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는 끝났지만 영수증은 남는다
파티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나는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천장은 그대로였고, 침대도 그대로였고, 방 구석의 낡은 빨래건조대도 그대로였다. 어젯밤 호텔 펜트하우스의 야경과 가면과 샴페인은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식탁 위에 놓인 가방은 꿈이 아니었다.
가방 안에는 명함들이 들어 있었다.
백승조의 카드.
강해린의 재단 안내장.
유태오의 연락처.
한영원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힌 작은 명함.
그리고 내 낡은 공책.
나는 가방을 닫았다.
"좋아. 어제는 잘 넘겼어."
그 말을 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받았다.
"여보세요."
"한도윤 님, 안녕하십니까. 어제 아르카디아에서 인사드렸던 백승조 대표 측 법무팀입니다. 간단한 협업 가능성 검토를 위해 비밀유지계약서와 초상권 사용 동의서 초안을 보내드렸습니다."
"네?"
"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유태오 이사님 측에서도 투자 검토용 의향서와 적격투자자 확인서, 해외 법인 정보 제공 동의서를 전달하셨다고 합니다."
"잠깐만요. 저는 아무것도 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네,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다만 검토를 위한 선제 절차입니다."
선제 절차.
부자들의 세계에서는 마음먹기 전에 서류가 먼저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고 메일함을 열었다.
받은 편지함 숫자가 미쳐 있었다.
읽지 않음 47
밤사이 내 메일함에는 이상한 제목들이 줄줄이 쌓여 있었다.
[긴급] 투자 참여 의향서 초안
[검토 요청] 자산관리 위임계약서
[제안] 한도윤 님 개인 브랜드 보호 및 미디어 전략
[중요] 패밀리 오피스 설립 관련 기본 구조
[확인 필요] 비거주자 법인 활용 시 세무 검토 사항
[초안] 기부재단 설립 및 운영 규정
[친애하는 한도윤 님께] 단독 부동산 매입 기회
마지막 메일은 제목부터 수상했다. 친애하는 사람은 보통 내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첫 번째 첨부파일을 열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계약서가 나타났다. 글자는 작았고, 문장은 길었고, 한 문장 안에 쉼표가 너무 많았다. 계약서는 사람을 설득하는 문서가 아니라, 사람을 지치게 해서 동의하게 만드는 덫처럼 보였다.
두 번째 파일은 더 길었다.
세 번째 파일은 38쪽이었다.
네 번째 파일은 71쪽이었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다 나한테 온 거라고?"
그때 상태창이 떠올랐다.
신규 이벤트 발생
1000억을 지키는 게임
난이도: 돈을 쓰는 게임보다 훨씬 어려움
현재 공격 유형: 계약서 폭격, 친절한 사기, 세금 현실, 관리비 누수
실패 페널티: 잔고 감소, 인간 불신 증가, 잠 못 잠 +200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돈을 얻는 장면은 짧았다.
통장 앱을 켰고, 숫자가 있었다.
그런데 돈을 지키는 장면은 끝이 없었다.
계약서를 읽어야 했고, 사람을 만나야 했고, 질문해야 했고, 의심해야 했고, 모른다고 말해야 했다. 부자가 되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내 자유는 갑자기 71쪽짜리 계약서 뒤에 숨어버렸다.

계약서는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전 열 시, 윤서하가 우리 집 근처 작은 회의실을 예약했다.
나는 처음엔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바로 거절당했다.
"왜요? 커피 마시면서 보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옆자리에서 듣습니다."
"누가요?"
"듣고 싶은 사람이요."
그 말에 나는 바로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에는 윤서하 혼자가 아니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변호사, 짙은 남색 재킷을 입은 세무사, 노트북 두 대를 펼친 자산관리 담당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출력된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진짜 산은 아니었지만, 내 눈에는 백두산이었다.
윤서하가 차분하게 말했다.
"어제 이후로 한도윤 님에게 접근하는 속도가 빨라질 겁니다. 오늘은 우선 들어온 서류를 분류하겠습니다."
"분류요?"
변호사가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네. 당장 버릴 것, 보류할 것, 추가 자료를 요구할 것, 절대 서명하면 안 되는 것으로요."
"절대 서명하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까?"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보았다.
있구나.
많이 있구나.
