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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전선으로 가다

Views 23약 11분생성형 AI 활용

파견 명령

브란델 교수의 수업은 칠판 위 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교실은 금세 술렁였다.

누군가는 진지한 얼굴로 깃펜을 들었고, 누군가는 벌써 졸다가 고개를 들었다. 핀은 카일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저 질문, 시험에 나오면 너무 어렵지 않아요?"

이리스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시험이면 차라리 낫지. 현실에 나오면 더 골치 아파."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쟁은 나쁜 사람이 먼저 때려서 나는 거 아니야?"

브란델 교수가 그 말을 들었는지, 분필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전쟁은 누군가의 주먹 하나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주먹이 올라가기 전까지 수많은 손이 등을 떠민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카일은 그 말을 듣고 창밖을 보았다.

아카데미 운동장에는 아직 학생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 마법 훈련장에서 터지는 작은 폭발음, 늦잠을 잔 누군가가 빵을 물고 뛰어가는 모습.

평화로웠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전쟁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들이 아직 웃고 있을 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브란델 교수가 갑자기 말했다.

학생들이 멍하니 그를 보았다.

"예?"

"교수님, 아직 수업 시작한 지 십 분도 안 됐는데요."

"그럼 좋지 않나?"

누군가 작게 환호하려는 순간, 교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카데미 기사 하나가 들어와 브란델 교수에게 봉인된 문서를 건넸다. 군청색 밀랍에 왕국군 문장이 찍혀 있었다.

교수는 문서를 뜯어 읽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카일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좋지 않은 소식이다.

브란델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문제아 반 전원, 그리고 특별 실습 대상자 네 명. 즉시 강당으로 이동한다."

핀의 얼굴이 하얘졌다.

"또 저희만요?"

이리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매점이 터진 것도 아닌데."

루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실습이야?"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서 낯익은 싸늘함이 올라왔다.

군 문서.

긴급 소집.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 세 가지가 모이면 대개 피 냄새가 난다.

강당에는 이미 몇몇 교수와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단상 위에는 아카데미 학장과 왕국군 연락 장교가 서 있었다.

장교는 젊었다. 스물다섯쯤 되었을까. 은색 견장을 달고 있었고, 갑옷에는 흠집이 거의 없었다. 전장보다는 연회장에서 더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북부 전선에서 지원 요청이 왔다."

강당이 얼어붙었다.

북부 전선.

왕국 북쪽 끝, 산맥과 얼어붙은 숲이 맞닿은 곳. 인간의 영토와 마수의 영역이 얇은 성벽 하나로 갈라지는 곳.

그 이름만으로도 학생들의 등골이 굳었다.

장교는 계속 말했다.

"최근 북부 회색산맥 일대에서 마수의 움직임이 증가했다. 왕국군은 그레이혼 요새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 중이며, 아카데미에는 후방 지원 및 현장 실습 인력을 요청했다."

핀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장 실습이요? 전쟁터를 그렇게 부르면 덜 무서워지나요?"

카일은 낮게 대답했다.

"아니."

"그럴 줄 알았어요."

학장이 앞으로 나섰다.

"너희는 정규 병력이 아니다. 전면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다. 부상자 후송, 보급품 분류, 방어 마법진 보조, 정찰 자료 정리 등이 주 임무다."

그럴 리 없다.

카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전장에 발을 들이면 누구도 '주 임무'대로만 움직이지 못한다. 칼이 날아오면 보급병도 방패를 든다. 성벽이 무너지면 서기관도 돌을 나른다. 마수가 뛰어들면 학생도 피를 본다.

그때 카일의 눈앞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긴급 임무 발생

북부 전선 지원 파견 목적지: 그레이혼 요새 위험도: 높음 경고: 과거의 패배가 다시 고개를 듭니다.

카일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과거의 패배.

그 말이 심장을 찔렀다.

그레이혼 요새.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전생의 카일이 처음으로 '전쟁은 이길 수 없는 날도 있다'는 사실을 배운 곳.

