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 사유: 갑작스러운 품격 상승
엄마의 메시지를 본 순간, 김치찌개가 더 이상 김치찌개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붉은 국물이 아니라 경고등이었다. 보글보글 끓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들켰다. 들켰다. 곧 들킨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뒤집었다. 민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누구야?"
"아무도 아니야."
"아무도 아닌데 표정이 왜 세무조사 받는 사람 같냐?"
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한도윤 진짜 오늘 이상하다. 아침부터 계란말이 쏘고, 회의 때 예산 낸다 그러고, 지금은 김치찌개 앞에서 인생 끝난 얼굴이고."
수아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윤아,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우리한테 다 말하라는 건 아닌데, 적어도 혼자 감당할 표정은 아니야."
그 말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나 사실 통장에 1000억이 생겼어.
그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민재는 처음엔 웃을 것이다. 지훈은 내 휴대폰을 빼앗아 확인하려 할 것이다. 수아는 제일 먼저 "이거 위험한 돈 아니야?"라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셋 다, 나를 보는 눈빛이 3초 안에 바뀔 것이다.
나는 그 3초가 무서웠다.
그래서 아주 어른스럽고, 사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처럼, 완벽하게 침착한 척 말했다.
"나 반차 쓸게."
셋이 동시에 나를 봤다.
민재가 물었다.
"지금?"
"응."
"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변명할 때 얼마나 창의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갑자기…… 품격이 안 좋아서."
침묵.
김치찌개만 보글거렸다.
지훈이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뭐가 안 좋다고?"
"아니, 그러니까. 컨디션. 컨디션이 안 좋다는 뜻이야."
수아가 작게 웃었다.
"품격이 안 좋은 건 병원 어디 과로 가야 해?"
민재는 아예 박수를 쳤다.
"이야, 한도윤 오늘 미쳤네. 반차 사유가 품격 저하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 있으면 내 입이 또 무슨 범죄를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나 먼저 갈게. 계란말이는 내가 계산했어."
"야, 너 진짜 무슨 일 있으면—"
민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상태창이 나타났다.
돌발 행동 감지
회사 반차 사용
친구 의심도: +5
직장 평판: 약간 이상함 → 확실히 이상함
내부 스트레스: +8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상태창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줄을 띄웠다.
새로운 임시 목표
부자처럼 보이는 법을 습득하십시오.
제한 시간: 오늘 하루
보상: 겉모습 자신감 +10
주의: 내면 어색함은 별도 과금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부자처럼 보이는 법.
생각해보면 맞았다. 내가 오늘 계속 들킬 뻔한 이유는 1000억이 생겼는데도 너무 예전의 나처럼 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통장은 부자인데 옷은 어제의 셔츠였고, 마음은 편의점 컵라면 앞에서 무너졌고, 말투는 김치찌개집에서 품격을 잃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했다.
부자처럼 보이면 된다.
물론 그 결론 자체가 이미 위험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엔 너무 많은 0을 봤다.
나는 휴대폰 검색창에 입력했다.
부자처럼 보이는 법
자동완성이 떴다.
부자처럼 보이는 옷
부자 말투
부자들이 타는 차
진짜 부자 특징
졸부 티 안 나는 법
마지막 검색어가 내 심장을 찔렀다.
나는 조용히 그것을 눌렀다.

가격표를 보고 놀라지 않는 연기
백화점 정문은 자동문인데도 꼭 누군가 나를 심사하는 문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 앞에서 한 번 멈췄다.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은 부자라기보다는 반차 내고 도망친 회사원이었다. 셔츠는 점심때 튄 김치 국물 한 방울을 품고 있었고, 바지는 어제 다림질을 포기한 흔적이 선명했다. 신발은 걷는 사람의 신발이었다. 즉, 비싼 차에서 내린 사람의 신발이 아니었다.
"괜찮아."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부자는 원래 검소할 수도 있어."
그 순간 상태창이 떴다.
자기합리화: +3
현실감각: -2
나는 못 본 척하고 들어갔다.
명품 매장 앞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숨을 고르는 것이었다. 매장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가격표가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직원은 검은 정장을 입고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찾으시는 제품 있으실까요?"
