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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해피엔딩

Views 132약 11분생성형 AI 활용

영웅은 침대에서 도망친다

카일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전장이 아니었다.

천장은 하얬고, 이불은 지나치게 부드러웠으며, 창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피 냄새도, 불타는 마나 냄새도, 흑기사의 쇳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드디어 깼나.

카일은 눈을 감았다.

"아직 안 깼습니다."

—눈을 뜨고 말하는 인간은 대체로 깬 인간이다.

"저는 예외입니다."

—예외는 검술 자세에서나 찾거라. 일어나라. 누운 자세가 흐트러졌다.

카일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라그나는 살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검 속에 남아 있었다. 마왕의 문을 닫을 때 심장 조각을 태워 버렸으니, 한동안 조용해질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사흘 정도는 평화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고대 드래곤은 질겼다.

무척이나 질겼다.

카일이 잠든 동안에도 라그나는 꿈속에 나타나 "칼을 베개 밑에 두지 마라, 품격이 없다", "오른손 악력이 약하다", "죽다 살아났다고 해서 게으름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같은 말을 해 댔다.

카일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갈비뼈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다시 누웠다.

"아."

—엄살이 늘었군.

"마왕 문 닫고 쓰러진 사람한테 엄살이라뇨."

—살아 있으면 수련할 수 있다.

"그 말, 정말 최악입니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루시아가 들어왔다. 손에는 물주전자가 들려 있었고, 표정은 평온했다. 다만 카일이 몸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모양새를 보자마자 눈썹이 올라갔다.

"움직였어?"

"아니."

"이불이 왜 구겨졌는데?"

"이불이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루시아는 말없이 다가와 카일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힘은 기사단 훈련용 망치 같았다.

"의사가 일주일은 안정하랬어."

"전쟁 끝난 지 얼마나 됐죠?"

"열흘."

카일은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열흘.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보상도 확인 못 했고, 상황도 듣지 못했고, 무엇보다 황녀가 약속한 돈도 받지 못했다.

카일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루시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파?"

"아뇨."

"그럼 왜 그렇게 절망한 얼굴이야?"

"제가 열흘 동안 돈 이야기를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시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물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살아 있네."

"네?"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살아 있어."

그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카일도 따라 웃었다.

살아 있었다.

전생의 끝에서는 혼자 진흙탕에 누워 죽었다. 이번에는 하얀 침대 위에서 동료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꽤 괜찮은 결말이었다.

왕도는 아직도 돈이 전부다

카일이 침대에서 탈출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정확히는 탈출하려다 붙잡혔다.

창문을 열고 병실 아래 정원으로 내려가려던 순간, 이리스가 나무 위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딜 가시나, 영웅님?"

카일은 창틀에 한쪽 다리를 걸친 자세로 굳었다.

"산책."

"창문으로?"

"왕도식 산책입니다."

"거짓말 실력이 죽다 살아나면서 퇴화했네."

이리스는 가볍게 몸을 돌려 창가에 앉았다. 그녀의 팔에는 새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전보다 훨씬 좋은 단검이 매달려 있었다. 누가 봐도 비싸 보였다.

카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단검."

"응?"

"어디서 났습니까?"

"마왕군 잔당 압수품."

"공식적으로 압수한 겁니까?"

이리스는 밝게 웃었다.

"공식이란 말은 참 넓은 뜻을 가졌지."

그때 복도 쪽에서 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품에는 서류뭉치가 산처럼 안겨 있었다. 종이 위에는 황실과 왕실 인장이 번갈아 찍혀 있었다.

"카일 형! 큰일 났어요!"

카일은 본능적으로 창밖으로 몸을 더 내밀었다.

"마왕이 부활했습니까?"

"아뇨!"

"흑기사가 되살아났습니까?"

"아뇨!"

"그럼 큰일 아닙니다."

핀은 울상을 지으며 서류뭉치를 침대 위에 쏟았다.

"형 앞으로 온 서류예요."

카일은 그 순간 마왕의 문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창백해졌다.

서류는 끝이 없었다. 포상금 수령 확인서, 전공 보고서, 피해 보상 심사서, 작위 수여 동의서, 영지 임시 관리 권한서, 아카데미 복학 여부 확인서, 왕실 초청 연회 참석 회신서.

