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냄새
카일은 한참 동안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작았다.
정확히 말하면, 작고 멀쩡했다.
전장에서 흑기사의 대검에 가슴을 꿰뚫리기 전, 그의 손은 온갖 흉터와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손가락 마디는 늘 부어 있었고, 손톱 밑에는 피와 흙이 굳어 잘 빠지지 않았다. 왼손 약지는 예전에 오크 도끼를 막다가 살짝 휘어졌고, 오른손 손바닥에는 불에 덴 자국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손은 달랐다.
굳은살은 얇았다. 흉터도 거의 없었다. 손목은 가늘었고, 손등의 핏줄도 아직 얌전했다.
열여섯 살.
카일은 그 단어를 떠올린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말도 안 돼."
목소리도 달랐다. 스물둘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 끝이 덜 여문, 아직 소년 티가 남은 목소리였다.
옆 침상에서 브람이 이불을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막내야. 네 코골이가 용병 셋을 죽일 만큼 크다는 거?"
카일은 브람을 보았다.
브람은 살아 있었다.
붉은 수염도 아직 전생보다 덜 길었다. 배도 조금 덜 나왔다. 무엇보다 목이 붙어 있었다. 흑기사의 칼 아래 쓰러졌던 그 브람이, 지금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며 벅벅 배를 긁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카일은 웃을 뻔했다.
사람은 정말 이상했다. 전장에서 죽은 동료가 살아 돌아오면 감동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은데, 막상 눈앞에서 보니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저 인간, 젊을 때도 배 긁는 건 똑같네.'
카일의 시선이 막사 입구로 향했다.
린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담요 속에서 작게 꼬물거리는 모습이 마치 겨울잠 자는 다람쥐 같았다.
"시끄러워……."
린이 잠결에 투덜거렸다.
"한 번만 더 떠들면 네 양말을 국에 넣어 버릴 거야……."
살아 있었다.
브람도, 린도.
그리고 카일 자신도.
가슴에는 구멍이 없었다. 부러졌던 왼팔도 멀쩡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가 따끔거리긴 했지만, 그것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라 너무 급하게 숨을 쉰 탓이었다.
카일은 침상 아래로 발을 내렸다.
딱딱한 나무 바닥이 발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진흙이 아니었다. 빗물과 피가 뒤섞인 전장도 아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검은개 용병단의 임시 막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용병단의 막사가 아니라, 용병단을 따라다니는 잡일꾼들이 자는 헛간이었다.
카일은 기억을 더듬었다.
열여섯 살의 자신은 아직 정식 용병이 아니었다. 굶어 죽기 싫어 검은개 용병단의 뒤를 따라다니며 솥을 닦고, 말똥을 치우고, 찢어진 천막을 꿰매던 시절이었다. 밥을 얻어먹는 대신 허드렛일을 했고, 가끔 훈련장에서 나무검을 주워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바로 내일.
카일은 검은개 용병단에 정식으로 들어가게 된다.
용병패를 받고, 싸구려 단검 하나를 지급받고, 모두에게 '막내'라고 불리기 시작하는 날.
그의 인생이 진흙탕으로 굴러 들어간 첫날.
아니, 전생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일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여기는 언제인가
카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람은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린은 여전히 담요 속에 숨어 있었다. 막사 안의 다른 잡일꾼들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누군가는 잠꼬대로 빵을 찾았고, 누군가는 이를 갈았다.
평화로웠다.
전장에 오래 있던 사람에게 평화란 이상한 것이었다. 너무 조용하면 오히려 불안했다. 적이 숨어 있는 것 같고, 화살이 날아오기 직전인 것 같고, 어딘가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릴 것 같았다.
카일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새벽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하늘은 아직 푸르스름했고, 동쪽 끝에만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대신 풀잎에 맺힌 이슬 냄새와 꺼져 가는 모닥불 냄새가 섞여 났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마차 세 대, 반쯤 무너진 울타리, 밤새 묶여 있던 말 두 필. 저 멀리에는 작은 마을의 지붕들이 보였고, 그 뒤로는 낮은 숲이 검게 누워 있었다.
카일은 그 숲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다.'
기억이 맞았다.
이곳은 라벤 마을 외곽의 물레방앗간 근처였다. 검은개 용병단은 이틀 뒤 남부 영주령으로 이동할 예정이었고, 그전에 마을에서 식량과 장비를 보충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도적들이 습격한다.
카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전생의 기억이 천천히 살아났다.
회색쥐단.
