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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거장은 중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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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거장은 중립이 아니다

정거장은 중립이 아니다

중립이라는 간판

라그랑주 정거장은 스스로를 중립이라고 불렀다.

가난한 장소들이 대개 그렇듯, 누구 편도 아니라는 말은 미덕이기 전에 영업 방식이었다. 누구 편도 들지 않아야 지구도 돈을 냈고, 화성도 물건을 보냈고, 벨트 쪽 화물선도 정박료를 냈다. 문제는 우주에서 돈이란 늘 방향을 갖고 날아온다는 점이었다. 방향이 있는 건 힘이 있고, 힘이 있는 건 결국 문을 열게 만든다.

서진은 서비스 승강기 안에서 죽은 선장이 남긴 파일을 열었다.

lagrange_internal_accounts.

파일 이름은 건조했다. 대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들이 그렇다. 폭탄은 늘 멋진 이름을 가지지만, 회계는 대개 민원서류처럼 생겼다.

화면 위로 계정들이 흘렀다. 중앙 생명유지 예비계정. 중립운영보전기금. 선착장 긴급안정화 적립분. 외부 조달 리스크 완충금. 이름은 하나같이 책임감 있어 보였지만, 숫자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았다.

같은 돈이 너무 자주 돌아다녔다.

중앙 예비계정에서 빠져나간 크레딧이 중립운영보전기금으로 들어갔다가, 몇 시간 뒤엔 테라옥시전 계열 결제망에 담보성 예치금으로 찍혔다. 그 뒤 다른 코드로 되돌아와 이번엔 화성 연합 소속 운송조합의 선적 우선권 보조금처럼 분류돼 있었다. 한 통의 숨을 두 번 담보 잡고, 같은 물 한 잔을 세 사람에게 판 것 같은 장부였다.

서진은 회계사가 아니었다. 다만 누출은 알아봤다. 기계에서 공기가 새는 소리나, 장부에서 돈이 새는 모양이나, 오래 보면 비슷해진다. 정직한 시스템은 곡선이 매끈하다. 누군가 손을 댄 시스템은 중간중간 움찔한다.

이 파일은 너무 많이 움찔했다.

승강기가 멈추기도 전에 반장 태경의 호출이 왔다.

"어디냐."

"운영동 가는 중입니다."

"좋아. 바로 평의회 홀로 와."

"정비사를 회의에 부르는 날도 있네요."

"오늘은 정비가 사람 쪽에서 새고 있거든."

호출이 끊겼다.

서진은 파일을 닫지 않고 들여다봤다. 승인 코드가 보였다. 정거장 재정서기 코드 하나, 외부 공급망 인증 하나, 그리고 세 번째는 낯설지 않았다. 화성 연합 통상중계 해시였다.

그는 혀끝으로 이를 쳤다.

중립이라.

돈은 이미 그렇지 않았다.

평의회 홀의 오래된 규칙

운영동 중심부에는 평의회 홀이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크고 근사한 정치의 심장 같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압력문과 더 오래된 체면으로 버티는 방에 가까웠다. 둥근 천장 아래 반원형 의석이 놓여 있고, 의석 앞에는 각 구역 표식이 붙어 있었다. 공기, 물, 거주, 선착장, 의료, 동력.

처음 정거장을 세운 사람들은 그 배열이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념이나 국기를 앞세우지 않고 생존 기능을 앞세우면 분쟁도 기능적으로 해결될 거라 믿었을 테니까. 인간이 아니라 공기와 물이 앉아 있는 척하면, 정치도 덜 정치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 믿음은 절반쯤만 맞았다.

공기는 입이 없어서 뇌물을 못 받지만, 공기 의석에 앉은 인간은 가능했다. 물은 편을 들지 않지만, 물 배급권을 쥔 사람은 언제나 들었다. 기능은 중립적일 수 있어도, 기능을 운영하는 건 늘 배고픈 인간이었다.

홀 입구 벽에는 정거장 헌장이 새겨져 있었다.

라그랑주는 어느 행성의 영토도 아니다. 라그랑주는 모든 등록 선박에 개방된다. 라그랑주는 무장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라그랑주는 자유항으로 남는다.

문장은 금속판 위에서 반짝였고, 현실은 그 아래에서 조금씩 녹슬고 있었다.

