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온 이름은 너무 가까웠다
은행 감사팀 직원은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해 주었다.
"지인 연락처는 박민재 님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전화를 귀에 댄 채로 그대로 굳었다.
박민재.
방금 전까지 나에게 "사람을 믿어도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말라"고 말했던 친구.
치킨 농담을 하며 내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 녹여준 친구.
대학생 때 내 월세가 밀렸을 때 아무 말 없이 30만 원을 빌려주고, 내가 갚겠다고 하자 "취업하면 삼겹살이나 사"라고 했던 친구.
그 이름이 은행 감사팀 직원의 차분한 목소리 속에서 흘러나오자,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낯설어졌다.
"확실합니까?"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이상했다. 마치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몸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현재 확인된 시스템 기록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박민재 님이 직접 정보를 제공했는지, 연락처가 도용되었는지, 혹은 제3자가 해당 연락처를 이용했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
추가 확인.
요즘 세상은 사람 심장을 떨어뜨려 놓고도 참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민재가… 제 정보를 넘겼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단정하실 단계는 아닙니다."
단정하지 말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단정하지 말라'고 말해도, 심장은 이미 빠르게 판결문을 쓰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아니, 돈 앞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민재가 왜?
민재도 돈이 필요했나?
내가 너무 바뀌어서 민재가 화났나?
아니면 처음부터?
생각은 미끄럼틀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자 중간에 멈출 손잡이가 없었다.
감사팀 직원은 관련 기록을 더 확인한 뒤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화면에는 민재와 조금 전 통화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박민재 23:12 통화 종료
방금까지 따뜻했던 이름이 갑자기 위험 표시처럼 보였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신뢰 붕괴 이벤트 발생
대상: 가장 가까운 친구
현재 감정: 배신감 41%, 의심 38%, 슬픔 21%
주의: 아직 사실 확정 전입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상상력은 이미 폭주 중입니다
"조용히 해."
나는 낮게 말했다.
상태창은 조용히 하지 않았다.
질문
부자가 된 당신은 예전의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까?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그걸 묻는다고?"
네
지금이 아니면 대답을 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면 위에 낯선 선택지가 나타났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하시겠습니까?
A. 부자가 된 세계 계속 보기
B. 부자가 되지 않은 세계 보기
C. 두 세계를 동시에 비교하기
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 몸은 피곤했고 머리는 뜨거웠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을 뻔했다. 12억. 믿음. 평온. 그리고 어쩌면 친구까지.
손가락이 허공을 눌렀다.
"C."
그 순간 방의 불빛이 깜빡였다.
전등이 꺼졌다 켜진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한 번 접혔다가 펴졌다.
내 앞에 있던 책상, 공책, 휴대폰, 침대, 빨래건조대가 종이처럼 얇아지더니 옆으로 밀려났다. 발밑에서 검은 선이 자라났다. 선은 방을 둘로 나누고, 천장까지 올라가 투명한 벽이 되었다.
왼쪽에는 내가 사는 방이 있었다.
오른쪽에도 내가 사는 방이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방은 조금 달랐다.
낡은 빨래건조대는 그대로였고, 침대도 비슷했고, 책상 위에는 편의점 영수증이 쌓여 있었다. 고급 시계도, 새 차 키도, 계약서 파일도 없었다. 대신 컵라면 뚜껑 위에 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른쪽 침대 위에서 누군가 뒤척였다.
나였다.
1000억을 받지 못한 한도윤.
그 세계의 내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1000억이 없던 아침
오른쪽 세계의 나는 휴대폰 알람을 세 번이나 끄고 나서야 일어났다.
"아, 진짜 퇴사하고 싶다."
그 말투가 너무 익숙해서 소름이 돋았다.
