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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는 내가 맡는 게 아니었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휴대폰은 한참 동안 뜨거웠다.

나는 펜트하우스 창가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한강 위로 차들의 불빛이 길게 흐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불빛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야근하고, 지하철 막차 시간을 계산하고, 편의점 1+1 행사 앞에서 인생의 작은 승리를 맛보던 사람.

그런데 지금 나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높은 곳은 전망이 좋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도망칠 곳이 없어 보였다.

휴대폰 화면에는 방금 끊긴 번호가 남아 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검색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번호. 다시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상태창이 천천히 떠올랐다.

이벤트 진행 중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
조건: 대형 지출 연속 발생, 부동산 계약, 고가 차량 출고
현재 노출도: 38%

"노출도?"

내가 중얼거리자 상태창이 친절하게 다음 줄을 띄웠다.

돈은 움직일 때 흔적을 남깁니다.
흔적은 사람을 부릅니다.
사람은 대체로 웃으면서 옵니다.

소름이 돋았다.

공포 영화에서는 귀신이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부자가 된 내 인생에서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보냈다.

그 첫 번째 메시지는 아주 평범했다.

박성호: 도윤아 나 성호 기억나? 초등학교 6학년 3반 ㅋㅋ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성호?

기억났다. 초등학교 때 내 필통에서 지우개를 자꾸 빌려가고 한 번도 돌려주지 않았던 애. 졸업식 날 "우리 꼭 연락하자"라고 말한 뒤 정확히 10년이 아니라 거의 17년 동안 사라졌던 인물.

그 성호가 갑자기 나타났다.

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박성호: 야 너 요즘 잘나간다며? ㅋㅋ 기사 난 건 아니고 아는 사람이 봤다더라

아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생물이었다. 얼굴도 없고, 책임도 없고, 정보만 흘리는 존재.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나타났다.

작은이모: 도윤아, 이모야. 잘 지내지? 요즘 바쁘다며?

작은이모는 명절에 나를 볼 때마다 "도윤이는 언제 집 사니?"라고 묻던 분이었다. 그 질문은 덕담처럼 포장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경제력 체력 테스트였다.

세 번째 알림은 더 강했다.

유나: 오랜만이야. 갑자기 생각나서.

나는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유나.

전 여자친구.

2년 전, 카페에서 내게 "너는 좋은 사람인데 미래가 잘 안 보여"라고 말했던 사람. 그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은 척했지만, 집에 돌아와 배달앱 장바구니에 담아둔 치킨을 삭제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내가 너무 작아 보여서였다.

그 유나가 갑자기 생각났다고 했다.

타이밍이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잔인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아니, 소파에게 흡수됐다. 휴대폰은 계속 울렸다.

동창회 총무: 도윤아 번호 맞지? 이번에 6학년 3반 모임 있는데 꼭 와라!

사촌형: 도윤아 혹시 통화 가능? 급한 사업 얘기 좀.

모르는 번호: 한도윤 님, 프리미엄 자산가 전용 커뮤니티에서 연락드립니다.

민재: 야 너 어디냐?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민재의 메시지만 결이 달랐다.

그는 돈 냄새를 맡고 온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그는 그냥 어제 점심때 반차 사유로 '품격'을 잃고 도망친 친구를 걱정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마저도 의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제일 싫었다.

상태창이 떴다.

관계 필터 활성화
모든 연락에 의심이 섞입니다.
주의: 필터를 오래 사용하면 진심도 흐리게 보입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1000억이 생기면 친구가 늘어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정확히는 연락처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진짜 친구를 구별하는 게임이 시작됐다.

10년 만의 동창은 왜 갑자기 치킨집을 열고 싶어졌나

나는 가장 덜 위험해 보이는 사람부터 골랐다.

박성호.

초등학교 동창. 지우개 절도 전과 3회. 현재 위험도는 낮아 보였다. 적어도 내 첫사랑은 아니고, 친척도 아니며, '프리미엄 자산가 커뮤니티' 같은 수상한 단어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도윤: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내?

성호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했다.

박성호: 와 답장 빠르네 ㅋㅋ 나 요즘 사업 준비 중이지.

사업.

나의 어깨가 자동으로 굳었다.

부자가 된 뒤 가장 무서운 단어가 하나 생겼다.

사업.

그 단어는 대체로 이런 뜻으로 번역됐다.

