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장 앞의 작전 회의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당일.
카일은 새벽부터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긴장해서가 아니었다. 옆방에서 누군가 밤새도록 왕국사를 외웠기 때문이다.
"초대 국왕 아르딘은 서력 삼백십이 년에…… 아니, 삼백십삼 년인가? 으아아!"
벽 너머에서 비명이 들렸다.
카일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필기는 망했군.'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전생의 카일은 왕국사를 외울 시간에 상처를 꿰맸고, 수학 문제를 풀 시간에 식량 배급을 계산했다. 마나 이론은 더 심했다. 마나는 몸 안에 흐르는 힘이라는데, 전생의 카일에게 몸 안에 흐른 것은 대개 피와 독한 술뿐이었다.
그래도 이번 생에는 상태창이 있었다.
카일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당일
권장 전략: 눈에 띄지 않게 합격하십시오. 세부 전략: 중상위권 성적 유지. 경고: 지나친 겸손은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상위권."
미라가 의자 위에서 망토를 걸치며 물었다.
"뭐가 중상위권인데?"
"오늘 제 목표요."
"네가?"
"그 반응은 뭡니까?"
미라는 카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낡은 검, 평범한 옷, 어딘가 평민 티가 나는 얼굴. 하지만 그 안쪽에는 사기꾼을 역으로 벗겨 먹고, 흑철석 가격 폭등을 맞히고, 귀족 도련님을 목검으로 눕힌 수상한 소년이 들어 있었다.
"넌 조용히 있으려고 하면 더 시끄러워져."
"오늘은 다릅니다."
카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급 검술만 쓸 겁니다. 기본 자세, 기본 베기, 기본 회피. 실력은 적당히 보여 주고, 귀족들 눈에는 안 띄게."
—하급 검술이라.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드래곤의 눈앞에서 그런 벌레 기어가는 기술을 쓰겠다고?
'벌레도 오래 살아남으면 강합니다.'
—그건 벌레가 아니라 바퀴벌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카일은 허리춤의 낡은 검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 진짜 힘을 드러내면 곤란했다. 귀족들은 강한 평민을 싫어한다. 교수들은 수상한 재능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정보상은 이야기를 팔고, 왕도는 소문을 키운다.
그러니 목표는 간단했다.
합격은 하되, 너무 빛나지 않기.
전장에서 살아남은 카일에게는 쉬운 일처럼 보였다.
문제는 세상이 카일에게 쉬운 일을 쉽게 허락한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필기시험은 칼보다 날카롭다
왕립 아카데미 시험장은 왕도 북동쪽에 있었다.
정문 앞은 축제처럼 붐볐다.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귀족 자제들은 하인의 도움을 받아 말끔한 제복을 정리했다. 평민 수험생들은 서류를 품에 안고 긴장한 얼굴로 줄을 섰다. 누군가는 기도를 했고, 누군가는 구석에서 마지막까지 책장을 넘겼다.
카일은 접수처에서 하르만 경의 이름을 댔다.
직원의 표정이 아주 잠깐 달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민을 돌멩이 보듯 하던 눈이, 오늘은 적어도 감자 정도는 보는 눈이 됐다.
"카일. 검은개 용병단 출신. 확인됐습니다."
직원이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시험표를 받으십시오. 분실하면 재발급 수수료가 있습니다."
"얼마입니까?"
"은화 한 닢입니다."
카일은 시험표를 두 손으로 받았다.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
미라는 시험장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울타리 너머로 카일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떨어지면 마구간으로 돌아가자."
"응원 맞습니까?"
"현실적인 응원."
카일은 한숨을 쉬며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는 필기였다.
긴 강의실에 수험생들이 앉았다. 책상은 반듯했고, 깃펜과 잉크가 놓여 있었다. 감독관이 문제지를 나눠 주자 강의실 전체에 종이 넘기는 소리가 파도처럼 퍼졌다.
카일은 첫 문제를 보았다.
"초대 국왕 아르딘이 북부 부족 연합과 맺은 조약의 명칭을 쓰시오."
카일은 멈췄다.
