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죽은 선장의 계정

2번 선착장은 조용한 척했다
2번 선착장은 넓었다. 넓은 장소는 대개 사람을 안심시키지만, 우주에선 반대였다. 넓다는 건 공기를 더 많이 잡아먹는다는 뜻이었고, 비어 있다는 건 누군가 돈을 못 내고 떠났거나,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비상 절약 조치가 내려진 뒤라 조명은 한 단계 어두워져 있었다. 천장 패널 사이사이로 새는 빛이 금속 바닥 위에 길고 마른 줄무늬를 만들었다. 접안 클램프는 잠든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정박 중인 선박 셋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가난해 보였다.
서진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선착장은 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냉각제, 연료 잔향, 용접 자국, 재활용 공기, 오래된 화물 포장재. 그런데 오늘은 거기에 하나가 더 섞여 있었다. 아주 미세했지만, 정비사 코엔 걸렸다.
너무 오래 밀폐된 공간 냄새였다.
그는 손목 단말을 켜고 회의실에서 넘겨받은 기록을 다시 띄웠다. 최근 열흘간 2번 선착장 접안 이력. 세 척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중형 화물선 한 척이었다. 선명은 백로. 민간 화물선치고는 선체가 지나치게 깨끗했고, 반대로 기록은 지나치게 지저분했다. 보조 산소 사용량이 일정하지 않았다. 많이 쓴 것도 문제였지만, 쓴 방식이 더 문제였다.
사람이 많이 타면 많이 쓰고, 적게 타면 적게 쓴다. 그건 상식이다.
그런데 백로는 마치 누가 일부 구획에만 숨을 몰아서 넣었다가, 갑자기 끊고, 몇 시간 뒤 다시 넣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보다 창고가 숨 쉬는 패턴이었다.
정비대 사무부스 안에는 선착장 관리인 임나래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니터 셋을 동시에 보고 있었고, 그중 둘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라그랑주에서 행정 일을 오래 하면 사람도 기계처럼 팬 소리를 낸다. 나래가 그랬다.
"정비반이 웬일이야. 오늘은 다들 산소 고쳐 주러 뛰는 줄 알았는데."
"맞아요. 그래서 왔죠. 여기서 산소가 좀 수상하게 새더군요."
나래는 한숨 비슷한 웃음을 냈다.
"새는 건 늘 수상했지. 다만 예산이 더 수상해서 문제였고."
서진은 백로의 기록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이 배. 열흘 동안 보조 공급을 다섯 번이나 비정상 패턴으로 당겨 갔어요. 선박 계정이 아니라 개인 계정에서요."
나래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개인? 누구 계정인데?"
서진이 화면을 확대했다.
민태식 / 선장 개인 정산 계정 / 상속 처리 대기
나래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짧은 침묵이 설명보다 빨랐다.
"죽었어요?" 서진이 물었다.
"여덟 날 전." 그녀가 대답했다. "외부 접안 클램프 수동 점검 중 사고. 테더 고정 불량으로 분리, 선체랑 한 번 부딪히고... 그 뒤는 알지?"
알았다. 우주에선 한 번 잘못 부딪힌 뒤의 이야기가 길지 않다.
"보험 판정은요?"
"작업 중 과실. 아주 깔끔하게 끝났어. 너무 깔끔해서 기분 나쁠 정도로."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죠?"
나래는 주변을 한 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민태식이 어떤 인간인진 몰라도, 테더 걸 줄 모르는 선장은 아니었어. 십이 년을 날아다닌 사람이야. 술 먹고도 클램프 번호를 맞출 놈이지, 자기 생명줄을 놓칠 놈은 아니었어."
그 말은 라그랑주식 조사 보고서였다. 공식 문서에 적히진 않지만, 다들 알아듣는 말.
서진은 다시 기록을 봤다. 사고 사흘 뒤부터였다. 죽은 선장의 개인 계정에서 산소 요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건.
죽은 사람이 숨을 사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죽은 사람은 대개 지출을 멈춘다
백로는 선착장 가장 안쪽에 붙어 있었다. 선체는 회색이었고, 이름은 희게 벗겨져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더 이상했다. 겉은 말끔했는데, 말끔한 데가 군데군데 새것처럼 반짝였다. 오래된 선박이 중간중간 새 피부를 얻은 꼴이었다. 싸게 버티는 배가 아니라, 필요한 곳만 비싸게 숨긴 배였다.
접현 통로 입구에는 임시 봉인 태그가 붙어 있었다. 보험 심사 대기, 사망 사고 조사 완료, 선박 이동 제한.
