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왕궁 아래의 하늘

도시가 불타면 그림자도 숨을 곳을 잃는다
수도에 도착했을 때, 리라는 제일 먼저 하늘부터 올려다봤다.
북쪽은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는데도 붉었다. 구름 밑이 타고 있었다. 성벽 바깥의 시장 거리부터 왕궁을 둘러싼 귀족 구역까지, 불길은 성질 나쁜 짐승처럼 골목을 옮겨 다니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는 종소리인지, 비명인지, 무너지는 지붕 소리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도시는 망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왕궁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서 있었다.
높은 첨탑 몇 개가 부러지고, 유리 돔이 반쯤 깨져 있었지만, 궁전의 중심부는 마치 누가 억지로 붙잡아 두는 것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검푸른 빛이 왕궁의 벽을 따라 가느다란 핏줄처럼 흐르고 있었다. 살아 있는 건물 같았다.
다비가 재를 털어 내며 말했다.
"좋네. 궁전이 그냥 건물이 아니고 기분 나쁜 생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확실해졌어."
카엘은 무너진 성문 너머를 살폈다.
"정문은 안 된다. 서쪽 회랑은 반란군이 물고 있을 테지만, 거긴 왕실 근위도 몰릴 거다."
리라는 불길 사이의 골목을 훑었다. 어릴 때부터 수도의 뒷골목은 그녀한테 지도보다 정확했다. 사람들은 늘 대로를 기준으로 도시를 기억하지만, 도둑은 아니다. 도둑은 빵집 굴뚝이 어느 지붕보다 낮은지, 세탁소 뒤 담장이 얼마나 썩었는지, 귀족 저택들이 부끄러운 물건을 어디로 숨기는지로 도시를 외운다.
그녀는 턱으로 왕궁 동쪽 아래를 가리켰다.
"하수로."
다비가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네가 길을 안다는 건 늘 냄새나는 길이란 뜻이지."
"이럴 때 가장 믿을 만한 길도 그런 길이야."
카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곧장 타다 남은 마차들을 돌아 골목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수도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뛰고 있었고, 반란군은 왕실 깃발이 보이는 곳마다 돌과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어느 지붕 위에서는 검은 연기 사이로 도둑들의 신호등이 짧게 번쩍였다. 리라는 그 빛을 보고 잠깐 입꼬리를 움직였다.
세상이 끝나도 도둑은 신호를 남긴다.
조금 위로가 되는 사실이었다.
하수로 입구는 오래전에 폐쇄된 포도주 창고 바닥 밑에 있었다. 다비가 썩은 통 하나를 걷어차자 나무판이 드러났고, 리라가 칼끝으로 녹슨 걸쇠를 젖히자 아래에서 눅눅한 공기가 확 올라왔다.
"내가 먼저 갈게." 리라가 말했다.
카엘이 그녀의 팔을 한 번 잡았다.
"안이 이상하면 바로 올라와."
리라가 피식 웃었다.
"기사님, 내 직업이 원래 이상한 데 먼저 들어가는 거야."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아래로 몸을 내렸다.
하수로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도시가 불타고 있는데도, 이 아래만은 오래전부터 시간에 버려진 장소 같았다. 물은 무릎 아래로 얕게 흘렀고, 벽면의 오래된 돌들은 촛농처럼 검게 변색돼 있었다. 문제는 냄새가 아니었다.
심장별이었다.
리라의 가슴 안에서 그것이 왕궁을 향해 점점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치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쿵.
쿵.
쿵.
그 박동이 벽으로 번질 때마다 어딘가 먼 아래에서 같은 박자가 되돌아왔다.
왕궁 아래에 있는 것은 단지 비밀 통로나 숨겨진 방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좌는 항상 무언가 위에 세워진다
하수로 끝의 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대신 녹아 있었다.
마치 안쪽에서 너무 뜨거운 손이 한 번 문고리를 움켜쥐고 비틀어 버린 것처럼, 두꺼운 철판이 흐물흐물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카엘이 조심스럽게 문을 밀자, 안쪽에는 왕궁의 오래된 저장고가 나타났다. 포도주 통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고, 먼지 쌓인 선반에는 푸른 재 같은 가루가 내려앉아 있었다.