전생에서 북부 부족과 조약을 맺은 사람은 알았다. 그 조약이 깨져서 전쟁이 났고, 그 전쟁터에서 카일은 얼어 죽을 뻔했다.
하지만 명칭?
'이걸 왜 외우지? 깨질 조약이면 이름보다 깨지는 이유가 중요하지.'
그때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기억 보정 발동
관련 경험: 북부 전선 보급 임무, 술집 노병의 헛소리, 군용 지도 낙서. 추정 답안: 흰서리 조약.
카일은 눈을 빛냈다.
'너도 쓸모가 있구나!'
주의: 추정 답안입니다. 술 취한 노병의 발음이 불분명했습니다.
'불안하잖아.'
그래도 빈칸보다는 나았다.
수학 문제는 의외로 쉬웠다. 용병단 보급품을 나눠 본 사람에게 분수 계산은 생존 문제였다. 열 명이 먹을 빵을 열둘이 나눠 먹으면 한 사람 몫이 줄어든다. 그걸 틀리면 싸움이 난다. 싸움이 나면 누군가 코피를 흘린다. 그러니 수학은 중요했다.
마나 이론은 반쯤 감으로 풀었다.
라그나는 가끔 끼어들었다.
—틀렸다. 마나는 그렇게 얌전한 힘이 아니다. 인간 학자들은 불을 촛불만 보고 설명하는군.
'시험에는 인간 학자 답을 써야 해.'
—그럼 틀린 답을 맞는 답처럼 쓰는 시험인가?
'대체로 그렇지.'
카일은 적당히 답안을 채웠다.
필기시험이 끝났을 때, 그는 깨달았다.
검보다 종이가 더 무서울 때도 있다는 것을.
하급 검술의 배신
두 번째 시험은 실기였다.
수험생들은 넓은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모래가 곱게 깔렸고, 사방에는 교수와 조교들이 서 있었다. 귀족 후원자 몇몇도 높은 관람석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하르만 경도 있었다.
카일은 일부러 맨 뒤쪽에 섰다.
'조용히. 평범하게. 하급 검술만.'
실기 내용은 간단했다. 정해진 자세를 취하고, 목검으로 지정된 공격과 방어를 수행한다. 화려한 기술보다 기본기를 보는 시험이었다.
카일에게는 오히려 잘됐다.
기본기는 숨기기 쉽다. 너무 빠르지 않게 움직이고, 너무 강하게 치지 않고, 적당히 균형을 흔들면 된다.
"다음, 카일."
조교가 이름을 불렀다.
카일은 목검을 들고 중앙으로 나섰다.
관람석 한쪽에서 누군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이군. 베르딘을 이겼다는 평민."
"검이 아니라 운이 좋았겠지."
"옷 좀 봐. 아카데미가 아니라 마구간에서 바로 온 줄 알겠네."
카일은 무시했다.
무시는 전장에서 배운 값싼 방패였다. 꽤 튼튼했다.
조교가 말했다.
"기본 상단 베기. 준비."
카일은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상태창이 번쩍였다.
기초 검술 보정 적용
자세 불안정 요소 제거. 근육 사용 효율 최적화. 시선, 호흡, 무게중심 자동 조정.
'잠깐.'
카일은 속으로 외쳤다.
'하지 마. 적당히 하자고 했잖아.'
하지만 몸은 이미 움직였다.
목검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휙.
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이상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조차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발끝은 모래를 거의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손목은 흔들림이 없었다.
조교의 눈썹이 꿈틀했다.
"다시."
카일은 이번에는 일부러 어깨에 힘을 넣으려 했다.
'조금 어색하게. 초보처럼은 말고, 그냥 평범하게.'
비효율적 움직임 감지
부상 위험 감소를 위해 자동 교정합니다.
'교정하지 말라고!'
두 번째 베기는 첫 번째보다 더 완벽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뭐야?"
"상단 베기가 저렇게 조용할 수 있나?"
"교본 자세랑 똑같은데?"
아니었다.
교본 자세보다 나았다.
교본에는 사람의 몸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카일의 움직임은 그 흔들림까지 지워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가장 이상적인 하급 검술'을 몸으로 그려 낸 것 같았다.
