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조용히 눌렀는데 세상은 시끄럽게 반응했다
내 손가락은 처음에 C로 갔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오늘 하루만 미친 듯이 써본다. 얼마나 달콤한 문장인가. '오늘 하루만'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결심을 무너뜨리는 마법 주문이다. 오늘 하루만 야식. 오늘 하루만 늦잠. 오늘 하루만 카드 할부. 그리고 오늘 하루만 1000억 부자처럼 살기.
나는 C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눈앞에 아주 짧은 상상이 지나갔다. 백화점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 "여기부터 저기까지 주세요"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게 유치했다. 그런데 너무 좋았다.
그다음 손가락은 A로 옮겨갔다.
은행 VIP 센터. 안전하다. 어른스럽다. 누가 봐도 정답처럼 생긴 선택지였다. 문제는 내가 지금 팬티 위에 구겨진 트레이닝바지를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1000억 원의 주인이 되자마자 은행 전담 팀을 만나러 간다니, 너무 빠르게 사회적 인간이 되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손가락은 B 위에 멈췄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출근한다.
가장 쉬워 보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선택. 원래 하던 대로 회사에 가고, 원래 하던 대로 팀장에게 혼나고, 원래 하던 대로 8000원 이하 점심을 먹는 것. 세상을 바꾸지 않는 선택. 그러니까 안전해 보이는 선택.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B를 눌렀다.
선택창이 푸른빛으로 번쩍였다.
첫 번째 선택 확정
B.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출근한다.
바로 아래에 상태 변화가 떴다.
관계도: 유지
평판: 평범함 유지
미래 안정도: 변화 없음
내부 스트레스: +17
특수 상태: 비밀 보유자 획득
"내부 스트레스는 왜 올라가는데."
나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몸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심장은 계속 빨랐고, 손바닥은 축축했고, 목 안쪽은 사막처럼 말라 있었다.
눈앞의 창이 마지막으로 깜박였다.
주의
숨기는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 아닙니다.
숨기기 위해서는 계속 행동해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창은 사라졌다.
방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1000억 원과 출근 시간 38분 전이라는 끔찍한 현실이 남았다.
나는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부자가 된 후 처음으로 하는 일은 명품 쇼핑도, 슈퍼카 검색도 아니었다.
구겨진 셔츠 냄새 맡기였다.

편의점 컵라면과 호텔 조식 사이의 인간
출근길은 평소와 같았다.
동네 골목의 쓰레기봉투는 그대로였고, 버스 정류장 앞 붕어빵 가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편의점 앞에는 밤새 일한 듯한 알바생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세상은 놀라울 만큼 무심했다. 내 통장 잔액이 1000억이 되었는데도 신호등은 빨간불이면 멈추라고 했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멈췄다.
배가 고팠다. 아침을 먹어야 했다.
원래라면 선택지는 간단했다. 컵라면 작은 컵 하나, 삼각김밥 하나. 할인 행사 중이면 바나나우유까지. 내 인생의 아침은 늘 5000원 안에서 해결되는 퍼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내 휴대폰 검색창에는 어느새 이런 문장이 입력되어 있었다.
서울 호텔 조식 뷔페 가격
검색 결과를 보는 순간 이상한 웃음이 나왔다. 1인 7만 원, 9만 원, 12만 원. 예전의 나는 그 가격을 보면 "아침에 금가루를 말아주나?"라고 비꼬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생각했다.
12만 원이면 내 통장에서는 먼지도 안 난다.
그래서 더 고민됐다.
편의점 컵라면을 먹으면 어제의 나를 지키는 것 같았다. 호텔 조식을 먹으면 오늘의 나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컵라면은 익숙했고, 호텔 조식은 낯설었다. 컵라면은 물을 붓고 3분 기다리면 됐고, 호텔 조식은 왠지 직원에게 "예약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것 같았다.
나는 편의점 자동문 앞에서 1분 30초 동안 서 있었다.
알바생이 나를 봤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아니면 비켜주세요.
나는 결국 들어갔다.
진열대 앞에서 컵라면을 골랐다. 작은 컵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큰 컵을 들었다가 또 내려놓았다. 1000억 원이 생긴 사람이 작은 컵라면을 먹는 건 너무 비참한가? 아니면 큰 컵라면을 먹는 건 갑자기 돈 생겼다고 허세 부리는 건가?