다비가 손가락으로 가루를 문질러 보더니 곧장 닦아 냈다.
"별재야. 왕의 힘이 새면 저렇게 남아."
카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왕도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뜻이군."
"좋은 쪽 한계면 좋겠네." 다비가 중얼거렸다.
셋은 저장고를 지나 위층으로 연결된 비밀 계단을 올랐다. 거기서부터는 왕궁 내부였다.
그러나 리라가 아는 왕궁이 아니었다.
긴 회랑의 벽화들은 절반쯤 검푸른 그을음에 삼켜져 있었고, 황금 난간에는 마른 피가 번들거렸다. 바닥에는 근위병 시체와 정체 모를 검은 껍질이 뒤섞여 나뒹굴었다. 어떤 시체는 칼에 죽은 모양이었지만, 어떤 것은 피부가 안쪽에서 바싹 말라 들어 버린 듯 쪼그라들어 있었다.
다비가 시선을 돌렸다.
"왕실이 서로 싸운 게 아니야. 저건 뭔가가 빨아먹은 자국이야."
리라가 자기도 모르게 가슴께를 눌렀다.
별의 문 아래에 있는 것들.
첫 번째 왕의 기록 속에서, 형체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눈을 돌리게 만들던 그림자들이 떠올랐다.
카엘은 검을 빼 들었다. 금속이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울렸다.
"빨리 끝내야 한다. 봉인이 흔들리면 왕궁 아래가 먼저 열릴 거다."
문제는 왕궁이 그들을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중앙 계단으로 향하자, 회랑 끝에서 느리게 무언가가 걸어 나왔다. 왕실 근위의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다. 투구 틈새로 보이는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별빛도 아니고 불빛도 아닌, 너무 깊어서 색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두 개 떠 있었다.
다비가 낮게 욕했다.
"아. 저건 밤샘 근무의 결과치고 너무 심한데."
그 괴이한 근위는 한 명이 아니었다. 좌우 어둠에서 셋, 다섯, 일곱이 더 나타났다. 검을 들고 있었지만 발소리가 없었다. 살아 있는 병사들이 전열을 맞출 때 나는 금속성 긴장감도 없었다.
대신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리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속삭임이었다.
문 열어.
돌려줘.
아래로.
그건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심장별이 듣는 소리였다.
"리라!"
카엘의 외침과 함께 첫 번째 근위가 달려들었다.
싸움은 길지 않았지만 불쾌하게 빨랐다. 카엘의 검은 여전히 정확했고, 다비의 단검은 늘 그렇듯 비열할 만큼 효율적이었다. 문제는 괴물들이 쓰러져도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투구가 벗겨진 자리에서는 검은 안개만 흩어졌고, 그 안개는 바닥을 기어 리라의 발목에 달라붙으려 했다.
리라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가, 문득 허리춤의 별 모양 열쇠를 떠올렸다.
그녀가 열쇠를 쥐는 순간, 심장별이 뜨겁게 맥동했다.
열쇠의 빈 중심이 푸르게 빛났고, 그 빛이 안개를 스치자 근위 하나가 그대로 주저앉아 산산이 부서졌다. 갑옷 속이 애초에 비어 있었던 것처럼.
다비가 눈을 크게 떴다.
"오, 좋아. 세계가 망하는 와중에도 네 전용 도구는 성실하네."
리라는 대답 대신 열쇠를 다시 휘둘렀다. 푸른 선이 어둠을 가르며 지나갔고, 남은 것들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잠시 뒤 회랑에는 금속 조각과 식은 먼지만 남았다.
카엘이 짧게 말했다.
"왕좌로 간다."
왕궁의 가장 깊은 중심, 왕좌의 방은 의외로 문이 열려 있었다.
거대한 이중문 안쪽으로 들어선 순간, 리라는 걸음을 멈췄다.
예전의 알현실은 없었다.