라그나가 즐거워했다.
—하급 검술이라더니, 하급의 끝까지 가 버렸군.
'입 다물어.'
—재미있다. 벌레가 너무 완벽하게 기어가면 사람들은 그것을 벌레라고 부르지 않는다.
'뭐라고 부르는데?'
—괴상한 벌레.
카일은 세 번째 동작에서 일부러 발을 삐끗하려 했다.
그러나 상태창은 자비가 없었다.
낙상 가능성 감지
균형 회복.
카일의 몸이 가볍게 돌아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구경하던 수험생 하나가 중얼거렸다.
"방금 일부러 흔들린 척한 거야?"
"흔들린 척하다가 더 안정됐는데?"
카일은 속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숨기려는 노력까지 재능처럼 보이고 있었다.
조교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음 항목을 말했다.
"하급 연속 삼단 베기."
카일은 체념했다.
목검이 움직였다.
왼쪽 어깨, 오른쪽 허리, 정면 찌르기.
하급 검술이었다. 마을 경비병도 배우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카일이 하자 그것은 하급이 아니라 '하급이라는 이름을 붙인 예술품'이 됐다.
관람석의 하르만 경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 옆에 앉은 흰 수염 교수는 안경을 고쳐 썼다.
"저 아이, 누구라고 했나?"
하르만 경이 대답했다.
"카일. 평민. 용병단 출신."
"평민 용병이 저런 기본기를?"
"나도 지금 그게 궁금하오."
카일은 마지막 자세를 마치고 목검을 내렸다.
조교가 잠깐 말없이 그를 보다가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카일은 슬쩍 보았다.
글씨가 보였다.
'기본기 매우 우수. 관찰 필요.'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관찰 필요라니. 그 말이 제일 무섭잖아.'
레온 드 발렌시아
실기시험이 끝나자마자 카일은 그늘진 벽 쪽으로 이동했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사람 많은 곳에 섞이는 게 좋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수험생 몇몇이 카일을 힐끔거렸다. 평민 수험생들은 기대와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귀족 수험생들은 불쾌함과 경계가 섞인 눈으로.
그중 가장 노골적인 시선은 붉은 제복을 입은 소년에게서 왔다.
그는 은빛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넘기고 있었다. 옷깃에는 백조와 검이 겹쳐진 문장이 달려 있었다. 발렌시아 자작가. 왕도 사교계에서 '돈은 백작급, 작위는 자작급, 자존심은 공작급'이라는 소리를 듣는 가문이었다.
소년은 하인에게 물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카일 앞에 섰다.
"네가 카일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레온 드 발렌시아다."
레온은 자신이 이름을 말하면 상대가 놀라거나 고개를 숙일 거라고 믿는 얼굴이었다.
카일은 예의상 고개만 살짝 숙였다.
"처음 듣습니다."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다.
레온의 미소가 딱딱해졌다.
"무식한 건 죄가 아니지. 평민이라면 그럴 수 있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다."
"그럼 받지 않겠습니다."
레온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라그나가 작게 웃었다.
—저 인간은 얼굴이 얇군. 말 몇 마디에 색이 변한다.
레온은 카일의 허리춤을 봤다.
"낡은 검. 낡은 옷. 낡은 말투. 그런데 기본기 하나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고 네가 특별해졌다고 생각하나?"
"아직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해라. 아카데미는 너 같은 평민이 우연으로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문, 교육, 품격, 후원. 그런 것들이 사람을 만든다."
카일은 잠시 레온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전장에서 가문은 화살을 막아 주지 않았다. 품격은 독을 해독하지 못했고, 후원자는 늦게 도착했다. 사람을 만든 것은 대개 굶주림, 상처, 그리고 죽기 싫다는 고집이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해 봐야 레온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카일은 짧게 말했다.
"그럼 검은 누가 잡습니까?"
레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조교가 외쳤다.
"공개 대련 평가를 시작한다! 호명된 수험생은 중앙으로!"
공개 대련.
