은 완전해 보였고, 그래서 위험했다.
샘 위로 아주 작은 파문이 번졌다.
그 파문은 정원을 흔들지 않았다. 나무는 쓰러지지 않았고, 별은 떨어지지 않았으며, 짐승들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세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서하 안에서는 처음으로 문 하나가 안쪽에서 닫혔다.
그 닫힘의 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 자신도 그것을 승리인지 상실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어두운 나의 탄생
서하는 오래 샘가에 있었다.
처음의 떨림이 지나가자 이상한 평온이 왔다. 그는 금지를 어겼다는 생각보다 무언가를 알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알게 된 자는 잠시 죄책감보다 앎의 빛에 눈이 멀기 쉽다. 특히 그 앎이 자신에 관한 것일 때 그렇다. 자기 안에 방이 있고, 그 방 한가운데 작은 왕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한동안 그 방의 어둠을 궁전처럼 착각한다.
서하는 물속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흐르는 개울에서는 얼굴을 깨뜨리는 놀이가 즐거웠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물속의 얼굴은 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증언이었다. 혹은 유혹이었다. 혹은 둘 다였다.
"왜 말하지 말랬어?"
그가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루아딘은 침묵을 주었다. 침묵은 상대가 자기 편의 대답을 만들게 하는 가장 능숙한 그릇이다.
서하는 스스로 대답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 강해서? 너무 위험해서? 좋은 것이 내가 이것을 보면 달라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율이 나를 붙잡는 눈으로는 이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함께 보면 이 왕국은 사라지기 때문에?
그 마지막 생각이 그를 아프게 했다.
함께 보면 사라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켜야 하는가 버려야 하는가. 서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본 것을 보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나율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혹은 깨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샘은 고요했다.
물속의 정원은 사라지고 다시 별들만 남았다. 서하의 얼굴도 더 이상 왕국을 품지 않은 듯 평범하게 비쳤다. 그러나 평범함은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얼굴인데, 이제 그는 그 얼굴 뒤의 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어섰다.
다리가 조금 떨렸다. 바위에서 내려오며 발을 헛디뎌 손바닥을 긁었다. 작은 상처가 생겼다. 피가 한 방울 맺혔다. 서하는 그 붉은 점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상처가 생기면 나율을 불렀을 것이다. 나율이 입김을 불어 주고, 아픔을 함께 가져가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손을 입 가까이 가져가 스스로 피를 핥았다. 피 맛은 낯설고 짰다.
이것도 나의 것.
그 생각이 지나갔다.
이렌은 샘가의 그림자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서하가 물을 보는 동안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샘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바로 그것이 슬펐다. 악은 언제나 거짓말만으로 오지 않는다. 때때로 그것은 아직 사랑 안에서 배워야 할 진실을 사랑 밖에서 먼저 보여 준다. 진실은 자리와 때를 잃으면 상처가 된다.
서하는 자기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는 언젠가 나율과 다른 자기의 경계를 배우고, 자기 마음의 방을 발견하고, 혼자 서는 법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 배움은 부름과 응답 사이에서, 감사와 신뢰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받은 기억 위에서 천천히 자랐어야 했다. 루아딘은 그 열매를 익기 전에 따게 했다. 익지 않은 열매도 열매이지만, 입안에서는 떫다.
이렌은 서하를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탓보다 더 깊은 슬픔이 있었다. 그는 자유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능성이 실제가 되는 순간, 지식은 아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 샘의 표면이 아주 잠깐 어두워졌다.
이렌은 고개를 들었다. 물 위에 네룬의 차가운 그림자가 스쳤다. 형상은 없었다. 짐승도, 괴물도, 날개 잃은 왕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서하의 꿈속 목소리와 같은 낮은 울림이 샘의 깊은 곳을 지나갔다.
이렌은 그것이 루아딘임을 알았다.
그는 칼을 뽑지 않았다. 대신 아주 낮게 말했다.
"너는 그에게 네 상처의 이름을 주었다."