나는 무려 컵라면 앞에서 계급 갈등을 겪었다.
결국 가장 비싼 컵라면을 집었다. 2300원이었다.
그리고 삼각김밥 코너로 갔다. 참치마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전주비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프리미엄'이라고 적힌 소고기 삼각김밥을 발견했다. 1700원.
"그래, 오늘은 플렉스다."
나는 중얼거리며 소고기 삼각김밥을 집었다.
계산대에서 알바생이 말했다.
"총 4000원입니다."
나는 카드 지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교통카드 기능이 되는 체크카드 한 장과, 모서리가 닳은 쿠폰 카드 몇 장이 있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1000억 원의 주인이 내민 카드가 너무 평범했다.
카드를 찍었다.
삑.
결제 완료.
잔액 알림이 떴다.
대한제일은행: 4,000원 출금. 잔액 100,000,320,810원
나는 그 문자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1000억 원에서 4000원이 빠졌다.
바닷물에서 눈물 한 방울을 떠낸 것 같았다.
편의점 창가 자리에 앉아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젓가락을 쪼개려는 순간,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친구 단톡방이었다.
민재: 야 한도윤 살아있냐?
지훈: 얘 또 지각각
수아: 오늘 점심 8천 이하라며. 후보 받음
나는 컵라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봤다.
손가락이 은행 앱을 열었다.
잔액 화면이 떴다.
100,000,320,810원
숫자가 너무 잘생겨 보였다.
나는 캡처 버튼을 눌렀다.
찰칵.
단톡방 입력창에 사진을 올렸다. 아직 전송은 누르지 않았다. 미리보기 화면에 내 잔액이 떡하니 떠 있었다. 0들이 줄지어 서서 나를 유혹했다. 마치 군대처럼 외쳤다.
보내라.
보내서 보여줘라.
너도 이제 점심값 8000원으로 고민하는 인간이 아니라고.
민재가 매번 "야 네가 커피 사라, 넌 대리잖아"라고 놀릴 때마다 웃어넘겼던 나. 지훈이 중고차 샀다고 자랑할 때 "오 좋네"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부러워했던 나. 수아가 "도윤이는 안정적이긴 한데 뭔가 큰일은 못 할 스타일"이라고 말했을 때 괜찮은 척했던 나.
그들에게 단 한 장이면 충분했다.
한 장의 잔액 인증.
나는 전송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때 사라졌던 시스템 창이 다시 나타났다.
공개 루트 미리보기
친구 단톡방에 잔액 인증을 전송하시겠습니까?
나는 젓가락을 든 채 얼어붙었다.
창 아래에 작은 영상처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장면. 단톡방이 폭발한다.
민재: 뭐야 합성이냐?
지훈: 야 전화 받아
수아: 도윤아 이거 진짜야?
두 번째 장면. 3분 뒤 민재에게 전화가 온다. 목소리는 웃고 있지만 숨이 가쁘다.
"야, 장난이지? 아니 근데 진짜면 오늘 네가 쏴야지. 아니,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나 진짜 급한 게 있는데……."
세 번째 장면. 누군가 스크린샷을 저장한다. 누가 저장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장되는 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린다.
찰칵.
네 번째 장면. 회사 복도에서 사람들이 나를 본다. 어제까지 "한 대리"였던 내가 갑자기 "그 돈 생긴 사람"이 된다.
다섯 번째 장면.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도윤아, 너 무슨 일 있니? 이모가 이상한 걸 봤다는데……."
마지막으로 상태창이 떴다.
공개 루트 예상 변화
부자력: +5
평판: 급변
관계도: 재정렬 시작
위험도: +24
이벤트: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 조기 등장 가능
나는 침을 삼켰다.
컵라면 김이 안경을 흐리게 만들었다. 아니, 나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만큼 머릿속이 뿌예졌다.
전송 버튼은 여전히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버튼은 작았다. 손톱보다 조금 큰 네모였다. 그런데 그걸 누르면 내 인생의 문 하나가 열릴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문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진을 삭제했다.
단톡방에는 이렇게 답했다.
도윤: 오늘은 김치찌개 말고 좀 좋은 거 먹을까?
보내자마자 후회했다.
너무 수상했다.
3초 뒤 답장이 왔다.
민재: 뭐야
지훈: 한도윤이?
수아: 좋은 거 기준 얼마? 8500?
