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 그러나 연습생의 현실

축하한다는 말의 무게
합격 문자를 받은 날 밤, 채아는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을 끄지 못했다.
민채아 지원자님, 1차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몇 글자가 이상할 만큼 무거웠다. 분명 기쁜데, 가슴은 자꾸만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제 정말 시작된다는 뜻 같아서였다.
채아는 침대에 앉아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날 것 같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손끝이 차가워졌다.
합격했다. 정말로.
그 말은 생각보다 사람을 들뜨게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더 선명하게 끌어왔다. 그동안은 무대를 꿈꿨다. 이제는 그 꿈이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거실에서는 엄마가 그릇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저녁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빠는 뉴스를 보고 있었고, TV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집 안은 너무 평소 같았다. 그런데 채아만 혼자, 평소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말해야 할까.
합격했다는 말은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고, 반대로 걱정을 부르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 버렸다. 더 미루면 더 겁이 날 것 같았다.
채아는 휴대폰을 꼭 쥔 채 거실로 나갔다.
"엄마, 아빠. 나 할 말 있어."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채아는 그 시선 앞에서 순간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나… 지난주에 오디션 봤어."
정적은 짧았지만, 채아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엄마가 먼저 눈을 깜빡였다.
"오디션? 무슨 오디션?"
"기획사 공개 오디션."
아빠가 리모컨으로 TV 소리를 줄였다. 평소보다 조용한 거실 안에서 채아의 심장 소리가 혼자 크게 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연락 왔어. 1차 합격했다고."
엄마의 표정에는 놀람이 먼저 스쳤고, 그 뒤에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기쁨, 당황, 걱정. 아빠는 채아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혼자 준비한 거야?"
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 못 해서 미안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괜히 먼저 말하면… 나도 더 무서울 것 같아서."
엄마는 곧바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채아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합격한 건 축하할 일이야. 그런데 이걸 우리한테 지금 말하는 건 좀 서운하다."
그 말은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조용히 남았다. 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아빠가 물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채아는 안내 문자를 보여 주었다. 추가 테스트와 면담, 앞으로의 일정이 적혀 있었다. 정식 데뷔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고, 연습생 생활이 바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선에 겨우 발을 올린 수준에 가까웠다.
엄마는 화면을 읽다 말고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이 길이 얼마나 힘든지는 알고 있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채아는 정확히는 몰랐다. 힘들 거라는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채아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알아. 그래도 해보고 싶어. 진짜로."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잠깐 바라보았다. 긴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채아는 그 침묵이 무서웠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자기 입으로 꺼낸 꿈이니까.
한참 뒤,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하자. 쉽다고 생각하면 안 돼."
"응."
"공부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 중간에 마음이 흔들려도 책임은 네가 져야 하고."
"응."
엄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끝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당장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네가 얼마나 진심인지는 보인다. 대신 정말 버틸 자신이 있어야 해. 잠깐 반짝하고 힘들다고 울면서 그만둘 거면 시작하지 않는 게 나아."
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이상하게 안심했다.
완전한 허락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전박대도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 마음이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채아는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합격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꿈은 비밀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다.
두 번째 문을 통과한 날
며칠 뒤, 채아는 다시 그 기획사 건물 앞에 섰다.
처음 오디션을 보러 왔을 때보다 발걸음이 덜 떨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있었다. 그때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면, 지금은 붙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건물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은 단정했지만, 눈빛은 잔뜩 굳어 있었다. 채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대기실이 아닌 작은 회의실로 안내받았다. 서류 몇 장이 놓인 테이블, 생수병, 검은 볼펜. TV에서 상상하던 화려한 장면과는 전혀 달랐다. 차가울 만큼 단순한 공간이었다.
직원은 또박또박 설명했다.
연습생 계약은 데뷔 보장이 아니다. 회사의 내부 평가에 따라 언제든 조정될 수 있다. 학교생활과 병행은 가능하지만, 스케줄에 따라 일상이 바뀔 수 있다. 무단 결석이나 태도 문제는 큰 불이익이 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얇은 얼음 위를 밟는 소리처럼 들렸다.
채아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합격이란 단어는 빛났지만, 그 아래 붙은 조건들은 아주 현실적이었다. 반짝이는 무대 대신, 작은 글씨들이 먼저 꿈의 가격을 알려 주는 기분이었다.
