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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번호로 확인한 아침

은행 담당자는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전화를 끊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문밖의 남자는 은행 직원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은행 직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은행 쪽 방문 기록은 없었고, 내 계좌에 대한 긴급 확인 절차도 없었다. 담당자는 "고객님께서 문을 열지 않으신 건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말투는 침착했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무서웠다.

적절한 판단.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회사 메신저에서 "점심 뭐 먹을까요?"라는 질문에도 부적절한 판단을 하던 사람이었다. 김치찌개를 먹고 싶으면서도 다수결에 밀려 쌀국수를 먹던 인간. 그런 내가 갑자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험을 피했다.

돈은 나를 성장시키는 걸까.

아니면 성장하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곳으로 밀어 넣는 걸까.

나는 원룸 바닥에서 새벽을 맞았다. 펜트하우스의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허리가 조금씩 항의하는 장판 위였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곳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낡은 벽지, 삐걱대는 창문,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이 방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침 여덟 시,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굳었다.

"누구세요?"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문 열어."

엄마였다.

나는 문을 열었다. 엄마는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봉지 안에는 반찬통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보안 시스템. 엄마 반찬.

엄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썹을 찌푸렸다.

"너 밤샜니?"

"조금."

"얼굴이 왜 이렇게 종잇장 같아. 밥은?"

"먹었어."

엄마는 내 옆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짓말. 밥 먹은 사람 방 냄새가 아니야."

도대체 밥 먹은 사람 방 냄새와 안 먹은 사람 방 냄새의 차이는 뭘까. 엄마들은 국가기관보다 정교한 감지 능력을 갖고 있었다.

엄마는 냉장고를 열고 한숨을 쉬었다.

"우유 유통기한 오늘까지네. 김치는 왜 이렇게 말라가고 있어. 돈 문제라더니 냉장고부터 문제구나."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말해야 했다.

완전히는 아니어도, 적어도 엄마가 이상한 소문에 끌려다니지 않을 만큼은. 작은이모가 5억 이야기를 꺼냈고, 문밖에는 가짜 은행 직원이 왔고, 내 돈 냄새는 이미 우리 집 근처 골목까지 퍼졌다.

엄마가 반찬통을 꺼내다가 내 얼굴을 보았다.

"왜. 진짜 무슨 일인데."

나는 바닥에 앉았다. 엄마도 맞은편에 앉았다. 어릴 때 혼날 때랑 똑같은 구도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내가 시험지를 숨겼고 지금은 1000억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엄마."

"응."

"나한테 돈이 생겼어."

엄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마나."

"많이."

"많이가 얼만데. 삼천? 오천?"

나는 침을 삼켰다.

"1000억."

방 안의 시간이 멈췄다.

냉장고 소리도 멈춘 것 같았다. 사실 냉장고는 계속 돌고 있었지만, 내 귀가 세상을 잠깐 차단했다.

엄마는 나를 한참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한도윤."

"응."

"너 혹시 요즘 이상한 인터넷 방송 하니?"

"아니."

"코인?"

"아니."

"도박?"

"아니."

"그럼 훔쳤니?"

"엄마!"

"아니, 엄마가 확인은 해야지. 갑자기 아들이 1000억이 생겼다는데 박수부터 치는 엄마가 어디 있어."

맞는 말이었다. 엄마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 설명했다. 어느 날 아침 통장에 말도 안 되는 돈이 들어와 있었고, 상태창 같은 것이 보이고, 이상한 선택지가 뜨고, 돈을 쓸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어젯밤에는 가짜 은행 직원 같은 사람이 찾아왔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미친 사람 같았다.

엄마는 중간에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다 듣고 난 뒤, 아주 조용히 물었다.

"병원은 가봤니?"

"엄마."

"아니, 엄마가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상태창이 보인다며."

"나도 알아. 이상한 거."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돈은 진짜고?"

나는 은행 앱을 켰다. 잔액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화면을 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이고."

그 한마디에는 놀람, 걱정, 의심, 두통, 혈압, 그리고 오늘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까지 들어 있었다.

잠시 뒤 상태창이 떴다.

