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산소를 나누는 법
숫자는 사람보다 먼저 비명을 지른다
중앙 제어실을 되찾은 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침묵이 아니었다.
질서였다.
공용 채널이 열린 지 채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정거장 전역에서 호출이 빗발쳤다. 생활구역 대표, 항만 조합, 농업링 기술반, 의료구획 당직의, 보안대 잔존 인원,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배부른 구역들. 다들 같은 말을 다른 억양으로 했다.
우리 쪽부터 보라고.
우리 쪽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 쪽이 먼저 죽는다고.
서진은 화면 위를 흐르는 요청 목록을 한 번 쓸어내렸다. 숫자가 또 떠올랐다. 잔여 예비량, 순환 손실, 저장탱크 격리 상태, 예상 압력 저하 곡선. 숫자는 감정이 없어서 편리하고, 감정이 없어서 잔인하다. 누구 사연이 더 딱한지 따지지 않고 그냥 모자란다고 말해 버리니까.
태경이 제어대 옆에 주저앉듯 기대 섰다. 응급 패치 아래로 번진 피가 아직 진득했다.
"내가 이래서 숫자를 싫어해."
민아는 단말 두 개를 동시에 띄운 채 대꾸했다.
"넌 글자도 싫어하잖아."
"글자는 가끔 거짓말이라도 해 줘. 숫자는 그런 예의가 없지."
유리는 제어실 출입문 쪽에 선 채 아직 무기를 내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성하림 편이던 경비 몇은 벽 쪽에 앉혀 두었고, 총을 들지 않았던 관제사들은 떨리는 손으로 콘솔에서 물러나 있었다. 혁명은 늘 포스터로 보면 근사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사람이 너무 많이 숨을 쉬고 있어서 어수선하다.
성하림은 두 손이 묶인 채도 꼿꼿했다. 그런 사람은 무릎을 꿇고도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방송을 닫으세요. 공황은 부족보다 더 빨리 번집니다."
서진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공황이 무서워서 진실을 숨기면, 남는 건 부족뿐이야."
"진실이 사람을 살립니까?"
그 말엔 독이 있었다. 그런데 독은 가끔 맞는 말을 한다.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중앙 계통도의 하단 경고창을 눌렀다. 빨간 창 하나가 새로 떠올랐다.
비공개 관리자 프로토콜 감지.
민아가 그 창을 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게 더 있어."
"오늘 밤엔 그 말이 좀 지겨워지는데." 태경이 말했다.
"그래도 들어야 해."
민아의 손가락이 몇 개의 오래된 메뉴를 열었다. 평소엔 관리자 권한으로도 보이지 않던 심층 계층이었다. 코어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래된 설계도가 한 겹씩 벗겨졌다.
"이 정거장 생명유지 체계, 원래 이렇게 만든 게 아니야."
서진이 눈을 좁혔다.
"무슨 뜻이야?"
"원안은 중앙집권형이 아니라 분산형이었어. 생활구역, 농업링, 항만, 의료구획이 각자 노드를 갖고, 코어는 계산만 하고 결정은 공개망에서 검증받게 되어 있었어."
유리가 낮게 물었다.
"그걸 누가 바꿨지?"
민아가 짧게 웃었다.
"누구긴. 공기를 상품으로 팔고 싶은 사람들이지."
화면 아래쪽에 오래된 문구가 떴다.
공동 거주지 비상 조항.
단일 행정 실패 시 생명유지권은 시민 공통망으로 이관 가능.
서진은 그 문장을 한참 봤다. 그건 법조문 같기도 했고, 유언 같기도 했다.
성하림이 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게 말했다.
"그 조항은 식민지 초기 혼란기에나 상정한 비상장치예요. 지금 그걸 살리면 정거장의 계약 체계가 붕괴합니다."
태경이 코웃음을 쳤다.
"좋네. 오늘 처음 들은 좋은 소식이군."
"웃을 일이 아닙니다." 성하림이 그를 쏘아봤다. "민간 거주권, 장기 항만 보험, 우선산소채권, 의료 예약권, 전부 그 계약 위에 올라가 있어요. 공개망 전환은 단순한 시스템 변경이 아니에요. 이 정거장의 소유 구조를 찢어 버리는 일입니다."
민아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가능하다는 거네."
코어는 누구 편도 아니었다
코어가 보여 준 해답은 멋지지 않았다.
멋진 해답은 대개 사기다. 진짜 해답은 지저분하고, 누구 하나 기분 좋게 끝나지 않고, 대개 청소까지 남긴다.