그리 대단한 도적단은 아니었다. 숫자는 스무 명 남짓. 기사도 없고 마법사도 없었다. 제대로 된 갑옷을 입은 놈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방심한 용병단의 보급 마차를 털기에는 충분했다.
전생의 카일은 그날 밤 아무것도 몰랐다.
술에 취한 용병들이 마을 선술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 때, 도적들은 숲길을 돌아와 마차를 습격했다. 잡일꾼 둘이 죽었고, 말 한 필이 도망쳤고, 식량 자루 절반이 사라졌다.
카일은 그 난리 속에서 처음으로 진짜 칼을 들었다.
무서워서 손이 덜덜 떨렸지만, 운 좋게 도적 하나의 발목을 베었다. 아니,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도적이 너무 방심했다. 상대는 카일을 겁먹은 꼬맹이로 봤고, 카일은 살려고 발버둥쳤다.
그 일 덕분에 단장 갈론의 눈에 들었다.
'배짱은 있군.'
갈론은 그렇게 말했고, 다음 날 카일을 정식 막내 용병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는 행운이라 생각했다.
굶어 죽지 않아도 된다고,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출발점이었다.
막내 용병 카일.
남의 명령에 굴러다니고, 남의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결국 흑기사에게 장난감처럼 찢겨 죽은 인생의 시작.
카일은 차갑게 식은 손끝을 문질렀다.
"오늘 밤 회색쥐단."
입 밖으로 말하자 이상하게 더 분명해졌다.
전생의 기억은 꿈이 아니었다.
그는 죽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정식 용병이 되기 하루 전으로.
"기회는 단 한 번이라……."
카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들렸던 낯선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되돌아가라.
값을 치러라.
"값이라면 이미 한 번 죽음으로 치른 거 아닌가?"
물론 대답은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눈앞에 뜬 이상한 글자
그때였다.
카일의 시야 한가운데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날벌레인 줄 알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파랗고 투명한 사각형이 허공에 떠 있었다.
카일은 얼어붙었다.
"……뭐야."
빛의 사각형 안에 글자가 나타났다.
그는 글자를 잘 읽는 편이 아니었다. 용병에게 글은 필수품이 아니었다. 칼을 피하는 법이 글자 읽는 법보다 훨씬 자주 목숨을 구했다.
그래도 간단한 글자는 알았다. 계약서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야 했고, 술집 외상 장부에 속지 않으려면 숫자 정도는 알아야 했으니까.
허공의 글자는 이상하게도 머릿속으로 바로 읽혔다.
마치 누군가 그의 생각 위에 글자의 뜻을 얹어 주는 것 같았다.
상태창이 개방되었습니다.
이름: 카일
나이: 16
직업: 잡일꾼
힘: 7
민첩: 8
체력: 9
감각: 11
마력: 0
특성: 회귀자, 악착같은 생존본능
보유 기술: 허드렛일, 도망치기, 엉성한 검술
미정산 보상: 1
카일은 눈을 깜빡였다.
글자는 그대로였다.
다시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세 번째로 눈을 깜빡였을 때, 카일은 아주 진지하게 자기 이마를 만졌다.
"열이 있나?"
없었다.
그는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상태창은 뻔뻔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카일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말 한 필이 그를 힐끗 보더니, '인간이 또 이상한 짓을 하는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태창?"
카일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사각형의 일부가 반짝였다.
상태창
사용자의 몸 상태, 능력, 특성, 보상 정보를 표시합니다.
"……친절하네."
카일은 멍하니 웃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모자라 눈앞에 글자가 뜬다. 보통 사람이라면 신전으로 달려가 사제에게 머리를 검사받아야 했다. 하지만 카일은 전생에 너무 많은 이상한 것을 봤다.
말하는 해골도 봤고, 불을 뿜는 도마뱀도 봤고, 술값을 내기 싫어서 죽은 척하다가 진짜 맞아 죽을 뻔한 용병도 봤다.
그러니 허공의 글자 정도야.
조금 많이 이상하긴 해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카일은 상태창을 뚫어져라 보았다.
힘 7.
민첩 8.
체력 9.
감각 11.
마력 0.
"마력 0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물론 전생에도 마법은 못 썼다. 마력 측정석에 손을 올렸을 때, 돌이 너무 조용해서 측정관이 돌이 고장 난 줄 알고 세 번이나 다시 시켰다.
결과는 같았다.
카일의 마력은 없었다.
측정관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이라도 열심히 해 보게.'