가족 고백 일부 성공
엄마 신뢰도: +25
엄마 걱정도: +70
엄마 의심 항목: 코인, 사이비, 납치, 꿈, 병원
특수 효과: 반찬 공급 안정화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타이밍에 반찬 공급이 왜 떠."

엄마가 내 시선을 따라 허공을 보았다.

"또 보이니?"

"응."

"뭐래."

"엄마 걱정도 70이래."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70밖에 안 돼? 700이지."

그때 상태창이 삐빅 하고 수정됐다.

엄마 걱정도: 측정 한계 초과

나는 처음으로 웃었다.

엄마도 아주 조금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는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도윤아, 엄마는 돈 많은 아들보다 안 다치는 아들이 좋아."

"알아."

"그리고 돈이 그렇게 많으면, 사람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미 안 가만두더라."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오늘 하루는 밖에 나가지 말고 쉬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태창이 떠올랐다.

특별 이벤트 개방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하루
제한 시간: 24시간
목표: 상상 속 버킷리스트를 현실에서 체험하십시오.
보상: 행복의 작동 방식에 대한 단서
경고: 소비는 때때로 외로움을 증폭합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 하필 지금?"

상태창은 대답 대신 선택지를 띄웠다.

A. 아무것도 사지 않고 안전하게 숨는다. 안정도 +10, 후회 가능성 +15
B. 딱 하나만 산다. 절제력 +5, 궁금증 지속
C. 오늘 하루, 마음속 버킷리스트를 전부 실행한다. 쾌락 +??, 공허함 +??, 노출도 상승

엄마가 물었다.

"또 뭐래."

나는 한참 선택지를 보았다.

어제는 거절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면 오늘은 사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몰랐다.

돈이 있다고 해서 다 사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돈으로 무엇이 가능한지 한 번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두려움에만 숨어 있으면, 나는 계속 돈의 주인이 아니라 돈의 인질로 살 것 같았다.

나는 엄마를 보았다.

"엄마."

"왜."

"오늘 나랑 하루만 이상한 짓 좀 하자."

엄마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얼마짜리 이상한 짓인데."

"많이 비싼."

"안 해."

"아직 말도 안 했잖아."

"네가 그렇게 말할 때는 보통 사고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예약이 필요했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하루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리면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오전 열 시, 나는 생전 처음으로 '프라이빗 대관'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보통 사람은 놀이공원에 갈 때 자유이용권 가격을 검색한다. 나는 놀이공원 전체를 빌릴 수 있는지 검색하고 있었다. 인간은 이토록 빨리 타락한다.

몇 통의 전화와 몇 번의 "예산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 끝에, 기적 같은 답이 돌아왔다.

당일 전체 대관은 원칙적으로 어렵지만, 평일 비수기, 일부 시설 점검 시간 조정, 초고액 긴급 행사 비용, 안전 인력 추가 배치, 비밀 유지 계약까지 포함하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불가능하지 않다.

부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말이었다.

예전의 내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그냥 불가능했다. 월세를 보증금 없이 깎는 것,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건강해지는 것, 팀장님이 회의 시간을 줄이는 것. 하지만 돈이 충분히 많아지자, 세상은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조금 어렵지만 가능합니다."

오후 한 시, 나는 놀이공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정문 위에는 원래 가족 단위 관람객을 환영하는 알록달록한 현수막이 걸려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직원들이 급하게 만든 듯한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금일 프라이빗 행사로 일반 입장이 제한됩니다.

프라이빗 행사.

그 행사의 정체는 나 하나였다.

정문 안쪽에는 직원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마스코트 인형 두 명도 서 있었다. 한 명은 토끼였고, 한 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 동물이었다. 노란 동물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너무 커서 오히려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결국 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데서 무릎 나가면 누가 책임지니. 너나 정신 차리고 다녀와."

대신 엄마는 보온병에 보리차를 담아주었다. 나는 1000억을 가진 남자로서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려놓고, 엄마표 보리차를 가방에 넣고 입장했다.

입장하자마자 상태창이 떴다.

