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내려온 검은 말
새벽빛은 승리의 색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레이혼 요새의 성벽 위에 선 카일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동쪽 하늘은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밤새 몰아치던 눈보라는 잦아들었고, 함몰지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수들의 시체는 눈 위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병사들은 지친 몸을 벽에 기대고 앉아 숨을 골랐다.
살아남았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웃어야 할 순간이었다.
그런데 카일의 손은 검자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라그나가 검 안에서 낮게 말했다.
—온다.
'압니다.'
—네 심장이 먼저 알고 있군.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용의 심장 조각을 열었던 후유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오래된 공포가, 뼈에 새겨진 기억처럼 몸을 조이고 있었다.
철 냄새.
진흙탕.
쏟아지는 비.
그리고 검은 갑옷.
전생의 마지막 순간, 카일은 흑기사의 대검에 가슴을 꿰뚫렸다. 막내 용병이었던 그는 이유도 모른 채 죽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전장 한복판에서 값싼 목숨 하나가 꺼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알았다.
그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북쪽 산맥 너머에서 그 죽음의 주인이 다시 걸어오고 있었다.
"카일."
루시아가 성벽 계단을 올라왔다. 방패에는 새 금이 세 줄이나 늘어 있었다. 얼굴은 피와 그을음으로 엉망이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똑바랐다.
"정말 또 싸워야 해?"
핀도 헐레벌떡 뒤따라왔다.
"아니, 보통은 이럴 때 치료를 받고, 따뜻한 수프를 먹고, 잠을 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방금 요새 하나 지켰잖아요. 요새요. 작은 창고도 아니고."
이리스는 성벽 난간에 기대 북쪽을 보았다.
"저쪽에서 오는 놈이 수프를 들고 올 얼굴은 아니네."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북쪽 숲 끝.
눈 안개가 갈라졌다.
그곳에서 검은 말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말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했다. 갈기는 연기처럼 흔들렸고, 발굽이 눈을 밟을 때마다 하얀 눈이 검게 물들었다. 그 위에 탄 기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투구의 틈새에서는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어두운 빛이 새어 나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요새를 공격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이미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걸어왔다.
성벽 위 병사들이 술렁였다.
"저게……."
"흑기사다."
누군가 중얼거린 이름은 순식간에 퍼졌다.
흑기사.
병사들의 얼굴에서 피로가 사라지고 공포가 들어찼다. 밤새 마수와 싸운 사람들도 그 이름 앞에서는 침을 삼켰다. 칼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에드릭 발렌 경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는 부러진 성문과 북쪽 숲을 번갈아 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전 병력 전투 준비!"
카일이 손을 들어 막았다.
"아닙니다."
에드릭이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냐?"
"저자는 요새를 치러 온 게 아닙니다."
흑기사는 함몰지 앞에서 말을 멈췄다.
그와 요새 사이에는 불에 탄 마수의 시체와 무너진 땅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거리가 아무 의미 없어 보였다.
흑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투구의 어둠이 정확히 카일을 향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만났군."
그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쇠가 관 속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다.
성벽 위의 모두가 굳었다. 거리가 멀었다. 평범한 목소리라면 들릴 리 없었다. 그런데 흑기사의 말은 카일의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했다.
카일은 검을 뽑았다.
라그나의 검날이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당신을 처음 봅니다."
카일이 말했다.
흑기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갑옷 안쪽에서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였다.
"아니. 너는 나를 기억한다."
카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비 오는 전장도."
흑기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 가슴을 뚫고 지나간 내 검도."
루시아가 숨을 들이켰다.
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리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차갑게 식었다. 이미 아물어 사라진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비가 피부 위로 떨어졌다. 진흙이 발목을 붙잡았다. 죽어 가던 자신의 숨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때 흑기사가 말했다.
"두 번째 삶은 마음에 드나, 막내 용병?"
선택된 희생
성벽 위가 얼어붙었다.
막내 용병.
그 호칭을 아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일,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라그나, 그리고 몇몇 단서로 의심하는 자들뿐이었다. 그런데 흑기사는 마치 전생의 마지막 장면을 눈앞에서 본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카일은 낮게 물었다.
"당신은 뭘 알고 있지?"
흑기사가 말에서 내렸다.
검은 발굽 자국 주변의 눈이 스르르 녹아 검은 물처럼 변했다. 그는 등 뒤의 대검을 뽑았다. 검날은 사람 키만 했고, 날 위에는 어둠이 얇게 흐르고 있었다.
