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도 조용할 수 없는 반
왕립 아카데미의 치유동은 평소보다 세 배는 시끄러웠다.
원래 치유동이란 조용해야 하는 곳이다. 다친 학생들이 누워 있고, 치유사들이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며, 창가에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허브 향이 은은하게 퍼져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가 진짜 봤다니까! 해골이 검 들고 달려왔다고!"
"초급 던전이라며! 초급이 원래 뼈다귀까지 나와?"
"나는 귀환 팔찌 눌렀는데 안 나가졌어. 그 순간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어."
"야, 너 울었잖아."
"눈에 먼지가 들어간 거다!"
치유동 복도는 던전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들의 무용담과 변명과 울먹임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팔에 붕대를 감고도 자기가 해골 세 마리를 쓰러뜨렸다고 떠들었고, 누군가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다시는 던전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카일은 침대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군.'
학생들이 너무 떠들어서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괜찮았다. 시끄럽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다. 전장에서는 조용한 막사가 제일 무섭다. 말하던 놈들이 사라졌다는 뜻이니까.
카일의 침대 옆에는 루시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손목에 감긴 붕대를 신기하다는 듯 만지작거렸다.
"나 붕대 감은 거 처음이야."
이리스가 옆 침대에서 책을 펼친 채 말했다.
"자랑할 일은 아니야."
"그래도 뭔가 모험가 같지 않아?"
"모험가는 붕대 감은 걸 자랑하다가 다음 모험에서 더 크게 다쳐."
핀은 침대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아직도 던전 안에 반쯤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앞으로 모험가가 되지 않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원래 모험가가 되고 싶었습니까?"
"아뇨."
"그럼 목표 달성입니다."
핀은 잠시 생각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이리스가 책 너머로 카일을 보았다.
"너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위로하는구나."
"효과가 있었습니다."
"기묘하게 있어서 더 싫어."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밝았다. 던전 중심부에서 봉인 수호자를 막아 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카일은 알았다. 루시아도 무서웠을 것이다. 이리스도, 핀도 마찬가지다.
다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일단 웃을 자격이 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브란델 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한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다시 찻잔을 들고 있었다.
카일은 찻잔을 보고 안심했다.
'아카데미가 아직 망하지는 않았군.'
브란델 교수는 네 사람을 훑어보았다.
"전원 상태는?"
루시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멀쩡합니다!"
이리스가 말했다.
"저 애는 기준에서 빼세요. 방패로 수호자 팔을 맞고도 '조금 저리다'고 한 애니까요."
핀은 이불 속에서 손만 살짝 들었다.
"저는 육체적으로는 멀쩡합니다. 정신은 잠시 외출했습니다."
브란델 교수는 카일을 보았다.
"너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너희 용병 출신들은 왜 늘 '살아 있으면 정상'이라는 식이냐?"
카일은 잠시 멈칫했다.
전생의 버릇이 튀어나왔다.
"……가벼운 마나 피로입니다."
브란델 교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벼운 마나 피로라. 봉인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던전 중심부를 찢고, 학생들을 구출한 뒤에 나온 진단치고는 너무 얌전하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으면 보통 복권을 맞히지, 봉인 던전 보스를 찌르지는 않는다."
이리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말에 동의하기 싫은데, 이번엔 맞는 말이에요."
브란델 교수는 서류를 펼쳤다. 종이 위에는 던전 내부 지도와 제어실 기록 일부가 적혀 있었다.
"공식 발표는 아직이다. 하지만 너희는 당사자니까 알아야겠지. 이번 던전 사고는 사고가 아니다."
치유동의 소음이 멀어지는 듯했다.
카일은 자세를 바로 했다.
"조작입니까?"
"그래."
브란델 교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어실 수정에 외부 간섭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라진 조교는 가짜 신분이었다. 기록에는 왕도 출신 평민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 출생 기록이 없다. 누군가 만들어 넣은 사람이다."
핀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아카데미 제어실에 가짜 사람이 들어왔다고요?"
"그래서 내가 지금 차를 세 잔째 마시고 있다."
"그게 심각한 상황의 기준인가요?"