대답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멀리 네룬에서 루아딘은 그 말을 들은 듯 눈을 떴다. 그는 잠시 이렌의 슬픔을 느꼈고, 그 슬픔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인간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뒤틀렸다. 그는 자신의 상처가 이름을 얻었다고 믿었다. 자기 자신. 이제 그 이름이 흙의 존재 안에서도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승리라 불렀다.
그러나 에나르에서는 아무 승리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서하가 큰 나무로 돌아왔을 때, 나율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앉아 있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어둠 속에서 그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잠이 없었다. 서하는 멈추었다. 둘 사이에 밤이 놓였다.
"서하."
나율이 불렀다.
그 이름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런데 서하는 그 따뜻함을 들으며 마음속의 작은 왕좌를 떠올렸다. 그 왕좌는 나율의 목소리 앞에서 흔들렸다. 그는 그것을 지키고 싶었다. 왜 지켜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나율."
그가 대답했다.
나율은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보았다.
"아파."
그녀가 말했다.
서하는 손을 뒤로 감추었다.
"작아."
"그래도 아파."
나율은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서하는 한순간 망설였다가 손을 내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상처 둘레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전처럼 입김을 불어 주려다, 그녀는 멈추었다.
"어디 갔어?"
서하는 샘 쪽을 보지 않으려 했다. 보지 않으려 할수록 그 방향이 더 선명해졌다.
"걸었어."
나율은 그 말을 들었다.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말 안에 빈곳이 있었다. 그녀는 그 빈곳을 느꼈다. 아직 거짓말이라는 말을 모르지만, 그 밤 나율은 거짓말이 생기기 전의 차가운 그림자를 처음 만졌다.
"샘?"
서하는 침묵했다.
침묵은 때로 대답을 감추지 못한다. 오히려 대답을 더 크게 만든다. 나율은 손을 놓았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서하는 그녀가 자신을 꾸짖을까 봐, 울까 봐, 좋은 목소리를 부를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나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혼자 봤어?"
서하는 입술을 열었다. 여러 대답이 올라왔다. 꿈이 불렀어. 나는 알고 싶었어. 샘은 나쁜 것 아니었어. 얼굴만 본 게 아니야. 나도 나를 알아야 해. 좋은 것이 왜 말렸는지 모르겠어. 나율도 너머 보고 싶잖아.
그 많은 말들 사이에서 가장 짧은 말이 나왔다.
"응."
나율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정원 어딘가에서 밤새 한 번도 울지 않던 새가 짧게 울었다. 소리는 곧 사라졌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고, 별들도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공기는 달라졌다. 함께라는 말이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처음으로 상처를 입었다.
나율은 눈을 떴다.
"뭐 봤어?"
그 질문에는 두 마음이 있었다. 하나는 서하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가 본 것을 함께 들으면, 늦게라도 함께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그녀 자신의 호기심이었다.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금지된 물은 정말 무엇을 비출까. 안개 너머처럼, 샘의 깊이도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서하는 그 두 마음을 모두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율에게도 자신과 닮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 사실은 그를 슬프게 하기보다 이상하게 안심시켰다. 혼자 어두운 것이 아니라면, 어둠도 함께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천천히 말했다.
"왕국."
나율은 그 말을 몰랐다.
"왕국?"
"내가…… 가운데 있는 곳."
나율은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하고 싶음 속에서 샘의 물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서하는 덧붙였다.
"나율도 있었어."
나율의 얼굴에 작은 희망이 스쳤다.
"나도?"
"응."
그다음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물속의 나율은 작아져 있었다.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서하는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그 왕국이 부서질까 봐 두려웠다. 또 말하면 나율이 다칠까 봐 두려웠다. 두 두려움은 서로 다른 듯했지만, 그의 입을 같은 방식으로 막았다.
"좋았어?"