다시 떠오른 요새

그레이혼 요새는 전생에서 무너졌다.

정확히는,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버려졌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하늘은 납빛이었고, 눈은 옆으로 날렸다. 성벽 아래에는 마수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지만, 살아 있는 놈들은 계속 올라왔다. 보급 창고에는 화살이 모자랐고, 치료소에는 붕대 대신 찢어진 군복이 쌓였다.

카일은 그때 막내 용병이었다.

명령은 간단했다.

'성벽을 지켜라.'

어떻게 지키라는 말은 없었다. 먹을 것도, 화살도, 지원군도 없이 그냥 지키라고 했다.

요새가 뚫린 것은 셋째 밤이었다.

북서쪽 절벽 아래, 오래전에 얼어붙은 배수로가 있었다. 지도에는 막혔다고 적혀 있었지만, 겨울 마수들은 그 길을 알고 있었다. 새벽 두 시, 눈보라가 가장 거세지던 때, 마수들은 그 배수로를 타고 요새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때 지휘관들은 정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귀족 장교들은 전공을 세우겠다고 성문 앞에 병력을 몰아넣었다. 나이 많은 보급관 하나가 배수로를 막아야 한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결과는 학살이었다.

카일은 그날 성벽 아래에서 동료 셋을 잃었다. 이름도 제대로 묻지 못한 용병들이었다. 마지막에 본 것은 불타는 보급 창고와 검은 갑옷의 그림자였다.

흑기사.

그가 그 전투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전생의 카일은 그때 너무 약했고, 너무 몰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마수의 침공 시간.

끊긴 보급로.

사라진 지원군.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요새 안으로 퍼지던 검은 서리.

라그나의 목소리가 검 안에서 낮게 울렸다.

—네 심장이 시끄럽게 뛴다.

'그레이혼은 전생에서 무너졌습니다.'

—이번에도 무너질 것 같으냐?

'그렇게 두면요.'

—그럼 두지 않으면 된다.

말은 쉬웠다.

하지만 전장은 말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아직 피 냄새를 맡아 보지 못한 지휘관들이 지도를 장난감처럼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카일은 단상 위 장교를 바라보았다.

젊고 깨끗한 갑옷.

자신감 있는 턱선.

저런 얼굴을 전생에서 많이 봤다. 첫 전투 전에는 모두 용감하다. 첫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는.

브란델 교수가 카일 곁으로 다가왔다.

"표정이 안 좋군."

"그레이혼 요새에 대해 아십니까?"

"북부의 목줄 같은 곳이지. 거기가 버티면 마수는 남하하지 못한다. 거기가 무너지면 북부 마을 여섯 곳이 먼저 사라지고, 그다음은 영지들이 흔들린다."

"파견 인원은 누가 정합니까?"

브란델 교수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미 정해졌다. 네 특별반 전원. 나도 감독관으로 간다."

핀은 뒤에서 거의 울상이 되었다.

"감독관이 같이 가면 안전한 거죠?"

브란델 교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조금 더 오래 위험할 수 있다."

"그런 식의 솔직함은 원하지 않았어요!"

루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우리가 가면 도움이 될 거야. 그렇지?"

이리스는 카일의 얼굴을 살폈다.

"넌 이미 뭔가 알고 있네."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전생을 전부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레이혼 요새는 위험합니다."

"북부 전선이니까 당연하지 않아?"

"아니. 위험한 방향이 다릅니다."

카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문이 아니라 안쪽이 뚫릴 겁니다. 그리고 보급로가 먼저 끊깁니다."

핀은 침을 삼켰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카일은 창밖 북쪽 하늘을 보았다.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내릴 것이다.

"전장에서 배운 감입니다."

이리스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막으면 되겠다."

너무 간단한 말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이상하게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북쪽으로 가는 길

파견은 다음 날 새벽에 시작됐다.