버킷리스트 실행 1: 놀이공원 단독 대관
예상 쾌락: 매우 높음
사회적 어색함: 측정 불가
현재 관객 수: 1명
현재 박수 담당 직원 수: 37명

나는 첫 번째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원래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는 줄 서는 시간까지 포함해 하나의 의식이다. 앞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걸 들으며 긴장하고, 뒤에 선 커플의 싸움을 어쩔 수 없이 듣고, "생각보다 안 무섭다"라고 허세를 부리다가 막상 안전바가 내려오면 인생을 반성하는 그 과정.

오늘은 달랐다.

줄이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직원이 나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고객님, 원하시는 좌석 있으실까요?"

"맨 앞이요."

"네, 맨 앞 한 분 탑승하십니다!"

그 말이 무전기를 타고 놀이공원 전체에 퍼지는 것 같았다.

맨 앞 한 분.

내 인생을 요약하면 그 말일지도 몰랐다.

기차가 출발했다. 덜컹덜컹 올라가는 동안,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뒤도 비어 있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하늘은 너무 파랬다. 정상에 도착하자 도시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아주 진심으로. 1000억이 있어도 중력 앞에서는 평등했다.

코스를 한 바퀴 돌고 플랫폼으로 돌아오자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나는 안전바가 올라가기도 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혼자 롤러코스터를 타고 37명의 박수를 받는 경험은, 인간의 자존감을 이상한 방향으로 훈련시켰다.

"한 번 더 타시겠습니까?" 직원이 물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네."

두 번째는 맨 뒤에 탔다.

세 번째는 가운데 탔다.

네 번째는 아무도 없는 열차의 3번 칸 2번 자리에 앉았다. 이유는 없었다. 돈이 많으면 이유 없는 선택도 서비스가 된다.

다음은 바이킹이었다.

원래 바이킹은 양쪽 끝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목숨을 건 비명을 겨루는 놀이기구다. 그런데 혼자 타니 배 전체가 나만을 위해 흔들렸다. 나는 한쪽 끝에 앉았다. 반대편 끝은 텅 비어 있었다.

바이킹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다시 올라갔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혼자 타는 바이킹은 공포가 아니라 철학이었다. 인생은 올라갈 때 신나고, 내려갈 때 배가 간지럽고, 반대편에 아무도 없으면 갑자기 외롭다.

마스코트 토끼가 아래에서 양팔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바이킹 꼭대기에서 토끼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토끼 인형의 플라스틱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이상하게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정말 크게 웃었다. 웃다가 비명을 지르고, 비명을 지르다가 또 웃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행복이 있다면, 아마 이 장면일 것이다.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린 사람이 혼자 바이킹에서 토끼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

그다음은 회전목마였다.

이건 실수였다.

놀이공원을 혼자 빌려도 롤러코스터는 신나고 바이킹은 웃긴데, 회전목마는 이상하게 기괴했다. 음악은 지나치게 밝았고, 말들은 지나치게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지나치게 성인 남성이었다.

나는 가장 용맹해 보이는 흰 말을 골라 탔다.

회전목마가 천천히 움직였다.

반짝이는 전구가 켜지고, 동화 같은 음악이 흘렀다. 관객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직원 한 명이 멀리서 내 사진을 찍어주려고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찰칵.

그 사진은 아마 내 인생의 어떤 약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상태창이 떴다.

회전목마 단독 탑승 완료
동심 회복: +3
사회적 수치심: +22
사진 유출 시 피해: 치명적

나는 급히 직원에게 말했다.

"그 사진은 삭제해 주세요."

직원은 완벽한 미소로 대답했다.

"네, 고객님."

그 완벽함이 조금 무서웠다.

두 시간 동안 나는 놀이공원의 거의 모든 것을 했다. 솜사탕 기계를 혼자 돌려보고, 사격 게임에서 큰 곰인형을 땄다. 사실 과녁에 거의 맞히지 못했는데 직원이 "특별 행사 기준으로 성공입니다"라고 했다. 돈은 내 사격 실력까지 왜곡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머리띠를 샀다. 아니, 하나만 사려고 했는데 직원이 "오늘 전체 상품 구매도 가능하십니다"라고 해서 순간 정신이 흔들렸다.

토끼 머리띠, 공룡 머리띠, 반짝이 망토, 야광봉, 마스코트 인형 세트, 한정판 머그컵, 이름을 새길 수 있는 팔찌까지 전부 계산했다.

