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고 말하는 순간 다시 재생되는 음악
베이퍼웨이브를 설명하는 일은 이상하게도 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된다. 낡은 쇼핑몰의 에스컬레이터가 천천히 움직이고, 아무도 없는 푸드코트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다. 스피커에서는 어딘가 익숙하지만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멜로디가 느리게 흐른다. 화면에는 야자수, 대리석 흉상, 일본어, 보라색 그리드, 오래된 운영체제의 창이 겹쳐 있다. 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고, 촌스럽고, 과장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왜 그럴까. 왜 한때 폐기된 광고 이미지, 엘리베이터 음악, 기업 로고, VHS 노이즈, 초기 인터넷 그래픽이 지금도 이상하게 아름답게 느껴질까.
이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대답은 단순하지 않다. 베이퍼웨이브는 "옛날 것이 좋아서" 만들어진 복고 취향만은 아니다. 그것은 음악 장르이면서 이미지 언어이고, 밈이면서 비평이며, 장난처럼 시작했다가 어느새 진심이 되어버린 인터넷 시대의 감각이다. 베이퍼웨이브는 매끈한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가 상상했던 미래, 그리고 그 미래가 정말 올 것이라고 믿었던 감각을 애도한다.
그러므로 베이퍼웨이브는 끝난 장르라기보다, 끝났다고 말할 때마다 다시 재생되는 장르에 가깝다. "죽었다"는 선언마저도 그것의 일부가 된다. 오래된 파일을 다시 압축하고, 낮은 해상도의 이미지를 다시 업로드하고, 잊힌 노래를 다시 느리게 재생하는 순간, 베이퍼웨이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포스트인터넷 시대의 종합예술
베이퍼웨이브는 처음부터 하나의 소리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 중심에는 샘플링이 있다. 1980~90년대 팝, 시티팝, 스무스 재즈, R&B, 라운지 음악, 뮤작, 기업 홍보 영상의 배경음악, 운영체제의 효과음이 잘리고 늘어나고 반복된다. 플런더포닉스, 즉 이미 존재하는 녹음물을 가져와 새로운 의미로 재배치하는 방식은 베이퍼웨이브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기반이다. 여기에 느려진 템포, 과한 리버브, 낮아진 피치, 반복되는 루프, 일부러 남겨둔 디지털 찌꺼기가 붙는다.
하지만 베이퍼웨이브는 귀로만 듣는 장르가 아니다. 인터넷 음악 마이크로장르이자 미학이며 밈으로 설명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 어떤 트랙은 앨범 커버를 보지 않으면 절반만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미지는 음악이 없어도 이미 음악처럼 작동한다. 분홍색과 청록색의 그라데이션,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상, 일본어 제목, 3D 렌더링 오브젝트, 멤피스 디자인의 기하학적 패턴, Windows 95를 떠올리게 하는 회색 창, VHS 화면의 번짐, 낮은 비트레이트의 압축 흔적은 모두 베이퍼웨이브의 악기다.
여기에 또 하나의 층이 있다. 바로 인터넷 커뮤니티다. Bandcamp의 앨범 페이지, Tumblr의 이미지 콜라주, Reddit의 토론, YouTube의 추천 알고리즘, 4chan과 포럼 문화, 24시간 스트리밍 라디오, 밈 계정과 리뷰 채널은 베이퍼웨이브의 유통망이자 전시장이고 공연장이다. 베이퍼웨이브는 "발표된 작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댓글을 달고, GIF를 만들고, 앨범 커버를 패러디하고,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다시 공유하는 순간마다 계속 변한다.
그래서 베이퍼웨이브는 포스트인터넷 시대의 종합예술이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서 포스트인터넷이란 단순히 "인터넷 이후"라는 뜻이 아니다. 인터넷이 이미 일상과 기억, 취향과 예술 생산의 기본 환경이 된 상태를 가리킨다. 베이퍼웨이브는 그 환경에서 탄생했다. 음악, 그래픽 디자인, 영상, 패션, 밈, 게시판 말투, 파일명, 가명, 가짜 기업 브랜드, 가상 쇼핑몰의 감각이 한꺼번에 뒤섞인다.
