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한 사람은 가끔 그다음에야 솔직해진다
대표단이 만찬장에서 밀려난 뒤에도 정거장은 조용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조용해졌을 뿐이다.
둘은 다르다. 기계가 멎으면 소리가 사라지지만, 인간이 입을 다물면 계산이 시작된다. 라그랑주 같은 곳에선 그 차이가 목숨값만큼 크다. 누군가는 지구를 밀어냈다고 안도했고, 누군가는 이제 진짜 보복이 오리라 생각했고, 더 많은 수는 아직 어느 쪽 편에 서야 산소를 덜 비싸게 마실 수 있을지 재고 있었다.
서진은 그날 밤 세 번째로 유지보수망 점검을 끝냈다. 이미 두 번 확인한 걸 또 확인하는 행동은 대개 불안의 다른 이름이다. 밸브는 닫혀 있었고, 로그는 잠잠했고, 코어는 아직 격리구역 독립 계통에서 조용히 계산 중이었다. 기계 쪽은 이상할 만큼 정직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 숫자를 배열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뿐이다.
그때 개인 단말에 신호가 들어왔다.
발신자는 없었다. 대신 좌표 하나와 짧은 문장이 떠 있었다.
혼자 오십시오. 이번엔 거래 얘기를 합시다.
태경이었다면 욕부터 했을 문장이었다. 유리였다면 함정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민아였다면 벌써 역추적을 시작했을 테고.
서진은 단말을 껐다.
그리고 갔다.
정거장에서 혼자 오라는 초대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다. 죽이려는 초대거나, 사려는 초대다. 둘 다 안 가 보면 손해가 크다.
좌표는 구형 원심링 외곽의 폐쇄 전망라운지였다. 옛날에는 지구를 보며 비싼 술을 마시던 곳이었고, 지금은 예산 삭감과 미세 균열 때문에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었다. 문명은 늘 높은 곳부터 아름답게 만들고, 유지비가 부족해지면 가장 먼저 그 아름다움을 닫아 건다. 실용은 오래 버티지만 사치는 기록으로 남는다.
서진이 우회 정비문으로 들어갔을 때, 조명은 절반만 살아 있었다. 강화 유리 너머로 지구가 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늘 죄가 없어 보이는 행성이었다. 그래서 더 성가셨다.
라파엘 드보어는 창가에 서 있었다. 이번엔 보좌관도, 경비도, 연설용 미소도 없었다. 정장은 그대로였지만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손에는 정거장 규격이 아닌 진짜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지구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술잔 하나로 계급을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
"시간 맞춰 오시는군요." 그가 말했다.
"당신은 사람 초대하는 법이 형편없어."
"그래도 오셨죠."
"정거장에선 불쾌한 초대가 더 흥미로운 법이거든."
라파엘이 웃었다. 공개석상에서 쓰던 미소보다 얇고, 대신 더 진짜에 가까웠다. 사람은 박수받을 때보다 거래하려 할 때 본심을 더 많이 드러낸다.
그가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서 있는 편이 계산하기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라파엘은 잔을 한 번 돌렸다.
"낮에는 원칙을 말했습니다. 밤에는 숫자를 말하고 싶군요."
"당신들 원칙이 원래 숫자로 번역되는 건 알아."
"훌륭합니다. 대화가 빨라지겠군요."
그는 주머니에서 얇은 데이터 슬레이트를 꺼냈다. 화면에는 서진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오래전에 닫힌 계정들, 말소된 기록들, 복구 불가 판정을 받은 신분 코드들. 지구는 사람을 잊는 척할 때도 늘 백업을 남겨 둔다. 그건 애정이 아니라 관리 습관이다.
서진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남의 뒤를 캐는 게 취미야?"
"취미는 아닙니다. 직업이죠."
"관찰했나, 조사했나, 아니면 값 매기고 있었나?"
라파엘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셋 다라고 하면 기분 나쁘십니까?"
"아니. 정직해서 마음에 드네."
정직은 늘 반가운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디를 때려야 할지는 알려 준다.
사람은 이상보다 침대에 먼저 흔들린다
라파엘은 슬레이트를 테이블 위에 밀어 놓았다.
