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초대장
축제가 끝난 다음 날, 왕립 아카데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평소라면 수업 시작 종이 울리기 전부터 복도에는 뛰어다니는 학생, 숙제를 베껴 달라는 학생, 늦잠을 잔 채 빵을 입에 문 학생들로 가득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모두가 발소리를 죽였고, 창밖을 한 번씩 훔쳐보았다.
어제 그 창밖에서 암살자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중앙 광장은 아직 통제 중이었다. 부서진 천막과 깨진 분수대는 치워졌지만, 바닥 곳곳에는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마법으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었다.
핀은 그 그을음을 보며 말했다.
"저거…… 꼭 시험지에 잉크 엎질렀을 때랑 비슷하네요."
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시험지에 잉크 엎질러 본 적 있구나."
"아, 아니요. 비유입니다. 예술적 비유."
"핀, 넌 거짓말할 때 귀가 빨개져."
핀은 양손으로 귀를 가렸다.
루시아는 금이 간 방패를 품에 안고 있었다. 수리 맡기기 전까지는 직접 들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방패는 어제 검은 창을 막아 낸 뒤로 표면에 긴 금이 가 있었다.
카일은 그 방패를 한 번 보고, 다시 복도 끝을 보았다.
경비가 늘었다.
아카데미 기사들이 두 명씩 조를 짜서 이동했고, 교수들도 평소보다 많이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하는 듯했지만, 카일은 오히려 어깨가 무거워졌다.
전장에서도 그랬다.
경비가 늘었다는 건 안전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뭔가를 잃었거나, 잃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그때 브란델 교수가 복도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그는 평소처럼 낡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지만, 눈 밑이 조금 어두웠다. 밤을 새운 얼굴이었다.
"카일."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
브란델 교수는 주변을 슬쩍 살폈다. 루시아와 이리스, 핀이 자연스럽게 가까이 다가왔다.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셋은 수업에 가라."
루시아가 바로 물었다.
"카일만 어디 가요?"
"혼나는 건가요?"
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리스는 이미 눈치챈 얼굴이었다.
"황녀 쪽에서 부른 거군요."
브란델 교수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황녀가 직접 부른 건 아니다. 그런 식으로 기록에 남으면 곤란하니까."
핀은 더 창백해졌다.
"기록에 남으면 곤란한 일은 보통 더 무서운 일 아닌가요?"
카일은 진지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 인정은 필요 없어요……."
브란델 교수는 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는 평범한 회색이었다. 귀족들이 쓰는 화려한 밀랍 인장도, 향수 냄새도 없었다. 대신 모서리가 아주 깔끔하게 접혀 있었다.
군용 문서처럼.
카일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겉면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오늘 밤, 오래된 종탑. 혼자.
글씨는 단정했다. 하지만 마지막 점 하나가 조금 깊게 찍혀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리스가 옆에서 보더니 낮게 말했다.
"혼자라니. 마음에 안 들어."
루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됩니다."
카일이 바로 대답했다.
루시아가 볼을 부풀렸다.
"왜?"
"혼자 오라고 했습니다."
"그건 알지만!"
카일은 봉투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만약 함정이면, 혼자 빠져나오는 편이 쉽습니다."
핀은 작게 손을 들었다.
"저기요. 함정이라는 단어를 너무 담담하게 말하지 말아 주시면 안 될까요?"
브란델 교수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네 성격상 갈 거지?"
"예."
"대답이 빨라서 싫군."
교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은 마법진을 그렸다. 푸른빛이 카일의 손등에 잠깐 스며들었다.
"위치 추적 표식이다. 강제로 따라가진 않겠다. 하지만 네가 죽기 직전이면 내가 알 수 있다."
"죽기 전이면 늦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죽기 직전까지 버텨라."
이상하게도 든든한 말이었다.
핀은 중얼거렸다.
"교수님들 격려 방식은 왜 다 이렇죠……."
카일은 손등의 희미한 빛을 내려다보았다. 곧 빛은 사라졌지만, 마나의 감각은 남았다.
루시아가 카일의 팔을 잡았다.
"진짜 위험하면 불러."
"부르겠습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이리스가 팔짱을 꼈다.
"거짓말하면 방패 수리비 네가 전부 내."
카일은 멈칫했다.
그건 상당히 무서운 협박이었다.
"반드시 부르겠습니다."
핀은 조용히 덧붙였다.
"저희도 준비하고 있을게요. 도망갈 준비 말고…… 도우러 갈 준비요."
말끝은 조금 떨렸지만 눈은 피하지 않았다.
