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봉투 개봉식
다음 날 밤 11시 58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세 개의 봉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금색 봉투, 은색 봉투, 흰색 봉투. 어젯밤엔 그것들이 그냥 봉투처럼 보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셋 다 아주 얌전한 얼굴로 내 인생을 물고 있는 짐승 같았다.
나는 먼저 공책을 펼쳤다.
어제 적은 여섯 문장이 그대로 있었다.
돈은 나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쓴다.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 쓰지 않는다.
과시하기 위한 지출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출을 구분한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선물보다 시간을 먼저 쓴다.
의심은 혼자 키우지 않고 확인한다. 믿음은 확인을 싫어하지 않는다.
도움은 상대와 함께 결정한다.
내 돈의 방향은 '사람이 다시 시작할 시간을 사는 일'에 둔다.
문장들은 어제보다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글씨는 그대로인데, 그 안에 민재의 국밥 냄새와 엄마의 김치통 무게와 윤서하의 조용한 충고가 들어간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은행 감사팀이었다.
"한도윤 고객님,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요청하신 조사 중간 결과가 나왔습니다."
나는 손바닥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말씀하세요."
"박민재 님 번호가 지인 연락처로 등록된 건 고객님 계좌에서 직접 등록된 기록이 아닙니다. 내부 상담 기록 일부가 외부 피싱 조직에 넘어간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김정훈 실장 때문입니까?"
"김정훈 실장이 관련 규정을 어기고 고객 정보를 사적으로 열람한 기록은 있습니다. 다만 실제 피싱 전화는 그 정보를 넘겨받은 외부 조직이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법적 절차와 수사가 함께 진행될 예정입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민재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웠다. 내 정보는 숫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름, 전화번호, 친구, 가족, 습관, 약점.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돈만 쫓는 게 아니었다. 돈 주변의 사람까지 더듬었다.
전화를 끊자 상태창이 떠올랐다.
최종 선택까지 남은 시간
00:01:12
나는 세 봉투를 보았다.
금색 봉투의 왕관 문양은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은색 봉투의 열쇠는 작지만 단단해 보였다. 흰색 봉투는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시끄러웠다.
상태창이 다시 떴다.
최종 선택 안내
A. 왕관: 돈을 더 큰 돈으로 불린다
B. 열쇠: 돈으로 가능성의 문을 연다
C. 빈 통장: 돈을 내려놓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주의: 어떤 엔딩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보상: 당신의 답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내가 혼자 보는 시험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내 옆에 앉은 누군가도 같이 선택하고 있을지 몰랐다. 부자가 된다면 무엇을 살지 상상하던 사람. 부자가 되면 아무 걱정 없을 거라고 믿던 사람. 부자가 되어도 여전히 밥 먹었냐는 말이 그리울지 궁금한 사람.
상태창의 마지막 줄이 깜빡였다.
어느 봉투를 여시겠습니까?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첫 번째 미래가 열렸다.

왕관 엔딩: 가장 높은 곳의 공기
금색 봉투를 열자, 안에서 얇은 카드 한 장이 나왔다.
카드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왕관은 머리 위에 얹는 것이 아니라, 목에 걸리는 무게다.
다음 순간, 방이 사라졌다.
나는 아주 높은 빌딩 꼭대기에 서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도로의 차들은 장난감처럼 작았고, 사람들은 점처럼 움직였다. 내 뒤에는 회의실이 있었다. 긴 테이블, 검은 정장, 태블릿, 그래프, 수익률, 인수합병, 해외 법인, 세금 전략, 리스크 관리.
그리고 내 이름이 적힌 명패.
한도윤 회장
나는 1000억을 지키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돈은 더 큰 돈을 불렀다. 좋은 투자 자문, 빠른 정보, 훌륭한 변호사, 공격적인 인수, 조용한 매각. 나는 잃지 않는 법을 배웠고, 이기는 법을 익혔다.
처음 1000억은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하지만 3000억이 되자 1000억은 출발선처럼 보였다.
7000억이 되자 3000억은 부족해 보였다.