내 꿈에 네 돈을 태워보지 않을래?

성호는 메시지를 길게 보냈다. 치킨 프랜차이즈를 할 생각인데, 본사가 괜찮고, 상권도 좋고, 요즘 배달 수요가 폭발적이고, 무엇보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장사 감각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성호는 초등학교 때 준비물로 색종이를 가져오라고 하면 늘 내 색종이를 반으로 찢어 갔다. 그것이 장사 감각의 초기 형태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곧바로 핵심이 도착했다.

박성호: 그래서 말인데 초기 자금이 조금 부족해서. 2억 정도만 들어오면 지분 30% 줄게.

2억.

어제의 나라면 그 숫자 앞에서 정신이 아득해졌을 것이다. 오늘의 나에게도 큰돈이었다. 하지만 내 통장 잔액을 생각하면 기묘하게 작아 보였다.

그게 위험했다.

2억이 작아 보이는 순간, 내 머릿속 어딘가가 고장 나고 있었다.

성호는 계속 보냈다.

박성호: 너랑 나랑 옛날 친구잖아. 남한테 좋은 기회 주기 아깝더라고.

옛날 친구.

그 말이 참 편리했다. 지우개를 빌려갈 때도 친구였고, 17년 동안 연락이 없을 때도 친구였고, 2억이 필요해지자 다시 친구였다.

그때 상태창이 나타났다.

선택 발생: 동창의 사업 제안
A. 2억을 투자한다. 동창 감사도 +40, 위험도 +35, 회수 가능성: 안개
B. 만나서 들어본다. 시간 소모 +6, 거절 난이도 상승
C. 정중히 거절한다. 죄책감 +8, 경계선 +10

나는 한참을 보았다.

돈이 있으니까 도와줄 수 있다. 그 생각은 따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따뜻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도와주면 왜 도와줬는지 설명해야 한다.

한 번 도와주면 다음엔 더 큰 부탁이 온다.

실패하면 내 탓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나는 성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초등학교 때의 지우개 사건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답장을 썼다.

도윤: 성호야, 오랜만에 연락 와서 반갑다. 그런데 나는 지금 누구 사업에 투자할 상황은 아니야. 미안.

전송하기까지 1분이 걸렸다.

손가락은 벌벌 떨렸다. 2억을 보내는 것보다 거절 문장을 보내는 게 더 어려웠다.

성호는 30초 뒤 답했다.

박성호: 아 ㅋㅋ 그래? 요즘 잘나간다길래 친구끼리 같이 잘되자는 건데.

그다음 메시지는 더 짧았다.

박성호: 알았다.

짧은 네 글자가 길게 아팠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상태창이 떴다.

거절 성공
경계선: +10
마음 불편함: +14
관계 정리 가능성: +1

"성공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별로야."

상태창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작은이모였다.

친척의 부탁은 늘 가족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온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벨이 끊겼다.

곧바로 카톡이 왔다.

작은이모: 도윤아, 이모가 전화했는데 바쁜가 보네.

마침표가 있었다.

문장 끝의 마침표는 때로 칼보다 날카롭다. 특히 친척이 보낸 마침표는 '너 지금 나 무시하니?'라는 부록을 달고 온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전화를 걸었다.

"이모, 저예요."

"아이고, 우리 도윤이. 목소리 듣기 힘드네. 바쁘지?"

"조금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무슨 일이라기보다. 가족끼리 그런 말 하기도 그렇고."

이 말은 보통 이제부터 꼭 해야 하는 돈 이야기가 나온다는 뜻이다.

이모는 한참 동안 외삼촌 건강 이야기, 사촌동생 취업 이야기, 요즘 물가 이야기, 김장 배추값 이야기까지 돌고 돌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라서 이모는 못 봤지만, 친척과의 통화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다.

마침내 이모가 본론에 들어갔다.

"도윤아, 네 사촌 준호 알지?"

"네."

"걔가 이번에 결혼 준비를 하는데 전셋값이 너무 올랐더라. 요즘 젊은 애들 참 힘들어. 너도 알지?"

"네, 알죠."

너무 잘 알았다. 어제까지 나는 그 '요즘 젊은 애들'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혹시 조금 도와줄 수 있나 해서. 빌려주는 거지. 가족끼리 이자 같은 건 좀 그렇고. 한 5억 정도만 있으면 애들이 숨을 돌릴 것 같아."