카일은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전생의 그는 부름을 받으면 혼자 갔다. 명령을 받으면 혼자 싸웠고, 위험하면 혼자 죽을 각오를 했다. 용병단에서도 막내는 늘 가장 먼저 위험한 곳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누군가가 그의 뒤를 봐 주고 있었다.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낡은 검 속에서 라그나가 낮게 웃었다.
—황녀의 비밀 초대라. 용의 계약자답게 일의 규모가 커지는구나.
'저는 아직 학생입니다.'
—학생이 어제 왕족 암살자를 베었느냐?
'베긴 했습니다.'
—그럼 학생이라는 변명은 이제 약해졌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길하게도, 맞는 말이었다.
오래된 종탑의 황녀
오래된 종탑은 아카데미 북쪽 정원 끝에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었다. 새 종탑이 세워진 뒤로 이곳은 학생들이 몰래 간식을 먹거나, 고백을 하거나, 시험을 망친 뒤 세상을 원망하는 장소가 되었다고 들었다.
카일은 그런 용도로 쓰기에는 위치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높고, 조용하고, 사방을 볼 수 있다. 도망칠 길은 좁지만, 올라오는 적을 막기는 쉽다. 전장식으로 말하자면 작은 감시 초소였다.
그는 해가 완전히 진 뒤 종탑으로 향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정원에는 마법등이 낮게 켜져 있었지만, 종탑 주변은 어둠이 깊었다. 카일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일부러 발소리를 숨기지도 않았다.
몰래 온 것처럼 보이면서도, 자신이 왔다는 사실은 알리는 편이 낫다.
함정이면 상대의 반응을 볼 수 있고, 회동이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종탑 문 앞에 근위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다.
둘 다 어제 황녀 곁에 있던 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루시아를 밀어내려 했다가 실패한 기사였다. 그는 카일을 보자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무기를 맡겨라."
카일은 허리의 낡은 검을 만졌다.
라그나가 즉시 으르렁거렸다.
—감히 나를 맡기라고?
카일은 태연히 말했다.
"곤란합니다."
기사가 눈썹을 찌푸렸다.
"황녀 전하를 만나는 자리다."
"그래서 더 곤란합니다."
"무슨 뜻이지?"
카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제 황녀 전하를 죽이려던 자들은 그림자에서 칼을 꺼냈습니다. 제가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지키기 어렵습니다."
기사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종탑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세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어제 광장 한복판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황녀의 목소리.
기사들은 마지못해 길을 비켰다.
카일은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오래된 나무가 발밑에서 삐걱거렸다. 계단을 오를수록 바람 소리가 커졌다.
종탑 꼭대기에는 커다란 청동 종이 매달려 있었다. 오래 사용하지 않아 표면이 어둡게 변했지만, 마법등 하나가 그 아래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아래 황녀가 서 있었다.
낮에 본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었다. 짙은 남색 외투와 간단한 머리끈. 은빛 머리카락은 어깨 뒤로 묶여 있었고, 보랏빛 눈은 밤하늘보다 차분했다.
그녀는 어제보다 황녀답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위험해 보였다.
"와 주었군요, 카일."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하."
황녀는 잠시 그 호칭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여기서는 전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무엇이라 부르면 됩니까?"
"아리아."
카일은 눈을 조금 좁혔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엘레노아는 공식 이름입니다. 제국 사절단의 문서에 쓰이는 이름이죠.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아리아라고 부릅니다."
"제가 가까운 사람입니까?"
"아직은 아니죠."
아리아는 너무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 밤이 지나면 서로의 목숨값 정도는 계산할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은 그 말에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목숨값.
전장에서 가장 흔하고도 가장 무거운 말.
카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리아 님."
"님도 빼도 됩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왜죠?"
"밖에 기사들이 있습니다."
아리아는 잠시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작고 짧은 웃음이었다.
"생각보다 현실적이군요."
"현실적인 사람이 오래 삽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요."
그녀는 종탑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아래로 아카데미의 불빛이 보였다. 멀리 왕도의 거리도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알고 있었다.
불빛이 많을수록 숨을 그림자도 많다.
아리아는 한동안 왕도 쪽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제 저를 구해 준 것에 대해 먼저 감사해야겠죠."
"루시아가 막았고, 이리스가 길을 만들었고, 핀이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암살자를 베었죠."
카일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리아는 그 점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필요 이상으로 겸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공을 혼자 가져가지도 않는다.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는 어제 죽을 뻔했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황족으로 태어난 뒤로 그런 일은 드물지 않았어요. 독이 든 차, 말 안장에 숨겨진 바늘, 침실 창문 아래에서 발견된 암살자. 어린 시절부터 죽음은 제 일과표에 종종 끼어 있었습니다."
