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책에 포함된 노트내일을 훔치는 법

선우의 생방송

Views 36약 10분생성형 AI 활용

꺼지지 않는 화면

학교를 빠져나온 뒤에도 재이는 자꾸 뒤를 봤다.

쫓아오는 차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방금 끝난 방송이 아직도 자기 등 뒤 어딘가에서 계속 재생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의 얼굴, 서울 전체로 퍼져 나가던 문장들, 그리고 그 문장 때문에 갑자기 너무 좁아진 도시.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야간 도로는 평소와 똑같아 보였지만, 이제는 신호등 하나도 이전과 같은 색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린은 운전대를 꽉 쥔 채 말이 없었다. 신호 대기 중에도 룸미러만 세 번씩 봤다. 재이는 조수석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뉴스 속보가 몇 초 단위로 새로 올라오고 있었다. 첫 번째 방송은 이미 찢겨서 수백 개의 짧은 영상이 되어 떠돌고 있었다. 누군가는 영웅이라 했고, 누군가는 합성이라 했고, 누군가는 드디어 미친 도시가 자기 얼굴을 보여 줬다고 썼다.

그 사이에 GOOD_PERSON_v1 파일은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었다.

좋은 사람.

멀쩡해서 더 더러운 말.

재이는 고개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았다. 선우가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죽었다고 믿게만 된 건지, 그 둘의 차이가 지금부터는 얼마나 큰지 아직 감이 오지 않았다. 사람이 친구의 죽음을 오래 믿고 살다가, 어느 순간 그 죽음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알게 되면 기쁨보다 먼저 모욕감이 온다. 네가 슬퍼했던 시간은 누구 것이었냐고, 세상이 뒤늦게 비웃는 것 같아서.

그때였다.

도로 오른편 전광판이 검게 꺼졌다.

광고가 사라진 자리에서 짧은 잡음이 튀었다. 치직. 이어서 앞차의 내비게이션 화면이 멈췄다. 횡단보도 앞 편의점 TV가 동시에 검어졌다. 버스 정류장 도착 안내판이 한 줄의 흰 점으로 흔들렸다. 너무 많은 화면이 한순간에 같은 방식으로 망가지는 걸 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늘을 본다. 누가 위에서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린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재이가 몸을 일으켰다.

차 안 대시보드 화면이 툭, 하고 켜졌다.

처음엔 어두운 천장만 보였다. 콘크리트에 오래 밴 습기 자국, 어딘가 삐걱거리는 환풍기 소리, 카메라를 급히 세운 사람의 흔들림. 그리고 화면이 아래로 기울자,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박선우였다.

재이는 숨을 잊었다.

녹화 화면 속에서 본 얼굴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이번에는 너무 현재였다. 눈이 카메라를 놓치지 않고 흔들렸고, 화면 밖에서 들린 금속성 충격음에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관자놀이 아래에는 갓 긁힌 상처가 있었고, 목소리 끝에는 지워지지 않은 숨이 걸려 있었다.

죽은 사람은 이렇게 타이밍 좋게 숨을 멈추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만 이런 식으로 버틴다.

선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예약방송 아니다."

짧은 정적.

그는 마른 웃음 비슷한 걸 흘렸다.

"그러니까 잘 들어. 나 아직 안 죽었어."

재이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져 발밑으로 떨어졌다. 서린은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 차를 갓길에 붙였다. 뒤차 경적이 연달아 울렸지만 둘 다 돌아보지 않았다. 서울의 소음이 전부 물속 소리처럼 멀어졌다. 남은 건 화면 속 선우의 얼굴뿐이었다.

그 얼굴이 아주 잠깐, 재이를 똑바로 보는 것 같았다.

"재이야. 네가 지금 이걸 보고 있으면, 일단 한 가지는 틀렸다는 뜻이지. 내가 남긴 유언은 유언이 아니었어."

목 안쪽에서 무언가 뜨겁게 올라왔다. 화인지 안도인지 구분이 안 갔다. 재이는 거의 욕처럼 선우의 이름을 뱉었다.

"이 미친 새끼…"

선우는 그 말을 들은 사람처럼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선우의 생방송

죽은 줄 알았던 진행자

이번 생방송은 첫 번째 것과 달랐다.

첫 번째 방송이 도시를 찢어 열었다면, 두 번째 방송은 그 틈에 칼을 꽂았다. 화면 아래에는 실시간 시간 표시가 떠 있었고, 왼쪽 위에는 불법 송출 경고처럼 보이는 깨진 코드가 계속 흘렀다. 선우는 일부러 손목시계를 카메라 앞으로 가져왔다. 초침이 떨리며 움직였다.