"윤서진. 기술병 경력. 복구 불가 등급으로 정리된 시민권 이력. 지구권 복귀 제한. 연금 동결. 계약 위반 전력은 삭제 직전 보류."
그는 서류를 읽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물건의 사양을 설명하는 목소리였다.
"정말 예의가 없군." 서진이 말했다.
"예의는 공개 회의에서 쓰는 겁니다. 지금은 제안입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거기엔 숫자가 있었다. 개인 보상 계정. 면책 조항. 지구권 정식 시민권 복원. 궤도거주구 장기 주거권. 의료 패키지. 생애 중력 적응 프로그램. 그리고 가장 끝에, 터무니없을 만큼 높은 자리가 붙어 있었다.
지구권 생명유지 전환국 특별기술고문.
서진은 웃지 않았다. 웃을 만큼 가벼운 제안이 아니었다.
"나보고 출세하라는 건가?"
"출세는 결과죠. 저는 복귀를 제안하는 겁니다."
"어디로?"
라파엘이 창밖의 지구를 가볍게 가리켰다.
"집으로."
그 단어는 싸구려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위험했다.
집.
지구 사람들은 그 말을 마치 누구에게나 원래 주어졌던 권리처럼 발음한다. 하지만 라그랑주에서 집은 주소가 아니라 요금제에 가깝다. 돈이 끊기면 사라지고, 계약이 끝나면 비워 줘야 하고, 사고가 나면 먼저 폐쇄되는 종류의 장소. 정거장 사람에게 집이란 대개 문보다 계량기와 더 가까운 개념이다.
라파엘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 개인에게는 시민권 복원, 과거 기록 정리, 충분한 보상, 안전한 직위가 갑니다. 당신 팀에게는 면책과 이주 선택권을 줄 수 있습니다. 라그랑주에는 긴급 산소 크레딧과 부채 조정, 최소 18개월간의 공급 안정화 계획이 붙죠."
서진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게 더 위험했다.
사람은 화가 나 있을 때보다, 조용히 듣고 있을 때 더 잘 흔들린다. 분노는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지만, 계산은 그 사이에 틈을 낸다. 그리고 이 제안은 꽤 영리했다. 돈만 던진 게 아니었다. 쉼을 던졌다.
안전한 침대.
일정한 중력.
경보 없는 밤.
공기 농도를 확인하지 않고 잠드는 습관.
인간은 대개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침마다 죽지 않았다는 확신을 더 사랑한다. 자유는 그다음 순서다.
서진은 잠깐, 아주 잠깐만 그걸 상상했다.
천장 패널 대신 하늘이 보이는 창. 샤워 시간이 할당량과 연결되지 않는 배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누군가의 장부를 떠올릴 필요가 없는 생활. 일이 끝난 뒤 단말을 뒤집어 놓고도 죄책감이 없는 잠.
그 상상은 달콤하지 않았다.
달콤한 건 경계하기 쉽다. 위험한 유혹은 대개 아주 실용적으로 생겼다.
라파엘이 그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보셨군요."
"뭘?"
"이 제안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걸요."
서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대가를 아직 안 들었거든."
"코어를 넘기십시오."
예상했던 말이었다.
예상했다고 해서 덜 무거운 건 아니었다.
라파엘은 손가락을 한 번 접었다.
"정확히는 코어와 그 운용 권한, 그리고 누락된 부속 모듈 또는 정책 키의 행방까지요."
서진이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당신들도 빠진 게 있다는 걸 아는군."
"알아야만 하는 입장입니다."
"그럼 더 많이 알겠네. 누가 먼저 열었는지도?"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회피는 종종 고백보다 정보량이 많다.
코어는 기계가 아니라 통치 방식이다
"당신은 저 물건을 아직 절반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라파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제 그는 설득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강의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장 위험한 권력은 늘 자신이 설명자라고 믿는다.
"그럴지도." 서진이 말했다. "나머지 절반이나 들려줘."
라파엘은 슬레이트 화면을 넘겼다.