서진이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회의는 시작 직전이었다. 그 사실보다 더 나쁜 건 누가 와 있는가였다.

평의회 의장 성하림은 중앙에 앉아 있었고, 그 왼쪽에는 지구 측 연락관 에블린 케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매끈한 회색 정장, 느긋한 자세, 그리고 남의 공기가 끊겨도 자기 문장은 끝까지 매끈할 것 같은 얼굴. 테라옥시전과 연계된 대외조정 담당으로 소개된 적 있는 여자였다.

의장 오른쪽엔 화성 연합 통상대표 주노 박이 앉아 있었다. 마른 체격에 붉은 먼지빛 피부, 짧은 머리, 한 번 웃으면 농담 같고 두 번 웃으면 경고처럼 보이는 사람. 화성 태생은 대개 말수가 적은 편인데, 그건 말이 귀해서가 아니라 공기가 귀해서 그렇다.

지구 자본과 화성 연합이 같은 방에, 같은 시간에, 같은 이유로 앉아 있다는 건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누가 큰돈을 벌 기회를 찾았거나, 누가 큰일을 저질렀거나.

서진은 오늘 둘 다일 거라고 짐작했다.

지구는 계약서를 들고 왔고, 화성은 시간표를 들고 왔다

"윤서진 정비사 맞죠?"

의장 성하림이 물었다.

"예."

"반장 한태경과 함께 기술 참고인으로 들어오세요. 오늘 회의는 비공개입니다."

태경은 이미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서진을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공기보다 말이 더 비싸다. 조심해."

"전 원래 말 아끼는 편입니다."

"거짓말도 참 자연스럽다."

의장이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의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테라옥시전의 공급단가 조정 통보. 둘째, 화성 연합 측의 공식 질의. 셋째, 2번 선착장에서 확인된 미신고 격리 화물과 정거장 내부 계정 연계 의혹."

에블린 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그래서 더 짜증났다.

"정정하겠습니다. '의혹'으로 남겨 두는 편이 좋겠군요. 아직 그 화물이 무엇인지, 누가 소유권을 갖는지, 어떤 계약 아래 운송됐는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주노 박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확인된 건 하나 있죠. 미신고 격리 화물이 중립 정거장을 통과했다는 사실. 우리 쪽 선단이 그 사실을 알면, 라그랑주를 민간 자유항으로 계속 볼 이유가 사라집니다."

에블린이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화성 연합이 민간 자유항 운운하는 건 흥미롭네요. 지난 분기 귀측 운송조합이 정거장 외부 정박 슬롯에 비공식 우선권을 행사한 기록을 제가 가져오면, 이 방의 분위기가 지금보다 더 재미있어질 텐데요."

주노가 웃었다.

"우린 적어도 숨을 팔아놓고 목줄까지 같이 청구하진 않죠."

"대신 굶지 않게 해 주는 대가로 충성을 청구하잖습니까."

"충성은 아니고 일정입니다. 제시간에 오는 배는 대개 고맙거든요."

두 사람은 앉은 채로 서로를 찔렀다. 저런 대화는 피가 안 튄다고 안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피는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서 난다.

의장이 끼어들었다.

"좋습니다. 서로의 위선을 전부 낭독하기 시작하면 산소가 먼저 떨어지겠습니다. 핵심만 봅시다."

서진은 그 한마디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의장은 시간을 낭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문제는 시간이 적은 사람도 틀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하림은 회의실 화면에 라그랑주의 공급망 도표를 띄웠다. 누가 봐도 단순한 그림이었다. 지구권에서 산소와 신용이 올라오고, 화성권에서 조류식량과 저가 부품, 보정 장비가 올라오고, 벨트와 외곽 거주구에서 광물과 희귀 자재가 들어왔다. 정거장은 그 한가운데서 수수료를 떼고 숨을 쉬었다.

단순한 그림은 늘 사람을 속인다.

실제 구조는 훨씬 추했다. 지구는 산소를 팔면서 결제망과 법무팀을 같이 보냈다. 돈을 빌려 주고, 담보를 잡고, 계약 위반을 만들어 냈다. 화성은 더 싼 재생장비와 더 오래 버티는 조류모듈을 팔았고, 대신 노선과 정박 순서를 쥐었다. 배가 하루 늦는 것만으로도 정거장 식당의 줄이 길어졌다. 지구는 계약서로 목을 조였고, 화성은 시간표로 배를 졸랐다.

