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성벽 아래에서
왕도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보석 같았다.
높은 성벽은 아침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났고, 성문 위에는 왕국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성벽 안쪽으로는 뾰족한 탑과 붉은 지붕들이 겹겹이 솟아 있었고, 저 멀리 왕궁의 첨탑은 구름을 찌를 듯 높았다.
카일은 그 광경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전생에서도 왕도를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말 뒤에서 짐짝처럼 실려 들어왔다. 상처 입은 용병들에게는 왕도의 아름다움보다 치료비가 더 중요했고, 성벽의 웅장함보다 통행세가 더 무서웠다. 그는 피 냄새와 마차 바퀴 소리 사이에서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갔다.
이번에는 달랐다.
스스로 걸어왔다.
낡은 검을 차고, 검은개 용병단의 가죽패를 품고, 옆에는 의심 많은 정찰병 미라가 있었다.
"우와."
미라가 드물게 감탄했다.
"크네."
카일은 피식 웃었다.
"감상이 짧네요."
"큰 걸 길게 말하면 더 커져?"
"그건 아니죠."
"그럼 됐어."
성문 앞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농부, 상인, 순례자, 용병, 곡예단, 염소 두 마리와 함께 온 노인까지. 각자 왕도에 들어갈 이유를 품고 있었고, 각자 주머니를 꽉 쥐고 있었다.
왜냐하면 왕도는 입구부터 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통행세. 성인 한 명당 동화 여섯 닢. 무기 소지자는 추가 동화 넷."
문지기의 목소리가 기계처럼 반복됐다.
카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생보다 올랐네."
"뭐?"
미라가 돌아봤다.
"아니요. 생각보다 비싸다고요."
"왕도니까."
"왕도면 숨 쉬는 데도 돈 받습니까?"
"좋은 자리에서 쉬면 받을걸."
미라의 말은 농담 같았지만, 사실에 가까웠다.
왕도는 그런 곳이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데 돈이 들고, 마차가 지나가는 데 돈이 들고, 상점을 열려면 돈이 들고, 길에서 칼을 차고 다녀도 돈이 들었다. 돈 없는 사람은 발소리조차 작게 내야 했다.
카일과 미라의 차례가 왔다.
문지기가 카일의 낡은 검을 훑어보고 코웃음을 쳤다.
"용병인가?"
카일은 갈론에게 받은 가죽패를 내밀었다.
"검은개 용병단 소속이었습니다."
"있었습니다?"
"지금은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러 왔습니다."
문지기의 눈썹이 올라갔다.
뒤쪽에서 누군가 킥킥 웃었다.
"용병이 아카데미?"
"검 닦는 하인 시험 아니고?"
카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 정도 조롱은 전생에서 귀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들었다. 저런 말에 일일이 반응하면 세상 모든 주먹질을 다 해야 했다. 그리고 왕도 성문 앞에서 주먹질을 하면 벌금이 동화 여섯 닢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지기는 가죽패를 앞뒤로 살피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둘이 합쳐 은화 한 닢."
미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계산이 이상한데."
"무기 소지자 둘. 외지인 관리비 포함."
"그런 항목은 방금 없었잖아."
문지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방금 생겼다."
카일은 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냈다. 갈론에게 정보값으로 받은 그 은화였다. 손끝에 닿자 묘하게 억울했다.
하지만 카일은 웃으며 은화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미라가 낮게 속삭였다.
"그냥 줘?"
"왕도에서는 싸울 상대를 골라야 합니다."
문지기는 은화를 받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흔들었다.
"다음!"
카일은 성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눈앞이 확 트였다.
왕도의 중심 거리였다.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두드리고, 상인들이 목청을 높여 물건을 팔고, 길거리 악사들이 바이올린을 켰다. 갓 구운 파이 냄새와 말똥 냄새, 향수 냄새와 땀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길을 비켰고, 꽃으로 장식한 마차에서는 귀족 영애가 손수건으로 코를 가렸다.
미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크네."
이번에는 카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는 크다.
화려하다.
그리고 더럽게 비싸다.
그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카일의 뒤통수를 때렸다.
침대 하나에 은화 두 닢
로만이 알려 준 구부러진 숟가락 여관은 서문 근처에 있었다.
간판은 정말로 구부러진 숟가락 모양이었다. 숟가락은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차라리 낚싯바늘처럼 보였다. 여관 주인은 로만의 말대로 욕이 많았고, 죽은 쥐는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는 쥐는 한 마리 봤지만, 그것은 기준 밖의 문제였다.
"방 하나, 하루 은화 두 닢."
여관 주인이 말했다.
카일은 잠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침대 하나 있는 방이요?"
"침대 하나, 창문 하나, 지붕 하나. 은화 두 닢."
"지붕은 기본 아닙니까?"
"왕도에서는 기본도 돈이야."
미라가 카운터에 팔꿈치를 올렸다.
"마구간은?"
"동화 열 닢."
"사람도 자도 돼?"
"말처럼 굴면."
