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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장바구니에 담기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천장을 보았다.

정확히는 천장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펜트하우스 침실의 천장은 이상하게 매끈해서, 불을 끄면 거울처럼 희미하게 사람을 비췄다. 어제까지는 그게 고급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조금 불편했다.

자고 일어나도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너 이제 뭐 할 건데?"라고 묻는 얼굴로.

침대 옆 협탁에는 어젯밤 조립하다 만 로봇이 서 있었다. 아직 다리 하나가 없어서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1000억을 가진 남자의 첫 작품이 외발 로봇이라니. 투자자들이 보면 당장 지분을 회수할 비주얼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은행 PB센터.

윤서하.

민재.

엄마.

그리고 모르는 번호 세 개.

모르는 번호는 이제 공포 영화의 문소리처럼 느껴졌다. 열면 안 될 것 같고, 안 열면 더 신경 쓰였다.

나는 먼저 엄마 메시지를 확인했다.

엄마: 김치찌개 끓여놨다.

그 한 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일정 알림이었다.

다음은 민재였다.

민재: 어제 말 심했으면 미안.

민재: 근데 진짜 조심해라. 너 지금 돈으로 사람들 감정 버튼 누를 수 있음.

나는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어제 나는 "갖고 싶은 거 있냐"는 말 하나로 민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선물을 하려 했지만, 민재는 시험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돈이 많아지면 선의도 커질 줄 알았다.

그런데 선의가 커지는 게 아니라, 선의의 그림자가 커졌다.

그때 상태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질문 활성화
부자가 되면 꿈도 커질까?
조건: 큰돈으로 할 수 있는 일 3가지를 확인하십시오.
보상: '사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의 차이를 이해할 확률 증가
경고: 남의 꿈은 완성품처럼 보이지만, 사용 설명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찼다.

"이번엔 또 뭘 사라는 건데."

상태창은 기다렸다는 듯 선택지를 띄웠다.

A. 게임 회사를 산다. 창작자 지망생의 오랜 로망 실현 가능
B. 카페 거리를 산다. 낭만적 건물주 루트 개방
C. 우주여행 회사에 투자한다. 인류 스케일의 허세 획득 가능
D. 아무것도 하지 않고 김치찌개를 먹으러 간다. 엄마 만족도 +30, 이벤트 진행 지연

나는 D를 오래 보았다.

솔직히 가장 끌렸다.

하지만 상태창의 질문은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배운 게 있다면, 돈이 생긴 뒤의 삶은 선택을 미룰수록 더 이상한 방식으로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게임 회사.

카페 거리.

우주여행 회사.

어제의 선택지가 '무엇을 살까'였다면, 오늘의 선택지는 '무엇이 될까'에 가까웠다. 사장님? 건물주? 우주 사업가?

셋 다 내 입에 붙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여전히 평범했다. 눈 밑은 조금 어두웠고, 머리는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우주 사업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고르다 참치마요와 전주비빔 사이에서 3분 고민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때 윤서하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받았다.

"한도윤 님, 좋은 아침입니다."

윤서하의 목소리는 언제나 아침보다 먼저 일어난 사람 같았다.

"좋은 아침인지 아직 판단 중입니다."

"그럼 판단에 도움이 될 만한 일정을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기도 전에요?"

"한도윤 님께서 오늘쯤 '소비 다음 단계'를 고민하실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나는 욕실 거울을 보며 입을 벌렸다.

"혹시 제 상태창 보세요?"

"상태창이요?"

"아닙니다. 잊어주세요."

윤서하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조차 계산된 것 같았다.

"오늘 세 곳을 보시면 어떨까요. 하나는 게임 회사, 하나는 상권 개발 중인 카페 거리, 하나는 민간 우주여행 스타트업입니다."

나는 칫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세 개를 제가 왜 봐요?"

"살 수도 있으니까요."

너무 쉽게 말했다.

마치 편의점에서 '하나는 드시고 하나는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듯이.

나는 세면대에 두 손을 짚었다.

돈이 많아지면 하고 싶은 일이 선명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이 갑자기 거대한 메뉴판을 펼쳐 보였다. 문제는 메뉴 이름이 너무 화려해서 맛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게임 회사를 사면 나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걸까.

카페 거리를 사면 나는 낭만을 파는 사람이 되는 걸까.

우주여행 회사에 투자하면 나는 미래를 여는 사람이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남들이 이미 만들던 꿈의 결제자가 되는 걸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상태창이 반짝였다.

일정 확정
초보 부자 난이도: 급상승
준비물: 질문, 침착함, 알아듣는 척하지 않는 용기

마지막 줄을 보고 나는 뜨끔했다.

알아듣는 척하지 않는 용기.

그건 아마 오늘 가장 부족할 예정이었다.