그리고 가장 위에는 반짝이는 금박 글씨가 적혀 있었다.

카일 폰 어쩌고저쩌고 경.

카일은 종이를 집어 들고 읽다가 멈췄다.

"제 이름 뒤에 왜 이렇게 많이 붙었죠?"

핀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형이 영웅 칭호를 받았거든요! 그리고 남부의 작은 영지를 하사받았대요. 이제 귀족이에요!"

카일은 조용히 물었다.

"귀족이면 돈이 많습니까?"

"세금 장부를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럼 귀족 왜 합니까?"

이리스가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 영지, 전쟁 때문에 성벽은 무너졌고 농지는 반쯤 탔고 행정관은 도망갔네. 축하해. 넌 이제 빚 있는 땅의 주인이야."

카일은 창밖을 보았다.

정원까지의 높이는 삼 층.

부상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었다.

—하지 마라.

라그나가 낮게 말했다.

'생각만 했습니다.'

—네 생각은 늘 사고의 예고편이다.

그때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황녀 아리아가 들어왔다. 공식 자리에서 쓰는 엘레노아 황녀의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오래된 종탑에서 보았던 그 차분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우아했고, 여전히 피곤해 보였으며, 여전히 사람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미소를 지었다.

"경, 깨어나자마자 창문으로 도주하려 했다지?"

카일은 창틀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오해입니다."

"그럼 저 서류들은 오해가 아니겠군."

아리아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왕국은 너를 영웅으로 선포했다. 마왕 부활을 막고 북부 전선을 지켜 낸 공로로 작위와 영지를 내렸지. 물론 거절할 수는 있다."

카일의 눈이 빛났다.

"정말입니까?"

"대신 서류는 세 배로 늘어난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대답은 즉시 나왔다.

루시아가 옆에서 작게 웃었다. 핀은 감동한 얼굴로 "역시 형은 현실적이에요"라고 중얼거렸다. 이리스는 이미 포상금 항목을 검토하고 있었다.

아리아는 카일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안에는 금으로 만든 영웅 훈장이 들어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였지만, 카일의 시선은 훈장 아래쪽에 깔린 수표로 향했다.

"이건?"

"약속했던 보상금."

카일은 경건한 손길로 수표를 들었다.

마왕의 문을 닫을 때보다 눈빛이 진지했다.

라그나가 한숨을 쉬었다.

—세계를 구한 인간의 눈빛이 아니다.

'세계도 중요하지만 현금 흐름도 중요합니다.'

—용의 보물을 보면 기절하겠군.

'어디 있습니까?'

—말을 말자.

각자의 길, 같은 약속

왕도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평화로워지지는 않았다.

무너진 성벽은 다시 쌓아야 했고, 흑기사의 잔당은 잡아야 했고, 마왕 부활식에 협력한 귀족들은 갑자기 기억을 잃은 척했다.

물론 아리아는 그런 자들에게 아주 친절했다.

"기억이 안 난다니, 조사실에서 천천히 떠올려 보게 하지."

그 한마디에 왕도의 귀족들은 집단으로 기억력이 좋아졌다.

아카데미도 다시 문을 열었다. 문제아 반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예전에는 교수들이 "사고 치지 마라"고 걱정했지만, 이제는 "나라를 또 구하려고 하지 마라"고 걱정했다.

핀은 마법학부의 특별 연구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며 도망치려 했지만, 브란델 교수가 직접 붙잡았다. 교수는 핀에게 두꺼운 책 열 권을 안기며 말했다.

"네가 제단의 마나 흐름을 뒤집은 방식은 학계의 상식을 세 번쯤 때려눕혔다. 책임져라."

핀은 창백해졌다.

"저도 서류 지옥인가요?"

"아니."

브란델 교수는 웃었다.

"논문 지옥이다."

핀은 그날 카일에게 와서 진심으로 물었다.

"형, 마왕이 다시 나오면 안 될까요? 차라리 그쪽이 쉬울 것 같아요."

카일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살다 보면 논문보다 마왕이 나은 날도 있지."

