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가장 비싼 점심 약속
다음 날 낮, 나는 민재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를 세 번 바꿨다.
처음에는 호텔 라운지를 예약했다. 이름만 들어도 의자가 나를 존댓말로 부를 것 같은 곳이었다. 커피 한 잔이 예전 내 점심값 두 끼였고, 메뉴판에는 가격보다 산지와 향미가 더 길게 적혀 있었다.
두 번째로는 프라이빗 룸이 있는 고급 한식당을 예약했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직원이 내 이름을 확인한 뒤 "한도윤 님,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내가 무슨 재벌 드라마 속 막내아들이 된 느낌이었다.
세 번째로는 그냥 국밥집으로 바꿨다.
민재가 보낸 메시지 때문이었다.
민재: 야, 너 혹시 나 심문하려고 스테이크집 잡은 거 아니지?
도윤: 왜.
민재: 비싼 데서 억울하면 체할 것 같아.
민재: 국밥집에서 억울하면 적어도 국물은 내려가.
나는 한참 화면을 보다가 웃었다.
그래. 우리에게는 국밥집이 맞았다.
비싼 방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것보다, 테이블이 조금 끈적거리고 옆자리 아저씨가 "여기 깍두기 좀 더 줘요!"라고 외치는 곳에서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덜 무서웠다.
상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신뢰 회복 퀘스트 시작
장소: 국밥집
난이도: 매움
주의: 국밥은 뜨거우나 감정은 더 뜨거울 수 있습니다
"너도 국밥 먹고 싶지?"
시스템은 음식 섭취 기능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럽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국밥집 문을 밀었다.
민재는 이미 와 있었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어."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 섰다.
평소 같았으면 민재가 먼저 "부자님 입장하십니다, 모두 박수!" 같은 헛소리를 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해, 국밥값은 네가 내"라고 받아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둘 다 아무 말도 못 했다.
잠깐의 침묵 뒤, 민재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기록 남아 있어."
화면에는 어제저녁 걸려온 번호가 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통화 시간은 38초.
"스팸 신고는?"
"하려다가 말았어. 찝찝해서."
"잘했네."
"내 인생에서 스팸 신고 안 한 게 칭찬받는 날이 오다니."
그제야 아주 조금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이모님이 다가와 물었다.
"뭐 드려?"
민재가 나를 흘끗 보았다.
"얘는 요즘 입맛이 고급이라 금가루 국밥 있나요?"
이모님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건 없어. 특으로 줄까?"
"네, 특 두 개요."
나는 황당해서 민재를 봤다.
"왜 네가 특을 시켜?"
"너 부자잖아."
"이럴 땐 빠르네."
"오해는 풀어야 하지만, 국밥 업그레이드는 받아야지.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해."
이 말도 안 되는 뻔뻔함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밥이 나오기 전에 우리는 다시 휴대폰을 테이블 가운데에 놓고 앉았다. 마치 세 번째 사람처럼. 어젯밤 우리 사이에 끼어든 의심이 저 작은 화면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믿음은 영수증처럼 뽑히지 않는다
민재가 먼저 말했다.
"전화 내용 정확히 말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남자가 전화해서, 네가 금융 상담을 받고 있는데 지인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어. 네 이름을 말했고, 내 이름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처음엔 진짜인가 싶었지."
"무슨 회사라고 했어?"
"너무 빨리 말해서 정확히 못 들었어. 무슨 글로벌 어쩌고였던 것 같아. 요즘 사기꾼들은 왜 다 글로벌이야? 동네 사기꾼은 자존심이 없나?"
민재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손가락은 계속 컵을 만지고 있었다.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리고?"
"네 비상 연락처가 맞는지 확인해달래. 내가 '그걸 왜 나한테 확인하냐'고 했더니, 네가 고액 자산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이라 주변인 인증이 필요하다고 했어."
"주변인 인증?"