"네가 죽은 날, 많은 이가 죽었다. 병사, 기사, 용병, 이름 없는 짐꾼들. 전장은 좋은 제단이지. 피가 많고, 원망이 많고, 누구 하나 사라져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카일의 목이 바싹 말랐다.
"제단?"
"마왕의 잠을 흔들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했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했고."
흑기사는 카일을 향해 한 걸음 걸었다.
그 한 걸음에 함몰지의 불길이 낮아졌다.
"너희 용병단은 우연히 그 전장에 있었던 게 아니다."
카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브람.
술 냄새 나던 붉은 수염의 용병.
툭하면 뒤통수를 때리던 선배들.
싸구려 방패와 이 빠진 검을 들고 벌벌 떨던 자기 자신.
그들이 그곳에 있던 것은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용병단이 돈을 벌기 위해 잘못된 전장에 끌려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흑기사가 말했다.
"너희는 골라졌다."
카일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왜?"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왜 우리였지?"
"값쌌으니까."
흑기사의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값싼 목숨은 많이 죽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죽음 앞에서 시간을 붙잡는 씨앗. 용의 잔향을 품을 수 있는 그릇. 우리는 그것을 시험했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전생에서 그는 자신이 운이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약해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전장의 맨 앞에 밀려나 우연히 흑기사와 마주쳤고, 그 대검에 꿰뚫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선택된 것이었다.
영웅으로 선택된 것도 아니고, 구원자로 선택된 것도 아니었다.
제물로.
소모품으로.
실험용 칼집으로.
라그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입을 찢어라.
카일은 숨을 들이쉬었다.
손이 떨렸다.
분노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전생의 죽음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흑기사의 대검이 가슴을 뚫던 감각. 폐에 피가 차오르던 느낌. 아무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던 절망.
카일의 발이 아주 조금 뒤로 밀렸다.
그 순간 루시아가 옆에 섰다.
"카일."
그녀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방패는 금투성이였다. 멋진 성물도 아니고, 왕가의 보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밤새 요새를 지켜 낸 방패였다.
"이번엔 혼자 아니야."
핀도 떨리는 손으로 마나 실을 펼쳤다.
"저, 저는 솔직히 지금 당장 기절하고 싶어요. 그런데 기절하면 나중에 엄청 후회할 것 같아서요."
이리스는 단검을 돌리며 웃었다.
"그리고 저 갑옷, 보기보다 비싸 보이거든. 흠집 하나 내면 기분이 꽤 좋을 것 같아."
카일은 그들을 보았다.
전생의 전장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모두 죽어 갔다. 누구도 카일을 붙잡아 주지 못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루시아가 있었다.
핀과 이리스가 있었다.
라그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카일은 그날의 막내 용병이 아니었다.
카일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떨림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떨리는 손으로도 검은 잡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카일이 성벽 난간을 넘어섰다.
에드릭이 외쳤다.
"카일!"
카일은 떨어지듯 뛰어내렸다. 성벽 아래 쌓인 눈 위로 몸을 굴려 충격을 흘렸다. 다친 팔이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뒤이어 루시아가 밧줄을 타고 내려왔고, 이리스는 성벽 돌출부를 딛고 가볍게 착지했다. 핀은 중간에 미끄러져 비명을 질렀지만, 마나 실이 허리를 붙잡아 가까스로 바닥에 내려섰다.
"저는 방금 멋있게 내려오고 싶었는데요!"
이리스가 말했다.
"비명은 멋있었어."
"칭찬이 아니잖아요!"
카일은 흑기사를 향해 걸었다.
"두 번째 결투군."
흑기사가 말했다.
카일은 검끝을 낮췄다.
"이번엔 결과가 다를 겁니다."
죽음의 기억을 밟고
흑기사가 먼저 움직였다.
눈 위에 발자국이 찍히는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카일!"
루시아의 외침과 동시에 카일은 몸을 틀었다.
콰아아앙!
대검이 방금 전 카일이 서 있던 자리를 갈랐다. 눈과 흙과 얼어붙은 돌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충격파만으로도 몸이 밀려났다.
카일은 이를 악물고 옆으로 굴렀다.
'빠르다.'
전생과 같았다.
아니, 전생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는 흑기사의 검이 내려오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검의 궤적이 보였다. 그러나 보인다는 것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흑기사의 대검이 다시 날아왔다.
카일은 라그나를 비스듬히 세워 검을 흘렸다.
까아아앙!
손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정면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진다. 카일은 검을 받는 순간 발을 틀어 충격을 옆으로 흘렸다.
하지만 흑기사는 바로 따라왔다.
검격이 이어졌다.
위에서 아래.
오른쪽에서 왼쪽.