"내 기준에서는 매우 심각하다."
루시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사람이 던전을 망가뜨린 거예요?"
"망가뜨린 게 아니라 열었다."
브란델 교수는 지도 중앙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카데미 지하의 초급 던전은 옛 봉인 던전 위에 만들어졌다. 이 사실은 극소수만 안다. 오래전 왕국이 던전을 완전히 폐쇄하려 했지만, 봉인 구조가 워낙 복잡해서 위에 훈련장을 덮는 방식으로 관리해 왔지."
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위험한 걸 학생 실습장으로 썼다고요?"
"봉인이 안정된 상태라면 위험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핀은 거의 본능처럼 말했다.
"이론상이라는 말 금지해 주세요……."
브란델 교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문제는 누군가 옛 봉인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거다. 귀환 팔찌 차단, 안내선 소거, 마물 봉인 일부 해제. 제어실 내부 권한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대 봉인문까지 건드린 흔적이 있어."
카일의 손이 주머니 쪽으로 살짝 움직였다.
검은 표식.
수호자가 무너진 자리에서 발견한, 투구 문양의 금속 조각.
브란델 교수의 눈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카일."
"예."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나?"
방 안의 공기가 조용해졌다.
루시아가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리스의 눈빛은 이미 '분명 뭔가 숨겼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핀은 이불을 더 끌어올렸다. 무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자세였다.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전생의 카일이라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용병단에서 막내는 비밀을 말할 권리가 없었다. 알고 있어도 입을 다물어야 살았다. 누구를 믿는 순간, 그 믿음이 칼이 되어 돌아올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혼자 살아남는 것과 모두를 살리는 것은 다르다.
카일은 주머니에서 검은 표식을 꺼냈다.
작은 금속 조각이 그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검은 투구 문양. 눈구멍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주위로 그림자처럼 번진 선이 새겨져 있었다.
브란델 교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리스가 물었다.
"그게 뭐야?"
카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문양을 보는 순간, 피 냄새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검은 투구의 문양
비가 내리던 전장.
진흙탕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진 용병들.
브람의 붉은 수염.
찢어진 깃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밟고 걸어오던 검은 갑옷.
카일의 숨이 아주 잠깐 멎었다.
흑기사는 말이 없었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랬다. 그는 명령도, 분노도, 조롱도 없이 사람을 베었다. 마치 수확철 농부가 익은 밀을 베듯이. 대검이 지나가면 갑옷도, 뼈도, 비명도 함께 갈라졌다.
카일은 그때 도망치지 못했다.
막내 용병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방패를 들어야 했고, 누군가의 퇴로를 열어야 했고, 누군가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은 투구였다.
그 투구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문양.
지금 손바닥 위에 놓인 것과 같은 모양.
"카일."
루시아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카일은 눈을 깜박였다. 손바닥에 힘이 너무 들어가 표식 가장자리가 살을 파고 있었다.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 피 나."
카일은 그제야 손을 펼쳤다. 손바닥에 붉은 선이 생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리스가 낮게 말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브란델 교수는 표식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평소의 느긋함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문양은 왕국 기록에 남아 있다."
핀은 작게 물었다.
"유명한 가문 문장인가요?"
"그랬으면 차라리 낫겠지."
브란델 교수는 표식을 내려놓았다.
"마왕군 잔당.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전투 조직의 흔적이다."
치유동 밖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던전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들이 서로 떠드는 소리였다. 그 밝은 소리가 이 방 안의 어둠과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루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마왕군이요? 마왕은 오래전에 사라졌잖아요."
"마왕은 사라졌다. 하지만 마왕을 따르던 자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브란델 교수는 창밖을 보았다.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평화를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은 칼을 보지 못하지. 마왕군 잔당은 패배 후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름을 바꾸고, 얼굴을 바꾸고, 때로는 사람인 척 살아왔다."
핀은 이불 속에서 거의 파묻히듯 말했다.
"사람인 척이요?"
이리스가 대신 물었다.
"마물이라는 뜻인가요?"
