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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라그랑주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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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라그랑주 선언

선언은 총성이 아니라 문장으로 완성된다

혁명 직후의 정거장은 대개 두 종류의 인간으로 가득 찬다.

아직 총을 쥐고 있는 인간과, 벌써 의자를 찾는 인간.

라그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개 원장이 열린 지 여섯 시간이 지나자 총성은 띄엄띄엄 멀어졌고, 대신 회의 요청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누구를 임시 대표로 세울지, 사설 탱크 몰수에 대한 보상 기준을 어떻게 둘지, 항만 통행료를 누가 징수할지, 의료구획의 우선 배분은 언제까지 유지할지, 상층 거주구의 분할 개방은 얼마나 빠르게 진행할지.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서로의 목을 조르던 손으로 이제 조항 번호를 세기 시작했다.

문명은 생각보다 얇은 막이다.

하지만 막이라도 있는 게 진공보다는 낫다.

서진은 중앙 제어실 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마신 커피는 이미 식었고, 네 시간 전에 느낀 피로는 이제 몸속의 기후처럼 자리 잡았다. 채널 곳곳에서는 그를 찾는 소리가 계속 올라왔다.

윤서진 어디 있나.

윤서진 보고 승인하라고 해.

윤서진이 말해야 사람들이 따른다.

그는 그런 문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오는 건 사람보다 책임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책임은 늘 발소리가 없다.

민아가 단말을 흔들며 다가왔다.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셋."

"이젠 반대로는 안 되나."

"좋은 소식은 의료구획이 급한 고비 넘겼어. 신생아 모듈 안정권."

"나머지는?"

"지구 대표선이 암호화 채널 열어 달래. 화성 연락선도 마찬가지. 그리고 항만 조합은 우리가 지금 뭘로 운영되는 건지 모르겠으니, 오늘 안에 법적 지위를 정하라고 난리야."

태경이 붕대 감긴 옆구리를 누른 채 끼어들었다.

"좋아. 둘이 싸우던 부모가 이제 와서 아이 양육권 서류부터 들이미는군."

유리는 제어실 출입문 쪽에서 채널을 듣고 있다가 짧게 말했다.

"지구는 보호를 말할 거고, 화성은 연대를 말하겠지."

"번역하면?" 민아가 물었다.

"둘 다 소유를 말하는 거야."

서진은 마른 눈을 한 번 비볐다. 피곤하면 세상이 단순해질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잠을 충분히 자본 적 없는 사람의 착각이다. 진짜 피로는 모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단어 하나도 무게가 생긴다.

보호.

연대.

질서.

안정.

그럴듯한 말들은 늘 목줄에 리본을 달고 온다.

민아가 그의 앞에 새 창을 띄웠다.

"그리고 이것도."

화면 상단에는 공개 원장에서 가장 많이 요청된 안건이 떠 있었다.

라그랑주 정거장의 대외 지위 확정.

임시 조치인지, 새 체제인지, 아니면 그저 반란 상태인지.

질문은 점잖았고, 의미는 거칠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대답할 것이다. 우주에서는 빈칸을 오래 두지 않는다. 빈칸은 대개 강한 쪽의 서명으로 채워진다.

서진이 말했다.

"회의 열자."

태경이 눈을 껌뻑였다.

"지금?"

"지금 아니면 지구가 먼저 문장을 쓰겠지."

민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상하네. 네가 점점 정치적인 말을 한다."

서진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가 바로 후회했다.

"아니. 배관적인 말을 하는 거야. 빈 관은 아무 데서나 새."

지구와 화성은 동시에 친절해졌다

회의는 중앙 의회실이 아니라 화물 분류장 2구역에서 열렸다. 의회실은 상층 대표들이 너무 오래 쓰던 곳이라 냄새가 나빴고, 화물 분류장은 적어도 모든 사람이 길을 아는 장소였다. 거기엔 바닥의 긁힌 자국이 있었고, 오래된 짐칸 번호가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공기가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 냄새를 풍겼다. 정치를 하려면 그런 냄새가 조금은 필요하다.

임시 대표들은 반원 형태로 앉았다. 의료구획, 농업링, 항만 조합, 하층 생활구역들, 정비반, 교육모듈, 외부작업조, 그리고 공개 원장에서 긴급 선출된 감시 노드 대표들. 상층 거주구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자기 몫을 잃은 사람들이야말로 회의에 가장 일찍 도착하는 법이다.