나는 이 질문이 무서웠다.
왜냐하면 나는 찾는 제품이 없었다. 찾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보겠습니다."
직원은 더 깊게 웃었다.
"편하게 둘러보세요."
편하게.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장소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였다.
나는 재킷 하나를 집었다. 검은색이었다. 평범해 보였다. 너무 평범해서 순간 안심했다. 평범한 옷이면 가격도 평범하겠지.
가격표를 보았다.
₩7,900,000
나는 손가락에 힘을 잃었다.
재킷이 미끄러질 뻔했다.
7백90만 원.
옷 한 벌이 내 중고차보다 비쌌다. 아니, 예전의 나는 중고차도 없었으니 비교 대상조차 사치였다.
"마음에 드세요?"
직원이 물었다.
나는 가격표를 다시 접어 넣으며 말했다.
"네. 아주…… 귀엽네요."
직원의 눈빛이 0.5초 흔들렸다.
재킷에게 귀엽다고 하는 손님은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급히 덧붙였다.
"가격도."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더 이상했다.
가격이 귀엽다니. 790만 원이 귀여우면 내 월급은 뭐였나. 먼지였나. 미생물이었나.
직원은 전문직답게 흔들림을 빠르게 회복했다.
"소재가 아주 좋고, 핏이 깔끔해서 오래 입으실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자처럼 보여야 했다. 가격표를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 옷값을 월세와 비교하지 않는 사람. 할인율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
"이거 입어볼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피팅룸에 들어가 재킷을 걸쳤다.
거울 속의 나는 달라 보였다. 확실히 달랐다. 어깨가 조금 넓어 보였고, 표정도 조금 덜 불쌍해 보였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얼굴이 옷을 못 따라갔다. 몸은 갑자기 고급 호텔 라운지에 앉아야 할 것 같은데, 얼굴은 여전히 구내식당에서 반찬 리필을 망설이는 사람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직원이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 말은 마법 같았다.
어울린다.
나는 평생 가격표보다 그 말을 더 무서워했다. 어울린다는 말은 사람을 결제하게 만든다.
"이걸로 할게요."
내 입이 먼저 말했다.
내 뇌가 뒤늦게 소리쳤다.
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계산대 앞에서 직원이 물었다.
"함께 보신 셔츠와 구두도 같이 준비해드릴까요?"
나는 셔츠와 구두를 본 기억이 없었다. 아마 내가 지나가다 눈길을 0.3초 준 것을 직원은 '함께 보신'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고급 매장의 무서움이었다. 내 시선조차 장바구니에 담겼다.
나는 부자처럼 보이기 위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 주세요."
직원이 미소 지었다.
"총 18,400,000원입니다."
순간 귀에서 삐 소리가 났다.
천팔백사십만 원.
내가 예전에 전세 대출 이자를 계산하며 잠을 못 이루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내 통장에는 1000억이 있었다. 정확히는 컵라면과 계란말이와 김치찌개와 이 옷값을 뺀 1000억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카드 지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모서리가 닳은 체크카드가 있었다.
직원의 눈이 아주 잠깐 카드에 머물렀다. 그 찰나의 시선이 내 자존심에 작은 바늘처럼 박혔다.
나는 괜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시불로."
직원이 카드를 받았다.
삑.
결제 완료.
휴대폰 알림이 떴다.
대한제일은행: 18,400,000원 출금. 잔액 99,981,920,810원
잔액이 여전히 말도 안 되게 컸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이 떨렸다.
옷값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내가 방금 한 행동이 너무 나답지 않아서였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고급 의상 장착
겉모습 자신감: +12
지출 감각 마비: +4
내면 어색함: +15
특수 효과: 직원에게 '구매력 있는 손님'으로 인식됨
나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매장을 나왔다. 쇼핑백은 두 개였다. 걷는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천천히 걸었다. 어깨를 펴고, 턱을 아주 살짝 들었다.
세 걸음 뒤에 쇼핑백 끈이 손목을 파고들었다.
다섯 걸음 뒤에 새 구두가 뒤꿈치를 물었다.
