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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를 지키는 꼼수

Views 59약 11분생성형 AI 활용

배수로에서 튀어나온 악몽

첫 번째 마수의 목이 눈 위로 굴렀다.

그러나 그 뒤에는 두 번째, 세 번째, 열 번째가 있었다.

배수로 안쪽은 마치 검은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얼음 가시가 돋은 늑대형 마수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기어 나왔다. 놈들의 발톱이 돌바닥을 긁을 때마다 불쾌한 쇳소리가 났고, 입가에서 흘러나온 검은 김은 눈송이를 닿는 순간 재처럼 녹였다.

핀은 신호탄을 쏜 뒤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저, 저거 너무 많지 않아요?"

이리스가 기름통을 걷어차며 말했다.

"많으면 세면 안 돼. 겁나니까."

"이미 겁나는데요!"

"그럼 더 세지 마!"

루시아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콰앙!

마수 한 마리가 방패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보통 학생이었다면 그대로 날아갔을 충격이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두 발로 눈을 파고들 듯 버텼다. 팔이 떨리고, 입술이 하얗게 질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카일!"

"왼쪽으로 밀어!"

"응!"

루시아가 방패를 비스듬히 틀었다. 두 번째로 달려든 마수가 미끄러지듯 옆으로 튕겼다. 그 순간 이리스가 기름통을 던졌다.

통이 깨지며 검은 기름이 눈 위로 번졌다.

카일은 검을 낮게 긋고, 튀어나온 불씨를 발끝으로 차 넣었다. 몰트 하사가 몰래 챙겨 준 조악한 화약 심지였다.

화르르륵!

불길이 배수로 입구를 핥았다.

마수들이 비명을 질렀다. 털이 두꺼운 북부 마수들은 추위에는 강했지만, 불에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배수로 안에서 밀려나오던 흐름이 잠시 막혔다.

잠시.

전장에서는 그 잠시가 생명이다.

"핀!"

"예!"

"감지 실을 성벽 위까지 연결해. 놈들이 다시 파고들면 바로 울리게."

"지금요? 여기서요? 이 상황에서요?"

핀은 거의 울먹였지만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가느다란 푸른 마나 실이 빠져나와 눈보라 속으로 뻗었다. 실은 돌기둥을 타고 올라가 성벽 난간에 걸렸다.

쨍!

성벽 위 작은 종이 울렸다.

병사들이 뒤늦게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배수로다!"

"배수로가 뚫렸다!"

"지원! 북서쪽에 지원을 보내!"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늦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는 배수로가 뚫린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요새 안쪽 절반이 불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적어도 입구에서 막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문이었다.

부우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다시 울렸다. 정문 쪽 성벽 위에서 불화살이 하늘로 솟았다. 눈보라 너머로 검은 물결이 보였다. 늑대형 마수만이 아니었다. 뿔 달린 멧돼지 마수, 두 팔이 땅에 닿는 거대한 설인형 마수, 그리고 등껍질이 돌처럼 단단한 놈들이 뒤섞여 성문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에드릭의 목소리가 성벽 위에서 터졌다.

"정문을 사수하라! 모든 병력, 정문 방어!"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안 됩니다.'

입 밖으로 말해도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리고 들린다 해도 에드릭은 같은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정문으로 몰려오는 마수 군단.

배수로에서 기어 나오는 침투조.

보급은 끊겼고, 기름은 부족하다.

정공법으로는 진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성문은 버티지 못한다. 북서쪽을 막기 위해 병력을 빼면 정문이 무너지고, 정문을 지키면 배수로가 뚫린다.

카일은 눈보라 속에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성벽.

배수로.

정문.

북쪽 숲.

그리고 요새 서쪽 절벽 아래의 오래된 폐광 입구.

순간, 전생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레이혼 요새는 산을 깎아 만든 성이 아니다. 원래는 광산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초소였다. 회색산맥의 철광을 캐내던 시절, 요새 아래에는 광부들이 파 놓은 터널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대부분은 무너졌고, 일부는 막혔다.

하지만 전생에서 카일은 요새가 함락된 뒤 도망치며 그중 하나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무너진 광산 터널.

그 터널은 북쪽 숲 가장자리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안쪽 벽은 약했다.

아주 약했다.

'정면에서 막을 수 없다면…….'

카일의 눈이 번뜩였다.

'길을 바꾸면 된다.'

라그나가 검 안에서 낮게 웃었다.