"나도 그때 이상해서 끊었어. 마지막에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다시 불렀어. 박민재 님 맞으시죠, 하고. 그래서 더 기분 나빴고."
민재는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도윤아, 나 네 돈 얘기 아무한테도 안 했어. 진짜야."
나는 그를 보았다.
내 안의 의심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 전등 스위치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형광등 같았다. 켜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켜진 뒤에도 몇 번 깜빡인다.
"나도 믿고 싶어."
민재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아직도 그 말이야?"
"응."
"야, 섭섭하다."
"알아."
"나한테는 바로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예전의 나라면 미안해서 바로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혹은 분위기를 풀려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말해야 했다.
"민재야. 내가 널 의심하고 싶어서 의심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지금은 내 정보가 어디서 새는지 확인해야 해. 너를 믿는 것과 확인하는 건 같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민재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니라는 걸 믿고 싶은 마음이 있어. 동시에 그 번호가 왜 등록됐는지 확인해야 하는 책임도 있어. 내가 너를 친구로 대하려면, 오히려 이걸 대충 넘기면 안 돼."
국밥이 나왔다.
이모님은 우리 앞에 뚝배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싸우지 말고 먹어. 국밥 식으면 맛없어."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민재와 나는 동시에 이모님을 봤다.
이모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갔다.
상태창이 떴다.
NPC 이모님 발언
효과: 감정 과열 -12
국밥 식음 경고 +30
민재가 숟가락을 들었다.
"일단 먹자."
"응."
우리는 몇 숟가락을 말없이 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머릿속에 잔뜩 엉켜 있던 선들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민재가 낮게 말했다.
"나도 미안해."
"뭐가."
"그 전화 받고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괜히 너 예민하게 만들까 봐 넘겼어. 사실은 나도 네가 부자 되고 나서 뭘 말해야 하고 뭘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숟가락을 멈췄다.
민재는 국밥을 내려다보며 계속 말했다.
"예전엔 네가 이상한 문자 받으면 그냥 '야 이거 스팸이냐?' 하고 보내면 됐잖아. 근데 지금은 뭔가… 네 세계가 커진 느낌이야. 내가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될 것 같고, 네가 바쁠 것 같고, 내가 괜히 짐 되는 것 같고."
"짐 아니야."
"그럼 왜 연락 잘 안 받았냐?"
정곡이었다.
국밥 속 고기가 갑자기 고소함을 잃었다.
"무서웠어."
"뭐가?"
"돈 생기고 나서 모든 관계가 이상해질까 봐. 누가 나한테 뭘 부탁할까 봐. 내가 거절하면 나쁜 사람 될까 봐. 또 들어주면 쉬운 사람 될까 봐."
민재는 나를 가만히 보았다.
"그래서 날 피한 거야?"
"조금은."
"와."
민재는 헛웃음을 흘렸다.
"부자 되니까 친구 피하는 스케일도 커지네. 나는 그냥 네가 바쁜 줄 알고 치킨 혼자 먹었는데."
"혼자 먹었어?"
"응. 네 몫까지 먹느라 힘들었다."
"그건 힘든 게 아니라 행복한 거잖아."
"들켰네."
우리는 아주 작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 남은 건 가볍지 않았다.
나는 민재에게 돈을 주면 관계가 쉬워질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사주고, 맛있는 걸 먹이고, 좋은 곳에 데려가면 된다고. 그런데 그건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관계가 망가졌을 때 내가 가장 빨리 꺼낼 수 있는 도구일 뿐이었다.
돈은 계산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미안함은 계산서에 찍히지 않았다.
믿음은 영수증처럼 뽑히지 않았다.
12억짜리 해결책과 2시간짜리 해결책
국밥을 먹고 나온 뒤, 나는 민재와 함께 은행 감사팀에 연락했다. 민재는 통화 기록을 전달했고, 나는 그 번호를 추가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감사팀 직원은 차분하게 말했다.