열 걸음 뒤에 나는 깨달았다.
부자처럼 보이는 일은 생각보다 발이 아팠다.
슈퍼카는 움직이는 집값이었다
옷을 바꾸자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나를 조금 다르게 보는 것 같았다. 백화점 거울을 지날 때마다 나는 흘끗 내 모습을 확인했다. 제법 그럴듯했다. 한도윤이 아니라 한도윤 대표 같았다. 무슨 대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표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차.
부자처럼 보이려면 차가 있어야 한다. 드라마 속 부자들은 늘 차에서 내렸다. 아무도 지하철 2호선에서 내리며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나는 검색했다.
슈퍼카 매장 서울
몇 분 뒤, 나는 유리벽으로 된 자동차 전시장 앞에 서 있었다.
안에는 낮게 엎드린 차들이 있었다. 차라기보다는 색깔 있는 맹수 같았다. 빨간색, 노란색, 검은색. 모두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직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번엔 백화점에서 배운 대로 행동했다. 놀라지 않는다.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가격부터 묻지 않는다. 최대한 많이 타본 사람처럼 말한다.
"요즘은 어떤 모델이…… 재밌나요?"
직원의 눈이 반짝였다.
"운전의 재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쪽 모델이 좋습니다. 제로백이 아주 인상적이고요."
제로백.
나는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백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예전에는 왜 그런 걸 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출근길 올림픽대로에서는 시속 12킬로미터도 감지덕지였으니까.
직원은 검은색 슈퍼카 앞에 섰다.
"이 차량은 출고가 기준으로 4억 후반대입니다. 옵션에 따라 5억을 넘기도 하고요."
나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4억 후반대.
사람이 신기한 게, 790만 원짜리 재킷에는 심장이 멎을 뻔했는데 4억이라는 숫자는 너무 커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달에서 귤을 판다고 해도 이보다 덜 비현실적일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꼈다.
"음. 색이 조금 얌전하네요."
직원이 미소 지었다.
"더 강한 색상을 원하시나요?"
나는 무심한 척 말했다.
"오늘 바로 탈 수 있는 걸로요."
그 문장을 말하는 순간, 전시장 공기가 바뀌었다.
직원의 허리가 3도 정도 더 숙여졌다. 어딘가에서 다른 직원이 조용히 움직였다. 커피가 나왔다. 이름을 묻고, 연락처를 묻고, 주소를 묻고, 보험 가입 여부를 물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세상이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어색해도, 카드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험료는 운전 경력과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고성능 차량이라 연간 몇천만 원 수준으로 보셔야 합니다."
"네?"
너무 평범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직원이 친절하게 다시 말했다.
"보험료요."
나는 부자처럼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따로 놀았다.
"아, 보험. 당연히 중요하죠. 안전. 네. 보험은…… 귀엽네요."
직원의 눈이 다시 0.5초 흔들렸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왜 자꾸 가격을 귀엽다고 하지.
서류는 빠르게 진행됐다. 내 통장 잔액을 확인한 금융 담당자의 표정이 딱 한 번 굳더니,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매끄러웠다. 돈은 문을 여는 열쇠였다. 문제는 문 안쪽에 또 다른 문들이 계속 있다는 점이었다.
차량 인수 설명만 40분이 걸렸다. 버튼이 너무 많았다. 시동 거는 법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문 여는 방식도 낯설었다. 기어 조작도 게임기 같았다. 나는 설명을 들으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지만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차가 내 앞에 섰다.
검은색 슈퍼카.
낮고, 번쩍이고, 비싸고, 화가 나 보였다.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몸이 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시트는 나를 꽉 안았다. 마치 차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도망 못 가.
시동을 걸자 엔진 소리가 터졌다.
부아아앙.
나는 놀라서 브레이크를 더 세게 밟았다.
밖에 있던 직원이 환하게 웃었다.
"소리가 좋죠?"
나는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네. 아주…… 건강하네요."
상태창이 떴다.
슈퍼카 획득
부자처럼 보임: +30
운전 자신감: -11
유지비 공포: +18
주변 시선: +25
전시장을 나와 도로에 합류하는 순간, 나는 알았다.