민아는 분산망 전환 시뮬레이션을 띄웠다. 수백 개의 선이 중앙 제어대에서 바깥 구역으로 갈라졌다. 지금까지는 한 손이 목을 쥐고 있던 구조였다면, 전환 뒤에는 수많은 손이 서로 손목을 감시하는 구조가 되는 셈이었다.
좋은 점은 분명했다. 누구도 몰래 특정 구역의 산소를 잠글 수 없다. 우선순위 변경은 전 구역에 즉시 공개된다. 예비량 이동도 기록이 남는다. 생명유지는 더 이상 사무실 안의 비밀문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배관도가 된다.
나쁜 점도 분명했다.
그 순간부터 특권은 특권인 척할 수 없어진다.
넓은 개인 거주 돔, 개인 정원, 사적 수영 수조, 과압 상태로 유지되던 고급 산책회랑, 민간인 출입금지로 묶어 둔 전용 예비탱크. 그런 것들은 전부 같은 문장으로 다시 쓰이게 된다.
공용 자원. 즉시 재배분 대상.
서진은 계통도 한쪽에 떠 있는 실행 경고를 읽었다.
공개망 전환 시, 비상 생존 최소치 이하 특혜 배분은 자동 종료됩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세금이 아니라 자동이다. 그들은 늘 자기 예외조항이 수동으로 남아 있길 원한다.
성하림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걸 실행하면, 몇 시간 안에 상층 거주구가 반발할 겁니다."
"반발이야 이미 하고 있잖아." 유리가 말했다.
"아니요. 지금까지는 저항이었죠. 그다음은 붕괴예요."
그녀는 서진만 바라봤다.
"상층이 가진 건 단지 사치가 아닙니다. 의사, 항법사, 고급 정비사, 장기 계약 선주들, 투자자들, 대형 농업 모듈의 지분권자들. 그들이 가진 공기까지 강제로 풀면, 내일 아침부터 아무도 규칙을 믿지 않게 됩니다."
서진이 천천히 물었다.
"지금은 믿고 있나?"
성하림은 처음으로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그 틈에 민아가 다른 창을 띄웠다.
"코어 예측이 세 가지를 내놨어."
첫 번째는 현 체제 유지였다. 상층과 핵심 산업구역을 우선 보존하고, 하층과 임시 대피구역은 순차 감축. 살아남는 정거장은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정거장보다 훨씬 더 비열한 버전이 된다.
두 번째는 단순 균등 배분이었다. 모든 구역에 같은 비율로 나누는 방식. 듣기엔 공평하지만, 농업링과 의료구획이 먼저 무너진다. 오늘은 모두 조금 더 평등해지고, 사흘 뒤에는 모두 더 많이 죽는다.
세 번째가 공개망 전환이었다. 모든 구역에 생존 최소치를 먼저 보장하고, 그 위의 추가 배분은 공개 사유와 공개 투표, 그리고 실시간 기록 하에서만 허용. 느리고, 시끄럽고, 불편하다. 대신 누가 누구를 몰래 질식시키는지는 끝난다.
태경이 화면을 보며 툭 말했다.
"셋 중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게 제일 정상적인 거군."
"정상적인 건 원래 좀 귀찮아." 민아가 말했다.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셋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번째는 악취가 났고, 두 번째는 멍청했고, 세 번째는 인간이 견딜 만큼 고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선택지가 마음에 들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작동하면 된다.
살리면 된다.
특권은 늘 필수 인력이라는 얼굴을 하고 온다
민아가 공용 채널을 제한 개방하자 대표자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항만 조합 대표는 바로 화를 냈다. 의료구획 당직의는 화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농업링 기술반장은 말보다 숨을 먼저 골랐다. 그리고 가장 침착한 얼굴은 역시 상층 거주구 대표였다. 침착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대개 자기가 잃을 것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앙 제어실 현 점유자에게 요구합니다." 상층 대표가 말했다. "비상상태를 빌미로 사유 예비자산에 손대지 마십시오. 그 탱크들은 합법적 비용으로 유지된 겁니다."
태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합법적으로 숨을 더 사뒀다, 이 말이군."
의료구획의 여의사가 끼어들었다.
"농담할 시간 없습니다. 저희는 산소가 더 필요합니다. 수술실 두 곳은 이미 예비압으로 돌리고 있어요."
농업링 반장이 바로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요. 배양실 압력 떨어지면 식량 생산이 끊깁니다. 내일이 아니라 다음 주부터 다 죽는다고."
항만 대표는 그 말을 자르듯 던졌다.
"도킹 구역이 멈추면 외부 보급선 못 받습니다. 선주들이 발 빼면 끝장이에요."
