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소값이 오르던 날

숨은 공짜가 아니었다
라그랑주 정거장에서 공짜인 것은 우주뿐이었다.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공짜가 아니었다. 우주는 늘 바깥에 있었고, 조금만 방심하면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진공은 예의가 없어서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틈이 있으면 들어왔고, 사람이 있으면 데려갔다.
그래서 정거장 사람들은 대개 두 종류로 나뉘었다. 산소를 만드는 사람과, 산소가 새지 않게 막는 사람. 윤서진은 두 번째였다.
그는 아침마다 눈을 뜨자마자 벽의 수치를 먼저 봤다. 기상 시간, 실내 기압, 산소 분압, 이산화탄소 농도, 이번 주 개인 호흡 할당량. 어떤 사람은 달력을 본다지만, 라그랑주에선 그런 사치가 통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숫자가 곧 날씨였고, 예보였고, 신의 기분이었다.
침대 머리맡 디스플레이에 녹색 숫자가 떠 있었다.
산소 분압 정상. 개인 크레딧 자동 차감 완료. 이번 달 요금 예상치 상향 조정.
서진은 한쪽 눈만 뜬 채 그 문장을 읽고 코웃음을 쳤다.
"상향 조정은 늘 자동이지."
방은 좁았고, 공기는 깨끗했다. 깨끗한 공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쌌다. 그는 발을 바닥에 내리자마자 손목 단말을 집어 들고 가계부부터 열어 봤다. 정비사들은 기계만 고치는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틀렸다. 정비사는 먼저 자기 월급을 고쳐 써야 했다. 월급이 새는 구멍은 공기 누출보다 찾기 어려웠다.
식비, 침대 사용료, 세탁수 사용료, 회전고리 교통세, 정비조합 회비. 그리고 가장 위에, 늘 그렇듯 산소.
정거장에선 누구나 숨을 쉬었고, 따라서 누구나 세금을 냈다. 다만 누가 더 많이 내느냐는 신분보다 폐활량에 좌우됐다. 용접공, 화물 하역반, 회전축 외벽 보수반은 하루가 끝나면 사무직보다 몇 배는 더 비싼 호흡 기록을 남겼다. 서진은 자기 직업이 좋아서 택한 게 아니라 폐를 속일 수 없어서 택했다. 태생적으로 가슴이 넓고 호흡이 깊었다. 학생 때 체력장은 잘 나왔지만, 성인이 되자 그건 장점이 아니라 고지서가 되었다.
그는 세면대 앞에서 이를 닦으며 벽면 환기구 소리를 들었다. 정거장에서 오래 산 사람은 환기음만 들어도 오늘 기계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무난했다. 축압기가 약간 떨리고, 순환 팬 베어링 하나가 슬슬 수명을 다해 가고 있었다. 정거장은 늘 작은 신음들을 냈다. 문제는 그 신음이 커질 때까지 아무도 돈을 안 쓴다는 점이었다.
세수를 마친 뒤, 그는 천장 쪽을 올려다봤다.
"오늘도 네가 우리보다 오래 버티면 좋겠다."
그 말은 환기 덕트에 한 것이기도 했고, 정거장 전체에 한 것이기도 했다.
라그랑주는 오래된 정거장이었다. 처음엔 연구용 모듈 몇 개를 연결한 것에 불과했고, 그다음엔 화물창이 붙었고, 선착장이 늘었고, 임시 거주 구획이 영구 거주 구획인 척 굳어졌다. 설계도대로 자란 도시가 아니라, 필요에 쫓겨 덕지덕지 이어 붙인 생존물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사람이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만든 타협의 연속에 가까웠다.
그런 장소들은 대개 이상하게도 정이 간다. 숨 쉬는 데 돈이 들수록, 옆집 사람이 문틈 고무 패킹을 바꿔 줬을 때 고마움도 커지는 법이다.
서진은 작업복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공구가방을 들고, 자동문이 열리는 타이밍에 맞춰 복도로 나섰다. 복도 벽엔 전날 붙은 종이가 그대로 펄럭이고 있었다.
절약은 생존입니다. 샤워 시간 2분 준수. 개인 식물 재배 허가증 미갱신 시 산소 가산세 부과.
