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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내일을 훔치는 법

내일을 훔치는 법

Views 23약 11분생성형 AI 활용

오전 여섯 시 십칠 분

서울은 깨어나는 데 실패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은 떴는데, 아직 꿈을 다 버리지 못한 얼굴.

거리마다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누군가는 자기가 받은 로그를 세 번이나 다시 읽었고, 누군가는 바로 지워 버렸고, 누군가는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을 문장 앞에서 발이 붙었다.

당신의 알림은 세 번 지연되었습니다.

당신이 본 뉴스 제목은 다르게 배열되었습니다.

당신의 불안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겁을 냈다.

그다음에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진짜 분노는 늘 그렇게 온다. 소리보다 먼저, 계산을 끝낸 얼굴로.

을지로 극장 영사실 안에서 서린은 새 창 하나가 떠오르는 걸 보고 욕을 삼켰다.

검은 화면 중앙에 붉은 문장이 깜빡였다.

CIVIL CALM / 대규모 안정화 정리 프로토콜

그 아래 숫자가 붙어 있었다.

대상 군집 추산 : 38,214명

재이가 물었다.

'뭐야, 저건.'

서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녀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목소리가 나왔다.

'당황한 시민 정리용 백업이에요.'

'정리?'

'쉽게 말하면… 다시 덮는 거예요.'

재이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서린은 끝내 눈을 들지 못한 채 설명했다.

'당장 오늘 아침처럼 로그를 받고도 그냥 넘어가면 괜찮아요. 혼란으로 끝나니까. 근데 사람들이 자기 일상을 조작당했다는 걸 서로 연결하기 시작하면, 시스템은 그걸 위험으로 봐요. 그러면 대표가 최종 안정화 버튼을 누를 수 있어요.'

재이가 차갑게 물었다.

'누르면.'

서린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최근 72시간. 대상자들의 기억을 크게 잘라요. 불안의 원인을 통째로 지워서, 결국 아무도 정확히 증언 못 하게 만드는 방식.'

영사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창밖에서는 버스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커피를 사고, 택배를 부치고, 병원 예약을 확인하고 있었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 평범함 속에서 3만 명이 넘는 사람의 머릿속이 도려내질 예정이었다.

재이가 화면을 노려봤다.

'그래서 문답은 늘 이겼구나.'

서린은 대답 대신 다른 줄을 확대했다.

수동 승인 권한 : 대표 단독

'놈이 도망치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자기 흔적부터 지우려는 거예요.'

수천 명을 지우는 버튼

재이는 한참 말이 없었다.

쉽고 더러운 길은 언제나 설명이 간단하다.

몇 만 명의 기억을 잘라 버리면 된다.

그럼 증언은 흐려지고, 분노는 방향을 잃고, 공포만 남는다. 사람들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말하지 못한 채 다시 일상으로 밀려간다. 오늘 아침 분명 뭔가가 무너졌는데, 저녁쯤 되면 그냥 기분이 이상했던 하루로 남는다.

문답은 그 방식을 믿었다.

사람은 잊으면 잠잠해진다고.

사람은 기억을 잃으면 다시 다루기 쉬워진다고.

서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재이가 고개를 들었다.

'말해.'

'정리 프로토콜은 원래 외부로 내보내는 방향으로만 설계돼 있어요. 위에서 아래로. 관리자 권한에서 시민군으로. 근데 이걸 역으로 태울 수 있으면…'

그녀가 말을 멈췄다.

재이는 그녀가 왜 망설이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를 매개로.'

서린이 그를 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요.'

짧고, 잔인하게 정확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돌렸다. 복잡한 회로망 가운데 한 점이 붉게 떠 있었다. YJ-441. 재이의 관리자 패턴이었다.

'당신 뇌에 남아 있는 초기 관리자 흔적이 아직 살아 있어요. 그 흔적을 발신점으로 쓰면, 삭제 신호보다 먼저 반대 방향으로 프로토콜을 태울 수 있어요. 지우는 대신 돌려주는 형태로.'

'돌려줘?'

'각자한테서 빼앗긴 작은 진실들. 통째 복원은 아니에요. 기적도 아니고. 근데 적어도 누가, 어떻게, 자기 하루에 손을 댔는지는 붙잡게 만들 수 있어요.'