1000억을 받기 전의 나였다. 아니, 받지 못한 나였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은행 앱을 켰다. 잔액을 확인한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327,810원
나는 그 숫자를 보자 이상하게 숨이 멎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버티는 계산을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점심값을 줄이고, 택시를 포기하고, 커피 쿠폰을 모으고, 친구 결혼식 축의금 봉투 앞에서 한숨을 쉬는 생활. 숫자가 작으면 하루가 조각난다. 월세 조각, 교통비 조각, 식비 조각, 카드값 조각. 내가 쓸 수 있는 나는 언제나 조금씩 잘려 있었다.
오른쪽의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계란 두 개, 반쯤 마른 대파, 엄마가 지난주에 가져다준 김치통이 있었다.
그는 김치를 꺼내 냄새를 맡고 혼잣말했다.
"살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 말도 너무 나 같았다.
그는 대충 밥을 데우고 김치와 계란프라이를 얹었다. 근사한 아침은 아니었다. 플레이팅이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터뜨릴 때, 그의 얼굴에는 작고 확실한 만족이 떠올랐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 밥은 먹었어?
오른쪽의 나는 바로 사진을 찍어 보냈다.
도윤: 먹는 중. 김치 맛있음.
곧 답장이 왔다.
엄마: 그 김치 마지막이야. 주말에 와. 더 싸줄게.
도윤: 무겁게 하지 마. 내가 가지러 갈게.
엄마: 네가 오는 게 무거운 것보다 좋아.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왼쪽 세계의 내 가슴이 이상하게 저렸다.
나는 돈이 생긴 뒤 엄마에게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새 집, 건강검진, 여행, 통장 잔고를 걱정하지 않는 노후. 분명히 좋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마음 때문에 나는 엄마에게 덜 갔다.
바빠서. 설명하기 어려워서. 위험할까 봐. 내 삶이 너무 커져서 엄마의 작은 질문에 답하는 일이 오히려 무서워져서.
오른쪽의 나는 낡은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까지 뛰어가며 이어폰 한쪽을 잃어버릴 뻔했고, 개찰구 앞에서 교통카드 잔액 부족 안내음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아, 왜 오늘이야."
그는 뒤로 물러나 휴대폰으로 급히 충전했다. 뒤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천천히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젊은 사람이 뭐 그렇게 급해."
오른쪽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회사요."
"회사도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야?"
"가끔요."
할아버지가 웃었다. 그 짧은 농담 하나가 출근길을 아주 조금 덜 비참하게 만들었다.
왼쪽의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돈이 없던 세계의 나는 불편했다. 피곤했고, 쪼들렸고, 가끔 초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평범한 점심은 의외로 따뜻했다
오른쪽 세계의 회사는 그대로였다.
형광등은 약간 차갑고, 팀장님 목소리는 아침부터 커피보다 진했다. 모니터에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줄지어 있었고, 단톡방에는 점심 메뉴 논쟁이 시작됐다.
민재: 오늘 8천 이하.
수아: 그 조건이면 김밥천국 우주정복.
지훈: 나는 국밥.
도윤: 나 도시락 싸옴.
곧 민재가 자리로 굴러왔다. 진짜로 의자를 발로 밀며 굴러왔다.
"야, 도시락? 배신자냐?"
오른쪽의 내가 가방에서 반찬통을 꺼냈다.
"돈 없어."
"그래서 배신자라는 거야. 가난은 같이 해야 우정이지."
"미친놈인가."
민재는 웃으며 자기 지갑을 열었다. 안에는 쿠폰이 몇 장 들어 있었다.
"오늘 내가 국밥 쿠폰 두 장 있음. 하나는 네 거."
"됐어. 나 김치볶음밥 있음."
"김치볶음밥은 저녁에도 먹을 수 있지만, 쿠폰 만료일은 오늘뿐이다. 자본주의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아."
오른쪽의 나는 결국 끌려갔다.
국밥집은 좁았다. 테이블은 끈적했고, 반찬통 뚜껑은 한쪽이 깨져 있었다. 하지만 뜨거운 국물이 나왔을 때 네 명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사람은 정말 배고플 때 철학자가 아니라 국밥 신자가 된다.
민재가 깍두기를 덜며 말했다.
"야, 너 요즘 힘들지?"