변호사가 첫 번째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이건 백승조 대표 측에서 보낸 초상권 및 스토리 개발 권리 동의서입니다. 제목은 협업 검토인데, 내용상으로는 한도윤 님의 이름, 성장 배경, 자산 형성 과정, 인터뷰 내용, 공책 이미지까지 10년간 독점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입을 벌렸다.
"저는 그냥 파티에서 말한 건데요."
"그 말이 상품이 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강해린 쪽 자료도 비슷했다. '전시 검토'라고 되어 있었지만, 내가 공책을 빌려주면 복제본 제작, 온라인 전시, 후원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촬영까지 이어질 수 있는 조항이 숨어 있었다.
유태오의 서류는 더 화려했다.
의향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중간에 '독점 협의 기간'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서명하는 순간 나는 90일 동안 비슷한 다른 투자 제안을 검토하지 못하게 될 수 있었다. 또 '실사 비용 분담'이라는 항목에는 외부 컨설팅 비용을 내가 먼저 부담할 수도 있다고 적혀 있었다.
"실사 비용이 얼마나 되는데요?"
자산관리 담당자가 건조하게 답했다.
"상한이 없습니다."
나는 웃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사람이 웃는다는 걸 알게 됐다.
"상한이 없으면 얼마든지 청구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어제 유태오는 나에게 300억짜리 투자를 제안했다. 오늘 서류는 아직 투자도 하기 전에 내 지갑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태창이 떴다.
계약서 몬스터 등장
이름: 친절한 의향서
특징: 아직 아무것도 아닌 척하지만 서명하면 많은 것이 됨
약점: 질문, 변호사, 시간 끌기
금지 행동: "대충 괜찮겠지"라고 말하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충 괜찮겠지는 이제 금지어구나."
윤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특히 1000억 앞에서는요."
그때 세무사가 두꺼운 파일을 내 앞에 밀었다.
"그리고 세금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벌써요?"
"돈이 들어온 순간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번 돈인지도 잘 모르는데요."
"그래서 더 확인해야 합니다. 자금의 성격에 따라 세금 문제가 달라집니다. 증여인지, 소득인지, 우연한 지급인지, 오류인지, 법적 원인이 있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오류.
그 단어가 내 귀에 박혔다.
만약 이 1000억이 언젠가 잘못 들어온 돈이라고 밝혀진다면?
누군가 돌려달라고 하면?
나는 지금까지 그 가능성을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통장에 찍힌 숫자가 너무 현실 같아서, 오히려 그 숫자의 출처를 묻는 일이 무서웠다.
세무사는 내 표정을 보고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겁주려는 게 아닙니다. 지키려는 겁니다. 큰돈은 들어오는 순간보다 설명할 수 있는 순간에 진짜 내 돈이 됩니다."
설명할 수 있는 돈.
그 말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나는 돈이 있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돈이 왜 있고, 어디서 왔고, 어떻게 보관되고, 어떤 세금을 내고, 누구에게 어떤 권한을 줄지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설명하지 못하는 돈은 내 편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상상 못 한 지출은 조용히 통장을 갉아먹는다
회의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나는 중간에 세 번이나 커피를 마셨고, 두 번이나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라고 물었고, 한 번은 진심으로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가도 돈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자산관리 담당자가 엑셀 화면을 띄웠다.
"우선 현재 확정적으로 예상되는 비용입니다."
나는 화면을 보았다.
숫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법률 자문료.
세무 자문료.
보안 컨설팅 비용.
임시 사무공간 임대료.
개인정보 모니터링 서비스.
가족 안전 관련 비용.
보험료.
기존에 결제한 차량 유지비.
새로 계약한 집 관리비.
운전기사 후보 면접 비용.
비서 채용 수수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잠깐만요. 비서 채용 수수료요?"
"한도윤 님의 일정, 문서, 연락처, 결제 요청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 아직 회사원인데요."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낮에 본업을 하시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계속 연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직원 월급도 나가겠네요?"
"네."
"4대 보험도요?"
"네."
"퇴직금도요?"
"장기 고용 시 고려해야 합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부자가 되면 돈 걱정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돈 걱정의 종류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카드값이 무서웠다. 월세가 무서웠고, 친구 결혼식 축의금이 무서웠고, 갑자기 고장 난 노트북 수리비가 무서웠다.