20세기의 종합예술이 무대 위에서 음악, 미술, 연극, 조명을 결합했다면, 베이퍼웨이브의 무대는 브라우저 창이다. 관객은 객석에 앉아 있지 않고, 탭을 여러 개 열어둔 채 듣는다. 한쪽에서는 앨범이 재생되고, 다른 쪽에서는 커버 이미지가 확대되어 있으며, 또 다른 창에는 누군가가 "이 장르는 이미 죽었다"고 적어놓았다. 그 모든 창이 합쳐져 하나의 작품이 된다.
베이퍼웨어라는 약속, 베이퍼웨이브라는 유령
베이퍼웨이브라는 이름은 자주 "베이퍼웨어"와 연결된다. 베이퍼웨어는 기업이 출시하겠다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끝내 시장에 나오지 않은 제품이나 소프트웨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진과 설명, 기대와 광고는 있었지만 물건은 도착하지 않았다. 약속은 있었지만 실현은 없었다. 이 말의 그림자가 베이퍼웨이브 전체를 비춘다.2
1980~90년대의 테크노-자본주의는 밝은 미래를 약속했다. 더 빠른 컴퓨터, 더 편리한 통신, 더 세련된 쇼핑 공간, 더 깨끗한 사무실, 더 국제적인 도시, 더 자유로운 소비. 광고 속 사람들은 웃고 있었고, 기업 홍보 영상의 신시사이저는 모든 것이 곧 나아질 것처럼 울렸다. 전화 대기음조차 친절했고, 엘리베이터 음악조차 안심을 주었다. 인터넷은 아직 감시와 분노와 피로의 공간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와 지식과 가능성의 창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미래는 우리가 상상한 방식으로 도착하지 않았다. 편의는 왔지만 동시에 감시는 왔다. 연결은 왔지만 동시에 고립도 왔다. 무한한 선택지는 생겼지만, 선택을 유도하는 알고리즘도 함께 생겼다. 쇼핑몰의 반짝이는 복도는 온라인 장바구니와 물류센터의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바뀌었다. 기업 유토피아의 미소는 고객센터 자동응답기의 목소리로 남았다.
베이퍼웨이브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울린다. 그것은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믿었는가"라고 묻는다. 낡은 광고 음악을 느리게 만들면, 그 안에 숨어 있던 공허가 들린다. 시티팝의 매끈한 도시적 낙관을 반복하면, 그 표면 아래의 쓸쓸함이 떠오른다. 기업 로고를 네온빛 폐허 속에 놓으면, 그것은 더 이상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 실패한 예언의 묘비처럼 보인다.
이때 베이퍼웨이브가 호출하는 것은 과거 자체가 아니라 "잃어버린 미래"다. 문화비평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미래란, 한때 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현실이 되지 못한 미래의 감각을 뜻한다. 베이퍼웨이브의 쇼핑몰, 사이버 공간, 가상 휴양지, 기업 사무실, 초기 3D 그래픽은 모두 그런 미래의 잔해다. 분명히 낡았는데도 미래적으로 보이고, 미래적인데도 이미 폐허처럼 느껴진다. 그 모순이 베이퍼웨이브의 심장이다.
키치의 이중생활
베이퍼웨이브의 표면은 키치하다. 과채도의 LCD 화면, 말도 안 되게 반짝이는 야자수, 어색한 3D 돌고래, 대리석 흉상, 싸구려 호텔 로비 같은 색감, 일본어를 장식처럼 배치한 앨범 제목은 때로 너무 노골적이라 웃음이 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촌스럽게 만든 디자인"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키치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베이퍼웨이브는 소비문화의 쾌락을 아주 잘 안다. 백화점 냉방의 감각, 늦은 밤 케이블TV 광고, 호텔 라운지의 조명, 새 전자제품 박스를 열 때의 설렘, 도시 야경을 배경으로 흐르는 색소폰 솔로. 그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감각적 즐거움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잘 재현한다. 그래서 위험하다. 듣다 보면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 유혹당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진다.
바로 그 양가성이 중요하다. 베이퍼웨이브는 소비문화의 이미지를 가져와 그것을 즉시 폐기하지 않는다. 먼저 아름답게 만든다. 충분히 매혹적으로 들려준다. 그런 다음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가리고 있었는지, 왜 지금은 불안하게 느껴지는지 묻게 한다. 어떤 연구들은 베이퍼웨이브가 글리치 아트, 기업 아이콘, 앰비언트 사운드스케이프를 통해 상품화, 알고리즘적 통제, 공동체 경험의 상실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3
글리치는 여기서 단순한 고장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매끈한 표면에 생긴 균열이다. VHS 노이즈는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낮은 해상도는 우리가 붙잡고 있는 향수가 이미 압축되고 손상된 파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반복되는 루프는 대중음악의 후렴이기도 하지만, 소비 시스템의 회전문이기도 하다. 쇼핑몰의 배경음악은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의 소리처럼 들린다.