아카데미 정문 앞에는 군용 마차 여덟 대가 서 있었다. 학생들은 두꺼운 외투와 보급 배낭을 지급받았다. 배낭 안에는 마른 빵, 말린 고기, 응급 붕대, 소형 마나등, 그리고 읽기 싫게 생긴 북부 생존 지침서가 들어 있었다.

핀은 지침서를 펼치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첫 장부터 '혼자 떨어지면 죽는다'라고 적혀 있어요."

이리스가 배낭끈을 조였다.

"친절하네."

"친절의 기준이 이상해졌어요."

루시아는 지급받은 두꺼운 장갑을 끼고 손을 쥐었다 폈다.

"좋아. 따뜻해."

"그 장갑, 방패 잡으라고 준 거야."

"따뜻하게 방패 잡으면 더 좋잖아."

카일은 자기 배낭을 빠르게 확인했다. 붕대 두 묶음, 예비 단검 하나, 건조 식량 사흘 치. 부족했다. 전장은 항상 부족하고, 보급은 항상 늦는다.

그는 옆 마차의 물자 목록을 훑어보았다.

화살은 충분해 보였지만 기름통이 적었다. 북부 마수 중 털이 두꺼운 놈들은 불을 두려워한다. 기름은 화살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기름통이 적습니다."

카일이 말하자 물자를 점검하던 군인이 고개를 들었다.

"학생은 자기 짐이나 확인해라."

"북부 마수 상대로는 방화용 기름이 필요합니다. 특히 눈이 오면 젖은 장작은 안 탑니다."

군인은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건 요새에 비축되어 있다."

전생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요새의 기름 창고는 보급로가 끊긴 둘째 날 이미 바닥났다.

카일은 더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목소리를 높여 봐야 '건방진 학생'이 될 뿐이다. 대신 이리스에게 작게 말했다.

"출발 전에 기름 작은 통을 몇 개 구할 수 있습니까?"

이리스의 눈이 반짝였다.

"공식으로?"

"싸게."

"그게 제일 어렵네."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곧 사라졌다. 십 분 뒤, 이리스는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기름통 여섯 개를 굴리며 돌아왔다.

핀은 경악했다.

"대체 어떻게 구한 거예요?"

"군수 담당 조수가 카드빚이 있더라."

"방금 너무 많은 범죄 냄새가 났는데요."

이리스는 태연히 말했다.

"범죄 아니야. 선결제야."

카일은 기름통을 마차 아래쪽에 묶었다.

작은 준비 하나가 목숨 여럿을 살릴 수 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도의 성벽이 뒤로 멀어지고, 넓은 길이 북쪽으로 뻗었다. 처음 하루는 평범했다. 들판은 누렇게 익어 있었고, 농부들은 군용 마차를 보며 모자를 벗었다. 학생들 중 몇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떠들었다.

둘째 날부터 풍경이 바뀌었다.

길가의 마을에는 닫힌 창문이 많아졌다. 우물가에는 남자보다 노인과 아이들이 많았다. 장정들은 이미 징발되었거나, 스스로 민병대에 들어갔을 것이다.

셋째 날, 첫 피난민 행렬을 만났다.

낡은 수레에 이불과 냄비, 닭장 하나를 싣고 내려오는 사람들이었다. 아이 하나가 맨발로 걸었다. 루시아는 자기 예비 양말을 벗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멍하니 양말을 받았다.

그 어머니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요새로 가시는 겁니까?"

"예."

카일이 대답했다.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밤마다 산에서 소리가 납니다. 늑대도 아니고 곰도 아닌 소리요. 그리고 어제는 하늘에 검은 새들이 돌았습니다. 북쪽으로 가지 마세요."

핀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변했다.

"검은 새라면 혹시…… 그냥 까마귀겠죠?"

카일은 북쪽 하늘을 보았다.

멀리 검은 점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까마귀는 전장을 안다.

죽음이 올 곳을 사람보다 먼저 알아차린다.

카일은 여인에게 물었다.

"상단 마차는 보셨습니까? 군 보급 마차입니다."

"이틀 전에 서쪽 길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은 못 봤습니다."