"마물도 있고, 인간도 있다. 권력에 미친 귀족, 금지된 힘을 탐한 마법사, 마왕군과 거래해 살아남은 배신자들. 잔당이라는 말은 편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지저분한 혼합물이다."
카일은 표식을 노려보았다.
마왕군 잔당.
전생에서도 그 이름은 종종 들었다. 하지만 카일 같은 막내 용병에게 중요한 건 누가 악당이냐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오늘 밥값을 받을 수 있느냐,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느냐였다.
흑기사가 누구 편인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따질 여유는 없었다.
그저 죽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서…….'
라그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낮게 울렸다.
—그 문양, 단순한 부대 표식이 아니다.
카일은 속으로 물었다.
'알고 있습니까?'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냄새다. 오래된 피, 오래된 맹세, 그리고 용의 힘을 갉아먹은 자들의 흔적.
카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용의 힘?'
라그나는 잠시 침묵했다. 평소 같으면 잘난 척부터 했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 침묵 때문에 오히려 더 불길했다.
브란델 교수가 카일을 바라보았다.
"표식을 어디서 찾았지?"
"봉인 수호자가 무너진 자리입니다."
"수호자 내부에 심은 건가."
교수는 턱을 쓸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단순히 학생들을 노린 테러가 아니다. 누군가 봉인 수호자를 깨워 용의 심장 조각을 회수하려 했다."
이리스가 카일을 흘겨보았다.
"그 조각은 지금 네 안에 들어갔고."
루시아가 놀라서 카일의 가슴 쪽을 보았다.
"아직 뜨거워? 빼야 해?"
핀은 진지하게 말했다.
"빼는 방법이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무서울 것 같은데요."
카일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문제는 없습니다."
이리스가 팔짱을 꼈다.
"아직이라는 말이 제일 문제야."
브란델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표식을 작은 천에 감쌌다.
"이건 내가 보관하겠다. 공식 조사에는 '정체불명의 금속 매개체'라고만 올릴 거다. 마왕군 잔당의 문양이라는 사실은 당분간 숨긴다."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다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카데미 안에 협력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학원.
하얀 탑, 푸른 정원, 수업 종소리, 맛없는 급식 수프, 과제 때문에 밤새는 학생들.
그 평범한 풍경 뒤에 적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카일은 창밖을 보았다. 햇빛을 받은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뛰고 있었다. 누군가는 목검을 휘두르고, 누군가는 공을 차며 웃고 있었다.
그 위에 아주 얇은 그림자가 덮인 것 같았다.
라그나가 싫어하는 이름
그날 밤, 카일은 기숙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브란델 교수의 지시로 특별 관리반 네 사람은 치유동 옆 임시 숙소에서 하루를 더 보내게 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안정 관찰이었다. 실제 이유는 보호 감시였다.
핀은 그 사실을 듣고 의외로 안심했다.
"감시라도 좋아요. 혼자 자는 것보단 낫죠."
이리스는 창문 잠금장치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 감시하는 사람이 적이면?"
핀은 침대에 앉다가 멈췄다.
"왜 그런 가능성을 말해요?"
"가능성이 있으니까."
"가능성 금지……."
루시아는 방 한가운데에 방패를 세워 두었다. 방패가 작지 않아서 마치 다섯 번째 동료처럼 보였다.
"혹시 누가 오면 이걸로 막을게."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잠결에 방패를 휘두르지는 마십시오."
"나 잠버릇 좋아."
이리스가 즉시 말했다.
"어제 병실에서 베개를 벽까지 날렸어."
"그건 꿈에서 거미가 나와서……."
핀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거미 이야기 금지……."
평소라면 카일도 한마디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검을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임시 숙소 뒤편에는 작은 중정이 있었다. 달빛이 돌바닥 위에 희게 내려앉아 있었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멀리서 순찰 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낡은 검을 뽑았다.
검날은 여전히 볼품없었다. 이가 빠지고, 녹이 남아 있고, 손잡이 가죽도 낡았다. 하지만 카일은 이제 안다. 이 검 안에는 드래곤 라그나가 있다. 성격이 나쁘고, 말투도 나쁘고, 가끔 도움이 되는 존재.