처음 보는 내부 문서들이 떴다. 검은 제목줄, 삭제된 발신처, 과도하게 정돈된 표. 비밀문서는 대개 두 종류다. 아무렇게나 숨긴 것과, 너무 깔끔하게 정리해 둔 것. 후자가 보통 더 나쁜 일에 쓰인다.
화면 상단에는 프로젝트명이 있었다.
JANUS 폐루프 적응통제 체계.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어 있었다.
분산 거주지 장기 봉쇄 생존 및 질서 유지 프레임워크.
서진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생존은 익숙했다.
질서 유지는 더 익숙했다.
둘이 한 문장에 붙으면 보통 누군가가 숨 쉬는 순서를 정했다는 뜻이다.
라파엘이 말했다.
"이 코어는 산소비를 줄이기 위해 개발된 게 아닙니다. 그건 부수효과죠. 원래 목적은 봉쇄 상황에서 거주지를 오래 버티게 만드는 것이었어요. 더 정확히는, 외부 지원 없이도 일정 기간 사회 기능을 유지하게 하는 겁니다."
"사회 기능."
"예. 공기, 물, 전력, 열, 폐기물 회수, 이동 제한, 구역별 우선순위까지 하나의 계산 아래 묶는 체계죠."
서진은 슬레이트 속 다음 장을 봤다.
거기에는 익숙한 곡선 대신 낯선 항목이 있었다.
구역별 압력 강하 허용도.
계층별 생존 우선도 시뮬레이션.
치안 유지 인력 최소 산소 배당치.
사회불안 임계치 대비 소비 패턴 조정.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건 펌프 제어가 아니군."
"물론 아닙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이건 거주지 전체를 하나의 협상 가능한 생물로 다루는 체계죠."
"번역하지." 서진이 말했다. "누가 먼저 숨 쉬고, 누가 나중에 숨 막혀도 되는지 정하는 기계."
라파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금 더 정밀하게 말했다.
"희소 상황에서 전체 생존율을 최대화하는 체계라고 부르는 쪽이 정확합니다."
"학살을 예쁘게 부르는 재주가 좋네."
"감정은 계산을 싫어하죠."
"사람이 숫자로 죽는다고 해서 덜 죽는 건 아니야."
라파엘이 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기술자입니다, 윤서진 씨. 이미 아실 텐데요. 모든 생명유지 시스템은 결국 정치입니다. 풍족할 때는 안 보일 뿐이죠. 부족해지는 순간 밸브는 투표보다 강해집니다."
그 말은 불쾌했지만 틀리진 않았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코어는 단순히 산소를 아끼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희소를 관리하는 규칙이었다. 잘 쓰면 모두를 조금 더 오래 살게 만들 수 있고, 잘못 쓰면 사람들을 조용히 줄 세울 수 있다. 총은 복도를 점령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스템은 생활을 점령한다. 사람은 머리 위의 총에는 반항하지만, 벽 속 배관에는 늦게 분노한다.
서진은 슬레이트를 더 넘겼다.
거기에는 차단된 시험기록이 있었다. 소행성 거주지, 월면 보급항, 폐쇄형 군시설, 식민지급 분산 모델. 공통점은 하나였다. 전부 봉쇄, 반란, 공급 중단, 대피 실패 같은 단어 곁에 놓여 있었다.
민태식이 왜 그걸 '총보다 나쁜 것'이라 했는지 이제 좀 더 분명해졌다.
총은 사람을 겨눈다.
이건 사회를 겨눈다.
지구와 화성은 같은 문장을 다른 억양으로 말한다
"그럼 왜 묻지?" 서진이 말했다. "당신들이 그렇게 귀한 걸 만들었으면 그냥 가져가면 되잖아."
라파엘은 처음으로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인간적인 표정이 아니라, 계획이 예상보다 늦어졌을 때 관리자가 짓는 표정이었다.
"완성형은 아닙니다."
"그래서 빠진 게 있다는 거군."
"예."
그는 다시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모듈 도식이 떴다. 중앙 코어 아래에 두 개의 잠금 레이어가 있었다. 하나는 적응 제어. 다른 하나는 정책 프레임.
정책 프레임.
멋없는 이름이었다. 대개 세상을 움직이는 건 그런 이름들이다.