부자가 되면 꿈도 커질까

게임 회사를 사면 게임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첫 번째 목적지는 강남의 한 오피스 빌딩이었다.

회사 이름은 몽키드래곤 스튜디오였다. 이름만 보면 장난감 회사 같았지만, 윤서하의 설명에 따르면 꽤 유명한 모바일 게임을 만든 곳이라고 했다. 나는 그 게임을 알고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자동 전투를 켜놓고, 회의 직전 몰래 보상을 수령하던 게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벽면에 거대한 캐릭터 일러스트가 붙어 있었다. 검을 든 기사, 날개 달린 마법사, 귀여운 척하지만 눈빛이 수상한 펫. 직원들은 후드티와 슬리퍼 차림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긴 자유롭구나.'

그 생각을 하자마자, 회의실 안에서 누군가 절규했다.

"이 빌드 또 터졌어!"

자유에는 대가가 있었다.

대표는 마흔 전후로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반짝였고, 다크서클은 예술적으로 깊었다.

"한도윤 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는 현재 차세대 수집형 오픈월드 액션 RPG와 방치형 소셜 메타버스 요소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라이브 서비스 모델을 준비 중입니다."

나는 첫 문장부터 길을 잃었다.

수집형.

오픈월드.

액션 RPG.

방치형.

소셜.

메타버스.

하이브리드.

라이브 서비스.

단어들이 회의실 공중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상태창이 떴다.

이해도: 17%
끄덕임 숙련도: +8
위험: 모르는 상태로 투자 결정 시 '비싼 고개 끄덕임' 발생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표는 자료 화면을 넘겼다. 그래프가 나왔다. 지표가 나왔다. DAU, ARPU, LTV, CPI 같은 영어 약자들이 쏟아졌다. 나는 속으로 하나씩 해석하려 했다.

DAU는 아마 하루 이용자.

ARPU는… 아르푸? 강아지 이름 같았다.

LTV는 TV보다 긴 건가.

CPI는 물가 지수 아닌가?

나는 점점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대표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핵심은 유저 리텐션입니다. 초반 퍼널에서 이탈을 줄이고, 과금 전환율을 높이되 페이투윈 피로감은 낮춰야 합니다. 커뮤니티 팬덤을 확보하면 IP 확장도 가능하고요."

나는 결국 손을 들었다.

"죄송한데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지금 절반도 이해를 못 했습니다."

대표가 눈을 깜빡였다.

윤서하도 옆에서 나를 보았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말을 이었다.

"저한테는 쉽게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예를 들면… 사람들이 이 게임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대표가 웃었다.

피곤한 사람의 웃음이었지만, 어딘가 반가운 웃음이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사실 저희도 그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표는 화면 속 화려한 캐릭터들을 보며 말했다.

"처음엔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이랑 밤새 이야기할 수 있는 세계요. 그런데 회사가 커지고, 투자금이 들어오고, 매출 목표가 생기면서 어느 순간 '재밌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붙잡을 수 있는가'를 더 많이 말하게 됐습니다."

그 말은 게임 회사 회의실의 조명보다 더 선명했다.

돈이 들어오면 꿈이 커질 줄 알았는데, 어떤 꿈은 돈이 들어오면서 모양이 바뀐다. 만들고 싶던 세계가 수익 모델이 되고, 웃기고 싶던 장면이 체류 시간으로 바뀌고, 사랑받고 싶던 캐릭터가 판매 패키지로 묶인다.

대표는 나를 보았다.

"한도윤 님이 저희 회사를 인수하신다면, 솔직히 저희는 숨통이 트입니다. 개발 기간도 벌고, 마케팅도 할 수 있고, 실패할 여유도 생기겠죠."

"실패할 여유요?"

"네. 창작은 실패할 여유가 없으면 점점 안전한 것만 만들게 됩니다."

그 말은 내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나는 어릴 때 게임을 좋아했다. 낡은 컴퓨터 앞에서 친구들과 밤을 새웠고, 언젠가 내가 만든 세계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멀고 비현실적인 꿈이라서, 나는 일찌감치 마음속 창고에 넣어두었다. 월급, 월세, 카드값 같은 현실적인 몬스터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은 돈이 있었다.

갑자기 그 창고 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남의 회사가 보였다. 남의 직원들, 남의 캐릭터, 남의 일정표, 남의 야근, 남의 꿈.

내가 이 회사를 사면, 나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될까.

아니면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소유한 사람이 될까.

상태창이 떠올랐다.

선택지 갱신
A-1.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다. 영향력 +50, 책임 +80
A-2. 창작 자유 펀드를 만든다. 간접 지원 +40, 통제력 낮음
A-3. 그냥 게임 굿즈만 사고 나온다. 추억 +5, 회피 +20

나는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은 제가 돈을 넣으면 뭘 하고 싶으세요?"