아니, 형체는 남아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어 있었다. 높은 천장은 가운데가 길게 갈라져 있었고, 그 틈으로는 밤이 아니라 검푸른 빛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왕좌 뒤 벽에 걸려 있던 거대한 왕가 문장은 반쯤 찢겨 나가 있었으며, 검은 금이 바닥 전체로 퍼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왕좌를 중심으로 이 궁전 전체를 거대한 자물쇠로 바꾸고, 너무 오랫동안 억지로 잠가 둔 것 같았다.
그리고 왕좌는 비어 있었다.
리라는 그 빈자리를 보고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다비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앉아 있어야 할 놈이 없을 때는 대개 더 나쁜 데 가 있는 거지."
카엘은 왕좌 앞으로 다가갔다. 바닥 문양 사이로 검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어 돌바닥을 짚었다가 곧 손을 뗐다.
"여기다. 왕좌 밑이 첫 문이야."
리라는 심장별이 시키는 대로 왕좌 앞으로 걸어갔다. 허리춤의 열쇠를 꺼내 바닥 중앙의 별자리 홈 위에 얹자, 홈이 정확히 맞물렸다. 딸깍.
그 작은 소리 뒤에 왕궁 전체가 숨을 들이쉬는 듯한 떨림이 왔다.
검푸른 금들이 동시에 빛났다. 왕좌가 천천히 뒤로 밀려났고, 바닥의 원형 문양이 갈라지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찬 공기가 올라왔다.
그 공기에는 흙냄새도, 곰팡이 냄새도 없었다.
대신 겨울밤 지붕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볼 때 맡게 되는, 너무 맑아서 차갑게 느껴지는 냄새가 있었다.
땅 아래에서 하늘 냄새가 났다.
리라가 아주 작게 말했다.
"미친 왕궁이네, 정말."
"이제 내려가면 더 미쳐 있을 거다." 다비가 답했다.
그 말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계단 끝에서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계단은 길었다.
처음에는 왕궁의 지하 저장고쯤 되는 깊이인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비밀 금고 정도겠거니 했다. 그러나 백 계단을 넘기고, 이백 계단을 내려가도 바닥이 보이지 않자, 리라는 슬그머니 숫자 세기를 포기했다.
벽도 바뀌었다.
윗부분은 사람이 다듬은 돌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돌이 아니라 검은 유리처럼 매끈한 재질이 이어졌다. 그 표면에는 별자리 비슷한 선들이 은빛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가까이 보면 별자리라기보다 거대한 자물쇠 내부 구조를 확대해 그려 놓은 것처럼 보였다.
카엘이 앞장을 서고, 다비가 뒤를 살폈다. 리라는 가운데에서 한 번도 손을 가슴에서 떼지 못했다. 심장별은 이제 거의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그것을 따라가느라 버거울 정도였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을 때, 셋은 동시에 멈춰 섰다.
그 아래에는 지하가 없었다.
하늘이 있었다.
거대한 공동의 천장 전체가 밤하늘이었다. 단지 별이 그려진 천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천 개의 별이 천천히 흐르고, 은빛 구름이 스쳐 가며, 멀리서는 유성 같은 빛줄기가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 하늘은 위에만 있지 않았다.
아래에도 있었다.
셋이 서 있는 발판 아래는 검고 투명한 바닥이었고, 그 너머로도 같은 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발밑에는 별이 있었고, 아주 먼 아래에는 구름이 떠 있었으며, 그 구름 틈 사이로 뒤집힌 탑 같은 것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위와 아래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기도 했고, 두 개의 하늘이 맞닿기 직전 잠깐 멈춰 선 장면 같기도 했다.
리라는 숨 쉬는 법을 잠깐 잊었다.
왕궁은 궁전이 아니었다.
뚜껑이었다.
땅 아래 이 거대한 하늘을 덮기 위해 지어진 뚜껑.
다비가 아주 드물게 농담을 잊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카엘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전장에서도, 용을 마주했을 때도, 그는 대개 먼저 판단하고 먼저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조차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느라 잠시 멈췄다.
신전은 그 하늘 한가운데 떠 있었다.