그 말도 참 잔인했다.
검에도 재능이 없었으니까.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특성 항목을 보았다.
회귀자.
악착같은 생존본능.
"이건 칭찬이냐 욕이냐."
악착같다는 말에는 이상하게 정이 있었다. 그래, 카일은 악착같았다. 멋지게 싸워 이긴 적은 거의 없지만, 끈질기게 살아남기는 했다. 굶주리면 훔쳤고, 맞으면 기어갔고, 죽을 것 같으면 도망쳤다.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손가락질도 못 한다.
살아남은 놈만 다음 날 욕을 먹을 수 있다.
카일은 문득 기술 항목을 보았다.
허드렛일.
도망치기.
엉성한 검술.
그는 잠시 침묵했다.
"……엉성한 건 굳이 안 써도 되잖아."
상태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얄미웠다.
막내의 재산
카일은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상태창은 그가 원하자 사라졌고, 다시 떠올리자 나타났다.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모습이 마법 같았다. 아니, 실제로 마법일 수도 있었다. 다만 마력 0인 카일이 쓰는 걸 보면 마법이라기보다는 누군가 억지로 붙여 준 장치에 가까워 보였다.
그는 자기 자리 옆의 낡은 가방을 뒤졌다.
내용물은 처참했다.
딱딱하게 굳은 검은빵 한 조각, 구멍 난 양말, 나무 숟가락, 녹슨 작은 칼, 동전 세 닢.
카일은 동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철화 두 닢, 동화 한 닢.
스물둘의 카일에게도 돈이 많았던 적은 없지만, 열여섯의 카일은 거의 자연재해 수준으로 가난했다. 쥐도 그의 가방을 털다가 울면서 나갈 판이었다.
'이걸로 뭘 하지?'
검을 사기에는 턱도 없었다.
갑옷? 농담도 안 됐다.
괜찮은 단검 하나도 못 산다. 기껏해야 마을 대장간에서 못 쓰는 칼날을 갈아 달라고 부탁하거나, 선술집에서 물 탄 수프 한 그릇을 사 먹는 정도였다.
하지만 전생의 카일에게는 돈보다 값진 재산이 있었다.
기억.
오늘 밤 도적들이 온다는 사실.
어디서 오는지, 누구를 먼저 노리는지, 어떤 실수를 하는지.
그리고 그 습격이 끝난 뒤 단장 갈론이 어떤 사람을 눈여겨보는지도 알고 있었다.
카일은 가방 안쪽에서 작은 가죽끈을 꺼냈다. 전생에도 갖고 있던 물건이었다. 별것 아닌 끈이지만, 손잡이가 미끄러운 칼에 감으면 꽤 쓸 만했다.
그는 녹슨 작은 칼을 들었다.
칼날은 짧고 볼품없었다. 끝은 살짝 무뎠고, 손잡이는 흔들렸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카일은 칼 손잡이에 가죽끈을 단단히 감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묶을 때마다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전생의 카일은 늘 준비가 늦었다. 위험이 닥치고 나서야 허둥지둥 칼을 찾았고, 피가 튀고 나서야 방패를 들었다. 배운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배울 기회가 너무 비쌌고, 실수의 대가는 항상 목숨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다.
오늘 밤, 도적들은 북쪽 숲길에서 온다.
처음에는 말들을 풀어 혼란을 만들고, 그다음 보급 마차를 턴다. 가장 키가 큰 놈은 오른쪽 다리를 절고, 우두머리는 왼손잡이다. 술에 취한 용병들을 피하려고 일부러 잡일꾼 막사 쪽으로 돈다.
그리고 전생에서 잡일꾼 로만이 죽었다.
늘 말이 많던 녀석이었다. 감자 껍질을 벗길 때마다 자신은 언젠가 큰 상인이 될 거라고 떠들었다. 카일은 그 말을 비웃었지만, 로만이 죽은 뒤 며칠 동안 감자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또 한 명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더 괴로웠다.
누군가 죽었는데,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카일은 칼을 허리춤에 꽂았다.
"이번엔 안 죽는다."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아직 자고 있는 저들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첫 번째 시험
해가 뜨자 막사는 금세 시끄러워졌다.
용병단의 아침은 닭보다 빨랐고, 욕설보다 시끄러웠다. 누군가는 물을 길러 갔고, 누군가는 불을 피웠고, 누군가는 어제 먹다 남은 죽을 보고 "이건 음식이 아니라 무기다"라고 투덜거렸다.
