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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화성의 친절한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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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화성의 친절한 침공

화성의 친절한 침공

좋은 소식은 대개 누군가의 함대와 함께 온다

화성 함대가 온다는 소식은 정거장 전체에 너무 빨리 퍼졌다.

진공보다 빠른 건 없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우주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진짜 빠른 건 희망이다. 특히 오래 굶은 사람들 사이를 돌 때의 희망은 빛보다도 경박하다. 누군가가 "무료 산소 크레딧이 들어온다"고 속삭이면, 그 말은 배관망보다 먼저 침실로 들어가고 식당으로 번지고 끝내는 작업장 천장에도 들러붙는다.

라그랑주가 딱 그랬다.

열한 시간 반 남았다는 경보가 뜬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외곽 통로 벽면에는 이미 화성 자치권의 상징색이 손바닥 크기 낙서로 번져 있었다. 누군가는 붉은 선을 그어 놓고 그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지구는 장부를 보내고, 화성은 공기를 보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서진이 중앙 정비구역으로 돌아왔을 때, 태경은 정비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커피 맛이 전혀 나지 않는 재생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유리는 벽면 단말에 접속해 도킹 일정표를 보고 있었고, 민아는 두 개의 화면을 동시에 띄워 놓고 화물명세와 항적 보정값을 대조하는 중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태경이 물었다. "지구 놈이 청혼이라도 했냐?"

"청혼보다 비싼 걸 하더라." 서진이 말했다.

유리가 돌아봤다. "받았어?"

"받긴 했지."

"그리고?"

서진은 대답 대신 라파엘이 준 슬레이트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방 안 공기가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 순간 조금 무거워진 느낌은 분명했다.

태경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건 사람을 사는 가격이 아니라, 사람을 교체하는 가격인데."

"지구는 늘 새 부품 사듯 사람을 산다." 유리가 말했다.

민아는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나중에 욕하고, 지금은 화성부터 보자. 저쪽도 만만치 않아."

"뭘 찾았는데?" 서진이 물었다.

민아가 오른쪽 화면을 키웠다. 공식 화물명세가 떴다. 의료 모듈, 필터 카트리지, 재생수 보정장치, 응급 식량 블록, 공병 인력. 전부 선의로 포장된 단어들이었다. 단어만 보면 천사도 도킹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다른 창을 열었다.

"이건 내가 항적 열지도에서 빼낸 실제 중량 분포야. 의료선 두 척이라고 했지? 그중 한 척은 병상보다 강화 격벽이 더 많아. 그리고 공병지원선은 외부 작업용 암보다 내부 진입용 절단 장비 비중이 높아."

태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구조하러 오는 배가 왜 문을 따는 장비를 저렇게 많이 실어?"

민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구조 대상이 문을 안 열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유리가 조용히 덧붙였다.

"아니면 처음부터 열쇠를 자기들이 갖고 싶거나."

서진은 화면을 오래 봤다.

숫자는 언제나 친절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만 거짓말하기 때문이다. 한 번 패턴을 알아차리면 인간보다 훨씬 덜 교묘하다.

화성은 구호품을 싣고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 따는 장비도 싣고 있었다.

그 둘은 모순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은 늘 그 둘을 같은 배에 실어 보냈다.

사람들은 해방을 좋아한다, 청구서가 나올 때까지는

세 시간 뒤, 화성 자치권은 정거장 공용 주파수 전체에 동시 송출을 걸었다.

평소 같으면 보안팀이 바로 차단했겠지만, 지금의 라그랑주에는 평소 같다는 말이 잘 맞지 않았다. 정거장은 최근 며칠 동안 너무 많은 비밀과 너무 적은 공기를 견뎌 냈고, 그런 상태의 사회는 대개 규정보다 감정에 먼저 반응한다.

중앙 스크린에 화성 대표가 떴다.

이름은 아디라 카세프였다. 붉은 제복도, 훈장도 없었다. 대신 작업복에 가까운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소매는 한 번 접혀 있었다. 그런 종류의 연출은 늘 계산되어 있다. 팔을 걷은 권력은 사람들에게 자기 편인 척하기 쉽다.