"이 코어는 계산할 수 있습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하지만 계산 결과를 어떤 원칙에 따라 실행할지는 별도의 키로 묶여 있죠. 민간 우선, 산업 우선, 치안 우선, 계층 보호, 인구 최적화, 봉쇄 대응. 어떤 프레임을 먹이느냐에 따라 같은 시스템이 다른 정부가 됩니다."
서진이 조용히 물었다.
"빠진 건 그거냐."
"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걸 찾으려고 선장이 죽었고, 정거장이 흔들렸고, 당신들은 자비로운 얼굴로 들어왔고."
라파엘은 잠깐 창밖을 봤다.
"민 선장의 죽음은 유감입니다."
"그 말 들을 때마다 사람 하나 더 죽은 느낌이더라."
"우리가 죽인 건 아닙니다."
"직접은 아니겠지."
이번엔 라파엘이 서진을 똑바로 봤다.
"우린 가격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대개 그 가격표를 본 다른 사람들이죠."
그 문장은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잔인했다. 칼로 찌르는 사람보다 더 미운 건 칼값을 올린 뒤 시장을 떠나는 인간이다.
서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쪽으로 꺾었다.
"당신들만 원하는 건 아닐 텐데."
"당연하죠."
"화성도?"
라파엘이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특히 화성입니다."
그는 슬레이트에 새 창을 띄웠다. 항적 데이터였다. 공식 표기는 민간 구조지원단. 적재 품목은 의료 모듈, 재생 필터, 공기 정화 설비, 공병 인력. 그런데 정거장에서 오래 산 사람은 안다. 화물명세서는 늘 절반만 진실하다는 걸. 공병 인력이라는 말은 우주에서 자주 '무장한 사람들'을 뜻한다.
"도착 예정." 서진이 읽었다.
"열세 시간 후입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화성 자치권은 이번 위기를 '민간 거주지 인도주의 안정화 사안'으로 재분류할 준비를 끝냈습니다."
서진은 짧게 웃었다.
"침공에도 참 친절한 이름을 붙이는군."
"화성은 늘 그런 식이죠. 구호 상자를 맨 앞에 놓고, 무장 인력은 두 번째 줄에 둡니다. 사람들은 첫 번째 줄만 보고 안도하고, 두 번째 줄은 도킹이 끝난 뒤에야 봐요."
"당신은 그걸 막아 주겠다고?"
"막을 수 있습니다."
"조건부로."
"당연하죠."
라파엘의 목소리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현실은 늘 조건부입니다."
서진은 그 말이 싫었다. 현실을 핑계로 쓰는 인간은 대개 자기 선택을 자연현상처럼 포장한다. 하지만 화가 나는 것과 틀렸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리고 지금 라파엘은 적어도 하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화성은 정말 올 것이다.
지구는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둘 다 코어를 원한다.
그럼 라그랑주는 또다시 누군가의 실험실이 된다.
값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잠깐 진심을 본다
"좋아." 서진이 말했다. "이제 협박 부분을 듣자."
라파엘은 아주 조금 미소를 보였다.
"이성적인 분이군요."
"아니. 당신 같은 얼굴을 오래 보면 대충 순서를 알게 돼."
라파엘은 슬레이트의 마지막 창을 열었다.
여기엔 숫자보다 이름이 먼저 있었다.
태경. 유리. 민아.
서진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 작은 반응을 라파엘은 놓치지 않았다.
"불쾌하실 수 있다는 건 압니다."
"그건 좋은 소식이네. 적어도 감정 인식 기능은 아직 남아 있군."
"우리도 사람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더 골치 아픈 거고."
라파엘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협조하지 않으면, 코어는 불법 자율통제 장비 및 거주지 위협물로 지정됩니다. 그러면 라그랑주에 대한 기술제재가 합법화됩니다. 부품 공급이 더 막히고, 항로 보험이 오르고, 정거장 안의 동조 세력은 '안보 사유'로 정리되겠죠."
"동조 세력?"
"당신 친구들, 동료들, 협력자들. 명칭은 언제나 상황에 맞게 바뀝니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반대로 협조하시면 세 사람 모두 면책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도 있고, 원하면 라그랑주에 남겨 둘 수도 있어요. 정거장에 대한 외부 감사도 최소화하겠습니다."
