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10. 중력 없는 쿠데타

Views 43약 11분생성형 AI 활용

10. 중력 없는 쿠데타

중력 없는 쿠데타

다수결은 공기를 만들지 못한다

화성 셔틀이 첫 번째 자세제어 분사를 시작한 시각, 라그랑주 정거장에선 세 종류의 인간이 동시에 바빠졌다.

하나는 환영할 준비를 하는 인간이었다.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구호물자를 벌써 자기 몫으로 나눠 갖고 있었고, 내일쯤이면 세상이 조금 덜 더러워질 거라고 믿고 싶어 했다.

다른 하나는 총을 세는 인간이었다. 구호 셔틀의 질량표에서 의료장비보다 격벽 절단 장비가 더 무겁다는 사실을 본 뒤에도 안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지막 하나는 회의를 여는 인간이었다.

대개 세 번째 부류가 제일 위험하다.

총을 든 인간은 자기가 위험하다는 걸 안다. 회의를 여는 인간은 자기가 책임감 있다고 믿는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티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더 많은 피해를 남기는 쪽은 의외로 후자인 경우가 많다.

서진이 시민링 중앙 회의구역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이미 사람과 경비와 소문으로 꽉 차 있었다. 평의회 긴급 소집. 도킹 승인 최종 재확인. 외부 세력 개입 대응. 이름은 많았지만 뜻은 하나였다.

누가 정거장의 목을 잡을지 지금 결정하겠다는 뜻.

태경이 회의실 앞 보안문을 보며 말했다.

"경비가 너무 많아."

"오늘은 다들 원칙을 사랑하니까." 유리가 대꾸했다. "원칙은 원래 무장한 상태에서 더 잘 사랑하지."

민아는 개인 단말을 손목에 고정한 채 낮게 말했다.

"도킹 표 다시 바뀌었어. 공개표는 의료 셔틀 우선인데, 내부 항만 제어 테이블에선 순서가 또 뒤집혔어."

"누가 바꿨는데?" 서진이 물었다.

민아가 고개를 저었다.

"기록이 지워졌어. 아니, 정확히는 지워진 척하고 있어. 너무 깔끔해. 이런 건 실수로 안 나와."

서진은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라파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디라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둘은 다른 억양으로 말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똑같이 침착했다. 그런 사람들 곁에서 오래 있으면 알게 된다. 세상은 자기 생각보다 더 자주 이미 정리되어 있다. 회의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열리는 게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열릴 때가 더 많다.

문이 열렸다.

회의실은 길고 차가웠다. 투명 차압벽 너머로 외곽 도킹암과 검은 우주가 보였다. 테이블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고, 의자 팔걸이에는 비상 고정끈이 달려 있었다. 우주에서 가구가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은 늘 협박과 비슷하다. 갑자기 날아다닐 수 있으니 미리 묶여 두라는 뜻이니까.

평의회 의장 성하림은 맨 끝 중앙석에 앉아 있었다. 옷차림은 단정했고, 표정은 지친 사람의 것이었다. 그 점이 오히려 불길했다. 진짜 위험한 인간은 여유로울 때보다 피곤해 보일 때 더 결심이 굳어 있다.

그녀의 양옆으로 각 구역 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농업링, 항만노조, 생활구역 배급위원, 보안감사관, 환승세관 담당. 며칠 전만 해도 서로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사람은 서로 미워할 때보다, 같은 공포를 공유할 때 더 닮아 보인다.

성하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윤서진 씨, 자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중한 말투였다.

정중한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화를 내는 사람은 적어도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보이지만, 정중한 사람은 칼을 꺼내기 전까지도 악수를 청할 수 있다.

서진은 자리에 앉지 않고 회의실 중앙 단말에 자료를 띄웠다. 화성의 비공개 도킹 순서표, 우선 확보 구역 목록, 접촉 우선 인물 분류표. 화면에 항만관제, 통신허브, 생명유지 백업실이라는 문장이 뜨자 회의장 안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게 식었다.

"의료선이 먼저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서진이 말했다. "전술 공병이 먼저 들어와요. 통신 통제 인원도 타고 있습니다. 이건 구호가 아니라 접수 절차예요."

항만 대표 하나가 얼굴을 굳혔다.

"그걸 확신합니까?"