"설명해 주십시오."
—명령인가?
"부탁입니다."
—부탁치고는 얼굴이 살벌하군.
"기분 탓입니다."
라그나는 낮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흑기사라고 했나. 네가 죽기 전 보았다는 검은 갑옷.
카일의 손이 굳었다.
"기억을 읽었습니까?"
—검을 잡은 순간 흘러들어온 조각들이 있다. 네가 감추려 해도, 죽음의 기억은 냄새가 강하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그나는 이어 말했다.
—그자는 단순한 마물이 아니다. 마물이라면 몸에서 나는 기운이 더 거칠고 단순했을 것이다. 네 기억 속 흑기사는 달랐다. 빈 껍데기 같았지만, 움직임은 지나치게 정교했다. 죽은 자도 아니고, 산 자도 아니다.
"그럼 뭡니까?"
—고대 계약자.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전생의 전장에서 용병들이 술에 취해 떠들 때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왕과 계약한 기사들. 죽지 않는 장수들. 영혼을 팔고 힘을 얻은 괴물들.
그때 카일은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허풍이 진짜였던 적은 너무 많았다.
라그나가 말했다.
—오래전, 마왕은 강한 자들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힘, 수명, 복수, 왕좌. 원하는 것을 주는 대신 영혼의 일부를 가져갔지. 계약자는 인간으로 남지만 인간에서 벗어난다. 죽음이 늦어지고, 고통이 무뎌지고, 명령에 묶인다.
"흑기사가 그런 자라고요?"
—네 기억과 오늘의 문양이 맞다면 그렇다. 더 나쁜 건, 그 문양이 단순히 마왕군 소속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일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또 나쁜 소식입니까?"
—좋은 소식도 있다.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쁜 소식만 말하지. 그 문양은 '그림자 계약'의 표식이다. 계약자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자신의 힘 일부를 표식에 심어 하수인을 조종하거나 봉인을 오염시킬 수 있다.
카일은 던전의 봉인 수호자를 떠올렸다.
검은 뼈와 돌 갑옷.
가슴에 박힌 용의 심장 조각.
그리고 수호자가 무너진 자리에 남은 표식.
"흑기사가 직접 온 건 아닐 수도 있군요."
—그렇다. 하지만 흔적을 남길 정도로 가까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네가 그 손가락을 잘라 버린 셈이지.
"비유가 마음에 안 듭니다."
—현실도 마음에 안 들 거다. 놈은 이제 널 알 가능성이 높다.
카일은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평화롭게 떠 있었다. 참 얄미울 정도로 평화로웠다.
전생에서 카일은 흑기사에게 죽었다. 그 죽음은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압도적이었다. 맞서 싸웠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벌레가 발에 밟힌 걸 두고 결투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 그 흑기사의 그림자가 아카데미까지 드리웠다.
카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지금입니까?"
—용의 심장 조각 때문일 수도 있고, 네가 회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회귀도 관련이 있습니까?"
—네 영혼은 한 번 죽음을 건넜다. 그런데 돌아왔다. 그것도 내가 깃든 검과 만나고, 용의 심장 조각을 품었다. 우연이라기엔 많이 쌓였지.
라그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리고 고대 계약자들은 그런 뒤틀림을 맡는다. 피 냄새를 맡은 짐승처럼.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학원 생활이 너무 어렵군요."
—네 기준의 학원 생활에는 봉인 수호자 토벌이 포함되나?
"입학시험부터 이상했습니다."
—그건 네가 이상한 거다.
카일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때 중정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검을 살짝 돌렸다.
"누구십니까?"
"우리."
이리스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는 루시아와 핀이 있었다. 핀은 얇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카일은 눈썹을 찌푸렸다.
"자야 합니다."
이리스가 팔짱을 꼈다.
"너는?"
"저는 잠깐 검을 점검하러……."
"검이랑 대화하던데."
카일의 말이 멈췄다.
루시아가 눈을 반짝였다.
"역시 그 검 살아 있어?"
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검도 귀신 들릴 수 있어요?"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불쾌하게 말했다.