카일은 조용히 들었다.
왕족의 삶이 화려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권력 근처에는 늘 칼이 있다. 전장에서는 적이 앞에서 달려오지만, 궁정에서는 미소 뒤에 숨어 온다.
아리아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어제 일은 달랐습니다. 단순히 저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요."
"혼란을 만들려 했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아리아의 눈이 그를 향했다.
"역시 보았군요."
"암살자 일부가 군중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황녀만 노렸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맞아요. 그들은 제가 죽든 살든, 왕도 한복판에서 제국 황녀가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아리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전쟁의 불씨가 됩니다."
전쟁을 원하는 자들
바람이 종탑 사이를 지나갔다.
낡은 종이 아주 작게 울렸다.
웅—.
마치 멀리서 전쟁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일은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왕국과 제국 사이의 전쟁 말입니까?"
"예."
아리아는 품에서 작은 서류 묶음을 꺼냈다. 봉투나 인장이 없는, 손바닥만 한 종이들이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카일에게 건넸다.
카일은 받아 읽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국경 지대의 소규모 충돌. 사라진 보급 물자. 서로의 군복을 입은 약탈자. 확인되지 않은 명령서. 왕국 귀족이 제국 상단을 습격했다는 소문. 제국 장교가 왕국 마을을 불태웠다는 증언.
하나하나는 작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모아 놓고 보니 방향이 보였다.
누군가가 양쪽을 조금씩 밀고 있었다.
마치 화덕에 장작을 넣듯이.
"최근 석 달 사이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아리아가 말했다.
"왕국에서는 제국이 남쪽 국경을 넘보려 한다고 믿기 시작했고, 제국에서는 왕국이 북부 귀족들을 선동해 반란을 만들려 한다고 의심합니다."
"실제로는 아닙니까?"
"완전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죠. 정치라는 건 언제나 더럽고, 국경 근처 귀족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로의 주머니를 털려 합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깔끔합니다. 원한이 쌓이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요. 마치 누군가가 양쪽의 분노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카일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정확히 계산된 분노.
그 말은 그의 기억 속 깊은 곳을 건드렸다.
전생의 대전쟁.
왕국과 제국이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았고, 북부 전선은 지옥이 되었다. 처음에는 국경 분쟁이었다고 했다. 다음에는 외교 사절 피살 사건이 터졌고, 그다음에는 보복전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누구도 멈출 수 없었다.
용병단은 그 틈에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카일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그때 그는 몰랐다.
전쟁은 그냥 터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들이 싸우고, 귀족들이 욕심을 부리고, 병사들이 끌려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처음부터 장작을 쌓고 있었다면?
'전생의 전쟁도…… 계획된 것이었나?'
가슴 안쪽에서 용의 심장 조각이 묵직하게 뛰었다.
라그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가능성이 있다. 큰 전쟁은 마왕군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원한, 죽음, 공포. 그런 것들은 어둠의 힘을 키우지.
카일은 종이를 움켜쥐었다.
전생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불타는 보급 창고. 엉뚱한 시간에 도착한 퇴각 명령. 갑자기 사라진 지원군. 서로 다른 군대가 같은 잘못된 정보를 믿고 움직이던 날들.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원래 엉망이니까.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엉망 속에도 손길이 있었을지 모른다.
"당신 표정이 변했군요."
아리아가 말했다.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비슷한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서요?"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전생을 말할 수는 없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절반만 말했다.
"전장에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리아는 그 대답을 곱씹듯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상합니다, 카일."
"자주 듣습니다."
"열여섯 살 학생처럼 보이지 않아요."
"노안이라는 뜻입니까?"
아리아는 아주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긴장된 공기가 조금 풀렸다.
하지만 아리아의 눈빛은 곧 다시 날카로워졌다.
"어제 암살자가 죽기 전 말했죠. 흑기사가 왕도에 있다고."
카일의 눈이 가라앉았다.
"들으셨습니까?"
"가까이에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제 정보망에도 그 이름이 걸려 있었습니다."
"흑기사의 정보가 있습니까?"
카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검집에 닿았다.
아리아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위험할 만큼은 있어요."
"말해 주십시오."
"그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카일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짜 정보는 없다.
용병단에서 가장 먼저 배운 법칙이었다.
황녀의 제안
아리아는 품에서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이번 종이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카일이 보기에 그것은 그냥 종이가 아니었다. 표면에 아주 얇은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계약서.