"확신은 숫자가 하지, 내가 안 합니다." 서진이 말했다. "나는 그냥 읽을 뿐이에요."

민아가 뒤에서 보조 화면을 넘겼다. 중량 분포표, 비공개 접근 코드, 암호층 송출 기록. 몇몇 평의원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몇몇은 오히려 등을 기대고 앉았다. 믿는 척하는 사람보다, 믿기 싫은 사람 쪽이 더 티가 난다.

유리가 덧붙였다.

"그리고 지구도 마찬가지예요. 감독이든 보호든 이름만 다르지, 다들 우리 배관부터 잡으려 합니다."

회의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화성 없이는 오늘 밤도 못 넘긴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런 식으로 문 열어 줬다가 영영 못 닫는다고 했다. 누군가는 지구가 더 나쁘다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화성이 더 교활하다고 했다. 평의회란 원래 그런 곳이다. 다들 자기가 책임지는 구역만큼만 진실을 안다. 산소를 맡은 사람은 숨부터 보고, 항만을 맡은 사람은 선박부터 보고, 보안을 맡은 사람은 적부터 본다.

문제는 정거장이 그 셋을 동시에 원한다는 데 있었다.

성하림은 한동안 침묵한 채 자료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좋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표결이 아니라 생존을 논해야겠군요."

그 말은 맞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회의실에서 중력이 꺼지면 본심이 떠오른다

첫 번째 이상은 소리로 왔다.

금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한 톤 낮아진 듯한 진동. 정거장에서 오래 산 사람은 그런 소리를 안다. 큰 기계가 결심할 때 나는 소리였다. 회전이 죽거나, 잠금이 걸리거나, 평소 움직이지 않던 계통이 갑자기 권한을 잡을 때 나는 소리.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같은 순간 민아가 손목 단말을 확인하다 욕을 삼켰다.

"중심축 자세 재동기화?"

태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 다음엔 감각으로 왔다.

발바닥 아래에서 바닥이 슬며시 멀어졌다.

아주 잠깐, 몸이 거짓말을 한다. 아직 서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미 무게가 빠지고 있다. 컵 속 물이 둥글게 들뜨고, 종이 한 장이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떠오르고,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결정을 발바닥으로 내리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닫는다.

"고정!" 누군가가 외쳤다.

늦었다.

회의실 중력이 꺼졌다.

의자 몇 개가 뒤로 밀리며 떠올랐고, 한 평의원이 팔걸이를 놓친 채 천천히 테이블 위로 들렸다. 누군가는 본능적으로 공기를 붙잡으려 했고, 누군가는 욕을 했다. 우주에서 욕은 대개 신앙에 가깝다. 도와주진 못해도 인간임은 확인시켜 주니까.

서진은 옆 테이블 가장자리를 잡아 몸을 고정했다. 태경은 반사적으로 민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벽 쪽 손잡이에 걸었다. 유리는 아예 몸을 둥글게 말아 회전량을 줄였다. 익숙한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 덜 우아하고, 더 오래 산 움직임.

그때 천장 패널 네 개가 동시에 열렸다.

검은 제복의 보안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자력부츠를 신은 자들만이 바닥을 밟고 있었고, 나머지는 천장 레일과 손잡이를 따라 움직였다. 전기충격봉, 고정용 와이어 런처, 압착식 구속 밴드. 실탄 대신 통제를 택한 장비들이었다.

그건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죽일 생각이 없는 상대는 대개 오래 쓸 생각이 있는 상대다.

회의실 곳곳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한 평의원이 비상 호출 패널을 향해 몸을 밀었다가 허공에서 옆으로 튕겨 나갔고, 보안대 하나가 그를 손쉽게 붙잡아 의자에 묶었다. 다른 누군가는 성질을 부리며 주먹질을 했지만, 중력 없는 주먹은 체면만 구기고 속도는 잘 안 나온다.

서진은 성하림을 봤다.

그녀만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너무 잘 움직이고 있었다.

자력부츠가 조용히 바닥에 붙은 채였다. 의자 아래 고정핀이 이미 내려가 있었고, 그녀의 팔은 테이블 손잡이에 느슨하게 걸쳐 있었다. 당황한 얼굴도, 실수한 표정도 없었다.

준비된 사람의 모습이었다.

서진이 낮게 말했다.

"당신이군."

성하림이 그를 바라봤다. 놀라지 않았다.