대표는 망설이지 않았다.

"직원들 퇴근시키고 싶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다음 게임은, 매출표 보기 전에 재미부터 테스트하고 싶습니다."

회의실 밖에서 누군가 다시 외쳤다.

"빌드 살아났다!"

곧이어 다른 사람이 외쳤다.

"아니, 다시 죽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게임 회사는 멋진 곳이었다.

동시에 무서운 곳이었다.

꿈이 굴러가는 공장 같았다. 반짝이는 상상력과 엑셀표와 커피와 피곤한 눈빛이 한데 섞여 있었다.

나는 당장 사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회의실을 나오며 대표에게 말했다.

"제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회사를 사면, 아마 모두에게 위험할 것 같습니다."

대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아시는 투자자는 드뭅니다."

상태창이 반응했다.

초보 부자 스킬 획득: 모른다고 말하기
효과: 사기 피해 확률 감소, 전문가 존중도 소폭 증가
부작용: 스스로의 무지와 정면으로 마주침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생각했다.

무지를 인정하는 건 생각보다 비쌌다.

자존심이 결제됐다.

카페 거리에는 커피보다 많은 것이 있다

두 번째 목적지는 오래된 동네의 작은 거리였다.

지하철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낮은 건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빨간 벽돌집, 오래된 간판, 낡은 문틀, 손글씨 메뉴판. 골목 끝에는 작은 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왕처럼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심사하고 있었다.

윤서하는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이 구역은 아직 대형 개발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개별 건물주들이 흩어져 있어서 매입 협상이 복잡하지만, 한 번 묶으면 가치가 크게 올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골목을 둘러보았다.

"카페 거리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뜻인가요?"

"시간과 금액이 충분하면 가능합니다."

또 나왔다.

가능합니다.

부자 세계의 주문.

첫 번째 카페는 느린 오후라는 이름이었다. 문을 열자 종이 딸랑 울렸다. 커피 향과 구운 버터 냄새가 섞여 있었다. 테이블은 여섯 개뿐이었고, 창가 자리에는 노트북을 펼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벽에는 손님들이 남긴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여기 라떼 마시고 면접 붙었습니다.

헤어진 날 울면서 케이크 먹은 곳. 지금은 괜찮아요.

사장님 오래 해주세요.

카페 사장은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윤서하가 인사를 건네자 사장은 우리를 위아래로 살폈다.

"또 개발 얘기예요?"

'또'라는 말에 공기가 달라졌다.

윤서하는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은 한도윤 님께서 상권을 직접 보고 싶어 하셔서요."

사장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젊은 분이 건물 사러 다녀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사는 건 아니고요. 그냥… 볼 수 있다고 해서요."

"돈 많은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냥 본다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사장은 커피를 내려주었다. 잔을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이 골목 예쁘죠?"

"네. 좋네요."

"예쁜 건 돈 냄새 맡기 전까지예요."

그 말은 커피보다 진했다.

사장은 창밖을 보았다. 맞은편에는 작은 독립서점이 있었고, 그 옆에는 꽃집이 있었다. 조금 더 안쪽에는 빈티지 옷가게와 사진관이 있었다.

"처음엔 아무도 안 오던 골목이었어요. 임대료가 싸서 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왔죠. 돈은 없지만 자기 취향 하나 믿고 버티는 사람들이요. 그러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사진 찍고, 글 올리고, 예쁘다고 하고. 그러면 꼭 누군가 와요. 이거 돈 되겠다고."

나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거리 전체를 사면…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장이 나를 보았다.

"좋게요?"

"임대료를 안정시키고, 가게들이 오래 있을 수 있게 하고, 공간을 정리하고…"

말하면서도 내 말이 어딘가 광고 문구처럼 들렸다.

사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대부분은 먼저 '브랜딩'을 말해요. 그다음 '활성화'를 말하고, 마지막엔 원래 있던 사람들을 '콘셉트에 안 맞는다'고 해요."

그때 상태창이 떴다.

전문가 용어 감지
브랜딩: 멋있게 포장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원래 있던 것을 지운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활성화: 사람이 많아진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임대료가 오른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콘셉트: 누군가에게는 정체성, 누군가에게는 퇴거 통보입니다.

나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게임 회사에서는 숫자와 약자들이 나를 길 잃게 했다. 여기서는 예쁜 단어들이 나를 길 잃게 했다. 낭만, 상권, 리뉴얼, 가치 상승, 지역 활성화. 듣기만 하면 모두 좋아 보였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의 월세와 생계와 오래된 단골들이 들어 있었다.

카페 사장이 물었다.

"정말 이 거리를 사고 싶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골목을 지켜내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임대료를 낮추고, 사장님들이 안심하고 장사하고, 사람들은 '와, 저 부자는 다르다'고 말하는 상상.