카일은 조용히 품속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성문에서 은화 하나가 사라진 뒤 남은 돈은 초라했다. 용병단을 떠날 때 챙긴 노잣돈과 길에서 아낀 동전들. 왕도 바깥에서는 며칠 버틸 수 있는 돈이었지만, 왕도 안에서는 숨 두 번 쉬면 줄어드는 돈이었다.
상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현재 자금 상태: 위험
권장 행동: 돈을 버십시오. 추가 조언: 돈은 땅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상태창이 나보다 현실적이네.'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웃었다.
—인간 문명은 이상하군. 돌로 만든 집에 들어가 누우려면 금속 조각을 바쳐야 한다니.
'드래곤은 보물 깔고 자잖아.'
—그것은 위엄이다.
'인간이 하면 임대료고?'
—대체로 그렇다.
카일은 결국 마구간을 골랐다.
미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 출신에게 마구간은 특별히 비참한 잠자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마구간 비용조차 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날 밤, 카일은 건초 위에 누워 왕도의 지붕들을 바라보았다.
지붕 위로 별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왕도의 별은 시골보다 희미했다. 불빛이 너무 많아서였다. 돈 많은 사람들이 밤에도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기름을 태우는 동안, 돈 없는 사람들은 그 불빛 아래 그림자처럼 웅크렸다.
미라가 옆에서 물었다.
"계획 있어?"
"있습니다."
"뭔데?"
"돈을 법니다."
"그건 계획이 아니라 소원 아니야?"
카일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때 라그나가 말했다.
—왕립 아카데미에는 추천장이 필요하지 않느냐?
카일은 눈을 감았다.
'평민 전형은 없어도 시험을 볼 수 있어. 하지만 추천장이 있으면 접수부터 다르지. 필기 면제는 아니어도, 신원 보증이 되니까.'
전생의 기억 속에서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잔인했다.
실력만으로 뽑는다고 말했지만, 그 실력을 증명할 기회조차 돈과 신분에 따라 달랐다. 귀족 자제는 교수의 제자라는 이유로 먼저 시험장에 들어갔고, 상인 자식은 기부금 덕분에 서류가 빠르게 처리됐다. 평민은 줄을 서다 해가 지면 다음 날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추천장이 있다면 그 벽을 조금 낮출 수 있었다.
문제는 추천장을 얻는 방법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은 귀족이나 고위 기사에게 인정받는 것.
비정상적인 방법은 돈으로 사는 것.
왕도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이 훨씬 빠르게 돌아갔다.
카일은 건초를 털고 일어났다.
"내일 추천장부터 알아봅시다."
미라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물었다.
"돈 없다며."
"그래서 알아만 보는 겁니다."
"보통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다음 날 사기당해."
카일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전 안 당합니다."
미라는 대답 대신 건초를 끌어당겨 덮었다.
그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이 제일 위험해.'
백합 향수 냄새가 나는 사기꾼
다음 날, 카일은 왕립 아카데미 접수처를 먼저 찾았다.
접수처는 왕도 동쪽 행정구역에 있었다. 깨끗한 흰 건물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잘 차려입은 귀족 자제들은 하인에게 양산을 들게 하고 있었고, 돈 많은 상인 집 아이들은 가죽 표지 서류철을 품에 안고 있었다.
카일과 미라는 그 줄의 맨 끝에 섰다.
한 시간 뒤, 줄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두 시간 뒤, 귀족 자제 몇 명이 옆문으로 들어갔다.
세 시간 뒤, 접수처 직원이 나와 말했다.
"오늘 일반 접수는 마감입니다."
줄 끝에서 욕이 터졌다.
카일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아직 중천이었다.
"마감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직원은 카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서류 검토량이 많습니다."
"옆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요?"
"사전 예약자입니다."
"어떻게 예약합니까?"
"적절한 보증과 추천 절차가 필요합니다."
직원은 적절하다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말뜻은 카일도 알았다.
돈.
혹은 신분.
둘 다 없으면 내일 다시 오라는 뜻.
그때였다.
"젊은 친구, 아카데미 시험을 보러 왔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카일이 돌아보자,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는 향유를 발랐고, 손가락에는 푸른 보석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카일의 신발과 검, 허리춤 주머니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갈론의 말이 떠올랐다.
왕도에서는 웃는 사람을 조심해라.
진짜 칼은 대개 웃는 얼굴 뒤에 있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처럼 보이는 얇은 나무패를 꺼냈다.
"나는 보른 남작가의 외무 대리인, 세드릭이라고 하네. 신분이 낮아도 재능 있는 젊은이를 돕는 일을 하고 있지."
미라가 작게 속삭였다.
"냄새나."
"향수요?"
"사기."
카일은 웃음을 참았다.
세드릭은 카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추천장이 필요하지 않나? 아카데미 접수에는 귀족 추천장이 큰 도움이 되네. 물론 정식 절차로 발급되는 것이고, 약간의 행정 수수료가 필요하지."
"얼마입니까?"
"젊은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아주 저렴하지. 은화 스무 닢."
카일은 속으로 감탄했다.
비싸다.
그리고 어설프다.
진짜 귀족 추천장을 은화 스무 닢에 살 수 있을 리 없다. 너무 싼 것도 사기지만, 평민에게는 너무 비싸게 느껴지는 절묘한 금액이었다. 가진 돈을 전부 긁어모으게 만들고, 도망칠 때는 피해자가 신고하기 애매한 정도.