나는 컵라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혀가 데었다. 1000억 원이 있어도 컵라면을 급하게 먹으면 혀는 똑같이 데었다.
숨기려는 사람은 너무 많이 움직인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평범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문제는 평범해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혹시 누가 내 은행 앱을 볼까 봐였다. 그러다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서 다시 꺼냈다. 꺼내자마자 화면이 켜질까 봐 황급히 뒤집었다. 뒤집어 놓으니 더 수상했다. 결국 양손으로 휴대폰을 감싸 쥐고 있었다.
옆자리 할머니가 나를 힐끔 보았다.
나는 괜히 웃었다.
할머니는 더 멀어졌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딱 범죄자였다. 아직 아무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얼굴만 보면 이미 세 번 정도 해외 도피를 실패한 사람 같았다.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시스템 창이 다시 떠올랐다.
은둔 루트 진행 중
비밀 유지 행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자연스러움 수치가 하락합니다.
"자연스러움 수치도 있어?"
나는 작게 말했다.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있어요?"
나는 어깨를 튕기듯 돌아섰다.
같은 팀 주임, 서아였다.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 대리님, 오늘 왜 이렇게 놀라요?"
"아니, 그냥. 잠을 잘 못 자서."
"셔츠 단추도 하나 밀렸는데요."
나는 내려다봤다.
정말이었다. 단추가 한 칸씩 어긋나 있었다. 1000억 원을 숨기는 데 정신이 팔려 기본적인 인간의 형태를 잃었다.
"요즘 많이 힘드세요?"
서아의 말투는 걱정 반, 호기심 반이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비율이었다.
"아니요. 완전 괜찮아요. 평범해요. 저는 오늘도 아주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을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서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 있죠?"
"없어요."
"진짜요?"
"네. 아무 일도 없어요. 통장에도 아무 일 없고요."
침묵.
서아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왜 통장 얘기를 했지?
시스템 창이 내 시야 한쪽에서 얄밉게 반짝였다.
자연스러움: -3
의심도: +4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치듯 탔다. 서아도 탔다. 우리 둘만 탔다. 좁은 공간에 어색함이 가득 찼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나는 여전히 단추가 어긋나 있었다. 고치려 했지만 서아가 보고 있어서 못 고쳤다. 안 고치면 더 이상했고, 고치면 지금까지 몰랐던 척한 게 들통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하기까지 14초가 걸렸다.
인생에서 가장 긴 14초였다.
회사 회의실에 1000억을 들고 들어가면
회의실에는 이미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팀장은 노트북을 두드리며 말했다.
"한 대리, 늦지는 않았네요."
평소라면 "네, 죄송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다른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내가 왜 죄송하지? 내 통장에 1000억 있는데?
나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위험했다. 돈은 아직 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마음속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회의가 시작됐다. 팀장은 다음 달 캠페인 예산안을 띄웠다.
"이번 전체 예산은 3000만 원입니다. 낭비 없이 써야 합니다."
나는 화면을 보다가 멍해졌다.
3000만 원.
어제까지는 큰돈이었다. 지금도 물론 큰돈이다. 누군가에게는 1년 연봉이고, 누군가에게는 빚을 갚을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계산이 튀어나왔다.
1000억의 0.03퍼센트도 안 되나?
팀장이 말했다.
"한 대리, 듣고 있어요?"
"네."
"이 예산 안에서 인플루언서 섭외를 몇 명까지 할 수 있을지 계산해봤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냥 제가 내면 안 돼요?"
회의실 공기가 멈췄다.
팀장이 눈을 깜박였다.
"뭘요?"
"아니, 그러니까…… 아이디어를요. 제가 아이디어를 내면 안 되냐는 뜻이었습니다."
말이 꼬였다. 혀가 내 편이 아니었다.
지훈이 옆에서 작게 웃었다. 회사 동기 지훈은 내 친구 단톡방의 그 지훈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팔꿈치로 툭 쳤다.
"너 오늘 이상하다?"
"안 이상해."
"아침에 좋은 거 먹자고 하더니. 로또 됐냐?"
그 말에 내 몸이 굳었다.
회의실에 있던 세 명이 동시에 나를 봤다.
로또.
세상에서 갑자기 돈 생긴 사람에게 가장 먼저 붙는 단어.
나는 웃으려 했다. 그런데 웃음이 너무 늦게 나왔다.
"하하. 무슨 로또야. 로또는 무슨. 내가 로또면 회사 왔겠냐?"