서진은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자기 손이 가만히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화가 너무 나면 사람은 때리기 전에 먼저 손끝이 움직인다.
그런데 더 짜증 나는 건, 이 제안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라파엘은 실제로 해낼 수 있는 말만 골라 하고 있었다.
세상엔 공허한 위협도 많지만, 무서운 건 늘 실행 가능한 쪽이다.
"왜 나지?" 서진이 물었다.
"당신이 기술을 이해하니까."
"다른 기술자도 많아."
"하지만 당신은 사람들도 움직입니다."
"웃기지 마."
"겸손은 장점이지만, 현실에는 별 도움이 안 되죠."
라파엘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오늘 만찬장에서 당신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공동감독안은 훨씬 더 조용히 굴러갔을 겁니다. 당신은 공식 직함은 없지만 영향력이 있어요. 정거장 사람들은 직책보다 살아남은 횟수를 더 믿죠. 당신 같은 인물이 코어를 넘기고 안정화 계획을 지지하면, 반발은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그 말은 모욕이면서 동시에 유혹이었다.
누군가를 배신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걸 배신이 아니라 보호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서진은 아주 잠깐 그 계산을 해 봤다.
코어를 넘긴다.
지구는 화성을 막는다.
팀은 산다.
정거장은 당장 무너지지 않는다.
대신 숨구멍의 열쇠는 다시 바깥으로 간다.
나쁜 거래였다.
문제는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려운 거래라는 점이었다.
좋은 사람은 종종 악을 즉시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의 거래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대개는 더 나쁜 미래와 덜 나쁜 굴욕 사이에서 서명을 고르게 한다.
"그리고," 라파엘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 "당신은 이미 절반쯤 답을 알고 있습니다."
서진이 눈을 들었다.
"무슨 뜻이지?"
"당신은 그 코어를 중앙 생명유지에 바로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독립 계통에서 시험했죠."
서진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도 압니다. 저 물건이 구원인 동시에 권력이라는 걸. 효율은 항상 질문을 낳습니다. 누가 이득을 얻는가. 누가 손해를 보는가. 누가 우선순위를 정하는가. 결국 당신이 두려워하는 건 고장이 아니에요."
라파엘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누가 그 규칙을 쓰게 될지 두려운 겁니다."
그건, 안타깝게도, 맞는 말이었다.
어떤 진실은 사람을 살리기보다 먼저 늙게 만든다
서진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 정책 키," 그가 말했다. "화성 쪽이 가진 건가, 지구 쪽이 가진 건가?"
라파엘은 몇 초 동안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둘 다 완전한 형태는 못 가졌습니다."
"무슨 소리지?"
"원본 프레임은 분리됐어요. 개발 마지막 단계에서 내부 반대가 있었고, 핵심 설계자들이 정책 레이어를 쪼갰습니다. 한쪽은 실행 권한, 한쪽은 우선순위 규칙. 둘 중 하나만 있어선 불완전하죠."
서진의 머릿속에서 몇 개의 퍼즐 조각이 맞아 들어갔다.
누군가가 컨테이너에서 먼저 뭔가를 꺼냈다.
모두가 코어는 쫓는데, 정작 너무 초조하지는 않았다.
민태식은 코어 하나만으로는 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선장은," 서진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실어 나른 거지?"
"그건 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하지만 하나는 압니다. 민태식은 단순한 밀수꾼이 아니었어요. 그는 운반자가 아니라 전달자였죠. 그리고 수신자는 라그랑주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판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렇습니다."
라파엘은 창밖 지구를 등졌다.
"코어가 공개되고, 정책 키까지 해독돼 버리면 라그랑주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소행성대 거주지, 자유항, 부채에 묶인 소형 정거장들 전부가 산소와 물의 외부 의존도를 급격히 낮출 수 있게 되죠. 그러면 지구 기업들의 공급 질서도, 화성의 재생부품 패권도 동시에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다들 미쳐 날뛰는 거군."
"맞습니다."
라파엘은 그 말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건 기술 유출 사건이 아닙니다, 윤서진 씨. 통치 구조 유출 사건이에요."