나는 눈을 감았다.

5억.

성호의 치킨집이 2억이었는데, 가족 전세는 5억이었다.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금액 단위를 참 빠르게 올렸다.

"이모, 제가 갑자기 왜 그런 돈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모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아니, 들은 게 있어서 그러지. 네가 요즘 큰 집도 보고, 차도 좋은 거 샀다며."

등골이 서늘했다.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고. 가족끼리 좋은 일 있으면 서로 돕는 거잖아. 네가 잘되면 우리도 기쁘지."

우리.

갑자기 그 단어가 넓어졌다. 엄마, 나, 가까운 가족 정도였던 '우리'가 순식간에 사촌의 전세보증금까지 포함하는 울타리가 되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와줄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능했다. 5억은 통장 잔액에서 숫자 몇 개가 움직이는 일일 뿐이었다. 사촌 준호가 진짜 힘들다면, 도와주는 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모는 내게 먼저 "괜찮니?"라고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어디선가 돈이 있다는 냄새를 맡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큰 그릇을 들고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모, 죄송한데 그런 큰돈은 바로 결정할 수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 돈 이야기는 엄마 통해서도, 저한테도 갑자기 하지 말아주세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나는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이모가 말했다.

"도윤아, 너 변했다."

그 말은 예상했는데도 아팠다.

"돈 좀 생겼다고 가족한테 선 긋는 거니?"

나는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돈 좀.

1000억도 가족 앞에서는 '돈 좀'이 될 수 있었다.

"선 긋는 게 아니라, 제 생활을 지키려는 거예요."

"생활을 지킨다니. 우리가 네 돈 뺏자는 것도 아니고."

"이모,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상태창이 떴다.

가족 부탁 거절
가족 의심도: +12
죄책감: +20
경계선: +15
특수 효과: '변했다' 디버프 획득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디버프 이름 한번 정확하네."

변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먼저 변한 걸까.

정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또 메시지가 왔다.

유나: 혹시 잠깐 볼 수 있어? 커피라도.

이번에는 심장이 조금 다르게 뛰었다.

돈 문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위험한 알림이었다.

전 애인의 커피에는 추억과 계산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유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사실은 카페 문을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는 문이 있다. 야식 앱, 전 직장 채용 공고, 그리고 전 애인이 기다리는 카페.

유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2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조금 짧아졌고, 옷차림은 더 단정해졌고, 표정은 여전히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녀가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는 이미 주문되어 있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 예전에도 우리는 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사실 내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메뉴판에서 가장 안전한 가격이어서였다.

유나가 내 재킷을 보았다.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느꼈다. 그 시선이 가격을 읽었다는 걸.

"잘 지냈어?" 그녀가 물었다.

"그럭저럭."

"요즘 좋은 일 있다며."

역시.

나는 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소문, 어디까지 간 거야?"

유나는 곤란한 듯 웃었다.

"소문이라기보다, 그냥 들었어. 네가 갑자기 잘됐다고."

"갑자기 잘됐다는 말 이상하다."

"미안. 그런 뜻은 아니었어."

잠깐 침묵이 흘렀다. 카페 안에서는 재즈 음악이 흘렀고, 옆자리에서는 누군가 노트북으로 기획서를 쓰고 있었다. 세상은 내가 전 애인 앞에서 정신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나가 먼저 말했다.

"사실 나 요즘 좀 힘들어."

내 안의 작은 경보기가 울렸다.

"회사?"

"응. 회사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아빠 병원비가 좀 많이 나와서."

나는 숨을 멈췄다.

돈 부탁일까.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싫어졌다.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처음 떠올린 게 진심 어린 걱정이 아니라 '금액'이라니.

"괜찮으셔?"

"수술은 잘됐는데 회복이 길어질 것 같아. 보험으로 안 되는 부분이 많더라."

유나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너한테 이런 얘기 하는 거 웃기지. 헤어진 지 오래됐는데."

"아니야."

"근데 이상하게 네 생각이 났어. 예전엔 네가 내 얘기를 제일 잘 들어줬으니까."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성호는 2억이라고 말했다. 이모는 5억이라고 말했다. 유나는 아직 금액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금액이 없는 부탁은 마음의 모양을 하고 다가온다.