서진은 태그를 훑고 코웃음을 쳤다.
완료라고 적힌 것치고, 세상엔 완료된 적 없는 일이 많다.
그는 정비반 권한으로 보조 패널을 열었다. 접안 중인 선박은 정거장 생명유지 계통과 최소한의 손을 맞잡아야 했다. 전력, 공기, 폐열, 문 잠금, 아주 기본적인 것들. 그리고 기본적인 것들만 봐도 사람은 꽤 많은 걸 들킨다.
데이터가 뜨자마자 이상한 점이 하나 더 눈에 들어왔다.
산소 사용량은 선실 전체가 아니라 특정 구획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구획 번호가 없었다. 정확히는, 있었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선체 도면의 7번 화물칸 뒤쪽이 어색하게 비어 있었다.
빈칸은 사람을 부른다.
서진은 선박 인터콤에 접속했다.
"백로, 정비반입니다. 승무원 있으면 응답하세요."
약간의 잡음 뒤에 늙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관실. 박철우다. 무슨 일이지?"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반쯤 위안이고 반쯤 번거로움이었다.
"접안 계통 점검입니다. 비정상 산소 사용 확인됐어요. 탑승 허가 필요합니다."
"지금 와. 어차피 여기선 다들 날 도둑 취급하니까 하나 더 늘어도 상관없어."
문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서진은 통로를 건넜다. 금속 바닥이 부츠 밑에서 짧게 울렸다. 선박 내부 공기는 정거장 공기보다 차고, 더 아끼는 냄새가 났다. 누군가 최소한으로만 돌려 놓은 환경이었다.
기관장 박철우는 마른 노인이었다. 손등은 케이블 껍질처럼 갈라져 있었고, 눈은 잠을 충분히 못 잔 사람의 눈이었다. 그는 서진의 정비반 패치를 확인하고 비켜섰다.
"선장 일 때문에 왔나 했더니, 공기 때문에 왔군. 세상 참 정직해."
"둘 다일 수도 있죠." 서진이 말했다.
박철우는 피곤하게 웃었다.
"그럼 재미있겠네."
사고는 너무 빨리 정리됐다
선내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중형 화물선이면 원래 좀 더 살아 있는 소리를 낸다. 펌프, 냉각순환기, 벽 너머 누군가의 욕, 식기 붙는 소리, 싸구려 음악. 그런데 백로는 필요한 소리만 냈다. 마치 누가 사람 사는 흔적을 일부러 얇게 펴 발라 놓은 것 같았다.
박철우가 앞장서며 말했다.
"타고 있던 건 나 포함 세 명이었다. 사고 뒤에 둘은 조사받고 바로 내렸지. 지금은 나 혼자야. 배는 묶였고, 보험은 느리고, 회사는 조용하고. 우주에선 누가 죽으면 늘 셋 중 하나가 먼저 오거든. 회사, 채권자, 냉장차."
"이번엔요?"
"회사만 왔어. 그게 더 기분 나빠."
그는 잠시 멈춰 섰다가 선장실 문 앞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긴 아직 손 안 댔다. 겉으론."
"겉으론?"
"사고 당일 밤에 본사 원격 접속이 두 번 들어왔어. 선장 계정 쪽으로. 난 건드리지 말라고 들었고. 그 뒤엔 죽은 사람 개인 계정에서 자꾸 뭔가 돌아가더군. 결제도, 인증도. 배를 오래 타면 알게 돼. 산 사람보다 계정이 더 오래 일하는 경우가 있어."
서진은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들어가 봐도 됩니까?"
"이제 와서 예의 따질 단계는 지난 것 같은데."
문이 열렸다.
선장실은 작았다. 넓은 방은 선장에게도 사치였다. 침대, 접이식 책상, 자석컵 두 개, 벽에 고정된 단말기, 그리고 선반 하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 안은 사람 냄새가 적었다. 너무 정돈돼 있었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방치고는 선이 너무 고왔다.
살던 흔적이 아니라 정리된 흔적이었다.
서진은 책상 위를 훑어봤다. 먼지는 얇았고, 컵 바닥엔 마른 커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단말기는 대기 상태였고, 화면 한쪽에 작은 붉은 표식이 떠 있었다.
상속 처리 대기 계정 / 제한 모드
그 아래 아주 작게, 다른 문구가 하나 더 있었다.
자동 정산 서비스 실행 중
서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죽은 사람은 대개 지출을 멈추는데. 이 양반은 성실하군요."
박철우가 벽에 기대 말했다.
"민 선장은 성실했지. 다만 죽고 나서까지 성실할 성격은 아니었어."