말하고 나서 또 후회했다.
그건 너무 진심이었다.
팀장이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한 대리, 컨디션 안 좋으면 회의 끝나고 잠깐 얘기합시다."
시스템 창이 조용히 떴다.
은둔 루트 즉각 변화
평판: 평범함 → 약간 이상함
관계도: 유지 → 관찰 대상
내부 스트레스: +9
의심도: +7
나는 눈을 감았다.
가장 쉬워 보였던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속 거짓말을 만들고, 표정을 관리하고, 단어를 고르고, 실수를 덮는 선택이었다. 숨긴다는 건 가만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숨긴다는 건 온몸으로 연기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연기를 못했다.
공개하면 사람들이 달려오고, 숨기면 내가 도망친다
점심시간이 되자 지훈과 민재에게서 동시에 메시지가 왔다.
지훈: 야 진짜 오늘 이상함. 뭔 일 있음?
민재: 좋은 거 먹자며. 소고기? 초밥? 아니면 너 돈 생김? ㅋㅋ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단톡방에 다시 잔액 인증을 올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강했다. 왜냐하면 숨기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말해버리면 편할 것 같았다.
그래, 맞아. 나 돈 생겼어.
그 한마디면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단추를 잘못 끼워도, 회의에서 이상한 말을 해도, 컵라면 앞에서 철학을 해도, 모든 게 설명된다.
하지만 설명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한도윤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시스템 창이 내 앞에 두 개의 문처럼 나타났다.
왼쪽 문에는 금색 글자가 떠 있었다.
공개 루트
장점: 숨 쉴 수 있음. 사람들이 즉시 다르게 대함. 돈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빠르게 사라짐.
단점: 사람들이 너무 빨리 다르게 대함. 돈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빠르게 생김.
오른쪽 문에는 회색 글자가 떠 있었다.
은둔 루트
장점: 기존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음. 관계의 진심을 조금 더 관찰할 수 있음. 외부 위험이 늦게 옴.
단점: 내가 먼저 망가질 수 있음. 사소한 말과 행동이 모두 증거가 됨. 가까운 사람일수록 배신감을 느낄 수 있음.
나는 두 문을 번갈아 보았다.
공개하면 사람들이 달려온다.
숨기면 내가 도망친다.
어느 쪽이 더 안전한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둘 다 위험하다는 것뿐이었다.
민재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민재: 야 답장 없으면 김치찌개 간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세계는 거대한 갈림길 앞에 나를 세워놓았는데, 친구는 김치찌개를 결정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게 나를 붙잡아주었다. 1000억 원의 무게보다 8000원짜리 점심 약속이 더 현실적이었다.
나는 답장을 썼다.
도윤: 김치찌개 가자.
전송.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도윤: 대신 계란말이 추가하자. 내가 살게.
단톡방이 잠시 조용해졌다.
민재: 미쳤다
지훈: 진짜 무슨 일 있음
수아: 한도윤 플렉스 시작
나는 피식 웃었다.
계란말이 하나로도 사람은 의심을 받는다. 그렇다면 1000억은 어떨까.
상태창이 떠올랐다.
소액 플렉스 발생
지출: 6,000원 예상
관계도: 소폭 상승
의심도: +2
부자력: +1
"계란말이에 부자력이라니."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부자력은 슈퍼카를 사는 능력이 아니라, 계란말이 하나를 사면서도 마음을 들키지 않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물론 나는 이미 반쯤 들켰지만.
첫 번째 균열
김치찌개집은 회사 근처 지하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테이블은 끈적했고, 벽에는 오래된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김치찌개 8000원. 계란말이 6000원. 공깃밥 추가 1000원.
예전의 나는 공깃밥 추가를 고민했다. 오늘의 나는 가게를 살 수 있을지 잠깐 계산했다.
위험한 생각이었다.
민재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야, 너 오늘 진짜 왜 그래?"
"뭐가."
"계란말이를 네가 산다고?"
"그럴 수도 있지."
"없었잖아, 원래."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회의 때도 이상했어. 예산을 자기가 낸다고 하지 않았냐?"
"아이디어를 낸다고 한 거라니까."
수아가 계란말이를 한 조각 집으며 말했다.
"도윤아, 혹시 좋은 일 있어?"
그 질문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좋은 일 있냐는 말에는 여러 대답이 가능하다. 승진? 연애? 로또? 상속? 범죄?