그 사이에 평의회가 있었다.

평의회는 오래전부터 이걸 중립이라고 불러 왔다. 어느 편에도 완전히 몸을 맡기지 않고, 두 편이 서로를 의심하게 유지하는 기술. 듣기 좋게 말하면 균형이었고, 솔직하게 말하면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줄 위에서 사는 사람은 발밑을 오래 보면 안 된다.

오늘은 모두가 아래를 보고 있었다.

계산은 언제나 사람보다 먼저 무너진다

의장이 고개를 돌렸다.

"윤 정비사. 보고하세요. 처음부터."

서진은 홀 한가운데 서서 숨을 골랐다. 이런 자리는 싫었다. 정비사는 대개 기계 옆에 있을 때 제일 똑똑해 보이고, 회의실 한가운데 서면 갑자기 월급이 아까워 보이는 직종이다.

그래도 그는 시작했다.

2번 선착장의 비정상 산소 사용 패턴. 죽은 선장 민태식의 개인 계정에서 계속 빠져나간 보조 산소 결제. 공식 도면에 없는 H-9 구획. 격리 환경이 유지된 숨은 적재 공간. 선박 내부에서 확보한 봉인 항로와, 테라옥시전 약자로 보이는 발송 코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 선장이 남긴 메시지.

정거장 내부 계정을 먼저 보라는 경고까지.

회의실은 조용했다. 모두가 조용하다는 건 대개 모두가 계산 중이라는 뜻이다.

서진은 복사해 온 자료를 띄웠다. 계정 흐름이 화면 위에 길게 펼쳐졌다.

"전 회계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이 돈은 한 번 쓰인 뒤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빠져나가 저기로 가고, 거기서 다시 이름을 바꿔 돌아옵니다. 중앙 생명유지 예비계정이 담보로 잡힌 흔적이 있고, 같은 시기에 화성 쪽 운송 우선권 비용을 메우는 데도 같은 숫자가 섞였습니다."

평의회 재정담당 의원이 얼굴을 굳혔다.

"그건 단순 유동성 조정일 수 있습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유동성 조정은 보통 숨겨진 화물칸하고 같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은 선장 개인 계정을 우회 결제용으로 쓰지도 않고요."

태경이 벽에 기대 선 채 덧붙였다.

"기계 쪽으로 보자면, 누가 정식 관로를 안 쓰고 우회 호스를 꽂아 놓은 겁니다. 우회 호스를 꽂는 이유는 둘뿐이에요. 급해서, 아니면 들키면 안 돼서."

주노 박이 곧장 물었다.

"그 내부 계정에 화성 해시가 붙어 있다는 건 뭡니까? 우리 쪽이 연루됐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서진은 화면을 넘겼다.

"연루와 책임은 다른 말입니다. 제가 보는 건 흔적뿐입니다. 화성 연합 통상중계 인증이 일부 승인 경로에 있습니다. 지구 쪽 공급망 인증도 있고요. 양쪽이 다 닿아 있습니다."

에블린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럼 더 조심해야겠군요. 공개적으로 처리할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노가 바로 받아쳤다.

"반대로 들리는데요. 양쪽 흔적이 다 있다는 건, 라그랑주가 양쪽 모두에게 다른 얼굴을 보여 왔다는 뜻 아닙니까?"

그 말이 방 가운데 떨어졌다.

아무도 즉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거의 자백처럼 들렸다.

서진은 이제야 퍼즐의 모양을 알 것 같았다. 라그랑주는 어느 편에도 완전히 서지 않는 대신, 양쪽에게 조금씩 다른 약속을 팔아 왔다. 지구에는 안정적인 정산과 우선 담보를, 화성에는 비공식 정박 이점과 유통 편의를. 평의회는 그 차이를 먹고 살았다. 중립은 원칙이 아니라 수익 모델이었다.

그게 지금까지는 먹혔다.

둘 다 정거장을 완전히 차지할 만큼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의회도 둘 다 열 받게 만들 만큼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H-9는 선을 넘었다.