실기 점수 일부에 들어가는 평가였다. 실전 감각, 대응력, 정신력을 본다는 명목이었다. 실제로는 귀족 자제들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조교가 명단을 훑었다.
"첫 번째 조. 레온 드 발렌시아."
레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카일."
카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원한을 배달해 준다고?'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벤트 발생: 공개 대련
상대: 레온 드 발렌시아 권장 행동: 지나치게 이기지 마십시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걸 네가 도와줘야지.'
답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불안해.'
너무 약하게 이기는 방법은 없다
중앙 연무장에 카일과 레온이 섰다.
관람석의 시선이 몰렸다. 필기시험 때 졸던 교수들까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귀족 수험생들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만난 얼굴이었고, 평민 수험생들은 숨을 죽였다.
레온은 목검을 들고 우아하게 자세를 잡았다.
"네게는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건방진 태도는 여기까지다."
대련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레온은 빠르게 움직였다.
확실히 실력은 있었다. 에리크 베르딘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발렌시아 가문이 돈만 많은 것은 아닌 듯했다. 검끝은 카일의 어깨와 손목을 번갈아 노렸고, 발놀림은 깔끔했다.
카일은 하급 검술의 기본 방어만 사용했다.
막고.
비키고.
한 걸음 물러나고.
다시 막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카일의 방어가 너무 정확했다.
레온의 목검은 카일의 몸에 닿지 못했다. 스치지도 못했다. 카일은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다. 그래서 더 얄미워 보였다.
레온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왜 공격하지 않지?"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공격하지 않으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레온에게 다르게 들렸다.
'내 공격에는 빈틈이 없어서 아직 안 친다'가 아니라, '네 빈틈이 너무 많아서 언제 칠지 고르는 중이다'처럼.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민 따위가!"
그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목검 주변에 희미한 푸른빛이 맺혔다. 관람석에서 낮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수험생 수준에서 검에 마나를 두르는 것은 꽤 어려운 기술이었다.
조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과한 마나 사용은 감점이다!"
레온은 듣지 않았다.
그는 카일의 정면으로 파고들며 목검을 내리쳤다.
카일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맞으면 다친다.
크게 피하면 뒤쪽에 서 있는 조교가 맞을 수도 있다.
강하게 받아치면 레온의 손목이 나간다.
그러면 귀족가 원한 추가.
'적당히.'
카일은 목검을 사선으로 세웠다.
위협 감지
반격 각도 최적화. 상대 무장 해제 가능성: 97%.
'가능성 낮춰!'
이미 늦었다.
카일의 목검이 레온의 검면을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힘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레온의 힘이 흘러가는 길을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레온의 목검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레온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카일은 반사적으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넘어지면 얼굴부터 모래에 박힐 위치였다.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멱살을 잡아당기는 순간, 레온의 붉은 제복 단추가 투두둑 떨어졌다.
침묵.
그리고 누군가 작게 웃었다.
레온은 카일 손에 목덜미가 잡힌 채 반쯤 매달린 꼴이 되었다. 목검은 저 멀리 모래 위에 떨어져 굴렀다. 제복 앞섶은 어설프게 벌어졌고, 레온의 고급 셔츠가 드러났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그를 세워 주었다.
"괜찮습니까?"
그 말이 더 치명타였다.
레온의 귀까지 빨개졌다.
"너…… 너 일부러……!"
"넘어지실까 봐 잡았습니다."
"이게 잡은 거냐? 끌어올린 거지!"
하르만 경이 관람석에서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는 듯했다. 흰 수염 교수는 안경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힘 조절이 묘하군.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무력화했어."
카일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해석하지 마십시오.'
조교가 선언했다.
"승자, 카일."
평민 수험생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처음에는 작았다. 그러다 점점 커졌다. 귀족 수험생들은 불편한 얼굴로 침묵했지만, 이미 늦었다. 카일은 레온 드 발렌시아를 공개 대련에서 이겼다. 그것도 다치게 하지 않고, 제복 단추만 박살 내는 이상한 방식으로.
레온은 이를 갈며 카일에게 속삭였다.
"두고 봐라."
카일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냥 안 보면 안 됩니까?"