전생에서 카일은 비슷한 수법에 당한 용병을 본 적이 있었다. 추천장이라고 받은 종이는 그저 귀족가 문장을 흉내 낸 장식 종이였고, 접수처에서는 웃음거리만 됐다.
카일은 일부러 눈을 반짝였다.
"정말입니까? 저 같은 평민도 가능합니까?"
세드릭의 웃음이 깊어졌다.
"물론이지. 왕국은 재능을 알아보는 곳이네."
—거짓말이 아주 매끄럽군.
라그나가 말했다.
—저 혀를 잘라 깃펜으로 쓰면 좋겠다.
'조용히 해. 지금 낚는 중이야.'
카일은 순진한 척 물었다.
"그런데 보른 남작가 문장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푸른 방패와 은색 매지."
"아, 그렇군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기억이 맞다면 보른 남작가는 왕도 서쪽에 있는 작은 귀족 가문이었다. 문장은 푸른 방패가 아니라 검은 방패였고, 은색 매가 아니라 붉은 여우였다.
세드릭은 사기꾼이었다.
그것도 귀족 이름조차 제대로 못 외운 싸구려 사기꾼.
카일은 더 밝게 웃었다.
"마침 제가 보른 남작가에 아는 분이 있습니다."
세드릭의 눈꼬리가 아주 살짝 굳었다.
"그런가?"
"예. 검은 방패와 붉은 여우 문장이 멋지더군요."
세드릭의 웃음이 멎었다.
미라가 뒤에서 아주 작게 웃었다.
카일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세드릭 씨. 왕도에서 귀족 사칭은 목이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모르시면 경비대에 같이 가서 물어볼까요? 아, 그리고 이 나무패도 가져가죠. 보른 남작가 외무 대리인이라고 새겨져 있으니 증거로 딱 좋겠습니다."
세드릭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카일은 나무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저는 가난해서 사기당하면 오래 기억합니다. 대신 지금 사과하고, 진짜 추천장 거래가 어디서 이뤄지는지 알려 주면 이 나무패는 돌려드리죠."
세드릭은 이를 악물었다.
"애송이가……."
그 순간 미라의 단검 끝이 세드릭의 옆구리에 가볍게 닿았다.
정말 가볍게.
하지만 찌르면 깊게 들어갈 위치였다.
"웃으면서 말해."
미라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왕도 사람들은 웃는 걸 좋아한다며."
세드릭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하, 하하. 오해가 있었군."
"정보."
카일이 말했다.
"왕도 뒷골목에 리엔이라는 정보상이 있네."
세드릭이 빠르게 말했다.
"추천장뿐 아니라 시험 일정, 감독관, 귀족 자제들 소문까지 다루지. 서문 시장 뒤쪽, 붉은 닭 간판 아래 지하로 내려가면 돼. 암호는 '비 오는 날엔 잉크가 번진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나무패를……."
카일은 나무패를 품에 넣었다.
"보관료입니다."
"뭐?"
"사기 예방을 위한 공익 활동에 쓰겠습니다."
세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일은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다시 평민 상대로 귀족 추천장 사기 치다 걸리면, 그때는 진짜 보른 남작가에 보내겠습니다. 검은 방패와 붉은 여우 쪽으로요."
세드릭은 욕을 삼키며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미라가 단검을 집어넣었다.
"안 당한다더니, 당할 뻔은 했네."
"당할 뻔한 게 아니라 역으로 턴 겁니다."
"돈은 못 벌었잖아."
"정보를 벌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정보 받고 재워 줘?"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랬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위험 회피 성공 사기꾼을 협박하여 정보 획득.
추가 조언: 그래도 돈은 없습니다.
카일은 진심으로 상태창을 때리고 싶었다.
전생의 광산, 현생의 돈줄
돈은 곧 필요했다.
아니, 이미 필요했다.
추천장 정보상을 만나려 해도 거래금이 필요할 것이다. 아카데미 시험 접수비도 싸지 않았다. 숙박비, 식비, 교재비, 무기 수리비까지 생각하면 주머니 속 동전들은 왕도 하수구로 흘러가는 빗물처럼 사라질 운명이었다.
카일은 서문 시장을 걸으며 기억을 뒤졌다.
전생의 왕도.
그 시기.
무엇이 돈이 됐더라?
도박판 결과? 기억 안 난다.
경마 우승마? 말 이름을 외울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귀족 스캔들? 돈이 되긴 하지만 잘못 물면 목이 날아간다.
그러다 시장 한쪽에서 들려오는 상인의 외침이 카일의 귀를 때렸다.
"흑철석! 북부산 흑철석 싸게 팝니다! 품질은 조금 떨어져도 농기구 만들기엔 충분합니다!"
카일의 걸음이 멈췄다.
흑철석.
검은빛이 도는 철광석.
지금은 그저 평범한 광석 취급을 받았다. 무겁고, 제련이 까다롭고, 색이 어두워 귀족 장식품에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격이 낮았다.