하지만 그 상상 한가운데에는 이상하게 내가 있었다.

도와주는 나.

칭찬받는 나.

멋있는 나.

정작 이 골목 사람들은 배경처럼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은 이 거리가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요?"

사장은 조금 놀란 듯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 머신을 닦고, 잔을 정리하고, 창밖 고양이를 한 번 본 뒤에야 말했다.

"그냥… 내일도 오늘처럼 문 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너무 작은 꿈 같았다.

그런데 그 작은 꿈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1000억을 가진 나는 우주여행 회사를 볼 예정인데, 이 사람의 꿈은 내일도 문을 여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더 큰 꿈일까. 금액으로 따지면 우주가 컸다. 하지만 마음의 무게로 따지면 알 수 없었다.

카페를 나오자 윤서하가 내 표정을 살폈다.

"생각보다 복잡하시죠."

"네."

"부동산은 숫자로 보면 단순합니다. 위치, 면적, 수익률, 개발 가능성."

"사람으로 보면요?"

윤서하는 잠시 멈췄다.

"끝없이 복잡합니다."

우리는 골목을 걸었다. 독립서점 주인은 택배 박스를 정리하고 있었고, 꽃집 앞에서는 아이가 작은 화분을 고르고 있었다. 사진관 창문에는 오래된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의 졸업, 누군가의 결혼, 누군가의 젊은 날.

나는 이 거리를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살 수 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선택지 갱신
B-1. 카페 거리 매입 후 직접 운영한다. 낭만 +60, 갈등 +70
B-2. 임대료 안정 재단을 만든다. 보호 가능성 +45, 지속 관리 필요
B-3. 커피만 마시고 감상적인 글을 쓴다. 자기만족 +20, 실질 변화 0

나는 상태창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실질 변화 0은 너무하잖아."

하지만 반박하기 어려웠다.

꿈은 감상문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내일에 손대는 일이었다.

우주는 생각보다 비싸고, 회의는 더 어렵다

세 번째 목적지는 도심 외곽의 연구단지였다.

건물 외벽에는 오르빗 게이트라는 로고가 붙어 있었다. 이름만 보면 이미 화성에 지점이 있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아직 지구의 회의실에서 투자금을 기다리는 회사였다.

로비에는 작은 로켓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옆에는 우주복을 입은 마네킹이 서 있었다. 마네킹의 표정은 없었지만, 왠지 "저도 아직 못 가봤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표는 젊었다.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였고, 눈빛은 피곤하다기보다 뜨거웠다. 그는 악수를 하자마자 말했다.

"한도윤 님, 저희는 단순한 우주여행 회사가 아닙니다. 인류의 이동 반경을 확장하는 플랫폼입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플랫폼이 또 나왔다.

요즘 세상에서 플랫폼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배달도 플랫폼, 영상도 플랫폼, 중고 거래도 플랫폼, 이제는 우주도 플랫폼이었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거대한 화면에 지구 사진이 떠 있었다. 파란 행성. 구름. 검은 우주. 솔직히 멋있었다. 인간은 지구 사진 앞에서 쉽게 겸손해지고, 쉽게 지갑을 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표는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의 핵심 경쟁력은 재사용 발사체 기반 준궤도 체험 모델과 고고도 캡슐 관광 서비스의 결합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우주 호텔 모듈, 미세중력 연구 플랫폼, 초고속 대륙 간 이동까지 확장 가능합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준궤도.

고고도.

캡슐.

미세중력.

대륙 간 이동.

아까 게임 회사의 영어 약자들과 카페 거리의 낭만적 단어들이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여기는 단어 하나하나가 대기권을 뚫고 있었다.

상태창이 떴다.

이해도: 9%
허세 감염도: +35
'인류'라는 단어에 약해지는 중

대표가 말했다.

"지금 투자하시면 한도윤 님은 초기 전략 파트너로 참여하시게 됩니다.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가 아니라, 한국 민간 우주관광 산업의 상징적 인물이 되실 수 있습니다."

상징적 인물.

그 말은 위험했다.

나는 어제 명품 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서 잠깐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은 우주 회사 회의실에서 인류의 미래를 여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 보이는 건 늘 빠르고, 되는 건 늘 느렸다.

나는 물었다.

"근데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우주에 가본 적은 있나요?"

대표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아직은 없습니다. 현재 기술 검증 단계입니다."

"언제 가능합니까?"

"일정은 투자 규모와 규제 승인, 시험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쉽게 말하면요?"

대표는 잠시 숨을 골랐다.

"돈이 많이 필요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제야 문장이 지구로 내려왔다.

나는 화면 속 지구를 보았다.

"왜 하시는 거예요?"

대표가 웃었다.