"해당 번호는 이미 유사한 피싱 시도와 관련된 신고가 있는 회선으로 보입니다. 고객님의 지인 정보를 이용해 접근한 정황이 있으므로, 내부 유출과 외부 수집 가능성을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내가 물었다.
"김정훈 실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고객님의 자산 정보에 접근했던 인원과 외부 연락 정황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단정하기 어렵다.
요즘 내 인생의 공식 배경음악 같은 문장이었다.
전화를 끊자 민재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나 용의자 탈출이냐?"
"임시 탈출."
"야."
"농담이야."
"부자 농담 재미없다."
"가난했을 때도 재미없었어."
"그건 인정."
우리는 길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점심시간의 속도로 움직였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뛰었고, 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인상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편의점 봉투를 흔들며 웃었다. 세상은 내 통장 잔고와 상관없이 자기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민재에게 말했다.
"나 사실 너한테 돈으로 뭔가 해결하려고 했어."
"얼마?"
"그 반응 빠른 거 봐."
"아니, 들어나 보자고. 사람은 배움에 열려 있어야 하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네가 힘들다고 했던 거, 그냥 크게 도와주면 될 줄 알았어. 빚이 있으면 갚아주고, 집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주고. 그럼 나는 좋은 친구고, 너는 편해지고, 끝."
민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거 좋은데?"
"뭐?"
"아니, 빚 갚아주는 건 좋은데?"
내가 어이없게 쳐다보자 민재가 손을 들었다.
"농담 반, 진담 반. 솔직히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면 좋지. 나도 돈 싫어하는 척할 정도로 고상하지 않아."
민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근데 네가 나한테 돈을 주면, 그다음부터 내가 너한테 뭘 말할 때마다 이상해질 것 같긴 해. 고맙지만 불편하고, 편하지만 작아지고, 친구인데 채무자 같고."
그 말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그럼 어떻게 도와야 해?"
"그걸 나랑 상의해야지. 네가 혼자 멋있게 결정하지 말고."
민재가 나를 쿡 찔렀다.
"너 요즘 무슨 히어로병 걸렸냐? 돈 생기니까 혼자 세상 구하려고 해. 근데 친구 하나 도와줄 때도 먼저 물어봐야 돼. 국밥에 다대기 넣을지 말지도 묻는데, 인생에 12억 넣을지는 물어봐야지."
"인생에 12억 넣는다는 표현 이상하다."
"그래서 기억에 남잖아."
나는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돈으로 사람을 덮어버리는 것은 달랐다. 전자는 불을 끄는 일이고, 후자는 연기 나는 곳 위에 금박 이불을 덮는 일이었다. 겉보기엔 번쩍이지만, 안에서는 계속 타고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민재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먼저 말해. 나는 듣고, 같이 방법을 정할게. 그냥 돈부터 던지지 않을게."
"던지면 맞으면 아프냐?"
"계좌로 던질 건데?"
"그럼 덜 아프긴 하겠다."
"박민재."
"알았어, 알았어."
민재는 손을 내밀었다.
"대신 너도 약속해. 의심 생기면 잠수 타지 말고 물어봐. 내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기회는 줘야지."
나는 그 손을 봤다.
대학생 때 내 이삿짐을 같이 날라주던 손. 월세 밀린 나에게 30만 원을 빌려주던 손. 어젯밤 내 머릿속 법정에서 피고인석에 앉혀졌던 손.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약속."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신뢰 회복률 +18
완전 회복까지 남은 시간: 알 수 없음
필요 재료: 대화, 확인, 반복, 가끔 치킨
민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보았다.
"왜 갑자기 웃어?"
"아니야."
"또 그 이상한 상태창 봤냐?"
나는 놀라서 민재를 봤다.
"너 그거 어떻게 알아?"
민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부자 된 뒤로 가끔 허공 보고 표정 관리하잖아. 처음엔 귀신 보는 줄 알았는데, 귀신이면 네 돈부터 빌려갔겠지 싶어서."
