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 마을의 장부
라벤 마을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전생의 기억 속 라벤은 불에 반쯤 타 있었고, 우물에는 시체가 빠져 있었으며, 광장에는 까마귀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카일은 열여섯 살보다 조금 더 어렸고, 검은개 용병단의 막내답게 시체를 치우고 말 먹이를 나르는 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라벤은 달랐다.
빵 굽는 냄새가 골목을 타고 흘렀고, 아이들은 진흙투성이 공을 차며 뛰어다녔다. 잡화점 주인은 도적에게 빼앗겼던 마차가 돌아오자 눈물을 글썽였고, 마을 촌장은 갈론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검은개 용병단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촌장이 그렇게 말하자 브람이 옆에서 가슴을 쭉 폈다.
"그럼 은혜 대신 술로 갚아도 됩니다!"
갈론이 브람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퍽.
"우리는 의뢰비를 받는다."
"술도 의뢰비의 일종 아닙니까?"
"네 월급에서 까겠다."
브람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평범한 풍경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가슴 한쪽이 서늘했다.
전생에서 검은개 용병단은 이곳을 지난 지 석 달 뒤에 몰락했다.
정확히는 몰락이라기보다, 천천히 목을 졸린 것에 가까웠다. 작은 의뢰 실패가 쌓였고, 보급이 끊겼고, 이상하게 적의 매복이 잦아졌다. 믿었던 고용주가 계약금을 떼어먹었고, 왕도 용병 길드는 검은개 용병단을 위험 등급 단체로 분류했다.
마지막에는 단원 절반이 죽고, 남은 자들은 흩어졌다.
카일은 그때 이유를 몰랐다. 막내에게 누가 단장 회의 내용을 알려 주겠는가. 그는 그저 단원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갈론의 외눈이 날이 갈수록 더 깊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두 번째 삶은 다르다.
그는 이제 기억을 비교할 수 있었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무엇이 아직 터지지 않았는지.
"막내."
갈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정신을 차렸다. 단장은 촌장 집 안쪽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 안에는 촌장이 건네준 의뢰 확인서와 도적에게서 회수한 물품 목록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갈론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는 늘 그렇듯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등 뒤를 남에게 맡기지 않는 습관이었다.
"어젯밤에 하다 만 이야기를 해라."
카일은 문을 닫았다.
밖에서는 브람이 로만에게 술값을 빌리려다 거절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린은 누군가의 주머니를 검사하고 있었고, 마구간 쪽에서는 말들이 콧김을 뿜었다.
익숙한 소리들이었다.
그래서 더 늦출 수 없었다.
"단장님."
"말해라."
"왕도에서 들어오는 의뢰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갈론의 외눈이 가늘어졌다.
"범위가 넓군."
"특히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계약서입니다. 백합 문장이 찍혀 있고, 의뢰주는 대개 이름을 숨긴 귀족 대리인일 겁니다. 표면상으론 북부 보급로 호위나 세금 운송 호위처럼 보일 테고요."
갈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카일은 그 침묵을 잘 알았다. 갈론이 화났을 때가 아니라, 생각할 때의 침묵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예상한 질문이었다.
카일은 준비해 둔 거짓말을 꺼내려 했다. 도적에게 들었다든가, 마을 술집에서 소문을 주웠다든가 하는 그럴듯한 말.
그때 허리춤의 검에서 라그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짧게 해라. 저 외눈 인간은 냄새를 맡는다. 긴 거짓말은 썩은 고기와 같다.
카일은 속으로 대답했다.
'알아.'
그는 갈론을 똑바로 보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도적들이 노린 마차에 있던 장부에서 이상한 이름을 봤습니다."
"이름?"
"에드만 상회."
갈론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카일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전생에서 검은개 용병단이 마지막으로 크게 엮였던 상회. 겉으로는 곡물과 가죽을 취급하는 평범한 상단이었지만, 뒤로는 귀족들의 더러운 물건을 옮겨 주던 놈들.
그리고 용병단을 미끼로 쓰고 버린 놈들.
"에드만 상회가 왕도 길드에 의뢰를 넣으면 받지 마십시오. 혹시 받아야 한다면 계약서의 위약 조항을 반드시 바꾸셔야 합니다. 보급 책임을 용병단이 지지 않는다고 못 박아야 합니다. 길 안내인은 우리가 고르고, 중간 보급지는 두 곳 이상 확보해야 합니다."