면담을 맡은 실장은 채아의 파일을 넘기며 말했다.
"오디션 때 가능성은 보였어요. 그런데 가능성만으로 버티는 세계는 아니에요."
채아는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
"네."
"춤은 기본기가 아직 더 필요하고, 노래는 발성부터 다시 잡아야 해요. 표정은 괜찮은 편인데 기복이 있더라고요. 긴장하면 얼굴이 바로 닫혀요."
칭찬보다 지적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채아는 이상하게 낙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말들이 너무 정확해서, 도망칠 구석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실장은 서류를 덮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네가 뭔가를 보여 줬다는 뜻이야. 문제는 그다음이지. 들어오는 건 어렵지만, 남아 있는 건 더 어려워."
들어오는 건 어렵지만, 남아 있는 건 더 어렵다.
그 문장은 채아의 마음에 깊게 박혔다.
최종 등록 절차가 끝났을 때, 직원은 출입카드와 첫 주 스케줄표를 건넸다. 채아는 그것을 받으며 아주 잠깐, 정말 잠깐만 기뻤다. 내 이름이 적힌 카드. 진짜 연습생이 된 것 같은 증거.
하지만 그 기쁨은 스케줄표를 펼치는 순간 금세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회사로 이동. 댄스 기초. 보컬 트레이닝. 개인 연습. 주말 보강. 체력 관리 체크.
글자로만 봐도 숨이 막혔다.
채아는 카드를 손에 쥔 채 생각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바쁘다.
화려함 대신 형광등
첫 연습실은 생각보다 훨씬 평범했다.
아니, 평범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벽 한쪽 전체가 거울이었고, 천장에는 밝은 형광등이 일렬로 박혀 있었다. 스피커는 커다랗지만 어딘가 낡아 보였고, 바닥에는 오래 문질러진 운동화 자국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 있었다. 문을 열자 약간의 땀 냄새와 먼지 섞인 공기가 훅 들어왔다.
채아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무대는 없었다. 조명도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대신, 끝없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만 있었다.
그 거울 앞에는 이미 몇 명의 연습생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채아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아이도 있었고, 더 어려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스트레칭을 하면서도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어떤 아이는 음악이 나오지 않는데도 혼자 박자를 세고 있었다.
채아는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안녕… 나 민채아야. 오늘부터 들어왔어."
짧은 인사가 몇 번 돌아왔다.
"안녕."
"새로 들어왔구나."
"저기 짐 놓으면 돼."
친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살가운 분위기도 아니었다. 다들 예의를 지키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처음 보는 누군가를 반기는 곳이라기보다, 각자 자기 몫의 버티기를 하고 있는 장소 같았다.
채아는 벽 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거울 속에는 자기만 어색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이미 이 공간의 공기를 익숙하게 들이마시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댄스 트레이너가 들어왔다. 높은 목소리도, 과장된 제스처도 없었다. 대신 눈빛이 정확했다.
"오늘 새로 들어온 친구 있지? 민채아? 앞에 나와 봐."
채아는 심장이 철렁했지만 앞으로 걸어나갔다.
"간단하게 몸 체크할게. 기본 동작 보여 줘."
음악이 켜지자 채아는 준비해 온 몇 가지 동작을 해 보였다. 오디션 때보다는 덜 떨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거울까지 정면으로 마주하니 몸이 묘하게 굳었다.
트레이너는 채아의 움직임을 잠깐 보더니 바로 말했다.
"힘이 너무 들어가."
채아는 순간 멈칫했다.
"네?"
"동작을 크게 하려고 애쓰는 건 보이는데, 힘이 위로만 떠 있어. 어깨 올라가고, 목 굳고, 시선도 불안해. 예뻐 보이려고 하면 더 안 예뻐져. 리듬부터 몸에 넣어."
말은 짧고 차가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마디도 틀린 것 같지 않았다.
채아는 작게 대답했다.
"네."
"다시."
이번엔 더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수록 몸은 더 말을 안 들었다. 발이 반 박자 늦었고, 손끝은 어중간했다.
"아니, 다시."
몇 번이고 같은 말이 이어졌다.