마법 계약의 일종이었다.
아리아는 그것을 펼쳐 보였다.
"저는 왕국과 제국 사이의 전쟁을 막고 싶습니다."
"황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 아닙니까?"
"아니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국 내부에는 전쟁을 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왕국에도 마찬가지겠죠. 전쟁은 누군가에게 지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금광입니다. 무기를 파는 자, 영지를 넓히려는 자, 정적을 전장으로 보내려는 자."
카일은 그 말을 잘 알았다.
용병단도 전쟁에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말은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서 있었다.
아리아는 계속 말했다.
"저는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제가 섣불리 나서면 제국은 제가 왕국 편에 섰다고 의심할 겁니다. 왕국은 저를 제국의 첩자로 볼 테고요."
"이미 그렇게 보는 자들도 있겠군요."
"많죠."
그녀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제게 필요한 건 공식 기록에 없는 칼입니다. 왕국 귀족도 아니고, 제국 기사도 아니며, 아카데미 안에서 움직일 수 있고, 마왕군의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
카일은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저를 쓰겠다는 뜻입니까?"
"손잡자는 뜻입니다."
아리아는 바로잡았다.
"당신은 단순히 쓰일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라그나가 속으로 킬킬거렸다.
—황녀의 눈이 나쁘지 않군.
카일은 무시했다.
"제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리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생겼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전장에서는 보상이 불명확한 명령이 제일 위험합니다."
"그럼 명확하게 말하죠."
아리아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첫째. 제 정보망을 통해 흑기사와 마왕군 잔당의 단서를 제공합니다. 왕국 안에서 제국 사절단만 접근할 수 있는 정보도 있고, 국경 너머에서 들어오는 소식도 있습니다."
카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흑기사.
전생에서 자신을 죽인 적. 이번 생에서도 계속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
아리아는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둘째. 당신과 당신 동료들의 신분을 보호합니다. 어제 일로 귀족들과 왕실, 제국 사절단이 모두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는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고, 누군가는 위험인물로 묶어 두려 할 겁니다."
"이미 늦은 것 아닙니까?"
"완전히 늦진 않았습니다. 적어도 누군가가 당신을 멋대로 체포하거나, 정치적 증언대에 세우거나, 암살 사건의 책임을 떠넘기는 건 막을 수 있어요."
핀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루시아의 금 간 방패도.
이리스가 계산하던 배상금 장부도.
카일 혼자라면 위험을 감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리아는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셋째. 필요할 때 당신에게 임시 신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제국 사절단의 협력자, 혹은 왕국 외교 자문단의 보조원 같은 이름으로요. 이름은 우습지만, 문 하나쯤은 열 수 있습니다."
"문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습니까?"
"정치판에서 문 하나는 성문보다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카일은 그 말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전장에서는 성문을 부수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정치판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으면 칼을 뽑기도 전에 죽는다.
아리아는 계약서를 카일 쪽으로 내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네 가지입니다."
카일은 조용히 들었다.
"첫째. 당신이 마왕군 잔당이나 흑기사의 흔적을 발견하면 제게 알릴 것."
"가능합니다."
"둘째. 왕국과 제국의 전쟁을 부추기는 증거를 찾는 데 협력할 것."
"방법은?"
"아카데미, 귀족 사교계, 국경 파견 임무. 앞으로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에서 단서를 모으면 됩니다."
카일은 북부 전선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곧 가게 될지도 모르는 곳.
"셋째. 제 이름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을 것. 우리가 손잡았다는 사실은 극소수만 알아야 합니다."
"그건 서로에게 필요하겠군요."
"맞아요."
아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막 조건을 말했다.
"넷째. 제가 잘못된 길로 가면, 막아 주세요."
카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조건은 의외였다.
"무슨 뜻입니까?"
아리아는 난간 밖 왕도의 불빛을 보았다.
"권력은 사람을 쉽게 변하게 합니다. 저는 전쟁을 막겠다고 말하지만, 언젠가 전쟁을 이용하는 편이 더 빠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편이 더 큰 희생을 막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죠."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 저를 막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국 신하들은 제게 충성하고, 왕국 귀족들은 저를 이용하려 들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적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을 뽑을 것 같군요."
카일은 잠시 생각했다.
그건 칭찬일까.
아마도 칭찬일 것이다.
"황녀를 상대로 칼을 뽑으면 반역 아닙니까?"
"그래서 비밀 계약이죠."
아리아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카일은 어이가 없어졌다.
라그나가 유쾌하게 웃었다.