서진은 단말기에 정비용 진단선을 꽂았다. 평범한 사용자는 로그인 화면만 보겠지만, 정비사는 기계가 숨기는 부끄러운 속사정을 본다. 시스템 프로세스 목록, 계정 호출 기록, 백그라운드 결제, 원격 인증 로그.
거짓말은 대개 겉에서 한다. 진실은 뒤에서 돌아간다.
화면이 바뀌었다.
최근 결제 내역이 떴다.
선착장 보조 산소 사용료. 격리 전력 유지비. 환경 안정화 보정치. 선착장 보조 산소 사용료. 격리 전력 유지비.
주기적이었다. 정확했다. 그리고 전부 선장 개인 계정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격리?" 서진이 중얼거렸다.
그는 바로 선체 도면을 다시 불러왔다. 공식 도면엔 격리 구획이 없었다.
이쯤 되면 누가 거짓말하는지 고르는 일만 남는다. 사람, 회사, 서류. 셋 중 하나거나, 셋 다거나.
선장의 계정은 아직 일하고 있었다
제한 모드 계정은 보통 읽기만 된다. 죽은 사람의 사생활은 살아 있는 사람의 돈과 충돌하기 전까지 보호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우주는 늘 예외 조항으로 굴러간다. 생명유지 계통과 결제가 엮이면 정비권한이 슬그머니 더 커진다.
서진은 자동 정산 서비스의 인증 경로를 따라갔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관료적인 실수 하나를 발견했다.
본사 쪽에서 계정을 잠그긴 했는데, 항법 패킷 보관함은 따로 잠그지 않았다.
그건 마치 집 문은 잠가 놓고 금고는 열쇠 꽂은 채 놔두는 종류의 멍청함이었다. 대기업은 늘 큰 실수를 작고 세련되게 한다.
그는 보관함을 열었다. 처음엔 별것 없어 보였다. 항로 승인서, 접안 허가, 연료 구매 이력, 통상 문서. 그런데 파일 목록 맨 아래, 자동 정렬에서 살짝 밀려난 항목 하나가 눈에 띄었다.
sealed_route.personal
민간 화물선 선장이 자기 계정에 봉인 항로 데이터를 넣어 두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주 드물거나, 아주 구린 일이다.
서진이 파일을 누르자 시스템이 망설였다. 화면 한쪽에 경고문이 떴다.
개인 봉인 항로 데이터입니다. 열람 시 로그가 남습니다.
그는 박철우를 돌아봤다.
"이제부터는 누군가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까지 와서 남 기분 생각하면 정거장에서 못 살아."
서진은 파일을 열었다.
항로가 펼쳐졌다.
공식 신고 경로는 화성 외곽 집하장 - 소행성 벨트 보급점 - 라그랑주였다. 평범했다. 세금은 아깝고, 시간은 걸리고, 돈은 적게 남는 민간 화물선의 전형적인 길이었다.
하지만 봉인된 실제 항로는 달랐다.
백로는 중간에 한 번 사라졌다.
트랜스폰더 기록이 통째로 비는 구간이 있었고, 그 공백 끝에는 등록되지 않은 중계 부표 좌표가 찍혀 있었다. 공식 항로망 바깥, 민간선이 들어가면 괜히 질문이 많아지는 위치였다. 더 기분 나쁜 건 그 다음이었다. 거기서 라그랑주로 직행하지 않았다. 지구권 물류망 외곽을 한 번 크게 돌아 들어왔다. 누가 봐도 감시망을 피하는 선의 모양이었다.
서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단순 밀수라면 이렇게 돌 필요 없는데."
박철우가 표정을 굳혔다.
"뭘 실었는지 알아?"
"아직은요. 다만 숨기고 싶었던 건 분명하네요."
항로 데이터 아래에는 추가 봉인 메모가 하나 붙어 있었다. 짧았다.
도착 후 H-9 유지. 인계 전까지 개봉 금지. 개인 정산으로 전환할 것. 문제가 생기면 회사 계정 사용 금지.
H-9.
없는 구획 번호였다.
없는 번호에 산소가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회사 계정을 피하고 있었다.
명세서에 없는 칸
백로의 7번 화물칸은 반쯤 비어 있었다. 적재된 건 대부분 평범한 산업 자재였다. 필터 하우징, 저온 밸브, 구조재 패널, 표준 용접봉 묶음. 우주를 유지하는 건 늘 이런 재미없는 물건들이다. 인류는 별에 진출했지만, 결국 볼트와 패킹 없이는 한 시간도 못 버틴다.