그러자 상층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보셨죠? 그래서 우선순위가 필요한 겁니다. 모두에게 다 줄 수 없으니, 기능이 큰 구역부터 보전해야 해요."
그 말은 매끈했다. 특권은 늘 공익의 문장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내가 먼저 숨 쉬어야 모두가 산다는 식으로.
서진은 그 얼굴들을 차례로 봤다. 거짓말하는 얼굴도 있었고, 진실을 말하는 얼굴도 있었다. 더 골치 아픈 건 둘 다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상층 거주구에는 탐욕스러운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도 있고, 늙은 사람도 있고, 자기 계약서가 누군가의 목줄이 되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도 있다.
하층에도 성자가만 있는 건 아니었다. 기회가 오면 남의 몫까지 쥘 사람은 어디나 있다.
그래서 정치가 어려운 것이다. 악당 얼굴을 한 악당만 있으면 일은 쉽다.
성하림이 그 틈을 찔렀다.
"들었죠? 당신은 지금 정의를 실행하는 게 아니라 복잡한 시스템을 망가뜨리려는 겁니다. 분산망은 듣기 좋지만, 결국 다수의 분노를 제도화할 뿐이에요."
서진이 그녀를 돌아봤다.
"아니. 다수의 분노를 숨기지 못하게 만드는 거지."
"같은 말 아닙니까?"
"전혀."
그는 제어대 위에 손을 올렸다.
"숨겨진 분노는 배관 뒤에서 밸브를 잠가. 드러난 분노는 적어도 기록에 남아."
유리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 기록은 나중에 책임을 찾게 해."
민아가 한숨처럼 덧붙였다.
"문제는, 지금 결정 안 하면 책임질 사람도 먼저 질식한다는 거지."
공평은 같은 양이 아니라 같은 바닥이다
서진은 생애 대부분을 배관 옆에서 보냈다. 배관은 철학보다 솔직하다.
모든 라인을 똑같이 열면 좋은 게 아니다. 어떤 라인은 병동으로 가고, 어떤 라인은 장식용 연못으로 간다. 똑같이 취급하는 건 공평이 아니라 게으름이다.
그는 공개 채널을 전체로 넓혔다. 이제 정거장 거의 모든 사람이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보통 위대한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서진은 그 재주가 없었다. 그 대신 진짜 필요한 말만 골랐다.
"잘 들어."
채널이 조금 조용해졌다.
"우린 산소가 모자라. 그건 협상으로 안 바뀐다. 하지만 누가 몰래 더 가지고 있느냐는 오늘 바꿀 수 있다."
화면 한쪽에서 누군가 욕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 울고 있었다. 둘 다 이해됐다.
서진이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생명유지 체계는 세 가지 규칙으로 움직인다."
민아가 옆에서 그 규칙을 실시간으로 자막화했다.
"첫째, 모든 거주구는 생존 최소치를 먼저 받는다. 신분, 계정, 시민권 등급, 계약 상태는 고려하지 않는다."
상층 대표의 얼굴이 굳었다.
"둘째, 그 이상이 필요한 구역은 이유를 공개한다. 병원, 농업링, 수리구획처럼 모두를 살리기 위해 더 필요한 곳은 더 받는다. 하지만 이유와 양은 전부 기록된다."
의료구획 당직의가 아주 조금 숨을 내쉬었다.
"셋째, 개인과 사기업이 잠가 둔 예비탱크는 오늘부로 공용망에 편입한다. 보상은 나중에 논의한다. 지금은 생존이 먼저다."
이번에는 욕설이 여러 구역에서 동시에 터졌다. 그건 예상한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이 사라질 때보다, 그것이 공개적으로 사라질 때 더 분노한다.
상층 대표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건 몰수입니다."
"맞아." 서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공기를 독점한 권리의 몰수지."
"당신에게 그런 권한이 있습니까?"
서진은 잠시 침묵했다가 민아를 봤다.
민아가 죽은 선장의 계정에서 복구한 옛 비상 승인 코드를 띄웠다. 오래전, 아직 이 정거장이 광고문구보다 생존계획을 더 믿던 시절의 서명이었다.
식민지 비상권 발동.
생명유지 공공신탁 전환 허용.
태경이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들은 가끔 산 사람보다 멀쩡한 판단을 하지."
성하림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코드는 폐기됐어요."
민아가 고개를 저었다.
"폐기 공문은 있었지. 근데 코어에선 삭제가 안 됐더라. 재미있지? 시스템은 종종 창립자 편이거든."
서진은 화면 속 수많은 얼굴을 다시 봤다.