재이는 화면을 보다가 물었다.

'대신 나는.'

서린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당신 안에 들어 있던 삽입 기억이 다 들고일어날 거예요. 원래 기억도 같이요. 둘이 부딪치면… 당신이 어느 쪽에 붙잡힐지 장담 못 해요. 잘못하면 당신 자신이 발신점에서 찢겨요.'

'쉽네.'

재이가 건조하게 말했다.

서린은 웃지 못했다.

'아니요. 하나 더 있어요.'

'또 뭐.'

'지우는 건 쉬워요. 시스템도 원래 그걸 잘하니까. 근데 돌려주는 건, 받는 사람도 견뎌야 해요. 자기가 피하고 싶었던 진실까지 같이 돌아가거든요. 자기가 그날 왜 입을 다물었는지, 왜 누군가를 못 만났는지, 왜 하필 그 순간 겁을 먹었는지. 다.'

재이가 창밖을 봤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한 여자가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화면에 뜬 로그를 읽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용기를 모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게 내일을 바꾸는 거겠지.'

서린이 물었다.

'뭐가요.'

재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지워서 조용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버텨서 달라지는 거.'

그리고 그는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연결해.'

문이 열리는 방향

장치는 놀라울 만큼 단순했다.

얇은 헤드밴드, 귀 뒤에 붙이는 접촉패치 두 장, 관자놀이를 누르는 검은 전극. 세상을 바꾸는 도구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했고, 그래서 더 진짜 같았다.

서린은 재이에게 장비를 씌우면서도 손끝이 떨렸다.

'들어가면,' 그녀가 말했다. '보이는 걸 다 믿지 마세요.'

'그건 원래도 잘 안 믿어.'

'이번엔 특히 더요. 당신이 가장 보고 싶었던 장면부터 꺼낼 거예요.'

재이가 눈썹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린은 패치를 눌러 붙이며 덧붙였다.

'가장 후회하는 장면도요.'

전원이 들어가자 낮은 울림이 영사실 안을 채웠다. 모니터에는 수만 개의 얇은 선이 떠올랐다. 시민들의 단말, 병원 서버, 교통망, 광고 제어판, 학교 공지 채널, 지역 방송 백업선. 서울이란 도시가 사실은 콘크리트보다 훨씬 많은 신호들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린이 마지막 설정을 눌렀다.

'대표가 지금 남산 데이터센터 보조동으로 이동 중이에요. 타워는 버렸어요. 거기서 직접 정리 프로토콜 승인하려는 것 같아요. 우리한텐 십이 분.'

재이가 헤드밴드를 쓴 채 웃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늘 아슬아슬하네.'

'그게 당신 취향인가 보죠.'

'아니.'

재이는 눈을 감았다.

'내 취향은 원래, 안 하는 쪽이었어.'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재이는 손을 접촉 패드 위에 올렸다.

차가운 표면이 손바닥의 열을 서서히 삼켰다.

모니터 중앙에 문장이 떴다.

역전송 경로 확보 중

매개체 인지 패턴 확인

자아 고정 실패 시 비가역 손상 가능

서린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준비됐어요?'

재이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아니.'

그리고 한 박자 뒤에 덧붙였다.

'근데 하자.'

내가 나라는 증거

처음 들어온 것은 빛이 아니라 냄새였다.

비에 젖은 콘크리트 냄새.

곧이어 형광등이 너무 밝은 복도.

아이 울음.

누군가 뛰는 발소리.

재이는 눈을 떴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수십 개의 장면이 겹쳐 있었다. 복도 위에 교실이 얹히고, 교실 위에 병실이 얹히고, 병실 위에 오래된 아파트 계단이 얹혔다. 서로 다른 시간이 한꺼번에 열려, 마치 누군가 인생을 잘게 잘라 한 화면에 던져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네가 본 건 다 착각이야.

네가 무서워한 건 원래 네 성격이었어.

도망친 건 너야.

살리지 못한 것도 너고.

그중에는 너무 다정해서 더 끔찍한 목소리도 있었다.

이쪽으로 오면 편해져.

기억 안 해도 돼.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버전으로 정리해 줄게.

재이는 그 자리에 선 채 숨을 골랐다.