지금은 세무 리스크가 무서웠다. 법률 자문료가 무서웠고, 보안 비용이 무서웠고, 나를 도와줄 사람의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하는 상상까지 무서웠다.
액수는 커졌고, 단어는 어려워졌고, 책임은 훨씬 많아졌다.
"1000억이면 이런 비용은 별거 아닌 거 아닌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윤서하가 조용히 나를 보았다.
"그 생각이 가장 위험합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큰돈을 잃는 사람들은 보통 한 번에 전부 잃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작은 문이 여러 개 열리면서 새어나갑니다. 자문료, 수수료, 관리비, 직원 급여, 지인 도움, 급한 투자금, 보증, 세금 추징. 하나하나는 버틸 수 있어도, 관리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자산관리 담당자가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그래프였다.
1000억이라는 커다란 막대가 있었고, 그 아래로 예상 세금 유보금, 안전자산, 생활비 한도, 투자 가능 금액, 유동성 비상금 같은 항목들이 나뉘어 있었다.
나는 막대가 쪼개지는 걸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1000억은 하나의 마법 주문 같았는데, 전문가들의 손에 들어가자 여러 개의 상자로 나뉘었다.
건드리면 안 되는 돈.
세금을 위해 묶어둘 돈.
생활비로 써도 되는 돈.
위험을 감수해도 되는 돈.
절대 남에게 빌려주면 안 되는 돈.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돈을 가진다는 건 커다란 숫자를 갖는 게 아니라, 그 숫자에 이름표를 붙이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돈은 유혹에 약했다.
이름 붙은 돈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믿었던 이름 옆에 빨간불이 켜졌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자산관리 담당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노트북 화면을 보다가 윤서하에게 눈짓했다.
윤서하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한도윤 님 계좌에서 외부 이체 예약이 걸렸습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네?"
"금액은 12억입니다. 오늘 오후 5시 30분 실행 예정입니다."
순간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은행 앱을 열었다.
정말이었다.
예약 이체 내역이 있었다.
12,000,000,000원
받는 사람 이름은 처음 보는 회사였다.
에이치앤케이 전략자문 주식회사
나는 숨이 막혔다.
"이거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윤서하가 즉시 말했다.
"은행에 전화하세요. 지금 바로."
나는 고객센터가 아니라 PB센터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제 계좌에서 12억 예약 이체가 걸렸습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즉시 정지해주세요."
담당자는 당황한 듯 확인하겠다고 했다.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변호사는 화면을 보며 말했다.
"이체 신청 IP와 인증 경로 확인이 필요합니다. 휴대폰 인증인지, 공동인증서인지, 대리 권한인지 봐야 합니다."
대리 권한.
나는 그 단어에서 멈췄다.
"대리 권한이요?"
윤서하가 나를 보았다.
"혹시 최근에 자산관리 위임장이나 계좌 조회 동의서에 서명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서명 안 했어요."
"오늘 말고요."
머릿속이 빠르게 뒤집혔다.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처음 1000억을 확인한 아침, 나에게 전화했던 사람은 강서윤 매니저였다. 그녀는 통화 내내 비밀번호나 인증번호를 말하지 말라고 했고, 공식 절차를 강조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꽤 믿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날 이후, 강서윤 매니저가 '상급 자산관리 검토를 도와줄 담당자'라며 김정훈 실장을 연결해준 적이 있었다. 짧은 화상 상담이었다. 김 실장은 차분했고, 설명은 쉬웠고, 나의 당황을 이해하는 척했다.
"고객님 같은 경우에는 우선 계좌 보안 강화와 자산 상담을 위한 기본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링크로 온 전자 서류 몇 장에 서명했다. 제목에는 '계좌 조회 동의', '상담 기록 활용 동의', '자문 절차 사전 확인'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 많은 숫자 앞에서 너무 빨리 어른인 척했다.
서류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은행 담당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한도윤 고객님, 이체는 즉시 보류 처리했습니다. 다만 신청 경로가 내부 PB 전용 시스템을 통한 자문 수수료 지급 요청으로 확인됩니다."
"내부요?"
"네. 담당자는 김정훈 실장으로 확인됩니다."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김정훈.
강서윤 매니저가 연결해준 상급 PB 담당자.
믿었던 이름 옆에 빨간불이 켜지는 순간, 세상은 조금 다른 색으로 보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사람이 제 돈을 빼가려고 한 겁니까?"