누군가 아래에 볼펜으로 덧써 놨다.
그럼 숨도 절약해 드릴까요?
정거장의 유머는 대개 반쯤은 농담이었고, 반쯤은 민원이었다.
정비사의 오전
정비반 아침 집합은 C링 회전구역 끝, 서비스 데크 12번에서 이루어졌다. 정식 명칭은 길었지만 다들 그냥 뒷배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정거장의 뒤쪽이었고, 냄새도 그에 걸맞았다. 금속, 윤활유, 미세하게 탄 절연체 냄새, 그리고 아무리 정제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 사는 냄새.
반장 한태경은 언제나처럼 커피 대용액을 들고 있었다. 원두가 아니라 조류 단백질과 합성 향료를 끓인 검은 액체였지만, 이름을 바꾸면 맛이 더 나아지는 건 아니라서 다들 그냥 커피라고 불렀다.
"서진."
"예."
"오늘 네 구역은 B축 순환 계통. 밤새 산소 회수 효율 0.8 떨어졌어."
"0.8이면 아직 사람 안 죽습니다."
"그래서 널 보내는 거지. 사람 죽기 전에."
"반장님은 늘 저를 귀하게 쓰십니다."
태경은 컵을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찌푸렸다. 음료 때문인지 정거장 때문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귀하게 쓴다기보다, 네가 제일 덜 부서져서."
그 말은 칭찬이었다. 라그랑주에서는 대개 그런 식으로 칭찬했다.
정비반 사람들은 흩어졌다. 누군가는 급수 라인으로, 누군가는 회전축 자이로 점검으로, 누군가는 외벽 패치 작업 준비로 갔다. 그들은 도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지만, 급여 명세서엔 그보다 초라한 이름으로 찍혔다. 기능직 3등급. 유지보수 실무. 교대제. 산소 사용량 가중 과세 대상.
서진은 서비스 레일 카트를 타고 B축으로 향했다. 카트는 낡았지만 속도만큼은 믿을 만했다. 창도 없는 통로를 달리며 그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으로 난간을 두드렸다. 하나, 둘, 셋. 진동이 일정했다. 모터 축은 아직 괜찮았다.
정거장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와 손으로 읽는 곳이었다. 금속이 내는 떨림, 압력밸브가 여닫히는 박자, 멀리서 울리는 경보의 음높이. 초보자는 경보가 울려야 문제를 알지만, 숙련자는 경보가 울리기 전부터 안다. 경보는 대개 문제가 생긴 뒤에야 예의를 차리는 장치였다.
B축의 순환실은 예상대로 더러웠다. 먼지라고 부르기엔 너무 기술적이고, 산업 잔여물이라 부르기엔 너무 인간적인 것들이 필터 하우징 주변에 끼어 있었다. 머리카락, 합성섬유 가루, 피부 각질, 포장재 찌꺼기, 이름 모를 회색 분말. 도시란 결국 사람이 벗겨지며 굴러가는 기계라는 사실을 이런 곳에 오면 절감하게 된다.
서진은 패널을 열고 진단선을 꽂았다. 수치가 흘렀다. 흡기량, 회수율, 이산화탄소 흡착재 포화도, 산소 보정 주입량. 문제는 금방 보였다. 회수 모듈 하나가 규정보다 더 오래 버틴 척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미 죽었는데 행정 서류상 살아 있는 부품이었다.
그는 웃었다.
"그래. 정거장다운 시민이군."
볼트를 풀고 모듈을 들어 올리자 안쪽 씰이 찢어져 있었다. 이런 종류의 고장은 악의가 아니라 빈곤에서 나온다. 예산이 부족하면 교체 주기를 미루고, 주기를 미루면 효율이 떨어지고, 효율이 떨어지면 산소를 더 사야 하고, 산소를 더 사면 예산이 더 부족해진다. 우주 정거장판 자가포식이었다.
무전이 울렸다.
"B축, 상태 보고." 태경의 목소리였다.
"사망한 모듈이 임금은 계속 타 가고 있습니다. 교체하면 해결됩니다."
"재고?"