주변에 있던 연습생들은 채아를 힐끗 보다가 금세 자기 연습으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이런 장면에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곳에서는 창피함도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채아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오디션에 붙었을 때 잠깐 품었던 기대가 그제야 천천히 벗겨졌다. 여기서는 합격이 끝이 아니었다. 합격은 겨우 입장권이었다.
그것도 자리가 보장된 표가 아니라, 계속 버텨야 하는 입장권이었다.
계속 서 있어야 하고, 밀리면 뒤로 넘어지는.
잘하는 애들은 정말 따로 있었다
첫 수업이 끝나고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을 때, 채아는 벽에 기대 물을 마셨다. 목이 타는데도 물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다리는 벌써 묵직했고, 어깨는 뻐근했다. 아직 본격적인 하루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놀라고 있었다.
그때 연습실 한가운데서 한 여자아이가 음악을 틀었다.
길게 묶은 머리가 한 번 휙 돌아가더니, 동작이 시작됐다.
채아는 자기도 모르게 물병을 든 채 멈춰 섰다.
춤이 엄청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군더더기가 없었다. 박자마다 몸이 정확히 떨어졌고, 힘을 써야 할 곳과 빼야 할 곳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거울 속 그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주변 연습생 중 누군가가 말했다.
"유나 오늘 컨디션 좋네."
다른 아이가 대꾸했다.
"쟤는 맨날 저 정도 아니야?"
채아는 그 이름을 조용히 마음속에 적어 두었다.
유나.
유나는 음악이 끝나자 아무렇지 않게 머리끈을 다시 조이고, 바닥에 놓인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방금 전까지 사람 눈을 빼앗던 애가, 곧바로 평범한 얼굴로 돌아오는 게 더 놀라웠다.
채아가 멍하니 보고 있자, 옆에 있던 단발머리 연습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보면 다 그래."
채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응?"
"유나. 원래 유명해. 들어온 지 오래됐고, 평가도 잘 받는 편이야."
채아는 괜히 목소리를 낮췄다.
"엄청 잘하네."
단발머리 아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 오면 그런 애들 많아. 그래서 멘탈 잡는 게 제일 힘들어."
그 말은 가볍게 들리면서도 이상하게 진짜 같았다.
채아는 그제야 주변을 조금 더 자세히 보았다.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도 발목 스트레칭을 하며 중얼중얼 음정을 맞추고 있었고, 구석에서 가사를 보던 아이는 쉬는 시간에도 입모양으로 노래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충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채아는 갑자기 자기 오디션 합격이 아주 작은 일처럼 느껴졌다.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문장이, 여기서는 이미 통과한 과거형에 불과했다.
붙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다.
연습생의 시간표
그날 이후 채아의 하루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침에는 학교에 가고, 수업 시간에는 최대한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은 전날의 피로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체육 시간도 아닌데 허벅지가 뻐근했고, 계단을 오를 때 종아리가 묵직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은 매점에 갈지, 주말에 뭐 할지 이야기했지만, 채아의 머릿속에는 그날 저녁 연습 스케줄이 먼저 떠올랐다.
수지의 눈썰미는 여전히 빨랐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지? 요즘 맨날 피곤해 보여."
채아는 예전처럼 바로 둘러대지 못했다. 이제는 완전히 비밀로 삼기 어려운 단계가 됐기 때문이다.
"사실… 나 기획사 들어갔어."
수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진짜? 연습생?"
채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괜히 낯설어졌다.
연습생.
집에서 혼자 거울 보던 아이가 아니라, 회사에 소속된 누군가가 된 것 같은 말.
"응. 아직 진짜 아무것도 아니긴 한데. 그냥… 시작한 거야."
수지는 놀라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야, 대박이다. 그래서 그렇게 맨날 피곤했구나. 왜 이제 말해!"
채아도 따라 웃었지만, 마음 한쪽은 묘하게 무거웠다.
수지에게 들린 연습생이라는 단어와, 회사 안에서 체감하는 연습생이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에게는 반짝이는 시작처럼 들리겠지만, 채아가 겪는 현실은 반짝임보다 압박에 가까웠다.
학교가 끝나면 채아는 곧장 회사로 향했다. 버스 창문에 기대면 잠깐 졸고 싶었지만, 눈을 붙였다가는 종점까지 갈까 봐 억지로 깨어 있곤 했다. 회사에 도착하면 출입카드를 찍고, 연습실로 들어가고, 몸을 풀고, 수업을 듣고, 지적을 받고, 다시 반복했다.