나는 물었다.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그 문장은 너무 넓었다. 1000억을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아니, 누구라도 조심해야 하는 말이었다.

유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네가 조금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빌리는 거야. 꼭 갚을게."

"얼마?"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건조했다.

유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3천만 원 정도."

3천만 원.

성호의 2억과 이모의 5억을 듣고 나니 오히려 작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전의 나에게는 몇 년을 모아야 가능한 금액이었다. 유나에게도 그만큼 절박한 돈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진심일까.

계산일까.

둘 다일까.

사람의 마음은 꼭 하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정말 힘들어서 손을 내밀면서도, 동시에 상대가 돈이 있다는 사실을 계산한다. 누군가는 그리워서 연락하면서도, 그 그리움 안에 필요를 숨긴다.

나는 그 복잡함이 싫었다.

돈이 생기면 모든 게 단순해질 줄 알았다. 살 수 있으면 사고, 도울 수 있으면 돕고,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돈은 사람 마음의 주름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유나야, 미안한데 돈은 빌려줄 수 없어."

유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네가 힘든 걸 가볍게 생각해서가 아니야. 나도 아직 내 상황을 정리 중이고, 돈으로 다시 엮이면 우리 둘 다 이상해질 것 같아."

"내가 돈 때문에 연락한 사람처럼 보였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그래서 더 조심하고 싶어."

유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너 예전보다 차가워졌다."

오늘 두 번째였다.

변했다.

차가워졌다.

돈을 거절하면 사람들은 기온으로 나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값을 계산하고 카페를 나왔다. 유나는 먼저 택시를 탔다. 나는 길가에 서서 택시 뒷모습을 보았다.

도와주지 않은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돈을 주면 관계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관계가 돈 때문에 이어지는 거라면, 언젠가 돈이 끊기는 순간 함께 끊길 것이다.

상태창이 떴다.

전 애인의 부탁 거절
추억 흔들림: +18
경계선: +12
자기혐오: +7
관계 잔상: 지속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경계선이 올라가면 왜 이렇게 사람이 외로워지냐."

이번에도 상태창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낯선 여자가 내 앞에 섰다.

"한도윤 님 맞으시죠?"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얇은 명함 지갑을 들고 있었다. 미소는 정중했지만 눈은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 내 얼굴, 재킷, 시계 없는 손목, 주차장 방향, 다시 얼굴.

"누구세요?"

"윤서하라고 합니다. 프라이빗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녀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회사 이름도, 직함도, 주소도 너무 세련되게 적혀 있었다. 그래서 더 믿기 어려웠다.

"저를 어떻게 아셨어요?"

윤서하는 웃었다.

"좋은 분들은 서로 소개로 알게 되죠."

"누가 소개했는데요?"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한도윤 님께 필요한 만남이 될 거예요."

필요한 만남.

돈이 생긴 뒤,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바뀌었다.

필요.

기회.

가족.

친구.

각자 다른 포장지였지만, 안쪽에서 나는 같은 냄새를 맡았다.

계산.

새로운 만남은 늘 반짝이는 얼굴로 온다

윤서하는 나를 근처 호텔 라운지로 안내하려 했다.

나는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가 말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한도윤 님의 움직임을 보고 있어요. 아무 정보 없이 혼자 계시는 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발이 멈췄다.

위험.

이 단어는 지금 내게 가장 잘 먹히는 미끼였다.

결국 나는 호텔 라운지에 앉았다. 천장이 높고 조명이 낮은 곳이었다. 커피 한 잔 가격이 회사 근처 김치찌개 두 그릇보다 비쌌다. 이제 그런 가격에 놀라지 않아야 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의 가계부는 여전히 비명을 질렀다.

윤서하는 차분히 말했다.

"갑작스러운 자산 증가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표적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표적이요?"

"네. 투자 제안, 가족 분쟁, 사기, 접근 목적이 불분명한 인간관계. 이미 겪고 계시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였다.

"저희 네트워크는 자산가들이 안전하게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교류하도록 돕습니다. 법률, 세무, 보안, 투자, 라이프스타일까지 연결해드려요."

말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배경음악이 깔린 광고 같았다.

"비용은요?"

"가입 보증금 10억, 연회비 1억입니다."

나는 커피를 뿜을 뻔했다.

부자들의 동호회비가 내 전 직장 팀 예산의 몇십 배였다.