서진은 선반을 훑어봤다. 빈 상자, 반쯤 뜯긴 포장, 등록은 되어 있으나 실물은 없는 번호표, 그리고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호환품 하나.
"서류상으론 넉넉합니다."
"실물 말이야, 서진."
"실물상으론 한 개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지난 세기 물건이네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끼워."
"규정 위반입니다."
"규정은 공기가 없을 때 읽는 거 아니야."
"반장님은 늘 시적이십니다."
"입 다물고 끼워."
그는 호환품을 들어 올렸다. 무겁고, 둔하고, 못생겼다. 대개 오래 가는 기계가 그렇다. 새 부품은 영리하게 설계되고, 오래된 부품은 고집스럽게 버틴다. 서진은 연결부를 맞추며 속으로 계산했다. 이걸 달면 효율은 정상선 근처까지 회복하겠지만, 전력은 더 먹는다. 전력을 더 먹으면 열이 늘고, 열이 늘면 냉각 부담이 커지고, 냉각 부담이 커지면 또 돈이 든다.
정거장에서는 모든 문제가 줄을 서 있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다음 것이 청구서를 들고 나타났다.
모듈을 고정하고 재가동을 걸자 팬이 헛기침하듯 돌더니 곧 안정됐다. 수치가 올라갔다. 회수 효율 94.1, 95.0, 95.3. 그럭저럭 살 만한 숫자였다.
그는 작업 기록을 남겼다.
임시 교체 완료. 정식 부품 필요.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한 줄을 더 넣었다.
정식 부품을 실제로 구매할 의사가 있을 경우에 한함.
물론 그 문장은 전송 전에 지웠다. 정거장은 유머를 좋아했지만, 회계팀은 그렇지 않았다.
값이 오른다는 통보
문제는 대개 가장 평범한 순간에 문을 연다.
서진이 점심 배급을 받으려고 식당 줄에 섰을 때도 그랬다. 오늘 메뉴는 단백질 면과 토마토 맛 영양소스였다. 토마토는 본 적 없는 세대도 토마토 맛이 뭔지 알고 있었다. 기업은 기억까지 수출하는 데 능숙했다.
식당의 공기는 늘 조금 따뜻했고, 사람들은 늘 조금 예민했다. 교대가 겹치는 시간이라 줄이 길었다. 서진 앞에는 화물 하역반 둘이 서 있었고, 뒤에는 교육 모듈 보조교사가 손목 단말로 학생 출결을 정리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빈 의자에 앉혀 두었다. 아이는 빵처럼 생긴 압축 간식을 손에 들고 공기 배출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라그랑주 아이들은 별보다 먼저 환기구를 배운다.
그때 식당 벽면 스크린이 깜박였다.
광고가 사라지고, 정거장 공지 채널이 떴다.
처음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공지는 늘 있었다. 절전 안내, 선착장 혼잡 경고, 식수 배급 조정, 민원 처리 지연 사과. 정거장은 사과를 자주 했고, 보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송출 표식이 달랐다.
지구권 자원관리협약 산하 테라옥시전 글로벌 공지
줄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사람들은 말을 멈추진 않았지만, 음량을 낮췄다. 그건 나쁜 소식이 올 때 나타나는 집단적 본능이었다.
화면에 매끈한 정장을 입은 여자가 떴다. 중력 우물 아래에서 자란 사람이 틀림없었다. 턱선이 편안했고, 피부엔 건조한 재활용 공기의 흔적이 없었다. 그녀는 우주 정거장에 사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숨 쉬는 법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계약 갱신 조항 17-B 및 운송 위험 할증 조정에 따라, 지구 외 거주구에 공급되는 산업용 및 생활용 산소의 기준 단가가 협약 시각 18시부로 재산정됩니다."
사람들은 그 문장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핵심은 바로 알아들었다. 기업은 언제나 나쁜 소식을 완곡하게 말한다.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 훈련이다.
화면 아래 숫자가 떴다.
기준 단가 38퍼센트 인상. 장거리 운송 리스크 프리미엄 별도 부과. 미납 계정 자동 제한 적용.
줄이 멈췄다.