오른쪽의 내가 숟가락을 멈췄다.
"갑자기?"
"얼굴이 월요일인데 오늘 수요일이잖아."
"그게 뭔데."
"심각하다는 뜻이지."
오른쪽의 나는 한참 국물을 저었다.
"그냥… 내가 계속 이렇게 살까 봐 좀 무섭다."
민재는 장난치지 않았다.
"계속은 아니겠지."
"뭐가 달라질까?"
"너."
"나?"
"월급은 천천히 오르고, 집값은 빨리 오르고, 세상은 가끔 미쳐 있지만 그래도 네가 아주 조금씩 달라지겠지. 안 되면 내가 먼저 로또 돼서 너 데려간다."
"로또 사긴 하냐?"
"아니."
"그럼 어떻게 돼."
"상상력으로."
네 사람은 웃었다. 별것 아닌 웃음이었다. 국밥집 소음에 묻히는 싸구려 웃음. 그런데 나는 그 웃음이 부러웠다.
1000억이 있는 세계의 나는 요즘 웃을 때도 주변을 살폈다. 누가 듣고 있는지, 누가 녹음하는지, 누가 나중에 이 말을 이용할지 생각했다. 웃음에도 보안이 필요해졌다.
오른쪽의 나는 점심값 9천 원을 아까워하면서도, 민재가 쿠폰을 내미는 순간 고맙다는 말을 했다. 민재는 "나중에 네가 부자 되면 이자 쳐서 갚아라"라고 했고, 오른쪽의 나는 "내가 부자 되면 네 국밥집 차려준다"고 했다.
그 농담은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전했다.
돈이 해결한 것들
투명한 벽 왼쪽, 그러니까 내가 부자가 된 세계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장면이 필름처럼 넘어갔다.
처음 1000억을 확인한 아침.
엄마에게 더 이상 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순간.
민재의 어려운 사정을 도울지 말지 망설였던 날.
처음으로 비싼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던 날.
새 차에 앉아 운전대 가죽 냄새를 맡던 순간.
고급 호텔 엘리베이터가 조용히 올라가던 느낌.
아르카디아 파티에서 사람들이 내 말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던 장면.
분명 돈은 많은 것을 해결했다.
돈은 엄마의 낡은 병원 예약을 빠르게 바꿀 수 있었다. 줄을 서는 시간을 줄이고, 더 자세한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돈은 내가 매달 카드값 날짜를 계산하며 잠드는 밤을 없앴다. 돈은 갑작스러운 고장, 병원비, 이사비, 빚, 밀린 월세 같은 괴물들을 한 번에 작게 만들었다.
돈은 선택지를 늘렸다.
예전에는 메뉴판 오른쪽 가격을 먼저 봤다. 지금은 왼쪽 이름을 먼저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누군가 힘든 이야기를 꺼내면 내 통장 잔액부터 떠올랐다. 지금은 적어도 도울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내 꿈이 얼마짜리인지 계산하다가 꿈을 접었다. 지금은 꿈을 펼칠 책상이 생겼다.
상태창이 조용히 정리했다.
돈이 해결한 문제
생존의 압박
선택지의 부족
시간을 빼앗기는 가난
작은 사고가 인생 전체를 흔드는 공포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돈은 중요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돈이 너무 없을 때는 잔인하게 들린다. 돈은 전부가 아니지만, 많은 문 앞에서 열쇠처럼 작동했다. 병원 문, 집 문, 배움의 문, 휴식의 문, 도망칠 수 있는 문.
1000억이 생긴 뒤 나는 처음으로 '내일'을 넓게 상상했다.
그건 분명 선물이었다.
하지만 장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왼쪽 세계가 다시 어두워졌다.
이번에는 돈이 만든 그림자가 나타났다.
돈 때문에 새로 생긴 것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전화벨이었다.
모르는 번호.
또 모르는 번호.
또 다른 모르는 번호.