슈퍼카는 빨리 달리는 차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울 도심에서는, 모두에게 구경당하며 천천히 식은땀을 흘리는 기계였다.
옆 차선의 버스 승객들이 나를 봤다. 횡단보도 앞 학생들이 휴대폰을 들었다.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옆에 붙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문제는 주차였다.
나는 근처 호텔 주차장에 들어가려 했다. 입구 경사로 앞에서 이미 심장이 내려앉았다. 차가 너무 낮았다. 바닥이 긁힐 것 같았다. 경사로를 내려갈 때 차 앞부분이 도로와 사랑에 빠질 듯 가까워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나는 시속 1킬로미터로 내려갔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빵.
내 심장도 같이 울렸다.
주차칸은 더 문제였다. 선 안에 넣으면 문을 열 수 없고, 문을 열 수 있게 넣으면 선 밖으로 나갔다. 후방 카메라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보였고, 경고음은 계속 삐삐거렸다.
삐삐삐삐삐.
"나도 알아! 가까운 거 안다고!"
나는 차에게 소리쳤다.
주차 요원이 다가왔다.
"도와드릴까요?"
나는 자존심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2초 고민했다.
"네."
즉시 생존 본능이 이겼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문이 위로 열렸다. 멋있었다. 너무 멋있어서 더 민망했다. 주차도 못 하는 사람이 우주선 문 같은 걸 열고 내리니, 내 인생 전체가 과장 광고 같았다.
주차 요원이 차를 능숙하게 넣었다. 나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원래 맡기려 했던 사람처럼 굴었다.
"역시 전문가시네요."
"차가 낮아서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죠. 제가 일부러 테스트해본 겁니다."
말하자마자 상태창이 떴다.
허세 발언 감지
주변 설득력: -6
본인 민망함: +10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 차는 분명히 내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나는 이 차의 사람이 아니었다.
펜트하우스의 첫 번째 미아
차를 샀고, 옷도 샀다.
그다음은 집이었다.
이쯤 되자 내 판단력은 쇼핑백 밑바닥 어딘가에 구겨져 있었다. 나는 은행 PB센터에 전화를 걸어야 했고, 엄마에게 답장을 해야 했고, 회사 팀장에게 반차 결재 사유를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부동산 앱을 보고 있었다.
한강뷰 펜트하우스 즉시 입주
부자가 되면 집부터 바꾸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그랬다. 주인공이 부자가 된 뒤에도 곰팡이 핀 원룸에 계속 살면 제작비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니까.
나는 몇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목소리가 떨렸지만, 두 번째부터는 조금 능숙해졌다.
"네, 즉시 입주 가능한 매물 보고 싶습니다."
"예산은요?"
그 질문이 나올 때마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
예산.
예전에는 모든 선택의 철창이었다. 월세 60 이하면 좋겠고, 관리비 포함이면 더 좋고, 역에서 10분 안쪽이면 기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산이 철창이 아니라 빈칸이었다.
나는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으면 바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마법이었다.
두 시간 뒤, 나는 한강이 보이는 고층 펜트하우스 거실에 서 있었다.
집은 넓었다.
넓다는 말로 부족했다. 거실이 내 원룸 전체보다 컸다. 아니, 원룸 세 개와 편의점 하나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밖으로 한강이 펼쳐져 있었고, 해가 유리창에 부딪혀 바닥 위로 금빛 사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공인중개사가 말했다.
"전용 면적이 워낙 잘 빠졌고, 프라이버시가 좋아서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보안도 철저하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돈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내 주변에서, 보안은 향수보다 중요했다.
"계약하겠습니다."
공인중개사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커졌다.
"오늘 바로요?"
"네."
나는 이제 알았다. 부자처럼 보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래 고민하지 않는 것이었다. 문제는 오래 고민하지 않으면 나중에 오래 후회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했지만, 돈이 충분하면 복잡함도 누군가의 업무가 되었다. 서명하고, 확인하고, 송금하고, 신분증을 내밀고, 또 서명했다. 숫자가 오갔다. 내 손끝에서 거대한 금액이 이동했다.
그러나 현실감은 없었다.