1조가 가까워지자, 나는 돈을 세는 게 아니라 순위를 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왔다. 기자는 내 한마디를 기사 제목으로 만들었고, 사업가들은 내 고개 끄덕임을 기다렸다. 예전 아르카디아에서 나를 시험하던 사람들은 이제 내 표정을 살폈다. 백승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유태오는 내 앞에서 더 조심스럽게 웃었다.
왕관은 빛났다.
정말 빛났다.
나는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빌릴 수 있었고, 마음에 드는 건물을 사서 간판을 바꿀 수 있었고, 누군가의 회사 운명을 한 줄 계약서로 바꿀 수 있었다. 비행기는 줄을 서지 않았고, 식당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문은 내가 손대기 전에 열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말이 조금씩 비슷해졌다.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역시 안목이 다르십니다."
"그 결정이면 충분합니다."
처음엔 기분이 좋았다.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했다. 내가 틀렸을 때도 사람들은 맞다고 했다. 내가 무리한 결정을 해도 누군가는 그것을 '통 큰 전략'이라고 불렀다. 내가 누군가에게 서운해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조용히 밀어냈다.
왕관을 쓴 사람에게는 바른말이 늦게 도착했다.
혹은 영영 도착하지 않았다.
민재와는 여전히 만났다. 처음엔 치킨도 먹었다. 하지만 내가 바빠질수록 약속은 회의 사이 빈칸으로 밀렸다. 민재는 농담처럼 말했다.
"야, 너랑 치킨 먹으려면 비서님 승인 받아야 하냐?"
나는 웃으며 넘겼다.
"요즘 일정이 좀 많아서."
"부자 스케줄 무섭네."
"다음 주엔 꼭 보자."
다음 주는 자주 오지 않았다.
엄마 집에도 갔다. 물론 훨씬 좋은 집으로 이사시켜드렸다. 병원도, 여행도, 생활비도 부족하지 않게 해드렸다. 엄마는 고마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새집 거실에서 말했다.
"집은 참 좋은데, 네 방 냄새가 안 나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새집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큰 창, 좋은 가구, 자동 커튼, 공기청정기, 비싼 식탁. 그런데 내가 엎드려 만화책을 보던 낡은 방 냄새는 없었다.
왕관 엔딩의 빛은 분명했다.
나는 누구보다 강해졌다. 더 이상 돈 때문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무례를 참지 않아도 됐다. 세상은 내게 선택권을 주었고, 나는 그 선택권을 이용해 더 많은 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림자도 분명했다.
나는 점점 돈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돈의 성을 지키는 병사가 되어갔다. 내 하루는 숫자의 공격과 방어로 채워졌다. 수익률이 오르면 안도했고, 떨어지면 예민해졌다. 내가 웃는 날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래프 때문일 때가 많아졌다.
상태창이 떴다.
왕관 엔딩 달성
자산: 폭발적 증가
영향력: 최상
외로움: 측정 불가
위험: 당신이 돈을 소유하는지, 돈이 당신을 지휘하는지 구분이 어려움
나는 유리벽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비싼 정장, 좋은 시계, 흔들림 없는 표정.
그리고 아주 작게 피곤한 눈.
왕관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오래 쓰고 있으면,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눌렸다.
열쇠 엔딩: 문을 여는 사람
은색 봉투를 열자, 작은 열쇠 하나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진짜 열쇠였다. 차갑고, 가볍고, 어딘가 오래된 느낌이 났다.
열쇠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문은 대신 지나가줄 수 없다. 다만 잠긴 문을 열어줄 수는 있다.
다음 순간, 나는 낡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간판은 아직 없었다. 페인트 냄새가 났고, 1층 유리문에는 임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다시시작연구소
이름은 민재가 지었다.
처음에는 내가 반대했다. 너무 직설적이고, 약간 동네 학원 같다고 했다. 민재는 치킨 무를 씹으며 말했다.
"그래서 좋은 거야. 돈 없는 사람한테 제일 필요한 말이 뭔데?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말이지."
엄마는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기 쉽네."