—네놈 눈빛이 아주 사기꾼 같아졌군.

'전장에서 칭찬입니까?'

—용족 기준으로는 모욕이다. 인간 기준으로는 아마 전략이라 부르겠지.

카일은 배수로 앞 마수의 머리를 베어 넘기며 외쳤다.

"이리스!"

"왜!"

"서쪽 폐광 입구 기억해?"

이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차 타고 들어올 때 본 거? 반쯤 무너진 곳?"

"거기에 남은 화약 있습니까?"

"공식적으로는 없어."

"비공식적으로는?"

이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몰트 하사가 '쓸모없는 폐품'이라고 부르던 게 있지."

핀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잠깐만요. 폐광, 화약, 지금 이 흐름이면 혹시 터뜨리자는 이야기인가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 제 불안한 예측은 항상 맞는 거죠?"

루시아가 방패로 또 한 마리를 밀쳐 내며 물었다.

"뭘 터뜨려?"

"산."

"산을?"

루시아가 잠깐 멈칫했다.

"그거 해도 되는 거야?"

카일은 눈앞으로 달려드는 마수를 걷어차며 대답했다.

"허락받으면 늦습니다."

이리스가 웃었다.

"좋아. 이번 작전명은 '혼나기 전에 이기자'네."

핀은 거의 울었다.

"저는 그 작전명 반대예요!"

지휘관이 모르는 전장

카일은 배수로 앞을 몰트 하사의 병사들에게 맡기고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성벽은 아수라장이었다.

병사들은 눈보라 속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화살은 바람에 휘어 날아갔고, 횃불은 눈에 젖어 힘없이 흔들렸다. 아래에서는 마수들이 성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쾅!

성문이 흔들렸다.

쾅!

다시 한 번.

오래된 나무와 철띠가 비명을 질렀다.

에드릭 발렌 경은 망루 아래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갑옷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고, 얼굴에는 처음과 달리 여유가 없었다.

"기름을 부어라!"

"기름이 부족합니다!"

"그럼 돌을 떨어뜨려!"

"돌도 정문 쪽으로 다 옮기는 중입니다!"

에드릭이 이를 악물었다.

카일은 그에게 다가갔다.

"발렌 경."

에드릭이 카일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짜증과 안도감이 동시에 스쳤다. 싫어하는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그 학생이 배수로를 먼저 발견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북서쪽은?"

"임시로 막았습니다. 오래 버티진 못합니다."

"그럼 지원을—"

"지원 보내면 정문이 무너집니다."

에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그걸 모르는 줄 아나?"

카일은 성벽 아래 마수 군단을 내려다보았다.

놈들은 이상할 정도로 정직하게 성문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몰아붙이는 것처럼. 정문만 부수면 된다는 명령을 받은 군대처럼.

마수는 본래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짐승은 불리하면 흩어진다. 배가 고프면 약한 쪽을 노린다. 그런데 저놈들은 죽어 가면서도 같은 방향을 향해 밀고 있었다.

검은 명령.

흑기사의 냄새였다.

"마수 군단의 진로를 바꾸겠습니다."

에드릭은 잠시 카일이 미쳤는지 살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냐?"

"서쪽 폐광 터널을 무너뜨리면 북쪽 숲 가장자리 지반이 꺼집니다. 성문으로 오던 놈들 일부가 그쪽으로 빠질 겁니다. 놈들이 몰려 있는 길목을 협곡처럼 바꿀 수 있습니다."

"폐광 터널?"

"요새 아래의 옛 광산입니다. 지도에는 대부분 폐쇄로 되어 있지만, 안쪽 공동이 남아 있습니다."

에드릭은 지도를 보려는 듯 막사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지도를 펼칠 시간은 없었다.

쾅!

성문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에는 철못 하나가 튕겨 나와 눈 위에 박혔다.

카일이 말했다.

"정공법으로는 못 막습니다."

에드릭의 턱이 굳었다.

"성문을 버리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성문 앞 적을 줄이자는 말입니다."

"실패하면?"

"성문이 무너집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에드릭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카일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해야 합니다."

눈보라가 둘 사이를 때렸다.

에드릭은 한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도에서 배운 병법서에는 이런 상황이 없었을 것이다. '무너진 광산을 터뜨려 마수의 진로를 바꾼다' 같은 항목은 지휘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장은 시험지가 아니다.

전장은 틀리면 죽는다.