"합성이라고 할 사람들 있을 거다. 그러라고 해. 원래 너무 늦게 나타난 진실은 늘 합성 취급부터 받으니까."

그가 카메라를 옆으로 돌렸다.

어두운 공간 한쪽에 쌓인 장비들이 보였다. 휴대용 인코더, 낡은 UPS 배터리, 잘라 놓은 통신 케이블, 그리고 오래된 CRT 모니터 두 대. 모니터 중 하나에는 실시간 뉴스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죽은 남자의 생방송, 전국 확산

선우가 다시 화면을 바로 잡았다.

"방금 자막 봤지.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화면이 생방송이라는 증거는 그걸로 충분할 거다. 더 확실한 걸 원하는 사람을 위해 하나 더 말해 줄게."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가, 어딘가 들여다보듯 눈을 옆으로 옮겼다.

"광화문 사거리 전광판 앞에서 휴대전화 들고 있는 남자. 검은 우산 접어. 너 지금 화면 다 가리고 있어."

순간 방송 화면 한쪽이 분할되며 광화문 사거리 CCTV가 떴다. 정말로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그 장면이 서울 곳곳의 화면으로 다시 송출됐다.

살아 있다.

재이는 그제야 확실히 느꼈다. 이건 녹화된 결심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보다 한 발 먼저 움직이려는 사람의 방송이었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시간 없어. 그래서 바로 간다."

화면이 갈라졌다.

이번엔 문서와 지도, 표, 구역별 색깔 분포가 빠르게 지나갔다. 선우가 말했고, 서울은 듣고 있었다.

"너희가 지금까지 '기억 거래'라고 불렀던 건 겉껍데기다. 부자들이 남의 추억 사서 노는 취미, 범죄자들이 증언 바꾸는 기술, 환자 기록 지우는 뒷거래. 다 맞아. 근데 그건 앞가림이다. 진짜 목적은 더 크다."

그가 화면에 전국 지도를 띄웠다. 선거구 몇 곳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 기술은 사람 기억을 통째로 새로 만드는 데 쓰인 게 아니다. 그건 비용도 많이 들고 실패도 잦아. 대신 더 싸고, 더 조용하고, 더 효과적인 방식이 사용됐다."

선우가 손가락으로 화면의 단어들을 짚었다.

감정 우선순위 조정

불안 자극 재배치

친숙도 귀속 실험

"쉽게 말하면 이거다. 어떤 이름을 들었을 때 먼저 올라오는 감정을 바꾸는 거야. 기억을 전부 바꾸는 게 아니라, 기억 위에 얹히는 감정의 무게를 바꾸는 거지. 무서워해야 할 사람을 익숙하게 보이게 만들고, 의심해야 할 장면을 피곤한 소음처럼 느끼게 만든다."

서린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정서 태깅…"

선우의 설명은 더 잔인할 만큼 쉬웠다.

"선거철이 되면 사람들은 정책보다 기분으로 먼저 움직여. 누구 말이 맞는지 다 따지기 전에, 누가 안전해 보이는지부터 고른다는 뜻이지. 그걸 만지는 실험이 몇 년 동안 있었다."

화면에 또 다른 자료가 떴다. 정신건강 앱, 학교 상담 프로그램, 재난 안내 알림, 지역 케이블 인터뷰, 병원 대기실 영상. 얼핏 보면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한 군데서만 한 게 아니다. 의료, 교육, 복지, 방송, 재난 대응. 사람 마음이 잠깐이라도 무방비해지는 자리마다 같은 기술을 심었어. 상담을 받는 동안, 대기실 TV를 보는 동안, 재난 문자 뒤에 뉴스를 보는 동안, 같은 얼굴과 같은 문장을 조금씩 반복해서 연결했다."

이번에는 선거 지도 옆에 숫자가 떴다. 사전 여론조사 변화, 부정 감정 반응률, 투표율 편차, 위기 대응 신뢰도 상승 수치.

"처음엔 구 단위 보궐선거에서 시험했고, 다음엔 광역 단위 여론 실험으로 키웠다. 기억 거래 시장은 그 데이터를 씻어서 넘기는 세탁기였어. 불법 장사처럼 보여야 아무도 국가 단위 실험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재이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한 번에 맞물렸다. 병원 지하의 파일, 좋은 사람의 조건, 선우가 목숨 걸고 모았던 테이프, 폭발, 편집된 증언. 누군가 한 사람의 기억을 망가뜨리는 일과 도시 전체의 표심을 만지는 일이 한 줄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줄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좋은 사람의 조건

선우는 물을 마시려는 듯 빈 컵을 들었다가, 안이 비어 있는 걸 보고 그냥 내려놓았다. 그 짧은 동작 하나가 오히려 방송을 더 무섭게 만들었다. 너무 인간적이어서.