서진은 화물칸 바닥을 한 바퀴 천천히 걸었다. 눈보다 발이 먼저 알았다. 중간쯤에서 바닥 울림이 달라졌다. 판 아래 공간이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손전등을 비췄다. 바닥 패널 모서리 한 군데가 다른 곳보다 조금 덜 닳아 있었다. 최근에 열었다 닫은 흔적이었다. 아주 조심성 있게 숨긴 티가 났다. 대개 범죄는 조심성 때문에 들킨다. 아무도 안 볼 거라고 생각하면 대충 숨기고, 누가 볼까 봐 두려우면 오히려 너무 깔끔해진다.
"여기 열어 본 적 있습니까?" 서진이 물었다.
박철우가 고개를 저었다.
"공식 도면엔 없는 자리야. 나도 짐칸 개조 정도로만 생각했지. 선장 권한 잠금이라 건드릴 수도 없었고."
서진은 패널 가장자리의 서비스 포트를 찾았다. 일반 화물칸 잠금은 선박 공용 계정으로 열리지만, 이건 달랐다. 선장 개인 인증과 연동된 보조 잠금이었다.
그는 아까 복사해 둔 자동 정산 토큰을 넣었다.
잠금이 풀렸다.
둘 다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몇 초는 항상 같다. 문이 열리기 직전의 침묵. 사람이 제일 정직해지는 시간이다. 기대하는지, 두려운지, 아니면 후회하는지. 셋 중 하나는 반드시 얼굴에 뜬다.
패널이 올라갔다.
아래에는 좁고 긴 숨은 적재 공간이 있었다. 공식 화물칸이라기보다, 설계도에서 몰래 긁어낸 틈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안에 검은 컨테이너 여섯 개가 고정되어 있었다.
컨테이너들은 화물이라기보다 장례용 관처럼 보였다. 표면은 빛을 먹는 무광 세라믹이었고, 각 모서리엔 열 차단재가 덧대어져 있었다. 냉각선이 따로 연결돼 있었고, 그중 두 개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기계만이 내는 떨림이었다.
외부 라벨은 떼어낸 뒤였다. 대신 남은 건 연마 자국뿐이었다.
연마 자국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 세상에 라벨을 지우는 합법적 이유는 거의 없으니까.
서진은 손목 단말로 컨테이너 하나를 스캔했다. 표준 민간 화물 코드가 안 떴다. 대신 오래된 경고 프로토콜 하나가 희미하게 반응했다.
제한 물질 혹은 제한 장비. 민간 개봉 금지. 관할권 확인 필요.
박철우가 낮게 욕했다.
"그 개자식들이 대체 뭘 실은 거야."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건 두 가지뿐이었다. 첫째, 이건 신고되지 않은 화물이다. 둘째, 이런 걸 굳이 개인 계정으로 산소 먹이며 숨긴다는 건, 안에 든 물건이 진공에 오래 노출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컨테이너 옆 보조 패널에 작은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산소 농도. 온도. 압력 안정화.
화물칸이 아니라 격리실에 더 가까운 설비였다.
그는 한쪽 컨테이너에 귀를 가까이 댔다. 아주 희미한 진동이 들렸다. 기계 소리인지, 안에 든 무언가가 내는 소리인지는 분간되지 않았다.
분간되지 않는 것만큼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건도 없다.
죽은 선장이 남긴 마지막 계산
서진은 컨테이너보다 옆 패널부터 확인했다. 물건 자체는 나중에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은 누가 지우기 시작하면 지금만큼 친절하지 않다.
로컬 적재 목록이 떴다. 공식 명세서엔 없던 항목 하나가 숨어 있었다.
H-9 보관물 / 수령인 계정 비공개 / 임시 인계지 라그랑주 / 인계 확인 전 개봉 금지
발송인 코드도 있었다.
다만 그 코드는 일반 화물회사가 쓰는 형식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짧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약어였다.
TOG-SR
서진은 그 약어를 한 번 더 봤다.
머리가 빠른 사람은 대개 행복하지 않다. 연결이 너무 빨리 되기 때문이다.
TOG. 테라옥시전 글로벌.
지금 정거장 전체의 목을 조르고 있는 바로 그 회사.
박철우가 먼저 물었다.
"뭔데?"
"아마 오늘 우리 숨값을 올린 회사 약자일 겁니다."
노인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가, 그 위로 천천히 분노가 올라왔다. 오래 산 사람의 분노는 불꽃보다 보일러에 가깝다. 늦게 끓고, 오래 간다.