브란델 교수가 어디선가 다가왔다. 그의 로브 끝은 피와 눈에 젖어 있었다.

"발렌 경."

"교수님까지 같은 의견입니까?"

브란델은 성문을 들이받는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카일의 말보다 나은 방법이 있습니까?"

에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없었다.

그 사실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병력은 못 준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 없습니다."

"뭐?"

"사람이 많으면 늦습니다."

이리스가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그녀는 작은 화약 상자를 두 개나 끌고 와 있었다. 표면에는 '폐기 예정'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핀은 그 옆에서 거의 영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폐기 예정이면 폐기해야지 왜 들고 다니는 건데……."

루시아는 피 묻은 방패를 어깨에 걸쳤다.

"내가 들게."

이리스가 화약 상자 하나를 넘기며 말했다.

"조심해. 떨어뜨리면 우리 다 아주 따뜻해질 수 있어."

"따뜻한 건 좋은데?"

"그 따뜻함은 한 번뿐이야."

루시아는 즉시 조심스러워졌다.

에드릭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학생들끼리 가겠다고?"

카일은 검을 고쳐 잡았다.

"예."

"미친 짓이다."

"전장에서는 가끔 미친 짓이 가장 정상입니다."

브란델 교수가 피식 웃었다.

"듣기 싫게 맞는 말이군."

에드릭은 한숨을 삼키듯 숨을 들이켰다.

"좋다. 하지만 실패하면—"

"혼나겠습니다."

"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리스가 지나가며 말했다.

"그럼 성공하면 되겠네요."

그녀의 말은 너무 가볍게 들렸다.

하지만 그 가벼움 덕분에 모두가 한 걸음 움직일 수 있었다.

카일은 성벽 계단을 내려가며 외쳤다.

"북서쪽 배수로는 계속 불로 막으세요! 정문 병력은 성문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말고, 기름은 아끼지 말고 지금 쓰십시오!"

에드릭이 뒤에서 외쳤다.

"누가 네게 명령권을 줬나!"

카일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마수들이요!"

핀은 달리면서도 중얼거렸다.

"저 말, 나중에 문제 될 것 같은데……."

이리스가 말했다.

"살아남으면 변명도 생각나."

무너진 광산의 입

서쪽 폐광 입구는 요새 성벽 아래, 눈과 바위 사이에 반쯤 묻혀 있었다.

낮에 보았을 때는 그저 낡은 구멍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눈보라 속에서 입구는 짐승의 목구멍처럼 어둡게 벌어져 있었다. 안쪽에서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핀은 마나등을 켰다.

푸른빛이 터널 안을 비췄다.

낡은 목재 지지대가 삐뚤게 서 있었고, 천장에서는 얼음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는 오래된 광차 레일이 녹슨 채 남아 있었다.

루시아가 작게 말했다.

"여기 무너지는 거 아니야?"

핀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무너지는 중인 것 같은데요."

"그럼 더 무너뜨리기 쉽겠네."

"루시아, 긍정적인 방향이 이상해요."

카일은 터널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억을 더듬었다.

전생의 그는 불타는 요새에서 도망치다 이 폐광을 지나쳤다. 그때는 길이 절반쯤 무너져 있었고, 천장 사이로 북쪽 숲의 차가운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그 틈으로 마수 몇 마리가 떨어져 죽어 있었다.

그 장면이 지금의 답이었다.

"왼쪽 갈림길."

카일이 말했다.

"그쪽 벽이 얇습니다."

이리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또 전장의 감?"

"예."

"좋아. 이제 네 감은 웬만한 지도보다 비싸게 쳐 줄게."

그들은 터널을 따라 달렸다. 뒤에서는 성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다. 쾅, 쾅, 쾅. 그때마다 천장에서 먼지와 얼음 조각이 떨어졌다.

마수 몇 마리가 폐광 안으로도 들어와 있었다.

아마 배수로가 막히자 다른 틈을 찾던 놈들이리라.

첫 번째 마수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엎드려!"

카일의 외침과 동시에 루시아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직!

마수의 발톱이 방패 표면을 긁고 지나갔다. 루시아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밀었다. 놈의 몸이 벽에 처박히는 순간, 카일의 검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피가 광산 벽에 튀었다.

두 번째 놈은 천장에서 떨어졌다.

핀의 마나 실이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푸른 실이 마수의 앞발을 휘감았다. 마수는 공중에서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굴렀다.

"저도 했어요!"