루시아는 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그녀는 북부 전선에서 보여 준 용기와 판단력으로 단숨에 주목받았다. 하지만 루시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새 방패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이번 방패는 전보다 크고 단단했다. 그리고 안쪽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절대 혼자 막지 말 것.

카일은 그 문구를 보고 말했다.

"좋네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새겨."

"제 검에요?"

"네 이마에."

카일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리스는 왕도의 음지와 양지를 동시에 오가는 정보상이 되었다. 아리아는 그녀에게 비밀 정보망의 한 축을 맡겼고, 이리스는 그 대가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아주 멋진 줄타기 집을 지었다.

"이제 훔치지 않아도 돼."

어느 날 이리스가 말했다.

카일이 놀라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신 정보료를 아주 비싸게 받을 거야. 합법적으로."

"그게 더 무섭습니다."

"성장했다고 해 줘."

브람과 용병단은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은 북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호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그 뒤에는 남쪽 국경의 복구 의뢰를 받았다.

브람은 카일을 보자마자 큰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막내가 귀족님이 됐다며?"

"머리 좀 그만 만지십쇼."

"귀족님 머리는 더 비싸냐?"

"네. 만질 때마다 청구합니다."

브람은 껄껄 웃었다.

"그럼 외상으로 달아 둬라."

그 말에 카일은 잠시 멈췄다.

외상.

예전 용병단에서는 그 말이 지긋지긋했다. 제대로 갚아지지 않는 술값, 장비값, 목숨값.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따뜻하게 들렸다.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뜻이었으니까.

출발 전날 밤, 모두는 아카데미 뒤뜰에 모였다. 예전에는 몰래 훈련하거나 벌을 받던 장소였다. 지금은 전쟁을 끝낸 이들이 조용히 웃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핀은 새 연구 노트를 품에 안고 있었고, 루시아는 새 방패를 등에 멨다. 이리스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고급 과자를 나눠 주었고, 브람은 술통을 들고 왔다가 루시아에게 압수당했다.

"다들 갈 길이 생겼네요."

핀이 말했다.

"그래도 다시 모일 거죠?"

이리스가 과자를 씹으며 대답했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루시아는 카일을 보았다.

"위험한 일이 있으면."

브람은 웃었다.

"돈 되는 일이 있으면."

카일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건은 충분하네요. 보통 재미있고 위험하고 돈 되는 일은 한꺼번에 오니까."

핀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진짜 올 것 같잖아요."

"오면 같이 가면 되죠."

카일은 가볍게 말했다.

정말 가볍게.

예전의 그는 그런 약속을 쉽게 하지 못했다. 내일 살아 있을지 몰랐고, 옆 사람이 언제 사라질지 몰랐다. 약속은 빚이었고, 빚은 살아남은 사람의 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약속은 돌아올 자리였다.

떠나도 다시 모일 수 있다는,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루시아가 손을 내밀었다. 핀이 그 위에 손을 올렸고, 이리스가 귀찮은 척하면서도 손을 얹었다. 브람은 손이 너무 커서 모두의 손을 한꺼번에 덮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카일이 손을 올렸다.

"다음에 모이면," 핀이 말했다. "제발 평범한 여행이면 좋겠어요."

이리스가 웃었다.

"평범한 여행에 카일이 끼면 그건 이미 평범하지 않아."

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카일은 억울했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라그나가 즉시 말했다.

—가해자에 가까운 피해자지.

"검은 빠지십시오."

귀족님은 일하기 싫다

카일의 영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망해 있었다.

보고서에는 '전쟁 피해가 상당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로 가 보니 '상당함'이라는 표현은 매우 예의 바른 거짓말이었다. 성벽은 한쪽이 무너져 있었고, 관청 지붕에는 구멍이 났으며, 창고에는 쥐가 먼저 입주해 있었다.

임시 행정관은 카일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영주님!"

카일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저 말입니까?"

"예!"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행정관은 두꺼운 장부를 내밀었다.

"처리하셔야 할 안건입니다."

카일은 장부를 받았다.

무거웠다.

라그나보다 무거운 것 같았다.

—불경한 비교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장부 첫 장에는 수리 예산, 난민 정착, 세금 감면, 수로 복구, 병력 재편, 곡물 배분 같은 단어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카일은 조용히 장부를 덮었다.