"어릴 때부터 우주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 대답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믿음이 갔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합니다. 별을 보고, 로켓 사진을 보고, 언젠가 저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어른이 되면 대부분 포기합니다. 비용, 기술, 규제, 위험. 포기할 이유는 너무 많거든요."

그는 화면을 넘겼다. 이번엔 아이들이 천문대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사진이 나왔다.

"저는 그 포기할 이유들을 하나씩 줄이고 싶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멋졌다.

정말 멋졌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나는 멋진 말에 약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와 '포기하지 않았다'가 붙은 꿈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포기했던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임 만들기, 글쓰기, 작은 카페에서 하루 종일 책 읽기, 엄마를 좋은 집에 모시기, 친구들과 걱정 없이 여행 가기. 나는 많은 것을 현실적이라는 이름으로 접어두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은 우주를 접지 않았다.

내가 이 회사에 투자하면, 나는 그 꿈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남이 평생 품은 꿈에 내 이름표를 붙이는 걸까.

상태창이 떠올랐다.

선택지 갱신
C-1. 대규모 투자로 우주여행 프로젝트 참여. 스케일 +100, 위험 +100
C-2. 기술 검증 단계별 투자. 신중함 +40, 속도 낮음
C-3. 우주복 입고 사진만 찍는다. 허세 +70, 실질 변화 0, 사진 유출 시 민재 놀림 +999

나는 C-3을 보자마자 마음속에서 지웠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 입어보고 싶었다.

대표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한도윤 님, 돈은 연료입니다. 연료가 없으면 로켓은 뜨지 못합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돈은 연료.

맞는 말 같았다. 하지만 연료가 많다고 해서 모든 로켓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방향이 틀리면 더 멀리 잘못 갈 뿐이다.

나는 회의실 유리창 밖을 보았다. 연구단지 위로 낮은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주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만 보였다.

나는 말했다.

"대표님 꿈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꿈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대표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투자하시면 안 됩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왜요?"

"남의 꿈에 취해서 투자하면, 나중에 반드시 원망하게 됩니다. 꿈은 멋있을수록 실패했을 때 책임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를 한참 보았다.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돈을 넣지 말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이 사람이 진짜로 우주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통장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말은 때때로 안개가 된다

저녁 무렵, 윤서하는 나를 한 호텔 라운지로 데려갔다.

"오늘 보신 세 곳을 정리할 자문 미팅입니다."

"자문이요?"

"투자 변호사, 회계사, 세무 전문가, 자산관리 담당자, 임팩트 투자 컨설턴트가 오실 겁니다."

나는 멈춰 섰다.

"제가 지금 도망가면요?"

"엘리베이터가 저쪽입니다."

"진짜 알려주시면 어떡해요."

윤서하는 웃지 않고 말했다.

"도망도 선택입니다. 다만 도망친 뒤에도 결정은 남습니다."

무서운 사람.

회의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노트북을 열고 있었고,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 한 잔을 마셨다. 왠지 오늘은 물도 계약서 맛이 났다.

첫 번째로 투자 변호사가 말했다.

"게임 회사 인수는 구주 매입과 신주 투자 구조를 병행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핵심 인력의 잔류 조건, 지식재산권 귀속, 미지급 인센티브, 퍼블리싱 계약 리스크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메모장에 썼다.

게임 회사: 사람 안 나가게 해야 함. 캐릭터 누구 건지 확인. 숨은 약속 많음.

두 번째로 회계사가 말했다.

"카페 거리 매입은 개별 부동산별 권리관계와 임대차 계약을 봐야 합니다. 수익률만 보면 매력도가 낮을 수 있으나, 장기 개발가치와 브랜드 프리미엄을 반영하면 다른 평가가 가능합니다."

나는 썼다.

카페 거리: 서류 복잡. 돈만 보면 별로일 수 있음. 마음까지 보면 더 복잡.

세 번째로 세무 전문가가 말했다.

"재단 설립을 고려하실 경우 출연재산, 공익 목적성, 사후관리 의무, 특수관계인 거래 제한을 면밀히 검토하셔야 합니다. 단순 기부와 운영형 재단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펜을 멈췄다.

"죄송한데요. 사후관리 의무가 뭐예요?"

세무 전문가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쉽게 말해, 좋은 일 하겠다고 돈을 넣은 뒤에도 그 돈이 정말 좋은 일에 쓰이는지 계속 증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은 생각보다 서류가 많았다.

네 번째로 우주 스타트업 담당 기술 자문이 말했다.

"해당 기업은 비전은 크지만 기술 성숙도는 초기 단계입니다. 단계별 마일스톤 투자가 적절합니다. 엔진 테스트, 캡슐 안전성, 보험, 규제 승인 여부를 기준으로 트랜치 투자를 권합니다."

나는 썼다.