핀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이리스가 단검을 던져 마수의 눈을 맞혔다.

"축하해. 다음 것도 해."

"칭찬이 너무 짧아요!"

세 번째 놈은 루시아가 방패로 밀어 레일 위에 넘어뜨렸고, 카일이 광차를 발로 찼다. 녹슨 광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굴러가 마수의 몸을 깔아뭉갰다.

루시아가 눈을 반짝였다.

"이거 재밌다."

핀은 질색했다.

"재밌으면 안 되는 상황이에요!"

그들은 마침내 왼쪽 갈림길에 도착했다.

그곳은 터널이라기보다 거대한 균열에 가까웠다. 벽 한쪽이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고, 그 뒤로 얼어붙은 흙과 바위층이 드러나 있었다. 바위틈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카일은 손을 대 보았다.

진동이 느껴졌다.

성문으로 몰려가는 마수들의 발굽 소리였다. 지면을 통해 떨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바로 위다.

카일은 말했다.

"여기입니다."

이리스는 화약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낡은 폭약 묶음과 젖지 않게 밀랍으로 감싼 도화선이 들어 있었다.

"상태가 별로야. 절반은 안 터질 수도 있어."

"절반만 터져도 됩니다."

"그 말, 폭약 앞에서는 되게 무섭게 들린다."

핀은 벽을 살피며 말했다.

"그냥 많이 터뜨리면 우리까지 묻혀요. 이 벽만 깨고, 위쪽 지반을 무너뜨리려면…… 음, 여기랑 여기, 그리고 저기 지지대 아래가 좋아요."

카일은 핀을 보았다.

"할 수 있습니까?"

핀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도망치지 않았다.

"계산만 맞으면요."

"맞추세요."

"지금 저한테 너무 많은 믿음을 주시는 거 아닌가요?"

"아까 칭찬 기록해 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핀은 잠깐 멍해졌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걸 여기서 써먹어요?"

"전장은 쓸 수 있는 걸 다 씁니다."

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그는 폭약을 세 묶음으로 나눠 벽의 균열 사이에 끼워 넣었다. 마나 실로 도화선을 연결하고, 터지는 시간을 조금씩 다르게 조절했다. 한 번에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폭발로 벽을 흔들고 마지막 폭발로 위쪽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다.

이리스는 옆에서 빠르게 손을 보탰다. 도화선이 젖지 않게 기름먹인 천으로 감싸고, 폭약이 빠지지 않도록 쇠못을 박았다.

루시아는 입구 쪽에서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마수들이 다시 몰려왔다.

"빨리!"

루시아가 외쳤다.

"여기 손님 많아!"

카일은 루시아 쪽으로 뛰었다.

좁은 터널에서는 많은 마수가 한꺼번에 덤빌 수 없다. 카일은 그 점을 이용했다. 그는 마수의 목을 치는 대신 앞발과 눈, 관절을 노렸다. 죽이는 것보다 막는 것이 중요했다.

한 놈이 쓰러지면 뒤의 놈이 걸렸다.

그 틈에 루시아가 방패로 밀었다.

마수 세 마리가 한꺼번에 뒤엉켜 굴렀다.

"카일!"

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치 끝났어요!"

"후퇴!"

이리스가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익.

불꽃이 푸른 마나 실을 타고 달렸다.

그들은 터널 밖으로 달렸다. 뒤에서 마수들이 울부짖으며 따라왔다. 바닥이 흔들렸고,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핀은 달리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요!"

"폭발이요?"

"아니요, 마수요!"

"둘 다 문제군."

카일은 검을 거꾸로 잡고 바닥의 낡은 레일을 내리쳤다.

까앙!

레일이 휘어졌다. 뒤따라오던 마수 하나가 발이 걸려 넘어졌고, 그 뒤의 놈들이 줄줄이 엉켰다.

"지금!"

그들이 폐광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첫 번째 폭발이 터졌다.

콰앙!

산이 울었다.

두 번째 폭발이 뒤따랐다.

콰르르릉!

눈 덮인 절벽 위가 흔들렸다. 북쪽 숲 가장자리의 지면이 갈라지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성문으로 돌진하던 마수들 중 앞줄은 그대로 달렸지만, 중간 대열이 갑자기 꺼지는 땅에 휩쓸렸다.

그리고 세 번째 폭발.

콰아아아앙!

무너진 광산 터널이 산의 속을 끌어내렸다.