"산소 파는 놈들이 몰래 뭘 실어 날랐다고?"
"그럴 가능성이 커졌죠."
서진은 데이터를 손목 단말로 복사하기 시작했다. 항로 데이터, 결제 기록, 적재 목록, 격리실 환경 로그. 퍼센트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52퍼센트에서 멈췄다.
선내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곧이어 경고음이 울렸다.
짧고, 딱딱하고, 듣는 사람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종류였다. 시스템 경보는 원래 다 그렇지만, 이건 특히 그랬다.
화면에 새 문구가 떴다.
원격 접속 감지
상위 권한 사용자 로그인 중
박철우가 욕설을 삼켰다.
"본사 놈들인가?"
"모르죠. 다만 우리가 반가운 손님은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복사 퍼센트가 다시 움직였다. 53. 54.
그 순간 선체 전체가 아주 약하게 떨렸다. 백로의 보조 동력이 깨어나는 진동이었다. 묶인 선박이 이런 식으로 혼자 몸을 풀면, 대개 좋은 일이 아니다.
선내 방송이 켜졌다. 인간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사무적인 합성음이었다.
"비인가 접근 감지. H-9 구획 보안 절차를 시작합니다."
"보안 절차가 뭔데?" 박철우가 물었다.
서진은 컨테이너 옆 산소 수치를 보고 대답했다.
"나쁜 쪽이면 퍼지. 더 나쁜 쪽이면 자폭."
"위로가 안 되는구만."
"저도 제 장점은 아닙니다."
퍼센트가 61로 올라갔다. 너무 느렸다.
서진은 재빨리 케이블을 하나 빼서 보조 패널에 꽂았다. 우주에서 급할 때 제일 믿을 만한 건 고상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물리적 방해다. 그는 환경 안정화 회로 하나를 강제로 우회시켰다. 경고등이 붉게 변했다.
합성음이 다시 울렸다.
"구획 격리 실패. 현장 개입 필요."
좋다. 기계가 현장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원격으로 할 수 있는 짓이 조금 줄어든다. 사람도 결국 손이 있어야 더럽게 일할 수 있다.
복사 78. 85. 91.
그때 선장 개인 계정 창이 스스로 열렸다.
누군가 반대편에서 접속을 건드리고 있었다. 커서는 잠깐 떨리더니, 새로운 메모 하나를 화면 위로 밀어 올렸다. 오래된 예약 송신 같았다.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뜨도록 걸어 둔 메시지.
짧은 문장이었다.
내 계정을 보고 있다면, 난 이미 죽었거나 곧 죽는다. H-9를 넘기지 마라. 라그랑주 안에 받는 놈이 있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정거장 계정을 먼저 봐. 계산이 거기서부터 틀어졌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화면 절반이 검게 지워지기 시작했다. 원격 접속 쪽에서 로그 삭제를 거는 모양이었다.
복사 완료.
서진은 케이블을 뽑아 단말을 움켜쥐었다.
"이제 뛰죠."
박철우는 군말 없이 돌아섰다. 그건 노인답고 선원다운 반응이었다. 질문은 살아남은 뒤에 하는 것.
둘이 숨은 적재 공간을 빠져나오자마자 뒤에서 패널이 쾅 닫혔다. 복도 조명은 붉게 바뀌었고, 선체 곳곳에서 잠금 소리가 연달아 났다. 누군가 백로를 원격으로 봉인하고 있었다.
서진은 달리면서 손목 단말을 봤다. 막 복사한 자료 맨 끝에, 선장 메시지와 함께 자동 첨부된 파일 하나가 더 있었다.
파일명은 단순했다.
lagrange_internal_accounts
그는 그 이름을 읽고도 바로 열지 않았다.
정비사는 고장 난 걸 많이 본다. 그래서 안다. 어떤 뚜껑은 당장 열어야 하고, 어떤 뚜껑은 숨을 한번 고른 뒤 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민태식 선장의 죽음은 더 이상 선체 사고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의 계정은 마지막까지 일하고 있었고, 그 일의 방향은 정거장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2번 선착장 차단문이 눈앞에서 열렸다. 서진은 달려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주에서는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개는 시체가 더 늦게 발견되는 이유일 뿐이다.
그의 손목 단말 안에는 봉인된 항로와, 명세서에 없는 화물과, 죽은 선장이 남긴 경고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선 이미 누군가가 그걸 되찾으려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흘짜리 산소 문제는 이제 조금 달라졌다.
누가 공기를 훔쳐 갔는지 찾는 일에서, 누가 정거장 전체를 팔아넘기고 있는지 찾는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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