카일은 솥 앞에 앉아 죽을 저었다.
전생에서 수없이 해 본 일이었다. 물을 조금 더 넣어 양을 불리고, 탄 부분이 위로 올라오지 않게 조심하며, 소금은 마지막에 넣는다. 그래야 사람들이 '맛없다'고 욕하면서도 일단 먹는다.
브람이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막내야, 오늘 죽 냄새가 좀 낫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어제보다 물을 덜 탔거든."
브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어제는 물을 탔다는 소리냐?"
"비밀이야."
"이 자식이 벌써 용병다운 말을 하네."
브람은 낄낄 웃으며 죽을 받아 갔다.
린도 졸린 눈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카일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너 오늘 이상하다."
카일의 손이 멈칫했다.
"뭐가?"
"눈이."
"눈?"
"어제까진 굶주린 강아지 같았는데, 오늘은……."
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빚쟁이를 피해 도망칠 준비를 끝낸 사기꾼 같아."
"좋은 말이냐?"
"나쁜 말이지."
카일은 피식 웃었다.
린은 눈치가 빨랐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적의 시선, 동료의 거짓말, 주머니 속 마지막 육포까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런 린에게 카일은 아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사실 죽었다가 여섯 해 전으로 돌아왔고, 오늘 밤 도적들이 올 거야. 그리고 내 눈앞에는 상태창이라는 이상한 글자가 떠.'
이 말을 했다간 린은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카일의 이마를 짚어 본다.
브람을 불러 카일을 묶는다.
아니면 주방일이 싫어서 미친 척한다고 판단하고 뒤통수를 때린다.
셋 다 별로였다.
카일은 죽을 한 국자 더 퍼 주며 말했다.
"그냥 꿈자리가 사나웠어."
"무슨 꿈?"
"비 오는 전장에서 죽는 꿈."
린은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그릇을 받아 들고 툭 말했다.
"재수 없게 그런 꿈 꾸지 마. 용병단 밥 먹고 그런 소리 하면 밥맛 떨어져."
"원래 맛없잖아."
"그건 맞아."
린은 인정이 빨랐다.
카일은 웃었다.
그 웃음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점심 무렵, 용병단장 갈론이 돌아왔다.
갈론은 전생보다 조금 더 꼿꼿했다. 한쪽 눈은 이미 잃었지만, 남은 한쪽 눈은 여전히 칼날 같았다. 그는 마을 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옆에서는 부단장이 일정과 보급품 목록을 확인했다.
카일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밤 습격을 막으면, 단장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전생에서는 우연히 도적의 발목을 베어 눈에 들었다.
이번에는 우연이 아니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기회가 필요했다.
그리고 기회는 대개 위험한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카일은 눈앞에 상태창을 다시 띄웠다.
미정산 보상: 1
그 항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미정산 보상.
무슨 보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어렴풋이 느꼈다.
이 힘은 공짜가 아니다.
죽음에서 돌아온 값.
흑기사의 칼 아래서 잃은 목숨값.
그것이 아직 정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카일은 주먹을 쥐었다.
"좋아."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솥 끓는 소리에 묻혔다.
"오늘 밤, 첫 번째로 판을 뒤집는다."
도적은 숲에서 온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마을은 천천히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붙잡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선술집에서는 벌써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검은개 용병단의 절반은 그 선술집에 있었다.
전생과 똑같았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저 인간들, 오늘 밤 털리는 줄도 모르고 술부터 마시는군.'
물론 전생의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술은 못 마셨지만, 몰래 남은 고기 조각을 훔쳐 먹다가 배탈이 났다. 그래서 습격이 시작됐을 때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카일은 이번에는 고기를 포기했다.
인생 두 번째 열여섯 살이 되니 배탈 하나에도 신중해졌다.
그는 마차 근처를 서성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심부름을 하는 척했다. 물통을 옮기고, 밧줄을 정리하고, 말에게 여물을 주었다. 하지만 사실은 도적들이 올 길목을 확인하고 있었다.
북쪽 숲길.
울타리의 썩은 부분.
마차와 막사 사이의 어두운 틈.
카일은 전생의 기억과 지금의 지형을 맞춰 보았다.
'놈들은 저쪽으로 들어온다. 먼저 말의 밧줄을 자르고, 소란이 나면 두 놈이 마차 뒤를 턴다. 우두머리는 뒤에서 지시만 하다가, 일이 꼬이면 직접 나선다.'