성하림은 구금 상태였지만 증언 자격으로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이 묶여 있지 않았고, 그게 더 적절해 보였다. 권력이란 금속보다 습관에 더 오래 남는다.

지구 연락선의 화면이 먼저 켜졌다. 정장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끈했고, 배경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저런 배경을 가진 사람은 대개 먼지를 정책으로만 안다.

그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라그랑주의 안정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구 연합은 현재 상황을 불행한 행정 붕괴로 보고 있으며, 인도주의적 보호 체계를 즉시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태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불행한 행정 붕괴라. 우릴 아주 공손하게 폭동 취급하는군."

화성 연락선은 그보다 더 편한 차림의 여자를 내보냈다. 그녀는 지구 대표보다 덜 비싼 옷을 입었고, 그 대신 더 영리한 눈을 하고 있었다.

"화성 자유도시는 라그랑주 시민들의 자결 의지를 존중합니다. 다만 지금은 외부 압력에 취약한 과도기이니, 상호방위와 자원 협약을 위한 임시 동맹을 제안합니다."

민아가 손가락으로 공중에 따옴표를 그렸다.

"자결을 존중하지만 먼저 서류에 서명하라. 매력적이네."

항만 대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둘 다 돈 얘기는 언제 합니까? 보급선이 들어와야 정거장이 버텨요."

지구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연합 항로 보증이 가능합니다. 단, 정거장 행정권은 국제 생명유지 관리위원회 감독 하에 두어야 합니다."

화성 대표도 곧장 덧붙였다.

"화성도 곡물과 공업 부품을 우선 공급할 수 있습니다. 대신 정거장은 화성-외곽 교역 우선권을 보장해야겠지요."

의료구획 대표가 낮게 욕했다. 농업링 기술반장은 웃지도 못했다. 다들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두 제안은 문장이 달랐지만 속은 같았다.

공기와 식량과 항로를 담보로 목줄을 다시 거는 일.

서진은 두 화면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둘 중 어느 쪽도 라그랑주를 독립 거주지로 인정할 생각은 없군."

지구 대표는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독립은 책임 능력을 갖춘 주체에게 주어지는 법적 지위입니다."

화성 대표는 조금 더 솔직했다.

"우주에 공짜 독립은 없어요, 서진 씨. 누군가의 우산 없이 버티기 어려운 시기라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서진은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았다. 틀리지 않은 말은 가끔 제일 위험하다. 사실을 이용해 사슬을 만드는 사람들은 늘 유능해 보인다.

그가 말했다.

"우산은 알겠는데, 당신들은 꼭 손잡이도 같이 쥐려 하지."

화면 너머의 두 사람은 동시에 침묵했다. 회의장 안에서는 아주 작은 웃음이 흘렀다. 피곤한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소리였다.

속령이 되는 건 생각보다 쉽다

논쟁은 곧 현실적인 숫자로 내려왔다.

라그랑주는 아직 자급이 완전하지 않았다. 산소 체계는 공개망으로 전환됐지만, 부품은 계속 닳을 것이다. 곡물과 약품과 외장 패널과 추진제와 항법 소프트웨어 갱신이 필요하다. 독립을 선언하는 건 멋있다. 그 뒤에 들어오는 청구서를 계산하는 건 덜 멋있지만 더 중요하다.

항만 조합 대표는 대놓고 말했다.

"멋진 문장으로는 도킹 클램프를 수리 못 합니다. 누가 비용을 댈 겁니까?"

농업링 반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는 넘겨도 다음 달은 몰라. 씨앗 배양분하고 비료 효소가 부족해."

상층 대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욱 정식 후견 체계가 필요합니다. 독립 운운하는 감상보다 계약 안정성이 먼저예요."

민아가 그를 보며 말했다.

"계약 안정성이라. 재미있네. 바로 며칠 전까지는 그 안정성 덕분에 절반이 질식할 뻔했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마십시오."

"나는 감정이 아니라 로그를 보고 말해."

성하림이 그때 처음 입을 열었다.

"둘 다 그만두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그녀는 여전히 패배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건 재능인지 결함인지 가끔 구분이 어렵다.

"독립이든 후견이든," 그녀가 말했다. "핵심은 누가 마지막 승인권을 갖느냐입니다. 공기, 항만, 외교, 치안, 분쟁 중재. 그 다섯 가지 중 셋 이상을 외부가 쥐면 속령입니다."