서쪽 길.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생에서 보급 마차가 습격당한 길도 그곳이었다. 지도상으로는 가장 빠른 길이지만, 오래된 벌목장과 좁은 협곡을 지난다. 매복하기에는 너무 좋은 곳.

그는 마차 안쪽에 펼쳐 둔 지도를 보며 작은 표시를 했다.

보급로 차단 예상 지점.

그 아래에 또 하나를 적었다.

마수 침공 예상: 첫눈 내린 뒤 셋째 밤, 새벽 두 시.

라그나가 낮게 말했다.

—글씨가 살벌하군.

'살벌한 일이니까요.'

—이번에는 네가 알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이 들어야 합니다.'

그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미래를 아는 것보다, 미래를 믿게 만드는 일이 더 어렵다.

그레이혼 요새

그레이혼 요새는 산의 목을 틀어쥔 짐승처럼 서 있었다.

회색 절벽 사이에 박힌 거대한 성벽. 눈을 막기 위해 낮고 두껍게 지은 망루. 바람에 찢어진 왕국기가 북쪽 하늘을 향해 펄럭였다.

요새 앞에는 병사들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화살 상자를 나르는 병사, 말에게 물을 먹이는 병사, 다친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욕을 하는 병사.

그리고 냄새.

철, 땀, 젖은 가죽, 오래된 피.

카일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아카데미 훈련장의 흙냄새와는 달랐다. 이곳의 공기는 칼날처럼 거칠었다.

핀은 코를 찡그렸다.

"여기…… 진짜 전장이네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루시아는 말없이 방패 끈을 조였다. 이리스도 평소처럼 농담하지 않았다.

요새 안쪽 지휘 막사에는 젊은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가운데 선 남자가 이곳 임시 지휘관인 에드릭 발렌 경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 반듯한 제복. 왕도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얼굴 전체가 말하고 있었다. 그는 카일 일행을 보자 예의 바르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얇은 벽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온 지원 인력인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브란델 교수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학생들이지만 던전 실습과 왕도 습격에서 실전을 겪었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에드릭의 시선이 카일에게 잠시 머물렀다.

"아, 자네가 그 유명한 카일인가. 황녀를 구했다던 학생."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과장된 소문입니다."

"겸손하군. 좋은 태도야."

말은 칭찬이었지만, 그 안에는 '학생답게 굴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카일은 지휘 막사 중앙의 지도를 보았다.

전생과 거의 같았다.

정문 방면에 병력이 몰려 있고, 북서쪽 배수로와 오래된 암거는 빨간 표시조차 없었다. 보급로는 서쪽 벌목장 길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다.

카일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보급로를 바꾸셔야 합니다."

막사 안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 꽂혔다.

에드릭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무슨 뜻이지?"

카일은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서쪽 벌목장 길은 빠르지만 좁습니다. 양쪽에 언덕이 있고, 마차가 한 번 멈추면 뒤가 전부 막힙니다. 마수뿐 아니라 사람의 매복에도 취약합니다."

젊은 장교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사람의 매복? 이곳은 마수 전선이다. 도적 따위가 군 보급대를 친다고?"

"도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막사 안 공기가 차가워졌다.

카일은 멈추지 않았다.

"남쪽 우회로를 같이 써야 합니다. 시간이 더 걸려도 보급로를 둘로 나누면 한쪽이 끊겨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서쪽 배수로는 즉시 봉쇄해야 합니다."

에드릭은 지도 위 북서쪽을 내려다보았다.

"그 배수로는 오래전에 얼어 막혔다고 보고받았다."

"겉만 막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눈이 오면 안쪽 얼음이 갈라지고, 작은 마수부터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근거는?"

카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전생에서 봤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북쪽 피난민들이 밤마다 산에서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검은 새들이 요새 북서쪽을 돌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보급 마차가 서쪽 길로 올라간 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장교 하나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피난민의 헛소문과 새 몇 마리로 지휘를 바꾸라는 건가?"

핀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새 몇 마리라기엔 좀 많았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다.