하지만 카일은 안다.
보름 뒤 북부 산맥의 큰 철광 갱도가 무너진다. 사고 자체는 큰 뉴스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 광산이 왕국 군수품에 쓰이는 양질의 철을 공급하던 핵심 광산이라는 점이었다. 광석 공급이 줄면 대장간들은 대체 광석을 찾게 된다.
그때 흑철석 가격이 오른다.
처음에는 두 배.
이후 군부가 매입에 나서며 네 배 가까이 뛴다.
전생에서 카일은 그 소식을 술집에서 들었다. 돈 있는 상인들이 미리 흑철석을 쓸어 담아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당시의 카일은 육포 하나 살 돈도 부족해서 그 이야기를 그저 남의 세상 이야기처럼 들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카일은 상인 앞으로 다가갔다.
"흑철석 얼마입니까?"
상인은 카일의 낡은 옷을 보고 김 빠진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살 만큼은 아니야."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한 자루에 동화 열다섯 닢. 많이 사면 깎아 주지."
싸다.
너무 싸다.
문제는 카일에게 그 싸다는 물건을 많이 살 돈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미라가 옆에서 물었다.
"광석 사게?"
"예."
"왜?"
"오를 겁니다."
"누가 그래?"
"감입니다."
미라는 카일을 빤히 봤다.
"네 감은 가끔 너무 구체적이야."
카일은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시장을 돌며 흑철석 가격을 확인했다. 몇몇 상단은 북부 물량이 남아 창고를 비우려 하고 있었다. 왕도 대장장이들은 더 가볍고 다루기 쉬운 청철석을 선호했기 때문에 흑철석은 찬밥 신세였다.
카일은 고민 끝에 방법을 정했다.
돈이 없으면 돈 있는 사람의 욕심을 이용하면 된다.
그는 서문 시장에서 가장 붐비는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불곰의 망치'라는 간판이 걸린 곳이었다. 안에서는 수염이 덥수룩한 대장장이가 뜨거운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무기 수리냐?"
대장장이가 물었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네 검은 거래 전에 부러질 것 같은데."
라그나가 즉시 분노했다.
—저 털 많은 인간이 감히 내 육신을 모욕했다!
'겉보기엔 낡은 검 맞잖아.'
—낡음은 깊이다!
카일은 속으로 라그나를 달래며 말했다.
"흑철석을 사 두십시오."
대장장이가 망치를 멈췄다.
"뭐?"
"가능한 만큼. 보름 안에 가격이 오릅니다."
대장장이는 카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꼬마야, 대장간은 점집이 아니다."
"북부 군수 광산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대장장이의 눈이 좁아졌다.
"그런 소문은 처음 듣는데."
"처음 들었으니 돈이 되는 겁니다."
카일은 품에서 세드릭의 나무패를 꺼냈다. 귀족 대리인이라는 가짜 표식이었지만, 겉보기에는 꽤 그럴듯했다. 물론 진짜 귀족에게 들이밀면 바로 들통나겠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대장장이가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정도였다.
"제 뒤에는 보증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물량을 잡기엔 자금이 부족합니다. 대장장이님이 사들이고, 저는 정보값으로 수익의 일부만 받겠습니다."
미라가 옆에서 카일을 보았다.
그 눈빛은 이랬다.
'사기꾼 잡더니 사기꾼 흉내 내네.'
카일은 눈으로 답했다.
'흉내가 아니라 협상입니다.'
대장장이는 팔짱을 꼈다.
"만약 안 오르면?"
"흑철석은 어차피 농기구와 못에 쓸 수 있습니다. 손해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르면?"
카일은 잠시 말을 끊었다.
"왕도에서 제일 먼저 물량을 잡은 대장간이 되겠죠."
대장장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욕심은 불보다 뜨겁다.
그리고 장인은 불을 다룰 줄 안다.
"수익의 몇 할을 원하지?"
"순이익의 두 할."
"도둑놈이냐?"
"그럼 한 할 반."
"반 할."
"한 할. 대신 제가 다른 상단 물량 위치를 알려 드리죠."
대장장이는 한참 카일을 노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그롬이다. 네 정보가 틀리면, 네 낡은 검을 녹여 못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라그나가 폭발했다.
—저 인간을 지금 태워라!
'참아. 돈줄이야.'
카일은 그롬의 손을 잡았다.
"카일입니다.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날부터 카일은 미라와 함께 시장을 돌았다. 흑철석이 남아 있는 창고, 북부 상단이 급히 처분하려는 물량, 세금 때문에 재고를 줄이려는 소상인까지 하나하나 표시했다. 그롬은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카일이 알려 준 물량이 실제로 존재하자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열사흘째 되는 날.
왕도에 소식이 도착했다.
북부 아이른 광산 붕괴.
주요 갱도 매몰.
철광석 공급 중단.
그날 오후 흑철석 가격은 두 배로 올랐다.
다음 날 군수청 관리들이 시장에 나타나자 세 배가 됐다.
그롬은 대장간 안쪽 방에서 카일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던졌다.
짤랑.
은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 할."
그롬이 투덜거렸다.