윤서하는 사업계획서를 보며 말했다.
"촌스럽지만 정확하네요."
세 명이 다 같은 편이 되자 나는 졌다.
다시시작연구소는 처음부터 거창하지 않았다. 나는 1000억 중 일부를 떼어 안전한 구조를 만들었다. 전부 기부하지도 않았고, 전부 투자하지도 않았다. 무턱대고 착한 사람이 되려 하지 않았다. 윤서하의 말대로, 좋은 마음에도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연구소의 첫 번째 원칙은 간단했다.
돈을 그냥 뿌리지 않는다.
두 번째 원칙은 더 중요했다.
사람의 삶을 대신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학자금 때문에 꿈을 미루는 사람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실패한 창업자가 빚 때문에 다시 일어설 기회를 잃지 않도록 법률 상담과 생활비 완충 장치를 연결했다. 보호종료 청년에게 집 보증금만 던져주는 대신, 함께 살 동네와 일자리와 상담 창구를 찾았다. 예술가에게 작업실을 빌려주되, 작품의 방향을 간섭하지 않았다.
돈은 열쇠였다.
하지만 문을 여는 손은 언제나 그 사람의 것이어야 했다.
이 엔딩에서도 문제는 많았다.
신문은 나를 '젊은 기부왕'이라고 불렀다가, 어느 날은 '선의로 포장된 영향력 사업가'라고 불렀다. 인터넷 댓글은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진짜 멋지다.
세금 줄이려고 쇼하는 거 아님?
나도 지원해줘요.
왜 저 사람은 돕고 나는 안 도와줌?
처음에는 댓글 하나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 누구를 도우면 누구를 돕지 못했다. 하나의 문을 열면, 열지 못한 수백 개의 문이 보였다. 돈이 많아도 세상의 모든 잠금장치를 풀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 밤, 나는 연구소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지원 신청서가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탈락자 명단이 있었다. 명단이라는 말이 너무 차가워서, 나는 종이를 뒤집어놓았다.
상태창이 떴다.
열쇠 엔딩 중간 점검
도움을 받은 사람: 증가 중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 여전히 많음
죄책감: 과다
권장 행동: 신이 되려 하지 말 것
"시스템 말이 맞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
그때 문이 열리고 민재가 들어왔다. 손에는 치킨 봉투가 있었다.
"야, 부자야. 야근하는 얼굴이 너무 가난해서 치킨 사 왔다."
"내가 계산할게."
"아니. 오늘은 내가 샀어."
"왜?"
"가끔은 네가 도움받는 사람도 해야지."
나는 치킨 봉투를 보다가 웃었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 연구소에 왔다. 처음엔 걱정돼서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김밥을 싸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날 엄마는 지원자 한 명에게 말했다.
"도움받는다고 작아지는 거 아니야. 사람은 살다 보면 누구나 손잡을 때가 있어."
그 말은 어떤 강연보다 오래 남았다.
윤서하는 연구소의 구조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감정으로 모든 결정을 하지 않도록 기준을 세우고, 돈이 엉뚱한 곳으로 새지 않게 감시했다. 그녀는 가끔 내게 말했다.
"따뜻함은 시스템을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오래 가려면 시스템이 필요해요."
나는 그 말을 배웠다.
선의는 불꽃 같아서 사람을 밝힐 수 있지만, 관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꺼지거나 태워버린다. 오래 가는 따뜻함은 난로에 가까웠다. 적당한 거리, 안전한 구조, 꾸준한 연료가 필요했다.
열쇠 엔딩의 빛은 조용했다.
누군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메시지. 누군가 첫 월급을 받았다는 사진. 누군가 실패 후 다시 자기 가게 문을 열었다는 소식. 누군가가 "그때 숨 쉴 시간을 벌어주셔서 버텼다"고 말하는 순간.
그런 것들은 왕관처럼 번쩍이지 않았다.
대신 오래 따뜻했다.
물론 그림자도 있었다.