역시 민재였다.
내 비밀을 정확히 모르는 방식으로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선물 말고 시간
민재와 헤어진 뒤, 나는 곧장 백화점으로 갔다.
엄마에게 갈 생각이었다.
빈손으로 오라고 했지만, 빈손으로 가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내 통장에 1000억이 있을 때 빈손은 거의 철학적 도전이었다.
백화점 1층에 들어서자마자 향수 냄새가 나를 공격했다. 직원들은 모두 완벽한 미소를 장착하고 있었고, 조명은 물건들이 스스로 "저를 사시면 삶이 고급스러워집니다"라고 속삭이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어울릴 만한 스카프를 봤다. 부드럽고, 은은하고, 가격은 전혀 은은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코트를 봤다. 엄마가 입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격표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내가 조금 낯설었다.
그리고 건강 팔찌, 안마의자, 프리미엄 여행 상품, 최고급 한우 세트, 유명 작가의 찻잔까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살 수 있었다.
다 살 수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예전에는 뭘 못 사서 슬펐다. 지금은 뭐든 살 수 있어서 헷갈렸다. 선물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어야 하는데, 나는 자꾸 가격으로 마음의 크기를 증명하려고 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엄마 선물 후보
A. 명품 스카프: 감동 가능, "이런 걸 왜 샀어" 확률 72%
B. 안마의자: 효도 점수 +40, 거실 공간 -80
C. 최고급 한우: 맛있음, 친척 소문 확산 위험 +25
D. 빈손으로 방문: 난이도 높음, 진심 대화 가능성 +60
나는 D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진짜 빈손?"
사용자는 이미 국밥값을 결제했습니다
오늘의 소비 욕구를 충분히 달랬습니다
"그건 효도가 아니잖아."
결국 나는 백화점을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작은 과일 바구니 하나만 샀다. 완전한 빈손은 아직 내 레벨에 맞지 않았다.
상태창이 수정되었다.
D-1. 거의 빈손: 현실적인 타협
부자의 원칙 형성 가능성 +10
엄마 집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기도 전에 김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어떤 고급 향수보다 빠르게 나를 예전으로 데려갔다. 내가 돈이 있든 없든, 엄마 집 현관 앞에서는 늘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문을 열었다.
"왔어?"
"응."
엄마는 내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를 보았다.
"빈손으로 오라니까."
"이건 거의 빈손이야."
"과일이 말을 하니? 자기가 빈손이라고?"
"엄마, 요즘 과일 비싸."
"그러니까 왜 사 와."
잔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좋았다.
집 안은 그대로였다. 오래된 식탁, 냉장고에 붙은 자석, 싱크대 옆에 걸린 고무장갑, 벽시계의 조금 큰 초침 소리. 내가 1000억을 가졌다는 사실이 이 집에서는 힘을 잃었다. 돈은 현관 밖에서 신발을 벗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엄마는 김치통을 꺼내며 말했다.
"밥 먹었어?"
나는 국밥을 떠올렸다.
"먹었는데 또 먹을 수 있어."
"그럼 안 먹은 거네."
엄마의 논리는 늘 이상하게 강했다.
나는 식탁에 앉았다. 엄마는 밥과 김치찌개, 계란말이를 내왔다. 계란말이는 조금 탔다. 예전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먹었을 텐데, 오늘은 그 탄 부분까지 이상하게 귀했다.
나는 밥을 한 숟가락 먹고 말했다.
"엄마."
"왜."
"나 요즘 엄마한테 돈으로만 뭘 해주려고 했던 것 같아."
엄마가 젓가락을 멈췄다.
"돈으로 해주면 좋지."
"어?"
"돈이 나쁜 것도 아니고. 병원비 내주면 좋고, 집 고쳐주면 좋고, 여행 보내주면 좋지. 엄마가 무슨 산속 도인인 줄 알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엄마는 계란말이를 내 접시에 하나 더 올려주었다.