"꼬마한테 이렇게 큰돈을 줄 줄은 몰랐다."
카일은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은화가 가득했다.
전생의 카일이라면 반년을 굴러도 만지기 힘든 돈이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자금 상태: 안정 첫 번째 큰돈을 벌었습니다.
추가 조언: 돈이 생겼다고 사람이 커지지는 않습니다. 지갑만 두꺼워집니다.
카일은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웃었다.
"지갑이 두꺼워지면 어깨도 조금 펴집니다."
그롬은 혀를 찼다.
"네가 또 이상한 소문을 들으면 나한테 먼저 와라."
"수익 배분은 그대로입니까?"
"그땐 반 할이다."
"그럼 다른 대장간에 가겠습니다."
"……한 할."
"좋습니다."
미라는 대장간을 나오며 말했다.
"너, 돈 냄새 맡는 재주도 있었어?"
"전생…… 아니, 예전부터 감이 좋았습니다."
"방금 전생이라고 하려 했지?"
"전생 같은 예전이요."
미라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말이 점점 이상해져."
카일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왕도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이제 첫 번째 벽은 넘었다.
하지만 돈만으로 모든 벽이 열리지는 않는다.
왕도에는 돈을 받아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자들이 있고, 돈을 받는 척하다가 목줄을 거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곳으로 들어가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붉은 닭 아래의 정보상
서문 시장 뒤쪽은 낮에도 어두웠다.
큰길의 화려한 상점들은 유리창을 닦고 향수를 뿌렸지만, 뒷골목은 생선 비린내와 젖은 나무 냄새가 고여 있었다. 빗물은 마르지 않았고, 벽에는 오래된 전단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술 취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누군가의 고양이가 그 위를 밟고 지나갔다.
미라는 편안해 보였다.
"여기가 더 낫네."
"왕도 중심가보다요?"
"응. 적어도 여긴 다들 수상해 보여서 솔직해."
맞는 말이었다.
카일은 붉은 닭 간판을 찾았다. 낡은 술집 처마 아래, 정말로 붉은 닭이 그려진 작은 나무판이 흔들리고 있었다. 닭은 화가 난 것처럼 부리를 벌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눈동자 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카일이 간판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자, 문 앞에 앉아 있던 덩치 큰 남자가 길을 막았다.
"술집은 위다."
카일이 낮게 말했다.
"비 오는 날엔 잉크가 번진다."
남자는 카일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카일은 순간 멈칫했다.
암호가 더 있었나?
세드릭 이 사기꾼이 절반만 알려 준 건가?
그때 미라가 옆에서 귀찮다는 듯 말했다.
"말리기 전에 읽어야지."
덩치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들어가."
카일은 미라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암호는 보통 이어지는 말이 있어."
"그걸 어떻게 맞혔는데요?"
"감."
"누님 감도 구체적이네요."
"누님 소리 하지 마."
지하실 안은 의외로 깨끗했다. 작은 등불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둥근 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누구도 오래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가장 안쪽 탁자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아니, 처음엔 소녀처럼 보였다. 나이는 카일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아 보였고, 짧은 은회색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달랐다. 장난스럽게 휘어져 있으면서도, 손님의 주머니 무게와 거짓말 두께를 동시에 재는 눈이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사기꾼 잡은 용병 소년."
카일은 의자를 빼며 멈췄다.
"벌써 압니까?"
"왕도에서 남의 이름 팔던 세드릭이 얼굴 허옇게 질려 도망갔는데 내가 모르면 장사 접어야지."
그녀는 싱긋 웃었다.
"리엔이야. 정보 팔고, 소문 사고, 가끔 사람도 빌려줘. 사람을 판다는 뜻은 아니니까 무섭게 보지 마. 왕도 법이 은근히 까다롭거든."
미라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이미 무서운데."
리엔은 미라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정찰병이네. 손이 가볍고 눈이 빨라. 좋아, 이런 손님은 오래 살아."
"너도 눈이 좋네."
"그래야 밥 먹고 살지."
카일은 은화 한 닢을 탁자 위에 올렸다.
"왕립 아카데미 추천장과 입학시험 정보가 필요합니다."
리엔은 은화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톡 밀어 돌려보냈다.
"그 돈으로는 아카데미 정문까지 가는 길 안내 정도?"
카일은 주머니에서 은화 다섯 닢을 더 꺼냈다.
리엔의 미소가 조금 진해졌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네."
"추천장은 구할 수 있습니까?"
"가짜는 오늘 안에. 진짜는 조건부."
"조건이 뭡니까?"
"너를 추천하는 사람이 손해 보지 않아야 해. 귀족 추천장이란 건 그냥 종이가 아니야. '이 아이가 사고 치면 나도 얼굴을 구긴다'는 보증이거든. 돈만으로 사면 비싸고 위험해. 대신 실적이 있으면 싸져."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엔은 말이 가벼웠지만 핵심은 정확했다.
"실적이라면?"
"시험 전 예비 검증장에서 눈에 띄거나,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귀족 자제 하나를 공개적으로 이기거나. 마지막은 추천은 얻기 쉬워도 원한도 같이 얻지."
"입학시험은 어떤 식입니까?"