북쪽 숲과 요새 정문 사이에 길게 함몰된 골이 생겼다. 깊지는 않았지만 충분했다. 달려오던 마수들이 그 안으로 굴러떨어졌고, 뒤따르던 놈들은 갑자기 생긴 장애물 앞에서 뒤엉켰다.

마수 군단의 물결이 끊겼다.

정문을 향하던 검은 파도가 둘로 갈라졌다.

카일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용의 심장 조각

성문 앞의 압박은 줄었다.

그러나 북서쪽 배수로와 함몰된 골 사이에서 마수들이 방향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일부는 성벽 아래로 흩어졌고, 일부는 폐광 입구 쪽으로 몰렸다.

요새 안에서는 병사들이 환호할 틈도 없이 다시 명령을 받았다.

"갈라진 놈들을 쏴라!"

"함몰지에 불을 던져!"

"북서쪽 지원! 늦지 않게 움직여!"

이제야 전장이 사람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눈보라 너머에서 낮은 울음이 들렸다.

우우우우우—.

그 소리는 앞서 들었던 정찰 마수의 울음과 달랐다. 더 깊고, 더 오래되고, 더 끈적했다. 마치 어둠이 목소리를 얻은 것 같았다.

함몰지 너머 숲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설인형 마수보다도 컸다. 네 발로 걷는 곰의 몸에 사슴 같은 뿔이 여섯 개 돋아 있었고, 등에는 검은 수정이 박혀 있었다. 놈이 한 걸음 내딛자 눈이 검게 변했다.

주변의 마수들이 길을 열었다.

이리스가 숨을 삼켰다.

"저건 또 뭐야?"

핀은 마나등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런 건 생존 지침서에 없었어요."

카일도 처음 보는 개체였다.

전생의 그레이혼에서 이런 놈은 보지 못했다. 그때 요새가 너무 빨리 무너져서 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이번에는 카일이 흐름을 바꿨기 때문에 적이 다른 패를 꺼냈을 수도 있다.

라그나가 검 안에서 낮게 말했다.

—검은 서리를 품은 지휘 개체다.

'마수들의 우두머리입니까?'

—우두머리라기보다는 목줄이다. 저놈을 통해 누군가가 군단을 조종하고 있다.

'누군가라면.'

—네가 생각하는 그 검은 깡통일 가능성이 높다.

흑기사.

카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거대 마수가 함몰지 앞에서 몸을 낮췄다. 그러더니 여섯 개의 뿔 끝에서 검은 빛이 모였다.

카일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엎드려!"

검은 빛이 폭발했다.

콰아아아!

서리 폭풍이 함몰지를 넘어 성벽을 때렸다. 돌벽 표면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성벽 위 병사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불붙은 기름통들이 꺼졌다.

마수들이 다시 움직였다.

불을 두려워하던 놈들이 검은 서리의 뒤를 따라 함몰지를 건너려 했다. 거대 마수가 얼음으로 임시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카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을 막아야 합니다.'

라그나가 대답했다.

—네 힘으로는 어렵다.

'압니다.'

—알면서 하려는군.

카일은 웃지 않았다.

전생의 그는 늘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안 된다.

어차피 늦었다.

어차피 죽는다.

그 말들은 맞았다. 그래서 더 지독했다.

이번 생에서 카일은 그 말을 싫어하기로 했다.

'방법을 주십시오.'

라그나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용의 심장 조각을 열어라.

카일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용의 심장 조각.

낡은 검 라그나와 연결된 뒤, 카일의 몸속에 자리 잡은 작은 불씨. 평소에는 아주 희미하게 힘을 빌려 줄 뿐이었다.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부 열면?'

—죽는다.

'일부는?'

—죽을 만큼 아프다.

'좋은 선택지가 없군요.'

—전장에 그런 게 있었나?

카일은 숨을 들이쉬었다.

라그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일시 개방이다. 아주 잠깐. 네 심장을 용의 심장처럼 뛰게 만드는 것이다. 힘은 얻겠지만, 그 냄새는 숨길 수 없다.

'냄새?'

—흑기사가 너를 알아챌 것이다. 지금까지는 희미한 흔적만 봤다면, 이제는 네 이름표를 목에 걸고 불길 속에서 춤추는 꼴이 된다.

카일은 거대 마수를 보았다.

놈이 만든 얼음 다리 위로 마수들이 하나둘 건너오고 있었다. 성문은 이미 반쯤 부서졌고, 북서쪽 배수로도 언제 다시 뚫릴지 모른다.