"늦게 알아챘네요, 윤서진 씨."

그녀가 손을 한 번 들자 보안대 둘이 서진 쪽으로 움직였다. 태경이 옆에서 테이블을 걷어찼다. 고정되지 않은 패드와 문서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민아는 그 틈에 조명 패널 하나를 강제로 과부하시켰고, 회의실 절반이 깜빡였다.

하지만 그 정도론 이미 시작된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쿠데타란 원래 처음 10초가 전부다. 그 10초를 놓치면 나머지는 설명과 체포 순서만 남는다.

의장은 표결 대신 자물쇠를 눌렀다

성하림의 목소리가 회의실 공용 음향을 타고 퍼졌다. 중력은 없어졌는데, 권위는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다. 우주에서 제일 얄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거다.

"평의회 전원에게 알립니다. 생존 연속성 조항 12호와 정거장 비상행정권 규정에 따라, 본 의장은 즉시 평의회 기능을 잠정 정지합니다."

한 평의원이 고정끈에 매달린 채 소리쳤다.

"이건 불법이야!"

성하림이 그를 흘겨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불법은 공기가 남을 때 따지는 겁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력부츠가 바닥을 짚을 때마다 작은 금속음이 났다. 아주 작고, 그래서 더 확실한 소리였다.

"정거장은 지구와 화성의 동시 개입 직전에 있습니다. 내부 정보 유출, 생명유지 핵심 기술의 비인가 점유, 도킹 통제 훼손, 외부 세력과의 비밀 접촉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다수결 구조로는 대응 속도가 생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태경이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멋지네. 쿠데타도 이렇게 회계보고처럼 하냐?"

성하림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태경 씨, 당신의 유머 감각은 늘 상황 인식보다 빠르군요."

"당신 권력욕보단 느린 것 같은데."

보안대 하나가 태경 쪽으로 전기봉을 겨눴다. 유리가 곧바로 떠다니는 의자를 발로 밀어 그를 막았다. 의자가 보안대의 가슴을 치고 지나가며 둘이 함께 벽 쪽으로 밀렸다. 중력 없는 싸움은 영화보다 훨씬 못생겼다. 대신 훨씬 절박하다.

성하림은 손을 다시 들었다. 보안대가 멈췄다.

"아직은 손상 없이 끝내고 싶습니다."

"정거장을?" 서진이 물었다.

"아니요." 성하림이 말했다. "당신들을."

회의실 안에 짧은 정적이 돌았다.

그녀는 중앙 스크린에 문서를 띄웠다. 서진의 이름, 민아의 접속 기록, 유리의 물류선 동선, 태경의 정비구역 출입 내역. 일부는 사실이었다. 일부는 잘라서 붙였고, 일부는 노골적으로 순서를 바꿔 놨다. 거짓말은 늘 진실 근처에 앉혀 둬야 오래 간다.

"윤서진과 그 협력자들은 미확인 외부 기술체계를 은닉하고," 성하림이 읽듯 말했다. "정거장 정식 승인 없이 생명유지 연산 자산을 비밀 운용했으며, 외부 세력과 독자 교신을 지속해 왔습니다. 최근 화성 접근 및 지구 측 접촉 과정에서 발생한 정보 누출 역시 이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가능성?"

성하림은 담담했다.

"비상권은 완벽한 재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좋은 핑계네." 유리가 말했다. "권력 잡을 땐 늘 급하더라."

성하림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쁜 방식으로 정직했다.

"예, 급합니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화성은 우리를 보호하겠다며 관제권을 원하고, 지구는 안정화하겠다며 감독권을 원합니다. 평의회는 지난 사흘 동안 둘 중 누구에게 얼마만큼 문을 열어 줄지 싸우느라 시간을 버렸어요. 여러분은 고결했지만 느렸고, 이분들은 용감했지만 제멋대로였죠."

그녀의 눈이 서진에게 멈췄다.

"정거장은 이제 의견이 아니라 명령 체계가 필요합니다."

서진은 손잡이를 붙든 채 물었다.

"그래서 네가 왕이 되겠다?"

성하림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왕은 세습합니다. 나는 관리자가 되려는 거예요."

"차이가 있나?"

"우주에선 꽤 큽니다."

"아니." 서진이 말했다. "우주에선 오히려 더 작아."