리엔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필기, 실기, 상황 평가. 필기는 왕국사, 기초 수학, 마나 이론. 실기는 검술이나 마법. 상황 평가는 말이 좋아 평가고, 사실상 통제된 난장판이야."
"난장판?"
"올해는 특히 심해. 귀족 자제들이 많이 몰렸거든. 남부의 베르딘 백작가 차남, 동부의 클레어 후작가 영애, 북부의 철벽 기사단장 조카. 다들 이름값이 있어. 그런 애들이 같은 해에 들어오면 시험은 시험이 아니라 서열 싸움이 돼."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생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중 부상자가 속출한 해.
평민 응시생 몇 명이 귀족 자제들의 '실력 확인'이라는 명목으로 망가졌다는 소문. 당시 카일은 전쟁터에 있어서 자세히 몰랐지만, 그 사건 뒤로 평민 전형 합격자가 크게 줄었다.
이번 생의 시험이 바로 그 해였나.
리엔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더러운 소문도 있어."
"무슨 소문입니까?"
"누군가 평민 유망주들을 미리 걸러 내고 있어. 접수 지연, 서류 분실, 숙소 습격, 장비 파손. 귀족들이 직접 움직이진 않겠지. 손 더러운 하인이나 거리 양아치들이 움직일 거야."
미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세드릭 같은 놈이 있는 거구나."
"맞아. 사기꾼은 먹잇감 냄새를 잘 맡거든."
리엔은 카일을 보았다.
"너도 먹잇감처럼 보였고."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물리면 이빨이 나갑니다."
리엔은 웃었다.
"좋아. 마음에 들어."
그녀는 탁자 아래에서 얇은 서류를 꺼냈다. 왕립 아카데미 예비 일정, 시험장 위치, 최근 귀족 자제들의 동향이 적힌 종이였다.
"이건 은화 여섯 닢 값."
"추천장은요?"
"지금 당장은 팔지 않아. 대신 길은 알려 줄게."
리엔은 손톱으로 서류 한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사흘 뒤, 왕도 서쪽 훈련장에서 예비 실기 확인이 있어. 공식 시험은 아니지만 교수 보조들과 귀족 후원자들이 보러 와. 거기서 눈에 띄어. 특히 평민을 싫어하는 귀족 애들 앞에서 너무 처참하게 이기지도 말고, 너무 약하게 보이지도 마."
"어렵군요."
"왕도에서는 강한 것도 기술이야. 언제 드러낼지 모르면 힘이 아니라 사고지."
라그나가 드물게 조용히 말했다.
—저 은색 머리 인간은 제법 안다.
카일도 동의했다.
리엔은 마지막으로 작은 동패 하나를 건넸다.
거기에는 붉은 닭 깃털이 새겨져 있었다.
"이걸 보여 주면 내 심부름꾼들이 최소한 네 말을 한 번은 들어 줄 거야. 공짜는 아니고."
"왜 이렇게까지 해 줍니까?"
리엔은 턱을 괴었다.
"너, 흑철석으로 돈 벌었지?"
카일의 손이 멈췄다.
미라의 눈도 가늘어졌다.
리엔은 즐겁다는 듯 웃었다.
"걱정 마. 훔치진 않아. 다만 궁금할 뿐이야. 사기꾼을 역으로 털고, 광석 가격을 미리 맞히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는 평민 용병. 왕도에서 이런 이야기는 아주 좋은 상품이거든."
"저를 팔겠다는 뜻입니까?"
"비싸게 팔 수 있을 때는 팔 수도 있지."
미라의 손이 단검 쪽으로 움직였다.
리엔은 손을 흔들었다.
"농담 반, 진담 반. 하지만 지금은 네가 올라가는 쪽에 걸어 보고 싶어. 바닥에서 갑자기 튀어 오르는 사람은 늘 재미있는 판을 만들거든."
카일은 동패를 받았다.
"제가 떨어지면요?"
"그럼 이야기는 짧아지고, 나는 다른 이야기를 찾으면 돼."
참 솔직한 조력자였다.
그래서 오히려 믿을 수 있었다. 적어도 리엔은 자신이 이득을 원한다고 숨기지 않았다. 왕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척 웃는 사람이었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는 계속합시다."
리엔이 손을 흔들었다.
"살아 있으면 언제든."
귀족 도련님들의 인사법
지하 정보상을 나온 뒤, 카일과 미라는 서쪽 훈련장을 미리 확인하기로 했다.
왕도 서쪽에는 귀족 자제들이 이용하는 검술장이 많았다. 깨끗한 모래가 깔린 연무장, 햇빛을 가리는 천막, 하인들이 들고 선 물병. 카일이 알던 용병단 훈련장과는 달랐다. 검은개 용병단의 훈련장은 흙바닥에 넘어지면 돌멩이가 등에 박혔고, 물은 알아서 떠 마셔야 했다.
"좋네."
미라가 말했다.
"넘어져도 덜 아프겠어."
"대신 자존심이 더 아플 겁니다."