갈론은 탁자 위의 장부를 천천히 넘겼다.
"그 장부에서 어디까지 봤지?"
"상회 이름과 물품 표시 정도입니다. 도적들이 내용 대부분을 태웠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장부는 실제로 있었다. 다만 카일이 말하는 위험의 대부분은 전생에서 가져온 기억이었다.
갈론은 한참 동안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숨을 고르게 쉬었다.
들숨.
날숨.
라그나가 가르친 마나 호흡을 흉내 내자, 심장이 조금 덜 뛰었다.
갈론이 낮게 말했다.
"너 요즘 이상하다."
"원래도 이상했습니다."
"전에는 멍청한 쪽으로 이상했다. 지금은 위험한 쪽으로 이상하다."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 평가는 꽤 정확했다.
갈론은 장부를 덮었다.
"경고는 들었다. 에드만 상회, 붉은 밀랍, 백합 문장. 기억하지."
카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믿으십니까?"
"믿는 게 아니다. 확인하는 거다."
갈론은 탁자에서 작은 은화를 하나 집어 카일에게 던졌다. 카일은 반사적으로 받아 냈다.
"정보값이다."
"이 정도로요?"
"헛소리면 네 월급에서 깐다."
"그럼 안 받겠습니다."
"이미 받았다."
단장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거의 칼집에 스친 빛처럼 짧은 웃음이었다.
카일은 은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바꾸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움직였다. 아직 용병단의 운명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경고 하나로 모든 불행이 사라질 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갈론은 들었다.
그거면 첫 단추는 충분했다.
떠나겠다는 말
카일은 그날 저녁까지 기다렸다.
용병단은 라벤 마을 외곽의 빈 창고를 숙소로 빌렸다. 마을 사람들이 답례로 고기 스튜와 검은 빵, 맥주 두 통을 가져왔다. 브람은 맥주통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고, 린은 브람이 먼저 달려들기 전에 잔을 정확히 나눠 놓았다.
"한 사람당 두 잔."
"린, 세상은 그렇게 각박하게 사는 게 아니다."
"네가 각박하게 마셔서 문제야."
로만은 조용히 빵을 세 조각 챙겼고, 미라는 창고 기둥에 기대 앉아 단검을 닦고 있었다.
미라.
검은개 용병단의 정찰병.
그녀는 카일보다 네 살 많았고, 늘 잠이 덜 깬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이 한번 숲을 훑으면 토끼 발자국과 도적 발자국을 구분했고, 사람 얼굴을 보면 거짓말의 절반은 알아챘다.
전생에서 미라는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에드만 상회의 의뢰 이후, 첫 번째 매복에서 사라졌다. 시체도 찾지 못했다. 카일은 당시 그것이 전쟁터의 흔한 실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안다. 검은개 용병단을 노린 손이 있었다면, 미라 같은 정찰병은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카일은 식사를 끝낸 뒤 갈론을 찾아갔다.
단장은 창고 밖에서 검을 갈고 있었다.
사각, 사각.
숫돌이 칼날을 문지르는 소리가 밤공기를 얇게 갈랐다.
"단장님."
"또 무슨 장부를 봤지?"
"이번엔 제 이야기입니다."
갈론의 손이 멈췄다.
카일은 잠시 입술을 적셨다.
말하기 전에는 쉽다고 생각했다.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검은개 용병단을 떠나 왕도로 간다. 인맥을 얻고, 정보를 얻고, 힘을 얻는다.
그런데 막상 말하려니 목구멍에 작은 돌이 걸린 것 같았다.
전생과 현생을 합치면 검은개 용병단에서 보낸 시간은 짧지 않았다. 욕을 먹고, 맞고, 굴렀다.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카일이 두 번째 삶에서 처음으로 지켜 낸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떠나는 말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용병단을 나가겠습니다."
갈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 창고 안에서 브람이 노래를 부르다 린에게 빵 조각을 맞는 소리가 들렸다.
라그나는 조용했다. 웬일로 끼어들지 않았다.
갈론이 숫돌을 내려놓았다.
"이유는?"
"왕도로 가야 합니다."
"돈 때문인가?"
"돈도 필요합니다."