삽입 기억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짓말은 들키면 끝난다. 대신 문답은 진실 사이사이에 편리한 해석을 끼워 넣었다. 네가 비겁했던 이유, 네가 침묵했던 이유, 네가 늦었던 이유를 전부 그럴싸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면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상처보다 그 설명을 더 믿게 된다.

그게 가장 교묘했다.

거짓 장면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선우가 웃고 있었다. 멀쩡한 얼굴이었다. 죽지 않았다. 피도 없고, 떨리는 손도 없고, 마지막 녹음도 없다. 그는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됐어, 재이. 여기서 그만해. 애초에 네 잘못 아니었잖아. 다 시스템 탓이지. 그러니까 편하게 잊어.'

재이는 그 얼굴을 오래 봤다.

너무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짜였다.

진짜 선우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진짜 선우는 사람이 덜 아프게 거짓말해 주는 타입이 아니라, 아파도 끝까지 같이 보게 만드는 쪽이었다. 다정했지만, 쉬운 다정함은 아니었다.

가짜 선우가 다시 말했다.

'네가 버티면 뭐가 달라져.'

그 순간 다른 장면이 옆에서 들이받았다. 삽입된 기억이 아니라, 재이가 잃어버렸던 어떤 진짜 조각이었다. 선우가 피투성이 얼굴로 웃으며 뭐라고 욕을 했다. 끝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대신 감정이 남았다.

같이 보자는 감정.

피하지 말자는 감정.

재이는 입 안쪽을 씹었다. 피 맛이 났다. 그 현실감이 오히려 닻이 됐다.

'내가 누구인지,' 그가 낮게 말했다. '기억이 다 맞아야만 정해지는 건 아니야.'

주변 장면이 뒤틀렸다. 목소리들이 커졌다.

네가 틀렸어.

넌 원래 겁쟁이야.

넌 늘 늦었어.

넌 끝까지 모를 거야.

재이는 흔들리는 바닥 위에 무릎을 굽혔다가, 다시 일어섰다.

맞다. 겁이 많았다.

늦은 적도 많았다.

모르는 일도 끝까지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있다고 해서, 지금 여기서 또 물러서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붙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걸로만 정해지지 않아.'

화면 저편에서 서린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 들려왔다.

'재이, 발신점 잡아요. 지금!'

재이는 눈앞에서 산산이 흔들리는 장면들 사이로,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았다.

얼굴도 아니고 날짜도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누군가가 울 때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순간.

아이를 두고 도망치지 못했던 순간.

끝났다고 믿고 싶었는데도 끝내 문 앞에서 돌아서지 못했던 순간.

그는 그 순간들을 붙잡았다.

정확한 순서는 몰라도 됐다.

진실은 순서보다 무거웠다.

'열어.'

재이가 말했다.

이번에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내가 본 거, 내가 피한 거, 내가 놓친 거… 다 열어. 대신 남의 머리부터 자르지는 마.'

모니터 바깥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서린이 숨을 삼켰다.

'역전송 잡혔어요.'

재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가.'

그리고 신호가 도시로 쏟아졌다.

서울이 화를 기억하는 법

이번에 돌아간 것은 영웅적인 진실이 아니었다.

세상을 한 번에 뒤집는 폭로도 아니었다.

너무 작아서 그래서 더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강북의 한 병원 앞에서, 오전 진료를 미루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여자가 문 앞에서 멈췄다. 화면 속 기록 한 줄이 갑자기 자물쇠처럼 풀렸다. 전날 그녀는 병원 예약 취소 권고를 세 번이나 받았다. 이상해서 무시하려다가, 마지막 문구가 너무 다급해서 결국 발길을 돌렸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설명 못 했는데, 이제 알았다. 누군가 자기 불안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로의 편의점 야간 직원은 계산대 아래에 숨겨 둔 메모지를 다시 펼쳤다. 며칠 전 그는 분명 한 남자의 얼굴을 봤다. 그런데 신고 전화를 걸려는 순간, 휴대전화에 전혀 관계없는 가족 안전 경고 알림이 연달아 뜨는 바람에 손이 멈췄다. 겁먹었던 이유가 자기 소심함만은 아니었다는 걸 그는 처음 이해했다.