그녀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진 씨, 당신은 아직도 자유를 선택지처럼 생각해요. 하지만 폐쇄 거주지에서 자유는 결과입니다. 먼저 누가 밸브를 잡을지 정해야 생기는 부산물이죠."

그 말은 지독하게 틀렸고, 그래서 지독하게 설득력 있었다.

나쁜 시대의 문제는 거짓말이 너무 엉성하다는 데 있지 않다. 대개는 사실을 너무 잘 이해한 사람들이, 그 사실 위에 권력을 세운다는 데 있다.

성하림은 선언을 계속했다.

"본 시각부로 평의회는 정지됩니다. 통신 허브, 도킹 관제, 생명유지 백업실, 분배 서버실은 비상행정국 직할로 편입됩니다. 외부 세력과의 모든 협상은 단일 창구를 통합니다. 그리고 윤서진 일행은 정거장 안전을 훼손한 혐의로 즉시 구금—"

"젠장." 태경이 말했다. "문구까지 완벽하네."

"—구금 대상입니다. 저항 시 반역 행위로 간주합니다."

그 한마디가 끝나자, 회의실 공기가 정말로 바뀌었다.

도망자는 사람이고, 반역자는 문서다.

사람은 숨을 수 있지만 문서는 네 얼굴보다 빨리 도착한다.

반역자는 비상구를 먼저 배운다

성하림이 마지막 단어를 끝내기도 전에 민아가 회의실 측면 서비스 패널에 원격 주입을 걸었다. 정상이라면 먹히지 않을 코드였다. 하지만 쿠데타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앞문을 너무 좋아해서, 정비용 뒷문을 잠깐 잊는다.

패널 하나가 튀어 올랐다.

"서진!" 민아가 외쳤다.

서진은 손잡이를 놓고 몸을 밀었다. 중력 없는 이동은 달리기가 아니라 판단이다. 어디를 잡고, 무엇을 밀고, 누구를 포기하지 않을지 순간마다 골라야 한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유리 쪽으로 뻗었고, 유리는 떠오른 데이터 슬레이트 뭉치를 보안대 얼굴 쪽으로 쏟아 버렸다. 서류는 총알만큼 아프진 않지만, 시야를 망치는 데는 충분하다.

태경은 가장 느린 방식으로 가장 큰 일을 했다. 회의 테이블의 비상 고정핀을 강제로 꺾어 버린 것이다.

볼트가 나가며 테이블 전체가 자유로워졌다.

길고 무거운 금속 덩어리가 미세한 회전과 함께 옆으로 떠밀리자, 보안대 셋이 동시에 자세를 잃었다. 누군가는 벽에 부딪혔고, 누군가는 와이어에 엉켰다. 우주에서 무게는 사라져도 질량은 안 죽는다. 인간은 종종 그 차이를 몸으로 배운다.

서진이 서비스 개구부로 먼저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배선 덕트였다. 사람이 기어 다니라고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이 끝내 기어 다닐 거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만든 공간. 정거장 기술자의 마지막 품위는 늘 그런 곳에 남아 있다.

민아가 뒤따랐고, 유리가 그녀를 밀어 넣었다. 태경이 맨 마지막에 들어오려는 순간, 보안대 하나가 전기봉 끝을 그의 발목에 걸었다. 태경이 욕을 내뱉으며 몸이 뒤로 돌았다.

서진이 손을 뻗었다.

아주 짧은 순간, 둘 사이엔 진공보다 얇은 간격만 남았다.

태경이 그의 팔을 잡았고, 어깨 관절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붙잡은 건 놓치지 않았다. 유리가 뒤에서 둘의 허리를 걷어차듯 밀어 넣었고, 개구부 해치가 닫히며 전기봉 끝이 금속에 부딪혀 불꽃 하나를 튀겼다.

어둠 속에서 다섯 초쯤 아무도 말을 못 했다.

숨소리만 있었다.

살아남은 직후의 숨소리는 다 비슷하다. 부끄럽고, 시끄럽고, 믿을 수 없다는 냄새가 난다.

태경이 먼저 말했다.

"내 어깨, 지금 두 개쯤 있는 것 같은데."

"축하해." 유리가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보다 많은 걸 갖게 됐네."

민아가 단말을 확인했다. 그녀 얼굴빛이 더 나빠졌다.

"큰일 났어."