그래서 베이퍼웨이브의 키치는 이중생활을 한다. 낮에는 광고판이고, 밤에는 유령이다. 낮에는 "이것을 사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밤에는 "우리는 왜 그 말을 믿었을까"라고 속삭인다. 이 장르가 아직도 흥미로운 이유는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비판도 아니고, 순수한 향수도 아니다. 사랑하면서 의심하고, 즐기면서 불편해하고, 웃으면서 애도한다.
죽음은 이 장르의 재생 버튼이다
베이퍼웨이브에 대해 조금만 찾아보면 곧 이런 말을 만나게 된다. "베이퍼웨이브는 죽었다." 이상한 일은, 이 말이 너무 오래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죽었다는 장르가 계속 새 앨범을 내고, 새 하위장르를 만들고, 새 이미지를 생산하고, 새 청자를 끌어들인다. 죽었다는 말 자체가 밈이 되고, 그 밈이 다시 장르를 홍보한다.
이 모순은 베이퍼웨이브의 핵심 성격을 잘 보여준다. 베이퍼웨이브는 일반적인 음악 산업의 유행 주기와 조금 다르게 움직였다. 차트에 오르고, 대형 레이블이 투자하고, 라디오 히트곡을 내고, 스타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물론 유명한 앨범과 상징적 아티스트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장르의 진짜 생명력은 익명의 계정, 작은 레이블, 한정판 카세트, 무료 다운로드 링크, 업로드와 삭제, 재업로드와 리믹스, 댓글과 포럼에 있었다.
24시간 온라인 라디오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Nightwave Plaza 같은 서비스는 광고 없는 24시간 베이퍼웨이브 라디오를 표방하며, 인터넷 연결만 있으면 어디서든 꿈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소개한다.4 이런 공간에서 베이퍼웨이브는 앨범 단위의 감상만이 아니라, 끝없이 흐르는 환경이 된다. 누군가는 공부할 때 듣고, 누군가는 잠들기 전에 듣고, 누군가는 아무도 없는 가상 쇼핑몰을 산책하듯 접속한다.
포럼 역시 중요하다. Agora Road's Macintosh Cafe 같은 커뮤니티에는 베이퍼웨이브 일반 토론, 음악 리뷰, 인터뷰, 아티스트 관련 게시판이 이어져 있으며, 장르가 여전히 대화와 기록의 대상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5 이곳에서 베이퍼웨이브는 박물관의 전시물이 아니라, 누군가가 지금 막 추천하고 반박하고 다시 분류하는 살아 있는 자료가 된다.
죽음과 부활의 논쟁은 결국 베이퍼웨이브가 "완성된 양식"이 아니라 "재편집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Floral Shoppe》 이후의 모든 것을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바로 그 반복이 베이퍼웨이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퓨처 펑크가 너무 밝아져서 베이퍼웨이브의 비판성을 잃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하드베이퍼나 베이퍼노이즈가 장르의 새로운 출구였다고 말한다. 이 다툼은 결론을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 다시 듣고 다시 이름 붙이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베이퍼웨이브는 "죽었다"는 말을 먹고 산다. 죽었다는 선언은 장례식이 아니라 샘플이 된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가져와 앨범 제목으로 쓰고, 누군가는 밈으로 만들고, 누군가는 다시 느리게 늘여 새로운 농담을 만든다. 그렇게 베이퍼웨이브는 자신의 부고 기사마저 리믹스한다.