나는 물을 마셨다.
"그냥…… 오늘 아침에 생각이 좀 많았어."
"무슨 생각?"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1000억이 생기면 사람은 말이 많아질 줄 알았다. 사실은 반대였다. 할 수 없는 말이 많아져서 입이 무거워졌다.
민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야, 진짜 돈 생긴 거면 나한테만 말해. 나 입 무거워."
지훈이 바로 말했다.
"네 입이 무거우면 풍선도 쇳덩이다."
다들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런데 웃음 끝이 조금 떨렸다.
그 순간 민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더니 자리에서 살짝 몸을 돌렸다.
"어, 엄마. 지금 밥 먹어. 왜?"
평범한 통화였다. 하지만 몇 초 뒤 민재의 표정이 굳었다.
"또? 얼마가 필요한데?"
나는 숟가락을 멈췄다.
민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나도 이번 달 빠듯하다니까. 카드값도 있고…… 알았어. 이따 전화할게."
그가 전화를 끊고 억지로 웃었다.
"아, 우리 엄마 또 친척 결혼식 축의금 때문에 난리네."
예전의 나라면 그냥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다들 비슷하게 빠듯하니까. 돈 얘기는 늘 민망하고, 민망한 이야기는 농담으로 덮는 게 어른들의 기술이니까.
그런데 오늘의 나는 달랐다.
내 통장에는 1000억이 있었다.
민재가 필요한 돈은 아마 몇십만 원일 것이다. 어쩌면 백만 원. 내게는 너무 작은 돈이었다. 너무 작아서 더 위험했다. 작은 돈이니까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한 번 도와주면 다음은? 민재가 왜 도와줬냐고 물으면? 내가 계속 숨길 수 있을까?
시스템 창이 식탁 위 김치찌개 김 사이로 떠올랐다.
즉석 선택 발생
친구의 돈 문제를 들었습니다.
A. 모른 척한다. 은둔 루트 유지. 관계도 변화 없음. 죄책감 +6
B. 작은 금액을 빌려준다. 관계도 상승. 의심도 +8
C. 잔액을 공개하고 크게 도와준다. 공개 루트 전환. 관계도 급변. 위험도 +30
나는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첫 번째 선택은 이미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부자가 된 뒤의 선택은 한 번 누르고 끝나는 버튼이 아니었다. 밥상 위에도, 단톡방에도, 엘리베이터 안에도, 친구의 한숨 속에도 계속 나타났다.
가장 쉬워 보였던 '숨기기'는 사실 매 순간 다시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게임이었다.
민재가 계란말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아, 맛있다. 도윤아, 오늘 왜 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다."
나는 그를 보았다.
친구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대학교 축제에서 같이 막걸리를 마시던 얼굴, 취업 준비할 때 서로 자소서를 봐주던 얼굴, 월급날마다 치킨값을 정확히 반반 나누던 얼굴.
이 얼굴이 돈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바뀔까.
아니, 더 무서운 질문은 따로 있었다.
내가 이 얼굴을 보는 방식은 이미 바뀐 걸까.
나는 입을 열었다.
"민재야."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왜?"
내 혀끝까지 말이 올라왔다.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게.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 사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은행에서 온 문자였다.
대한제일은행 PB센터: 한도윤 고객님, 고액 자금 관련 긴급 확인이 필요합니다. 금일 방문이 어려우실 경우 담당 매니저와 통화 부탁드립니다.
동시에 또 다른 알림이 떴다.
보낸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 아들, 은행에서 집으로 우편 온다는데 무슨 일 있어?
심장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돈은 이미 나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민재에게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 아침 내가 누른 B 버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런 뜻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상태창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은둔 루트 유지
내부 스트레스: +12
가족 의심도: +10
친구 의심도: +6
다음 이벤트: 은행, 가족, 회사 중 하나가 먼저 문을 두드립니다.
김치찌개는 끓고 있었다.
친구들은 웃고 있었다.
내 휴대폰 화면에는 엄마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리고 내 통장에는 여전히 1000억 원이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부자가 된 첫날,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호텔 조식도, 명품도, 자동차도 사지 않았다. 겨우 컵라면 하나와 계란말이 하나를 샀을 뿐이다.
그런데도 내 주변의 공기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돈은 크게 쓸 때만 티가 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돈은 숨기려는 순간부터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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