"공평은 같은 양을 뿌리는 게 아니야. 누구나 같은 바닥에서 숨 쉬게 만드는 거다. 오늘부터 바닥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제어실 바깥에서 멀리 총성이 한 번 들렸다.
유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결정해. 밖은 내가 막을 수 있어. 하지만 오래는 못 막아."
그 말은 압박이 아니라 친절이었다. 친구가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종류의 친절.
버튼 하나로 끝나는 일은 없다
공개망 전환은 버튼 하나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늘 그렇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버튼 하나로 되는 것처럼 광고되지만, 실제론 확인 절차가 더럽게 많다. 아마 우주가 인간의 낭만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민아가 실행 순서를 읽었다.
"중앙 배분권 해제. 사설 저장탱크 강제 병합. 구역별 생존 최소치 재산정. 로컬 감시노드 활성화. 마지막으로 공개 원장 개방."
태경이 물었다.
"되돌릴 수 있나?"
민아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단계 지나면 어려워. 배관 지도 자체가 바뀌어."
유리가 낮게 말했다.
"좋네. 되돌리기 쉬운 혁명은 대개 반품되거든."
성하림이 서진만 보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죠. 전환 순간 상층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항만 선주들도, 투자자들도, 계약권자들도. 당신이 살린 사람들조차 나중에는 당신을 미워할 수 있어요. 부족은 누구도 고맙게 만들지 않으니까."
서진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은 구해 놓으면 감사보다 계산을 먼저 시작한다. 어제보다 덜 죽었다는 사실보다, 왜 나보다 저쪽이 조금 더 받았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그는 그래서 더 오래 망설였다.
망설임은 비겁함이 아닐 때가 있다. 어떤 선택이 너무 많은 사람 위를 지나갈 때, 바로 누르는 손가락보다 잠깐 멈추는 손가락이 더 책임감 있다.
그때 공용 채널 맨 아래쪽에서 우선순위가 낮은 호출 하나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생활구역 E-17, 미성년 보호모듈.
누가 잘못 연결한 것 같았다.
민아가 끊으려 했지만, 아이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저기요."
제어실 안이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우리 구역은 지금도 숨 쉬면 되는 거예요?"
질문은 짧았다.
정거장 전체가 그 짧은 질문 앞에서 조금 초라해졌다. 선주도, 의장도, 투자자도, 혁명가도. 다들 방금 전까지 더 근사한 문장으로 떠들고 있었는데, 결국 필요한 말은 저 정도 길이였다.
지금도 숨 쉬면 되는가.
서진이 대답했다.
"그래. 그걸 만들 거야."
그리고 승인창 위에 손을 얹었다.
산소를 나누는 법
첫 번째 단계가 실행되자, 중앙 제어실의 권한 표시등이 하나씩 꺼졌다.
성하림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권력이라는 표정이 사라졌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수갑이 아닐 때가 많다. 자기만 보던 숫자를 이제 모두가 보게 되는 순간, 권력은 절반쯤 증발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사설 저장탱크 병합 경고가 떴다. 상층 거주구의 전용 예비분, 항만 VIP 도크의 독립 환기실, 투자자 회랑의 과압 산책로, 민간 클럽의 유휴 저장분, 다들 하나의 공용 수치로 합쳐졌다.
화면 저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 압력이 떨어진다!"
"그래." 서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제 남들 사는 압력으로 사는 거야."
세 번째 단계에서 생활구역 몇 곳의 경고등이 노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아주 큰 변화는 아니었다. 갑자기 천국이 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당장 죽지 않을 만큼의 공기가 돌아갔다.
농업링에는 추가 배분이 승인됐다. 이유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식량 생산 유지. 의료구획에도 마찬가지였다. 수술실과 신생아 모듈, 회복실 최소치. 항만은 절반만 승인됐다. 외부 보급선 접안을 유지할 만큼만.
상층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구역의 추가분은?"
서진은 화면을 확인했다.
장식 생태정원 유지.
개인 스포츠 돔 가압 유지.
프리미엄 거주 회랑 쾌적압 보존.
전부 기각.
그는 그 결과를 그대로 읽어 주었다.
누군가 욕설을 퍼부었다. 누군가는 법적 책임을 운운했다. 또 누군가는 떠나겠다고 소리쳤다. 우주에서 제일 우스운 협박 중 하나가 떠나겠다는 말이다. 당장 바깥이 진공인데도 자주들 한다.
태경이 픽 웃었다.
"떠날 산소는 공용망에서 신청하고."
민아가 마지막 단계를 띄웠다.