에드릭은 차분한 척 손을 들어 장교들을 말렸다.

"카일, 자네의 열정은 인정한다. 하지만 전장은 아카데미 실습과 다르다. 지휘는 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카일의 눈빛이 낮아졌다.

전생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막내 용병의 감.

보급관의 걱정.

피난민의 소문.

그 모든 것이 '근거 없음'으로 밀려났고, 그 대가를 병사들이 피로 치렀다.

"그 감이 사람을 살릴 때도 있습니다."

에드릭의 미소가 사라졌다.

"학생."

호칭이 바뀌었다.

"요새의 지휘권은 내게 있다. 자네들은 지원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다. 방어선 배치는 왕국군이 결정한다."

브란델 교수가 낮게 말했다.

"발렌 경, 한 번 확인해 보는 데 큰 비용은 들지 않습니다."

"교수님."

에드릭은 예의를 지키려 애쓰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병사들은 정문 방어 준비만으로도 바쁩니다.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낡은 배수로에 인력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카일은 지도 위 배수로 표시를 바라보았다.

낭비.

그 단어가 귀에 박혔다.

죽은 뒤에야 사람들은 알게 된다. 미리 막는 일은 낭비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무시당한 조언

지휘 막사에서 나온 핀은 긴 숨을 토했다.

"와. 분위기 무서웠어요. 저는 중간에 숨도 못 쉬었어요."

이리스가 차갑게 말했다.

"젊은 지휘관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마수요?"

"아니.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맞는 말 하는 거."

루시아는 주먹을 쥐었다.

"그럼 우리가 몰래 막으면 안 돼?"

핀은 깜짝 놀랐다.

"몰래요? 군사 시설을요? 그거 엄청 혼나는 일 아니에요?"

카일은 요새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성벽 아래로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구름이 낮게 깔렸다. 첫눈은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쯤 올 것이다.

전생의 시간표가 다시 움직이고 있다.

"대놓고 막을 수는 없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그럼?"

"지원 임무를 하면서 확인합니다."

이리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합법과 불법 사이의 회색 지대네. 좋아."

핀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지 마세요. 그런 말은 보통 나중에 서류가 많아져요."

그들은 먼저 보급 창고로 향했다. 창고 책임자는 나이 든 하사관이었다. 이름은 몰트. 한쪽 눈썹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고, 말투는 거칠었지만 손은 빨랐다.

"아카데미 애송이들이라더니, 짐 나르는 법은 아냐?"

루시아가 양손에 화살 상자를 하나씩 들었다.

"이렇게요?"

몰트 하사는 눈을 깜빡였다.

"……너는 애송이 말고 일꾼 해라."

핀도 작은 상자를 들다가 비틀거렸다.

"저는 지식 노동 쪽이 맞는 것 같아요."

"전장에서는 지식도 상자 나른 뒤에 써라."

이리스는 장부를 훑어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하사님, 기름 재고가 보고서보다 적습니다."

몰트 하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봤냐?"

"숫자가 틀리면 눈에 띄어서요."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낮게 말했다.

"서류상으로는 충분하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는 지난주 보급분이 반밖에 안 왔다."

카일이 물었다.

"서쪽 길로 온 보급입니까?"

몰트 하사는 카일을 보았다.

"그래. 중간에 마차 두 대가 늦어진다더니 아직도 안 왔다. 위에는 보고했지만, 다들 곧 올 거라더군."

이리스가 작게 욕했다.

"이미 끊겼네."

카일의 머릿속에서 전생의 장면이 겹쳤다.

첫째 날, 보급 지연.

둘째 날, 눈.

셋째 밤, 배수로.

이번에도 순서가 같다.

카일은 몰트 하사에게 말했다.

"북서쪽 배수로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몰트 하사는 코웃음을 쳤다.

"너도 그 얘기냐? 오래전부터 막힌 곳이다."

"확인만 하겠습니다."

"허가가 있나?"

카일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지원 임무 중 시설 안전 점검입니다."