레온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시험장에 열린 우리
공개 대련 뒤, 세 번째 시험인 상황 평가가 시작되었다.
상황 평가는 작은 조를 이루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시험이었다. 부상자 호위, 함정 통과, 제한 시간 내 목표물 확보 같은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아카데미식 실전 흉내였다.
카일은 네 명으로 이루어진 조에 배정되었다.
평민 소녀 하나, 상인 집 아들 하나, 그리고 방금까지 카일을 피하던 귀족 소년 하나. 귀족 소년은 카일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했다.
"나는 너와 싸울 생각 없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 말투가 문제야."
상황 평가는 훈련장 뒤편의 모의 숲에서 진행됐다. 나무 기둥과 천막, 낮은 장애물, 가짜 부상자 인형이 놓여 있었다. 각 조는 인형을 안전 지점까지 옮겨야 했다. 중간에는 조교들이 방해 역할을 한다고 했다.
카일은 안도했다.
'좋아. 이건 적당히 할 수 있겠어.'
부상자 호위는 전생에서 질리도록 해 봤다. 하지만 굳이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길을 조금 돌아가고, 함정을 하나쯤 일부러 발견 늦게 하면 된다.
그때 숲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끼이이익.
쇠가 긁히는 소리.
카일의 눈빛이 바뀌었다.
전장에서 오래 굴러 본 사람은 안다. 훈련장의 소리와 진짜 위험의 소리는 다르다. 훈련은 사람을 겁주려고 소리를 키우지만, 진짜 위험은 작고 불쾌한 소리로 시작된다.
뒤이어 누군가 외쳤다.
"우리 문이 열렸다!"
"마수다!"
모의 숲 왼쪽의 철창이 박살 나며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늑대와 멧돼지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마수였다. 어깨에는 날카로운 뼈가 돋아 있었고, 입가에서는 끈적한 침이 흘렀다. 눈은 붉게 빛났다.
"칼등멧늑대……?"
상인 집 아들이 다리에 힘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카일도 알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칼등멧늑대. 빠르고 사납고, 등뼈가 칼날처럼 솟은 하급 마수였다. 하급이라고 해도 훈련받지 않은 수험생 몇 명쯤은 순식간에 찢어 놓을 수 있다.
문제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철창 안쪽에서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조교들이 달려왔지만 거리가 있었다. 관람석 쪽에서도 소란이 커졌다. 누군가 결계를 작동하라고 외쳤고, 누군가는 수험생들을 대피시키라고 소리쳤다.
카일의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돌발 상황 발생
통제 실패: 마수 난입. 위험 등급: 중상. 권장 행동: 생존 및 민간인 보호.
'민간인이 아니라 수험생이잖아.'
수험생도 잘 찢어집니다.
'그건 맞지.'
칼등멧늑대 한 마리가 가장 가까운 평민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녀는 목검을 들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카일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숨기고 말고 할 때가 아니었다.
들키지 않게 구하는 법은 없다
카일은 목검을 던졌다.
목검은 빙글 돌며 칼등멧늑대의 눈앞을 때렸다. 마수의 고개가 순간 틀어졌고, 소녀를 향하던 돌진 궤도가 빗나갔다. 카일은 그 틈에 달려들어 소녀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밀었다.
"뒤로!"
소녀가 주저앉듯 물러났다.
카일은 허리춤의 낡은 검을 잡았다.
라그나가 낮게 웃었다.
—드디어인가.
'불태우지 마. 여긴 시험장이야.'
—그럼 조금만?
'절대.'
카일은 검을 뽑았다.
낡은 검날이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오래된 검이었다. 하지만 손에 쥐는 순간 무게가 달라졌다. 숨이 가라앉고, 소리가 멀어지고, 마수들의 움직임이 선명해졌다.
첫 번째 칼등멧늑대가 몸을 낮췄다.
카일은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칼등멧늑대는 등뼈가 날카롭고 돌진력이 강하다. 힘으로 막으면 팔이 밀린다. 대신 옆구리 아래, 앞발이 모래를 박차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
전생의 카일은 이런 마수에게 동료를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배웠다.