루시아가 다친 병사를 방패 뒤로 끌어당겼다.

이리스는 마지막 기름통을 함몰지로 굴리고 있었다.

핀은 창백한 얼굴로 마나 실을 붙들고 있었다.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버티고 있었다.

카일은 짧게 말했다.

'열겠습니다.'

—겁먹지 마라. 심장은 네 것이다. 조각은 손님일 뿐이다.

'예.'

—그리고 하나 더.

'뭡니까?'

—가능하면 멋있게 해라. 용의 힘을 빌려 놓고 폼이 안 나면 내가 창피하다.

카일은 어이없게 숨을 내뱉었다.

"그런 건 나중에 따지시죠."

그는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자기 심장 안쪽, 아주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금빛 불씨를 건드렸다.

쿵.

심장이 뛰었다.

쿵.

두 번째 박동과 함께 세상이 느려졌다.

쿵.

세 번째 박동에서 카일의 혈관을 따라 불이 달렸다.

"윽……!"

무릎이 꺾일 뻔했다. 뼈가 안쪽에서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에 불꽃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검날이 빛났다.

낡고 투박하던 검의 표면에 금빛 문양이 떠올랐다. 용의 비늘 같은 무늬가 검등을 타고 번졌고, 카일의 오른쪽 눈동자에도 같은 빛이 맺혔다.

눈보라가 그를 피해 갈라졌다.

루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카일……?"

이리스는 입을 벌렸다.

"와. 저건 돈으로 환산이 안 되겠는데."

핀은 거의 울 듯 말했다.

"지금 농담할 때 아니잖아요!"

카일은 앞으로 걸었다.

한 걸음.

발밑의 눈이 녹았다.

두 걸음.

검은 서리가 밀려났다.

세 걸음.

거대 마수가 그를 보았다.

놈의 여섯 뿔이 동시에 카일을 향했다.

검은 빛이 다시 모였다.

카일은 낮게 말했다.

"라그나."

—베어라.

"예."

검은 서리 광선이 쏘아졌다.

카일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금빛 검격이 눈보라를 찢었다.

콰아아아앙!

검은 서리와 금빛 불꽃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성벽 위 병사들이 눈을 가렸다. 함몰지에 있던 마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카일의 팔에서 피가 터졌다.

하지만 검은 빛이 갈라졌다.

금빛 검격은 그대로 나아가 거대 마수의 뿔 세 개를 잘라 냈다.

크아아아아아!

거대 마수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카일은 멈추지 않았다.

땅을 박차고 뛰었다.

몸이 너무 가벼웠다. 아니, 가볍다기보다 세상이 느렸다.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보였고, 마수의 근육이 움직이는 방향까지 읽혔다.

그러나 그만큼 심장이 타들어 갔다.

'짧게.'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짧게 끝낸다.'

거대 마수가 앞발을 휘둘렀다.

평소라면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공격이었다. 카일은 검으로 발톱을 흘리고, 놈의 앞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이 빛났다.

첫 번째 베기.

앞다리 힘줄이 끊겼다.

두 번째 베기.

검은 수정 하나가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세 번째 베기.

카일은 놈의 가슴까지 올라탔다.

거대 마수의 노란 눈동자 속에서 순간 다른 시선이 비쳤다.

차갑고, 검고, 인간의 눈에 가까운 것.

그 시선이 카일을 보았다.

아니, 알아보았다.

카일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눈동자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낮고 금속성 섞인 목소리.

흑기사였다.

카일은 대답 대신 검을 내려찍었다.

금빛 칼날이 거대 마수의 가슴에 박혔다. 검은 수정들이 하나둘 갈라졌고, 놈의 몸속에서 검은 서리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꺼져."

카일은 검을 비틀었다.

금빛 불꽃이 마수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거대 마수가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그 울음은 산맥 전체를 흔드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놈의 몸이 검은 재처럼 무너졌다.

함몰지 위에 놓였던 얼음 다리도 함께 깨졌다.

마수들이 줄줄이 아래로 떨어졌다.

성벽 위에서 누군가 외쳤다.

"쏴라!"

화살이 쏟아졌다.

기름통이 터졌다.

불길이 함몰지 안을 가득 메웠다.

마수 군단의 흐름이 완전히 끊겼다.