카운터 직원이 물었다.

"선물 포장 해드릴까요?"

나는 쌓여가는 물건들을 보았다.

"제가 이걸 누구한테 주죠?"

직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놀이공원의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방금 전까지 웃음이 나던 공간이 갑자기 너무 넓게 느껴졌다. 놀이공원은 원래 사람들 사이에서 완성되는 장소였다. 줄을 서며 투덜대는 사람, 아이 손을 잡고 뛰는 부모, 사진 찍자고 싸우는 커플, 길을 잃고 우는 아이, 그 아이보다 더 당황한 아빠.

그 모든 소란이 빠져나간 놀이공원은 거대한 장난감 상자 같았다.

비싸고, 화려하고, 완벽하게 비어 있는.

상태창이 천천히 떠올랐다.

단독 대관 만족도: 91% → 63%
이유: 기쁨을 목격해줄 사람이 부족합니다.
힌트: 어떤 즐거움은 공유될 때 유지됩니다.

나는 가방에서 엄마가 싸준 보리차를 꺼냈다.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린 남자가 벤치에 앉아 미지근한 보리차를 마셨다.

희한하게 그게 오늘 마신 것 중 제일 맛있었다.

장바구니가 현실이 되면 장바구니가 사라진다

놀이공원에서 나온 뒤, 나는 곧바로 쇼핑센터로 향했다.

상태창은 친절하게 다음 미션을 띄웠다.

버킷리스트 실행 2: 갖고 싶던 물건 전부 구매
추천 목록 불러오기: 과거 검색 기록, 장바구니, 저장한 게시물, 월급날 이후 삭제한 상품
주의: 오래 품은 욕망은 결제 직후 빠르게 증발할 수 있습니다.

내 휴대폰 화면에 목록이 줄줄이 떴다.

놀라웠다.

나는 내가 이렇게 많은 걸 갖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척하고 있었다. 돈이 없을 때 갖고 싶은 물건은 마음속에 조용히 쌓인다. 당장 못 사니까 "언젠가"라는 창고에 넣어둔다. 그 창고에는 먼지가 쌓이지만, 물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최고 사양 게이밍 PC.

인체공학 의자.

소음 차단 헤드폰.

한정판 운동화.

카메라.

드론.

스마트워치.

커피 머신.

명품 코트.

빈티지 게임기.

어릴 때 너무 갖고 싶었지만 부모님에게 말하지 못했던 조립 로봇 한정판.

월급날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월세와 카드값을 보고 삭제했던 책장.

나는 매장에 들어갔다.

직원들이 다가왔다. 예전에는 직원이 다가오면 부담스러워서 "그냥 보는 중이에요"라고 말하고 도망쳤다. 오늘은 달랐다.

"이거 주세요."

처음 그 말을 했을 때는 심장이 뛰었다.

두 번째도 좋았다.

세 번째는 짜릿했다.

네 번째부터는 이상하게 쉬워졌다.

"이 색 말고 다른 색도 있나요?"

"전부 주세요."

"배송은 어디로 해드릴까요?"

나는 잠깐 멈칫했다. 펜트하우스 주소를 말할까, 원룸 주소를 말할까. 결국 펜트하우스 주소를 불렀다. 원룸에 이 물건들이 들어가면 방보다 택배 상자가 더 넓어질 것이다.

직원은 태블릿에 주소를 입력했다.

"오늘 구매하신 상품은 순차적으로 배송됩니다."

구매하신 상품.

그 말이 마법 같았다.

나는 전자제품 매장에서 최고 사양 PC를 샀다. 모니터는 하나만 사려다가 "듀얼로 쓰시면 훨씬 편합니다"라는 말에 두 개를 샀고, "요즘은 트리플도 많이 하십니다"라는 말에 세 개를 샀다. 예전의 나는 중고 모니터 하나 살 때도 흠집 사진을 확대해보며 고민했다.