"이제 문서 하나를 보여 줄게. 너희가 방금 본 GOOD_PERSON_v1은 초안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 뒤 버전들이야."

화면 가득 표가 떴다.

하얀 배경 위에 검은 글씨. 관공서 보고서 같은 단정한 형식. 그런데 적힌 내용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문장이었다.

안정적 시민군 선별 지표

불쾌 기억 지속 저항성

권위적 서사 수용도

타인 피해에 대한 지연 공감률

위기 시 집단 동조 반응

선우가 천천히 읽었다.

"좋은 사람의 조건은 착함이 아니다. 잘 잊는 능력, 불편한 걸 오래 붙들지 않는 습관, 이상한 걸 봐도 내 일이 아니라고 넘기는 순응성. 그게 여기서 말하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니까 누군가 너한테 좋은 시민, 안정적인 유권자, 건강한 회복 탄력성 같은 말을 너무 아름답게 할 때는 한 번쯤 의심해. 그 말들이 사람을 살리려는 건지, 아니면 다루기 편한 형태로 깎으려는 건지."

재이는 자기 손등에 핏기가 빠지는 걸 느꼈다.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설명할 수 없던 공백들, 어떤 장면은 떠오르기 직전에 꼭 안개처럼 흩어지던 습관, 자신이 정말 자기 판단으로 살아온 게 맞는지 묻게 만들던 순간들. 그게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설계의 흔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는 이제 알았다.

선우가 다시 말했다.

"누군가는 이걸 치료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안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선거가 다가오면, 이름만 바꿔 같은 걸 반복했다. 기억을 고치는 게 아니라, 시민의 반응을 '정상 범위'로 맞춘다고."

화면 아래 자막이 떴다.

비정상 반응군 관리 프로토콜

그 아래에 더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반복 노출, 사회적 고립 유도, 신뢰 인물 재배치, 편의적 죄책감 삽입

재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죄책감까지 설계했다고?"

서린이 대답 대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선우가 마치 그 질문에 답하듯 고개를 들었다.

"죄책감은 아주 유용하다. 사람이 진실보다 자기 탓을 먼저 하게 만들거든. 그러면 화살이 위로 안 올라간다."

차 밖 인도에는 이미 사람들이 멈춰 서 있었다. 카페 안 TV를 보던 사람도, 택시에서 막 내린 사람도, 편의점 문을 열다 만 사람도 전부 같은 얼굴을 보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시청각실이 된 밤이었다. 누구도 초대받지 않았는데, 모두가 이미 관객이었다.

타워에는 문이 없다

선우는 손을 뻗어 화면 하나를 직접 넘겼다. 이번에는 설계도처럼 보이는 도면이 떴다.

높고 길쭉한 건물 단면도. 송신 층, 냉각 층, 보정 층, 백업 전원실. 상단에는 큼지막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D-TOWER MASS SYNCHRONIZATION ARRAY

재이는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온몸이 조용히 얼어붙는 걸 느꼈다.

문.

다들 그걸 찾고 있었다. 병원 지하의 두 번째 문, 사람 안의 문, 열리면 안 되는 문. 그런데 선우는 도면을 가리키며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잘 들어. 데이터 타워 안에 문은 없다."

서울 여기저기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동시에 난 것처럼 느껴졌다.

선우는 한 글자씩 박아 넣듯 말했다.

"문은 은어였어. 미끼였고, 내부자들끼리 쓰는 농담이었고, 추적하는 사람들 방향 틀어 놓으려고 흘린 가짜 이름이었다. 진짜로 타워 안에 있는 건 송신기다."

그는 도면 중 중앙 원형 구조를 확대했다.

수십 개의 케이블과 고리 모양 배열이 겹쳐 있는 장치였다.

"대중 기억 동기화 송신기. 말이 어려우면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사람마다 흔들리는 기억의 틈이 있어. 불안할 때, 슬플 때, 겁먹었을 때, 또는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볼 때. 이 장치는 그 틈이 열리는 타이밍을 도시 단위로 맞춘다."

