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비어 있는 이력
그날 밤 재이는 모텔 불을 끝내 끄지 못했다.
불을 끄면 서울 전체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광화문 지하통로 통제 문자 이후로 뉴스는 쉬지 않았고, 벽 너머 누군가 웃는 소리마저 불길하게 들렸다. 침대 위에 늘어놓은 테이프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방 안의 공기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새벽 다섯 시가 되자 그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일어났다.
폭발로 노트북을 잃은 사람에게 남은 건 몸과 휴대전화, 그리고 의심뿐이었다. 재이는 서울역 근처 24시간 PC방으로 들어갔다. 밤샘 손님들의 컵라면 냄새와 키보드 소리 사이에서, 그는 가방 안쪽 지퍼칸에 있던 메모리카드를 조심스럽게 꽂았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손끝이 묘하게 차분했다.
문은사람안에있다441.
폴더가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날짜별 음성 파형 파일이었다. 그 아래로 압축 폴더 몇 개가 더 있었다. SCHOOL, PSW, 441, RIN.
재이는 맨 먼저 SCHOOL을 열었다.
거기에는 박선우의 학창 시절이 종이 냄새 나는 스캔본으로 눌어붙어 있었다. 생활기록부 일부, 방송반 활동 사진, 장학금 신청서, 결석 사유서, 오래된 급식표까지 있었다. 누군가 집요하게 모아 두지 않았다면 남아 있을 리 없는 자료들이었다.
이상한 건 성적이 아니었다.
비어 있는 칸들이었다.
고3 2학기, 선우의 출결표에는 매주 수요일이 통째로 빠져 있었다. 결석도, 조퇴도, 병결도 아니었다. 사유란만 비어 있었다. 담임 확인 도장만 찍혀 있었다. 장학금 지급 기관은 생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새하늘 인지발달지원재단.
좋은 일 하는 데처럼 들리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재이는 파일을 넘기다 멈췄다. 장학생 추천 사유서 하단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현장 적응력 우수. 청각 반응 기록 업무에 적합.
청각 반응 기록.
학생한테 붙일 말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다음 파일을 열었다. 선우의 방송반 담당 교사가 남긴 듯한 짧은 메모였다. 손글씨를 급하게 찍어 스캔한 파일이었다.
선우가 또 카세트 녹음기 빌려감. 디지털은 믿지 말라며 고집. 돌아와서는 코피 흘림. 병원 가라 해도 안 감.
재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테이프가 그냥 취향이 아니었다. 버릇도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PSW 폴더에는 선우의 스무 살 이후 흔적이 들어 있었다. 편의점 야간, 촬영 보조, 음향 케이블 정리 아르바이트, 외주 다큐 현장 동행. 일정하지 않고, 오래 버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력 중간중간 같은 주소가 반복됐다.
경기도 외곽, 산 아래.
하늘인지개발연구원.
이름은 번듯했지만 첨부된 사진은 이상했다. 어린이 치료센터처럼 꾸민 건물 외벽, 꽃 그림이 그려진 유리문, 웃는 캐릭터 간판. 그런데 그 뒤편 출입구 사진에는 검은 보안문이 달려 있었고, 직원용 출입증에는 지하 구역 코드가 적혀 있었다.
B4-아카이브.
연구시설이라기보다,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건물처럼 보였다.
재이는 파일 속 연락처 하나를 눌렀다. 선우의 고등학교 담임 번호였다. 오래전에 저장한 번호를 선우가 굳이 남겨 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세 번 만에 전화를 받은 노교사는 잠긴 목소리로 박선우라는 이름을 되물었다.
한참 침묵하던 그는 뜻밖에도 먼저 말했다.
'그 애, 수요일마다 흰 봉고차 타고 나갔어.'
재이는 아무 말 없이 들었다.
'상담이라고 했지. 재단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라더군. 나는 공부 도와주는 줄 알았어. 그런데 돌아오면 늘 멍했어. 졸거나, 토하거나, 이상하게 소리에 예민했어. 복도 끝에서 분필 떨어지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어.'
전화기 너머에서 늙은 남자가 작게 한숨 쉬었다.
'한 번은 나한테 그러더라. 선생님, 사람 머리 안에도 편집실이 있냐고.'
재이는 손등에 돋은 소름을 눌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웃어넘겼어. 다음 해에 완전히 사라졌지. 연락도 안 되고. 나중에는 내가 그 애를 실제로 가르친 게 맞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
마지막 말이 오래 남았다.
