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거버넌스는 흔히 브뤼셀의 규제나 빅테크의 모델 정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장 따라 하기 쉬운 운영 규칙은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중 하나인 바티칸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바티칸 시국은 2025년 1월부터 내부 AI 가이드라인을 시행했고, 5인 위원회를 두어 후속 법·시행 규정을 준비 중입니다.12
이게 중요한 이유는 상징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교황은 사제들에게 AI로 강론을 쓰지 말라고도 했습니다.3 즉, 바티칸은 "AI를 써도 된다"와 "여기서는 인간이 직접 해야 한다"를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조직이 아직 추상적 원칙에 머무는 사이, 바티칸은 신뢰가 걸린 업무를 기준으로 선을 긋고 있는 셈입니다.
작은 기관이 오히려 더 쓸모 있는 규칙을 만드는 이유
확인된 사실부터 보죠. 바티칸 가이드라인은 단순한 선언문이 아닙니다. 적용 대상이 분명합니다. 행정, 박물관, 보건, 법무, 보안, 우편, 시설 관리뿐 아니라 외부 계약자까지 포함합니다.24 또 AI 생성 텍스트·음악·사진·영상·라디오 콘텐츠에는 AI 사용 사실을 표시하도록 했고, 의료에서는 환자에게 AI 사용을 알려야 하며, 사법 영역에서는 법 해석·사실 판단·판결은 인간 판사가 전담하도록 못 박았습니다.45
이 구조가 실무적으로 강한 이유는 AI 정책을 "기술 규정"이 아니라 "역할 배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 자동화할지보다, 어떤 결정은 끝까지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지를 먼저 정합니다. 대기업 문서에서 자주 보이는 "책임 있는 AI"보다 운영자 입장에서는 훨씬 실행하기 쉽습니다.
학교, 언론사, 비영리, 지방정부에 이 점이 특히 유용합니다. 이 조직들은 보통 자체 모델을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외부 AI 도구를 가져다 씁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최첨단 모델 평가 프레임워크보다 "어떤 업무에 금지선이 있는가"를 정하는 내부 규칙입니다.
바티칸 프레임워크에서 바로 가져올 수 있는 5가지 규칙
첫째, 신뢰를 대신할 수 없는 말은 AI에 맡기지 말 것. 강론 금지는 종교 조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3 학교라면 추천서, 언론사라면 사설, 공공기관이라면 공식 입장문, 병원이라면 환자 설명 문서가 여기에 가깝습니다. 정보 전달은 AI가 도울 수 있어도, 책임과 진정성이 핵심인 발화는 인간이 써야 합니다.
둘째, 대외 콘텐츠에는 AI 사용 사실을 표시할 것. 바티칸의 "IA" 표기는 거창한 기술 통제보다 신뢰 장치에 가깝습니다.4 모든 산출물을 다 공개하라는 뜻이 아니라, 독자가 사람의 말과 기계의 합성을 구분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뜻입니다.
셋째, 고위험 판단은 "보조만 허용, 결정은 인간"으로 설계할 것. 바티칸은 사법과 의료에서 이 선을 분명히 했습니다.45 채용, 징계, 복지 심사, 학생 평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넷째, 금지 사례를 추상어가 아니라 사용 시나리오로 쓸 것. 바티칸은 차별, 장애인 배제, 심리적 조작, 공공질서 침해, 범죄 조장 등을 금지했습니다.24 "윤리적으로 사용한다"보다 훨씬 낫습니다. 금지 항목이 실제 상황으로 번역돼야 직원이 이해합니다.
다섯째, 위원회 없이 정책만 만들지 말 것. 바티칸은 5인 AI 위원회를 두고 위험 보고와 반기별 점검을 맡겼습니다.25 작은 조직도 이름만 거창한 위원회가 아니라, 법무·IT·현업 3인 리뷰 체계만 있어도 효과가 큽니다.
강한 원칙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보완이 필요하다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인간 존엄"과 "공익"은 방향은 좋지만, 고객지원 챗봇의 허용 범위나 직원 감시형 AI의 임계값 같은 세부 운영 기준까지 자동으로 풀어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AI 사용 고지"는 필요하지만, 어디까지가 단순 보조이고 어디부터 생성 콘텐츠로 봐야 하는지 조직마다 경계가 다릅니다.
또 바티칸 모델은 규모가 작고 권한 구조가 명확한 조직에 잘 맞습니다. 반대로 다국적 기업이나 지방정부처럼 이해관계자가 복잡한 곳에서는 기록 보존, 이의제기 절차, 벤더 감사, 데이터 반출 통제까지 더 촘촘한 규정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바티칸 프레임워크는 완성본이라기보다, 가치와 운영 규칙을 연결하는 좋은 출발점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신호는 분명합니다. AI 정책은 이제 법무 문서가 아니라 평판 전략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는 무엇을 자동화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지가 신뢰를 가르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사례를 봐야 하는 사람은 기술 회사만이 아닙니다. 학교, 병원, 언론사, 재단, 지자체처럼 "정확함"보다 "신뢰받는 인간 판단"이 더 중요한 조직들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첫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 조직에서 AI를 써도 되는 업무가 아니라, AI가 대신하면 안 되는 말과 결정은 무엇인가.
참고
1The Governorate of Vatican City State's Guidelines on Artificial Intelligence
2Vatican City State puts AI guidelines in place
4The Principles behind the Guidelines on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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