나는 때때로 지쳤다. 좋은 일을 한다는 이유로 더 많은 기대를 받았고, 한계를 말하면 차갑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도움을 당연하게 여겼고, 어떤 사람은 나를 이용하려 했다. 돈이 선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해서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여섯 문장을 다시 읽었다.
특히 마지막 문장.
내 돈의 방향은 '사람이 다시 시작할 시간을 사는 일'에 둔다.
나는 모든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에게는 시간을 건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시간을 건네는 동안 나도 조금씩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상태창이 떴다.
열쇠 엔딩 달성
자산: 관리 가능한 감소와 성장
관계: 깊어짐
책임: 증가
따뜻함: 꾸준히 발생
위험: 구원자 착각, 과로, 세상의 모든 문을 열고 싶어지는 병
나는 연구소 유리문에 열쇠를 꽂았다.
딸깍.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완벽한 세상이 있지 않았다.
다만 다시 시작해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빈 통장 엔딩: 숫자가 사라진 아침
흰색 봉투를 열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봉투 안쪽까지 흔들어보았다. 카드도, 열쇠도, 계약서도 없었다. 대신 봉투 안쪽 벽면에 아주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비워야 보이는 것도 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은행 앱 알림이었다.
나는 손가락이 굳은 채 화면을 열었다.
잔액: 0원.
아니, 정확히 말하면 1000억이 사라지고, 예전 월급 통장에 남아 있던 48만 2310원만 남아 있었다.
나는 한참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카드값 어떡하지?
상태창이 떴다.
빈 통장 엔딩 적용 완료
1000억 이벤트 종료
잔액: 현실적
심박수: 비현실적
"야!"
나는 허공에 소리쳤다.
"이건 좀 너무 갑작스럽잖아!"
사용자가 직접 선택했습니다
"내가 흰 봉투 열었지, 파산 신청서 쓴 건 아니잖아!"
빈 통장이라는 이름을 보고도 여셨습니다
책임 있는 선택을 응원합니다
진짜 얄미웠다.
나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방 안은 그대로였다. 비싼 정장 몇 벌, 며칠 전 충동적으로 산 물건들, 엄마가 준 김치, 공책, 민재와 찍은 오래된 사진. 1000억이 사라졌는데, 이상하게 방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아침이 되자 나는 은행에 전화했다. 은행은 내 1000억 계좌가 존재한 기록 자체가 없다고 했다. 김정훈 실장 조사? 그런 직원은 있지만, 내 자산 관련 사건은 없다고 했다. 아르카디아 초대장? 내 메일함에서 사라져 있었다. VIP 파티 사진? 없었다.
그런데 민재는 기억했다.
정확히는, 이상한 방식으로 기억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야, 나 어젯밤 꿈에 네가 부자였거든? 근데 너무 리얼해서 치킨값 받아야 할 것 같아."
나는 웃다가 울 뻔했다.
"민재야."
"왜 목소리가 그래? 진짜 망했냐?"
"조금."
"얼마 있는데?"
"48만 2310원."
"오, 구체적이라 슬프다."
"치킨은 다음 달에 먹자."
민재는 잠깐 조용하더니 말했다.
"야, 오늘은 내가 살게. 대신 너 무슨 일 있었는지 다 말해."
엄마에게도 갔다.
이번에는 진짜 빈손이었다. 엄마는 문을 열자마자 내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너 돈 잃었니?"
나는 신발도 벗기 전에 멈췄다.
"엄마는 어떻게 알아?"
"돈 잃은 얼굴이야."
"1000억 잃었어."
엄마는 3초 동안 나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밥 먹었어?"
나는 그 자리에서 웃음이 터졌다.
1000억이 사라져도 엄마의 첫 질문은 바뀌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살렸다.
빈 통장 엔딩의 해방감은 묘했다.
처음엔 공포였다. 다시 월세를 걱정해야 했고, 회사에 계속 다녀야 했고, 택시를 타기 전에 지하철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비싼 물건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은 금방 현실이 되었다.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삭제하는 손가락은 매우 빠르게 옛날 감각을 되찾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이상한 가벼움도 찾아왔다.