공개 원장 개방.
이제부터는 누구든 볼 수 있다. 어느 구역이 얼마를 쓰는지, 누가 추가 배분을 신청했는지, 어떤 이유로 승인됐는지, 어떤 손이 밸브를 돌렸는지. 숨 쉬는 일이 더 이상 신분증 뒤에서 처리되지 않는다.
서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열었다.
"열어."
민아가 실행했다.
그 순간 정거장은 아마 처음으로 같은 공기를 같은 정보와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대단한 음악도 없었고, 영웅적인 조명도 없었다. 배관을 따라 압력 수치가 조정되고, 탱크의 잔량이 새 기준으로 환산되고, 특권층의 사설 예비분이 공용 수치로 녹아드는 아주 비극적이고 행정적인 기적이 일어났을 뿐이다.
혁명은 생각보다 자주 회계 처리처럼 생겼다.
몰락은 때로 숨소리의 크기로 측정된다
전환이 끝난 뒤, 제어실은 더 바빠졌다.
누군가는 승리라고 불렀겠지만, 서진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승리라면 조금은 홀가분해야 하는데, 그의 가슴은 오히려 더 무거웠다. 이제 누구를 비난하면 끝나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층 거주구에서는 이미 문이 열리고 있었다. 폐쇄 회랑 일부가 공용 동선으로 전환되었고, 넓은 개인 돔은 압력 효율 때문에 구획 분할 대상이 됐다. 부드러운 말로 표현하면 재조정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몰락이었다.
하지만 그 몰락이 꼭 비극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남과 같은 공기를 마시는 일일 뿐이니까.
성하림은 침묵하다가 아주 나중에 물었다.
"후회하지 않습니까?"
서진은 그녀를 봤다.
"아직 몰라."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 결정이 옳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옳은 결정이 언제나 좋은 기분을 주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당신이 무너뜨린 건 체제만이 아니에요." 성하림이 말했다. "사람들이 기대고 있던 확실성도 무너졌죠."
"그 확실성이란 게 누구 목을 밟고 서 있었는지, 이제 다 봤잖아."
"그래서요? 모두가 진실을 본다고 해서 모두가 현명해지진 않아요."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멍청한 결정도 공개적으로 하게 되겠지."
유리가 문가에서 말했다.
"그게 민주주의의 제일 우울한 장점이야."
태경이 피곤하게 웃었다.
"그리고 독재보다 덜 치명적인 단점이지."
민아는 새로 열린 공개 원장을 보며 빠르게 작업을 이어 갔다. 지역 노드 선출, 임시 감시권 배분, 자동 경고 범위 조정. 그녀의 얼굴은 지쳐 있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서진."
"왜."
"이제 선언문 필요해."
그는 화면을 봤다. 이미 사람들이 채널에서 같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가 규칙을 쓰냐고. 이게 임시조치인지, 앞으로도 계속되는 건지. 다시 누군가가 공기를 계급으로 나눌 수 있는지 없는지.
서진은 창밖의 검은 우주를 잠깐 봤다. 우주는 늘 심드렁했다. 인간이 방금 제도를 뒤집든 말든 별들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다. 그래서 오히려 좋을 때가 있다. 박수칠 청중이 없으면, 사람은 덜 연극적으로 선택하게 되니까.
그가 말했다.
"선언문은 나중에 써."
민아가 눈썹을 올렸다.
"정치적으론 지금이 좋은 타이밍인데?"
"정치야 늘 지금이 좋지."
서진은 제어대 위 공개 원장을 가리켰다.
"먼저 이걸 굴려. 문장보다 배관이 먼저 믿음을 줘."
태경이 낮게 중얼거렸다.
"근사한 말치고는 꽤 쓸모 있네."
서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정거장 곳곳에서 산소 수치가 새 기준에 맞춰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안도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방금 뭘 잃었는지도 아직 모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미 끝났다.
숨을 사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
그건 총보다 늦게 죽고, 총보다 오래 사람을 지배하던 믿음이었다.
오늘 밤 그 믿음이 꺼졌다.
그리고 라그랑주 정거장은 처음으로, 자유가 멋진 구호가 아니라 아주 귀찮은 배분 규칙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밖에서는 여전히 누군가 소리치고 있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누군가 계산하고 있었다. 세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그래서 살아 있었다.
서진은 주 제어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권력을 쥐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제 막 모두의 것이 된 공기가, 다시 누구 하나의 것이 되지 않게 하려면, 밤이 조금 더 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언이라는 건 대개 그다음에 오는 법이다.
먼저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마시고.
그다음에야 같은 문장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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