의자 매장에서는 앉자마자 허리가 감격하는 의자를 샀다. 직원이 "장시간 앉아 계시는 분들에게 좋습니다"라고 했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장시간 앉아 있을 회사가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운동화 매장에서는 한정판을 신어보았다. 거울 속 내 발이 갑자기 성공한 사람의 발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 성공한 발이 여전히 걷는 법을 어색해한다는 점이었다.

명품 매장에서는 코트를 입어보았다. 가격표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예전에는 가격표를 먼저 보고, 그다음 디자인을 봤다. 오늘은 디자인을 먼저 보고, 가격은 나중에도 보지 않았다.

처음엔 해방감이 있었다.

가격표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느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가격표를 보지 않아도 되자, 물건들이 조금씩 비슷해 보이기 시작했다. 비싼 것과 더 비싼 것의 차이는 분명 있을 텐데, 내 마음은 그 차이를 오래 붙잡지 못했다. 어제까지는 한정판 운동화 사진만 봐도 심장이 뛰었는데, 막상 다 살 수 있게 되자 운동화는 그냥 운동화가 됐다.

나는 카페에 앉아 구매 내역을 확인했다.

숫자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예전 같으면 손이 떨렸을 금액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잔액의 아주 작은 일부였다.

작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무서웠다.

내가 오래 품어온 설렘들이 이렇게 쉽게 결제되고, 이렇게 빨리 식어버릴 수 있다는 게.

상태창이 떴다.

설렘 지속 시간 측정 중
게이밍 PC: 결제 후 11분
한정판 운동화: 착용 후 7분
명품 코트: 거울 확인 후 4분
조립 로봇 한정판: 예상보다 오래 지속, 23분
원인: 어린 시절의 결핍이 포함되어 있음

나는 조립 로봇 상자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 문방구 진열장에 있던 장난감이었다. 생일 선물로 받고 싶었지만, 가격을 보고 말하지 못했다. 그때 엄마는 내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나도 엄마가 아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오늘 나는 그 장난감을 샀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보관용, 조립용, 혹시 망가질 때 대비용까지 세 개를 샀다.

웃긴 건, 세 개를 사자 하나였을 때의 애틋함이 줄었다는 것이다.

부족할 때는 물건 하나가 꿈처럼 보인다.

넘칠 때는 꿈도 재고가 된다.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민재였다.

민재: 살아 있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내 앞에 쌓인 쇼핑백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민재: 너 백화점 털었냐?

도윤: 합법적으로.

민재: 그게 더 무섭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한참 망설이다가 물었다.

도윤: 너 갖고 싶던 거 있냐?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몇 분 뒤 민재가 보냈다.

민재: 지금 나 시험하냐?

나는 화면을 보고 굳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하지만 민재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돈 많은 친구가 갑자기 "갖고 싶은 거 있냐"고 묻는 순간, 우정은 선물과 자존심 사이에 낀다.

나는 급히 답했다.

도윤: 미안. 그런 뜻 아니었어.

민재: 알아. 근데 조심해. 너 지금 좋은 마음으로 사람 불편하게 만들 수 있어.

좋은 마음으로 사람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 문장이 쇼핑백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상태창이 떴다.

선물 충동 감지
위험: 상대의 필요보다 나의 기분 해소가 우선될 수 있음
힌트: 선물은 가격보다 맥락이 중요합니다.

나는 쇼핑백 사이에 앉아 생각했다.

물건을 사는 건 쉬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저녁 식사

저녁은 윤서하가 연결해준 곳이었다.

정확히는, 어제 보류했던 프라이빗 네트워크에 가입하지 않았는데도 윤서하가 보낸 메시지였다.

한도윤 님, 오늘 같은 날에는 좋은 식사가 필요하실 것 같아 셰프 한 분을 소개드립니다. 가입과 무관한 호의로 받아주세요.

호의.

이 단어는 요즘 내게 신호등의 노란불처럼 느껴졌다. 멈춰야 할지, 지나가도 될지 애매한 색.

하지만 나는 오늘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하루'를 실행 중이었다. 놀이공원도 빌렸고, 쇼핑도 했다. 그렇다면 음식의 끝도 봐야 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프라이빗 다이닝룸에 앉게 되었다. 테이블은 단 하나였다. 조명은 낮고, 접시는 지나치게 넓었으며, 물 한 잔에도 설명이 붙었다.