마포의 한 고등학생은 친구 채팅방을 열었다가 손을 떨었다. 그날 자신이 괜히 예민했던 게 아니었다. 같은 시간대, 같은 문장들이 반복해서 그의 피드를 때렸다. 사고, 폭발, 실종, 경고. 세상이 위험하다는 말만 정교하게 모아 보여 줬다. 누군가 일부러 그의 하루를 공포 쪽으로 밀었다.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은 처음에는 창백해졌다.

그다음, 얼굴이 달라졌다.

공포는 혼자 있을 때 커진다.

분노는 연결될 때 생긴다.

각자 다른 장소에서 각자 다른 로그를 본 사람들이 아주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병원은 병원끼리, 학교는 학교끼리, 같은 시간대에 같은 이상을 겪은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겹쳐 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날 집에 그냥 있었지.

왜 그 시간에 뉴스를 믿었지.

왜 전화를 끊었지.

왜 신고를 미뤘지.

이 질문들이 더는 자기혐오로만 끝나지 않았다.

누가 그랬지, 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이 그제야 진짜로 깨어났다.

가장 조작된 사람들

오전 여섯 시 스물여덟 분, 문답 대표는 남산 데이터센터 보조동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좋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여전히 표정이 정돈돼 있었다. 건물 밖에서는 이미 항의가 시작됐지만, 그는 그런 소리를 오래전부터 통계값으로만 듣는 사람 같았다.

보좌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 준비됐습니다. 공항 쪽 라인은 아직—'

대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이라는 말은 회의실에서나 써.'

'시민 제보가 예상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곧 잠잠해진다.'

그는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오히려 자기 입으로 결말을 미리 말하는 사람처럼 들렸다.

'사람은 자기 고통을 오래 들고 못 가. 무섭게 만들면 숨고, 흐리게 만들면 잊어. 둘 다 안 되면 서로를 의심하지.'

그가 지하 승인실 문 앞에 섰을 때였다.

복도 끝 벽면 스크린이 갑자기 켜졌다.

보조동 내부 방송망이 누군가에게 탈취된 듯, 검은 화면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쉰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병원 환자복 차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누구나 먼저 상태부터 의심했을 얼굴.

그녀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날 내 딸이 사라졌다고 나는 세 번 말했다. 세 번 다, 내가 과민반응하는 엄마라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지금 알겠다. 내가 받은 문자, 내가 들은 안내, 내가 보게 된 기사 제목이 전부 같은 쪽으로 밀고 있었다. 내 딸이 위험한 게 아니라, 내가 틀린 사람처럼 보이게.'

대표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헬멧을 든 배달 기사였다. 눈 밑이 퀭했고 말투는 거칠었지만, 목소리는 이상하게 또렷했다.

'난 그날 신고하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약물 검사 경고가 내 이름으로 떴다.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 내 하루를 전부 방어하는 데 써버렸다. 지금 로그 보니까 누가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 내가 입 다물게 하려고.'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었다. 손은 떨렸지만 눈은 아니었다.

'저는 계속 문제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근데 제가 화를 낸 시각마다, 제 피드에 같은 종류의 영상이 몰렸어요. 자극적인 폭력 영상, 불안 유발 기사, 위기 경고. 저를 위험한 애로 만든 다음, 제가 하는 말을 다 위험한 말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대표는 스크린을 꺼 버리라고 손짓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 화면이 꺼지면 다른 화면이 켜졌다. 엘리베이터 위 작은 모니터, 복도 끝 비상패널, 보안실 TV, 심지어 직원용 태블릿까지. 증언이 연달아 터졌다.

이상한 점은 단 하나였다.

그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었는데, 가리키는 방식은 정확히 같았다.

문장을 바꾸고,

알림을 늦추고,

두려움을 부풀리고,

증언자를 불안정해 보이게 만들었다.

가장 조작된 사람들.

그래서 가장 믿기 어려웠던 사람들.

그들이 한꺼번에 같은 구조를 말하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보이던 것들이 오히려 가장 강한 증거가 됐다.

대표의 보좌관이 뒤로 물러섰다.

복도 양쪽 보안 인력의 눈빛도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는 보호 임무를 수행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표정에는 처음 보는 종류의 망설임이 들어왔다. 자신들도 같은 도시에서 같은 알림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그 얼굴들이 뒤늦게 기억해 낸 것 같았다.

대표가 낮게 말했다.