"방금보다?" 태경이 물었다.

"응. 이번엔 공문이야."

민아가 작은 화면을 띄웠다.

정거장 전체 긴급 공지였다. 붉은 머리말, 비상행정국 seal, 우선 송출 표기. 윤서진, 한태경, 유리 사바, 정민아. 이름이 또렷했다.

정거장 질서 전복 및 생명유지 자산 탈취 공모 혐의. 즉시 구금 대상. 공공 설비 접근 제한. 민간 협조 의무 발동.

태경이 헛웃음을 냈다.

"이렇게 빨라?"

민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통신 허브를 이미 먹은 거야. 우리 계정도 끊었어."

서진은 자기 단말을 열었다.

개인 접근권한 취소. 이동 허가 취소. 정비망 인증 취소. 배급 계정 보류.

우주에서 신분 박탈은 추상적인 벌이 아니다. 문이 안 열리고, 공기가 끊기고, 물이 비싸지고, 누군가가 널 숨겨 주려면 자기 배급표를 같이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행성에선 추방이 지리 문제지만, 정거장에선 호흡 문제다.

그들은 이제 공식적으로 살아 있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정거장은 금세 남의 목소리를 배운다

배선 덕트는 오래된 정비구역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환기 흐름과 전력 분산선만 지나던 길이었지만, 위기가 잦은 거주지에선 그런 길들이 결국 사람 통로가 된다. 설계도는 기능을 위해 만들어지지만, 역사란 건 늘 도망칠 구멍까지 추가한다.

그들이 덕트 끝 해치를 밀어 열었을 때, 아래 구역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모든 공용 스크린에 성하림의 얼굴이 떠 있었다.

방금 전 회의실에서 보던 피곤한 얼굴과 같은 얼굴이었지만, 조명이 더 좋았고 목소리도 더 안정되어 있었다. 인간은 참 대단하다. 쿠데타 직후에도 방송용 표정을 만들 줄 아니까.

"거주민 여러분," 그녀가 말했다. "라그랑주는 현재 외부 강압과 내부 파괴행위의 동시 위협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평의회 기능은 일시 중지되었으며, 비상행정국이 정거장 운영을 인수합니다."

유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인수. 저 단어 좋아하네."

성하림의 방송은 계속됐다.

"일부 불순 세력은 미승인 생명유지 연산체계와 외부 접촉망을 이용해 정거장을 거래 대상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해당 인원은 현재 도주 중이며, 모든 거주민은 이들에게 설비 접근권을 제공해서는 안 됩니다. 협조자는 동일하게 반역 공모로 간주됩니다."

서진은 스크린을 한참 올려다봤다.

반역 공모.

말은 참 편리했다. 정치가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을 법 밖으로 밀어낼 때 쓰기 좋고, 겁먹은 사람들에게 이웃을 의심하라 가르치기에도 좋다. 총보다 먼저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건 늘 이런 말들이다.

복도 아래로 사람 몇이 서둘러 지나갔다. 누군가는 스크린을 보고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정거장의 공기는 재생되지만, 공포는 늘 생것으로 퍼진다.

민아가 주파수를 더듬었다.

"항만 폐쇄 들어갔어. 통신도 중앙 경유 아니면 다 끊겨. 그리고… 화성 셔틀 하나 도킹 승인 났다."

서진이 그녀를 봤다.

"하나만?"

"응. 제한 도킹. 보안 점검 지원 명목."

유리가 짧게 웃었다.

"좋네. 쿠데타도 외주를 주는 시대야."

"아냐." 서진이 말했다. "외주가 아니라 견적 비교지."

그는 성하림의 의도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지구 편도, 화성 편도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 생각엔 그랬다. 그런 인간이 제일 위험하다. 누구의 앞잡이도 아니라고 믿는 독재자는 스스로를 배신자 대신 의사라고 생각한다. 수술 중이라고, 마취가 필요하다고, 환자가 비명을 지르는 건 병이 깊어서라고 믿는다.

아마 성하림은 정거장을 팔 생각이 없을 것이다.

대신 정거장을 자기 손에 쥐고 두 행성 사이에서 값을 올릴 생각이겠지.

그 계산은 영리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기 딱 좋은 종류의 영리함이었다.