전화기 너머의 담당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 관련 부서에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사실 확인.
조사.
내 돈 12억이 사라질 뻔했는데, 세상은 여전히 단정한 단어를 사용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상태창이 떴다.
긴급 이벤트: 내부자 공격
공격자 후보: 믿었던 전문가
손실 예정 금액: 12억
방어 성공 여부: 임시 보류
정신 피해: 매우 큼
새 디버프 획득: "누구를 믿어야 하지?"
나는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이런 디버프는 안 받고 싶은데."
상태창은 잔인하게도 아무 말이 없었다.
사기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는다
김 실장은 그날 저녁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은행에서는 내부 감사팀이 확인 중이라고 했고, 변호사는 즉시 내용증명과 형사 고소 가능성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윤서하는 내 모든 계좌의 권한과 연결된 서비스를 점검하자고 했다.
나는 회의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12억.
1000억 중 12억.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988억 남잖아."
그런데 문제는 금액이 아니었다.
내가 믿은 사람이 내 돈을 향해 손을 뻗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손이 밖에서 온 게 아니라, 내가 문을 열어준 안쪽에서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사기는 검은 모자를 쓰고 골목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사기는 깨끗한 셔츠를 입고, 명함을 내밀고, "고객님을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사기는 어려운 단어를 쉬운 목소리로 포장했다. 사기는 내가 피곤할 때, 내가 모른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때, 내가 빨리 어른처럼 보이고 싶을 때 슬쩍 서류를 밀어 넣었다.
나는 그제야 지난 며칠을 다시 떠올렸다.
가짜 은행 직원.
수상한 투자 제안.
친척을 통해 퍼진 소문.
아르카디아의 친절한 미소.
그리고 진짜 은행 안에 있던 가짜 같은 사람.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멀리서만 오지 않았다.
내 바로 옆 의자에도 앉아 있었다.
윤서하가 내 앞에 따뜻한 물을 놓았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컵을 잡았다.
"안 괜찮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저 사람 믿었어요."
"네."
"처음엔 윤서하 씨보다 그 사람이 더 믿음직해 보였어요. 은행 사람이니까. 명함도 있고, 사무실도 있고, 말도 잘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앞으로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윤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 침묵이 답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침묵이 필요했다. 쉬운 대답은 거의 다 위험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구조를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조요?"
"한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돈을 움직일 수 없는 구조. 서명 전에 반드시 두 명 이상이 검토하는 구조. 큰 금액은 숙려 시간이 지나야 나가는 구조. 이해하지 못한 문서는 자동으로 멈추는 구조. 사람의 선의를 믿되, 선의가 무너져도 돈이 바로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나는 컵을 내려다보았다.
구조.
그 단어는 차갑지만,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
사람을 계속 의심하는 건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시스템을 만들어두면, 적어도 모든 사람의 눈을 내가 밤새 지켜볼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방어 규칙을 만드는 밤
그날 밤, 우리는 임시 방어 규칙을 만들었다.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윤서하가 굵은 글씨로 썼다.
한도윤 자산 방어 규칙 v1.0
나는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게임 패치노트 같네요."
"실제로 패치입니다. 취약점이 발견됐으니까요."
상태창이 반응했다.
패치 업데이트 가능
버전: 부자 초보자 v1.0 → 생존형 자산가 v1.1
업데이트 내용: 자동 신뢰 기능 삭제, 서명 전 검토 기능 추가, 24시간 쿨다운 적용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동 신뢰 기능 삭제라니. 좀 슬프네."
그래도 규칙은 필요했다.
앞으로 1억 원 이상 움직이는 돈은 최소 24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투자, 기부, 대여, 보증, 선급금 모두 포함이었다. 어떤 문서도 변호사와 세무사 검토 없이 서명하지 않기로 했다. 계좌 권한은 전부 재설정하고, 기존 위임장은 모두 철회하기로 했다. 일정과 연락은 임시 비서가 관리하되, 결제 권한은 주지 않기로 했다. 가족과 친구에게 돈 이야기를 할 때도 즉흥적으로 약속하지 않기로 했다.
화이트보드가 규칙으로 가득 찰수록 내 마음은 조금씩 무거워졌다.
이상했다.
규칙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동시에 나를 가두는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부자가 되면 마음대로 살 줄 알았는데요."