화면 속 나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조금씩 표정을 잃었다. 누군가는 투자를 권했고, 누군가는 기부를 요청했고, 누군가는 친척이라며 도움을 청했고,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팔자고 했다.
다음 장면에서는 계약서가 쌓였다.
백승조의 초상권 계약서.
강해린의 전시 제안서.
유태오의 투자 의향서.
김정훈 실장의 자산관리 서류.
서류들은 종이가 아니라 얇은 입처럼 보였다. 입들은 동시에 속삭였다.
서명하세요.
검토만 하는 겁니다.
고객님을 위해서입니다.
지금 아니면 늦습니다.
왼쪽 세계의 나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만 의심했다. 그다음에는 명함을 가진 사람을 의심했다. 그다음에는 친척을 의심했다. 이제는 친구 이름 앞에서도 멈춰 섰다.
장면이 바뀌었다.
엄마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반찬은 차려져 있는데 젓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는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도윤: 오늘은 못 가. 일이 있어.
그 위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있었다.
도윤: 다음 주에 갈게.
도윤: 미안, 갑자기 미팅 잡힘.
도윤: 엄마한테 위험할 수도 있어서 자세히 말 못 해.
엄마는 화면을 껐다. 그리고 혼잣말했다.
"돈 생기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얼굴 보기가 더 어렵네."
그 말은 아주 작았지만, 내 귀에는 크게 박혔다.
또 장면이 바뀌었다.
민재가 치킨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손에는 포장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내 집 앞까지 왔다가, 경비실 앞에서 멈췄다. 새로 옮긴 보안 좋은 오피스텔이었다. 출입증이 없으면 올라올 수 없었다.
민재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 속 나는 전화를 보았다.
받지 않았다.
민재는 한 번 더 걸었다.
나는 또 받지 않았다.
그러고는 윤서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윤: 민재가 갑자기 집 앞에 왔대요. 확인해 봐야 할까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건… 내가 아니야."
상태창이 물었다.
정말입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밤, 은행 감사팀 직원이 민재의 이름을 말한 순간 나는 이미 그를 의심했다. 전화해서 묻지도 않았다. 만나서 눈을 보지도 않았다. 상황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냥 마음속으로 문을 닫았다.
돈 때문에 새로 생긴 문제는 돈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돈이 많아질수록 내 주변에는 벽도 많아졌다. 보안문, 비밀번호, 검토 절차, 대리인, 필터링된 전화, 예약된 만남, 녹음될까 조심하는 대화.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든 벽이었다.
그런데 벽은 바깥의 위험만 막지 않았다.
사람도 막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벽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상태창이 다시 떴다.
돈 때문에 새로 생긴 문제
사람의 의도를 계속 계산하게 됨
친절과 거래를 구분하기 어려워짐
보호와 고립의 경계가 흐려짐
내가 먼저 사라지고 돈만 남을 위험
마지막 줄에서 시뮬레이션의 온도가 내려갔다.
내가 먼저 사라지고 돈만 남을 위험.
그 말은 이상하게 현실적이었다.
내가 사라진 세계
왼쪽 세계가 갑자기 몇 년 뒤로 건너뛰었다.
나는 더 큰 집에 살고 있었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고, 거실은 모델하우스처럼 완벽했다. 먼지 하나 없고, 물건 하나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너무 깨끗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았다.
그 세계의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비싼 셔츠를 입고, 비싼 시계를 차고, 비싼 공기를 마시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일정이 빽빽했다.
10:00 법무팀 보고
11:30 세무 구조 검토
13:00 투자위원회
15:00 재단 인터뷰
17:00 보안 브리핑
19:00 VIP 만찬
그는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났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비서가 말했다.
"대표님, 어머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몇 년 뒤의 내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문자로 안부 전해 주세요. 이번 주는 어렵다고."
"박민재 님도 연락이 왔습니다."
그 이름에 그는 아주 잠깐 멈췄다.
"무슨 일인데요?"
"그냥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냥이면 나중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뒤의 나는 다시 숫자를 보았다. 자산 배분표, 수익률, 세금 계획, 위험 보고서.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 돈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늘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내가 없었다.