미신고 격리 화물은 단순한 밀수가 아니다. 그건 어느 한쪽이, 혹은 둘 다가, 정거장의 중립 규칙 바깥에서 더 큰일을 했다는 뜻이다. 규칙이 깨지면 줄타기는 끝난다. 그다음부턴 누가 먼저 바닥에서 일어나는지만 남는다.

평의회는 숨을 쉬기 위해 거짓말한다

회의는 그때부터 정직해졌다.

정직하다는 건 품위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선착장 의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예쁜 말은 그만하죠. 지금 지구 쪽 결제망이 우리 예비계정 목을 잡고 있습니다. 사흘 안에 추가 보증 없으면 중앙 생명유지 라인이 제한됩니다. 화성 쪽은 지난달부터 재생모듈 교체분 선적을 늦추고 있고요. 우리한테 남은 중립은 헌장 벽판밖에 없습니다."

의료 의원이 차갑게 말했다.

"중립이 없어도 아이들은 숨을 쉬어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당장 산소와 식품을 끊지 않게 만들 방법부터 찾아야 합니다."

에블린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펼쳤다.

"방법은 있습니다. 테라옥시전은 30일 유예를 제공할 수 있어요. 단, 정거장 내 생명유지 계통에 대한 감사 권한과 선착장 격리 화물 전수조사 권한을 받아야 합니다. 외부 공급망 위협이 확인된 만큼 기업 보안팀이 직접 관리하는 편이 모두에게 안전하니까요."

서진은 속으로 웃었다. 기업이 말하는 안전은 늘 누가 열쇠를 가지느냐의 문제였다.

주노도 지지 않았다.

"우리도 제안하죠. 화성 연합은 긴급 조류카트리지와 회수 효율 증강 패치를 우선 선적할 수 있습니다. 대신 테라옥시전의 독점 조정권을 정지하고, 정거장 선착장 검사권을 공동 위원회로 넘기세요. 자유항이라면 최소한 한 회사의 창고처럼 보이진 말아야죠."

"공동 위원회?" 에블린이 비웃듯 말했다. "달리 말하면 화성 연합 감독관이 상주하겠다는 거군요."

"기업 보안팀이 상주하는 것보단 덜 무섭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배지를 숨기진 않거든요."

성하림 의장이 두 손을 깍지 꼈다. 손등이 희게 질렸다.

둘 다 구원처럼 말했고, 둘 다 청구서가 붙어 있었다.

지구는 공기를 더 살 시간을 팔았다. 대신 문과 장부를 달라고 했다. 화성은 공기를 덜 사는 방법을 팔았다. 대신 부두와 절차를 달라고 했다.

둘 중 어느 제안이 더 나쁜지 따지는 건 철학자의 취미일지 몰라도, 정거장에 사는 사람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둘 다 결국 정거장이 누군가의 손에 더 깊이 들어가는 방식이었으니까.

태경이 서진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보이냐."

"뭐가요?"

"저 사람들, 지금 우리를 살릴 방법을 찾는 게 아니야. 누가 우리 목에 자기 이름표를 먼저 걸지 협상하는 중이지."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장이 드물게 시적인 날엔 대개 상황이 정말 나빴다.

재정담당 의원이 힘없이 말했다.

"우린 둘 다 거절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자 성하림이 낮고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문제는 둘 중 하나를 고를 여력도 없다는 겁니다."

그게 진실이었다.

라그랑주가 여태 살아남은 이유는 어느 편에도 완전히 기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가 정거장을 완전히 갖지 못하게 화성이 막아 줬고, 화성이 정거장을 자기 항만으로 만들지 못하게 지구가 막아 줬다. 평의회는 그 사이에서 수수료를 떼고 규칙을 외웠다.

중립은 선량함이 아니었다.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게 유지하는, 비싸고 피곤한 장치였다.

그 장치가 지금 고장 나고 있었다.

표결보다 빠른 것

회의가 가장 시끄러워졌을 때, 서진은 습관적으로 자기 단말을 내려다봤다. 백로에서 복사해 온 H-9 환경 로그가 백그라운드에서 살아 있었다. 그는 회의보다 숫자를 더 믿는 편이었다. 숫자는 적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런데 로그 한 줄이 바뀌었다.