그때 훈련장 안쪽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자세로 아카데미 시험을 보겠다고?"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귀족 자제 셋이 평민으로 보이는 소년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평민 소년은 목검을 들고 있었지만, 이미 팔이 떨리고 있었다. 맞은 흔적이 어깨와 허벅지에 선명했다.
가장 앞에 선 금발 소년이 목검을 어깨에 걸쳤다. 옷깃에는 작은 은색 사자 문장이 달려 있었다.
"평민 전형은 왕국의 자비지, 너희 같은 것들이 기어올라오라는 사다리가 아니야."
카일은 그 문장을 알아봤다.
베르딘 백작가.
리엔이 말한 남부 백작가 차남일 가능성이 높았다.
평민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금발 소년이 웃었다.
"좋아. 대신 이번에 버티지 못하면 접수 포기 각서를 써라. 네가 포기하면 우리도 귀찮게 손쓸 필요가 없지."
카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전생에서 들었던 평민 유망주 걸러 내기.
소문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미라가 낮게 물었다.
"끼어들어?"
카일은 잠시 생각했다.
왕도에서는 싸울 상대를 골라야 한다.
하지만 어떤 싸움은 피하면 더 큰값을 치른다.
카일은 연무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셋이 하나를 두들겨 패는 것도 아카데미식 예절입니까?"
순간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금발 소년이 천천히 돌아봤다.
"넌 뭐지?"
"시험 보러 온 평민입니다."
귀족 자제 중 하나가 비웃었다.
"또 하나 왔군."
카일은 쓰러질 듯 서 있는 평민 소년을 지나쳐 금발 소년 앞에 섰다.
"평민 전형이 왕국의 자비라면, 귀족 전형은 부모님의 지갑입니까?"
주변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미라는 이마를 짚었다.
"너무 골랐잖아, 상대를."
금발 소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베르딘 가문을 모욕해?"
"가문 말고 당신을 모욕했습니다. 가문은 아직 만난 적이 없어서요."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만족스럽게 말했다.
—말로 찌르는 솜씨가 늘었군.
금발 소년은 목검을 들어 올렸다.
"좋다. 네가 대신 상대해라. 이름은?"
"카일."
"나는 에리크 베르딘이다. 기억해 둬라. 네 시험을 망친 이름이 될 테니까."
카일은 허리춤의 낡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진검을 뽑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옆에 놓인 연습용 목검을 집었다.
목검의 균형은 좋았다.
비싼 훈련장답게 나무도 고급이었다.
'부러뜨리면 물어내야 하나?'
상태창이 즉시 떠올랐다.
경고: 시설 파손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카일은 눈썹을 찌푸렸다.
'너는 왜 이런 것만 빠르냐.'
에리크가 먼저 달려들었다.
귀족답게 검술은 잘 배웠다. 발은 안정적이었고, 손목은 부드러웠다. 다만 문제는 실전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목검은 교과서처럼 날아왔다.
전장에서 교과서처럼 날아오는 공격은 친절한 편이다.
카일은 반걸음 옆으로 빠지며 에리크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탁.
에리크의 목검이 흔들렸다.
"뭐……!"
카일은 곧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압도적으로 이기면 원한만 커진다. 리엔의 충고가 떠올랐다.
강한 것도 기술이다.
언제 드러낼지 모르면 힘이 아니라 사고다.
그래서 카일은 세 번을 받아 냈다.
네 번째에는 살짝 밀렸다.
다섯 번째에는 일부러 모래를 밟고 자세를 낮췄다.
에리크의 얼굴에 자신감이 돌아왔다.
"입만 산 놈이었군!"
그가 크게 휘둘렀다.
바로 그 순간.
카일은 목검의 끝으로 에리크의 발목 앞 모래를 찍었다. 에리크의 발이 모래에 걸려 아주 조금 멈췄고, 카일은 손목을 틀어 그의 목검을 위로 튕겼다.
탁!
목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다음 순간 카일의 목검 끝이 에리크의 목 앞에 멈췄다.
훈련장은 조용해졌다.
에리크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카일은 웃었다.
"부모님 지갑이 검까지 대신 잡아 주진 않나 봅니다."
누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리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너…… 너 이 자식……!"
"그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장 가장자리 천막 아래에서 중년 기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회색 머리에 깔끔한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걸음걸이에서 검을 오래 잡은 사람 특유의 무게가 느껴졌다.
주변 귀족 자제들이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하르만 경."
기사는 카일과 에리크를 번갈아 보았다.
"예비 확인장은 결투장이 아니다. 베르딘, 목검을 주워라."
에리크는 입술을 깨물며 목검을 주웠다.
하르만 경의 시선이 카일에게 향했다.
"너는?"
"카일입니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응시 예정입니다."
"추천장은?"
"아직 없습니다."
"신분 보증은?"
카일은 검은개 용병단의 가죽패를 꺼냈다.
"검은개 용병단 출신입니다."
하르만 경은 가죽패를 받아 살폈다.
"갈론의 부하였나."
카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단장님을 아십니까?"
"전장에서 몇 번 봤다. 외눈에 성질 더럽고, 쓸데없이 정직한 용병이었지."
"정확하십니다."
하르만 경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검술은 거칠지만 눈이 좋다. 힘을 숨길 줄도 알고. 방금 한 말은 지나치게 건방졌지만."