마수도 빈틈은 있다. 다만 그 빈틈을 보려면 누군가 먼저 물려야 할 때가 많다.
이번에는 아무도 물리게 하지 않는다.
카일의 검이 낮게 지나갔다.
서걱.
첫 번째 마수의 앞발 힘줄이 끊어졌다. 마수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카일은 곧바로 검등으로 목 뒤를 강하게 내리쳤다. 두개골이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고, 마수는 모래 위에 처박혔다.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기도 어려웠다.
"뭐, 뭐야?"
귀족 소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두 번째 마수는 더 빨랐다. 카일의 옆구리를 물기 위해 뛰어올랐다. 카일은 몸을 낮추며 검을 세웠다. 마수의 턱이 검면에 부딪혔다. 동시에 카일의 무릎이 마수의 가슴을 밀어 올렸다.
전장 생존술 보정
반격 경로 최적화.
'이번엔 고맙다.'
카일은 손목을 틀었다.
검날이 마수의 뿔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며 균형을 무너뜨렸다. 곧이어 손잡이 끝이 마수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두 번째 마수도 모래 위에 굴렀다.
세 번째 마수는 방향을 바꿨다.
도망치는 수험생들 쪽이었다.
그 앞에는 레온이 있었다.
레온은 제복 단추가 반쯤 사라진 채 목검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귀족의 자존심 때문인지, 다리가 굳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칼등멧늑대가 레온에게 달려들었다.
레온은 마나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손이 떨렸다. 공개 대련 때처럼 매끄럽게 움직이지 못했다. 진짜 마수 앞에서는 목검이 너무 가볍고, 숨이 너무 무거웠다.
카일은 욕을 삼켰다.
'저걸 구하면 더 귀찮아지는데.'
하지만 몸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카일은 레온의 어깨를 밀쳐 넘어뜨렸다.
"엎드려!"
칼등멧늑대의 발톱이 카일의 머리 위를 스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갔다. 카일은 땅을 구르며 검을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마수가 착지하는 순간, 솟아난 등뼈 사이의 빈틈을 찔렀다.
푹.
깊지 않았다. 일부러 급소를 피했다. 하지만 고통은 충분했다. 마수는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고, 카일은 검을 뽑으며 뒷다리를 걷어찼다.
마수가 넘어졌다.
바로 그때 하르만 경이 도착했다. 그의 검이 번개처럼 내려와 세 번째 마수의 목 바로 옆 모래를 갈랐다. 살기는 짙었지만, 죽이진 않았다. 교수들이 뒤늦게 결박 마법을 펼치자 마수들의 몸이 푸른 빛줄기에 묶였다.
모의 숲은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숨소리만 들렸다.
카일은 검을 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교수도.
조교도.
수험생도.
방금 구해 준 레온까지.
카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상황 평가였습니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미라만 울타리 밖에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아주 선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또 저질렀네.'
수상한 평민 천재
마수 난입 사건은 즉시 수습되었다.
교수들은 철창을 조사했고, 조교들은 수험생들의 부상을 확인했다.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었다. 넘어진 사람, 놀라서 운 사람, 레온처럼 자존심에 상처 입은 사람은 있었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하르만 경은 카일을 따로 불렀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조금 잘렸군."
"그 정도는 부상으로 치지 않습니다."
하르만 경은 잠시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전장에서 지휘관이 살아 돌아온 병사를 볼 때의 눈빛과 비슷했다. 칭찬보다 먼저 계산이 들어간다. 이 병사는 어디까지 쓸 수 있는가. 무엇을 겪었는가. 왜 아직 살아 있는가.
"칼등멧늑대를 세 마리 상대했다."
"조교님들이 오실 때까지 버틴 것뿐입니다."
"한 마리는 힘줄을 끊고, 한 마리는 기절시키고, 한 마리는 급소를 피해서 제압했다. 죽이지 않았지."
카일은 침묵했다.
"수험생이 할 판단은 아니다."
"용병단에서 배웠습니다."
"검은개 용병단이 좋은 곳이긴 하지만, 열여섯 살짜리에게 그런 기술을 가르치진 않는다."