가슴을 향한 찌르기.
마지막 공격에서 카일의 눈앞에 전생의 장면이 겹쳤다.
비.
진흙.
가슴으로 들어오던 검.
몸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그 짧은 순간이 죽음이다.
흑기사의 대검이 카일의 심장을 향해 뻗었다.
"안 돼!"
루시아가 끼어들었다.
콰앙!
방패가 대검을 막았다.
막았다기보다, 부서지면서 버텼다. 루시아의 두 발이 눈을 갈며 뒤로 밀렸다. 방패 표면에 있던 금이 쩍 벌어졌다.
루시아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카일! 정신 차려!"
그 목소리가 카일을 끌어올렸다.
카일은 숨을 들이쉬었다.
살아 있다.
아직 뚫리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루시아의 어깨 너머로 낮게 파고들었다. 라그나의 검날이 흑기사의 무릎을 향했다.
흑기사는 가볍게 발을 빼 피했다.
그 순간 핀의 마나 실이 눈 아래에서 튀어 올랐다.
푸른 실 다섯 가닥이 흑기사의 발목을 감았다.
"잡았어요!"
핀의 목소리가 터졌다.
흑기사의 움직임이 아주 조금 멈췄다.
정말 아주 조금.
눈 깜빡할 시간보다 짧았다.
하지만 카일에게는 충분했다.
그는 검을 거꾸로 쥐고 몸을 회전시켰다. 전생에서 용병단 선배 브람이 술에 취해 알려 준 싸구려 검술. 멋은 없고, 자세도 우아하지 않다. 대신 더럽게 실전적이었다.
발목을 묶였을 때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각도.
허벅지 안쪽.
검이 파고들었다.
까각!
갑옷이 튀었다.
하지만 살까지는 닿지 않았다.
흑기사가 마나 실을 힘으로 끊었다. 핀의 손가락에서 피가 튀었다.
"으악!"
이리스가 그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유리병 세 개를 던졌다. 병이 흑기사의 투구와 어깨 위에서 깨졌다. 안에서 검은 기름이 흘러내렸다.
"비싼 놈은 잘 타겠지?"
이리스가 불씨를 튕겼다.
화르륵!
불길이 흑기사의 갑옷 위로 번졌다.
그러나 흑기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오라가 피어올라 불을 집어삼켰다.
"잔재주."
그가 말했다.
이리스가 혀를 찼다.
"싼 기름이라 그런가."
흑기사의 대검이 이리스를 향했다.
카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동료를 보지 마.'
그는 앞으로 뛰었다.
흑기사의 검이 이리스를 베기 직전, 카일이 검끝을 대검의 옆면에 찔러 넣었다. 힘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비트는 공격이었다.
대검의 궤적이 한 치 어긋났다.
이리스의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흩어졌다.
"야, 머리값 비싸거든?"
이리스가 뒤로 물러나며 투덜거렸다.
카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흑기사의 팔꿈치가 그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다.
퍽!
숨이 끊겼다. 카일의 몸이 눈 위를 굴렀다.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다.
흑기사가 걸어왔다.
"다시 죽는 것이 두렵나?"
카일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두렵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다.
죽음은 한 번 겪었다고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숨이 멎는 감각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더 잘 안다.
흑기사가 대검을 들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너는 다시 선택될 것이다. 제물은 발버둥칠수록 문을 크게 연다."
카일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흑기사의 검을 보았다.
전생의 마지막이었던 검.
이번 생에서도 자신을 끝내려는 검.
그리고 깨달았다.
검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죽는 자신이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바뀌었다.
요새는 무너지지 않았다.
동료들은 살아 있다.
그는 무릎을 세웠다.
"라그나."
—무리하면 몸이 찢어진다.
"조금만."
—그 '조금'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죽기 전에 가장 자주 하는 헛소리다.
"그럼 안 죽을 만큼만."
라그나가 낮게 웃었다.
—그건 마음에 드는 헛소리군.
카일의 심장 안쪽에서 금빛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이번에는 전처럼 활짝 열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란 틈만 열었다. 피가 뜨거워지고, 시야가 맑아졌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일어섰다.
흑기사의 대검이 내려왔다.
카일은 피하지 않았다.
한 걸음 앞으로 들어갔다.
대검은 긴 무기다. 강하고 무겁다. 대신 너무 가까이 붙으면 날의 힘이 죽는다.
전생의 카일은 몰랐다.
지금의 카일은 알았다.
죽음이 가르쳐 준 거리였다.
카일은 흑기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대검의 날이 어깨를 스쳤다. 피가 튀었다. 그러나 심장은 비켜 갔다.