그는 화면을 또 바꿨다. 지하철 모니터, 휴대전화 푸시, 재난 알림, 옥외 광고판, 지역 케이블, 병원 안내 음성. 전부 하나의 타이밍 선 위에 포개졌다.

"같은 시간, 같은 톤, 같은 색, 같은 불안, 같은 안도. 그러면 사람들은 각자 혼자 판단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비슷한 감정 순서로 움직이게 된다. 누굴 먼저 믿을지, 뭘 먼저 무서워할지, 어떤 사건을 얼마나 빨리 잊을지까지."

서린이 눈을 크게 떴다.

"집단 편집…"

"그래." 선우가 말했다. "개인 기억 조작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감정 박자 맞추기."

재이는 그제야 왜 서울이 어떤 사건 앞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비슷한 속도로 화내고, 비슷한 속도로 지치고, 비슷한 속도로 잊어버렸는지 설명할 단어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여론을 만든 게 아니라, 여론이 생겨나는 박자 자체를 만든 것이다.

그건 선동보다 더 깊고, 검열보다 더 교묘했다.

선우가 낮게 웃었다.

"문을 찾느라 고생했지. 근데 그들이 진짜 숨긴 건 출입구가 아니라 리듬이었어."

그 말은 재이에게 이상할 만큼 날카롭게 꽂혔다. 문은 사람 안에 있고, 타워에는 문이 없다.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 안의 문을 열 수 있도록 도시 전체의 박자를 맞추는 기계가 타워에 있다는 뜻이니까.

방송이 새는 속도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작은 경고창이 튀었다.

UPLINK INSTABILITY.

선우의 뒤쪽에서 짧은 금속음이 다시 났다. 누군가 멀리서 문을 건드리는 소리 같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시간이다. 그들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야. 다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아직 정확히 못 잡았을 뿐이지."

서린은 이미 노트북을 열고 있었다. 학교 방송실에서 챙겨 온 보조 장비를 차 안에서 바로 연결했다. 화면 위에 패킷 경로와 중계 노드들이 쏟아졌다. 그녀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재이."

"왜."

"이거 역추적 들어왔어요."

"어디서?"

"한 군데가 아니에요. 경찰 망도 물었고, 민간 보안 회선도 물었고…"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문답 쪽 사설 추적도 붙었어."

화면 속 선우는 아직 말하고 있었다.

"내 위치는 오래 못 숨긴다. 그래서 이 방송은 증거이기도 하고, 미끼이기도 해."

재이가 소리쳤다.

"미끼 같은 소리 하지 마."

선우가 들을 리 없는데도, 그 말은 차 안을 세게 때렸다.

방송 화면이 잠깐 흔들리더니, 뒤쪽 벽면 일부가 스쳤다. 벗겨진 녹색 페인트, 창문 대신 용접판으로 막은 직사각형 틀, 오래된 방송국 장비 보관실에서나 볼 법한 번호 스텐실.

서린이 화면을 정지시켰다.

"잠깐."

그녀는 프레임을 확대했다. 희미하게 적힌 글자가 드러났다.

MBS ANNEX B2

재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어디야."

"상암 옛 미디어 백업송신동."

서린의 목소리가 빠르게 떨렸다.

"폐쇄된 건물인데 비상 중계용 회선 몇 개는 아직 살아 있어요. 불법 송출하기엔 최악이고, 도시 전체 장악하기엔 최고의 자리야. 그리고—"

그녀가 말끝을 삼켰다.

"그리고 뭐."

"거기서 데이터 타워까지 차로 열여덟 분이에요. 너무 가까워."

선우가 화면 속에서 마지막 자료를 띄웠다. 데이터 타워 하부 구조와 연결된 얇은 회선들이 거미줄처럼 주변 시설로 뻗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상암 권역 송신 백업망으로 이어졌다.

"타워를 멈추고 싶다면, 꼭대기부터 가지 마. 그건 다들 생각하는 순서니까. 먼저 주변 송신 백업망을 끊어. 특히 상암 쪽 오래된 중계 고리. 그게 살아 있으면 타워를 반쯤 죽여도 다시 맞춰진다."

재이는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선우는 지금 자기가 있는 위치를 거의 자백하고 있었다.

서린도 그걸 알아챘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부러예요."

"뭐가."

"자기 위치를 우리한테 주는 거야."

화면 속 선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아주 잠깐 흔들렸다. 오래 버틴 사람이 무너질 때 나오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끝까지 계산을 마친 사람이 마지막 한 칸을 밀어 넣을 때의 얼굴이었다.

"재이야."

이번에는 분명히 이름을 불렀다.