셰프는 세계 여러 도시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예약은 원래 몇 달 뒤까지 꽉 차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가능하다고 했다.

또 나왔다.

특별히 가능.

돈이 열쇠라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문이 있었다. 문제는 문이 너무 많아지면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첫 번째 요리가 나왔다.

작은 숟가락 위에 바다 향이 나는 거품과 투명한 젤리, 아주 얇게 썬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서버는 재료의 산지와 조리 과정을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은 이해했고 절반은 놓쳤다.

한입 먹었다.

맛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입안에서 바다와 숲과 무슨 고급스러운 안개가 동시에 지나갔다. 문제는 내가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내 미식 언어는 대체로 "와 맛있다", "좀 짜다", "밥이랑 먹으면 좋겠다" 정도였다.

두 번째 요리는 더 작았다.

세 번째 요리는 더 예뻤다.

네 번째 요리는 접시의 빈 공간이 요리보다 많았다. 나는 그 빈 공간도 가격에 포함되는지 궁금했다.

셰프가 직접 나와 말했다.

"이번 코스는 기억의 맛을 주제로 준비했습니다."

기억의 맛.

나는 긴장했다. 혹시 내 과거 검색 기록처럼 내 기억까지 불러오는 건 아니겠지.

다음 접시에는 완벽하게 구운 생선과 맑은 국물이 담겨 있었다. 국물은 놀랄 만큼 깊었다. 한 숟가락 떠먹자, 입안에 따뜻함이 퍼졌다. 고급스럽고 섬세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상한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 김치찌개.

알루미늄 냄비에 끓던 찌개. 김치가 푹 익어 국물이 붉고, 두부는 모서리가 조금 부서져 있고, 돼지고기는 많지 않아서 숟가락으로 찾으면 보물처럼 나오던 찌개. 엄마가 "고기 별로 안 넣었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내 그릇에 고기 많은 쪽을 떠주던 찌개.

나는 숟가락을 멈췄다.

눈앞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셰프가 만든 음식이 있었다. 재료는 완벽했고, 온도는 정확했고, 접시는 예술 작품 같았다.

그런데 나는 엄마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비싼 음식이 맛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훌륭해서 이상했다. 완벽한 맛은 감탄을 불렀지만, 엄마 김치찌개는 나를 불렀다. 감탄과 그리움은 다른 방향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셰프가 물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니요.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조금…"

나는 웃었다.

"갑자기 집밥이 생각나서요."

셰프는 잠깐 멈추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제가 이길 수 없는 음식이네요."

그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내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돈을 많이 내도 같은 맛으로 살 수 없는 음식이 있다.

그 차이는 레시피가 아니라 시간에서 온다. 누가 끓였는지, 언제 먹었는지, 그날 내가 얼마나 배고팠는지, 식탁 맞은편에 누가 앉아 있었는지. 그런 것들은 계산서에 적히지 않는다.

마지막 디저트가 나왔다. 금박이 올라간 작은 케이크였다. 금은 맛이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금을 씹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비싼 음식의 가장 큰 기능은 '내가 지금 비싼 걸 먹고 있다'는 사실을 먹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은 잠깐 사람을 들뜨게 한다.

하지만 배가 부른 뒤에도 마음이 비어 있으면, 금박은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다.

식사가 끝나자 결제서가 조용히 놓였다.

금액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게 제일 놀라웠다.

나는 서명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미식 체험 완료
혀의 만족도: 96%
마음의 포만감: 41%
엄마 김치찌개 회상률: 88%
결론 후보: 맛은 살 수 있지만, 식탁은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다이닝룸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 속의 나는 멀끔했다. 명품 코트, 새 구두, 비싼 시계. 하루 만에 부자처럼 보이는 법은 거의 마스터한 것 같았다.

그런데 거울 속 남자는 어딘가 배고파 보였다.

행복을 만드는 소비, 행복을 망치는 소비

밤 아홉 시, 펜트하우스에는 택배와 쇼핑백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상자가 들어왔다. 큰 상자, 더 큰 상자, 사람 한 명쯤 들어갈 것 같은 상자. 설치 기사들이 모니터를 세우고, 의자를 조립하고, 커피 머신 사용법을 설명했다.