정확히는, 수많은 검은 다리와 고리와 사슬이 위아래의 하늘을 연결하며 중앙의 원형 제단을 떠받치고 있었다. 제단 주변에는 사람 키의 세 배는 되는 기둥들이 서 있었는데, 기둥 끝마다 금속 날개를 펼친 새 머리 조각이 달려 있었다. 그 새들은 모두 아래를 보고 있었다.
아래의 하늘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무언가를 감시하듯.
리라는 제단으로 이어지는 좁은 다리를 보았다. 다리 너머 중앙에는 봉인대가 있었다. 첫 번째 왕의 유언에서 들었던 바로 그 자리.
문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멀어 보이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쉽게 닿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심장별이 거기로 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동시에 도망치라고도 외치고 있었다.
신전은 오래된 진실을 숨기지 않고 매달아 둔다
셋이 다리 위로 발을 옮기자, 기둥에 새겨진 문자들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해석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심장별이 그 의미를 바로 리라의 머릿속에 밀어 넣었다.
이곳은 하늘 신전이었다.
첫 번째 왕보다도 오래된 시대, 인간이 아직 왕관보다 별을 더 두려워하던 시절에 세워진 장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알았다. 하늘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보는 푸른 하늘 위에 별의 바다가 있고, 그보다 더 깊은 아래에는 닫혀 있어야 할 또 하나의 하늘이 있다는 것을.
그 아래 하늘은 죽은 자의 세계도, 신들의 거처도 아니었다.
그냥 문 반대편이었다.
이 세계가 아니어야 할 것들이 닿는 자리.
리라는 기둥 하나에 손을 얹었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미지근했다. 살아 있는 피부처럼.
문자가 다시 흘렀다.
첫 번째 왕은 별을 훔쳐 문을 막았다.
그 뒤의 왕들은 자기 몸으로 뚜껑을 눌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뚜껑과 왕의 구분은 흐려졌다.
다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왕이 왕좌에 앉은 게 아니라, 왕좌가 왕을 삼킨 셈이네."
카엘의 손등 힘줄이 불거졌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왕을 섬겼다. 충성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낯섦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이해는 되는데, 이해되는 만큼 더 끔찍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폐하가 저렇게 변한 건가." 그가 낮게 말했다. "오래 살아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리라는 기둥에서 손을 떼었다. 그녀는 지금도 왕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수도를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목줄처럼 움켜쥔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왕은 단지 왕좌를 놓기 싫어한 괴물이 아니었다.
괴물 같은 선택을 너무 오래 하도록 묶여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 사실이 칼을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칼 끝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다.
그때 아래의 하늘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구름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
리라는 투명한 바닥 너머를 내려다보다가 목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 멀어서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별들이 그 주위를 둥글게 비켜 흐르고 있었고, 빛이 그 부분만 묘하게 꺼졌다. 눈으로 확인하기보다 본능으로 먼저 알아차리게 되는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다비도 봤는지 숨을 삼켰다.
"저건 그냥 문이 아니잖아."
"문은 원래 빈 곳이야." 리라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저건 빈 곳이 아니네."
그 순간 아래에서 속삭임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더 분명했다.
리라.
그 목소리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죽은 도둑 친구의 목소리, 어린 시절 자신을 팔아넘긴 장물아비의 목소리, 시장에서 스쳐 지나간 이름 모를 아이의 울음소리, 심지어 한 번도 직접 만나 본 적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것까지 뒤섞여 올라왔다.
돌려줘.
내려와.
하나만 더 열면 돼.
리라는 그대로 얼어붙을 뻔했다. 그러자 카엘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보지 마." 그가 말했다. "대답도 하지 마."
다비는 재빨리 귀에 천 조각을 욱여넣었다. "이럴 때는 듣는 척 안 하는 게 최고야."
리라는 억지로 시선을 떼고 앞으로 걸었다.
도둑은 원래 잠긴 문 앞에서 설렌다.
그런데 이 문은 달랐다.
이건 열리면 안 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열 수 있는 손이, 지금 리라 자기 손이었다.
그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심장별은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리라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중앙 제단에 가까워질수록 신전이 깨어났다.