그는 라그나를 짧게 세웠다.
용병단의 더러운 검술.
아카데미에서 다듬은 발놀림.
라그나의 용의 불꽃.
동료들이 만들어 준 찰나의 빈틈.
그 모든 것이 한 점에 모였다.
"이번엔."
카일이 낮게 말했다.
"내가 벤다."
검이 흑기사의 옆구리를 그었다.
쩌어억!
검은 갑옷이 갈라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흑기사의 갑옷 안쪽에서 검붉은 피가 튀었다.
첫 상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성벽 위의 병사들도, 에드릭도, 브란델 교수도 숨을 삼켰다.
흑기사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눈 위로 떨어졌다.
치이익.
피가 닿은 눈이 검게 타들어 갔다.
핀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상처…… 냈어요?"
이리스가 낮게 웃었다.
"냈네. 저 비싼 갑옷에 환불 불가 흠집."
루시아는 방패를 고쳐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카일!"
카일은 숨을 몰아쉬었다.
몸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어깨의 상처는 뜨거웠고, 갈비뼈는 숨을 쉴 때마다 아팠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전생의 흑기사는 재앙이었다.
다가오면 죽는 것.
마주치면 끝나는 것.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흑기사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절대적인 괴물도 상처를 입는다.
그 사실 하나가 카일의 가슴을 뚫고 들어온 오래된 공포를 찢어 냈다.
흑기사가 옆구리에 손을 가져갔다. 검은 장갑에 피가 묻었다.
그는 그 피를 잠시 바라보았다.
"용의 불."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달라졌다.
차갑지만, 그 안에 아주 희미한 놀람이 섞여 있었다.
"그 검이 너를 고른 것이 아니군. 네가 검을 깨웠다."
카일은 검을 세웠다.
"설명은 됐고, 다음은 목입니다."
흑기사가 웃었다.
이번 웃음은 전보다 더 낮았다.
"좋다. 막내 용병.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기 어렵겠군."
그가 대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흑기사의 그림자가 크게 부풀었다. 눈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갈라진 갑옷 틈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라그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뒤로 물러나라!
카일은 즉시 외쳤다.
"전부 물러서!"
그 순간 흑기사의 그림자가 폭발했다.
콰아아아!
검은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루시아가 방패를 세워 핀과 이리스를 감쌌고, 카일은 라그나를 땅에 박아 버텼다. 눈과 재와 마수의 뼈가 함께 날아올랐다.
흑기사는 그 폭풍 속에서 다시 말을 불러냈다.
검은 말이 그림자에서 솟아나듯 나타났다.
"도망치는 겁니까?"
카일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흑기사는 말 위에 올라탔다.
"착각하지 마라. 네 목은 아직 제단 위에 올릴 가치가 있다. 여기서 부숴 버리기에는 아깝다."
"그럼 내려와서 다시 확인하시죠."
카일이 한 걸음 나섰다.
다리는 떨렸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흑기사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바꾼 것은 작은 가지 하나다. 요새 하나. 병사 몇 명. 친구 몇 명."
그 말에 루시아가 발끈했다.
"몇 명 아니거든! 엄청 많거든!"
이리스가 옆에서 덧붙였다.
"그리고 요새 하나면 부동산 가치가 꽤 높아."
핀은 떨면서도 마나 실을 다시 펼쳤다.
"저, 저희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요. 아주 조금."
카일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검을 잡았다.
흑기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그 작은 가지들이 모여 시간을 흔들고 있지. 그래서 의식이 앞당겨졌다."
카일의 눈빛이 굳었다.
"무슨 뜻이지?"
흑기사는 북쪽 산맥을 돌아보았다.
검은 구름이 산 너머에서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새벽빛이 닿아도 그 구름은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의 빛을 먹어 치우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마왕 부활식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한마디가 전장 위로 떨어졌다.
요새의 승리도, 새벽의 안도도, 흑기사에게 낸 첫 상처의 통쾌함도 그 말 앞에서 잠시 멈췄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장소는 어디냐?"
흑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투구의 어둠 속에서 붉은 점 하나가 번뜩였다.
"네가 늦을수록 문은 넓어진다. 네가 서두를수록 제단은 기뻐한다. 선택해라, 회귀자."
핀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니, 선택지가 왜 다 나쁜데요?"
흑기사는 말머리를 돌렸다.
카일이 달려들려 했지만, 무릎이 순간 꺾였다. 루시아가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무리하지 마!"
"놓으면 따라잡을 수—"
"못 잡아. 지금은 못 잡아."
루시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카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처음으로 상처를 냈다.