오히려 현실감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 찾아왔다.
공인중개사가 열쇠와 출입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이제 고객님 댁입니다."
고객님 댁.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숨이 멎었다.
내 집.
아니, 내 집들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는 집.
말도 안 됐다.
공인중개사가 떠난 뒤, 펜트하우스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원룸에서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옆집 물 내리는 소리, 골목 오토바이 소리가 항상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 집은 침묵조차 비싸 보였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 섰다.
"음."
내 목소리가 멀리 갔다가 돌아왔다.
집이 너무 넓어서 혼잣말에도 이동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안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복도를 걸었다. 문이 하나 나왔다. 열었더니 드레스룸이었다. 내 원룸보다 컸다. 두 번째 문은 욕실이었다. 욕조가 있었다. 욕조라기보다는 작은 수영장 같았다. 세 번째 문은 또 다른 방이었다. 네 번째 문은 서재였다. 다섯 번째 문은 창고였다.
안방은 어디지?
나는 다시 거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거실이 나오지 않았다.
복도가 갈라졌다.
왼쪽으로 갔다. 처음 보는 그림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갔다. 처음 보는 화분이 있었다. 뒤로 돌아갔다. 또 다른 욕실이 나왔다.
나는 멈췄다.
"설마."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켰다. 당연히 집 안 지도는 나오지 않았다.
상태창이 떴다.
펜트하우스 입주 완료
주거 품격: +45
생활 동선 이해도: -20
외로움 예고: +7
현재 상태: 실내 미아
"실내 미아가 뭐야!"
나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소리가 집 전체에 울렸다. 나는 현관으로 가야 했다. 문제는 현관이 어디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딩동.
"갑니다!"
나는 소리치며 뛰었다. 새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복도를 돌아, 드레스룸을 지나, 욕실 앞에서 멈추고, 다시 반대로 갔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그림 뒤쪽 복도를 지나자 엘리베이터 홀이 나왔다.
문을 열자, 배송 기사님이 서 있었다.
"한도윤 님 맞으세요? 백화점 배송입니다."
아까 산 옷과 구두,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추가 상품들이 도착했다.
기사님은 내 땀에 젖은 얼굴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집이 좀…… 활발해서요."
기사님은 직업적 예의로 더 묻지 않았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거실 저편의 한강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라면 먹으면 어디서 물 끓이지?
부자가 되어도 인간의 첫 번째 생존 문제는 주방 위치였다.
부자 말투 검색의 부작용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나는 펜트하우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니, 소파에 앉았다고 하기엔 소파가 나를 삼킨 느낌이었다. 너무 크고 푹신해서 몸이 반쯤 묻혔다. 일어나려면 의지가 필요했다.
나는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명품 옷을 샀다.
슈퍼카를 샀다.
펜트하우스에 입주했다.
겉으로 보면 완벽했다. 하루 만에 나는 누가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속은 엉망이었다.
새 구두 때문에 뒤꿈치는 까졌고, 슈퍼카는 주차장에 모셔둔 검은 짐승이 되었고, 펜트하우스에서는 아직도 안방을 확신하지 못했다. 옷은 몸에 맞았지만, 삶은 맞지 않았다.
그때 회사 메신저 알림이 떴다.
팀장: 한 대리, 내일 오전에 잠깐 면담합시다. 오늘 반차 사유가 명확하지 않아서요.
이어 지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훈: 야 너 어디냐? 민재가 너 진짜 걱정함.
민재에게서도 왔다.
민재: 도윤아 괜찮냐? 아까 내가 돈 얘기해서 부담 준 거면 미안.
수아의 메시지는 짧았다.
수아: 필요하면 연락해.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상했다. 오늘 나는 부자처럼 보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썼다. 그런데 친구들이 보낸 메시지 앞에서는 다시 예전의 한도윤이 되었다.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엄지손가락만 떠는 사람.
그때 나는 검색창을 다시 열었다.
부자 말투
결과가 쏟아졌다.
여유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법
상류층 대화법
성공한 사람의 화법
돈 많은 사람은 절대 하지 않는 말
나는 눈을 빛냈다.