누군가 낮게 욕했다. 다른 누군가는 웃었다. 정말 기분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은 가끔 웃는다. 뇌가 아직 현실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서진은 자기 손목 단말을 봤다. 아직 아무 알림도 오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시스템이 계산 중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스크린 속 여자는 아주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본 조정은 지속 가능한 우주 거주 인프라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입니다."
화물 하역반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우리더러 죽지 말라는 건지, 죽되 조용히 죽으라는 건지."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단말이 진동했다.
개인 요금 예상치 갱신. 이번 달 산소비 +21%. 정거장 공동관리비 재산정 예정. 비상 예비분 충당금 특별 부과 가능.
개인 요금이 21퍼센트 오르는 데 정거장 전체 공급 단가가 38퍼센트 오른다는 건, 나머지가 어디론가 숨어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숨는 곳은 많지 않았다. 공동구매, 회계 유예, 누적 부채, 그리고 아직 발표되지 않은 추가 세금.
식당 안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보조교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의 귀를 막아 주었다. 배식 로봇은 사람들의 기분과 상관없이 일정한 양의 면을 그릇에 떨어뜨렸다. 기계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문명적이다. 세상이 무너지기 직전에도 제 할 일을 한다.
반장 태경에게서 호출이 왔다.
"어디냐."
"식당입니다."
"먹지 마. 중앙 유지실로 와."
"저 점심 아직—"
"지금부터 정거장 전체가 다이어트야. 뛰어."
호출이 끊겼다.
서진은 배식받지 못한 쟁반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식당 문을 나서기 직전, 그는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은 여전히 줄에 서 있었고, 여전히 살아 있었고, 방금 전보다 조금 더 가난해졌다. 우주에서 혁명은 대개 포성보다 고지서로 먼저 시작된다.
숨이 숫자가 되는 순간
중앙 유지실은 늘 시끄러웠지만, 그날은 종류가 달랐다. 기계음보다 사람 목소리가 컸다.
벽면 대형 스크린엔 정거장 전체 계통도가 떠 있었고, 산소 저장 탱크 잔량, 회수 효율, 인구 호흡 추정치, 외부 구매 예정량이 구획별로 분할 표시되고 있었다. 붉은 숫자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숫자는 피를 흘리지 않지만, 잘 보면 공포를 표현할 줄 안다.
태경 말고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시설국 차장 오민재, 회계실에서 파견된 듯한 말쑥한 여자 하나, 그리고 정거장 운영위원회 서기가 단말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회계실 사람 표정이 특히 좋지 않으면, 대개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곧 반영된다.
태경이 서진을 보자 손짓했다.
"왔냐. 여기 봐."
스크린에 확대된 그래프가 떴다. 현재 소비량 기준으로 산소 비축분은 23일. 절약 조치 1단계 시행 시 31일. 산업구역 제한 가동 시 40일. 의료구역과 유아구역 우선 배정 후 일반 거주구 순환 감압 실시 시… 숫자가 애매하게 흔들리다 57일에서 멈췄다.
"감압?" 서진이 물었다.
회계실 여자가 대신 답했다.
"평균 실내 기압을 단계적으로 낮추는 안입니다."
"사람을 덜 사람답게 만들어서 오래 살리겠다는 거군요."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생존 가능 기간을 늘리는 겁니다."
서진은 그런 얼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숫자를 다루는 사람의 얼굴. 그들은 인간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인간보다 계산식을 더 오래 들여다봐서 그렇게 된다. 우주에서는 그런 사람도 필요했다. 문제는 그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대개 불쾌하다는 점이다.
오민재 차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테라옥시전 측은 일방 통보라고 하지만, 법적으로는 계약 범위 안이야. 지구 쪽 협약 법무팀이 붙었고. 우린 즉시 항의 문서를 보내겠지만…"
"그동안에도 숨은 쉬어야 하죠." 서진이 말했다.
민재는 피곤한 눈으로 그를 봤다.
"맞아. 그래서 기술 쪽 대책이 필요해. 회수율을 최대한 올려야 해."