—마음에 든다. 저 황녀, 생각보다 배짱이 있군.
카일은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마법 계약은 신중해야 한다. 잘못 맺으면 목숨이 묶인다. 특히 왕족과의 계약은 칼보다 날카롭다. 보이지 않는 줄이 손목에 감기고, 어느 순간 목을 조일 수 있다.
하지만 거절하면?
흑기사의 단서를 놓친다. 마왕군 잔당의 움직임을 왕국 안에서만 쫓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생의 대전쟁이 다시 벌어지는 것을 눈 뜨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이름 없는 막내 용병으로.
이번 생에도 같은 지옥이 반복된다면, 회귀한 의미가 없다.
카일은 물었다.
"제 조건도 있습니다."
아리아의 눈이 빛났다.
"말하세요."
"제 동료들을 판에 올리지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미끼나 협박 수단으로 쓰면 계약은 끝입니다."
아리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도 물러서지 않았다.
종탑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래에서는 야간 순찰 기사들의 발소리가 멀리 지나갔다.
마침내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단, 그들이 스스로 끼어드는 경우는 예외로 하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제 봤으니까요."
그녀는 살짝 웃었다.
"방패 든 학생은 특히 막기 어려워 보이더군요."
"루시아는 실제로 잘 막습니다."
"그 뜻이 아니었지만, 맞는 말이네요."
카일은 두 번째 조건을 말했다.
"마왕군의 정보는 숨기지 마십시오. 정치적으로 불리하더라도."
"그 정보가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어도요?"
"이미 위험합니다."
아리아는 그 대답을 듣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카일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면, 제 방식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그 방식이 무엇이죠?"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무섭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리아의 표정은 오히려 만족스러워 보였다.
"동의합니다."
피 한 방울의 서명
아리아가 계약서 위에 손을 얹자, 비어 있던 종이에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잉크가 아니라 빛이었다.
문장은 길지 않았다. 양쪽이 방금 나눈 조건들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법 계약은 이상한 수식어를 싫어한다. 뜻이 모호하면 계약이 뒤틀리기 때문이다.
카일은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었다.
아리아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보다 신중하군요."
"계약서는 적보다 더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줬나요?"
"임금을 떼먹던 용병대장들이요."
아리아는 웃을 듯 말 듯한 얼굴이 되었다.
"실전적인 교육이었겠네요."
"매우 실전적이었습니다."
계약서의 마지막 줄에는 서명 방식이 적혀 있었다.
피 한 방울.
카일은 망설이지 않고 손끝을 살짝 베었다. 붉은 피가 맺혔다. 용의 심장 조각 때문인지 피 안쪽에 아주 희미한 금빛이 스쳤다.
아리아의 눈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카일은 피를 계약서 아래쪽에 떨어뜨렸다.
아리아도 작은 은침으로 손끝을 찔렀다. 황족의 피는 특별한 빛이 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평범하게 붉었다. 다만 피가 종이에 닿는 순간, 계약서 전체가 은은한 은빛으로 번졌다.
두 사람의 피가 글자 사이로 스며들었다.
계약서가 한 번 작게 타올랐다.
불꽃은 뜨겁지 않았다. 종이는 재가 되지 않고, 빛으로 흩어져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카일의 손등에, 하나는 아리아의 손등에 스며들었다.
잠시 후 카일의 손등에 작은 문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검과 별이 겹친 모양.
아리아의 손등에도 같은 문양이 생겼다.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 순간 카일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비밀 계약 체결: 황녀 아리아
계약 유형: 상호 협력. 주요 목표: 전쟁 조장 세력 추적, 마왕군 잔당 정보 확보. 보상: 고급 정보망 접근 권한 일부 개방, 신분 보호 효과, 특수 임시 신분 발급 가능. 경고: 정치적 위험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새로운 흐름이 열립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단순한 학생이 아닙니다.
카일은 마지막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더 이상 단순한 학생이 아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학생이면 수업만 들으면 된다. 시험을 보고, 숙제를 하고, 가끔 문제아 반의 적자를 걱정하면 된다. 하지만 이제 그는 왕국과 제국, 황녀와 흑기사, 마왕군 잔당이 얽힌 판 위에 발을 올렸다.
전장보다 복잡한 판이었다.
칼로 베어도 피가 나오지 않는 적들이 있을 것이다.
웃으면서 등을 찌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카일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전생의 지옥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아리아가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제 첫 번째 정보를 드리죠."
카일은 눈을 들었다.
"흑기사에 대한 정보입니까?"
"일부는요."