"잠깐 순찰을 다녀오겠습니다."

행정관이 환하게 웃었다.

"훌륭하십니다! 직접 민심을 살피시려는군요!"

"그렇습니다."

카일은 말에 올랐다.

그리고 영지 바깥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처음부터 그쪽이 순찰로인 것처럼.

성문을 나서기 직전, 성벽 위에서 루시아가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가?"

카일은 말고삐를 잡은 채 굳었다.

"민심을 살피러."

"민심은 성 안에 있어."

"성 밖 민심도 중요합니다."

"그쪽은 왕도로 가는 길인데."

이리스가 성문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도주 경로를 너무 정직하게 잡았어. 초보 같네."

핀은 행정관 옆에서 서류를 들고 있었다.

"형, 제가 도와드릴게요. 대신 제 논문 자료도 같이 봐 주세요."

카일은 말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왕."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생각해 보니 그때 죽는 게 조금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루시아는 말없이 훈련용 목검을 들었다.

카일은 즉시 말에서 내렸다.

"농담입니다. 영지 경영, 아주 좋아합니다."

라그나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도망치지 않는 것도 수련이다.

"요즘 수련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날부터 카일은 영주가 되었다.

물론 완벽한 영주는 아니었다. 회의 중간에 몰래 졸다가 루시아에게 발을 밟혔고, 예산안을 보다가 이리스에게 "그건 숫자가 아니라 함정이야"라는 설명을 들었고, 주민 대표 앞에서 멋진 연설을 하려다 핀이 써 준 원고를 거꾸로 들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적어도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영지는 조금씩 살아났다. 무너진 성벽에는 새 돌이 쌓였고, 비어 있던 밭에는 씨앗이 뿌려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가족을 찾았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은 새 집을 얻었다.

카일은 밤마다 장부를 보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았다.

마을 곳곳에 불빛이 켜져 있었다.

작고 따뜻한 불빛들.

전생의 전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

그는 펜을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네."

—무엇이 말이냐?

"살아 있는 사람들 뒤치다꺼리하는 거요."

—그것을 통치라고 부른다.

"이름을 너무 거창하게 붙였군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으려 들 테니까.

카일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조금은 이해했다.

세상을 구하는 건 한 번의 검격으로 가능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게 하는 건 매일의 서류와 밥, 지붕, 길, 그리고 누군가의 잔소리로 이루어진다.

그 사실은 마왕보다 훨씬 귀찮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훨씬 오래 남았다.

이번 생은 해피엔딩

봄이 왔다.

북부의 눈은 녹았고, 왕도의 축제는 다시 열렸다. 작년 축제에서는 습격이 벌어졌지만, 올해는 다행히 폭발도 없고 암살자도 없고 마왕의 사제도 없었다.

물론 이리스가 노점상과 가격 흥정을 하다 작은 전쟁을 일으킬 뻔하긴 했다.

"이 꼬치가 이 가격이라고? 금가루라도 뿌렸어?"

"손님, 고기입니다."

"고기면 다야? 나도 정보에 고기 붙여서 팔까?"

핀은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다니다가 결국 자기 로브에 소스를 쏟았다. 루시아는 경비병들과 함께 순찰을 돌다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아이들은 그녀의 방패를 만져 보고 싶어 했고, 루시아는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나중에는 한 명씩 방패 뒤에 숨는 놀이를 시켜 주었다.

브람은 용병단과 함께 술집을 점령했다.

"오늘은 막내가 산다!"

카일은 멀리서 그 말을 듣고 즉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브람이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귀족님이 도망가면 체면이 안 살지."

"제 체면은 원래 저렴합니다."

"그럼 술값도 저렴하게 내라."

"말이 이상한데요."

밤이 깊어지자 모두는 왕도 언덕 위에 모였다. 축제의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붉고 푸르고 금빛인 불꽃들이 밤하늘에 피었다가 사라졌다.

카일은 그 빛을 올려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불꽃 소리에 몸이 먼저 굳었을 것이다. 폭발인지, 마법인지, 적의 신호인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예뻤다.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웠고, 조금 벅찼다.

루시아가 옆에 섰다.

"무슨 생각해?"

카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번 생은 꽤 잘 풀렸다는 생각."

