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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포함된 노트내일을 훔치는 법

죽은 사람의 전화

Views 65약 9분생성형 AI 활용

망해 가는 사람의 새벽

윤재이는 신호 대기 중에 하품을 참다가 턱이 빠질 뻔했다.

새벽 네 시 십칠 분. 비는 그쳤지만 도로는 아직 젖어 있었고, 가로등 불빛은 물기 어린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찢어졌다. 재이는 대리운전 앱을 한 번, 보조석에 던져 둔 편의점 삼각김밥을 한 번 번갈아 봤다. 삼각김밥은 두 시간 전에 뜯어 놓고 한 입도 못 먹었다. 속은 비었는데 입맛은 없었다.

이런 날이 벌써 몇 달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낮에는 자고, 해가 지면 나와 남의 차 키를 받아 들고 서울을 떠돈다. 취한 손님은 목적지를 두 번 말하고 한 번 잊어버렸고, 어떤 손님은 창문을 내린 채 울었고, 어떤 손님은 재이를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다. "기사님, 빨리 좀요"라는 말은 밤마다 다른 입에서 나오는데도 이상하게 다 같은 목소리처럼 들렸다.

한때 그는 소설가가 되겠다고 말했다.

스물셋의 윤재이는 그렇게 말할 때 자기 얼굴이 꽤 그럴듯해 보인다고 믿었다. 노트를 펼치면 세상이 자신에게만 문장을 허락해 주는 것 같았다. 새벽까지 카페에 앉아 인물의 대사를 적고, 누군가의 표정 하나를 붙잡고 며칠씩 들여다보곤 했다. 그때는 삶이 망가지더라도 그것을 문장으로 바꾸면 결국 이기는 거라고 믿었다.

지금은 메모장 앱에 적힌 문장이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 미납: 월세

  • 어머니 병원비 송금

  • 차량용 충전기 사기

  • 더는 안 미루기

더는 안 미루기.

그게 뭔 뜻인지 자기 자신도 몰랐다.

앱이 울렸다. 배차였다. 논현동에서 합정동. 재이는 콜을 잡고 시동을 걸었다. 와이퍼가 한 번 유리창을 쓸고 지나가자 서울의 새벽이 약간 더 선명해졌다.

오늘도 별일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 늘 문제였다.

죽은 사람의 전화

저장된 이름 없는 번호

손님은 술에 절어 있었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차에 타자마자 자기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는 백미러 너머로 재이를 보며 웃었다.

"기사님, 나 오늘 진급 잘렸어요."

"아, 네."

"축하해 주세요. 인생이 아주 깔끔하게 망했거든."

재이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방향지시등만 켰다. 취객의 농담인지 고백인지 분간이 안 되는 말들은 대체로 무시하는 편이 낫다.

"기사님은 꿈이 뭐였어요?"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재이는 웃지도 못한 채 앞만 봤다. 손님은 이미 반쯤 잠들어 있었다. 질문은 던져 놓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처럼, 그 남자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꿈이 뭐였냐고.

그 질문은 술 냄새보다 더 오래 차 안에 남았다.

합정동에 도착해 손님을 내려 보내고 나니 다섯 시가 넘었다. 새벽과 아침 사이, 세상이 가장 애매한 색으로 바래는 시간이었다. 재이는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우고 식은 캔커피를 하나 샀다. 첫 모금을 넘기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건 이름 없는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는 대개 두 종류다. 대리 손님이거나, 돈을 받아 가려는 사람.

재이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았다.

"네, 윤재이입니다."

잠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전파가 약한 것처럼 지직거리는 소리.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할 때 같은 마른 잡음. 그리고 아주 희미한 숨소리.

재이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어 화면을 확인했다. 통화는 분명 연결되어 있었다.

"여보세요?"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갈라진 남자 목소리였다.

"재이야."

캔커피가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이름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아는 목소리인데 너무 오래전에 묻어 둔 이름이라 흙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상대는 대답 대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내일 밤 11시 전에 절대 집에 들어가지 마."

재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절대 들어가지 마. 문 열지 마. 엘리베이터도 타지 마."

말끝마다 잡음이 섞였다. 가까운 데서 말하는 것 같다가도, 아주 먼 지하에서 송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이는 피식 웃었다.

"새벽 장난 전화 하시려면 사람 잘못 고르셨어요."

그러자 상대가 말했다.

"나 장난칠 상황 아니야."

그 한마디에 재이의 웃음이 멈췄다.

그 말투를 그는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벌점 받을 걸 알면서도 교문을 넘어오던 애. 체육복 차림으로도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던 애. 늘 장난스러운데 결정적인 순간엔 절대 웃지 않던 애.