그래. 옷, 차, 집을 바꿨으면 말투도 바꿔야 한다. 사람은 말에서 들킨다. 오늘 내가 들킬 뻔한 이유도 "품격이 안 좋다"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검색 결과를 읽으며 메모했다.
여유 있게 말하기.
직접 자랑하지 않기.
가격보다 가치를 말하기.
작은 일에 흥분하지 않기.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기.
좋았다. 이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지훈에게 답장을 보냈다.
도윤: 나는 현재 나의 컨디션과 방향성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고 있어. 걱정은 고맙고, 네 마음의 결을 존중해.
보내고 나서 읽어보았다.
끔찍했다.
3초 뒤 지훈의 답장이 왔다.
지훈: 너 사이비 갔냐?
나는 급히 민재에게 답장을 썼다.
도윤: 돈이라는 건 결국 흐름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필요와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하지.
민재는 바로 답했다.
민재: 뭔 소리야
민재: 너 진짜 어디 아파?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수아에게는 더 자연스럽게 보내야 했다.
도윤: 연락 고마워. 오늘은 내 삶의 레벨이 조금 전환되는 날이라 혼자만의 라운지가 필요했어.
보내기 직전, 나는 멈췄다.
라운지?
혼자만의 라운지?
제정신인가?
나는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썼다.
도윤: 고마워. 오늘 좀 정신없었어. 내일 얘기할게.
전송.
이게 훨씬 나았다.
그 순간 상태창이 떠올랐다.
부자 말투 실험 결과
지훈 의심도: +8
민재 걱정도: +10
수아 신뢰도: +1
교훈: 검색으로 배운 말투는 대체로 사람을 멀어지게 합니다.
나는 소파에 머리를 묻었다.
"진작 알려주지."
상태창은 뻔뻔하게 다음 문장을 띄웠다.
직접 경험 보너스가 적용되었습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혀서 나온 웃음이었다.
하루 만에 부자처럼 보이는 법.
나는 꽤 많은 것을 배웠다.
가격표를 보고 놀라지 않는 척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까지 숨기기는 어렵다.
슈퍼카를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식은땀을 흘리지 않는 운전 실력은 돈으로 바로 결제되지 않는다.
펜트하우스에 입주할 수는 있다. 하지만 넓은 집에서 길을 잃지 않는 감각은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부자 말투를 검색할 수는 있다. 하지만 친구가 걱정해서 보낸 메시지에 이상한 철학으로 답하면 그냥 이상한 사람이 된다.
돈은 겉모습을 바꾸는 데 정말 빨랐다.
무서울 만큼 빨랐다.
하지만 어색함은 끈질겼다. 그것은 내 낡은 셔츠 냄새처럼, 컵라면 국물 자국처럼, 8000원 점심을 계산하던 습관처럼 내 안쪽에 남아 있었다.
나는 한강이 보이는 창가로 걸어갔다.
아래로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그 빛들 사이에 어제까지의 내 원룸도 있을 것이다. 좁고 답답하고, 겨울이면 창문에 물이 맺히고, 여름이면 에어컨 전기세를 걱정하던 방.
그 방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도 놀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도윤 고객님 되시죠?"
은행 PB센터인가?
나는 긴장했다.
"네, 그런데요."
"오늘 차량 출고와 고가 부동산 계약이 확인되어 연락드렸습니다."
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은행이 아니었다.
상대는 웃고 있었다.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셨네요."
"누구세요?"
짧은 침묵.
그리고 상대가 말했다.
"돈이 움직이면, 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든 채 굳었다.
창밖 도시의 불빛이 갑자기 수많은 눈동자처럼 보였다.
동시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경고
대형 지출 연속 발생
은둔 루트 위장 실패 가능성 증가
돈 냄새 확산 중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깜박였다.
다음 이벤트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
나는 오늘 산 재킷을 내려다보았다.
비싸고, 고급스럽고, 아주 잘 맞았다.
하지만 그 안의 나는 여전히 어제의 한도윤이었다.
그리고 어제의 한도윤은 이제 알았다.
부자처럼 보이는 법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있다는 걸.
부자가 된 나를 들키지 않고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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