윤서하가 펜을 내려놓았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지금은 마음대로 하지 않기 위한 규칙을 만들고 있네요."
"그게 돈을 지키는 일입니다."
나는 화이트보드를 보았다.
24시간 기다리기.
두 명 이상 검토하기.
서명 전 질문하기.
모르는 건 멈추기.
말로 쓰면 쉬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번 나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다.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 기회를 놓치기 싫은 마음, 귀찮아서 넘기고 싶은 마음. 돈을 노리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순간의 나일지도 몰랐다.
그때 민재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받았다.
"왜."
"목소리 왜 죽었냐? VIP 파티 후유증?"
나는 잠시 침묵했다.
민재가 바로 진지해졌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오늘 일을 짧게 말했다. 김 실장, 12억, 예약 이체, 보류.
전화기 너머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미친 거 아니야? 은행 사람이?"
"그러게."
"너 괜찮냐?"
그 질문을 듣자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회의실에서 전문가들은 계속 돈을 지키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필요한 말들이었다. 중요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민재의 질문은 돈이 아니라 나를 향해 있었다.
너 괜찮냐.
나는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안 괜찮은데, 괜찮아지는 중."
"야, 너 이제 아무도 믿지 말자 이런 이상한 결론 내리지 마라."
나는 피식 웃었다.
"이미 반쯤 내렸는데."
"멈춰. 그럼 너 진짜 게임 속 외로운 부자 된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게 아니라,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말라는 거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민재의 말이 윤서하의 말보다 단순했는데, 이상하게 같은 뜻이었다.
사람을 믿어도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않는다.
친구다운 문장이라 더 오래 남았다.
"너 오늘 좀 똑똑하다?"
"원래 똑똑했어. 네가 돈 생기고 나서 잠깐 날 못 알아본 거지."
"고맙다."
"고마우면 치킨 사. 단, 1억 넘는 치킨이면 24시간 기다리고."
나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도 나를 보았다. 나는 손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웃음이 멎고 나자, 마음속에 남아 있던 얼음이 아주 조금 녹아 있었다.
돈을 지키려다 나를 잃지 않으려면
밤 11시가 넘어서야 회의가 끝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창밖을 보았다. 도시는 여전히 밝았다. 빌딩마다 불이 켜져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야근을 하고, 누군가는 장사를 마감하고, 누군가는 마지막 지하철을 타기 위해 뛰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중 한 명이었다.
지금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내 옆에는 계약서 더미와 세무 파일과 보안 체크리스트가 놓여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엄마: 밥은 먹었어?
나는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12억을 잃을 뻔했고, 세금과 법률 문서에 파묻혔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그런데 엄마는 여전히 밥을 물었다.
그 질문이 갑자기 너무 귀했다.
도윤: 먹었어. 엄마는?
엄마: 나도. 얼굴 보고 싶네. 너무 무리하지 마.
나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돈을 지키려면 사람을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나를 지키려면 누군가는 믿어야 했다.
그 균형을 찾는 일이, 어쩌면 이 게임의 진짜 난이도일지도 몰랐다.
나는 책상 위에 공책을 펼쳤다.
중학생의 내가 그린 몬스터들 사이에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오늘의 규칙을 적었다.
1000억을 지키는 게임
규칙 1. 빨리 결정하라고 하면 느려진다.
규칙 2. 모르면 멈춘다.
규칙 3. 사람은 믿어도 권한은 나눈다.
규칙 4. 돈을 지키느라 나를 잃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니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때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챕터 클리어 조건 일부 달성
계약서 폭격: 생존
내부자 공격: 1차 방어 성공
세금 현실: 인식 완료
인간 불신 게이지: 상승 중
다음 위험: 당신이 믿는 세계와 당신이 사라지는 세계의 분기점
나는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
내가 믿는 세계.
내가 사라지는 세계.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상태창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은행 감사팀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한도윤 님, 확인된 내용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김정훈 실장이 단독으로 움직인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고객님의 자산 정보가 외부로 공유된 정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단에… 지인으로 등록된 연락처 하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심장이 다시 내려앉는 걸 느꼈다.
"지인이라면 누구요?"
짧은 침묵.
그리고 들려온 이름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창밖의 도시 불빛이 갑자기 멀어졌다.
1000억을 지키는 게임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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