거실 한쪽에는 놀이공원 기념품이 쌓였다. 토끼 머리띠가 고급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 어울려서 오히려 당당했다.

나는 새 의자에 앉아 새 모니터 세 개를 바라보았다.

화면은 압도적으로 선명했다.

그 선명함으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게임을 켜볼까 했다. 어릴 때부터 최고 사양 컴퓨터로 게임하는 게 꿈이었다. 옵션을 전부 '최상'으로 올리고, 프레임 숫자가 미친 듯이 올라가는 걸 보고 싶었다.

게임은 부드럽게 실행됐다.

그래픽은 환상적이었다.

나는 10분 만에 껐다.

이상했다.

예전 원룸에서 낡은 노트북으로 게임을 돌릴 때는 렉이 걸려도 재미있었다. 팬 소리가 비행기처럼 나고, 화면이 끊기고, 그래픽 옵션을 '낮음'으로 낮춰도 친구들과 웃으며 했다. 그때는 부족함이 불편했지만, 동시에 이야기가 되었다.

오늘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핑계도 없었다.

재미가 없으면 온전히 재미없는 것이었다.

상태창이 조용히 떴다.

소비 분석 시작
오늘의 총 지출: 매우 큼
즉각 쾌락: 높음
지속 행복: 변동 심함
공허함 발생 구간: 혼자 즐길 때, 목적 없이 살 때, 감정을 덮기 위해 결제할 때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감정을 덮기 위해 결제할 때.

그 문장이 가장 아팠다.

오늘 내가 산 것들 중 일부는 정말 갖고 싶던 것이었다. 놀이공원을 빌린 건 웃겼고, 롤러코스터는 신났고, 조립 로봇 상자를 들었을 때는 어린 시절의 내가 잠깐 웃었다.

하지만 어떤 결제는 달랐다.

성호를 거절한 불편함.

이모에게 들은 "변했다"는 말.

유나를 도와주지 않은 뒤의 찝찝함.

민재를 의심한 죄책감.

문밖의 가짜 은행 직원이 남긴 공포.

나는 그 감정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대신, 계속 무언가를 샀다. 더 큰 것, 더 비싼 것, 더 특별한 것. 결제음은 잠깐 마음의 소음을 덮어주었다. 하지만 소음은 사라진 게 아니라, 상자 밑에 깔려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열고 어제 만든 한도윤 생존 매뉴얼 1.0 파일을 열었다.

새 항목을 추가했다.

돈을 쓰면 행복해질 때가 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그 아래에 썼다.

하지만 돈으로 감정을 덮으면, 행복이 아니라 영수증이 쌓인다.

조금 과한 문장 같았지만 지우지 않았다. 오늘 내 거실이 바로 그 증거였다.

나는 다시 정리했다.

행복을 만드는 소비는 이상하게 몸이 가볍다. 누군가와 함께 웃기 위해 쓰는 돈, 오래 기다린 것을 적당한 순간에 얻는 돈, 시간을 되찾는 돈, 안전을 지키는 돈. 그런 소비는 결제 뒤에도 마음이 덜 불안하다.

반대로 행복을 망치는 소비는 결제 직전에 더 뜨겁고, 결제 직후 더 차갑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외로움을 못 느끼기 위해, 상처받은 마음을 무시하기 위해, '나는 괜찮다'고 증명하기 위해 쓰는 돈. 그런 소비는 물건을 남기지만, 이상하게 나를 조금씩 비운다.

나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있었다.

그래서 더 선명하게 보였다.

없는 것들이.

같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옆에서 비명 질러줄 사람.

새 컴퓨터를 보고 "야 이 정도면 NASA냐?"라고 놀려줄 친구.

비싼 저녁을 먹고 돌아와도 "그래서 밥은 먹었고?"라고 물어줄 엄마.

상태창이 떠올랐다.

오늘의 핵심 단서 획득
소비가 행복을 만드는 시간: 욕망이 삶과 연결될 때
소비가 행복을 망치는 시간: 욕망이 불안을 숨길 때
다음 질문: 부자가 되면 꿈도 커질까?