재이는 거의 반사적으로 이름을 내뱉었다.

"선우야?"

잠시 정적.

그리고 상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야 알아듣네."

윤재이의 등골을 타고 식은 것이 주르륵 흘렀다.

이선우.

고등학교 동창. 졸업 후 몇 번 술자리를 함께한 뒤로 연락이 끊겼던 놈. 그리고 분명히, 이미 죽은 놈.

재이는 그 소식을 기억했다.

작년 여름, 지방 출장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고속도로에서 화물차를 피하지 못했고, 차는 심하게 찌그러졌다고. 빈소 사진까지 단체 채팅방에 올라왔었다. 재이는 결국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지만, 이름 앞에 붙은 검은 리본 이모지를 똑똑히 봤다.

죽은 사람의 번호로 전화가 올 리 없었다.

재이는 화면을 다시 봤다. 번호는 분명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손이 먼저 통화 상세 화면을 눌렀다. 숫자 끝자리 넷.

기억났다. 선우 생일이었다. 장난처럼 끝자리를 자기 생일로 통일하고 다니던 놈.

"누구야."

재이의 목소리가 바싹 말랐다.

"진짜 누구냐고."

상대는 이번에도 대답을 피했다.

"재이야, 잘 들어. 내일 밤 11시 전에 네 집 앞에 가지도 마."

"미쳤냐? 선우는 죽었어."

"알아."

그 짧은 두 글자가 이상하게도 가장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순간, 통화 너머에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철문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 누군가 거칠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 아주 멀리서 울리는 경보음 같은 것.

그리고 선우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낮아졌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특히—"

뚝.

통화가 끊겼다.

재이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서 있었다. 편의점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따뜻한 바람이 스쳤지만 손끝은 차갑기만 했다.

곧바로 다시 걸었다.

'없는 번호입니다.'

안내음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재이는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두 번 더 전화를 걸었다. 결과는 같았다. 없는 번호.

방금 전까지 통화한 번호가, 이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번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헛웃음이었다.

"별 미친…"

졸리면 환청도 들을 수 있지. 밤샘 운전에 과로, 카페인, 스트레스, 미납 문자 다섯 통. 사람이 이쯤 되면 귀신이 아니라 세금 고지서랑도 대화할 수 있다.

재이는 일부러 더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누군가 장난을 친 거다. 옛날 친구들 중 누가 술김에 번호를 바꿔가며 놀리는 걸 수도 있다. 죽은 동창을 들먹이는 장난이 좀 악취미이긴 했지만, 세상엔 악취미인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게 결론 내리자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죽은 친구의 기억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재이는 일부러 라디오 볼륨을 키웠다. 시시한 아침 뉴스와 날씨, 광고 멘트가 차 안을 채웠다. 사람 사는 소리는 원래 위로가 된다. 누가 웃고, 누가 커피를 팔고, 누가 출근한다고 떠드는 세계는 귀신보다 훨씬 현실적이니까.

하지만 선우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선우는 이상한 애였다.

고등학교 때도 늘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다. 싸움을 잘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는데, 교실 분위기가 뒤집힐 때마다 꼭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날은 전교생이 아는 비밀을 혼자 제일 늦게 말했고, 어떤 날은 아무도 모르는 일을 제일 먼저 알아냈다. 선우는 세상을 조금 옆에서 보는 인간 같았다. 다들 똑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때 혼자 다른 쪽을 보는 애.

재이는 그런 선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부러웠다.

왜냐하면 자신은 늘 한 박자 늦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은 집에 돌아와서야 생각났고, 써야 할 문장은 다 놓친 뒤에 떠올랐다. 반면 선우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어디서나 자기 몫의 장면을 가져가는 놈이었다.

졸업 뒤 한동안은 연락이 이어졌다. 술집에서 만나면 선우는 늘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영상 편집을 한다더니, 다큐 촬영을 따라다닌다더니, 나중엔 "남들이 안 보는 걸 찍는 일"이라고 얼버무렸다. 구체적으로 뭘 하느냐고 물으면 웃기만 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몇 년 뒤, 사고 소식이 들렸다.

재이는 운전대를 잡은 채 혀로 입천장을 눌렀다. 선우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한 게 갑자기 걸렸다. 그날도 아마 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감 때문이라고 둘러댔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가지 않았고, 그 뒤로 선우는 완전히 죽은 사람의 칸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왔다.

내일 밤 11시 전에 절대 집에 들어가지 마.

경고는 이상할 만큼 구체적이었다. 오늘도 아니고, 당장도 아니고, 내일 밤 11시 전. 문을 열지 말고, 엘리베이터도 타지 말라니. 장난치려면 너무 디테일했고, 협박하기엔 이유가 없었다.