"근데 돈으로 해주는 거랑, 돈만 주는 건 다르지."
그 말이 식탁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김치찌개 국물을 떠먹으며 말했다.
"네가 바쁜 건 알겠는데, 엄마는 네가 보낸 돈보다 네가 밥 먹는지 궁금해. 좋은 집 사주는 것도 고맙겠지만, 그 집에 네가 가끔 와서 자고 가면 더 좋고."
나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요즘 좀 피했지."
"많이 피했지."
역시 엄마의 계산은 정확했다.
"미안해."
엄마는 나를 보았다. 잔소리할 때의 눈이 아니었다. 조금 걱정하고, 조금 서운하고, 그래도 여전히 내 밥그릇을 채워주고 싶은 눈이었다.
"돈 생긴 뒤로 네가 자꾸 무슨 큰일을 혼자 감당하는 얼굴이야. 엄마는 네 돈을 관리해줄 순 없어. 그런 건 몰라. 그런데 네 얼굴이 안 좋은 건 알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럼 자주 와서 밥 먹어. 밥 먹으면 생각이 조금 나아져."
"그게 해결책이야?"
"세상 큰 해결책은 아니고, 엄마 해결책."
나는 웃다가 눈가가 뜨거워졌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거창한 이름을 하고 있지 않았다. 신뢰, 시간, 안부, 미안하다는 말, 밥 한 끼, 누군가 내 얼굴을 보고 "안 좋아 보인다"고 알아차리는 일. 그런 것들은 가격표가 없어서 공짜처럼 보이지만, 막상 잃어버리면 어떤 돈으로도 바로 되살 수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올게."
"바쁘면 전화라도 해."
"전화도 하고, 올게."
"빈손으로."
"거의 빈손으로."
"한도윤."
"알았어. 진짜 빈손으로."
엄마는 그제야 만족한 듯 김치통을 꺼냈다. 그런데 김치통이 하나가 아니었다. 세 개였다.
"이거 다 가져가."
"엄마, 빈손으로 오라며."
"올 때 빈손, 갈 때는 무겁게."
나는 김치통 세 개를 보며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공정한 거래가 여기 있었다.
나는 빈손으로 와도, 엄마는 늘 무언가를 들려보냈다.
화려한 문제 해결 쇼
저녁에는 윤서하를 만났다.
장소는 강남의 조용한 사무실이었다. 유리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고,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물 한 병도 디자인 잡지처럼 놓여 있었다.
윤서하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재 씨와는 일단 대화가 된 거네요."
"네. 완전히 풀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도망치진 않았어요."
"그게 중요해요."
나는 낮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국밥집, 민재의 전화 기록, 엄마 집, 거의 빈손 사건, 김치통 세 개. 윤서하는 김치통 세 개에서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그게 오늘 가장 안전한 자산이네요."
"냉장고 지분을 많이 차지하긴 하죠."
웃음이 지나간 뒤, 윤서하는 태블릿을 열었다.
"이제 현실적인 정리를 해야 해요. 정보 유출 경로, 법적 대응, 자산 방어, 연락 창구 단일화. 그리고 앞으로 도윤 씨가 어떤 기준으로 돈을 쓸지요."
"기준이요."
"돈이 많아지면 결정이 많아져요. 결정이 많아지면 사람이 지칩니다. 기준이 없으면 매번 감정으로 판단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과하게 베풀고, 어느 날은 과하게 닫아버리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오늘 하루 내내 내가 겪은 일이었다.
윤서하가 화면을 넘겼다. 거기에는 온갖 제안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재단 설립, 스타트업 투자, 의료 지원, 교육 사업, 문화 후원, 가족 자산 관리, 보안 시스템, 법률 대응.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다 하고 싶으면요?" 내가 물었다.
"그럼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할 가능성이 커요."
"1000억인데도요?"