태경이 스크린을 넘겼다. 노후 모듈 목록이 줄줄이 떴다. B축, D링, 농업 보조구역, 선착장 2번, 회전축 보조 순환기. 죽지 않았지만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는 장비들이었다. 정거장은 오래된 사람처럼 여기저기서 버텨 왔고, 지금까지는 그걸 미덕이라 불렀다.
"문제는," 태경이 말했다. "부품 창고가 빈 걸 네가 아침에 이미 확인했다는 점이지."
서진은 팔짱을 꼈다.
"창고가 빈 게 오늘의 새 소식은 아닙니다."
"오늘은 새 소식이 하나 더 있어."
태경이 시선을 돌렸다. 유지실 구석에 선 젊은 통신기사가 손을 들었다.
"지구 결제망이 방금 재동기화됐습니다. 미납 계정 사전 제한 목록이 내려왔고요."
스크린 한쪽에 명단이 떴다. 개인 계정, 영세 사업자, 선박 운영계정, 정거장 공동구매 하위 계정.
그리고 가장 위에, 크게.
라그랑주 정거장 중앙 생명유지 예비계정 — 유예 기간 72시간.
잠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아주 간단했지만, 번역하면 이런 뜻이었다. 너희가 사흘 안에 돈을 더 내지 못하면, 그다음 숨은 더 비싸진다. 그리고 더 비싼 숨을 못 사면, 그다음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운영위원회 서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중앙 예비계정은 장기 공급 안정화 계약 대상인데—"
회계실 여자가 잘랐다.
"재분류됐습니다. 위험 지역 외부 거주구로."
"우리가 위험 지역이 된 건 언제부터죠?"
서진이 물었다.
그녀는 서진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들이 그렇게 적은 순간부터요."
그건 이상하리만치 정직한 대답이었다.
고장 난 것과 고장 나지 않은 것
회의는 길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말은 많아졌고 결론은 짧아졌다.
절약 조치 즉시 시행. 비핵심 구역 순환량 축소. 민간 공방 야간 가동 제한. 선착장 체류 선박에 추가 산소 부담금 부과. 모든 유지보수 인력 비상 대기.
이런 조치들은 언제나 종이 위에선 훌륭했다. 종이는 숨을 쉬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서진은 가만히 스크린의 좌하단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선착장 계통 산소 사용량이 이상하게 높았다. 아주 심한 수준은 아니지만, 계절 변동치로 넘기기엔 미묘했다.
그는 확대를 요청했다.
"잠깐. 2번 선착장 이거 뭡니까?"
통신기사가 화면을 조정했다. 최근 열흘간 선착장 2번과 연결된 외부 선박 세 곳이 기록에 남아 있었다. 화물선 두 척, 민간 예인선 한 척. 입출항 시간은 평범했고, 연료 사용도 정상범위였다. 그런데 접안 중 내부 보조 산소 공급 사용량이 비정상적으로 들쑥날쑥했다.
태경이 물었다.
"누출?"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누출이면 더 매끈하게 빠집니다. 이건 누가 숨을 크게 쉬었다가, 갑자기 안 쉬고, 다시 많이 쉬는 패턴이에요."
"사람?"
"사람이거나, 기록이 거짓말을 하거나."
민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밀수 조사할 때가 아니야."
"아닐지도 모르죠." 서진이 말했다. "정거장 예비계정이 사흘짜리라면, 지금은 숨이 어디로 가는지 따질 때입니다."
태경은 잠깐 서진을 보더니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건 반장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2번 선착장 네가 맡아."
민재가 반발했다.
"우린 당장 전체 회수율부터—"
"회수율은 나머지가 잡습니다." 태경이 잘랐다. "서진은 냄새를 맡았고, 난 그런 걸 무시해서 좋았던 적이 없어요."
회의실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처음엔 단순한 비용 인상 문제였던 일이, 이제는 계산이 맞지 않는 문제로 바뀌고 있었다. 정거장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사실엔 익숙했지만, 누가 자기 호흡을 빼돌리고 있을 가능성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선착장 로그, 접안 기록, 보조 탱크 배출량, 승무원 명부 다 넘겨 주세요."
회계실 여자가 물었다.
"정비사가 그걸 봐서 뭘 알 수 있죠?"