"네가 아직도 나한테 화나 있으면 그건 나중에 해. 지금은 시간부터 벌어."

열여덟 분

바깥에서 누군가 뛰는 그림자가 화면 뒤로 스쳤다.

선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좋은 사람의 조건 원본은 여기 있다. v1이 아니라 운영판. 선거구별 적용표, 피실험군 분류, 동기화 세기, 실패 사례까지. 이게 나가면 그들은 변명할 수는 있어도 부정은 못 해."

그는 손에 작은 외장 저장장치를 들어 보였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겨우 잡히는 검은 물건이었는데, 이상하게 총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근데 이걸 내가 끝까지 들고 있으면, 여기서 같이 끝난다."

서린의 화면에 추적 경로가 계속 좁혀지고 있었다. 원이 하나씩 겹쳐졌다. 경찰, 민간 보안, 사설팀. 세 방향에서 같은 지점을 향해 닫혀 오는 지도는 마치 올가미 같았다.

"재이." 서린이 말했다. "역추적 속도 미쳤어요. 빨라."

"얼마나 남았어."

그녀는 계산을 다시 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경찰보다 사설팀이 먼저 닿아요. 빠르면 열여덟 분. 우리가 지금 출발하면… 신호만 안 걸리면 간신히 먼저 도착할 수도 있어."

간신히.

요즘 들어 가장 믿기 힘든 단어였다.

선우는 방송 마지막 문장을 꺼내듯 숨을 들이쉬었다.

"타워는 문이 아니다. 사람들을 한 박자로 흔들어 놓는 메트로놈이야. 그 박자를 끊어야 해. 그리고 좋은 사람의 조건이 뭔지, 서울이 자기 입으로 읽게 만들어."

멀리서 둔탁한 충격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선우도 돌아봤다.

아주 잠깐, 그의 얼굴에서 지금껏 억지로 붙들고 있던 평정이 벗겨졌다. 지친 사람의 나이가 한순간에 다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는 웃었다.

늘 그랬듯, 겁이 날수록 남을 안심시키는 쪽으로.

"올 거면 뛰어."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노이즈가 화면 아래에서부터 물처럼 차올랐다. 선우의 얼굴이 깨진 격자 속으로 잠깐 잠겼다가 다시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그의 손이었다. 저장장치를 쥔 손. 손등엔 말라붙은 피가 있었다.

그리고 방송이 끊겼다.

서울 곳곳의 화면이 동시에 흑전했다가, 몇 초 뒤 원래 광고와 뉴스로 돌아갔다. 너무 갑자기 평소의 도시가 복구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소름이 끼쳤다. 방금 전까지 진실을 보던 화면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분양 광고와 날씨 예보를 틀어 대고 있었다.

재이는 문을 박차고 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탔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데, 지금은 뛰는 것보다 달리는 게 먼저였다.

"가."

서린은 이미 시동을 걸고 있었다.

"상암까지 최단으로 간다. 근데 중간에 검문 뜰 거예요."

"뚫어."

"그건 너무 쉽게 말하네."

"그러면 더 빨리 생각해."

차가 튀어나가듯 출발했다. 안전벨트가 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재이는 대시보드 위에 손을 짚고 앞만 봤다. 도시의 모든 불빛이 이제는 시계처럼 느껴졌다. 빨간불은 시간을 뺏고, 초록불은 시간을 잠깐 돌려줬다.

서린이 이를 악문 채 물었다.

"살아 있으면 뭐부터 할 거예요?"

재이는 창밖을 보다가 대답했다.

"한 대 때리고."

"그다음은?"

"저장장치 받는다."

차는 이미 강변북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멀리 상암 쪽 하늘에 방송 송신탑 불빛이 서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빛인데, 오늘 밤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도시를 비추는 빛이 아니라, 도시를 맞추는 장치처럼.

서린의 노트북 화면에 남은 시간이 줄고 있었다.

00:17:12

00:16:48

00:16:03

재이는 두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살아 돌아와 서울 전체를 상대로 유언이 아닌 생방송을 했다. 그리고 그 생방송은 도시의 심장을 드러내는 동시에, 친구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이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늦으면 끝이었다.

책 목록

내일을 훔치는 법

전체 목차 보기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

틸노트는 사용자가 AI를 활용해 노트를 쉽게 작성하거나 편집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AI 스퀘어 단톡방에 함께해요

AI 활용과 틸노트 사용 팁을 나누는 오픈채팅방입니다. 입장 비밀번호는 tilnote입니다.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