내가 그 애를 실제로 가르친 게 맞나.
재이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모니터만 봤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 더 끔찍한 방법이 세상에 정말 있다면, 아마 이런 식일 것이다. 남아 있던 기억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깎아 내는 일.
그때 마지막 폴더가 눈에 들어왔다.
RIN.
안에는 영상 포스터 한 장과 짧은 편집본 예고 영상이 들어 있었다. 제목은 '삭제된 증언'. 독립 다큐멘터리. 하단 크레딧 첫 줄에 PD 서린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상은 채 1분도 안 됐다. 인터뷰이의 입술이 떨리고, 편집실 모니터가 지나가고, 아주 낮은 기계음이 배경에 깔렸다.
재이는 그대로 화면을 멈췄다.
그 소리였다.
열두 번째 테이프 맨 앞에서 들렸던, 수백 개의 전자음이 멀리서 한꺼번에 웅웅거리는 소리. 더 작고 희미했지만 틀림없었다.
그는 곧장 주소를 적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이 이미 테이프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자기가 먼저 따라잡아야 했다.

서린이라는 증인
독립 다큐 시사회가 열린 건 을지로의 작은 상영관이었다.
의자는 낡았고, 스크린은 완전히 펴지지 않아 오른쪽 끝이 조금 접혀 있었다. 하지만 상영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끝까지 믿어 보려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이미 잃은 게 있는 사람들.
재이는 맨 뒤에 서서 사람들 틈을 지켜봤다.
마지막까지 남은 여자 하나가 케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팔에는 잔상처럼 남은 테이프 자국이 있었고, 눈빛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 번 본 걸 쉽게 놓치지 않는 사람의 눈이었다.
재이가 가까이 가서 말했다.
'박선우를 아십니까.'
여자의 손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재이의 얼굴을 봤다. 탄내 밴 옷깃, 며칠 못 잔 눈, 손에 남은 작은 화상 자국. 그녀는 대답 대신 문을 잠갔다.
그리고 아주 낮게 물었다.
'테이프, 몇 개예요?'
재이는 그 자리에서 도망칠지, 붙잡을지 잠깐 망설였다.
여자는 자기 소개를 먼저 했다.
'서린이에요. 선우랑 2년 만났고, 8개월 동안은 같이 도망다녔어요.'
담담한 말투였지만 마지막 단어가 유난히 무거웠다.
두 사람은 상영관 뒤편 좁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낮에도 어두운 건물이었다. 바깥 도로에서는 금속 셔터 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재이는 결국 가방에서 첫 번째 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서린은 그것을 받자마자 웃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플라스틱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릴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이거 선우 거 맞아요.'
'어떻게 압니까.'
'라벨 붙이는 버릇이 있어요. 왼쪽이 늘 1밀리 정도 올라가 있거든요.'
정말 그랬다.
재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런 사소한 걸 아는 사람과는 거짓말하기가 어렵다.
서린은 테이프를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천천히 말했다.
'선우는 한동안 죽은 사람으로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죽은 사람 취급도 못 받게 됐어요.'
'무슨 뜻이죠.'
그녀는 재이를 똑바로 봤다.
'선우는 죽은 게 아니라 지워졌어요.'
재이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서린은 누군가를 설득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혼자 믿어 온 사람처럼 말했다.
'처음엔 저도 그냥 은폐라고 생각했어요. 사고 기사 하나 내고, 시신 확인은 못 하게 막고, 주변 사람들 입막음하면 끝나는 그런 종류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계속 생겼어요. 같이 밥 먹었던 사람도 선우를 모른다고 했고, 몇 년 치 통화기록이 빈칸으로 바뀌었고, 제가 편집한 인터뷰 파일에서는 선우 목소리만 특정 구간에서 지워졌어요. 얼굴이 날아간 적도 있었고요.'
그녀는 숨을 고르더니 더 낮게 말했다.
'기억이 조작되고 있었어요. 완벽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더럽게.'
재이는 본능적으로 반박하고 싶었다. 기억 조작 같은 단어는 정신 나간 음모론자들이나 붙잡는 말처럼 들리기 쉬웠다. 그런데 그는 이미 미래의 자기 목소리가 들어 있는 테이프를 들은 사람이었다. 서울 곳곳에서 아직 오지 않은 사고가 재연되는 것도 봤다. 정상적인 말만 붙들고 있을 상황은 지나 있었다.
'당신 다큐는 뭡니까.'