"솔직하군."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왕도에는 귀족, 상인, 기사, 마법사, 길드, 학원까지 다 모입니다. 작은 용병단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앞으로 살아남으려면 그런 인맥이 필요합니다."
인맥.
전생의 카일이 가장 없던 것.
검을 못 쓰면 배울 스승이 없었다. 억울한 누명을 써도 변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위험한 의뢰를 피하고 싶어도 정보를 줄 사람이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강한 놈만 사는 것 같지만, 진짜 강한 놈들은 전쟁터에 서기 전에 이미 판을 짜 놓는다.
이번 생에는 그 판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갈론이 물었다.
"왕도에서 뭘 할 생각이지? 막내 용병이 갑자기 귀족들과 차를 마실 수는 없을 텐데."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볼 겁니다."
이번에는 갈론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외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아카데미?"
"예."
"거긴 귀족 자식들과 돈 많은 상인 자식들이 가는 곳이다."
"평민 전형도 있습니다."
"매년 몇 명 뽑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들어가면 가치가 크죠."
갈론은 카일을 빤히 보았다.
그 눈에는 의심과 걱정, 그리고 아주 희미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검술, 마나, 필기. 셋 다 봐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너는 글도 간신히 읽는다."
"그건 많이 아픈 말입니다."
"검도 간신히 휘두른다."
"두 번 아픕니다."
"마나는?"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안쪽에서 희미한 열이 움직였다. 정말로 작은 불씨였다. 손가락 하나 데우기도 힘든 불씨. 하지만 없던 것이 생겼다.
갈론의 눈빛이 변했다.
"……느끼기 시작했군."
"아주 조금입니다."
"누가 가르쳤지?"
카일은 허리춤의 낡은 검을 슬쩍 눌렀다.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느긋하게 말했다.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해라.
카일은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비겁한 제자 같으니.
갈론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품 안에서 낡은 가죽패 하나를 꺼냈다. 검은 개 머리가 거칠게 새겨진 용병단 표식이었다.
"가져가라."
"이건……."
"검은개 용병단에 있었던 증표다. 왕도 용병 길드에서 최소한 문전박대는 안 당할 거다."
카일은 가죽패를 받아 들었다.
손바닥 위의 패는 가볍고 낡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은화보다 무거웠다.
"감사합니다."
"착각하지 마라. 널 내보내는 게 아니다."
갈론은 다시 숫돌을 집어 들었다.
"네가 나가는 거다. 그러니 살아서 돌아와라. 죽으면 퇴단 처리가 귀찮다."
카일은 웃었다.
"반드시 귀찮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고양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다음 날 새벽, 카일은 짐을 꾸렸다.
짐이라고 해 봐야 별것 없었다. 여벌 셔츠 한 장, 말린 빵, 육포 조금, 단검, 물통, 그리고 갈론이 준 가죽패. 전생에서 그는 늘 가난했지만, 이번 생도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는 않았다.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목표 설정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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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기 목표를 지정하십시오.
카일은 잠시 창밖을 보았다.
라벤 마을의 새벽은 푸르렀다. 굴뚝에서는 얇은 연기가 올라왔고, 닭이 세상 망한 듯 울어 댔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합격.'
상태창의 글자가 바뀌었다.
장기 목표: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합격
보상: 조건 달성 시 공개
실패 시: 본인의 자존심이 크게 손상됩니다.
조언: 필기 공부를 미루지 마십시오.
카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얘는 왜 내 약점을 정확히 찌르지?"
—그 장부, 점점 마음에 드는군.
"너도 조용히 해. 너한테도 글자 가르칠 거야."
—나는 고대어, 용언, 별의 문자를 안다.
"그럼 왕국 역사 시험도 대신 봐."
라그나는 침묵했다.
—인간 왕국의 족보는 쓸데없이 자주 바뀐다. 한심한 분야다.
"모른다는 뜻이네."
—한심해서 안 외운 것이다.
카일은 피식 웃으며 낡은 검을 허리에 찼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웃는 버릇도 생겼네."
카일은 천천히 돌아섰다.
미라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작은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긴 머리를 끈으로 묶은 상태였다. 눈은 여전히 졸려 보였지만, 그 안쪽은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미라 누님."
"누님 소리 하지 마. 뭔가 숨길 때만 그러더라."
카일은 말문이 막혔다.