댄스 시간에는 같은 동작을 수십 번 반복했다. 한 번은 팔 각도 때문에, 한 번은 골반 방향 때문에, 한 번은 시선이 늦어서 다시. 채아는 이제야 알았다. TV에서 몇 초 스쳐 지나가는 안무 한 조각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반복 위에 세워지는지.
보컬 시간은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
"목으로 부르지 마. 배로 밀어."
"호흡 끊기지 않게. 다시."
"지금 음정 말고 소리 습관부터 고쳐야 해."
춤보다 노래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날도 많았다. 춤은 적어도 거울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목소리는 자기 귀로 듣는 것과 녹음된 소리가 너무 달랐다. 녹음 파일 속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제대로 들은 날, 채아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불렀다고?
머릿속에서는 더 단단하고 안정적인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호흡이 얇고 끝음이 자주 흔들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연습이 끝나는 시간쯤이면 늘 밤이었다. 집에 돌아와 씻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려 침대에 바로 쓰러지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낮에 들은 지적들이 머릿속에서 더 크게 울렸다.
어깨 힘 빼. 시선 흔들려. 박자 늦어. 호흡 짧아. 표정 죽었어.
신기하게도, 몸보다 마음이 늦게 지쳤다.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 세계
채아가 가장 놀란 건, 여기에는 누구도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틀리면 다시 해야 했다. 느리면 뒤처졌다. 외우지 못하면 그만큼 혼났다.
선생님들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정확했다. 가능성이 없는 아이에게 괜한 기대를 심어 주는 대신, 부족한 부분을 바로 짚었다. 문제는 그 정확함이 때로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단체 안무를 배우던 중이었다. 채아는 대형 이동에서 동선을 헷갈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도 타이밍이 어긋나자 트레이너가 음악을 끊었다.
"민채아. 지금 몇 번째지?"
순간 연습실의 시선이 전부 자기에게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채아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트레이너는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한 건 집에 가서 하고, 여기선 맞춰. 네가 한 번 놓치면 팀 전체가 같이 망가져. 아이돌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채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맞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혼자 있을 땐 서툴러도 다시 시작하면 됐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실수 하나가 다른 사람의 동작과 호흡까지 무너뜨릴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감각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쉬는 시간, 채아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손에 묻혀 얼굴을 눌렀다. 울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막상 거울을 보니 눈물이 나오기보다는 표정이 멍했다.
그때 옆 칸에서 나오던 단발머리 연습생이 말했다.
"처음엔 다 그래."
또 그 말이었다.
채아는 힘없이 웃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네."
"왜냐하면 진짜니까."
그 아이는 손을 닦으며 거울 속 채아를 흘끗 봤다.
"근데 처음이라고 계속 봐주진 않아. 그게 문제지."
채아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두 가지가 자주 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작아지는 날들
연습생 생활이 시작되고 2주쯤 지났을 때, 채아는 처음으로 자기 실력이 무서워졌다.
예전에는 부족해도, 적어도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혼자 연습하던 시절엔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나아 보였고, 학원에서도 선생님 칭찬 한마디면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기준이 달랐다.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면, 어제보다 나아진 정도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분명 열심히 했는데도 늘 뒤에서 쫓아가는 느낌이었다. 유나는 여전히 잘했고, 다른 연습생들도 각자 강점이 뚜렷했다. 누군가는 음색이 좋았고, 누군가는 춤선이 예뻤고, 누군가는 표정이 살아 있었다.
채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자주 봤다.
나는 뭐가 있지.
그 질문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
춤도 아직 애매하고, 노래도 더 배워야 하고, 얼굴이 확 튀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엄청 당찬 것도 아니었다. 오디션에 붙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감을 주기보다, 오히려 의문을 만들었다.
정말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그날 밤, 채아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리는 아프고 발바닥은 뜨거웠다. 엄마는 방문 너머로 물었다.
"오늘도 늦었네. 괜찮아?"
채아는 잠깐 대답을 못 했다.
괜찮다는 말은 너무 쉬웠고, 안 괜찮다는 말은 너무 무거웠다.
결국 채아는 익숙한 쪽을 택했다.
"응, 괜찮아."
하지만 혼자 남은 방 안에서만큼은 괜찮지 않았다.