"반성하겠습니다."
"표정은 아닌데."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하르만 경은 가죽패를 돌려주었다.
"사흘 뒤 예비 실기 확인에 와라. 공식 추천장은 아니지만, 내 이름으로 접수 지연은 막아 주겠다."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에리크가 이를 갈며 말했다.
"하르만 경, 저런 평민을……."
하르만 경이 그를 바라보았다.
"베르딘."
"예."
"시험장에서 가문 이름보다 검이 느리면, 떨어지는 건 너다."
에리크의 얼굴이 굳었다.
하르만 경은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카일은 목검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평민 소년이 다가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접수 포기하지 마세요."
"하지만 저들은……."
"무섭죠."
카일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포기 각서 쓰면 그다음부터는 평생 누가 시키는 대로만 써야 합니다. 이름이든, 목숨이든."
소년은 입술을 깨물다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가 옆에 다가왔다.
"한 명 구했네."
"그리고 한 명 적을 만들었죠."
"베르딘 백작가 차남."
"예."
"비싼 적이네."
카일은 한숨을 쉬었다.
왕도에서는 적도 비쌌다.
돈으로 열고, 검으로 버틴다
그날 저녁, 카일은 더 이상 마구간에서 자지 않았다.
구부러진 숟가락 여관의 침대 있는 방을 잡았다. 여관 주인은 은화를 확인하더니 태도가 아주 조금 친절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욕설 사이에 '손님'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손님, 방 더럽게 쓰면 추가 요금이야."
왕도식 친절이었다.
미라는 침대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돈 좋네."
"그러게요."
카일은 책상 위에 오늘 얻은 것들을 올려놓았다.
리엔의 정보 서류.
붉은 닭 동패.
검은개 용병단 가죽패.
그리고 묵직해진 돈주머니.
아침까지만 해도 왕도는 카일에게 벽이었다. 통행세, 숙박비, 접수 마감, 귀족 사기꾼. 모든 것이 말하고 있었다.
돈 없고 신분 없는 놈은 줄 끝에 서라.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길이 조금 보였다.
돈은 흑철석으로 벌었다.
정보는 리엔에게서 얻었다.
접수 지연은 하르만 경의 이름으로 막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에리크 베르딘은 절대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귀족 자제들의 견제는 더 노골적이 될지 모른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단순히 문제를 풀고 검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밟고 올라가느냐를 정하는 첫 번째 전장이었다.
카일은 창밖을 보았다.
왕도의 밤은 밝았다.
귀족가 저택의 등불, 상점의 간판, 순찰병의 횃불, 술집의 붉은 불빛. 그 빛 아래에서 수많은 거래와 음모가 움직이고 있었다.
라그나가 말했다.
—인간의 도시는 둥지와 비슷하군.
'드래곤 둥지랑요?'
—아니다. 쥐 둥지.
카일은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미라가 침대 위에서 몸을 돌렸다.
"또 검이랑 얘기해?"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상대가 검이잖아."
"정이 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말 두 번째야. 수상한 말은 반복하면 더 수상해져."
카일은 대답 대신 리엔의 서류를 펼쳤다.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필기.
실기.
상황 평가.
그리고 귀족 자제들의 방해.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까지 남은 시간: 29일
현재 준비 상태: 검술: 생존형 마나: 불씨 수준 필기: 위험 자금: 안정 인맥: 형성 중
특별 경고: 귀족 자제와의 충돌이 예상됩니다.
카일은 마지막 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이라니. 이미 충돌했는데."
정정: 추가 충돌이 예상됩니다.
"친절하네."
—두려우냐?
라그나가 물었다.
카일은 잠시 생각했다.
왕도는 전장과 달랐다. 전장에서는 적이 칼을 들고 달려왔다. 왕도에서는 웃는 얼굴로 다가와 계약서와 추천장과 향수 냄새 뒤에 칼을 숨겼다.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전생의 카일은 이런 판에 들어올 돈도, 정보도, 배짱도 없었다.
이번에는 있다.
아직 부족하지만, 있다.
"두렵죠."
카일이 말했다.
"그런데 재미도 있습니다."
라그나가 낮게 웃었다.
—좋다. 두려움을 알고도 걷는 인간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미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중얼거렸다.
"멋있는 말은 내일 해. 오늘은 자."
카일은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왕도는 돈이 전부다.
아니, 정확히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돈으로 문을 열었다면, 그다음은 검으로 버텨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정보로 속이고, 배짱으로 밀고, 웃는 얼굴 뒤의 칼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
카일은 침대 옆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마나 호흡을 시작하자 가슴 안쪽의 작은 불씨가 천천히 흔들렸다.
내일은 더 바빠질 것이다.
사흘 뒤 예비 실기 확인.
그곳에서 그는 왕도 귀족 자제들 앞에 다시 서야 한다.
막내 용병이 아카데미 문 앞까지 기어 올라오는 꼴을, 그들은 결코 반기지 않을 것이다.
카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반기지 않아도 상관없다.
문은 열리라고 있는 것이다.
안 열리면?
부수고 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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