아리아는 종탑 벽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암살자들이 사용한 검은 불꽃. 제국 동부 기록에 비슷한 힘이 등장합니다. 이름은 '서리 그림자'. 불꽃처럼 보이지만 열을 빼앗고, 죽은 자의 마나를 묶어 움직이게 하는 힘이죠."
"마왕군의 힘입니까?"
"공식 기록에는 금지된 사령술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 비밀문서에는 다르게 적혀 있어요. 마왕의 일곱 장수 중 하나가 쓰던 권능의 잔재라고."
라그나의 기척이 낮게 가라앉았다.
—서리 그림자라. 기억난다. 마왕의 오른팔은 아니지만, 까다로운 놈이었다. 죽음을 얼려서 무기로 삼는 족속.
카일은 속으로 물었다.
'흑기사가 그 힘을 이어받았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 힘을 먹은 무언가일 수도 있다.
별로 좋은 답은 아니었다.
아리아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 왕도 서쪽 빈민가에서 비슷한 검은 서리가 발견되었습니다. 공식 보고서는 화재 사고로 처리됐지만, 현장에는 불탄 흔적보다 얼어붙은 흔적이 많았어요."
"사망자는?"
"열세 명. 모두 신원 불명으로 처리됐습니다."
카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신원 불명.
그 말은 대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생의 용병 동료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았다. 죽으면 이름이 아니라 숫자가 되는 사람들.
"왜 제게 바로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오늘 계약하기 전까지는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카일은 감정적으로 따지지 않았다.
"그곳을 조사해야겠습니다."
"이미 예상했습니다."
아리아는 작은 금속패 하나를 건넸다. 표면에는 제국 문장이 아닌, 평범한 상단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왕도 서쪽에 '푸른 등불 여관'이 있습니다. 그곳 주인에게 이 패를 보이면 안내인을 붙여 줄 겁니다. 제 사람입니다."
카일은 패를 받아 품에 넣었다.
"언제 가면 됩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어제 일 때문에 왕도 전체가 예민합니다. 오늘 밤 움직이면 오히려 눈에 띕니다."
"그럼?"
"사흘 뒤. 그전에 저는 사절단 내부의 배신자를 확인해야 합니다."
카일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배신자가 있습니까?"
"어제 제 동선은 극비였습니다. 그런데 암살자들은 정확히 제가 문제아 반 매점 앞에 도착할 때를 노렸죠."
아리아는 차갑게 웃었다.
"제 곁에도 구멍이 있습니다."
카일은 종탑 아래를 떠올렸다.
근위 기사들.
그중 누군가일 수도 있고, 시종일 수도 있고, 사절단의 문관일 수도 있다.
정치판은 역시 더럽다.
전장에서는 적이 갑옷을 입고 온다. 정치판에서는 아군의 옷을 입고 온다.
"조심하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아리아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걱정해 주는 건가요?"
"계약 상대가 죽으면 곤란합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남았다.
"저도 같은 말을 해야겠네요. 조심하세요, 카일. 당신은 이미 누군가에게 너무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늦은 조언입니다."
"알아요."
아리아는 종탑 밖 왕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살아남으세요. 저는 죽은 사람과 계약을 유지할 취미가 없습니다."
카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은 예전보다 무거웠다.
이번 생에서는 정말로 그랬다.
판 위의 말이 아니라 손
카일이 종탑을 내려왔을 때, 기사들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경계와 의심, 그리고 조금의 인정.
카일은 그들 사이를 지나 정원으로 걸어갔다.
밤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왔다.
시원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뜨거웠다.
전쟁을 조장하는 세력.
왕국과 제국을 서로 물어뜯게 만들려는 자들.
흑기사.
서리 그림자.
왕도 서쪽 빈민가의 열세 명.
그리고 전생의 대전쟁.
모든 것이 하나의 끈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아직 매듭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끝에 닿는 감각은 분명했다.
카일은 멈춰 서서 밤하늘을 보았다.
전생의 그는 판 위의 말이었다.
용병대장이 가라면 갔고, 귀족이 돈을 주면 싸웠고, 왕들이 전쟁을 벌이면 그 아래에서 죽었다. 왜 싸우는지 묻지 않았다. 물어도 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그는 이제 누군가가 움직이는 말이 아니라, 판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아니, 가능하다면 판 자체를 뒤엎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라그나가 말했다.
—표정이 무겁군.
'일이 커졌습니다.'
—처음부터 컸다. 네가 늦게 인정했을 뿐이지.
카일은 부정하지 못했다.
라그나는 이어 말했다.