나는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

부자가 되면 꿈도 커질까.

내가 정말 원한 건 놀이공원을 혼자 빌리는 것이었을까. 갖고 싶던 물건을 전부 사는 것이었을까. 세계 최고 셰프의 음식을 먹는 것이었을까.

분명 원했다.

그런데 전부는 아니었다.

아마 나는 이런 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돈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삶.

가격표를 보고 마음을 접지 않아도 되는 삶.

엄마가 병원비 걱정을 하지 않는 삶.

민재가 돈 때문에 밤새지 않아도 되는 삶.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의심하기 전에 먼저 웃을 수 있는 삶.

그건 물건이 아니었다.

목표에 가까웠다.

어쩌면 꿈이라고 불러도 될지 몰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나는 바로 받았다.

"응, 엄마."

"너 어디야?"

"집."

"무슨 집."

엄마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이제 내게 집이 두 개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사람의 질문이었다.

"큰 집."

"밥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프라이빗 다이닝 영수증을 보았다.

"먹었어."

"또 이상한 거 먹었지."

"엄청 비싼 거."

"맛있었어?"

나는 잠깐 침묵했다.

"맛있었는데, 엄마 김치찌개 생각났어."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엄마가 말했다.

"내일 와. 끓여줄게."

그 말 한마디에 오늘 산 어떤 것보다 마음이 빨리 따뜻해졌다.

나는 웃었다.

"응. 갈게."

"그리고 도윤아."

"응."

"돈 많다고 하루에 다 쓰려고 하지 마. 체한다."

나는 거실 가득 쌓인 상자를 보았다.

"이미 좀 체한 것 같아."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전화를 끊고 나자, 펜트하우스가 조금 덜 차갑게 느껴졌다. 물건 때문이 아니었다. 내일 갈 식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립 로봇 상자 하나를 뜯었다.

보관용도 아니고, 과시용도 아니고, 그냥 조립용.

설명서를 펼치고 첫 번째 부품을 끼웠다. 딸깍.

작은 소리가 났다.

오늘 들은 결제음보다 훨씬 작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오래 남았다.

영수증의 끝에 남은 질문

밤이 깊어졌다.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어제는 그 빛들이 나를 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졌고, 오늘은 거대한 쇼윈도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팔리고, 모든 것이 빛나고, 모든 것이 나를 유혹했다.

나는 하루 동안 많은 것을 샀다.

놀이공원의 시간.

백화점의 물건.

셰프의 기술.

고급 서비스의 미소.

배송 기사들의 빠른 발걸음.

사람들이 "고객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

하지만 사지 못한 것도 분명했다.

놀이공원의 웃음소리.

물건을 기다리던 설렘의 길이.

엄마 김치찌개의 기억.

민재와 아무렇지 않게 농담하던 편안함.

돈이 없던 시절의 나는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오늘의 나는 돈이 있으면 사라지는 문제도 있지만, 돈 때문에 새로 생기는 문제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난은 사람을 좁은 방에 가둔다.

그런데 부는 사람을 너무 넓은 방 한가운데 세워둘 때가 있다.

좁은 방에서는 밖으로 나가고 싶고, 너무 넓은 방에서는 누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상태창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특별 이벤트 종료: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하루
획득한 것: 물건 다수, 경험 다수, 웃긴 사진 0장(삭제됨)
잃은 것: 돈 약간, 환상 일부
남은 것: 질문

곧이어 새로운 알림이 반짝였다.

다음 이벤트 예고
부자가 되면 꿈도 커질까
조건: '사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을 구분하십시오.

나는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사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비슷해 보였지만 완전히 달랐다.

나는 오늘 사고 싶은 것을 거의 다 샀다. 그런데 되고 싶은 나는 아직 멀리 있었다. 좋은 아들, 괜찮은 친구,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누군가를 돕더라도 나를 잃지 않는 사람.

그런 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었다.

나는 조립 로봇의 두 번째 부품을 끼웠다.

딸깍.

작은 소리가 다시 났다.

천억의 세계에서, 아주 싼 플라스틱 조각 두 개가 맞물리는 소리.

이상하게 그 소리가 내일로 가는 문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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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자가 된다면? 1000억 시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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