"1000억은 큰돈이지만, 무한은 아니에요. 그리고 돈보다 먼저 닳는 건 도윤 씨의 판단력입니다."
그때 상태창이 번쩍였다.
긴급 이벤트 발생
화려한 문제 해결 쇼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제한 시간: 10분
목표: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보기
"또 시작이네."
윤서하가 눈썹을 올렸다.
"상태창인가요?"
"네."
"이제 놀랍지도 않네요."
상태창은 선택지를 띄웠다.
A. 엄마에게 최고급 주택 즉시 증여
B. 민재에게 30억 송금
C. 의심되는 사람 전원에게 변호사 내용증명 발송
D. 모든 제안에 투자해서 좋은 사람 되기
E. 아르카디아 회원들 앞에서 '진짜 부자란 이런 것' 발표하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거 완전 부자 폭주 버튼인데요?"
윤서하가 화면을 보지도 못하면서 말했다.
"누르지 마세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도윤 씨 표정이 누르고 싶어 하는 표정입니다."
정확했다.
솔직히 말하면, A부터 E까지 모두 잠깐은 매력적이었다. 엄마에게 집을 사주면 효자가 된 느낌일 것이다. 민재에게 큰돈을 보내면 내 미안함이 줄어들 것 같았다.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내용증명을 보내면 통쾌할 것이다. 모든 좋은 제안에 투자하면 세상이 나를 착한 부자로 불러줄지도 모른다. 아르카디아에서 멋진 연설을 하면 박수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오늘 내가 배운 답은 아니었다.
나는 상태창을 향해 말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해결하되, 사람 마음까지 결제하려고 하진 않겠다."
상태창이 잠깐 멈췄다.
답변이 길고 재미없습니다
그래도 방향은 맞습니다
"재미없다니."
윤서하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시스템 평가가 냉정하네요."
상태창이 다시 선택지를 바꾸었다.
새로운 선택지
F. 원칙을 만든 뒤, 그 원칙에 따라 돈을 쓴다
나는 망설임 없이 F를 눌렀다.
회의실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유리벽 너머 도시의 불빛이 잠시 금빛으로 번졌다. 마치 밤하늘에 거대한 영수증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영수증에는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나만의 부자의 원칙
윤서하는 빈 종이를 내 앞에 놓았다.
"써보세요."
"지금요?"
"원칙은 생각만 하면 흐려져요. 글로 쓰면 도망가기 어려워집니다."
나는 펜을 들었다.
처음에는 손이 멈췄다. 1000억이라는 숫자 앞에서 원칙이라는 단어는 너무 작아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필요했다. 배가 클수록 방향키가 필요하듯, 돈이 클수록 작은 문장이 필요했다.
나는 천천히 적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문장은 어렵지 않았다.
돈은 나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쓴다.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 쓰지 않는다.
민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에게 큰돈을 던져주며 내 미안함을 지우려 했던 마음도 함께 떠올랐다. 도움은 필요했다. 하지만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입을 막거나, 관계의 모양을 내 마음대로 바꾸면 안 됐다.
두 번째 문장을 썼다.
과시하기 위한 지출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출을 구분한다.
비싼 차, 옷, 호텔, 파티가 모두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도 좋은 것을 좋아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좋아했다. 비싼 차 시트는 정말 편했고, 좋은 옷은 사람 어깨를 조금 펴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 될 때였다.
과시는 사람들에게 "나를 봐"라고 외치는 돈이었다.
해결은 누군가에게 "이제 숨 좀 쉬어"라고 말하는 돈이었다.
나는 앞으로 그 차이를 잊고 싶지 않았다.
세 번째 문장을 썼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선물보다 시간을 먼저 쓴다.
엄마의 김치통, 탄 계란말이, "밥 먹었어?"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 질문은 평생 무료였지만,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꾸 놓치면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말이 될 것이다.
네 번째 문장을 썼다.