서진은 공구가방 손잡이를 다시 고쳐 잡았다.
"기계는 거짓말을 못 합니다. 사람은 잘하고요. 둘을 같은 표에 올려놓으면, 대개 누가 사람인지 보입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서진을 제대로 봤다.
유지실 밖 복도에 비상 절약 방송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명은 한 단계 어두워졌고, 환기 세기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보통 사람은 못 느낄 정도였지만, 정거장 사람은 느꼈다. 모두가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공기가 아주 조금 인색해졌다는 사실을.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동물이 된다.
사흘의 시작
서진이 유지실을 나섰을 때, 정거장은 여전히 돌고 있었다.
그건 이상한 위안이었다. 세상이 끝날 것 같아도 인공중력은 제 할 일을 하고, 팬은 돌고, 문은 열리고 닫혔다. 우주는 무심했고, 기계는 성실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끼인 인간이었다.
복도에는 이미 줄이 생기고 있었다. 민원실 앞이었다. 식수 제한 문의, 요금 이의신청, 의료 예외 허가 요청, 어린이 구획 우선 배정 확인.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숨을 지키려 했다. 한 남자가 벽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어떤 여자는 단말을 붙들고 누군가와 다투고 있었다. 아마 지구 쪽 친척이거나, 거래선이거나, 이미 돈을 받을 수 없는 누군가일 것이다.
서진의 단말엔 새 파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선착장 2번 접안 기록. 보조 산소 전환 로그. 탱크 재충전 이력. 화물 목록. 승인 코드. 그 사이에 개인 경고문도 하나 끼어 있었다.
자발적 절약 프로그램 참여 시 요금 감면. 고강도 노동 시간 조정 권고. 불필요한 외출 자제.
그는 피식 웃었다.
정비사에게 외출을 자제하라니, 화재 진압반에게 불 가까이 가지 말라고 조언하는 셈이었다.
서비스 데크 창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라그랑주 정거장 바깥으로 검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멀리 지구가 보였다. 푸르고, 둥글고, 부유하고, 숨 쉬기 쉬워 보였다. 저 아래 사람들에겐 대기라는 것이 공공재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무도 들이마신 숨의 단가를 생각하지 않는 세계. 그런 행성에서 올라온 기업이 이제 정거장 사람들의 폐까지 가격표를 붙여 파는 중이었다.
서진은 지구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화가 났고, 화가 나면 계산이 흐려졌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선착장 쪽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의 일은 낡은 모듈 하나 갈아 끼우는 것으로 끝날 예정이었다. 점심쯤엔 배급 식판이나 들고 투덜대고, 교대가 끝나면 침대에 누워 다음 달 청구서를 욕하면 그만이었다. 그 정도면 라그랑주에서 꽤 평화로운 하루였다.
그런데 이제 정거장 전체의 숨이 사흘짜리 계산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계산을 틀리게 만들고 있었다.
서진은 공구가방을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금속 바닥이 구둣발 아래에서 짧게 울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살아 있는 도시의 뼈가 내는 소리.
그는 그 소리를 믿었다. 사람보다 기계를 더 믿는 게 아니라, 적어도 고장 난 기계는 고장 난 자리를 남기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흔적을 지우려 든다. 계정을 바꾸고, 기록을 수정하고, 비용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정거장은 지금 숨값이 올랐고, 누군가는 그 틈에서 더 큰돈을 벌 기회를 봤을 것이다. 그런 일은 언제나 있다. 세상이 흔들리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건 구원자가 아니라 계산기다.
선착장 구역 차단문이 열렸다. 차가운 금속 냄새와 함께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멀리 접안 클램프가 번들거렸고, 2번 선착장 표시등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서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정거장이 사람을 시험하는 방식은 언제나 단순했다. 숨을 값을 매기고, 그 값을 누가 치를지 묻는 것.
오늘은 그 질문이 정거장 전체에 떨어졌다.
윤서진은 평범한 정비사였지만, 평범한 정비사가 해야 하는 일 중에는 가끔 이런 것도 포함됐다.
누가 우리 공기를 훔쳐 갔는지 밝혀내는 일.
그리고, 사흘 안에 모두가 계속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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