'사라진 증인들 이야기예요. 사고를 봤는데도 기억을 못 하는 사람들. 특정 건물만 지나면 구토하는 사람들. 가족이 분명 존재했다고 우는데 주민등록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처리된 사람들. 저는 그걸 모으고 있었고, 선우는 그중 몇 개가 같은 시설에서 시작됐다고 했어요.'
'하늘인지개발연구원.'
서린의 눈빛이 바뀌었다.
'거기까지 갔네요.'
재이는 메모리카드 이야기를 짧게 털어놨다. 선우의 출결표, 장학 재단, 지하 아카이브, 교사의 말까지. 서린은 한 마디도 끊지 않고 들었다.
그러다 재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선우가 왜 하필 테이프였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서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지털은 예쁘게 지울 수 있으니까요. 파일은 잘리고, 시간코드는 덧칠되고, 서버는 통째로 갈아치우면 끝나요. 그런데 아날로그는 흔적이 남아요. 잡음이든 눌린 자국이든. 썩어도 썩은 방식이 남죠.'
그녀는 계단 벽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말했다.
'선우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세상이 거짓말을 시작하면, 최소한 거짓말하는 소리라도 남겨 두려는 사람.'
그 말이 재이의 가슴에 이상하게 박혔다.
폭발 직전 자신을 살린 목소리와, 수요일마다 흰 봉고차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가던 고등학생.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 났다.
죽은 친구가 아니었다.
살아서 오래 망가진 친구였다.
'선우가 숨던 곳이 하나 있어요.'
서린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장비랑 원본을 디지털이 못 건드리는 곳에 모아 두겠다던 날이 있었어요. 그때 저를 데려간 적이 있어요.'
재이가 물었다.
'안전합니까.'
서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 일에 안전한 곳이 있었으면 선우가 테이프를 남기진 않았겠죠.'
죽은 사람의 은신처
선우의 은신처는 인현동 뒷골목, 간판 떨어진 필름 현상소 3층에 있었다.
일층 셔터에는 오래된 현상액 광고가 반쯤 벗겨져 있었고, 계단은 사람보다 먼지가 먼저 올라다니는 곳처럼 보였다. 서린이 맨 앞에서 올라갔다. 그녀는 길을 잊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잊지 않으려고 계속 되뇌어 온 사람 같았다.
삼층 철문에는 자물쇠가 세 개 달려 있었다.
그중 두 개는 열려 있었고, 하나는 부서져 있었다.
재이와 서린이 동시에 멈췄다.
누군가 먼저 다녀간 흔적이었다.
문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다. 천장이 낮고 창문은 신문지로 절반쯤 막혀 있었지만, 방 안은 창고가 아니라 작업실에 가까웠다. 벽 한 면에는 서울 지도가 붙어 있었고, 곳곳에 핀으로 고정된 메모들이 연결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충무로, 광화문, 망원, 목동, 삼성. 테이프 라벨과 같은 이름들이었다.
반대편 벽에는 사람들 사진이 빼곡했다.
정장 입은 회사원, 유치원 버스 기사, 편의점 야간 알바생, 지하철 역무원, 병실에서 웃는 아이, 시장 골목 상인. 유명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도시를 움직이는 대부분의 얼굴들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사고 전날 통화기록 공백.
딸만 아버지를 기억함.
7층만 가면 구토.
이름 바뀜.
재이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음모라는 말은 크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벽에 붙은 얼굴들은 작고 구체적이었다. 누군가의 저녁 식사, 누군가의 월세, 누군가의 아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얼굴들.
서린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전 이 벽 때문에 못 놓았어요. 선우가 과장하는 줄 알았는데, 한 명씩 만나 보면 다 진짜였거든요.'
재이는 책상 아래를 뒤졌다. 먼지투성이 공구함, 녹슨 마이크, 라벨 떨어진 미니DV 테이프, 반쯤 태운 수첩이 나왔다. 서린은 벽장 뒤쪽 합판이 조금 들뜬 걸 발견했다.
둘이 힘을 합쳐 합판을 젖히자 안에서 길게 말린 도면 통이 나왔다.
재이가 그것을 펼치자 방 안 공기가 달라졌다.
거대한 서버실 도면이었다.
지하 네 개 층을 통으로 뚫어 만든 공간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랙 배열, 냉각 라인, 비상 전원실, 출입 동선, 보안 구역. 서버실이라기보다 지하 성당 같았다. 사람 대신 기억을 모시는 장소처럼 보였다.
도면 우측 상단에는 작은 활자로 명칭이 적혀 있었다.