내 농담이 없었다. 내 당황이 없었다. 컵라면 앞에서 행복해하던 내가 없었다. 엄마 김치 사진을 찍어 보내던 내가 없었다. 민재와 국밥집에서 쓸데없는 소리로 웃던 내가 없었다. 꿈을 말하다가 부끄러워하던 내가 없었다.
남은 것은 돈을 관리하는 사람뿐이었다.
그는 안전했다.
그리고 완전히 외로웠다.
나는 투명한 벽을 두드렸다.
"야."
몇 년 뒤의 내가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가 나를 보았다.
우리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내 눈동자와 같았지만, 오래 닫힌 방처럼 어두웠다.
"너 누구야?"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너."
"아니야."
"맞아. 돈을 잃지 않으려고 하다가, 사람을 먼저 잃은 너."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나는 그렇게 안 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유리벽 너머로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거울 속 그림자 같았다.
"처음엔 전부 조심하려고 했어. 조심은 필요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심이 습관이 됐고, 습관이 성격이 됐고, 성격이 운명이 됐어."
"그럼 어쩌라고? 아무나 믿어? 서명도 막 하고? 돈 빌려달라면 다 줘?"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멍청한 거야. 그런데 모두를 의심하는 것도 똑같이 멍청해. 방향만 다를 뿐이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아팠다.
부자가 아닌 내가 물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세계가 멈췄다.
1000억이 없는 내가 퇴근길 골목을 걷고 있었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2+1 음료와 할인 스티커가 붙은 삼각김밥. 그는 지친 얼굴이었지만, 집 앞에서 엄마 전화를 받자 목소리를 조금 밝게 바꿨다.
"어, 엄마. 나 지금 들어가."
전화를 끊은 뒤, 오른쪽의 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도 나를 보았다.
이번에는 투명한 벽이 사라졌다.
나는 어두운 골목에 서 있었고, 내 앞에는 돈을 받지 못한 내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옷 좋아 보인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좀 비싸."
"얼마?"
"말하면 네가 욕할걸."
"그럼 하지 마. 이미 욕하고 싶으니까."
목소리도, 표정도, 삐딱하게 웃는 습관도 똑같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거울을 보는데 거울 속 내가 나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그가 물었다.
"그래서 좋아?"
"뭐가?"
"부자 된 거."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좋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무서워."
"그것도 그럴 줄 알았어."
"사람들이 다르게 보여. 누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내 돈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친절한 사람도 의심하게 되고, 가까운 사람도 멀리 보게 돼."
돈 없는 나는 편의점 봉투를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겼다.
"우린 원래도 사람 마음 잘 몰랐어."
"뭐?"
"돈 없을 때도 그랬다고.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그냥 심심해서 만나는지, 내가 쓸모 있어서 부르는지 몰랐어. 다만 그때는 의심할 힘도 없어서 그냥 웃고 넘긴 거지."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가 계속 말했다.
"돈이 생겨서 사람들이 변한 것도 있겠지만, 네 눈이 확대경이 된 것도 있을 거야. 작은 욕심이 크게 보이고, 작은 거리감이 배신처럼 보이고, 작은 실수가 음모처럼 보이는 거."
"그럼 내가 예민하다는 거야?"
"아니. 위험은 진짜겠지. 김정훈 같은 사람도 진짜고, 사기도 진짜고, 돈 냄새 맡는 사람들도 진짜야. 그런데 진짜 위험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위험인 건 아니잖아."
그 말은 민재가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사람을 믿어도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않는다.
돈 없는 내가 나를 빤히 보았다.
"너 부자 됐다고 더 나은 사람 된 거 아니야."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알아."
"그렇다고 더 나쁜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말했다.
"그냥 선택지가 많아진 너야. 그래서 네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더 자주 들키는 중이고."
골목의 가로등이 깜빡였다.
"돈은 네 안에 없던 걸 갑자기 만들어내진 않는 것 같아. 대신 있던 걸 크게 키우지. 좋은 마음도, 허세도, 겁도, 외로움도, 욕심도."