윤서하는 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한도윤 님께는 큰 금액이 아닐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나를 모른다.

그녀는 내 돈을 안다.

그 차이가 갑자기 선명해졌다.

내가 컵라면 앞에서 작은 컵과 큰 컵을 두고 고민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른다. 새 구두 때문에 뒤꿈치가 까졌다는 것도 모른다. 슈퍼카 주차를 못 해서 주차 요원에게 맡겼다는 것도 모른다. 민재의 전화 앞에서 죄책감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는 것도 모른다.

그녀에게 나는 한도윤이 아니라 '갑자기 큰돈을 움직인 사람'이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윤서하가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다만 너무 오래 생각하진 마세요. 돈이 많아질수록, 혼자 결정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 말은 이상하게 진짜 같았다.

나는 라운지를 나왔다.

문 앞에서 상태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만남 감지
호감도: 판단 불가
계산도: 높음
유용성: 잠재적 있음
위험도: 잠재적 있음

아래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A. 가입한다. 보호막 획득 가능, 종속 위험 증가
B. 보류한다. 정보 탐색 유지, 외부 압박 지속
C. 완전히 차단한다. 단기 안전, 장기 정보 부족

나는 B를 골랐다.

보류.

요즘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누르는 버튼이었다. 결정하지 않는 결정.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어정쩡한 자세.

하지만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정쩡함이 아니라 선이었다.

선.

넘어오면 안 되는 곳.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지켜주지 않는 곳.

그때 민재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화면을 보며 잠깐 망설였다.

민재.

가장 친한 친구.

내가 돈이 없어도 치킨을 반반 나눠 먹던 사람. 내가 자소서에서 '도전정신'이라는 단어를 7번 써서 떨어졌을 때, "너는 도전정신보다 생존정신이 강점이다"라고 말해준 사람.

나는 전화를 받았다.

"어."

민재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 지금 어디야?"

"밖이야."

"어딘데?"

나는 호텔 라운지 간판을 보았다. 그리고 거짓말을 했다.

"그냥 카페."

짧은 침묵.

"도윤아."

"응."

"너 나 피하냐?"

가슴이 내려앉았다.

민재가 처음으로 한 걸음 물러난 순간

민재는 만나자고 했다.

나는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 사실 이유는 많았다. 지금은 정신이 없고, 누가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민재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모르고, 내 새 차는 너무 튀고, 펜트하우스로 데려갈 수도 없고, 회사 근처에서 만나면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이유가 너무 많으면 결국 가장 단순한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예전 원룸 근처 분식집에서 만났다.

그곳은 내가 돈이 없던 시절의 안전지대였다. 떡볶이 1인분, 김밥 한 줄, 어묵 국물 무한 리필. 주인 아주머니는 나를 보면 아직도 "학생?"이라고 부르셨다. 대리 4년 차에게 학생은 모욕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민재는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내 재킷을 보고, 새 구두를 보고, 조심스럽게 눈을 돌렸다.

그 눈 돌림이 마음에 걸렸다.

"밥 먹었냐?" 내가 물었다.

"아니."

"뭐 시킬까?"

"네가 먹고 싶은 거."

예전 같았으면 민재는 메뉴판을 보기도 전에 말했다.

"떡볶이 2인분에 튀김, 순대 반반. 네가 어묵 국물 떠와."

그런데 오늘은 내게 선택권을 넘겼다.

별것 아닌데 이상했다.

나는 아주머니를 불렀다.

"떡볶이 2인분이랑 튀김, 순대 주세요. 김밥도 두 줄이요."

민재가 작게 말했다.

"많이 시키네."

"먹으면 되지."

"예전엔 김밥 한 줄 추가할 때도 나랑 가위바위보 했잖아."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지 않았다.

나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랬나."

"그랬지."

음식이 나왔다. 빨간 떡볶이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이상하게 안심했다. 명품 매장 향수 냄새보다, 호텔 라운지 커피 향보다, 이 냄새가 훨씬 진짜 같았다.

민재가 젓가락을 들지 않고 말했다.

"도윤아, 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부터 이상했어. 회사에서 반차 내고 사라지고, 말투 이상해지고, 갑자기 옷도 바뀌고. 지훈이 너 차 봤대."

심장이 멎을 뻔했다.

"무슨 차?"

민재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 반응이 더 이상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민재는 한숨을 쉬었다.