합성 향수의 시대
이제 베이퍼웨이브의 방법론은 더 넓은 환경으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누군가가 오래된 음반과 광고 영상, TV 녹화본, 게임 화면, 운영체제 사운드를 찾아내 잘라 붙였다. 이제는 데이터셋이 그 일을 돕는다. AI 이미지 생성기는 "vaporwave"라는 프롬프트만으로 분홍빛 하늘, 로마 조각상, 네온 그리드, 복고풍 컴퓨터, 초현실적 해변을 순식간에 만들어낸다. 실제로 여러 이미지 생성 서비스는 베이퍼웨이브풍의 핑크·블루 그라데이션, 레트로 테크, 로마 조각상 같은 요소를 대표 특징으로 내세운다.6
이 변화는 흥미롭고도 불안하다. 베이퍼웨이브가 한때 과거 미디어의 파편을 손으로 주워 조합했다면, 이제는 기계가 그 파편들의 평균값을 계산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우리는 실제 1990년대 광고를 보지 않아도 "1990년대 광고처럼 보이는 것"을 생성할 수 있다. 실제 존재했던 쇼핑몰을 기억하지 않아도 "쇼핑몰을 그리워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실제로 겪지 않은 시대에 대한 향수, 즉 아네모이아의 감각은 베이퍼웨이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자주 언급되어 왔다.7 AI 시대에는 이 감각이 더 정교해진다.
이것을 "합성 향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합성 향수는 특정한 개인의 기억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수많은 이미지와 소리, 광고와 앨범 커버, 게임 화면과 영화 장면, 인터넷 밈의 축적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면서 동시에 아무의 어린 시절도 아니다. 너무 익숙한데 출처를 알 수 없고, 분명히 그리운데 실제로 가진 적은 없는 감정이다.
무한 스트리밍도 이 감각을 강화한다. 음악은 더 이상 한 장의 앨범으로 끝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비슷한 곡을 이어 붙이고, 라이브 스트림은 밤낮없이 흐르며, 플레이리스트는 청자의 기분에 맞춰 자동으로 갱신된다. 베이퍼웨이브는 원래도 배경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쇼핑몰, 대기실, 콜센터의 음악을 가져와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베이퍼웨이브 자신이 다시 배경음악이 된다. 공부할 때, 일할 때, 잠잘 때, 가상공간을 떠돌 때, 그것은 끝없이 흐르는 환경음이 된다.
가상공간과 메타버스 환경에서도 베이퍼웨이브의 언어는 쉽게 확장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베이퍼웨이브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지 않는 공간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가짜 쇼핑몰, 가짜 기업, 가짜 휴양지, 가짜 운영체제, 가짜 라디오 방송국. 이 장르는 물리적 장소보다 인터페이스에 더 잘 어울린다. 로그인 화면, 로딩 창, 아바타가 서 있는 광장, 텅 빈 3D 로비, 사용자가 떠난 서버의 잔향. 이런 공간은 베이퍼웨이브가 처음부터 꿈꾸던 무대와 닮아 있다.
물론 위험도 있다. 베이퍼웨이브의 미학이 너무 쉽게 생성되고 소비될 때, 그것은 비판적 날카로움을 잃고 단순한 필터가 될 수 있다. 분홍색 네온과 대리석 흉상만 붙이면 무엇이든 베이퍼웨이브처럼 보이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베이퍼웨이브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특정한 색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미디어의 파편을 다시 배치해, 우리가 믿었던 미래의 모양을 묻는 방법이다. 그 방법이 살아 있다면, 베이퍼웨이브는 도구가 바뀌어도 계속 변형될 수 있다.
그리움의 방향을 바꾸는 장치
베이퍼웨이브를 들을 때 우리는 흔히 과거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더 오래 머물면 그 그리움의 방향이 이상하게 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반드시 실제 과거가 아니다. 많은 청자는 베이퍼웨이브가 참조하는 1980~90년대를 직접 겪지 않았거나, 겪었더라도 광고 속 세계처럼 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이미지들은 강하게 작동한다.
왜냐하면 베이퍼웨이브의 향수는 경험의 기억보다 약속의 기억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살았던 시간"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미래"를 떠올리게 만든다. 새 컴퓨터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 글로벌 도시가 모두를 연결할 것이라는 믿음, 소비의 자유가 삶의 자유와 같을 것이라는 믿음, 기술의 진보가 자연스럽게 더 나은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은 완전히 순진했지만, 완전히 거짓만도 아니었다. 적어도 어떤 순간에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
베이퍼웨이브는 바로 그 믿음의 감각을 애도한다. 그래서 그것은 우울하지만 냉소적이지만은 않다.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비웃는 장르였다면, 이렇게 오래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베이퍼웨이브에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있다. 느려진 멜로디는 망가졌지만 여전히 달콤하고, 낡은 그래픽은 촌스럽지만 여전히 빛나며, 텅 빈 쇼핑몰은 불안하지만 이상하게 평화롭다.