태경이 벽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계획은 대개 합법적인 신분과 안정적인 문, 그리고 최소한의 식수가 있을 때 나온다. 반역자로 선언된 지 삼 분 된 인간에게는 보통 나쁜 계획만 남는다.

그때 멀리서 정거장 안내음이 울렸다. 차분하고, 상냥하고, 완전히 중립적인 기계 목소리였다.

주의. 비상행정 명령에 따라 구역 간 이동권한이 재조정되었습니다. 미승인 인원의 주요 설비 접근은 제한됩니다. 질서 유지에 협조해 주십시오.

질서 유지.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참 대단했다. 누가 숨을 먼저 쉬는지 정하는 순간에도, 늘 예의 바르게 들리니까.

문서상 반역자가 되는 법

그들이 다음 해치를 통과해 폐쇄 정비창으로 내려갔을 때, 첫 번째 문이 얼굴 인식을 거부했다.

붉은 띠가 켜졌다.

권한 없음.

두 번째 문은 열리다 말고 멈췄다. 세 번째는 아예 응답하지 않았다. 민아가 땀 섞인 손으로 우회 코드를 넣었고, 문 하나가 마지못해 반쯤 열렸다. 반역자는 대개 정문 대신 오작동을 믿고 산다.

그 사이 공용 스크린에 그들의 얼굴이 또 떴다.

이번엔 정면 사진이 아니라 작업 중 촬영된 기록화면이었다. 서진이 유지보수 수트를 입은 채 밸브를 점검하고 있었고, 유리는 화물 구역에서 누군가와 실랑이 중이었고, 민아는 단말 앞에서 눈을 치켜뜨고 있었고, 태경은 늘 그랬듯 세상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 아래 굵은 글자가 붙었다.

수배: 반역 혐의. 접촉 금지. 은닉 시 배급 제한.

태경이 화면을 보고 말했다.

"사진은 잘 나왔네."

"입 다물어." 유리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도 웃진 못했다.

그 문장을 본 순간, 서진은 이상할 만큼 차분해졌다.

반역자.

말이 크니까 처음엔 꼭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들린다. 실제론 그 반대다. 네가 너무 작아졌다는 선언이다. 제도 바깥으로 밀어내도 괜찮을 만큼, 네 호흡을 끊어도 계산서가 더럽혀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작아졌다는 뜻.

그는 스크린에서 자기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이제 우린 설명할 시간이 없어."

민아가 물었다.

"그럼?"

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평의회는 끝났다.

화성은 문 밖에 있다.

지구는 기다리고 있다.

성하림은 정거장을 손에 넣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 넷은 이제 누구 허락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점부터 선택이 오히려 단순해진다. 합법을 잃으면 체면도 같이 날아간다. 체면이 날아가면 계산이 빨라진다.

"그녀가 제어권을 잡았지." 서진이 말했다. "좋아. 그럼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도 분명해."

유리가 그를 봤다.

"빼앗는 거?"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먼저 망가뜨리지 않게 막는 거야."

태경이 어깨를 움켜쥔 채 씩 웃었다.

"듣자 하니 더 귀찮은 일 같네."

"맞아."

서진은 정비창 너머 어두운 통로를 바라봤다. 저 끝 어딘가에 생명유지 백업실이 있고, 통신 허브가 있고, 코어가 있고, 이제는 자기 자신을 정거장이라 부르는 여자가 있었다.

문제는 늘 비슷했다.

누군가가 공기를 쥐면, 곧 사람까지 쥐려고 든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공용 방송에서는 아직도 성하림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질서를 약속하고, 생존을 말하고, 협조를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는 언제나 잘 훈련된 칼과 같다. 반짝이지도 않고, 소리도 작고,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날 라그랑주에서 사라진 건 중력만이 아니었다.

절차가 사라졌고, 중립이 사라졌고, 합법적으로 숨 쉴 권리도 사라졌다.

그리고 윤서진 일행은 처음으로, 문서상으로도 완전히 정거장의 적이 되었다.

책 목록

라그랑주 선언: 숨의 가격으로 움직이는 우주 정거장

전체 목차 보기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

틸노트는 사용자가 AI를 활용해 노트를 쉽게 작성하거나 편집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AI 스퀘어 단톡방에 함께해요

AI 활용과 틸노트 사용 팁을 나누는 오픈채팅방입니다. 입장 비밀번호는 tilnote입니다.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