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우리 편을 들어준 건가?"

"아니요. 정확한 말을 한 겁니다."

서진은 성하림을 잠깐 바라봤다. 그녀는 무너진 체제의 사람이었지만, 체제를 이해하는 능력만큼은 여전히 쓸모가 있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성가시다. 틀린 편에 선 인간이 항상 틀린 말만 하는 건 아니다.

유리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럼 답은 간단하네. 다섯 가지를 우리 손에 두면 되지."

항만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말은 쉽죠. 우린 군함도 없고, 함대도 없어요."

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속령 되는 건 함대 때문만은 아니야. 대개는 먼저 겁먹어서 되지."

그 말이 회의장에 남았다. 누구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무력은 무섭다. 하지만 무력보다 먼저 굴복을 결정하는 건 계산서일 때가 많다.

서진은 공개 원장을 불러왔다. 각 구역의 잔량, 필요량, 생산량, 수리 일정, 외부 의존 목록이 복잡한 표로 떠올랐다. 그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우린 당장 모든 걸 혼자 할 수는 없어."

상층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기울였다.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서진이 잘라 말했다. "혼자 못 한다는 이유로 남의 소유가 될 필요는 없어."

민아가 곧장 받아 적었다. 그녀는 사람의 말을 의심하면서도 좋은 문장은 절대 그냥 놓치지 않았다.

"교역은 하되 종속은 안 한다?"

"그래."

"보급은 받되 승인권은 안 넘긴다?"

"그거지."

태경이 씩 웃었다.

"드디어 인간 말로 들리네."

시민은 고객이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독립을 말하는 건 쉽다. 누가 그 독립의 주인이냐를 정하는 순간부터 골치가 시작된다. 라그랑주는 너무 오래 고객과 노동자와 계약자와 무허가 체류자와 단기 승선자와 고급 시민권 보유자를 따로 세어 왔다. 어떤 사람은 같은 정거장에서 십 년을 살고도 임시 체류 딱지를 떼지 못했고, 어떤 사람은 투자 계정 하나로 넓은 돔과 예비 산소를 샀다.

정거장은 집이라기보다 늘 시장처럼 운영됐다.

시장은 물건을 분류하는 데는 능하지만 사람을 함께 살게 만드는 데는 서툴다.

교육모듈 대표인 노교사가 입을 열었다.

"독립을 선언한다면, 먼저 누가 시민인지 정해야 합니다."

하층 생활구역 대표 중 하나가 즉각 반발했다.

"또 심사입니까? 서류 없는 사람들은 그 심사 때문에 늘 뒤로 밀렸어요."

상층 대표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 기준 없이 시민권을 주면 혼란만 커집니다."

"기준이 있었으니까 지금 꼴이 난 거지." 민아가 받아쳤다.

논쟁은 금세 뜨거워졌다. 거주 기간, 노동 기여, 미성년자 처리, 외부 선원에게 부여할 임시 권리, 재산권 보장 범위, 형사 책임, 무장 인원의 등록 문제까지 한꺼번에 쏟아졌다.

서진은 그 소리를 듣다가 문득 첫날을 떠올렸다. 개인 호흡 할당량이 아침 인사보다 먼저 떠오르던 날. 사람보다 계정이 먼저 존재하던 곳. 죽은 선장의 아이디가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던 정거장.

그가 말했다.

"시민은 구매 기록으로 정하는 거 아니야."

회의장이 조금 조용해졌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기서 사는 사람, 여기서 일하는 사람, 여기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 여기서 아픈 사람, 여기서 늙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민이지. 고객이 아니고."

노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주를 기준으로 하자는 겁니까?"

"거주와 책임."

항만 대표가 물었다.

"외부 선원은?"

"머무는 동안 보호받는다. 하지만 정거장 규칙도 따른다."

의료구획 대표가 끼어들었다.

"신분등급과 무관하게 생명유지 최소치는 계속 보장?"

서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건 시민권보다 아래 바닥이야. 숨 쉬는 건 회원제 서비스가 아니니까."

민아가 빠르게 문장을 정리했다. 그녀의 손이 만들어 내는 초안은 차갑고 명료했다. 그 차가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뜨거운 말만으로는 헌장이 안 된다.

성하림이 낮게 말했다.

"그렇게 가면 투자자들은 떨어져 나갈 겁니다."

서진이 그녀를 봤다.