방어선의 사람들

거대 마수가 쓰러지자 전장의 공기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마수들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군대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우두머리의 검은 목줄이 끊어지자 놈들은 다시 짐승이 되었다.

불을 보고 물러서고, 화살을 맞고 흩어지고, 함몰지 앞에서 서로를 밀치며 우왕좌왕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것은 브란델 교수였다.

"지금이다! 좌측 성벽, 놈들의 옆구리를 쳐라!"

교수의 목소리는 늙은 종처럼 깊게 울렸다.

병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좌측으로 돌려!"

"화살 아끼지 마!"

"기름 남은 거 다 가져와!"

몰트 하사가 보급 창고 문을 발로 차며 나타났다.

"이 멍청이들아! 창고에 있는 건 장식품이 아니다! 던져! 깨! 태워!"

그는 보고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름통까지 끌고 나왔다.

이리스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역시 하사님. 숨긴 재고가 있을 줄 알았어."

몰트 하사가 버럭 외쳤다.

"숨긴 게 아니라 비상용이다!"

"말만 다르네요!"

이리스는 병사 셋을 붙잡아 빠르게 배치했다.

"기름통은 한 번에 던지지 마요! 저기 함몰지 모서리, 저기 바위 뒤, 그리고 저쪽 눈이 쌓인 곳! 불길을 이어야 해요. 한꺼번에 태우면 멋있긴 한데 금방 꺼져요!"

병사 하나가 멍하니 물었다.

"학생이 왜 이렇게 잘 알아?"

이리스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돈 되는 물건은 태우는 법도 알아야 하거든요."

"그게 무슨 논리야?"

"지금 살았으면 된 논리요!"

루시아는 북서쪽 배수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도 마지막 마수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배수로 입구는 불타고 있었지만, 놈들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넘어왔다.

루시아는 방패를 땅에 박았다.

"여긴 못 지나가."

마수 한 마리가 몸을 던졌다.

쿵!

루시아의 발이 뒤로 밀렸다.

두 번째가 덮쳤다.

쿵!

방패에 금이 더 갔다.

세 번째가 뛰어오르려는 순간, 루시아가 오히려 앞으로 돌진했다.

"하아아압!"

방패가 마수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후려쳤다. 놈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성벽 위 병사의 창이 그대로 꿰뚫었다.

병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외쳤다.

"맞았다!"

루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잘했어!"

병사는 어째서인지 더 힘이 났다.

핀은 성벽과 배수로, 함몰지 사이를 잇는 마나 실을 붙들고 있었다. 그의 역할은 화려하지 않았다. 검으로 마수를 베지도 않았고, 방패로 막지도 않았다.

하지만 핀의 실이 울릴 때마다 병사들은 어디가 위험한지 알 수 있었다.

쨍!

"북서쪽 두 마리!"

쨍!

"함몰지 오른쪽, 기어오릅니다!"

쨍!

"정문 앞 큰 놈 하나, 아직 살아 있어요!"

처음에는 아무도 학생의 외침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 맞고, 네 번 맞고, 다섯 번 목숨을 건진 뒤에는 달라졌다.

병사 하나가 핀의 옆에 붙어 외쳤다.

"꼬마 마법사 말 들어! 저놈이 울리면 거기에 뭐가 있다!"

핀은 당황했다.

"꼬마는 좀……."

다른 병사가 말했다.

"그럼 선생님!"

"그것도 부담스러워요!"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주 조금 웃음이 떠올랐다.

그레이혼 요새의 방어선은 더 이상 지휘 막사의 지도 위에만 있지 않았다.

루시아의 방패가 버티는 곳.

이리스의 기름과 함정이 타오르는 곳.

핀의 마나 실이 울리는 곳.

브란델의 목소리가 병사들을 붙잡는 곳.

몰트 하사의 욕설이 보급품을 움직이는 곳.

그리고 카일이 마수의 목줄을 끊은 곳.

그 모든 곳이 방어선이었다.

카일은 거대 마수가 무너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휘청였다.

용의 심장 조각을 닫아야 했다.

'라그나.'

—닫아라. 당장.

카일은 심장 안쪽의 금빛 불씨를 억눌렀다.

그 순간, 세상이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동시에 고통이 몰려왔다.

"커헉……."

카일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입안에 피 맛이 번졌다. 오른팔은 감각이 없었고, 온몸의 근육이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

라그나가 말했다.

—잘했다. 폼도 나쁘지 않았다.