"그럼 나는 뭘 해야 해?"
돈 없는 나는 편의점 봉투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꺼내 내게 던졌다.
나는 얼떨결에 받았다.
"밥 먹어."
"뭐?"
"배고프면 사람은 판단을 망쳐. 그리고 전화해. 확인해. 화내더라도 얼굴 보고 화내. 네 머릿속 재판장에서 사람을 바로 유죄 만들지 말고."
나는 손안의 삼각김밥을 내려다보았다. 참치마요였다.
돈 없는 내가 씩 웃었다.
"그리고 엄마한테 가. 김치는 돈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엄마가 '더 싸줄게' 하는 목소리는 주문 안 되더라."
그 순간 목이 메었다.
"너는 괜찮아?" 내가 물었다.
"나?"
"그 세계에서. 돈 없이 사는 거 힘들잖아."
그는 잠깐 하늘을 보았다.
"힘들지. 솔직히 말하면 엄청 힘들어. 돈 때문에 포기한 것도 많고, 속으로 운 적도 많고, 남이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이면 배 아프고, 미래 생각하면 숨 막혀."
그는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돈을 가볍게 말하지 마. 돈 없는 삶을 낭만처럼 포장하지도 마. 가난은 사람을 단단하게만 만드는 게 아니라, 자주 닳게 해. 그런데 돈 있는 삶도 자동으로 사람을 완성시키진 않나 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이번 시뮬레이션의 답처럼 느껴졌다.
돈 없는 세계는 따뜻했지만 어렵다.
돈 있는 세계는 넓지만 위험하다.
어느 쪽도 천국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느 세계에서든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거울 사이의 선택
골목이 사라지고, 나는 다시 내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지만 방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사방이 거울이었다. 왼쪽 거울에는 1000억이 있는 내가 비쳤다. 오른쪽 거울에는 1000억이 없는 내가 비쳤다. 정면 거울에는 몇 년 뒤, 돈은 지켰지만 사람을 잃은 내가 서 있었다.
세 명의 내가 동시에 나를 보았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최종 질문
당신은 어떤 부자가 되겠습니까?
선택지가 나타났다.
A. 아무도 믿지 않는 부자
자산 방어력 +50, 외로움 +80
B.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부자
인기 +30, 잔고 누수 +70, 후회 +60
C. 경계선을 가진 부자
신뢰 회복 가능, 실수 가능, 학습 필요
나는 한참 동안 선택지를 바라보았다.
A는 편해 보였다. 아무도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줄어든다. 문을 닫으면 바람도 먼지도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B도 익숙했다. 나는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돈이 없을 때도 그랬다. 누가 부탁하면 마음이 먼저 흔들렸다. 돈이 생긴 지금 B를 선택하면,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쉬운 사람이 될 것이다.
C는 가장 귀찮아 보였다.
믿되 확인해야 하고, 돕되 한계를 정해야 하고, 화가 나도 묻기 전에 단정하지 않아야 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도 돈의 경계선을 설명해야 한다. 매번 불편할 것이다. 누군가는 섭섭해할 것이고, 누군가는 나를 차갑다고 할 것이다. 나도 흔들릴 것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선택지는 C뿐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C를 눌렀다.
거울들이 동시에 금이 갔다.
쩍, 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몇 년 뒤의 나는 금이 간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풀렸다.
돈 없는 나는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흔들며 말했다.
"늦게 먹으면 맛없다."
나는 웃었다.
"알았어."
거울이 빛으로 부서졌다.
돌아온 방, 아직 끝나지 않은 의심
눈을 뜨자 나는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은 손에 쥐어져 있었고, 창밖은 여전히 밤이었다. 실제로는 몇 초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하루, 몇 년, 두 개의 인생이 지나간 것처럼 피곤했다.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시뮬레이션 종료
획득한 통찰: 돈은 선택지를 늘리지만, 선택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획득한 규칙: 확인 전 단정 금지
신규 능력: 경계선 긋기 Lv.1
주의: Lv.1은 자주 흔들립니다
"친절하네. 마지막 경고까지."