의심은 혼자 키우지 않고 확인한다. 믿음은 확인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쓰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완전히 멋진 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는 필요했다. 나는 사람을 믿고 싶었다. 동시에 내 돈과 삶을 지키고 싶었다. 둘 중 하나만 고르는 게 아니라, 둘을 같이 들고 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섯 번째 문장을 썼다.
도움은 상대와 함께 결정한다.
국밥에 다대기를 넣을지도 묻는데, 인생에 12억을 넣을지는 물어봐야지.
민재의 이상한 문장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억울하지만 명언이었다.
여섯 번째 문장을 쓰려다가 멈췄다.
윤서하가 물었다.
"왜요?"
"마지막이 제일 어려워요."
"어떤 내용인데요?"
나는 펜 끝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부를 어떤 방향으로 쓸지.
이 장의 가장 큰 질문이었다.
돈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돈을 쓰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돈을 어디로 흐르게 할지 정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은 가장 시끄러운 곳으로 흘러갈 것이다. 박수 소리가 큰 곳, 수익률이 화려한 곳, 내 허영심을 간지럽히는 곳.
나는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꿈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돈 때문에 꿈을 너무 일찍 포기하지 않는 곳.
작은 실패가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곳.
내가 예전에 필요했던, 그러나 갖지 못했던 완충지대.
나는 여섯 번째 문장을 썼다.
내 돈의 방향은 '사람이 다시 시작할 시간을 사는 일'에 둔다.
윤서하가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나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거창한 재단 이름도, 멋진 로고도, 기사 제목도 아직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돈이 숫자 덩어리가 아니라 방향을 가진 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의 꿈을 사는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이 자기 꿈을 다시 집어 들 시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부자의 원칙 생성 완료
이름: 한도윤의 여섯 문장
효과: 충동 지출 -20, 관계 파괴 위험 -15, 고민 시간 +50
특이사항: 고민 시간 증가는 단점이 아니라 인간성입니다
나는 작게 웃었다.
"고민이 인간성이라니, 너무 피곤한 인간성이네."
윤서하가 말했다.
"부자가 된다고 고민이 사라지진 않아요. 다만 고민의 크기와 책임이 바뀌죠."
"그럼 저는 이제부터 뭘 하면 될까요?"
윤서하는 종이를 접어 내게 건넸다.
"오늘은 더 결정하지 마세요."
"네?"
"중요한 결정을 너무 많이 했어요. 민재 씨를 만났고, 어머님께 갔고, 원칙을 썼죠. 돈 많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어요. 마음이 뜨거울 때 바로 거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
"좋은 마음이어도요?"
"좋은 마음일수록 더 위험할 때가 있어요. 좋은 마음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거든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나는 원칙이 적힌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가격표 없는 것들의 목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일부러 택시를 타지 않았다.
지하철을 탔다.
물론 지하철을 탄다고 갑자기 소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는 1000억의 주인이 적은 원칙이 들어 있었고, 계좌에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서 있고 싶었다.
퇴근 시간 지하철은 한 편의 생존 게임이었다. 누군가의 가방이 내 옆구리를 찔렀고, 누군가의 이어폰에서는 드럼 소리가 새어 나왔고, 앞에 선 학생은 졸다가 자기 머리로 계속 허공에 도장을 찍었다.
예전에는 이 모든 게 지겨웠다.
오늘도 솔직히 조금 지겨웠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안심됐다. 세상에는 내 돈과 상관없는 표정들이 이렇게 많았다. 피곤한 사람, 배고픈 사람, 연애 문자에 웃는 사람, 상사의 메시지를 보고 영혼이 빠져나가는 사람, 손잡이를 잡고 꾸벅꾸벅 조는 사람.
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가격표 없는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엄마가 밥 먹었냐고 묻는 목소리.
민재가 억울해서 화내는 얼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같이 앉아 있는 두 시간.
돈을 주기 전에 먼저 묻는 예의.
나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내가 괜찮은 척하지 않을 용기.
내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평범한 하루.