"떨어져 나가는 게 돈이라면 다시 벌면 돼. 떨어져 나가는 게 사람이면 복구가 안 돼."

그 말에 누구도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돈을 다시 버는 일은 어렵다. 사람을 다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라그랑주 선언

최종 문장을 쓰는 데는 예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좋은 선언문은 대개 문장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이미 수많은 사람이 똑같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다. 문장은 뒤늦게 도착한 합의일 뿐이다.

민아가 읽고, 노교사가 다듬고, 의료구획 대표가 생명유지 조항을 확인하고, 항만 조합이 통행권 문구에 이빨을 드러냈다가 조금 물러서고, 농업링이 자급 목표 시한을 넣었고, 유리가 치안권 조항에서 외부 무력 개입 금지 문장을 더 세게 밀어붙였다. 성하림은 세 번이나 표현을 고쳤다. 놀랍게도, 그녀가 손댄 문장들은 더 위험하지만 더 정확해졌다.

마침내 초안이 전체 채널에 공개되었다.

서진은 읽기 전에 한 번 물었다.

"이걸 내가 읽어야 하나?"

태경이 웃었다.

"싫어?"

"아주."

민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네 목소리를 사람들이 제일 잘 알아들어."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늘 그렇듯 한숨부터 쉬었다. 그리고 공용 채널을 열었다.

정거장 전역의 화면이 켜졌다. 작업복 차림의 정비사, 회복실 침대 옆의 보호자, 농업링의 땀 젖은 기술자, 분할 개방된 상층 회랑에 서 있는 아이들, 항만에서 도킹 암을 점검하던 노동자들, 아직도 어디 편인지 정하지 못한 얼굴들. 다들 잠깐씩 손을 멈췄다.

서진이 읽었다.

"라그랑주 정거장 거주민은 오늘부로 다음을 선언한다."

그는 문장을 하나씩 또박또박 읽었다.

라그랑주는 지구의 속령도, 화성의 속령도 아니다.

라그랑주는 교역하는 항구이되 소유되는 창고가 아니다.

이 정거장의 생명유지 체계와 항만, 치안, 법적 승인권은 라그랑주 시민 공동체에 속한다.

모든 거주자는 신분등급, 출신 행성, 계약 상태와 무관하게 생존 최소치를 보장받는다.

시민권은 재산이 아니라 거주와 책임에 의해 부여된다.

공용 자원은 공개 원장 아래에서만 배분된다.

외부 세력과의 조약은 공개 절차와 시민 승인 없이 체결될 수 없다.

누구도 공기를 사유 권력의 수단으로 독점할 수 없다.

마지막 문장은 민아가 썼고, 노교사가 고치지 않은 문장이었다.

우리는 중립을 가장한 상품이 아니라,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거주지다.

채널은 잠시 조용했다.

그 침묵은 불안한 종류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막 들은 말을 자기 안쪽에 내려놓고 있는 침묵이었다. 큰 문장은 늘 한 박자 늦게 이해된다.

그다음에는 박수가 났다.

어디선가 먼저 시작했고, 다른 구역들이 뒤따랐다. 요란한 환호도 있었고, 어색한 손뼉도 있었고, 끝까지 팔짱을 끼고 있는 인간들도 있었다. 그게 더 진짜 같았다. 모두가 한꺼번에 감동하면 대개 사기다.

지구 대표선은 곧바로 항의 문서를 보냈다. 화성은 유감을 표하면서도 실무 회담을 제안했다. 둘 다 예상 범위 안이었다. 제국은 모욕당하면 먼저 문서부터 보낸다. 총은 그다음 순서다.

민아가 메시지 목록을 보며 말했다.

"축하해. 우린 방금 두 행성을 동시에 귀찮게 만들었어."

태경이 웃었다.

"독립의 첫 증거군."

영웅은 투표 줄에 서지 않는다, 그래서 서진은 섰다

선언 직후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축배가 아니라 등록이었다.

임시 시민 등록소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 철자를 두 번 확인했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 처음으로 '거주지' 칸에 자랑스럽게 라그랑주를 적었다. 아이들은 그저 줄이 길다는 이유로 신이 났고, 어른들은 긴장이 풀리자 더 피곤해 보였다.

민아는 서진에게 임시 행정위원 자리를 맡으라고 했다. 항만 쪽에서는 보안과 생명유지 권한을 묶어 임시 총감독직을 만들자는 말도 나왔다. 정거장은 이제 막 영웅을 발명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인간 사회는 위기 뒤에 얼굴 하나를 크게 걸어 두길 좋아한다. 그래야 복잡한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서진은 전부 거절했다.