하르만 경의 말은 조용했지만 날카로웠다.
카일은 웃었다.
"제가 좀 열심히 배웠습니다."
"열심히 배운 사람은 많다. 살아남은 사람은 적고."
하르만 경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서류판을 들어 무언가를 적었다.
카일은 이번에도 슬쩍 보았다.
'실전 대응 매우 우수. 위험 상황에서 침착. 신원 및 능력 추가 확인 필요.'
카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추가 확인은 빼 주시면 안 됩니까.'
그때 흰 수염 교수가 다가왔다. 그는 마나 이론 시험 감독관이기도 했다.
"카일이라고 했나?"
"예."
"자네, 마나를 거의 쓰지 않았더군."
카일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직 마나 운용이 미숙합니다."
"그런데 마수를 상대로 저런 움직임을 보였다?"
"몸으로 때웠습니다."
교수는 눈을 반짝였다.
학자의 눈이었다.
귀찮은 눈이었다.
"흥미롭군. 마나가 약한데 신체 제어가 비정상적으로 정교하다. 기본기는 지나치게 완벽하고, 실전 판단은 노련하다. 평민 출신 용병 소년이라……."
카일은 한 걸음 물러나고 싶었다.
교수가 미소 지었다.
"아주 수상해."
그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레온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는 카일에게 도움받은 사실이 분한 듯했다. 하지만 그 분노 안쪽에는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방금 전, 레온은 보았다. 자신이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순간, 카일이 마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카일은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레온과 눈이 마주쳤다.
레온은 입술을 깨물더니 낮게 말했다.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카일은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자도 없겠군요."
"너는 정말……!"
레온은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섰다.
주변 평민 수험생 몇 명이 카일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났어."
"진짜 용병이었구나."
카일은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다들 운이 좋았습니다."
그때 상태창이 떠올랐다.
입학시험 주요 평가 완료
필기: 보통 이상 추정 실기: 매우 우수 공개 대련: 압승 돌발 상황 평가: 압도적 기여
목표였던 '중상위권으로 조용히 합격' 달성 가능성: 0% 현재 평판: 수상한 평민 천재
카일은 눈을 감았다.
'왜 0%냐.'
사유: 너무 강했습니다.
라그나가 크게 웃었다.
—축하한다, 카일. 숨긴다는 목표는 장렬히 전사했다.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마.'
—남의 일이다. 나는 드래곤이다.
카일은 한숨을 쉬었다.
시험장 저편에서는 교수들이 모여 낮은 목소리로 회의하고 있었다. 몇몇은 카일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르만 경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라가 울타리 너머로 다가왔다.
"어땠어? 조용히 합격하기."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실패했습니다."
"알아."
"아직 결과는 안 나왔습니다."
"결과 말고 조용히가 실패했다고."
미라는 턱짓으로 시험장 안쪽을 가리켰다.
교수 하나가 조교에게 말했다.
"저 평민 소년은 일반 반에 넣기엔 애매하군."
다른 교수가 대답했다.
"재능은 확실하지만 신원이 불안정해. 귀족 자제들과 충돌도 예상되고."
"그럼 어디로 보내지?"
잠깐 침묵.
그리고 흰 수염 교수가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올해 문제아 반이 비어 있지 않나."
카일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문제아 반.
이름만 들어도 평온한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태창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새로운 가능성 발견
배정 후보: 문제아 반 설명: 정상적인 학생 생활과 거리가 먼 반입니다. 추가 조언: 축하합니다. 관심을 독차지했습니다.
카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립 아카데미의 하얀 탑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답고, 웅장하고, 아주 비싸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카일의 조용한 입학 계획은 완전히 박살 났다.
"이번 생은 편하게 살려고 했는데."
미라가 옆에서 말했다.
"그 말도 반복하면 거짓말 같아."
카일은 반박하지 못했다.
멀리서 레온이 다시 한번 카일을 노려보았다. 교수들은 여전히 수상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평민 수험생들은 영웅을 본 얼굴로 카일을 바라봤다.
카일은 깨달았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끝났다.
하지만 진짜 귀찮은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