목록은 점점 길어졌다.
어떤 것들은 너무 평범해서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귀한 줄 몰랐다. 어떤 것들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돈을 벌러 멀리 갈수록 더 쉽게 놓쳤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민재였다.
민재: 야, 아까 국밥 내가 특 시켰잖아.
도윤: 그래서?
민재: 다음엔 네가 치킨 특 시켜.
도윤: 치킨에 특이 어딨어.
민재: 부자면 만들어.
나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도윤: 알았어. 대신 메뉴는 같이 정한다.
곧 답장이 왔다.
민재: 오. 민주적 부자.
나는 그 문장을 보고 한참 웃었다.
민주적 부자.
이상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싸준 김치통 세 개가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너무 무거워서 배송 앱을 부를까 하다가, 결국 직접 들고 왔다. 팔이 빠질 것 같았다. 1000억이 있어도 김치통 세 개는 무거웠다.
나는 냉장고에 김치를 넣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원칙이 적힌 종이를 꺼내 공책에 옮겨 적었다. 한 줄 한 줄 천천히. 마치 계약서에 서명하듯.
마지막 줄 아래에 오늘의 결론을 썼다.
가장 비싼 것은 가격표가 없다.
그 문장을 쓰자 상태창이 떠올랐다.
챕터 목표 달성
깨달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공짜가 아니라, 결제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결제 수단: 시간, 진심, 반복, 책임
잔액: 부족할 수 있음
"잔액 부족이라니. 1000억 있는데."
시간 잔액은 별도 계좌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맞는 말이었다.
세 개의 봉투
밤 11시 59분.
하루가 끝나기 1분 전, 책상 위에 없던 것이 나타났다.
봉투 세 개였다.
첫 번째 봉투는 금색이었다. 표면에는 왕관 문양이 찍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비쌌다. 봉투 주제에 건방지게 비쌌다.
두 번째 봉투는 은색이었다. 가운데에는 작은 열쇠 문양이 있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손이 갔다.
세 번째 봉투는 흰색이었다. 아무 무늬도 없었다. 대신 봉투 아래쪽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빈 통장
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최종 엔딩 선택지가 도착했습니다
선택 가능 시간: 다음 자정까지
주의: 어떤 선택도 이전의 당신으로 완전히 돌아가게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세 봉투를 바라보았다.
금색 봉투는 속삭이는 것 같았다.
왕관을 써라.
돈의 힘을 인정하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라.
은색 봉투는 조용히 말했다.
열쇠를 가져라.
문을 열되, 어느 문을 열지 스스로 정하라.
흰색 봉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가장 크게 들렸다.
빈 통장.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선택일까. 아니면 1000억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나를 확인하는 선택일까.
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오늘 쓴 여섯 문장이 공책 위에서 조용히 나를 보고 있었다. 민재의 통화 기록, 엄마의 김치, 윤서하의 조언, 국밥집 이모님의 "싸우지 말고 먹어"라는 말까지. 이상한 하루가 전부 한곳에 모여 있었다.
돈은 여전히 내 계좌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돈은 나를 끌고 가는 괴물이 아니라, 내가 방향을 정해야 할 거대한 강처럼 느껴졌다.
강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집을 삼킬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둑을 세우고, 어디에 물길을 낼지였다.
나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대신 공책을 덮고 불을 껐다.
내일 선택할 것이다.
왕관인지.
열쇠인지.
아니면 빈 통장인지.
침대에 누웠을 때, 상태창이 마지막으로 아주 작게 빛났다.
마지막 질문
당신이 부자가 된다면, 무엇을 지키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잠들기 전, 휴대폰을 들어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윤: 김치 냉장고에 넣었어. 고마워.
그리고 민재에게도 보냈다.
도윤: 다음 주 치킨. 메뉴 같이 정하자.
두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눈을 감았다.
가장 비싼 것들은 결제 완료 알림을 보내주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곁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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