그는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H-9 유지 신호가 방금 전까지 2번 선착장 고정 노드에 물려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중계기를 잡고 있었다. 위치가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의장님."

아무도 못 들은 척하려 했지만, 그는 더 크게 말했다.

"의장님, 누가 H-9를 옮기고 있습니다."

방 안의 말이 뚝 끊겼다.

성하림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무슨 소리죠?"

서진은 화면을 띄웠다. 단순한 위치선 하나가 선착장에서 운영동 하부 화물 레일 쪽으로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환경 유지 신호가 이동 중입니다. 선착장 고정 노드에서 빠졌어요. 승인 없이는 안 되는 작업입니다."

선착장 의원이 벌떡 일어났다.

"불가능합니다. 2번 선착장 봉인 상태예요."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봉인은 풀렸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봉인을 푼 권한이 너무 높아서 기록이 자동 은폐되고 있습니다."

태경이 짧게 물었다.

"무슨 권한인데?"

서진은 승인 코드를 확대했다.

회의실 스크린에 붉은 문자가 떴다.

평의회 비상행정 권한 사용

이번엔 정말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주노 박이 가장 먼저 의장을 봤다. 에블린 케인은 의장을 보지 않고 미세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 반응만으로도 서진은 알 수 있었다.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이 방 바깥에서 움직인 손은 아주 높은 곳의 손이었다.

성하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승인한 적 없습니다."

에블린이 즉시 말했다.

"우리도 아닙니다."

주노는 차갑게 웃었다.

"그럼 멋지군요. 아무도 안 했는데 화물이 움직이는군요. 라그랑주는 여전히 기적의 정거장입니다."

서진은 화면 속 경로를 보며 말했다.

"기적은 아니고 구조 문제죠. 중립 체계가 이렇게 돼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편 이름을 달고도 같은 문을 열 수 있게."

그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이 정거장은 애초에 누가 와도 최소한 돌아가게 설계됐다. 그래서 누구나 조금씩 손을 댈 수 있었다. 조금씩 손을 대게 허용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큰 손이 생긴다.

그게 지금 컨테이너를 밀고 있었다.

성하림이 외쳤다.

"보안팀 호출! 화물 레일 전 구간 잠가요. 지금!"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서진이 다시 말했다.

"늦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동 속도로 봐선 이미 하부 분기점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갈라지면 저장고도, 의료구역도, 구형 격리실도 다 연결됩니다."

태경이 공구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럼 뛰어야지. 회의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주노 박도 일어섰다.

"우리 참관인을 붙이겠습니다."

에블린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기업 자산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으니 우리도 동행하죠."

서진은 피곤하게 그 둘을 봤다.

"좋습니다. 길에서 싸우지만 마세요. 여긴 벽에 총알보다 구멍이 더 무섭습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좋은 농담은 아니었지만, 사실은 대개 웃기지 않다.

평의회 의원들까지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하자, 둥근 홀은 순식간에 정치의 방이 아니라 대피 직전의 배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 서로의 문장을 다듬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문을 향해 뛰었다. 위신은 늘 산소보다 먼저 벗겨진다.

복도로 나오자 비상등이 켜지고 있었다. 붉은 조명이 금속 벽을 훑으며 지나갔다. 어디선가 차단문 내려오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정거장은 아직 공식적으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이미 자기 편의 화물을 확보하려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핵심이었다.

중립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더 나쁜 것이었다.

모두가 믿는 척해야만 겨우 굴러가는 구조, 그런데 모두가 속으로는 먼저 손을 뻗을 준비를 마친 구조. 평화가 아니라 임시 정전, 원칙이 아니라 상호 인질 상태. 라그랑주는 어느 행성의 영토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의 것도 아니었다.

서진은 화물 레일 쪽으로 달리며 마지막으로 단말을 봤다.

H-9 신호가 한 번 더 튀었다.

목적지 표기가 떴다.

구형 생물격리 구역

그는 달리던 속도를 더 올렸다.

죽은 선장의 계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계산은 정거장 안쪽에서 틀어졌고, 이제 누군가는 그 계산서를 열어젖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평의회가 아직 어느 편인지 결정하지도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우주에선,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도 화물은 계속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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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선언: 숨의 가격으로 움직이는 우주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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