나는 손안에 뭔가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삼각김밥이었다.
참치마요.
편의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환상이라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현실이라기엔 너무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이 되는 일만 따지기엔, 내 통장에 1000억이 찍힌 순간부터 세상은 이미 선을 넘었다.
나는 포장을 뜯었다.
삼각김밥은 조금 차가웠다.
그래도 맛있었다.
한 입을 삼킨 뒤, 나는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민재가 받았다.
"왜. 또 무슨 일인데? 설마 1억 넘는 치킨 찾았냐?"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까처럼 바로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의심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름을 들은 충격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민재야."
"어."
"내가 지금 이상한 얘기 할 건데, 먼저 화내지 말고 들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보통 내가 화낼 일이던데."
"은행 감사팀에서 연락이 왔어. 내 자산 정보가 외부로 공유된 정황이 있대. 그런데 그 과정에 지인 연락처가 하나 등록되어 있었고…"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게 네 번호래."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침묵은 길지 않았지만, 내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민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 한 음절에는 당황, 분노,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욕설 예고가 모두 들어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도 아직 네가 뭘 했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전화했어. 묻고 싶어서."
민재가 바로 말했다.
"야, 한도윤. 나 아니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재가 말을 이었다.
"나 진짜 아니야. 나 네 돈 얘기 누구한테 안 했어. 아니, 잠깐만. 내 번호가 왜 거기 들어가? 미친… 혹시 그때?"
"그때?"
민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며칠 전에 이상한 전화가 왔었어. 너랑 같이 일했던 사람이라면서, 네가 금융 상담 받는 중인데 비상 연락처 확인이 필요하다고. 나는 수상해서 끊었거든. 근데…"
"근데?"
"끊기 전에 내 이름 확인했어. 그리고 네 이름도 말했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때는 그냥 스팸인 줄 알았지. 너한테 이상한 전화 많이 온다고 했잖아. 괜히 불안하게 만들까 봐…"
민재의 말이 멈췄다.
그도 깨달은 것 같았다.
괜히 불안하게 만들까 봐 말하지 않은 작은 일이, 지금은 거대한 의심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일 만나자."
"지금 갈까?"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하려다 멈췄다.
거울 속 몇 년 뒤의 내가 떠올랐다.
그냥이면 나중에.
나는 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늦었고, 나도 감정이 정리가 안 됐어. 내일 낮에 만나. 그리고 그 전화 온 기록 있으면 지우지 말고 캡처해."
"알았어. 야, 도윤아."
"응."
"나 진짜 아니야."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믿고 싶어."
"믿어줘가 아니라?"
"지금은 그 말이 내 최선이야."
민재는 잠깐 조용했다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해서 증명할게."
전화를 끊고 나니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공책을 펼쳤다. 어젯밤 적었던 규칙 아래에 새 문장을 썼다.
규칙 5. 의심이 생기면 혼자 키우지 말고 확인한다.
잠시 생각하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규칙 6.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되, 사람을 문제처럼만 보지 않는다.
펜을 내려놓자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엄마: 자니?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도윤: 아직. 주말에 갈게. 김치 가지러.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엄마: 그래. 빈손으로 와. 김치는 내가 줄게.
나는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보았다.
1000억은 여전히 있었다.
문제도 여전히 있었다.
김정훈 실장, 외부로 공유된 정보, 민재 번호를 이용한 누군가, 나를 둘러싼 계약서와 사람들. 하나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작은 것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돈이 있는 세계와 돈이 없는 세계 중 하나를 고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나를 골라야 하는 사람이었다.
상태창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다음 챕터 예고
가장 비싼 것은 가격표가 없다
힌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잃기 직전, 사람은 진짜 가격을 알게 됩니다
나는 삼각김밥의 마지막 한 입을 먹었다.
차갑고, 평범하고, 이상하게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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