—귀신이라니. 저 겁쟁이 꼬마의 표현력을 교육해야겠군.
카일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들었습니까?"
이리스가 말했다.
"전부는 아니고. 흑기사, 고대 계약자, 네가 죽었다는 말 정도."
"중요한 건 거의 다 들었군요."
"그러게. 숨어서 듣기엔 꽤 수확이 좋았어."
"당당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카일에게 다가왔다.
"카일, 너……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핀도 고개를 들었다.
"비유죠? 용병식 비유 같은 거죠? 시험 망하면 '죽었다'고 하는 그런……."
카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더는 혼자 숨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던전 안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루시아가 막지 않았다면, 이리스가 비추지 않았다면, 핀이 사슬을 쏘지 않았다면 카일은 봉인 수호자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전생의 카일은 혼자 버티다 죽었다.
이번 생의 카일은 혼자 살아남으려 하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는 검을 천천히 내렸다.
반쯤 털어놓은 진실
"전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카일의 첫마디에 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작부터 수상하네."
"하지만 필요한 만큼은 말하겠습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어줄게."
핀도 담요를 꼭 잡은 채 말했다.
"저도…… 너무 무서운 부분은 조금 부드럽게 말해 주세요."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나는 한 번 죽었다.
전장에서 흑기사에게 가슴을 꿰뚫렸다.
눈을 떠 보니 열여섯 살이었다.
이 낡은 검에는 드래곤이 깃들어 있고, 상태창이 보이며, 너희가 사는 이 평화로운 학원은 앞으로 여러 번 터질 예정이다.
그대로 말하면 핀은 기절하고, 루시아는 울지도 모르며, 이리스는 카일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그래서 카일은 가장 단단한 사실부터 꺼냈다.
"저는 예전에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이리스가 바로 반응했다.
"나이에 안 맞잖아."
"맞지 않습니다."
그 대답에 세 사람의 표정이 달라졌다.
카일은 계속 말했다.
"그곳에서 흑기사를 봤습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오늘 표식에 새겨진 것과 같은 문양을 가진 자였습니다. 저는 그자에게…… 죽을 뻔했습니다."
죽었다고 말하려다 멈췄다.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만도 아니었다.
이리스는 카일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는 영리했다. 카일이 말을 덜어 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던전에서 그 표식을 보고 흔들린 거구나."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흑기사가 널 다치게 했어?"
"그렇습니다."
"나쁜 사람이네."
루시아의 결론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이상하게 카일의 가슴을 누그러뜨렸다.
핀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질문해도 돼요?"
"하십시오."
"그 흑기사…… 우리도 만나게 되나요?"
카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라그나가 말한 고대 계약자.
던전 조작에 남은 그림자 표식.
마왕군 잔당.
아카데미 내부 협력자.
모든 조각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일은 천천히 말했다.
"가능성이 높습니다."
핀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능성 금지라니까요……."
이리스가 물었다.
"그럼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혼자 조사하다가 혼자 죽을 뻔하고, 나중에 '괜찮습니다'라고 할 생각?"
카일은 뜨끔했다.
"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루시아는 순수한 눈으로.
핀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리스는 '방금 스스로도 안 믿었지?'라는 눈으로.
카일은 말을 바꿨다.
"……앞으로는 최대한 공유하겠습니다."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우리도 정리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첫째, 던전 조작은 단순 사고가 아니고 마왕군 잔당과 관련 있다. 둘째, 흑기사라는 놈이 그 잔당의 핵심일 가능성이 있다. 셋째, 그놈은 고대 계약자라는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 넷째, 카일은 뭔가 더 숨기고 있지만 지금은 반쯤만 믿어 주기로 한다."
"넷째는 빼도 됩니다."
"못 빼."
루시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카일을 혼자 두지 않는 거네."
카일은 바로 반박했다.
"위험합니다."
"혼자 두는 게 더 위험해 보여."
루시아의 말에 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카일은 혼자 있으면 꼭 위험한 곳으로 걸어갈 것 같아요. 그것도 '확인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요."
이리스가 덧붙였다.