누가 내 돈을 노릴까 봐 겁내지 않아도 됐다. 누가 나를 돈 때문에 좋아하는지 의심하지 않아도 됐다. 갑자기 걸려오는 모르는 번호에 심장이 내려앉지 않았다. 내 이름 앞에 붙던 '1000억 자산가'라는 투명한 명찰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그냥 한도윤이었다.
물론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한번 1000억을 가져본 사람은 돈의 힘을 모른 척할 수 없다. 돈이 얼마나 많은 문을 여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꾸는지, 얼마나 쉽게 내 마음을 변명하게 만드는지 나는 봐버렸다.
그래서 나는 작은 버전의 여섯 문장을 만들었다.
돈은 1000억이 아니어도 방향이 필요했다.
월급날, 나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작은 자동이체를 걸었다. 누군가의 생활비를 해결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덜 무겁게 만들 수 있는 정도였다. 엄마에게는 큰집 대신 전화를 더 자주 했다. 민재에게는 돈 대신 시간을 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작은 열쇠를 하나 주었다.
다시 공부하기.
다시 일어서기.
다시 실패해도 끝이 아니라고 믿기.
상태창은 예전만큼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다.
빈 통장 엔딩 달성
자산: 원점에 가까움
불안: 현실적
자유: 예상보다 큼
남은 것: 경험, 관계, 여섯 문장
주의: 가난은 낭만이 아니며, 돈의 부재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추가 설명: 다만 당신은 이제 돈이 전부라는 거짓말에도 속지 않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맞다.
돈이 없는 삶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돈 때문에 포기하는 것들은 실제로 아프다. 병원비, 월세, 부모님 걱정, 미래 불안은 시가 아니라 영수증으로 온다.
하지만 빈 통장은 이상하게 내게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내가 돈을 잃어도 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돈이 있든 없든 나를 잃지 않는 일이었다.
세 결말 뒤에 남은 한 사람
세 개의 미래가 모두 지나간 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금색 봉투는 닫혀 있었다.
은색 봉투도 닫혀 있었다.
흰색 봉투도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나는 세 봉투를 모두 열어본 것 같았다. 왕관의 무게도, 열쇠의 온도도, 빈 통장의 서늘함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상태창이 조용히 떴다.
시뮬레이션 종료
세 엔딩 모두 가능
최종 선택은 사용자에게 귀속됩니다
"사용자?"
나는 피식 웃었다.
"나 말하는 거야, 아니면 지금 이 이야기를 보고 있는 사람 말하는 거야?"
상태창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답했다.
둘 다입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창밖에는 평범한 밤이 있었다. 누군가는 야근을 끝내고 집에 가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로또 번호를 확인하며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부자가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고, 누군가는 부자들이 다 나쁘다고 욕하고, 누군가는 돈 얘기를 피하면서도 사실은 매일 돈 때문에 마음을 접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어느 날 갑자기 통장에 1000억이 찍힌 사람.
처음엔 flex를 꿈꿨고, 그다음엔 숨으려 했고, 결국 사람들의 눈과 돈 냄새와 내 안의 허영심을 모두 마주해야 했던 사람.
나는 많은 걸 살 수 있었다.
차, 집, 옷, 파티, 침묵, 관심, 시간처럼 보이는 서비스.
하지만 살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민재가 나를 다시 믿기까지 필요한 반복.
엄마가 내 얼굴을 보고 안심하는 시간.
누군가를 도울 때 먼저 묻는 예의.
돈 앞에서 작아지지 않으려는 마음.
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다시 세워야 하는 경계선.
상태창이 마지막 선택지를 띄웠다.
최종 질문
당신은 어느 엔딩을 선택하시겠습니까?
A. 왕관 — 더 크게 벌고, 더 높이 올라간다
B. 열쇠 — 가진 것으로 문을 열되, 사람을 대신 살지 않는다
C. 빈 통장 — 모든 돈을 내려놓고, 돈 없이 남는 나를 확인한다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누르지 않았다.
이 선택은 너무 쉽게 누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로 고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매일의 행동으로 다시 골라야 하는 문제였으니까.