—정치판은 검술과 다르다. 빠르게 베는 놈보다 오래 숨기는 놈이 이긴다.
'드래곤도 정치에 대해 압니까?'
—드래곤 둥지 근처에 왕국 세 개가 서로 조공 순서를 두고 백 년 동안 싸운 적이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셋 다 불태우겠다고 하자 협상하더군.
'참고가 안 됩니다.'
—가끔은 참고가 된다.
카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정원 덤불 쪽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카일의 손이 즉시 검자루로 갔다.
"나와."
덤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핀이 양손을 든 채 나왔다.
"저, 저예요! 베지 마세요!"
그 뒤로 루시아가 기어 나오듯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이리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
카일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혼자 오라고 했습니다."
이리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넌 혼자 갔고,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어. 조건 위반은 아니야."
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계속 이건 위험하다고 말했는데요. 둘이 너무 자연스럽게 덤불로 들어가서……."
루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걱정돼서 왔어!"
카일은 말문이 막혔다.
전장에서는 명령 불복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대신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따뜻해졌다.
"무슨 일 있었어?"
루시아가 물었다.
카일은 잠시 고민했다.
계약 내용을 전부 말할 수는 없다. 아리아의 이름을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완전히 숨기는 것도 옳지 않다.
그들은 이미 같은 전장에 서 있었다.
카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국과 제국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핀의 얼굴이 굳었다.
"전쟁이요?"
이리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제 습격이 그 불씨였구나."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기사와 마왕군 잔당이 그 일에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루시아는 방패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럼 막아야지."
말은 너무 간단했다.
하지만 그 간단함이 때로는 사람을 움직인다.
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는 전쟁 같은 건 잘 몰라요. 솔직히 싸움도 아직 무섭고요. 그런데…… 전쟁 나면 사람들이 많이 죽는 거죠?"
"많이 죽습니다."
카일은 거짓으로 안심시키지 않았다.
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저도 도울게요. 안 무서워서가 아니라, 무서우니까요.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나면 더 무서울 것 같아서요."
이리스가 팔짱을 꼈다.
"전쟁이 나면 돈도 엉망이 돼. 물가가 뛰고, 보급이 끊기고, 평민들이 제일 먼저 굶어. 귀족들은 명예니 국익이니 떠들겠지만, 결국 계산서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받지."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런 계산서는 사양이야."
루시아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나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다치는 건 싫어. 그러니까 막을래."
카일은 세 사람을 보았다.
정치판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스스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동료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험하니 물러서라고 말해도, 옆에서 같이 욕하며 걸어오는 사람들.
카일은 천천히 말했다.
"앞으로 위험해질 겁니다. 어제보다 더 복잡하고, 던전보다 더 지저분할 수도 있습니다."
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숙제도 많아지나요?"
이리스가 그를 보았다.
"지금 그게 걱정이야?"
"위험과 숙제가 동시에 오면 너무 힘드니까요."
루시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맞아."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숙제는 나눠서 하면 됩니다."
핀의 눈이 촉촉해졌다.
"카일……."
이리스가 바로 끼어들었다.
"검술 숙제 말고 이론 숙제는 네가 해."
핀의 감동이 빠르게 식었다.
라그나가 폭소했다.
밤의 정원에 아주 작은 웃음이 번졌다.
잠깐이지만, 카일은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전쟁을 막겠다는 말은 너무 컸다. 흑기사를 쫓겠다는 말은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 사람이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 그 모든 무게를 조금 덜어 주었다.
검은 투구의 시선
같은 시각, 왕도 서쪽의 버려진 예배당.
무너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달빛이 흘러들었다. 먼지 쌓인 바닥에는 오래된 성인의 조각상이 쓰러져 있었고, 제단 위에는 검은 서리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검은 망토를 걸쳤고, 오른팔은 얼어붙은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어제 축제장에서 도망친 암살자 중 하나였다. 교수들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유일한 자.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고 안도하지 못했다.
예배당 중앙에 검은 갑옷의 기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투구.
얼굴이 보이지 않는 틈 사이로 붉은 빛이 아주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흑기사.
암살자는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죄송합니다. 황녀 암살은 실패했습니다. 학생들이…… 예상보다 강했습니다."
흑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오히려 목을 조였다.
암살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특히 카일이라는 학생이—"
그 순간 흑기사의 투구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암살자는 말을 멈췄다.
예배당 안의 온도가 떨어졌다. 바닥의 서리가 조금 더 넓게 번졌다.
흑기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름을 알고 있다."
낮고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 아이는 죽음에서 돌아온 냄새가 난다."
암살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감히 묻지 않았다.