"그리고 확인만 하러 간 곳에서 보스를 잡겠지."
"매번 그러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그랬어."
카일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루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나 막을 수 있어. 이리스는 똑똑하고, 핀은 잘 보고, 카일은 이상한 걸 잘 알아."
핀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역할이 '잘 보는 사람'인 건 좋은데, 보는 대상이 너무 무서워요."
이리스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넌 봐야 해. 안 보면 우리가 떨어지거나 찔리거나 먹히거든."
"책임감이 너무 무거워요……."
카일은 세 사람을 보았다.
전생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거칠고, 시끄럽고, 욕을 많이 하고,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 등을 맡겼던 사람들. 그들은 이제 없다. 적어도 이 생에서는 카일만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새로운 동료들이 있었다.
방패를 든 루시아.
날카로운 눈의 이리스.
겁은 많지만 누구보다 정확히 보는 핀.
카일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위험한 일이 생기면…… 말하겠습니다."
이리스가 즉시 말했다.
"'생기면'이 아니라 '냄새가 나면' 말해."
루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위험해지기 전에."
핀은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낮에 말해 주세요. 밤에 들으면 잠을 못 자요."
카일은 조금 웃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무른 놈들끼리 잘 모였군.
카일은 속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오래 살 겁니다.'
라그나는 잠시 조용했다가 낮게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그림자가 남긴 다음 표식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는 겉보기에는 평소로 돌아왔다.
종이 울렸고, 학생들은 졸린 얼굴로 강의실을 향했다. 식당에서는 묽은 수프를 두고 불만이 터졌다. 누군가는 던전 실습이 취소될 거라며 기뻐했고, 누군가는 실습 점수는 어떻게 되는 거냐며 울상을 지었다.
학원은 강했다.
정확히는, 학생들은 생각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어제 죽을 뻔했어도 오늘 아침 수업은 온다. 과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교수는 인정사정이 없다.
브란델 교수는 특별 관리반을 강의실에 모아 놓고 말했다.
"오늘 수업은 휴식이다."
핀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요?"
"대신 보고서를 쓴다."
핀의 얼굴이 다시 죽었다.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역시 교수는 마물보다 잔인해."
브란델 교수는 못 들은 척 칠판에 크게 적었다.
던전 비상 상황 분석 보고서
루시아가 손을 들었다.
"그림도 그려도 돼요?"
"정확하면 된다."
"수호자 크게 그려도 돼요?"
"과장하지 마라."
"실제로 컸는데요?"
"그럼 크게 그려라."
핀은 종이를 받아 들고 진지하게 첫 줄을 썼다.
초급 던전은 믿으면 안 된다.
카일은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좋은 시작입니다."
이리스는 자기 보고서 첫 줄에 이렇게 썼다.
아카데미 안전 관리 체계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아주 많이.
브란델 교수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마 속으로 동의한 듯했다.
카일은 펜을 들고 잠시 멈췄다.
무엇을 써야 할까.
공식 보고서에 흑기사의 문양을 쓸 수는 없었다. 마왕군 잔당에 대한 내용도 브란델 교수가 막아 둔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던전 내부 구조, 마물 출현 지점, 귀환 팔찌 차단 시점, 봉인 수호자의 약점만 적었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서 펜이 멈췄다.
외부 간섭은 일회성으로 보기 어렵다.
카일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종이를 접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브란델 교수가 카일만 따로 불렀다.
"따라와라."
그가 데려간 곳은 아카데미 북쪽 기록탑이었다. 평소 학생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두꺼운 문을 지나고, 계단을 세 번 올라가고, 마법 잠금장치를 두 번 통과하자 작은 방이 나왔다.
방 안에는 오래된 책과 봉인된 상자들이 빼곡했다.
브란델 교수는 책상 위에 천으로 감싼 물건을 올려놓았다.
어제의 검은 표식이었다.
"밤새 분석했다."
카일은 표식을 바라보았다.
"결과는요?"
"표식 자체는 최근에 만들어진 물건이다. 길어야 한 달. 하지만 새겨진 술식은 아주 오래됐다. 최소 수백 년 전 방식이다."