핀은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꽤요? 형, 마왕 부활 막고 영웅 되고 귀족 됐잖아요."

이리스가 덧붙였다.

"그리고 빚 있는 영지도 얻었지."

"그 이야기는 빼죠."

브람은 술잔을 흔들며 웃었다.

"죽다 살아난 놈이 뭘 더 바라냐. 친구 있고, 밥 있고, 술 있고, 갚을 돈 있으면 인생이지."

"갚을 돈은 없어도 됩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라그나가 검 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아직 검집을 새로 맞추지 않았다.

카일은 이마를 짚었다.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제발."

—품격도 감동의 일부다.

동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카일도 결국 웃었다.

이번 생은 완벽하지 않았다.

아직 처리할 서류가 산더미였고, 영지의 수로는 비가 오면 자꾸 막혔고, 아리아는 필요할 때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위험한 부탁을 보냈다. 핀의 논문은 읽을수록 마왕의 주문서보다 어려웠고, 이리스는 합법적으로 돈을 뜯는 기술을 하루가 다르게 발전시켰다. 루시아는 카일이 무리할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났고, 브람은 술값을 외상으로 달아 두었다.

라그나는 여전히 잔소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귀찮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전생의 카일이 바라던 것은 거창한 왕관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는 것.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 죽음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골치 아파하는 것.

이번 생의 카일은 그것들을 얻었다.

그리고 더 얻었다.

함께 웃을 사람들.

다시 만날 약속.

아직 모르는 길.

카일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라그나."

—말해라.

"저 잘 살고 있습니까?"

라그나는 잠시 침묵했다.

평소라면 자세가 나쁘다거나, 검집이 형편없다거나, 영주 업무를 미루지 말라거나 하는 말이 날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직은 엉망이다.

"역시나."

—그러나 엉망인 채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카일은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불꽃이 밤하늘에서 터졌다.

금빛 빛무리가 모두의 얼굴을 비췄다. 루시아의 미소, 핀의 반짝이는 눈, 이리스의 장난스러운 표정, 브람의 호탕한 웃음.

카일은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잊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좋아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카일의 눈앞에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던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너무 익숙해서, 너무 불길해서, 너무 반가운 그 글자.

[외전 퀘스트 발생]

카일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핀은 카일의 얼굴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퀘스트명: 영웅님의 신혼……]

글자가 잠시 지직거렸다.

[오류]

[퀘스트명 재설정]

[퀘스트명: 도망친 드래곤 세금 징수관을 잡아라]

라그나가 검 속에서 격하게 반응했다.

—드래곤 세금 징수관? 그런 끔찍한 직책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이냐!

이리스의 눈이 번쩍였다.

"세금? 드래곤? 돈 냄새 나는데?"

루시아는 이미 방패 끈을 고쳐 매고 있었다.

"위험한 일이네."

핀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제발 아니라고 해 줘요. 제 논문 마감이 다음 주예요."

브람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재미있고 위험하고 돈 되는 일이라며? 약속 지켜야지, 막내!"

카일은 푸른 글자를 노려보았다.

[참여 보상: 미확인 드래곤 보물창고 위치 정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일의 표정이 아주 천천히 바뀌었다.

라그나가 낮게 말했다.

—카일. 눈빛이 천박하다.

카일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영지 재정을 위한 숭고한 결단입니다."

루시아가 웃었다.

이리스도 웃었다.

핀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고, 브람은 배를 잡고 웃었다.

카일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생은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이라고 해서 이야기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다음 장을 조금 더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카일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갈까요?"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핀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진짜 외전이죠? 본편급으로 터지는 거 아니죠?"

이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터지면 터지는 대로 벌면 되지."

브람이 외쳤다.

"막내가 쏜다!"

"그 말은 취소하십시오."

—우선 검집부터 맞추러 간다.

"그것도 취소하십시오."

웃음소리가 언덕 위로 퍼졌다.

왕도의 밤하늘에는 아직 축제의 불꽃이 남아 있었다. 길은 다시 이어졌고, 바람은 따뜻했으며, 세상은 구해진 뒤에도 여전히 귀찮고 시끄럽고 반짝였다.

카일은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내일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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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막내 용병은 목숨값을 다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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