우주: 멋있음. 아직 모름. 한 번에 다 넣지 말 것. 트랜치=나눠서 돈 주기.

상태창이 떠올랐다.

전문가 언어 번역 진행 중
리스크: 망할 수도 있음
시너지: 잘되면 같이 좋아 보임
밸류에이션: 지금 이 꿈에 가격표를 붙이는 행위
엑싯: 빠져나갈 문. 들어가기 전에 확인해야 함
임팩트: 돈 말고도 세상에 남기는 흔적

나는 상태창을 보고 싶지 않은데도 고마웠다.

회의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했고, 친절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내 머릿속은 더 흐려졌다.

게임 회사는 창작의 자유가 필요했다.

카페 거리는 사람들의 내일이 걸려 있었다.

우주 회사는 인류의 미래를 말했지만 실패 확률도 컸다.

재단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운영을 잘못하면 보여주기식 장식품이 될 수 있었다.

투자는 돈을 불릴 수 있지만, 내가 모르는 세계에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기도 했다.

창작은 나를 설레게 했지만, 나는 아직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몰랐다.

기부는 따뜻해 보였지만, 잘못하면 내 죄책감을 남에게 떠넘기는 방식이 될 수 있었다.

회의실의 조명이 점점 밝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잠깐만요."

모두가 나를 보았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지금 뭘 결정하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말할 수 있었다.

"아침에는 돈이 많으면 꿈도 커질 줄 알았습니다. 게임 회사도 사고, 거리도 사고, 우주에도 투자하고, 재단도 만들고. 그런데 지금은… 남들이 오래 키워온 꿈 앞에 제가 갑자기 계산서를 들고 나타난 기분입니다."

윤서하가 조용히 나를 보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제가 돈을 내면 그 꿈에 참여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게 제 꿈인지, 그냥 남의 꿈을 사서 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회의실이 고요해졌다.

그때 투자 변호사가 노트북을 덮었다.

"좋은 고민입니다."

회계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지금 바로 결정하지 않으시는 게 합리적입니다."

세무 전문가는 말했다.

"돈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목적은 천천히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 말을 메모했다.

목적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이벤트 중간 평가
큰 선택지 확인 완료: 사업, 부동산, 우주, 재단, 투자
현재 상태: 선택지 과부하
핵심 오류: 돈이 생기면 꿈이 자동 생성된다고 착각함
권장 행동: 조용한 곳에서 자신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윤서하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나는 휴대폰을 봤다.

엄마의 메시지가 아직 화면 위쪽에 남아 있었다.

김치찌개 끓여놨다.

나는 말했다.

"집이요."

그리고 덧붙였다.

"작은 집 말고, 엄마 집."

남의 꿈을 살 것인가, 내 꿈을 만들 것인가

엄마 집 현관을 열자마자 김치찌개 냄새가 나를 잡아끌었다.

어떤 냄새는 사람을 설득하지 않는다. 그냥 데려간다. 나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배가 고파졌다.

엄마는 식탁에 냄비를 올리고 있었다.

"손 씻어."

"응."

1000억을 가진 사람도 엄마 집에서는 손부터 씻어야 했다. 이것이 진짜 질서였다.

식탁에는 김치찌개, 계란말이, 멸치볶음, 김, 그리고 어제 가져왔던 반찬통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엄마는 내 앞에 밥을 밀어주었다.

"오늘은 또 뭘 했는데 얼굴이 그렇게 넋이 나갔니?"

나는 숟가락을 들다가 멈췄다.

"게임 회사 보고 왔어."

엄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락실?"

"아니, 게임 만드는 회사."

"그다음은?"

"카페 거리."

"커피 마셨니?"

"응."

"또?"

"우주여행 회사."

엄마가 국자를 든 채 멈췄다.

"밥 먹기 전에 그런 말 하지 마. 체해."

나는 웃음이 터졌다.

엄마는 내 그릇에 찌개를 떠주며 말했다.

"그래서 뭘 사려고?"

"모르겠어."

"돈 많다며."

"그래서 더 모르겠어."

엄마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오늘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게임 회사 대표가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싶다고 한 것. 카페 사장이 내일도 문을 열고 싶다고 한 것. 우주 회사 대표가 어릴 때부터 우주에 가고 싶었다고 한 것. 전문가들이 어려운 말을 많이 했고, 상태창이 그것들을 번역해줬다는 것까지.

엄마는 상태창 얘기에서만 잠깐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 넘어가 주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엄마는 밥을 한 숟가락 먹고 말했다.

"다들 자기 꿈이 있네."

"응."

"너는?"

나는 숟가락을 멈췄다.

엄마는 다시 물었다.

"너는 뭐 하고 싶은데."

그 질문은 오늘 들은 어떤 전문 용어보다 어려웠다.