노트북으로 연습 영상을 틀어 자신의 동작을 확인하던 채아는 결국 재생을 멈췄다. 화면 속 자신은 생각보다 더 굳어 있었고, 시선은 불안했고, 손끝은 확신이 없었다. 오디션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 잘 보였다.
아는 만큼 실망도 커지는 법이었다.
채아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는 지친 얼굴이 있었다. 다짐으로 빛나던 눈은 조금 흐려져 있었고, 입꼬리는 힘없이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얼굴이 더 진짜처럼 느껴졌다.
화려함을 꿈꿀 때는 몰랐다. 무대는 예뻤지만, 그 무대를 만드는 시간은 하나도 예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 남는다는 말
주말 보강이 있던 날, 트레이너는 수업 끝 무렵 연습생들을 한 줄로 세웠다. 다들 땀에 젖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바닥에 손을 짚고 있었고, 누군가는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말했다.
"다들 착각하지 마. 여기 들어왔다고 특별해진 거 아니야."
연습실 공기가 순간 더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연습생이라고 하면 대단해 보일 수 있지. 근데 이 안에서는 그냥 아직 데뷔하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야. 가능성은 칭찬이 아니라 숙제고, 재능은 면제권이 아니야."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버티는 애가 이기는 것도 아니야. 잘 버티는 애가 남는 거지."
채아는 그 말을 들으며 입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잘 버티는 애. 그건 단순히 오래 남아 있는 사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무너지지 않으면서, 배우고, 바꾸고, 따라잡는 사람. 지적을 듣고도 주저앉지 않고, 남의 실력에 눌려도 자기 것을 찾는 사람.
트레이너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다음 달부터 내부 체크 들어갈 거야. 각자 준비해."
짧은 공지가 떨어지자, 연습생들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누군가는 무표정했고, 누군가는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채아는 그 공기가 무서웠다. 아직 평가전이라고 부를 정도의 큰 무대는 아니겠지만, 여기서는 늘 누군가를 보고 있었고, 늘 순서가 매겨질 수 있었다.
연습실 문이 열리고 다들 하나둘 빠져나갈 때도 채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발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가슴이 먼저 무거웠다.
합격했을 때는 끝없이 넓은 문이 열린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그 안은 수많은 좁은 문들로 이어져 있었다.
하나를 통과하면 또 하나. 잠깐 지나가면 또 다음. 그리고 문 앞에는 늘 비교와 평가와 경쟁이 서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늦은 밤, 거의 비어 버린 연습실에 채아 혼자 남았다.
형광등 불빛은 여전히 차갑고, 거울은 여전히 솔직했다. 스피커 전원을 끈 뒤라 공간은 더 고요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오늘 들은 말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힘이 너무 들어가. 표정 닫혀. 네가 놓치면 팀이 무너져. 남아 있는 게 더 어렵다.
채아는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첫 동작을 만들어 보다가 다시 내렸다. 똑같은 동작인데도 아까보다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위축된 탓이었다.
거울 속 자신은 아직 연습생이라는 말이 어색한 얼굴이었다. 데뷔는 너무 멀고, 실력은 너무 부족하고, 경쟁은 너무 가까웠다.
그런데도 채아는 이상하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속상했다. 창피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작고 질긴 감정 하나가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해보고 싶다.
처음 오디션 지원 버튼을 눌렀을 때도 그랬다. 무서운데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무게가 훨씬 더 진짜가 되었을 뿐이다.
채아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발끝을 맞추고, 어깨 힘을 내리고,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이번에는 방금 들은 지적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동작을 시작했다.
예뻐 보이려고 하지 말기. 리듬 먼저 느끼기. 도망치지 않기.
거울 속 채아는 아직 서툴렀다. 하지만 적어도 아까보다는 조금 더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연습실 밖 복도는 조용했고, 건물 어딘가에서 누군가 문 닫는 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채아는 마른입술을 혀끝으로 적신 뒤 작게 중얼거렸다.
"다시 해 보자."
그 말은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멋있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딱 그 정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창한 결심보다, 다시 한 번 해 보는 마음.
합격은 채아를 무대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대신 거울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채아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꿈을 이루는 길은 조명 아래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아무도 박수 쳐 주지 않는 연습실에서, 자기 부족함을 끝까지 바라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채아는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화려함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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