왕관을 골라도 열쇠가 필요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어떤 문을 열고 닫을지 더 조심해야 했다.
열쇠를 골라도 왕관의 유혹은 남았다. 좋은 일을 한다는 이름으로 박수를 탐내는 순간, 열쇠는 작은 왕관이 될 수 있었다.
빈 통장을 골라도 돈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돈을 포기한다고 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돈 없는 삶에서도 돈은 계속 문 앞에 서서 월세와 병원비와 식비의 얼굴로 노크했다.
그러니까 진짜 엔딩은 봉투 안에 없었다.
진짜 엔딩은 돈을 마주하는 태도에 있었다.
나는 공책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한 줄을 썼다.
나는 돈을 소유할 것인가, 돈이 나를 소유할 것인가.
문장을 쓰고 나니, 이상하게도 세 봉투가 조금 작아 보였다.
돈은 거대했다.
하지만 질문은 더 컸다.
마지막 선택
자정이 되었다.
상태창이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세 봉투도, 공책도, 휴대폰도, 김치통이 들어 있는 냉장고도 각자의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다.
나는 금색 봉투에 손을 올려보았다.
차가웠다.
높은 곳의 공기처럼.
나는 은색 봉투에 손을 올려보았다.
미지근했다.
누군가 오래 쥐고 있던 열쇠처럼.
나는 흰색 봉투에 손을 올려보았다.
가벼웠다.
두렵지만 이상하게 숨이 쉬어지는 빈손처럼.
그리고 나는 알았다.
어떤 봉투를 고르든, 내일 아침 나는 다시 선택해야 한다.
돈을 더 벌 때도.
돈을 쓸 때도.
돈이 없을 때도.
친구의 전화를 받을 때도.
엄마의 밥 먹었냐는 말에 대답할 때도.
누군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때도.
내 안의 작은 왕이 "다 사버려"라고 외칠 때도.
내 안의 겁먹은 아이가 "다 숨겨"라고 말할 때도.
나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이 돈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지?
나는 지금 사람을 살리고 있나, 아니면 내 불안을 결제하고 있나?
나는 가진 것으로 문을 열고 있나, 아니면 문 앞에 내 이름표를 붙이고 있나?
나는 돈을 소유하고 있나?
아니면 돈이 나를 소유하고 있나?
나는 끝내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세 봉투를 공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윤: 만약 내가 진짜 엄청난 부자가 되면, 나 이상해질 때 말해줄 거지?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민재: 이미 좀 이상해.
도윤: 진지하게.
민재: 말해줄게. 대신 너도 내가 돈 빌려달라고 이상하게 굴면 정신 차리게 해줘.
도윤: 약속.
민재: 그리고 치킨은 네가 사. 부자든 아니든 그건 변하지 않음.
나는 웃었다.
엄마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도윤: 이번 주에 갈게. 빈손으로.
엄마의 답장은 짧았다.
엄마: 밥 먹고 와도 또 먹어.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따뜻한 초대장.
상태창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최종 엔딩 저장 중...
오류: 단일 엔딩으로 저장할 수 없습니다
사유: 인간은 선택 하나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대체 저장: 계속 선택하는 사람
나는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세 봉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금색, 은색, 흰색. 왕관, 열쇠, 빈 통장.
어쩌면 언젠가 나는 왕관을 고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열쇠를 쥐고 오래 걷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빈 통장 앞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하나를 안다.
부자가 된다는 건 단지 통장에 0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 0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계속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 따라온 당신에게도, 같은 봉투 세 개가 조용히 놓여 있다.
금색 봉투가 묻는다.
더 높이 올라갈 준비가 되었느냐고.
은색 봉투가 묻는다.
누군가의 문을 열어줄 용기가 있느냐고.
흰색 봉투가 묻는다.
모든 숫자가 사라져도 남는 자신을 볼 수 있느냐고.
나는 내 답을 아직 완성하지 않았다.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만 남긴다.
당신이 부자가 된다면,
돈을 소유할 것인가.
아니면 돈이 당신을 소유하게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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