"고대 계약자의 술식입니까?"
브란델 교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지?"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검이 알려 줬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미친 소리로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브란델 교수는 카일의 낡은 검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역시 평범한 검은 아니었군."
"믿으십니까?"
"내 나이쯤 되면 이상한 일을 너무 많이 봐서,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지 않게 된다."
그는 표식 옆에 작은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마법으로 떠오른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투구 문양 주변으로 가느다란 실 같은 술식이 뻗어 있었다.
"이 표식은 명령 전달용이다. 누군가 이걸 매개로 던전의 봉인을 오염시켰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무엇입니까?"
"명령이 완전하지 않다."
브란델 교수는 문양의 한쪽을 가리켰다.
"수호자를 깨우고, 심장 조각을 노린 건 맞다. 하지만 마지막 명령이 끊겨 있다. 마치 중간에 목표가 바뀐 것처럼."
카일의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용의 심장 조각이 반응하고 있었다.
라그나가 낮게 말했다.
—놈이 널 감지한 거다.
카일은 표정을 굳혔다.
브란델 교수가 그 변화를 보았다.
"짐작 가는 게 있나?"
"아마…… 제가 변수가 된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변수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표식 위의 검은 선이 꿈틀거렸다.
브란델 교수가 즉시 보호 마법을 펼쳤다. 책상 위로 투명한 막이 생겼다.
표식의 빈 눈구멍에 검은 빛이 맺혔다.
그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차갑고, 쇠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
"찾았다."
카일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빗소리 너머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던 흑기사.
죽음을 선고하듯 짧게 내뱉던 목소리.
브란델 교수의 얼굴이 굳었다.
"차단한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보호막이 표식을 압박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한 번 더 흘러나왔다.
"용의 심장…… 그리고 돌아온 영혼."
카일의 손이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라그나가 포효하듯 말했다.
—끊어라!
카일은 낡은 검을 뽑아 표식 위로 내리쳤다.
쩍!
검은 금속 조각이 둘로 갈라졌다. 검은 빛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브란델 교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금 그 목소리가…… 흑기사인가?"
카일은 대답했다.
"예."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브란델 교수는 그 손을 보았다가, 아무 말 없이 책상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진정제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내 거다."
교수는 병을 열어 냄새를 맡고 다시 닫았다.
"빌어먹을. 이건 차로 해결될 일이 아니군."
카일은 갈라진 표식을 바라보았다.
흑기사는 카일을 알아보았다.
정확히는, 돌아온 영혼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카일이 전생에서 도망치듯 얻은 두 번째 삶은 이제 더 이상 조용히 숨을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더는 혼자가 아니다
그날 저녁, 카일은 세 사람을 다시 중정으로 불렀다.
루시아는 방패를 들고 왔다.
이리스는 노트를 들고 왔다.
핀은 왜인지 베개를 들고 왔다.
카일이 물었다.
"베개는 왜 가져왔습니까?"
핀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무서운 이야기면 안고 들으려고요."
이리스가 작게 말했다.
"실용적이네."
카일은 짧게 웃었다. 그리고 낮에 기록탑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흑기사의 목소리, 표식의 술식, 돌아온 영혼이라는 말. 완전히 숨기지 않았다.
물론 회귀의 전부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피하지 않았다.
"저는 그 흑기사에게 한 번 패했습니다."
카일은 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압도적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루시아의 얼굴이 슬퍼졌다.
이리스는 입술을 다물었다.
핀은 베개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카일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혼자 피하려 했습니다. 그자의 흔적이 보이면 제가 처리하고, 여러분은 모르게 넘기고 싶었습니다."
이리스가 차갑게 말했다.
"멍청한 생각이네."
"압니다."
"생각보다 빨리 인정하네."
"던전에서 배웠습니다."
카일은 루시아를 보았다.
"제가 뛰어들 때 막아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루시아가 눈을 깜박였다.
카일은 이리스를 보았다.
"보이지 않는 길을 비춰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리스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카일은 핀을 보았다.
"그리고 제가 보지 못한 사슬을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핀은 베개 뒤로 얼굴을 숨겼다.