"왜?" 민아가 물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밸브지 의자 아니야."

"그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래도 네가 앉으면 덜 시끄러울 거야."

"그건 더 안 좋은데."

그는 등록소 쪽을 턱짓했다.

"우리가 방금 만든 건 시민 공동체지, 나 하나 믿고 굴러가는 기계가 아니잖아."

유리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대단한 이유 같지만, 사실은 회의가 싫은 거지."

서진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크다."

결국 그는 작업복 그대로 줄 맨 뒤에 섰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몇몇은 먼저 가라고 했다. 어떤 노인은 그를 보고 악수를 청했고, 어떤 아이는 진짜 저 사람이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서진은 다 어색했다. 영웅 취급이란 대개 상대가 당신을 사람보다 상징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상징은 숨 쉬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 보면 위험하다.

등록 창구의 젊은 직원은 서진 차례가 오자 괜히 등을 폈다.

"이름."

"윤서진."

"거주 구역."

그는 잠깐 멈췄다. 중앙 유지보수 구역의 임시 숙소를 말할지, 오래전 떠나온 군 관사 기록을 떠올릴지, 아니면 그냥 정거장 전체를 집이라고 우길지. 잠깐의 머뭇거림 뒤에 그는 답했다.

"현재는 C-유지보수 12. 아마 곧 옮기겠지."

직원이 웃음을 참았다.

"직업."

"생명유지 정비."

"비고란에 공적 사항 기재할까요?"

서진은 눈을 들었다.

"안 해도 돼."

"그래도 기록상—"

"불법 침입, 관리자 권한 무단 사용, 공용 채널 강제 개방, 상층 배분권 몰수. 그런 건 적어도 되겠다."

창구 뒤 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직원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단말에 다른 문장을 입력했다.

시민 등록. 심사 보류 없음.

임시 시민권 번호가 뜨자, 서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감격과는 조금 달랐다. 너무 늦게 받은 것치고는 담백했고, 너무 무거운 것치고는 숫자 네 줄뿐이었다.

그는 영웅 훈장 대신 얇은 등록패 하나를 받았다.

생각해 보니 그 편이 더 맞았다.

훈장은 과거를 기념하지만, 시민증은 내일도 갱신해야 하니까.

승리 뒤에는 청소가 남는다

선언 다음 날부터 정거장은 놀랄 만큼 평범해졌다.

평범함이란 대개 노동의 다른 이름이다.

누수 점검이 있었고, 분할 개방된 상층 회랑의 재배관 작업이 있었고, 장식 생태정원을 식용 작물 시험구로 바꾸는 회의가 있었고, 옛 사설 경비 인력의 재등록 심사가 있었다. 항만에는 첫 외부 화물선이 들어왔는데, 선주는 새 통행세에 욕을 하면서도 결국 서류에 서명했다. 돈은 이념보다 성질이 더 나쁘지만, 때로는 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지구는 라그랑주를 '자칭 자치 거주구'라고 불렀다. 화성은 '협력 가능한 독립체'라는 애매한 표현을 썼다. 둘 다 완전한 인정은 아니었고, 둘 다 완전한 부정도 아니었다. 그 역시 현실적이었다. 우주 정치에서 진심보다 먼저 움직이는 건 보험 약관이다.

성하림에 대한 공개 청문도 열렸다. 처벌을 원하는 사람도 많았고, 체계 설계에 대한 증언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컸다. 그녀는 놀랄 만큼 침착하게 자료를 제출했다. 자신을 변호하면서도 이전 체제의 비밀 장치를 빠짐없이 설명했다. 인간은 끝까지 복합적이라서, 미워하기 편한 형태로 오래 머물러 주지 않는다.

태경은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도 항만 치안 재편 회의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유리는 외부 무장선 감시 규약을 만들며 잠을 줄였다. 민아는 공개 원장 인터페이스를 손봤다. 사람들이 진짜 자주 쓰는 시스템은 예쁜 화면이 아니라 욕하기 쉬운 화면이라는 게 그녀의 철학이었다.