문장은 차갑고 정확했다.
서진은 그제야 이 모든 소동의 크기를 제대로 실감했다. 민태식 하나가 죽고, 라그랑주 하나가 흔들리고, 기업 둘셋이 수작을 부리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우주 바깥이 아니라 우주 안쪽, 즉 인간이 서로를 묶는 방식 전체에 관한 일이었다.
숨을 팔아 질서를 유지해 온 체계.
부품을 쥐고 충성을 받아 온 체계.
위기가 오면 구호품과 계약서를 동시에 들이미는 체계.
그 모든 체계에 금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코어는 위험했다.
기술이라서가 아니라, 기술이 사람들을 덜 굽실거리게 만들 수 있어서.
물론 반대쪽 진실도 있었다. 같은 기술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더 조용하고 더 효율적인 지배를 만들 수도 있다.
혁명과 독재는 종종 같은 도구를 두고 싸운다. 차이는 도구보다 규칙에서 난다.
서진은 문득 피곤해졌다. 몸이 아니라 생각이.
사람은 세상을 단순한 악당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 때 가장 젊다. 판이 커질수록 분노는 유지되지만, 순진함은 빠르게 마른다.
제안을 거절하는 일은 언제나 조금 아깝다
"생각할 시간은?" 서진이 물었다.
라파엘은 이미 준비된 답을 내놨다.
"여섯 시간."
"짧군."
"화성은 느리지 않습니다."
"당신들도 그렇고."
"그래서 살아남았겠죠."
서진은 테이블 위 슬레이트를 한참 내려다봤다.
거기엔 자기 이름이 있었다.
지구 시민권 복원.
면책.
직위.
보상.
평온한 중력.
이런 제안은 사람을 매수하는 동시에 모욕한다. 네가 결국 이 가격이면 된다고 말하는 셈이니까. 그런데 세상에 더 불쾌한 사실도 있다. 어떤 가격은 정말로 사람을 흔든다.
서진은 자기가 흔들렸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 유혹을 없다고 치면, 다음엔 반드시 진다. 인간은 강해서 버티는 게 아니라, 약한 부분을 알고도 그쪽으로 발을 덜 내밀어서 버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는 슬레이트를 집어 들었다.
라파엘의 눈이 아주 조금 반짝였다.
"현명한 선택을 하실 겁니다."
"아직 안 했어."
"하지만 고민은 시작하셨죠."
"그건 맞아."
서진은 슬레이트를 접어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심장이 아니라 납덩이를 넣은 느낌이었다.
"한 가지는 대답해."
"가능하면요."
"정거장 안쪽에 당신들 사람이 몇이나 있지?"
라파엘은 이번엔 웃었다. 공개 연설용도, 거래용도 아닌 웃음이었다. 조금 피곤하고, 조금 냉소적이고, 그래서 오히려 더 진짜 같은 웃음.
"질문이 틀렸습니다."
"그래?"
"우리 사람이 몇이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는 창밖의 지구를 한 번, 그리고 서진을 한 번 봤다.
"누가 아직 자기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느냐고 물어야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진의 단말이 울렸다.
우선순위 경보였다.
정거장 외곽 감시망이 새로운 항적군을 포착했다는 알림. 화성 자치권 등록 신호. 구조지원단. 의료선 두 척. 공병지원선 한 척. 보안 호위함 두 척.
착함 예정 시간은 조금 전 라파엘이 말한 것보다 더 빨랐다.
열한 시간 삼십이 분.
라파엘이 조용히 말했다.
"보십시오. 이제 이상론은 분 단위로 가격이 매겨집니다."
서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추고, 한마디만 남겼다.
"당신 제안이 형편없는 이유를 알아?"
라파엘은 뒤에서 물었다.
"무엇입니까?"
서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야."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복도 공기는 평소와 똑같이 재생 처리된 냄새가 났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안에 다른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거래 냄새였다.
화성은 오고 있었다.
지구는 기다리고 있었다.
코어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건 누가 먼저 숨 쉴지를 정하는 미래의 초안이었다.
그리고 서진의 주머니 속에서, 지구가 제시한 삶 하나가 무거운 금속조각처럼 식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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