"칭찬은 좋은데 부담스러워요……."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부탁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대신 저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위험하면 말하고, 계획이 있으면 공유하고, 혼자 뛰어들기 전에 한 번은 멈추겠습니다."
이리스가 손가락을 들었다.
"한 번은 부족해. 세 번 멈춰."
"전장에서는 세 번 멈추면 죽습니다."
"여긴 학원이야."
"학원에서도 던전이 터졌습니다."
"그건…… 반박하기 어렵네."
루시아가 방패를 가슴 앞에 세웠다.
"나는 도와줄게. 카일이 무서워하는 사람이면, 같이 무서워하면 돼."
핀은 베개를 안은 채 중얼거렸다.
"같이 무서워하는 건 자신 있어요."
이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도와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하십시오."
"네가 또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안 괜찮아 보인다고 판단하면 강제로 쉬게 할 거야."
카일은 잠시 생각했다.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표식이나 이상한 목소리나 수상한 던전이나 살아 있는 검 같은 건 즉시 공유해."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발끈했다.
—살아 있는 검이라는 표현은 무례하다.
카일은 무시했다.
"알겠습니다."
핀도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도 조건 있어요."
"말하십시오."
"다음에 던전 들어갈 때는 간식 챙겨도 되나요? 배고프면 더 무섭더라고요."
카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입니다. 전장에서 식량은 생존입니다."
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럼 말린 과일도……."
이리스가 말했다.
"보고서 쓸 때도 그 집중력을 보여 줘."
핀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중정 위로 밤바람이 지나갔다.
카일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설프고, 시끄럽고, 아직 약점도 많았다. 하지만 던전 안에서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일은 낡은 검을 허리에 찼다.
흑기사의 그림자는 이미 다가오고 있다.
마왕군 잔당은 아카데미 안쪽까지 손을 뻗었다.
고대 계약자라는 이름은 아직 너무 크고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일은 더 이상 전생의 막내 용병이 아니었다. 혼자 죽음을 기다리던 소년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동료가 있다.
이번에는 먼저 알고 있다.
이번에는, 흑기사가 오기 전에 칼을 갈 수 있다.
그때 카일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메인 위협 확인: 흑기사의 그림자
분류: 고대 계약자 추정. 연관 세력: 마왕군 잔당. 현재 상태: 사용자 인식 완료.
권장 행동: 성장, 동료 확보, 정보 수집. 경고: 단독 행동 시 사망 확률 급상승.
카일은 마지막 줄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너까지 잔소리입니까?'
상태창은 친절하게 한 줄을 더 띄웠다.
필요한 잔소리입니다.
카일은 작게 웃었다.
루시아가 물었다.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리스가 바로 말했다.
"그 말도 금지어에 넣자."
핀은 베개를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카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은 여전히 깊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먼 곳, 왕도 지하의 오래된 석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투구의 빈 눈구멍 안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 회수는 실패했습니다. 용의 심장 조각은…… 아카데미의 학생에게 넘어간 듯합니다."
흑기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내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마침내 흑기사가 입을 열었다.
"실패가 아니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예?"
흑기사는 검은 장갑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튀었다. 그것은 용의 심장 조각이 남긴 공명의 흔적이었다.
"죽었던 영혼이 돌아왔다. 용이 그 곁에 있다. 심장은 그를 선택했다."
흑기사의 목소리에는 웃음도, 분노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를 살려 두어라."
"하지만 조각은—"
"그릇이 자라야 한다."
사내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흑기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석실 벽에 걸린 검은 깃발이 흔들렸다. 그 깃발에는 비어 있는 눈의 투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축제 때 움직인다."
그 한마디에 사내의 몸이 굳었다.
왕립 아카데미의 봄 축제.
수많은 귀족과 학생, 외부 손님이 몰려드는 날.
가장 밝고, 가장 시끄럽고, 가장 방심하기 쉬운 날.
흑기사는 어둠 속에서 낮게 말했다.
"그림자는 빛이 많을수록 짙어진다."
검은 불꽃이 흔들렸다.
그리고 왕도 위의 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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