나율이 물었다.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좋았다고 말하면 너무 가벼웠고, 나빴다고 말하면 거짓이었다. 아름다웠고 무서웠다. 넓었고 차가웠다. 자신을 크게 만들었고, 동시에 작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말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고개만 숙였다.
나율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거울의 샘이 서하의 얼굴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서하에게 또 하나의 얼굴을 주었다. 문제는 그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졌다.
"여기 서하."
서하는 눈을 들었다.
나율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도 서하."
그 말에 서하의 눈이 흔들렸다. 나율은 샘과 싸우려 했다. 물속의 얼굴보다 살아 있는 부름이 더 깊다는 것을 다시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도 전과 다른 떨림이 있었다. 그녀 자신도 이제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샘이 자기에게는 무엇을 보여 줄까. 자기만의 왕국은 어떤 모양일까. 서하의 왕국 안에서 작아지는 대신, 자기 중심의 세계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그녀는 그 질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질문은 자랐다.
돌아온 얼굴
새벽이 오기 전까지 둘은 잠들지 못했다.
그들은 큰 나무 아래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서로 기대지 않았다. 손은 가까웠으나 닿지 않았다. 닿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둘 다 손을 내밀면 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닿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에는 손을 잡으면 함께가 되었다. 이제는 손을 잡아도 말하지 않은 것들이 손바닥 사이에 남을 것 같았다.
정원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물은 계속 흘렀고, 바람은 밤의 차가움을 부드럽게 나누어 주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짐승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둘의 낯선 침묵을 느낀 듯 다시 풀숲으로 사라졌다. 별들은 여전히 많았다. 세상은 첫 불순종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더 슬펐다. 어떤 파괴는 너무 조용해서, 당장 아무도 폐허를 알아보지 못한다.
서하는 자기 안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율을 사랑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다칠까 봐 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사랑 안에 새로운 벽이 생겼다. 벽은 높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벽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달라지게 했다. 그는 이제 자기 안에 나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방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나율도 달라졌다.
그녀는 서하를 지키고 싶었다. 동시에 샘이 그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샘에서 멀리 데려가고 싶었다. 동시에 그의 손을 잡고 샘가로 돌아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사랑과 호기심이 그녀 안에서 서로의 이름을 빌렸다. 사랑은 말했다. 그를 이해하려면 보아야 한다. 호기심은 말했다. 그를 지키려면 알아야 한다.
이렌은 밤새 그들 곁에 있었다.
그는 이제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알았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끝이라는 말은 너무 쉽다. 인간의 마음은 한 번의 어둠으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서하는 샘을 보았으나 나율에게 돌아왔다. 나율은 상처 입었으나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 부름이 남아 있었다. 이름이 남아 있는 곳에는 길도 남아 있다.
그러나 길은 이제 이전처럼 평평하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나뭇잎의 가장자리가 어둠에서 분리되었고, 풀잎 끝의 이슬이 하나씩 빛을 받았다. 서하는 새벽을 보았다. 전날의 새벽과 같은 빛이었으나, 이제 그는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었다. 빛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는 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 빛은 나를 비추는가, 아니면 내가 빛 아래 놓이기를 요구하는가.
그 질문은 너무 피곤했다.
나율이 낮게 말했다.
"서하."
"응."
"오늘…… 샘 안 가."
그 말은 약속이면서 부탁이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가."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 순간에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방은 이미 샘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길을 한 번 걸은 발은 눈을 감고도 그 방향을 안다.
나율은 다시 말했다.
"안개도 안 가."
이번에는 서하가 그녀를 보았다. 나율의 눈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두려움도 있었다. 서하는 처음으로 그녀를 지키고 싶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지킴 속에는 조금 전 나율이 자신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상대를 지키려는 마음은 쉽게 상대를 감시하려는 마음과 닿는다.
"함께 있어."
서하가 말했다.
나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그 말은 전보다 무거워졌다. 처음 태어났을 때 함께는 물을 두 손으로 받치며 웃는 말이었다. 이제 함께는 서로의 어둠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 되었다. 말은 자라면서 무게를 얻는다. 어떤 무게는 축복이고, 어떤 무게는 슬픔이다.