맞았다.
미라는 방 안으로 들어와 카일의 짐을 훑어보았다.
"말린 빵 셋, 육포 둘, 물통 하나. 길 떠나는 짐이네."
"잠깐 다녀올 일이 있습니다."
"왕도?"
카일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제 밤에 단장 방 밖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어. 아카데미 어쩌고."
"엿들으신 겁니까?"
"정찰병은 듣는 게 일이야."
정말 당당했다.
미라는 카일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너, 며칠 전부터 이상해. 도적 매복을 미리 알고, 단장한테 장부 이야기를 하고, 갑자기 마나도 느끼고, 이제는 왕립 아카데미 시험이라니. 막내가 하루아침에 막내가 아니게 됐잖아."
카일은 침묵했다.
미라의 눈을 속이는 건 쉽지 않았다. 아니, 거의 불가능했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발자국만 보고 사람의 키와 부상 부위를 맞히던 여자였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 말, 나쁜 놈들이 제일 많이 해."
"저 나쁜 놈 아닙니다."
"나쁜 놈들도 그렇게 말해."
"……반박이 어렵네요."
미라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도 간다."
카일은 눈을 깜빡였다.
"어딜요?"
"왕도."
"왜요?"
"수상하니까."
"이유가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단순한 이유가 오래가."
미라는 배낭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동전 부딪히는 소리가 짤랑 울렸다.
"그리고 단장이 허락했어."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단장님이요?"
"응. 네가 사고 칠 것 같으니 감시하래."
카일은 이마를 짚었다.
갈론답다. 보내 주기는 하되 그냥 보내지는 않는다.
미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 네 비밀을 캐내려고 따라가는 건 반쯤뿐이야."
"나머지 반은요?"
"왕도 구경."
"정말 솔직하시네요."
"그리고 아카데미 시험장에 막내 용병이 걸어 들어가서 귀족 도련님들 표정 망가지는 것도 보고 싶어."
그건 카일도 조금 보고 싶었다.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말했다.
—저 암컷 인간은 눈이 좋군. 귀찮지만 유용하다.
'암컷 인간이라고 부르지 마. 들키면 너부터 팔아넘길지도 몰라.'
—감히 고대의 적룡을?
'미라는 가능해.'
라그나는 잠시 침묵했다.
—조심해야겠군.
카일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위험할 겁니다."
"용병 일이 원래 그래."
"왕도는 전장보다 더 더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 더더욱 정찰병이 필요하겠네."
미라는 배낭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카일."
"예."
"네가 뭘 숨기든 상관없어.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하지만 검은개를 위험하게 만들 거면, 내가 먼저 널 찌를 거야."
카일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미라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카일도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럴 일 없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출발하자."
"지금요?"
"새벽길이 시원하잖아."
카일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익숙했다. 검은개 용병단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사람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 놓고, 바로 다음 순간 아무렇지 않게 길을 나섰다.
검은개 깃발 아래에서
용병단은 마을 입구에 모여 있었다.
카일은 자신이 조용히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
브람은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다. 로만은 작게 접은 지도를 내밀었고, 린은 빵을 천에 싸서 던졌다.
"이거 가져가."
린이 말했다.
카일은 빵 꾸러미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굶으면 멍청해져. 너는 더 멍청해지면 안 돼."
"감동이 좀 줄었습니다."
브람이 카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세게 두드려서 카일은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막내야! 왕도 가서 기죽지 마라. 귀족 놈들이 뭐라 하면 이렇게 말해. 우리 단장보다 세냐고!"
"그러면 바로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럼 먼저 때려!"
"아카데미 입학시험 보러 가는 겁니다. 결투장 아닙니다."
"세상은 다 결투장이다!"
브람의 철학은 대체로 주먹에서 시작해 주먹으로 끝났다.
로만은 조용히 카일에게 지도를 건넸다.
"큰길로만 가면 통행세가 세다. 여기 숲길을 타면 하루 줄일 수 있어. 대신 늪지대는 피하고."
"고맙습니다."
"왕도 서문 근처에 값싼 여관이 있어. 간판에 구부러진 숟가락이 그려져 있다. 주인은 욕이 많지만 죽은 쥐는 안 나온다."
"좋은 여관의 기준이 낮네요."
"싸면 기준도 낮아져."