"나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온 거 아니야."

그 말에 더 아팠다.

나는 어제 점심때 민재의 전화 통화를 들은 뒤부터, 그가 언젠가 나에게 부탁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방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재는 먼저 선을 그었다.

"우리 엄마 일 때문에 내가 돈 얘기한 거, 네가 들었잖아. 그래서 너 부담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어. 근데 너는 내가 무슨 부탁할 사람처럼 계속 피하는 것 같더라."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맞잖아."

민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너한테 좋은 일이 생겼으면, 나는 축하해줄 수 있어. 나쁜 일이 생겼으면, 같이 욕해줄 수도 있고. 근데 네가 나를 제일 먼저 의심할 사람으로 보는 건 좀…"

그는 말을 멈췄다.

분식집 안의 소리가 갑자기 멀어졌다. 기름 끓는 소리, 학생들 웃는 소리, 아주머니가 주문을 확인하는 소리. 모든 게 물속처럼 흐릿했다.

"좀 서운하다."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돈이 생긴 뒤 처음으로, 누군가 나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이 다쳤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동안,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코를 막고 있었다. 누가 진심이고 누가 계산인지 구별하려다, 진심도 계산처럼 취급했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민재는 떡볶이를 하나 집었다. 먹지 않고 한참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다.

"나도 알아. 네가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근데 도윤아."

"응."

"친구 사이에도 비밀은 있을 수 있어. 근데 비밀 때문에 나를 바깥사람처럼 대하면, 나는 진짜 바깥사람이 돼."

그 문장은 분식집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오래 남았다.

상태창이 떴다.

관계 경고
가장 친한 친구가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민재 신뢰도: -8
민재 서운함: +20
도윤 죄책감: +30

나는 상태창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숫자로 표시되지 않았으면 했다. 민재의 서운함은 +20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앞에 앉은 사람이 젓가락을 들지 못하는 침묵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민재야, 나한테 진짜 이상한 일이 생겼어."

민재가 나를 보았다.

나는 1000억이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아직은 아니었다.

비겁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모든 걸 말하는 것이 항상 정직은 아닐 수도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고백은 상대를 끌어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다 말할 수는 없는데, 내가 요즘 돈 문제로… 좀 무너져 있어."

민재의 눈썹이 움직였다.

"돈 문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민재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나 같아도 이해 못 했을 것이다.

나는 말을 골랐다.

"누가 갑자기 연락 오고, 부탁하고, 뭔가 제안하고. 내가 사람을 다 의심하게 돼. 너까지."

민재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물었다.

"나한테 부탁할 기회를 줄까 봐 무서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민재는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빠지는 소리였다.

"나 진짜 자존심 상한다."

"미안."

"근데 이해도 돼서 더 짜증 나."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민재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완전히 풀린 얼굴은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판이 생긴 것 같았다. 손을 대면 닿을 듯한데, 온기가 바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 유리판의 이름은 돈이었다.

거절은 칼이 아니라 울타리였다

분식집을 나온 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예전 원룸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아직 계약이 남아 있는 방. 좁고, 낡고, 창문이 잘 안 닫히고, 화장실 환풍기가 이상한 소리를 내던 곳.

나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방 안은 그대로였다.

빨래 건조대에 어제 널어둔 셔츠가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반쯤 마신 생수병이 있었다. 싱크대에는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와 김치통이 있었다.

펜트하우스보다 훨씬 좁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숨이 쉬어졌다.

나는 바닥에 앉았다. 의자도 있었지만, 이 방에서는 바닥이 더 익숙했다.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성호는 더 이상 답이 없었다.

작은이모는 엄마에게 연락했는지,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엄마: 이모가 이상한 소리 하던데, 너 괜찮니? 통화하자.

유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윤서하는 정중한 안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모르는 번호들이 계속 늘어났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한 거절은 대부분 도망이었다. 짧은 답장, 전화 끊기, 보류. 상대를 상처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불편한 대화를 피하려고 했다.

거절을 배워야 했다.

단단하게.

하지만 함부로 찌르지 않게.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회사 기획서가 아니라, 내 인생 최초의 '돈 관련 대응 문서'를 만들었다. 제목을 쓰고 보니 조금 웃겼다.

한도윤 생존 매뉴얼 1.0

첫 줄에는 이렇게 적었다.