해가 떠올랐다.
빛이 나율의 얼굴에 닿았다. 서하는 그녀를 보았다. 물속의 왕국에서 보았던 나율이 떠올랐다. 기다리던 얼굴, 작아진 얼굴. 그는 갑자기 견딜 수 없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율."
그녀가 그를 보았다.
"응."
그 살아 있는 대답이 물속의 모든 형상보다 따뜻했다. 서하는 잠시 구원받은 듯했다. 그러나 구원은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샘을 보았다. 자기만의 왕국을 보았다. 자기 자신을 자기 눈으로 본 어두운 기쁨을 기억했다.
그는 나율에게 가까이 앉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율은 망설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의 상처가 닿자 서하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나율은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 전처럼 입김을 불었다.
따뜻한 숨이 상처 위에 내려앉았다.
서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는 샘이 보여 주지 못한 것을 다시 느꼈다. 물속의 왕국에는 이런 입김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를 향해 있었지만, 아무것도 그와 함께 아프지 않았다. 그 왕국은 넓었으나 외로웠다.
그는 그 사실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말하면 왕국이 사라질까 봐. 말하지 않으면 나율이 멀어질까 봐. 두 두려움 사이에서 그는 침묵했다.
나율은 그 침묵을 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잠시 정원의 중심, 거울의 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서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렌은 보았다.
보이지 않는 안내자는 그 시선 하나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유혹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서하 안에만 있지 않았다. 질문은 나율의 눈에도 작고 어두운 씨앗을 남겼다. 씨앗은 아직 싹트지 않았다. 그러나 흙은 따뜻했고, 물은 가까웠으며, 빛은 모든 것을 자라게 한다. 선한 빛조차 어둠의 씨앗을 비추면, 그 씨앗은 자기 방식으로 자라려 한다.
멀리 네룬의 검은 유리 홀에서 루아딘은 웃지 않았다.
그는 너무 깊은 만족 앞에서 오히려 조용해졌다.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소란스럽다. 그러나 마음이 스스로 자기 문을 연 것을 본 자는 낮게 숨을 쉰다. 그는 서하를 넘어뜨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인간 안에 자기 자신이라는 방이 열렸음을 알았다. 이제 그 방에 무엇을 놓을지는 시간이 정할 것이다. 혹은 다음 속삭임이.
에나르의 아침은 아름다웠다.
꽃들은 피었고, 새들은 날았으며, 물은 어제와 같은 길로 흘렀다. 서하와 나율은 손을 잡고 개울가로 걸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첫날의 그들처럼 보였다. 흙 위에 두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고, 젖은 풀잎이 그들의 발목을 적셨다.
그러나 발자국 사이의 간격은 아주 조금 넓어져 있었다.
그 간격은 눈으로 재기 어려울 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질문 하나가 들어갈 수 있었다. 질문 하나가 들어간 곳에는 언젠가 선택도 들어갈 수 있다.
거울의 샘은 정원의 중심에서 고요히 빛났다. 그 물은 서하를 부르지 않았다. 나율을 부르지도 않았다. 샘은 그저 자신이 본 것을 잊지 않는 물처럼 가만히 있었다.
서하는 개울물을 마시며 샘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율은 서하의 손을 잡으며 샘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렌은 그들 뒤에서,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아니게 걸었다. 그의 침묵은 전날보다 무거웠다. 그러나 그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안의 어둠을 처음 본다고 해서 반드시 어둠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어둠을 본 자만이 빛을 새롭게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
그날 아침, 에나르에는 아무 심판도 내려오지 않았다. 하늘은 닫히지 않았고, 땅은 갈라지지 않았다. 첫 타락은 천둥보다 조용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물 위에 홀로 자기 얼굴을 숙인 순간, 자기 안에 작은 왕국이 있음을 알아버린 사건이었다.
죄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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