처음으로 흑기사의 피를 보았다.
그런데 아직 닿지 못했다.
흑기사는 눈보라 속으로 천천히 멀어졌다. 떠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네 심장이 아니라, 네 선택을 찌르겠다."
검은 말이 한 번 울었다.
그리고 흑기사의 모습은 북쪽 숲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이긴 자의 상처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곧장 환호하지 못했다.
흑기사는 후퇴했다.
카일은 살아 있었다.
그의 검은 흑기사에게 상처를 냈다.
분명 승리였다.
하지만 마왕 부활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 모두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
카일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루시아가 그를 받쳤다.
"카일!"
핀은 허둥지둥 달려와 치료용 붕대를 꺼냈다. 손이 떨려 매듭을 세 번이나 잘못 묶었다.
"피, 피가 너무 많이 나요. 아니, 왜 항상 피를 이렇게 많이 흘려요? 사람 몸에 피가 무한정 있는 줄 알아요?"
이리스가 카일의 어깨 상처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살아 있네. 진짜 질기다."
카일은 힘겹게 웃었다.
"칭찬입니까?"
"응. 최고급 칭찬."
루시아는 카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무서웠어?"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은 척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전장에서는 그런 말이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습니다."
핀과 이리스가 조용해졌다.
카일은 흑기사가 사라진 북쪽 숲을 바라보았다.
"죽는 게 무서웠습니다. 또 아무것도 못 바꾸고 끝날까 봐 무서웠습니다."
루시아가 말했다.
"근데 바꿨잖아."
카일은 그녀를 보았다.
루시아는 금 간 방패를 들어 보였다.
"요새도 지켰고, 저 사람한테 상처도 냈어. 그리고 우리 다 살아 있어."
핀은 작게 손을 들었다.
"저는 손가락이 좀 아프지만 살아 있어요."
이리스도 어깨를 으쓱했다.
"내 머리카락 몇 올은 전사했지만, 대체로 살아 있지."
카일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웃자 갈비뼈가 아파서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웃기지 마십시오. 아픕니다."
"웃은 건 너잖아."
이리스가 말했다.
라그나가 검 안에서 중얼거렸다.
—흑기사에게 첫 상처를 내고도 이렇게 시끄러운 놈들은 처음 보는군.
'좋은 뜻입니까?'
—아마도.
카일은 천천히 검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검날에는 아직 금빛 열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열기 너머로 흑기사의 검붉은 피가 아주 조금 묻어 있었다.
전생의 죽음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었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기억은 카일을 바닥에 묶어 두는 쇠사슬이 아니었다.
그는 그 죽음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성벽 위에서 브란델 교수가 내려왔다. 에드릭 발렌 경도 함께였다. 두 사람 모두 흑기사가 사라진 방향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브란델이 말했다.
"마왕 부활식이라…… 오래된 기록에서나 보던 말이군."
에드릭은 이를 악물었다.
"즉시 왕도에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황실에도 보고해야 합니다."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보고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늦습니다."
에드릭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
카일은 북쪽을 보았다.
검은 구름이 산맥 너머에서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 아래 어딘가에서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흑기사는 시간을 벌었고, 카일에게는 선택을 강요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카일은 천천히 일어섰다. 루시아가 부축했고, 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붙었다. 이리스는 흑기사의 피가 떨어진 눈을 작은 병에 담고 있었다.
핀은 기겁했다.
"그걸 왜 담아요?"
이리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비싼 단서잖아."
"세상 모든 걸 가격으로 보지 마세요!"
"가격 안 매기면 사람들이 막 버려."
카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검을 쥐었다.
전생의 흑기사는 카일의 끝이었다.
이번 생의 흑기사는 아직 넘어야 할 벽이었다.
벽은 높았다.
하지만 방금, 그 벽에 금이 갔다.
카일은 말했다.
"부활식을 막으러 갑니다."
루시아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
핀은 울상을 지었다.
"저도 가야겠죠? 당연히 가야겠죠? 안 간다고 하면 평생 후회하겠죠?"
이리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후회는 비싸. 그냥 같이 가."
카일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무섭다.
여전히 무섭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알았다.
공포를 없애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포를 품은 채, 그래도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진짜 용기다.
북쪽 산맥 위로 검은 구름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마왕 부활식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일은 피 묻은 검을 들고 그 어둠을 마주 보았다.
"이번엔 내가 선택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누가 죽을지, 누가 살아남을지. 그딴 건 더 이상 네놈들이 정하지 못해."
새벽바람이 성벽 위를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흑기사의 피 냄새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금빛 불꽃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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