돈을 줄 수 있는 능력과 돈을 줘야 하는 의무는 다르다.

그 문장을 쓰자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이어서 적었다.

거절은 관계를 끊기 위한 말이 아니라, 관계가 망가지지 않도록 세우는 울타리다.

이것도 마음에 들었다. 너무 명언 같아서 민망했지만, 지금은 명언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다음부터는 실제 문장을 만들었다. 앞으로 누군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보낼 문장. 투자 제안을 받을 때 보낼 문장. 가족이 부담스러운 부탁을 할 때 할 말. 전 애인이나 친구처럼 마음이 얽힌 사람이 부탁할 때, 내 마음을 지키는 문장.

나는 여러 번 지우고 다시 썼다.

미안하지만 돈은 빌려줄 수 없어.

너무 차가웠다.

내가 지금 상황이 복잡해서 도와주기 어려워.

너무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네가 힘든 건 이해하지만, 나는 개인적인 돈 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어.

조금 나았다.

돈 거래.

그 단어는 삭막했지만 정확했다. 돈을 주는 순간, 관계는 다른 계약서를 마음속에 쓰기 시작한다. 이자는 없어도 기대가 붙고, 만기는 없어도 기억이 붙는다.

나는 문장을 정리했다.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읽히기 위해서였다.

잠시 뒤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킬 습득
거절하기 Lv.1
효과: 경계선 유지 가능
부작용: 죄책감이 즉시 사라지지는 않음

나는 피식 웃었다.

"레벨 1이면 아직 튜토리얼이네."

상태창이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튜토리얼 난이도: 높음
추천 행동: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진심을 설명하십시오.

가까운 사람.

나는 민재를 떠올렸다.

그리고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에게는 계속 숨길 수 없었다. 은행 우편, 친척의 연락, 내 지출 기록. 돈은 이미 엄마의 문 앞까지 갔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엄마는 바로 받았다.

"도윤아, 너 괜찮아? 이모가 너 돈 생겼냐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무슨 일 있는 거야?"

엄마의 목소리에는 계산이 없었다.

걱정만 있었다.

그 단순함이 나를 울컥하게 했다.

"엄마, 나 괜찮아. 근데 좀 복잡한 일이 생겼어."

"빚졌니?"

역시 엄마는 가장 현실적인 최악부터 확인했다.

"아니. 빚은 아니야."

"그럼 사기당했니?"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뭔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다 말할까.

아직은 두려웠다. 하지만 엄마에게 최소한의 울타리는 세워야 했다. 나를 위해서도, 엄마를 위해서도.

"엄마, 당분간 친척들이 돈 얘기하면 그냥 나한테 직접 하라고 하지 말고, 아예 모른다고 해줘. 그리고 누가 내 얘기 물어보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진짜 무슨 일 있구나."

"응. 근데 나쁜 일은 아니야. 엄마한테는 곧 제대로 말할게. 지금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엄마는 한동안 조용했다.

그리고 말했다.

"도윤아."

"응."

"돈 문제든 뭐든, 네가 사람들한테 다 잘해줄 필요는 없어."

나는 숨을 멈췄다.

"엄마도 친척들한테 거절 잘 못 하잖아."

"그래서 네가 나처럼 살까 봐 하는 말이야."

그 말에 목이 막혔다.

엄마는 계속 말했다.

"도와줄 수 있을 때 돕는 건 좋은데, 네가 무너져가면서 돕는 건 착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같이 넘어지는 거야."

나는 바닥을 보았다.

낡은 장판의 무늬가 눈앞에서 흐려졌다.

"알겠어."

"밥은 먹었어?"

"먹었어."

"거짓말하지 말고."

"떡볶이 먹었어."

"그게 밥이니?"

돈이 1000억이 있어도 엄마에게 떡볶이는 밥이 아니었다.

나는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웃은 것 같았다.

전화를 끊자 상태창이 떠올랐다.

엄마와 최소 경계 공유
가족 안정도: +8
내부 스트레스: -10
엄마 걱정도: 여전히 높음
특수 효과: 밥 먹었냐 질문 지속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밖에서는 오토바이 소리가 지나갔다. 펜트하우스에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좋았다.

냄새를 따라온 마지막 사람

밤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나는 원룸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닫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다. 10년 넘게 연락 없던 동창,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손을 내민 친척, 추억과 부탁을 함께 가져온 전 애인, 웃는 얼굴로 입장료 10억짜리 울타리를 팔던 낯선 사람, 그리고 처음으로 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민재.