핀은 옆에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임무 있었어요?"

이리스가 팔꿈치로 핀의 옆구리를 찔렀다.

"방금 생겼어."

몰트 하사는 카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이 든 병사의 눈이었다. 전장을 겪은 사람은 때때로 말보다 표정을 믿는다.

마침내 그가 낮게 말했다.

"해 질 때 전까지 돌아와라. 그리고 걸리면 난 모른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살아 돌아온 뒤에 해."

얼어붙은 배수로

북서쪽 배수로는 성벽 가장 그늘진 곳에 있었다.

지도에는 '폐쇄'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입구는 눈과 낙엽, 부서진 돌로 대충 막아 둔 수준이었다. 겉은 얼어붙어 단단해 보였지만, 카일은 무릎을 꿇고 돌 틈에 손을 넣었다.

안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아주 약하지만 분명한 바람.

막힌 길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루시아가 방패를 내려놓고 말했다.

"뚫려 있어?"

"안쪽이 비어 있습니다."

핀은 즉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저 안에서 뭐가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죠?"

"예."

"대답이 너무 빠르잖아요……."

이리스는 주변을 살폈다.

"병사들 눈에 띄기 전에 표시만 해 두자. 완전히 막으려면 인력이 필요해."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가져온 작은 기름통 두 개를 배수로 옆 바위틈에 숨겼다. 루시아는 큰 돌을 몇 개 굴려 입구 앞에 세웠고, 핀은 마나 감지용 실을 얇게 걸었다.

핀의 손은 떨렸지만, 매듭은 정확했다.

카일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안 괜찮은데요."

핀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손은 움직여요. 그럼 된 거죠?"

카일은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장에서는 그게 용기입니다."

핀은 멍하니 카일을 보았다.

"방금 저 칭찬받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기록해 둬야겠다."

이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때 북쪽 숲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

늑대도 아니고, 곰도 아니었다. 목구멍이 여러 개인 짐승이 동시에 우는 듯한 소리.

루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가까워."

카일은 숲을 바라보았다.

나무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눈이 없는데도 땅 위에는 희미한 서리 자국이 남았다.

마수다.

아니, 정찰 개체다.

전생에서도 먼저 저놈들이 왔다. 사람 냄새와 성벽의 약점을 찾는 놈들.

카일은 검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그림자는 곧 사라졌다.

마치 일부러 자신을 보여 준 것처럼.

라그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평범한 마수만은 아니다. 어둠이 묻어 있다.

'흑기사입니까?'

—직접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냄새가 난다.

카일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레이혼 요새 방어전.

흑기사의 그림자.

전생의 패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점점 굳어졌다.

그들이 요새 안으로 돌아왔을 때,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가벼운 눈송이였다.

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쁘네요."

카일은 눈송이가 장갑 위에 녹는 것을 보았다.

예쁘다.

맞다. 눈은 예쁘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눈이 피를 덮고, 발자국을 지우고, 비명을 삼킨다.

카일은 낮게 말했다.

"오늘부터 시간이 없습니다."

젊은 지휘관들

그날 밤, 카일은 다시 지휘 막사를 찾았다.

에드릭 발렌 경은 참모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지도 위에는 붉은 말이 정문 앞에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카일은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배수로 안쪽이 뚫려 있습니다."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에드릭의 얼굴에 피로와 짜증이 동시에 떠올랐다.

"허가 없이 성벽 외곽을 조사했나?"

"시설 안전 점검 중 확인했습니다."

이리스가 뒤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네."

핀은 더 작게 말했다.

"거짓말에 가까운 진실이죠."

카일은 이어 말했다.

"배수로 안쪽에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수 정찰 개체도 북서쪽 숲에서 확인했습니다. 첫눈이 내렸으니, 침공은 사흘 안에 옵니다. 가장 위험한 시간은 셋째 밤 새벽 두 시입니다."

젊은 장교들이 서로를 보았다.

그중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시간까지 예언하나?"

다른 장교가 비꼬았다.