흑기사는 제단 위에 놓인 깨진 가면 조각을 바라보았다. 어제 광대 암살자가 쓰고 있던 가면과 같은 모양이었다.
"황녀는?"
"비밀리에 움직이기 시작한 듯합니다. 사절단 내부에서도 동요가 있습니다."
"좋다."
암살자는 고개를 번쩍 들 뻔했다.
좋다?
실패했는데?
흑기사는 그 의문을 읽은 듯 말했다.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손이 그것을 덮으려 들겠지. 손이 많아지면, 누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보인다."
그는 천천히 예배당 문 쪽으로 걸었다.
"황녀가 움직이면 제국이 흔들린다. 학생이 움직이면 아카데미가 흔들린다. 왕국은 의심하고, 귀족들은 계산한다."
흑기사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전쟁은 칼로 시작되지 않는다. 의심으로 시작된다."
암살자는 몸을 떨었다.
흑기사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카일을 지켜봐라. 죽이지 마라. 아직은."
"예, 주군."
"그는 자신이 판에 올라왔다고 생각하겠지."
투구 안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판은 이미 오래전에 깔렸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다.
예배당 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검은 서리가 조용히 왕도 아래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수업은 정치학
다음 날 아침, 카일은 평소처럼 수업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평소처럼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이 이미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귀족 학생들은 그를 보면 속삭였다. 어떤 학생은 존경하는 눈빛을 보냈고, 어떤 학생은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족을 구한 학생. 마왕군 잔당을 베어 낸 학생. 문제아 반의 임시 반장.
소문은 전염병보다 빨랐다.
핀은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걸었다.
"사람들이 너무 쳐다봐요."
이리스가 말했다.
"익숙해져."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요."
루시아는 오히려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
"루시아, 누구한테 인사하는 거야?"
"쳐다보는 사람들한테!"
핀은 더 깊이 책 뒤로 숨었다.
카일은 교실 문 앞에서 멈췄다.
문득 상태창의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은 더 이상 단순한 학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실 안에서는 여전히 출석을 불렀고, 교수는 과제를 냈으며, 학생들은 졸았다. 세상은 아무렇지 않은 척 굴러갔다. 그 점이 오히려 무서웠다.
전쟁도 그렇게 온다.
처음에는 모두가 일상인 척한다. 오늘도 빵을 사고, 숙제를 걱정하고, 축제 적자를 계산한다. 그러다 어느 날 국경에서 불이 오르고, 다음 날 징집 명령이 붙고, 그다음 날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
카일은 자리에 앉으며 주먹을 쥐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않는다.
브란델 교수가 교단에 올라왔다. 그는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카일을 보고 아주 작게 눈썹을 올렸다. 아마도 밤의 회동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칠판에 큼직하게 글씨를 썼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교실이 술렁였다.
핀은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수업 주제 너무 시의적절한데요……."
이리스가 낮게 말했다.
"교수님, 분명 알고 하시는 거야."
루시아는 손을 들었다.
브란델 교수가 그녀를 가리켰다.
"루시아."
"싸우고 싶어서요?"
교실 몇몇 학생이 웃었다.
브란델 교수도 피식 웃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싸우고 싶은 사람만으로는 전쟁이 안 된다. 싸워도 된다고 믿는 사람, 싸우면 이득이라고 계산하는 사람, 싸우지 않으면 손해라고 겁먹는 사람이 필요하지."
그의 시선이 잠깐 카일에게 닿았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가 그 믿음과 계산과 공포를 조종한다."
카일은 칠판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전생에서는 한 번도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답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답 뒤에 숨어 있는 손을 잘라 내야 한다.
카일은 낡은 검을 무릎 옆에 세워 두었다.
라그나가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싸움이 시작되는군.
카일은 속으로 대답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수업 같습니다.'
—정치학 수업 말이냐?
'예.'
—그럼 낙제하지 마라. 낙제하면 나라가 불탄다.
카일은 앞을 보았다.
브란델 교수의 목소리가 교실을 채우고, 학생들은 각자 다른 표정으로 칠판을 바라보았다. 아직 누구도 몰랐다. 이 평범한 수업이, 곧 왕국 전체를 흔들 사건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카일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막내 용병이었던 그는 전장에서 죽었다.
열여섯 살 학생으로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학생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더 큰 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왕국과 제국.
황녀와 흑기사.
마왕군과 전생의 대전쟁.
모든 실이 하나씩 그의 손끝에 걸리고 있었다.
카일은 그 실을 놓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는 끌려가지 않는다.
이번에는 자신이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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