그녀는 미인이었다기보다 믿음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피곤을 아는 눈, 그러나 그 피곤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 정치가가 갖기엔 지나치게 실용적인 얼굴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뛰어난 정치가처럼 보였다.

"라그랑주 거주민 여러분."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 급한 사람의 말투가 아니었다. 충분히 준비된 사람의 말투였다.

"우리는 여러분을 점령하러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립된 거주지를 안정화하고, 외부 압박으로부터 보호하며,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삶을 되찾도록 돕기 위해 접근 중입니다."

좋은 문장이었다.

좋은 문장은 늘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문장일수록 군더더기가 없다.

아디라는 말을 이었다.

"지구는 여러분에게 감독을 제안했을 겁니다. 부채 조정과 공급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통제권을 요구했겠죠. 우리는 다르게 말하겠습니다. 라그랑주는 스스로를 운영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권리를 지키는 데 필요한 자원과 방패를 제공하겠습니다."

정거장 여러 구역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용 마이크를 타고 들어온 잡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작업장을 두드렸고, 누군가는 식당 트레이를 흔들었고, 누군가는 그냥 안도해서 울었을 것이다.

서진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유리도 치지 않았다.

민아는 영상 하단의 자막 송출 주소를 추적하고 있었고, 태경은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침묵했다.

화면 속 아디라는 잠시 멈췄다가 결정적인 문장을 꺼냈다.

"도착 즉시 우리는 응급 산소 배당분을 무상 공급하고, 정거장 부채 추심을 유예시키며, 필수 거주 구역에 대한 안전 보장을 선언하겠습니다. 또한 부패한 중개망과 외부 기업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과도기적 공동안정위원회를 설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서진이 작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민아가 대답했다.

"과도기적 공동안정위원회."

태경이 코웃음을 쳤다.

"이름이 벌써 냄새 나는데."

유리는 화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공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대개 누가 더 많이 갖는지부터 봐야 해."

아디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해방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해방은 남이 주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는 다만 여러분이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목을 누르는 손을 치우러 갑니다."

그건 박수를 받기에 충분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말로 박수를 쳤다.

서진도 인정했다. 만약 라파엘 드보어의 얼굴을 몇 시간 전에 보지 않았더라도, 자신 역시 그 문장에 약간은 흔들렸을 것이다.

문제는 흔들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흔들리는 자신을 누군가가 이미 계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친절한 사람일수록 지도를 먼저 본다

민아가 송출이 끝나자마자 단말 하나를 껐다.

"찾았다."

"뭘?" 태경이 물었다.

"방금 방송은 공개 채널용이었고, 같은 시각에 다른 암호층으로 내부 운영문이 같이 나갔어. 수신처는 화성 함대 사령부, 외곽 보안호위함 두 척, 그리고 정거장 내부 몇 군데."

유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내부 몇 군데?"

"응. 누가 아직 자기 사람이라고 착각하는지 묻지 말라더니, 지구만 그런 건 아니었나 봐."

서진은 라파엘의 말을 떠올렸다.

질문이 틀렸습니다.

누가 아직 자기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느냐고 물어야죠.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사실 중 하나는, 적이 둘일 때 둘 다 같은 습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민아가 암호를 하나 더 벗겼다. 완전한 문서는 아니었지만,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했다.

라그랑주 안정화 및 해방 지원 초안 3-B.

"열어." 서진이 말했다.

문서가 뜨자, 방 안에 있던 네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화성이 도착 후 확보할 우선 구역이 적혀 있었다. 항만관제, 중앙 통신 허브, 생명유지 백업실, 분배 서버실, 선거기록 보관구역, 그리고 선박 출입 승인권.

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지원이 아니라 접수 순서인데."

민아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더 예쁜 말이 있었다.

현지 자치 역량 회복 전까지, 기능 마비 방지를 위한 임시 집행권 위임.

유리가 짧게 웃었다.

"봐라. 제국은 끝났어도 문장은 안 죽는다."

다음 조항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부채 기반 배급 체계를 폐지하고, 생존 기반 기여 체계로 전환한다.

듣기엔 좋아 보였다.

정말 좋아 보였다.