이 점에서 베이퍼웨이브는 단순한 폐허 취미와 다르다. 폐허를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폐허가 한때 어떤 꿈의 건축물이었는지 상상하게 만든다. 쇼핑몰은 단지 망한 상업 시설이 아니라 공동체를 대체하려 했던 소비 공간의 유령이 된다. 기업 로고는 단지 디자인 요소가 아니라 신뢰와 번영을 약속했던 시대의 부적이 된다. 엘리베이터 음악은 단지 싸구려 배경음악이 아니라 감정을 관리하고 시간을 부드럽게 통제하려 했던 시스템의 목소리가 된다.
베이퍼웨이브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정말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면 그 시대가 믿었던 가능성을 다시 갖고 싶은가. 우리는 쇼핑몰을 그리워하는가. 아니면 낯선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듣던 경험을 그리워하는가. 우리는 오래된 컴퓨터를 그리워하는가. 아니면 기술이 아직 감시와 피로보다 호기심과 해방에 가까워 보였던 순간을 그리워하는가.
이 질문들 때문에 베이퍼웨이브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그것은 과거의 장르가 아니라, 현재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장르다. 우리가 미래를 믿기 어려워질수록, 베이퍼웨이브의 과거 미래는 더 또렷해진다.
아직도 이상하게 아름다운 이유
이 책의 처음에서 우리는 베이퍼웨이브라는 이상한 입구 앞에 섰다. 그 입구는 쇼핑몰의 자동문 같기도 했고, 오래된 웹사이트의 배너 같기도 했고, 해변 리조트 광고의 분홍빛 노을 같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오자 음악은 점점 느려졌고, 이미지는 점점 흐려졌다. 《Floral Shoppe》의 분홍빛 방을 지나, Bandcamp와 Tumblr와 Reddit과 YouTube의 복도를 건넜고, 전각 문자와 대리석 흉상과 일본어와 VHS 노이즈의 벽을 보았다. 몰소프트의 텅 빈 매장, 퓨처 펑크의 반짝이는 댄스플로어, 유토피안 버추얼의 기업 유토피아, 슬러시웨이브의 길게 번지는 안개, 하드베이퍼의 거친 균열도 지나왔다.
이제 돌아보면 베이퍼웨이브는 하나의 답을 주기보다, 하나의 감각을 남긴다. 그것은 시간의 층이 겹쳐질 때 생기는 감각이다. 과거와 미래, 농담과 진심, 비판과 매혹, 폐허와 유토피아, 개인 기억과 집단 데이터, 음악과 이미지가 한 화면에 열린다. 그 화면은 완벽하지 않다. 픽셀이 깨지고, 색이 번지고, 로딩이 느리다. 그런데 바로 그 결함 때문에 아름답다.
베이퍼웨이브가 아직도 이상하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실패한 약속을 조롱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패한 약속을 다시 틀어준다. 아주 느리게,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늘여서, 우리가 그 안에 무엇을 들었는지 생각할 시간을 준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가 잃은 것은 단지 오래된 음악과 디자인이 아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미래를 향한 어떤 순진한 믿음, 기술이 인간을 더 외롭게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 소비가 아닌 다른 방식의 풍요가 가능하리라는 상상, 화면 너머에 아직 열리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설렘이다.
베이퍼웨이브는 그 믿음을 되살릴 수 없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할 수는 있다. 유령처럼, 잔향처럼, 낮은 해상도의 파일처럼. 사라진 미래는 돌아오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수 있다. 느려진 드럼 사이에서, 끊어진 광고 문구 사이에서, 아무도 없는 가상 플라자의 조명 아래에서.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퍼웨이브는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가 상상했던 미래, 그리고 그 미래를 믿었던 마음을 애도하게 만드는 문화적 장치다. 그 애도는 우습고, 과장되어 있고, 때로는 싸구려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짜 슬픔은 종종 그런 모습으로 온다. 너무 반짝이는 색, 너무 느린 멜로디, 너무 낡은 화면, 너무 오래된 로고를 하고서.
어쩌면 베이퍼웨이브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라진 미래의 폐허 앞에서 잠시 멈춰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곳이 정말 낙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광고였을 것이다. 그래도 한때 누군가는 이 빛을 보고 미래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빛의 잔상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말한다.
참고
2Vaporwave: The Musical Wallpaper of Lost Futures
3Rhizomes PDF essay on vaporwave aesthetics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