"아카데미에서는 점성술도 가르치나 보군."

루시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 비웃은 거야?"

핀은 급히 루시아의 팔을 붙잡았다.

"참아요, 제발. 여기서 지휘관 때리면 진짜 큰일 나요."

에드릭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카일, 자네가 왕도에서 공을 세운 것은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내 전장이다. 병사들의 배치는 경험과 보고에 따라 결정된다. 불확실한 추측으로 병력을 흔들 수 없다."

"보급 마차가 이미 늦었습니다."

"눈 때문에 지연될 수 있다."

"기름 재고도 부족합니다."

"비축분이 있다."

"서류상으로만 그렇습니다."

에드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카일은 물러서지 않았다.

"예."

막사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브란델 교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발렌 경, 학생의 말투가 거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확인할 가치는 있습니다. 배수로에 병사 스무 명과 돌, 목재만 보내도 최소한의 봉쇄는 가능합니다."

에드릭은 교수와 카일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차갑게 말했다.

"스무 명을 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섯 명을 보내 확인하게 하겠습니다. 만족하나?"

다섯 명.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카일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에드릭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카일."

"예."

"이후로 지휘 체계를 흔드는 발언은 삼가라. 병사들은 불안에 약하다. 영웅담을 가진 학생의 말 한마디가 혼란을 만들 수도 있다."

카일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대답했다.

"혼란보다 무서운 것은 준비되지 않은 침묵입니다."

에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카일은 더 말하지 않고 막사를 나왔다.

밖에는 눈이 조금 더 굵어지고 있었다.

루시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저 사람 너무 답답해."

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섯 명은 보내 준다니까요. 다섯 명이면…… 음, 충분하지는 않겠죠?"

카일은 북서쪽 성벽을 바라보았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리스가 물었다.

"그럼?"

카일은 짧게 대답했다.

"우리가 더 준비합니다."

첫 번째 밤

첫째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너무 조용했다.

성벽 위 병사들은 눈을 털며 농담을 나눴고, 정문 앞 참호에는 횃불이 줄지어 켜졌다. 에드릭은 정면 방어에 병력을 집중했다. 북서쪽 배수로에는 약속대로 병사 다섯 명이 배치되었지만, 그들은 불평하며 모닥불만 쬐고 있었다.

카일은 잠을 자지 않았다.

루시아도 방패를 끌어안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 카일이 움직이면 바로 눈을 떴다. 핀은 마나 실 감지 장치를 몇 번이나 확인했고, 이리스는 보급 창고에서 몰래 빼낸 낡은 쇠못과 밧줄을 정리했다.

"우리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핀이 물었다.

"괜찮지 않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그럼 왜 이렇게 담담해요?"

"담담하게 해야 덜 무섭습니다."

핀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담담해질게요."

바로 그때 바람이 세게 불어 천막이 흔들렸다.

핀은 펄쩍 뛰었다.

"아, 안 되네요."

루시아가 웃었다.

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 덕분에 얼어붙은 밤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둘째 날, 보급 마차가 오지 않았다.

에드릭의 얼굴에서도 여유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는 정찰대를 서쪽 벌목장 길로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말 한 마리뿐이었다. 말의 옆구리에는 깊은 발톱 자국이 나 있었다.

그날 오후, 카일은 다시 지휘 막사로 불려 갔다.

에드릭은 지도 앞에 서 있었다.

"자네 말대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인정은 아니었다.

그저 사실 앞에서 잠시 물러난 말투였다.

카일은 말했다.

"남쪽 우회로를 열어야 합니다."

"이미 전령을 보냈다."

"늦었습니다. 요새 안 재고로 사흘을 버텨야 합니다. 기름은 방어용으로만 쓰고, 화살은 정문보다 측면 성벽에 분산해야 합니다."

젊은 장교 하나가 이를 악물었다.

"또 지휘를 하려 드는군."

에드릭은 그를 말리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셋째 밤 새벽 두 시라고 했나?"

"예."

"그때 아무 일도 없으면?"