하지만 각주를 열자 뜻이 달라졌다. 필수 노동 지정권은 위원회가 가진다. 필수 노동자는 우선 산소를 받는다. 위원회가 인정하지 않는 업종과 이동은 비필수로 분류된다. 비필수 구역은 소비 억제 대상이 된다.

서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만 다르네."

"뭐가?" 태경이 물었다.

"지구는 계층별 생존 우선도라고 쓰고, 화성은 기여 기반 배당이라고 써. 둘 다 누가 먼저 숨 쉬는지 정하는 건 같아."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는 장부를 들고 서고, 화성은 깃발을 들고 서는 차이지."

민아가 더 아래로 내렸다.

거기에는 훨씬 솔직한 문장이 숨어 있었다.

현지 반혁명 세력 및 외부 매수망의 저항 가능성에 대비해, 통신과 공조직 노드에 대한 선제적 통제 필요.

태경이 혀를 찼다.

"반혁명 세력?"

서진이 말했다.

"저 말은 번역하면, 자기들 말 안 듣는 사람들 전부라는 뜻이야."

"외부 매수망은?"

"지구와 거래한 놈들." 유리가 말했다. "혹은 거래했다고 의심되는 놈들."

민아가 덧붙였다.

"혹은 그냥 거슬리는 놈들."

그 셋 중 어느 것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상은 늘 산소통 위에 올라가 연설한다

정거장 내부는 예상보다 빨리 둘로 갈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둘보다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잡한 걸 싫어하므로 결국 둘로 나뉜 척했다.

한쪽은 화성을 환영했다. 그들은 적어도 화성이 지구처럼 우리를 빚으로 묶진 않을 거라고 말했다. 다른 쪽은 그 말을 순진하다고 불렀다. 또 다른 쪽은 누가 오든 당장 필터만 갈아 주면 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쪽은, 아직 어느 편이 더 덜 나쁜지 계산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라그랑주답게, 가장 현실적인 집단이 가장 침묵했다.

서진과 일행은 구형 화물 환승실을 임시 회의실처럼 쓰고 있는 자치연락망 쪽으로 갔다.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유지보수 조장, 농업링 대표, 두 개 선착장 노조원, 식수 재생 구역 관리자, 그리고 평소엔 정치 따위 믿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믿고 싶은 얼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화면엔 아디라 카세프의 연설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지구는 우리를 감독하겠다고 했고, 화성은 보호하겠다고 했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냐? 적어도 화성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하잖아."

그러자 구역 관리자 하나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인간이라고 불러 주는 것만으로 밸브를 넘기진 않아."

다른 여자가 끼어들었다.

"넘긴다고 누가 그래요? 공동안정위원회는 임시라잖아요."

유리가 그 말을 듣고 낮게 말했다.

"우주에서 임시보다 오래가는 건 드물지."

태경은 회의장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말다툼에 끼어드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참지 못했다.

"임시라는 말 믿는 사람은 계약서 처음 쓰는 신입 아니면 정치인뿐이야."

몇몇이 그를 흘겨봤다. 그중 하나가 비웃듯 물었다.

"그럼 지구로 가자는 거야?"

"아니." 태경이 말했다. "난 그냥 우리 목을 죄는 손이 어느 행성 소속인지부터 확인하자는 거지."

회의장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은 논쟁할 때보다, 자기 희망이 공격받는다고 느낄 때 더 빨리 소리친다. 누군가는 화성이 노동자 편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노동자 편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지구가 더 위험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화성이 더 능숙하다고 했다.

서진은 그 소란을 보며 이상한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종종 자유를 두고 싸운다고 말한다.

실은, 자신을 덜 모욕하는 지배 방식을 고르느라 싸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는 앞으로 나섰다.

"다들 조용히 해."

신기하게도 잠깐은 조용해졌다. 공식 직함이 없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조용함을 얻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대개 그 사람이 너무 여러 번 살아남았다는 뜻이니까.

서진은 스크린을 껐다.

"화성이 지금 우리한테 준 건 산소가 아니야. 연설이지. 그리고 연설은 숨을 대신 못 해."

누군가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거절하자고?"

"아니."