그는 썩은 울타리 근처에 빈 항아리 세 개를 세워 두었다. 누가 발로 차면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놓았다.
그다음 마차 아래에는 기름 묻은 천 조각을 숨겼다. 불을 지르려는 게 아니었다. 도적이 급하게 움직이다 밟으면 미끄러질 만한 자리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말의 밧줄을 평소보다 짧게 묶었다. 도적이 끊어도 말이 바로 뛰쳐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단한 함정은 아니었다.
마법진도 아니고, 쇠창살도 아니고, 독화살도 아니었다. 그냥 가난한 잡일꾼이 만들 수 있는 초라한 방해물이었다.
하지만 전장은 늘 그런 사소한 것들로 기울었다.
진흙 한 줌 때문에 기사가 넘어지고, 헐거운 끈 하나 때문에 방패를 놓치고, 반 박자 빠른 고함 하나 때문에 사람이 산다.
카일은 그걸 여섯 해 동안 몸으로 배웠다.
해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린이 다가왔다.
"너 계속 뭐 해?"
카일은 항아리 위치를 발로 슬쩍 고치며 말했다.
"쥐덫 놓는 중."
"쥐?"
"응. 회색쥐."
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진짜 이상하다니까."
"칭찬으로 들을게."
"나쁜 말이라고 했잖아."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린은 한동안 그를 보다가, 품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내 던졌다. 돌멩이는 카일이 세워 둔 항아리 옆에 딱 멈췄다.
"항아리만 있으면 티 나. 돌도 몇 개 놔. 누가 봐도 원래 있던 잡동사니처럼."
카일은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왜. 나도 쥐 싫어해."
카일은 웃었다.
"그래. 고맙다."
"고맙다는 말도 이상해."
린은 투덜거리며 떠났다.
카일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린을 밀쳐 냈다. 린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둠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밀쳐 살리고 자신은 죽는 결말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막내로 죽지 않는다
밤이 깊었다.
선술집의 노랫소리도 잦아들었다. 막사 안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났다. 모닥불은 붉은 숯만 남기고 낮게 가라앉았다.
카일은 마차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허리춤의 작은 칼이 낯설게 느껴졌다. 전생에서 수많은 검을 쥐었지만, 지금 이 칼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아마 이 칼에 오늘 밤의 미래가 걸려 있어서일 것이다.
그는 상태창을 조용히 불렀다.
투명한 글자가 어둠 속에 떠올랐다.
이름: 카일
나이: 16
직업: 잡일꾼
특성: 회귀자, 악착같은 생존본능
미정산 보상: 1
카일은 상태창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잡일꾼이라."
전생의 그는 오랫동안 막내였다.
열여덟에 검을 들고, 스물둘에 죽을 때까지 막내였다. 누군가에게는 어린놈, 누군가에게는 미끼, 누군가에게는 대신 맞아 주는 방패였다.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카일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왕을 구한다거나, 마왕을 벤다거나, 세상을 뒤집는다는 말은 술 취한 음유시인이나 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눈앞에는 상태창이 있었다.
전생의 기억도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먼저 아는 머리와, 죽음에서 돌아온 몸과, 아직 정산되지 않은 보상 하나.
평범했던 막내 용병이 판을 뒤집을 무기를 손에 넣은 순간이었다.
물론 그 무기는 번쩍이는 성검도 아니고, 드래곤의 심장도 아니었다.
허공에 뜬 글자 몇 줄.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구르며 배운 지저분한 생존법.
하지만 카일에게는 충분했다.
영웅들은 멋진 무기로 세상을 구한다.
용병은 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쓴다.
그때였다.
바스락.
북쪽 숲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카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다시 바스락.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낮게 몸을 숙인 사내들이 울타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는 짧은 칼과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전생의 기억과 똑같았다.
맨 앞의 놈은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고 있었다.
카일은 천천히 칼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죽음을 한 번 겪었다고 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아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포 뒤에 다른 것이 있었다.
분노.
기대.
그리고 결심.
카일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전생에서 그는 이 밤을 우연히 살아남았다.
이번에는 우연에 맡기지 않는다.
그는 마차 그림자 속에서 몸을 낮추며 속삭였다.
"와라, 쥐새끼들아."
도적 하나가 썩은 울타리를 넘었다.
발끝이 항아리를 건드렸다.
와장창!
새벽처럼 고요하던 밤이 산산조각 났다.
카일은 튀어나갔다.
작은 칼이 달빛을 받아 짧게 번뜩였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문장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이번 생에서는, 막내로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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