돈이 생기면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말은 너무 단순했다.

정확히는, 돈이 생기면 각자 자기 방식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기회를 들고 온다.

누군가는 가족을 들고 온다.

누군가는 추억을 들고 온다.

누군가는 보호를 들고 온다.

그리고 진짜 친구는 상처를 들고 온다.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그렇게 보니 아프다고 말한다.

나는 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윤: 오늘 미안했다. 다 말하진 못했지만, 너를 의심한 건 내가 잘못했어. 나한테 시간이 좀 필요해. 대신 도망치진 않을게.

한참 뒤 답장이 왔다.

민재: 알았어.

짧았다.

하지만 성호의 '알았다'와는 달랐다. 민재의 '알았어'는 문을 닫는 소리가 아니라, 아주 조금 열어두는 소리 같았다.

나는 안도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몸이 굳었다.

여기는 펜트하우스가 아니었다. 보안이 철저한 고급 아파트도 아니었다. 누구나 공동현관 문이 열릴 때 따라 들어올 수 있는 낡은 원룸 건물이었다.

나는 현관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누구세요?"

문밖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한도윤 님 맞으시죠?"

나는 숨을 죽였다.

"누구신데요?"

"대한제일은행 프라이빗뱅킹 센터에서 나왔습니다."

은행.

내가 하루 종일 미루고 있던 단어였다.

"이 시간에요?"

"죄송합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긴급 방문드렸습니다. 고객님 계좌와 관련해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열어야 할까.

상태창이 즉시 떠올랐다.

긴급 선택 발생
문밖 방문자: 은행 PB 직원 주장
A. 문을 연다. 정보 획득 가능, 신원 위험
B. 문을 열지 않고 공식 번호로 확인한다. 안전도 +15, 시간 지연
C. 도망친다. 체력 소모, 의심도 증가, 현실 문제 미해결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오늘 배운 게 있었다.

돈이 생기면 웃는 얼굴이 늘어난다. 반가운 이름도 늘어나고, 그럴듯한 명함도 늘어난다. 그리고 그중에는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고, 진짜와 가짜가 섞인 사람도 있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착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것.

거절하는 것.

경계선을 세우는 것.

나는 문 너머로 말했다.

"문은 열지 않겠습니다. 제가 은행 공식 번호로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문밖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 침묵이 너무 길었다.

남자가 말했다.

"고객님, 지금 바로 확인하지 않으시면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상했다.

진짜 은행 직원의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배웠다. 급하게 결정하라는 말은 대체로 상대에게 유리하다.

"공식 번호로 확인하겠습니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휴대폰을 들고 대한제일은행 앱을 열었다. 고객센터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문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인터폰 화면을 켰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뒤 고객센터가 연결됐다.

"대한제일은행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PB센터 직원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는데요. 확인 가능할까요?"

상담원은 몇 가지 본인 확인을 했다.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잠시 뒤 상담원이 말했다.

"고객님, 저희 쪽에서 금일 방문 예약이나 긴급 방문 기록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등이 차가워졌다.

상담원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전을 위해 문을 열지 않으신 건 잘하셨습니다. 관할 지점 담당자와 즉시 연결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낡은 문 하나.

어제까지만 해도 그 문은 세상과 나를 나누는 평범한 경계였다. 택배가 오고, 배달 음식이 오고, 월세 고지서가 붙던 문.

오늘 그 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이 되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거절하기 Lv.1 발동 성공
위험 회피: +25
경계선 이해도: +20
외부 위협도: 상승 중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깜박였다.

돈을 쓰는 게임은 끝났습니다.
돈을 지키는 게임이 곧 시작됩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 나는 2억을 거절했고, 5억을 거절했고, 3천만 원을 거절했고, 10억짜리 초대를 보류했다. 그리고 방금은 문 하나를 열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부자가 되면 무엇이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돈이 생긴 첫 번째 날들이 내게 가르친 것은 사는 법이 아니었다.

지키는 법이었다.

관계를 지키는 법.

나 자신을 지키는 법.

그리고 문밖에서 웃으며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아직은 안 된다고 말하는 법.

휴대폰 너머에서 은행 담당자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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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자가 된다면? 1000억 시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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