그 한마디에 여러 얼굴이 흔들렸다.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면 좋겠지. 하지만 우린 이미 지구의 제안을 들었고, 화성의 접근도 막기 어려워.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건 호감이 아니라 확인이야."

그는 민아가 뽑아 온 문서 일부를 띄웠다. 항만관제, 통신 허브, 생명유지 백업실. 선제 확보 우선구역.

회의장 공기가 조금 식었다.

"이게 보호야?" 서진이 물었다. "누가 도와주러 오면서 제일 먼저 생명유지 백업실부터 갖겠다고 해?"

아까 화성을 옹호하던 남자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지구 방해를 막으려는 안전조치일 수도 있잖아."

"맞아." 서진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문제는 그런 말이 늘 맞기도 하다는 거야. 안전조치는 언제나 그럴듯해. 그리고 대부분의 독재는 안전조치로 시작해."

이번엔 아무도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게 상황을 더 낫게 만들진 않았다.

정답이 없을 때 침묵은 합의가 아니라 공포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해방군은 먼저 인사하고 그다음 배선을 바꾼다

민아가 서진의 단말로 짧은 신호를 보냈다.

개인 채널. 화성 쪽. 직통.

서진은 회의장을 나와 환승실 옆 서비스 복도로 들어갔다. 좁고 울림이 심한 통로였다. 사람을 설득하기엔 형편없고, 진실을 듣기엔 오히려 적당한 장소였다.

화면이 켜지자 아디라 카세프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방송용 얼굴이 아니었다. 조명이 덜했고, 배경도 노출된 격벽과 전술 디스플레이뿐이었다. 친절은 남아 있었지만 연출은 줄어 있었다. 서진은 오히려 그쪽이 더 믿을 만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윤서진 씨." 아디라가 말했다. "이렇게 연결한 걸 무례라 생각하진 않길 바랍니다."

"지금은 다들 무례를 좋은 뜻으로 포장하느라 바쁘더군."

아디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시간을 아끼죠. 당신이 우리 내부 문서를 조금 본 것 같더군요."

"조금은 아니고, 기분 나쁠 만큼."

"그렇다면 이해도 빠르겠네요."

"아니. 이해는 빠르지 않아. 다만 냄새를 맡을 뿐이지."

아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지 않았다.

"그 문서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작전 문서입니다. 지구가 선제 개입하거나, 정거장 내부 매수망이 생명유지를 인질로 잡는 경우를 대비한 거죠."

"그래서 백업실과 통신 허브를 먼저 잡겠다고?"

"그걸 안 잡으면 다른 누군가가 먼저 잡습니다."

"세상에, 그 말은 오늘 두 번째로 듣네."

"아마 앞으로 자주 듣게 될 겁니다."

아디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위험하지만, 한편으론 드물게 유능하다. 무능한 악당은 짜증 나고, 유능한 확신범은 역사를 만든다.

"당신들은 과도기적 공동안정위원회를 만들 생각이지." 서진이 말했다.

"예."

"임시 집행권도 갖고."

"예."

"필수 노동 지정권도."

"예."

아디라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 점은 라파엘보다 낫고, 동시에 더 무서웠다.

"그걸 해방이라고 부르진 않겠지?"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난 그런 낭만적인 단어를 믿지 않습니다."

서진이 눈썹을 올렸다.

방송에선 분명 더 좋은 말을 했는데, 개인 채널에선 칼같이 잘라 말하고 있었다.

아디라는 계속했다.

"고립된 거주지는 배관과 계정으로 움직입니다. 그 둘이 무너지면 선거도, 자치도, 존엄도 전부 공기와 함께 날아가요. 우린 먼저 장치를 잡고, 그다음 권한을 나눕니다."

"그게 지배라는 생각은 안 해?"

"안 합니다."

"왜?"

"지배는 끝낼 생각이 없을 때 하는 거니까."

서진은 벽에 기대 선 채 웃지도 못했다.

"끝낼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권력은 역사상 너무 많았어."

"압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자기들이 다르다고 믿고."

"아니요." 아디라가 말했다. "우린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기록과 기한과 공개 회계를 남기려는 겁니다."

그 말은 꽤 정직했다.

그리고 정직한 제안이라는 게 언제나 좋은 제안은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서진이 물었다.