나는 게임 회사에서 들은 지표보다, 카페 거리의 권리관계보다, 우주 회사의 기술 성숙도보다 그 질문이 더 복잡했다.

뭐 하고 싶은데.

나는 부자가 되면 이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좋은 집.

좋은 차.

여행.

엄마 병원비.

친구들 돕기.

회사 그만두기.

그런 것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돈이 없어서 불편했던 것'을 없애는 목록이었다. 불편함이 사라진 뒤에도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아니었다.

나는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먹었다.

뜨겁고, 짜고, 익숙했다.

속이 천천히 풀렸다.

"나… 예전에는 게임 만들고 싶었던 적 있어."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그랬니?"

"응. 근데 말 안 했어. 돈 안 될 것 같아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글도 쓰고 싶었어. 사람들이 읽고 웃는 이야기. 근데 그것도 돈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접었고."

"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엄마한테 좋은 집 사주고 싶었어. 그건 아직도 그래."

엄마가 바로 말했다.

"엄마는 이 집도 괜찮아."

"알아. 근데 나는 안 괜찮았어."

엄마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고장 난 보일러 때문에 겨울마다 전기장판 틀고 자는 거 싫었어. 병원 예약 미루는 것도 싫었고. 내가 돈 없어서 아무 말 못 하는 것도 싫었어."

엄마는 천천히 물을 마셨다.

"그건 꿈이라기보다 마음고생이지."

"그런가."

"그래도 중요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도윤아, 남의 꿈을 도와주는 건 나쁜 일이 아니야."

"응."

"근데 네가 비어 있으면, 남의 꿈을 도와주면서도 자꾸 네 이름을 크게 쓰고 싶어질 거야. 내가 했다, 내가 살렸다, 내가 만들었다. 그러면 도와주는 건지 빼앗는 건지 헷갈리게 돼."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엄마는 가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내 못난 부분을 찔렀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식탁에서, 계란말이를 집어 먹으며.

"그럼 어떡해야 해?"

"네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알아야지."

"그걸 모르겠어."

"그럼 작은 것부터 해."

"1000억 있는데 작은 것부터?"

엄마가 나를 째려보았다.

"돈 많으면 처음부터 크게 넘어져야 하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엄마는 김을 한 장 집어 내 밥 위에 올려주었다.

"네가 진짜 좋아하는 건 돈 없을 때도 자꾸 생각나던 거야. 시간이 없어도 마음이 가던 거. 남들이 몰라도 혼자 괜히 찾아보던 거. 그런 것부터 봐."

나는 오늘 본 세 가지를 떠올렸다.

게임 회사에서 나는 설렜다. 하지만 회사를 갖고 싶다기보다, 사람들이 재미있는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 궁금했다.

카페 거리에서 나는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거리를 소유하고 싶다기보다,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잃지 않게 하고 싶었다.

우주 회사에서 나는 압도됐다. 하지만 우주 사업가가 되고 싶다기보다, 누군가가 포기하지 않은 꿈을 보는 게 좋았다.

공통점은 소유가 아니었다.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왜 어떤 것을 만들고, 왜 버티고, 왜 포기하지 않는지.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쓰고 싶었다.

그 순간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자기 질문 발생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답변 생성 중…
오류: 남의 기대, 과거의 결핍, 갑작스러운 돈, 인정 욕구가 뒤섞여 있습니다.
권장: 서두르지 마십시오.

나는 허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엄마가 물었다.

"또 뭐래?"

"서두르지 말래."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상태창이 아니라 엄마도 할 수 있는 말이야."

나는 웃었다.

정말 그랬다.

처음으로 고른 작은 꿈

밥을 다 먹은 뒤, 나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처음엔 의심했다.

"갑자기 왜."

"그냥."

"접시 깨면 네가 사."

"1000억 있는데 접시 정도는…"

"그 접시 세트 이제 안 나와."

나는 즉시 조심스러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접시는 명품 접시가 아니라 엄마가 '이제 안 나온다'고 말한 접시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작은 방에 들어갔다. 내가 어릴 때 쓰던 방이었다. 지금은 잡동사니와 계절 옷, 오래된 책들이 쌓여 있었다. 책상 서랍을 열자 낡은 공책들이 나왔다.

중학교 때 쓰던 노트.

고등학교 때 그린 이상한 캐릭터.

대학교 때 적다 만 게임 기획서.

첫 페이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플레이어가 돈을 많이 벌수록 외로워지는 게임.

나는 숨을 멈췄다.

"뭐야."

등골이 서늘했다.

공책을 넘기자 설정들이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을 얻은 주인공. 돈을 쓰면 선택지가 열리지만, 관계가 흔들린다. 마지막에는 돈을 지킬지, 나눌지, 버릴지 선택한다.

나는 한참 공책을 들고 서 있었다.

어릴 때의 나는 대체 뭘 만들고 싶었던 걸까.