"그럼 제가 틀린 겁니다."

"책임은?"

카일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집니다."

핀은 뒤에서 거의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이리스가 낮게 속삭였다.

"너 방금 뭘 건 거야?"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드릭은 한동안 카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다. 셋째 밤, 북서쪽 경계를 조금 강화하겠다. 하지만 정문 병력을 크게 뺄 수는 없다."

조금.

그 말이 또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카일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여기서 더 나가면 명령 불복종으로 갇힐 수도 있다.

그는 막사를 나오며 결심했다.

공식 병력이 부족하면 비공식으로 움직인다.

전생의 막내 용병은 명령만 기다리다 죽었다.

이번 생의 카일은 기다리지 않는다.

새벽 두 시

셋째 밤이 왔다.

눈보라가 요새를 삼켰다.

바람은 칼처럼 얼굴을 베었고, 횃불은 몇 번이나 꺼질 뻔했다. 정문 앞 숲에서는 간헐적으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모두 그쪽을 바라보았다.

전생과 같았다.

카일은 북서쪽 배수로 앞에 서 있었다.

곁에는 루시아, 이리스, 핀. 그리고 몰트 하사가 몰래 붙여 준 병사 셋이 있었다. 공식 지원 병력은 아니었다. 장부상으로는 모두 '창고 정리 중'이었다.

몰트 하사는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걸리면 난 모른다. 살아오면 술은 내가 산다.'

핀은 마나 실을 확인했다.

"아직 반응 없어요."

루시아는 방패를 앞으로 세웠다.

"오면 막을게."

이리스는 쇠못을 눈 위에 뿌리며 말했다.

"마수 발바닥에도 이게 통하면 좋겠네."

카일은 하늘을 보았다.

구름에 달이 가려 시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곧이다.

라그나가 말했다.

—두렵나?

카일은 잠시 생각했다.

전생의 비명.

무너지는 성벽.

눈 위에 번진 피.

이번 생의 동료들.

"예."

—좋다. 두려움을 아는 놈이 오래 산다.

그 순간 핀의 마나 실이 파랗게 빛났다.

핀의 얼굴이 굳었다.

"움직였어요."

배수로 안쪽에서 긁는 소리가 났다.

드득.

드드득.

얼음이 갈라지고, 돌이 밀리는 소리.

루시아가 방패를 고쳐 잡았다.

이리스는 기름통 마개를 뽑았다.

카일은 검을 뽑았다.

낡은 검날 위로 희미한 금빛이 스쳤다.

배수로 입구의 돌무더기가 안쪽에서부터 흔들렸다. 틈 사이로 검은 서리가 스며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란 눈동자 여러 개가 떠올랐다.

동시에 요새 정문 쪽에서 거대한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부우우우우—!

정면에서도 마수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고함이 눈보라를 찢었다.

"마수다!"

"정문 방어!"

"화살 준비!"

모든 시선이 정문으로 쏠리는 순간, 북서쪽 배수로가 터졌다.

첫 번째 마수가 기어 나왔다.

늑대보다 크고, 등에는 얼음 가시가 돋아 있었다. 입가에서는 검은 김이 흘러나왔다.

카일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전생에서는 이 순간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있었다.

그가 있었다.

그리고 동료들이 있었다.

"루시아, 첫 돌진 막아!"

"응!"

"이리스, 기름!"

"이미 준비했어!"

"핀, 신호탄!"

"쏩니다!"

핀의 손에서 붉은 신호탄이 하늘로 솟구쳤다. 눈보라 속에서 붉은 빛이 터졌다.

요새 위 병사들이 뒤늦게 북서쪽을 돌아보았다.

카일은 달려드는 마수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검은 서리를 갈랐다.

피가 눈 위에 튀었다.

전생의 패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말이 같지 않을 것이다.

카일은 두 번째 마수를 향해 검을 들며 낮게 말했다.

"막는다."

그 목소리는 눈보라 속에서도 이상하게 선명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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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막내 용병은 목숨값을 다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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