"코어도 원하겠지."

아디라의 대답은 조금도 늦지 않았다.

"물론이죠."

"왜?"

"지구가 그걸 잡으면 여러분은 다시 밸브로 통치당합니다. 우리가 잡으면 적어도 생산수단을 거주민 쪽으로 돌릴 수 있어요."

"생산수단." 서진이 중얼거렸다. "말이 거창하네."

"거창한 게 아니라 단순합니다. 공기와 물, 열과 이동. 인간은 이런 걸 가진 쪽 말을 듣습니다."

"그럼 당신들도 결국 가진 쪽이 되겠다는 거군."

아디라는 한 박자 쉬고 답했다.

"한동안은요."

그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서진은 잠깐 화를 내는 타이밍을 놓쳤다.

누구 편도 아닌 사람은 제일 먼저 분류된다

통신이 끊긴 뒤 민아가 또 다른 자료를 들고 왔다.

이번에는 문서가 아니라 명단이었다.

화성 측이 정거장 도착 후 접촉 우선순위로 설정한 인물 목록. 노조 조직자들, 유지보수반 핵심 인력, 식량 생산 구역 대표들, 채무 불이행으로 지구 계정이 묶인 사람들, 그리고 최근 지구 대표단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이들.

태경이 명단을 넘기다 멈췄다.

"이건 포섭 리스트야."

유리가 받아쳤다.

"아니. 그보다 정교해. 충성도 만들기 리스트지."

서진은 자신의 이름도 그 안에 있는 걸 봤다.

분류 항목은 이랬다.

기술 핵심. 영향력 비공식 고위. 설득 우선. 협조 실패 시 고립 필요.

그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이상하게도 화는 금방 나지 않았다. 대신 피로가 먼저 왔다.

지구 문서에도 자기 이름이 있었고, 화성 문서에도 있었다. 양쪽 모두 그를 이해한 척했고, 양쪽 모두 그를 숫자로 정리했다. 한쪽은 협력 자산이라 불렀고, 다른 쪽은 설득 우선 대상이라 불렀다.

인간으로 불리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태경이 말했다.

"우린 어느 쪽에도 안 넘어가면 되는 거 아냐?"

유리가 그를 봤다.

"그 말은 산소통이 둘 다 네 목을 겨누지 않을 때나 가능해."

민아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정거장 안에서 사람들은 편을 고르기 시작했어. 우리만 안 고른다고 중립이 되진 않아."

맞는 말이었다.

중립은 대개 강한 쪽이 허락할 때만 존재한다. 우주에선 더 그렇다. 진공은 중립을 존중하지 않고, 권력은 더더욱 그렇다.

서진은 명단 아래 첨부된 짧은 부속 메모를 읽었다.

현지 자치 세력은 해방 담론에 호의적이나, 통제 없는 분산 자치에 대한 낭만적 기대가 강함. 초기 단계에서 의사결정 속도를 위하여 대표성은 선별적으로 인정할 것.

그는 헛웃음을 쳤다.

"봐.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 아주 체계적이야."

태경이 메모를 빼앗아 읽더니 욕을 내뱉었다.

"대표성은 선별적으로 인정?"

"쉽게 말하면," 유리가 말했다. "말 잘 듣는 사람만 민중이라는 뜻이지."

총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배급표다

화성 함대가 외곽 정지궤도에 들어섰을 때, 정거장 창문이 있는 구역마다 사람들이 몰렸다.

멀리선 아름다웠다.

항상 그렇다. 멀리 있는 함대는 별자리처럼 보인다. 가까워지고 나서야 대포와 격벽과 수송선의 입이 드러난다. 인간은 너무 멀리서 보면 언제나 시를 짓고, 너무 가까이 가면 뒤늦게 계약서를 찾는다.

공용 채널에 새 통지가 떴다.

화성 자치권 긴급지원단, 도킹 전 사전 배분 계획 송부.

사람들이 환호했다. 진짜 물건이 오는 것이다. 연설이 아니라 배급표가. 배급표는 언제나 연설보다 강하다.

그런데 민아가 그 표를 열어 보자, 환호할 일이 조금 덜 남았다.