카일은 지도를 품에 넣었다.
갈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특별한 말이 없었다. 그저 검은개 용병단의 낡은 깃발 아래에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그 앞에 섰다.
"다녀오겠습니다."
"합격하고 말해라."
"불합격하면요?"
"재시험을 봐라."
"그것도 떨어지면요?"
"그때는 돌아와서 마구간부터 청소해라. 네 자리는 비워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일거리는 남겨 두지."
카일은 웃었다.
이상하게 눈가가 조금 뜨거웠다.
전생에서 그는 제대로 작별하지 못했다. 전장은 언제나 사람을 갑자기 빼앗아 갔다. 어제까지 같이 욕하던 사람이 오늘은 이름표만 남겼고, 내일이면 그 이름표도 잃어버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자기 발로 떠난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무대로 가기 위해.
갈론이 낮게 말했다.
"카일."
"예."
"네가 경고한 일은 내가 확인한다. 그러니 너는 네 일을 해라."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예, 단장님."
갈론은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왕도에서는 웃는 사람을 조심해라."
"왜입니까?"
"진짜 칼은 대개 웃는 얼굴 뒤에 있다."
카일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라그나가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외눈 인간의 말은 쓸 만하다. 기록해 둘 가치가 있다.
'너도 웃을 수 있잖아.'
—나는 위대하게 비웃는 것이다.
'그게 더 위험한데.'
카일은 마지막으로 용병단을 둘러보았다.
낡은 갑옷, 삐걱거리는 마차, 늘어난 천막, 고기 냄새, 말똥 냄새, 브람의 시끄러운 웃음, 린의 잔소리, 로만의 무표정한 친절, 갈론의 무거운 침묵.
그 모든 것이 카일의 두 번째 삶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붙잡힌다고 해서 머물 수는 없었다.
카일은 발을 돌렸다.
미라가 옆에 따라붙었다.
"울어?"
"안 웁니다."
"눈 빨간데."
"새벽바람 때문입니다."
"그래. 새벽바람이 사람 마음도 찌르지."
미라는 더 놀리지 않았다.
둘은 라벤 마을을 벗어나 왕도로 이어지는 길에 올랐다. 흙길은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멀리 언덕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풀잎 끝의 이슬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카일은 허리춤의 낡은 검을 만졌다.
"라그나."
—왜 부르느냐.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까지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네가 게으르지 않다면 조금.
"조금?"
—네가 죽을 만큼 노력하면 제법.
"더 좋은 답은 없어?"
—드래곤으로 다시 태어나면 아주 많이.
카일은 검집을 툭 쳤다.
"그 농담 금지."
미라가 옆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방금 검이랑 싸웠어?"
"검집이 삐뚤어져서요."
"검집한테 말도 걸어?"
"정이 들면 그럴 수 있습니다."
미라는 한참 카일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수상해."
카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도.
그곳에는 귀족들이 있고, 돈 냄새 나는 상인들이 있고, 검을 든 천재들이 있고, 책으로 사람을 때릴 것 같은 교수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전생에서 카일이 닿지 못했던 운명의 중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생의 첫 번째 목표는 정해졌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그 문을 통과하면, 카일은 더 이상 막내 용병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낡은 검 하나, 수상한 드래곤 하나, 의심 많은 정찰병 하나를 데리고 길을 걷는 열여섯 살 소년일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모험은 대개 그렇게 시작된다.
대단한 깃발도, 번쩍이는 갑옷도 없이.
말린 빵과 빚진 은화, 그리고 돌아갈 곳을 뒤에 남겨 둔 채.
카일은 걸음을 빨리했다.
등 뒤에서 검은개 용병단의 깃발이 아침바람에 펄럭였다.
앞에는 왕도로 향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상태창이 조용히 빛났다.
첫 번째 목표가 지정되었습니다.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까지 남은 시간: 43일
권장 행동: 검술 수련, 마나 호흡, 기초 학문 공부
특별 경고: 글공부를 피한다고 글자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카일은 진심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도적 열 명이 낫겠네."
미라가 물었다.
"뭐가?"
"공부요."
미라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라그나도 머릿속에서 아주 즐겁게 웃었다.
—훌륭하다. 고통을 아는 제자는 빨리 큰다.
카일은 이를 악물고 걸었다.
왕도는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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