하늘인지개발연구원 지하 아카이브 증설안.
그 아래 선우의 손글씨가 비스듬히 덧붙어 있었다.
서울에서 지운 걸 여기 모은다.
재이의 목이 바짝 말랐다.
도면에는 유독 굵게 동그라미 쳐진 구역이 있었다. 2구역, 표기명은 MIRROR HALL. 그 옆에 다시 손글씨 메모.
여기서 사람을 백업하는 게 아니라, 사람 안의 문을 복제한다.
뜻은 정확히 모르겠는데, 모를수록 더 끔찍했다.
서린이 도면 모서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선우가 그랬어요. 저 아래는 서버실이 아니라 기억 경매장 같은 곳이라고. 돈 되는 건 보관하고, 방해되는 건 지우고, 필요한 건 다시 심는다고.'
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을 왜 이제 합니까.'
'당신이 미친 사람 취급하면서 나갈까 봐.'
그녀의 대답은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변명 같지 않았다.
재이는 다시 도면을 접으려다 책상 서랍 하나가 반쯤 열려 있는 걸 봤다. 안에는 납작한 철제 상자가 들어 있었다. 잠금장치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그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사진들이 있었다.
사진 속 같은 벽
대부분 폴라로이드였다.
낡고, 모서리가 바랬고, 어떤 건 습기를 먹어 표면이 조금 들떠 있었다. 아이들 사진이 많았다. 생일 케이크 앞에 앉은 아이, 팔에 주사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아이, 병원복 비슷한 옷을 입고 블록을 쌓는 아이.
처음엔 공통점이 보이지 않았다.
서린이 사진 몇 장을 바닥에 나란히 놓기 전까지는.
'이거 봐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사진 속 배경이었다.
연한 파란 벽.
벽 한쪽에 그려진 노란 해.
창문 밑으로 반쯤 드리운 하늘색 커튼.
그리고 아이 키를 재는 자가, 늘 같은 자리에 붙어 있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달랐다. 찍힌 시기도 달랐다. 그런데 배경은 이상할 정도로 같았다. 누군가 여러 해 동안 같은 방에서, 다른 아이들을 차례로 찍은 것 같았다.
재이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배경 가운데 한 장에서 박선우가 웃고 있었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마른 얼굴, 어색한 어깨, 눈 밑에 옅은 그늘. 셔츠 가슴에는 종이 명찰이 붙어 있었다. 441.
그리고 그 바로 아래 다른 사진 한 장.
재이는 처음에 그 아이를 못 알아봤다.
머리가 짧고, 웃는 법을 배우는 중인 것 같은 굳은 표정. 왼쪽 눈썹 위에 아주 작은 흉터. 낯설 만큼 어린 얼굴인데도, 자기 얼굴이었다.
윤재이.
사진 뒤집힌 면에는 검은 볼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재이. 반응 좋음. 기억 잔존 불안정.
서린이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의 소음이 한순간 전부 사라진 것 같았다. 바깥 자동차 소리도, 형광등 우는 소리도 멀어졌다. 재이는 자기 심장 소리만 들었다.
'이건… 아니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사진을 다시 뒤집었다. 다시 봐도 자기였다. 어릴 때 가족사진에서 늘 보던 그 흉터가 있었다. 열 살 전에 자전거에서 넘어져 생긴 것. 엄마가 약 바르며 웃었던 기억까지 따라 올라왔다.
그런데 그 방은 기억나지 않았다.
연한 파란 벽도, 노란 해도, 하늘색 커튼도.
아무것도.
서린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도 거기 있었네요.'
재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선우 사진과 자기 사진을 나란히 놓아 봤다. 같은 벽, 같은 자, 같은 커튼. 심지어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의 방향까지 비슷했다.
우연일 리 없었다.
선우는 자기 과거를 추적한 게 아니었다.
자기와 재이의 공통된 시작점을 쫓고 있었던 거였다.
그 순간 아래층에서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한 걸음.
잠깐 멈춤.
다시 한 걸음.
재이와 서린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서린이 먼저 도면 통을 집었고, 재이는 사진 몇 장을 움켜쥐었다. 그중에서도 자기 사진과 선우 사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먼저 챙겼다.
문밖 그림자가 잠깐 멈췄다.
서린이 속삭였다.
'이제 혼자 다니면 죽어요.'
재이는 대답 대신 사진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는 살아 있었고, 살아 있던 자신의 기억은 어딘가에서 잘려 나가 있었다.
이제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문손잡이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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