우선 배당 대상은 필수 유지인력, 항만 노동자, 정거장 보안 협력 인원, 공조 설비 운영자, 통신 안정화 협력 인원이었다. 마지막 항목은 아주 예쁜 단어였지만, 실제 뜻은 간단했다.

우리 체계에 협조하는 사람부터 살리겠다는 뜻.

지구와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지구는 그걸 노골적인 계약서로 쓰고 화성은 연대의 언어로 쓴다는 정도였다.

태경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툭 쳤다.

"젠장, 진짜 똑같네."

"아니." 서진이 말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봤다.

"똑같진 않아. 화성 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왜?" 민아가 물었다.

"지구는 자기가 위에서 통제한다고 말하는 데 별 부끄러움이 없어. 그래서 사람들도 빨리 미워하지. 그런데 화성은 네 편인 척하면서 같은 걸 해. 그런 쪽이 더 오래 먹혀."

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놓고 목줄 채우는 놈보다, 네 자유를 지켜 준다면서 규격에 맞는 목걸이를 건네는 놈이 더 오래 간다."

서진은 다시 창밖을 봤다.

붉은 식별등들이 정거장 외곽에서 차례로 점멸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사람들이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선 이미 화성식 노래를 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어딘가에선 지구와 연결된 누군가가 패닉에 빠져 있을 것이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고르기엔, 모두가 너무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친절한 침공은 문을 두드린다

도킹 허가를 둘러싼 최종 회의는 짧고, 더럽고, 결정적이었다.

자치연락망 대표 일부는 화성 선단에 제한 도킹을 허가하자고 주장했다. 의료 모듈과 산소만 먼저 받자는 안이었다. 다른 일부는 그조차 함정이라고 했다. 몇몇은 지구와 화성을 동시에 외곽에 묶어 두자고 했지만, 그런 소리는 배가 실제로 보이는 순간 힘을 잃는다. 인간은 추상적 자존심보다 눈앞의 필터 박스를 더 빨리 믿는다.

결국 정거장은 가장 정거장다운 결론에 가까워졌다.

허가는 하되, 믿지는 않는다.

문제는 우주에서 그 둘이 오래 같이 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서진은 마지막까지 발언을 아꼈다. 너무 빨리 방향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생각 대신 기대를 올려다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결 직전, 그는 한 가지 질문만 던졌다.

"화성이 진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생각이라면, 왜 첫날부터 우리 통신과 배급과 도킹 허가를 함께 원하지?"

누군가는 대답했다.

"지구 때문이잖아."

"좋아." 서진이 말했다. "그럼 지구가 사라진 뒤엔?"

아무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오늘 회의에서 나온 가장 정직한 문장이었다.

도킹 승인 신호가 발송되기 직전, 서진의 개인 단말에 또 하나의 비공개 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자는 없었다.

문장은 짧았다.

첫 번째로 들어오는 건 의사들이 아닙니다.

그 아래엔 도킹 순서표가 첨부돼 있었다.

공개표와 달랐다.

의료선이 아니라 보안 호위함 부속 셔틀이 먼저 붙도록 되어 있었다. 명목은 선체 안전 점검 지원. 실제 적재 인원은 전술 공병 18명, 통신통제 전문가 6명, 행정연결 담당 4명.

서진은 그 숫자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웃긴 일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이렇게까지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이 지겨워서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회의장 스크린에는 화성 선단의 선두 셔틀이 천천히 방향을 틀고 있었다. 아주 정중한 속도였다. 급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게. 마치 정말로 허가를 존중한다는 듯이.

유리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침공이 저렇게 예의 바를 수도 있네."

서진이 대답했다.

"그래서 더 비싸."

그는 회의장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누군가는 말해야 했다. 지구도 아니고 화성도 아닌 언어로. 적어도 아직은, 누구 손에도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창밖에서 첫 셔틀의 자세제어 분사가 반짝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구호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진은 아니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며 아주 오래된 진실 하나를 떠올렸다.

침공은 원래 두 종류다.

하나는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

다른 하나는 문을 열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부터 한다.

그리고 대개, 두 번째 쪽이 더 오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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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선언: 숨의 가격으로 움직이는 우주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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