재이는 차를 세우고 담배를 찾았다. 이미 끊은 지 반년 됐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사람은 불안할 때 자기가 끊은 것부터 찾는다.

휴대전화 연락처를 뒤졌다. 고등학교 동창 단체방, 몇 년째 말 없는 채팅창, 프로필 사진도 사라진 이름들. 선우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누군가 예전에 올린 부고 공지 캡처가 파일함에 남아 있었다.

[이선우 장례식장 안내]

짧고 건조한 문장. 날짜. 장소. 상주 이름.

재이는 화면을 오래 보고 있다가 결국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장난이라면 악질이고, 진짜라면 더 문제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집에 가서 샤워하고 쓰러지듯 자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해가 뜨면 새벽에 들은 목소리는 절반쯤 현실감을 잃는다. 공포는 대개 햇빛에 약하다.

적어도 재이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귀가 직전

오전이 되어 잠들었고, 오후가 되어 깼고, 저녁이 되자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밤은 어김없이 시작됐다. 손님을 태우고 강남에서 마포로, 마포에서 잠실로, 잠실에서 다시 종로로 건너다니는 동안 재이는 일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평소보다 시간이 천천히 갔다.

대리 콜은 끊기지 않았고, 손님들은 여전히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재이는 틈만 나면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혹시 같은 번호가 다시 뜰까 봐. 혹시 정말 밤 11시가 가까워질수록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아무 일도 없었다.

11시가 지나도, 자정이 되어도, 새벽 1시가 되어도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역시 장난이었네.'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짜증이 치밀었다. 잠도 설쳤고, 하루 종일 기분만 잡쳤다. 재이는 마지막 콜을 마치고 자기 아파트가 있는 동네로 차를 몰았다.

새벽 2시 40분.

그가 사는 곳은 오래된 구축 아파트였다. 현관문은 자주 삐걱거렸고, 복도 센서등은 한 박자 늦게 켜졌고, 겨울이면 배관이 울었다. 그래도 월세가 그나마 버틸 만했고, 어머니 병원과도 멀지 않았다. 무너져 가는 사람은 대체로 무너져 가는 집을 고른다. 서로 사정이 맞기 때문이다.

재이는 단지 입구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맞은편으로 자기 아파트가 보였다. 경비실 불빛, 주차된 차들, 놀이터의 흔들림 없는 그네. 늘 보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재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화면을 보자 또다시 이름 없는 번호였다.

같은 번호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번엔 잡음이 더 심했다. 치직, 치직. 그리고 선우의 목소리.

다급했다. 거의 비명 직전이었다.

"어디야?"

"뭐?"

"지금 어디냐고!"

재이는 본능적으로 앞을 봤다. 아파트 정문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집 앞인데."

전화기 너머에서 선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생전에도 거의 하지 않던 거친 말이었다.

"멈춰. 거기서 움직이지 마."

"대체 뭔데?"

"재이야, 뒤로 빼."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뒤차가 짧게 경적을 울렸다.

"야, 선우—"

"뒤로 빼!"

그 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재이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기어를 후진에 넣고 차를 살짝 뒤로 물렸다. 뒤차가 또 경적을 울렸고, 옆 차선의 택시 기사가 창문을 내리며 뭐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먼저 번쩍였다.

빛이 소리보다 빨랐다.

재이의 아파트 1층 쪽에서 흰 섬광이 터졌고, 바로 다음 찰나 엄청난 폭음이 밤을 찢었다. 유리창 조각이 별처럼 튀어 올랐고, 경비실 창문이 산산조각 났다. 충격파가 길 건너까지 밀려와 재이의 차를 주먹처럼 후려쳤다. 차체가 옆으로 흔들리고, 브레이크를 밟은 발끝이 덜덜 떨렸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는 엎드렸고, 누군가는 도망쳤다. 경보음이 사방에서 울렸다. 검은 연기와 흰 먼지가 뒤섞여 아파트 입구를 집어삼켰다.

재이는 숨을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앞만 봤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들어가려던 곳이었다.

현관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친 몸으로 벽에 기대 섰을 시간이 정확히 저 폭발의 순간과 겹쳤다.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졌다. 그런데도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스피커폰 너머로 선우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봤지."

재이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믿어?"

먼 곳에서 사람들 고함이 겹쳤다. 차 경적, 경보음, 깨진 유리 밟는 소리. 그런데도 선우의 목소리는 그 모든 소음을 뚫고 정확히 귀에 꽂혔다.

낮고, 차갑고,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또렷하게.

"재이야,"

그가 말했다.

"네가 다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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