아니, 혹시 지금 내가 겪는 이 이상한 상황은 그 공책에서 나온 걸까.

상태창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는 공책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엄마가 TV를 보다가 물었다.

"그건 뭐니?"

"옛날에 내가 쓴 거."

"공부는 안 하고 그런 거 썼구나."

"엄마, 감동할 타이밍 아니야?"

"감동은 성적표 보고 했어야지."

나는 공책을 다시 보았다.

어릴 때의 나는 돈에 대해 뭔가를 이미 궁금해하고 있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 돈을 쓰면 사람이 바뀔까. 선택지가 많아지면 자유로울까, 아니면 더 길을 잃을까.

그 질문은 지금의 나보다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윤: 나 예전에 이상한 게임 기획서 쓴 거 찾음.

곧바로 답장이 왔다.

민재: 네 인생이 이미 이상한 게임인데 또?

도윤: 제목이 플레이어가 돈을 많이 벌수록 외로워지는 게임임.

답장이 잠시 끊겼다.

그리고 민재가 보냈다.

민재: 야 그거 지금 너잖아.

나는 웃다가 조금 소름이 돋았다.

도윤: 그러니까.

민재: 만들래?

그 세 글자를 보고 손가락이 멈췄다.

만들래?

게임 회사를 통째로 사는 것보다, 카페 거리를 매입하는 것보다, 우주 회사에 투자하는 것보다 그 질문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답했다.

도윤: 모르겠어. 근데 해보고 싶어.

민재의 답장은 빠르게 왔다.

민재: 그럼 일단 우리 둘이 기획서부터 다시 써. 회사 사지 말고. 우주 가지 말고. 카페 거리도 아직 사지 말고.

민재: 작은 거부터.

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엄마와 같은 말을 했다.

작은 거부터.

그때 상태창이 떠올랐다.

첫 번째 자발적 꿈 감지
유형: 창작
규모: 매우 작음
위험: 실패, 민망함, 친구와 싸울 가능성
장점: 돈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임
특수 효과: '소유'가 아닌 '참여' 루트 개방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처음이었다.

상태창이 시켜서도 아니고, 누가 제안해서도 아니고, 멋있어 보이려고도 아니고, 내가 먼저 해보고 싶다고 느낀 일.

그건 1000억에 비하면 너무 작았다.

작은 공책 한 권.

친구와 나눌 메시지 몇 줄.

엉성한 아이디어.

하지만 이상하게 그 작은 것이 오늘 본 어떤 거대한 사업보다 내 쪽으로 가까이 걸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민재에게 다시 보냈다.

도윤: 내일 시간 돼?

민재: 돈 많은 백수님 일정에 맞춰드림.

도윤: 백수 아님. 아직 사표 안 냈음.

민재: 그게 더 웃김.

나는 웃었다.

웃음이 편했다. 어제의 선물 질문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돈 얘기가 아니라 같이 뭔가 해보자는 얘기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공책 첫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새 파일을 만들었다.

돈이 많아질수록 외로워지는 게임_기획서_새버전.md

파일명을 입력하는 순간, 상태창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오늘의 결론 후보
돈은 남의 꿈을 사는 데 쓸 수 있습니다.
돈은 내 꿈을 크게 보이게 꾸미는 데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꿈은 먼저 작게 움직입니다.
질문 갱신: 당신은 무엇을 소유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에 참여하고 싶은가?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소유하고 싶은 것.

참여하고 싶은 것.

게임 회사, 카페 거리, 우주여행 회사는 모두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안의 꿈은 사는 순간 내 것이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간, 실패, 고집, 애정, 상처가 쌓여야만 꿈은 꿈이 됐다.

나는 아직 그런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거대한 결제 버튼이 아니었다.

첫 문장.

첫 회의.

첫 실패.

처음으로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묻는 용기.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첫 줄을 썼다.

어느 날 아침, 주인공의 통장에 1000억이 들어왔다.

손가락이 멈췄다.

창밖에서 도시의 불빛이 흔들렸다. 펜트하우스도, 게임 회사도, 카페 거리도, 우주도 잠시 멀어졌다. 내 앞에는 낡은 공책과 새 문서,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내일이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발신자는 윤서하였다.

한도윤 님, 오늘 결정 보류하신 세 건과 별개로 초대장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곧이어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

검은 봉투.

금색 글씨.

그리고 낯선 문장.

VIP NIGHT: 진짜 부자들이 꿈을 거래하는 밤

상태창이 번쩍였다.

다음 이벤트 예고
VIP 파티의 이상한 초대장
경고: 어떤 사람들은 돈으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미래를 삽니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방금 쓴 첫 문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꿈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남의 꿈을 거래하는 문으로 나를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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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자가 된다면? 1000억 시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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