'칭찬 기준이 이상합니다.'

—살았으면 됐다.

그 말은 조금 전 이리스의 말과 비슷했다.

카일은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동료들이었다.

검도 포함해서.

새벽의 승리

전투는 해가 뜨기 직전 끝났다.

마수 군단은 완전히 전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요새를 향해 몰려오지 못했다. 지휘 개체가 죽고, 길이 무너지고, 불길이 진로를 막자 놈들은 흩어졌다.

북쪽 숲으로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몰트 하사가 그 의견을 낸 젊은 장교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밤새 죽을 뻔하고도 산책이 하고 싶으면 혼자 가십시오."

아무도 추격하지 않았다.

성벽 위에는 지친 병사들이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부러진 창대를 끌어안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하지만 이제 그 눈은 패배를 덮는 눈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눈이었다.

에드릭 발렌 경은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성문은 반쯤 부서졌고, 철띠는 휘어졌으며, 바닥에는 마수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일이 다가가자 에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밤새 몇 년은 늙은 듯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요새가 버텼군."

"예."

"자네가 아니었다면 무너졌겠지."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듣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에드릭은 입술을 달싹였다. 사과를 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귀족 장교의 자존심과 지휘관의 책임감이 목에 걸린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틀렸다."

그 한마디는 서툴렀다.

하지만 쉽게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카일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는 더 빨리 믿어 주시면 됩니다."

에드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이 있나?"

카일은 북쪽을 보았다.

눈보라 너머, 검은 숲이 있었다.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에드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 루시아가 달려왔다.

"카일! 괜찮아?"

그녀는 카일의 팔을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이거 안 괜찮잖아!"

핀도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게요! 왜 항상 괜찮다고 말하기 전에 안 괜찮은 상태가 되는 거예요?"

이리스는 카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살아 있네. 좋아. 그럼 나중에 화약 상자 훔친 책임은 네가 져."

카일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왜 제가 집니까?"

"네 작전이었잖아."

"가져온 건 당신입니다."

"전략적 조달이야."

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제발 아무도 공식 보고서에 그 단어 쓰지 마세요."

루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겼잖아!"

그 말에 모두가 잠깐 조용해졌다.

이겼다.

정말로.

전생에서 무너졌던 그레이혼 요새가 이번에는 버텼다.

보급 창고가 불타지 않았고, 배수로로 들어온 마수들은 막혔고, 성문은 부서졌지만 열리지 않았다.

카일은 성벽 위로 올라갔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밤새 검던 구름 사이로 푸른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눈밭 위에는 마수의 시체와 부서진 무기, 피 묻은 발자국이 뒤엉켜 있었다.

처참했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그레이혼 요새도.

병사들도.

동료들도.

카일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기억 하나가 바뀌었다.

작지만 분명하게.

그때 눈앞에 익숙한 빛이 떠올랐다.

긴급 임무 완료

그레이혼 요새 방어 성공 전생의 패배를 뒤집었습니다.

보상 정산 중……

경고: 용의 심장 조각 일시 개방 흔적이 감지되었습니다. 경고: 고위 적대 개체가 사용자의 존재를 특정했습니다.

카일의 눈빛이 굳었다.

라그나가 조용히 말했다.

—왔군.

'뭐가 말입니까?'

—시선.

카일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눈보라 너머, 숲보다 더 먼 곳.

회색산맥의 어두운 능선 위에 검은 점 하나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멀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일 리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카일은 느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차갑고 무거운 시선.

검은 갑옷의 그림자.

흑기사.

그 순간, 바람을 타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용의 냄새가 나는군.

카일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루시아가 옆에서 물었다.

"왜 그래?"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요새 방어는 성공했다.

전생의 비극 하나를 막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품고 있는지, 적에게 완전히 드러났다.

카일은 북쪽 산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다음 적이 우리를 찾았습니다."

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우리 방금 이겼는데요?"

이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양심이 있으면 하루는 쉬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라그나가 검 안에서 낮게 웃었다.

—양심 있는 악당은 오래 못 산다.

카일은 피 묻은 장갑을 천천히 조였다.

새벽빛이 성벽 위로 번졌다.

그레이혼 요새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북쪽 어둠도, 이제 카일을 똑똑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카일 역시 알았다.

다음 전투는 요새를 지키는 싸움이 아닐 것이다.

흑기사와 자신.

둘 중 하나가 먼저 무너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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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막내 용병은 목숨값을 다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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