'저건 편집본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데이터센터 외벽 전체 전광판에 마지막 화면이 떴다.

카메라는 흔들리고 있었고, 화질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 속 남자의 얼굴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예전에 문답 프로젝트의 피실험자로 분류됐던 남자였다. 기억 오류, 공격성, 진술 불안정. 그렇게 낙인 찍혀 누구도 오래 듣지 않았던 사람.

그는 카메라를 향해 아주 천천히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고쳐야 할 오류라고 불렀지. 근데 오류가 아니었어. 당신들이 손댄 흔적이었어.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이상하게 만든 거야.'

그 말이 끝나자 데이터센터 밖에서 함성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시민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도망은 늘 조용할 때만 가능하다.

진실이 한꺼번에 입을 열면, 도망칠 통로부터 막힌다.

대표는 승인실 문으로 몸을 틀었지만, 보안 잠금이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 내부 권한을 끊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정돈된 얼굴을 잃었다.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던 얼굴에, 아주 인간적인 공포가 번졌다.

그는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내가 없으면 이 도시는 서로를 찢어 먹는다!'

복도에 울리던 증언 중 하나가 그 말을 덮었다.

'그래도 우리 손으로 찢고 꿰매는 게 낫지.'

누가 했는지 모를 그 문장이, 이상하게도 모든 소음 위로 또렷하게 남았다.

대표는 더 이상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했다.

그를 무너뜨린 건 총도 아니고 폭탄도 아니었다.

한때 가장 쉽게 지워졌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내일은 지워서 오지 않는다

영사실에서 서린은 대표 측 권한이 차단되는 걸 확인하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잡혔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재이를 돌아봤을 때, 안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재이는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헤드밴드 아래로 식은땀이 턱 끝까지 흘렀다. 손가락은 패드 위에 붙은 듯 굳어 있었다.

서린이 급히 전극을 떼어 내려고 하자, 재이가 아주 약하게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그의 눈은 아직 제대로 초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보여요?' 서린이 물었다.

재이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많이.'

그리고 조금 웃으려다 실패한 얼굴로 덧붙였다.

'근데 전보다 덜 무서워.'

서린은 숨을 참았다.

재이가 벽 쪽을 멍하니 보며 말했다.

'이상하네. 난 계속 진실이란 게 기억을 전부 되찾는 거라고 생각했어. 빠진 장면 하나 없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몇 시였는지, 정확히 다.'

그는 젖은 숨을 내쉬었다.

'근데 아닌 것 같아. 어떤 건 끝까지 안 돌아올 거야.'

서린은 조용히 물었다.

'그럼요.'

재이는 천천히 그녀를 봤다.

눈은 지쳐 있었지만, 그 안에는 전에 없던 단단함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는 있네.'

창밖의 서울은 이미 다른 소리로 가득해지고 있었다.

경적.

신고.

실시간 제보.

서로 확인하는 전화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욕하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사과하고 있을 것이다.

엉망이었다.

하지만 이번 엉망은 누군가가 설계한 마비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도시가 자기 통증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였다.

재이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가, 아주 천천히 다시 떴다.

'서린.'

'네.'

'이제 알겠어.'

'뭘요.'

그는 잠시 창밖을 봤다.

아침빛이 서울의 유리창마다 제멋대로 부서지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았고, 예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래서 진짜 같았다.

재이가 낮게 말했다.

'내일을 훔치는 제일 센 방법은, 누군가 머릿속을 비우는 게 아니야.'

서린이 숨을 죽였다.

재이는 끝까지 말했다.

'진실을 못 견디게 만들어서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거지.'

그는 마른 입술을 한 번 적셨다.

'그러니까 반대로 하면 돼. 안 지우고, 견디면.'

영사실 안은 잠시 조용했다.

멀리서 사이렌이 들렸다.

아주 멀리, 그러나 분명히 들리는 소리였다.

누군가의 끝이 시작되는 소리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내일이 비로소 자기 손에 돌아오는 소리이기도 했다.

재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도망치듯 감은 게 아니었다.

버텨 낸 사람이 잠깐 쉬기 위해 감는 눈이었다.

서울은 그날 아침, 누군가가 대신 써 둔 각본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틈으로, 아직 아무도 편집하지 못한 내일이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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