서진은 다시 배관 속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장 난 압력 조절기를 바꿨고, 새 감시 노드의 오류 경보를 조정했고, 분산망 때문에 복잡해진 데이터 흐름에 욕을 했다. 어떤 날은 누군가 고맙다고 했고, 어떤 날은 왜 우리 구역만 압력 변동이 있느냐고 따졌다. 시민 사회는 아름다운 합창이 아니라, 각자 다른 박자로 불평하는 인간들을 그래도 같은 배 안에 태우는 기술에 가깝다.

그는 그 기술이 아직 서툴렀고, 그래서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툴다는 건 연기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마지막 페이지 뒤에서 계속되는 것들

며칠 뒤, 인공 야간 주기가 시작되기 직전 서진은 외부 관측창 앞에 섰다.

검은 우주 저편으로 지구가 아주 멀리 푸르게 떠 있었고, 화성은 그보다 더 작고 더 붉게 보였다. 둘 다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과 믿을 만한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만 빼면, 우주는 꽤 낭만적이다.

정거장 안쪽에서는 여전히 소리가 났다. 어디선가는 아이들이 새 시민 수업에서 선언문 마지막 줄을 외우고 있었고, 항만에선 도킹 클램프 시험음이 울렸고, 상층을 개조한 공동 거주구에선 벽체 절단 공구가 금속을 갈았다. 누군가는 처음으로 넓은 복도를 지나며 불평했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같은 복도를 당당하게 걸었다.

세상은 승리 장면에서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민아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단말을 내려다보다가 화면을 껐다.

"지구가 또 회담하재."

"하라고 해."

"화성도 관세율 재조정 제안 보냈어."

"그것도 읽어."

"그리고 시민 감시노드 선거에 네 이름이 추천됐어. 일곱 구역에서."

서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빼."

"벌써 두 구역은 철회 안 한대."

"왜."

"네가 싫어할 걸 아니까 더 재밌대."

그는 한숨을 쉬었다. 민아는 아주 짧게 웃었다.

"좋은 소식도 있어."

"이 우주에?"

"E-17 보호모듈 기억나지?"

그 아이였다. 지금도 숨 쉬면 되는 거냐고 물었던 목소리.

민아가 말했다.

"오늘 수업 시간에 자기가 커서 배관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했대."

서진은 창밖을 보다가, 아주 조금 웃었다.

"세상이 애를 잘못 가르치고 있군."

"아니. 드물게 제대로 가르친 거지."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은 전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서가 아니라, 일이 계속될 거라는 걸 둘 다 알아서였다.

정거장 방송이 부드럽게 울렸다. 야간 주기 전환 안내, 항만 접근선 경고, 시민회 의제 공지. 마지막 항목이 짧게 흘렀다.

내일 첫 정식 시민회에서 외부 교역 규정 초안과 임시 치안 조례, 그리고 공용 배관 증설안이 논의됩니다.

서진은 그 문장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혁명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게 결국 배관 증설안이라니. 우주는 유머 감각이 없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좋은 쪽일 것이다.

그가 몸을 돌리자 민아가 물었다.

"어디 가?"

"증설안 검토."

"또 일?"

"누군가는 해야지."

"영웅답지 않네."

서진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애초에 그런 적 없었어."

그건 겸손한 말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그는 나라를 세운 위인이 아니었고, 역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도 아니었다. 총보다 밸브를 더 자주 잡았고, 연설보다 수리 목록을 더 오래 봤다. 중요한 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몇 번 했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짜증을 냈고, 피곤해했고, 회의를 싫어했고, 사람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딱 시민 하나 몫이었다.

아마 자유라는 건 그런 인간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 완성된 영웅보다, 잘못도 하고 투표도 하고 불평도 하면서 그래도 다음 날 배관을 고치러 나가는 인간들.

서진은 복도를 지나 제어구획 쪽으로 걸어갔다. 조명이 하나씩 야간 모드로 낮아졌고, 멀리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사라졌다. 관측창 밖에서는 지구와 화성이 각자의 궤도를 따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라그랑주도 마찬가지였다.

정거장은 아직 가난했고, 아직 취약했고, 아직 인정도 덜 받았다. 싸워야 할 계약이 남았고, 고쳐야 할 배관이 남았고,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일은 적어도 자기 이름으로 벌어질 것이었다.

그걸로 당장은 충분했다.

충분하지 않더라도, 시작으로는 괜찮았다.

서진은 등록패를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고, 다음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서는 공기가 규칙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좋았다.

세계가 아직 움직인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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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선언: 숨의 가격으로 움직이는 우주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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