기둥 사이로 얇은 빛줄기들이 뻗어나와 봉인대 위에서 둥근 고리를 만들었고, 발밑 하늘에서는 별들이 한 점으로 천천히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단 중앙에는 심장 하나를 겨우 올려둘 만한 홈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 작고 단순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세계의 운명이 달린 자리가, 겨우 손바닥만 한 홈이라니.
리라는 봉인대 앞에 섰다. 열쇠는 이미 허리춤에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심장별이 문제였다.
그것은 그녀 몸 안에 있었다.
꺼내야 했다.
다비가 먼저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는 농담하지 않았다.
"리라. 설마…"
리라가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응. 나도 딱 그 생각 했어. 아주 별로야."
카엘이 봉인대를 살피더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꺼내면 네가 죽을 수도 있다."
"안 꺼내면 다른 쪽이 더 많이 죽겠지."
그녀는 그것을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말끝이 조금 떨렸다.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리라는 늘 살기 위해 도망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까지 와서야, 자기가 정말 어디까지 왔는지 실감이 났다.
보석을 훔치고, 목숨을 걸고, 왕과 계약하고, 용을 만나고, 숲과 시장과 탑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가슴에서 별을 꺼내야 한다.
이건 정말 도둑치고 너무 멀리 온 인생이었다.
리라는 웃음 비슷한 숨을 내쉬고 봉인대에 손을 얹었다.
심장별이 즉시 반응했다.
고통은 칼날처럼 오지 않았다.
도리어 손 안의 실을 누군가 천천히, 끝도 없이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가슴뼈 사이에서 뜨거운 것이 미끄러져 올라왔고, 그녀는 숨을 들이쉬다 말고 허리를 굽혔다. 입에서 피 대신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다비가 욕을 내뱉으며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봉인대에서 뻗은 빛줄기가 리라 주위를 둥글게 감싸 접근을 막았다.
카엘이 검으로 빛을 끊으려 했으나 검끝은 튕겨 나갔다.
리라는 혼자였다.
아래의 하늘이 크게 요동쳤다.
속삭임이 환호로 바뀌었다.
열려.
열려.
열려.
그 소리 속에서 리라는 자기 안의 별을 봤다.
처음 그것을 훔치던 밤의 장면, 탑에서 첫 번째 왕의 유언을 듣던 순간, 수도가 타는 광경, 카엘이 끝까지 검을 놓지 않던 얼굴, 다비가 겁먹은 척도 안 하면서 제일 먼저 옆에 서 주던 순간들이 번쩍번쩍 스쳐 갔다.
심장별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선택이었다.
누가 이 별을 쥐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 의지의 흔적이 겹겹이 남아 있었다.
리라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돌아가고 싶은 건 알겠어," 그녀가 헐떡이며 말했다. "근데 누구 마음대로야. 넌 내가 훔쳤잖아."
이상하게도 그 말은 심장별한테 먹혔다.
푸른 빛이 한 번 크게 요동하더니,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서 작은 별이 실체를 드러냈다. 맥동하는 푸른 심장. 피와 불과 밤을 한꺼번에 빚어 만든 것 같은 물체.
리라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뜨거웠다.
살아 있었다.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왜 첫 번째 왕이 도둑을 기다렸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남의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래서 더 절대로 함부로 놓지 않는 손.
리라는 비틀거리며 심장별을 봉인대 홈 위에 올렸다.
찰칵.
세상이 잠깐 멈췄다.
곧이어 열쇠가 저절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별 모양 홈과 빈 열쇠의 중심이 정확히 맞물렸고, 봉인대 전체에 푸른 금이 퍼져 나갔다. 제단을 잇는 다리들, 기둥들, 위아래의 하늘을 묶고 있던 사슬들, 그리고 멀리 왕궁 천장까지 빛이 번졌다.
아래의 하늘에서 무언가가 크게 몸을 뒤틀었다.
이번에는 신전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빛이었다. 소리 없는 빛의 비명.
위의 하늘이 천천히 접히기 시작했고, 아래의 하늘은 더 멀어졌다. 두 하늘 사이에 벌어진 틈이 닫히고 있었다. 별들은 봉인대 주위를 소용돌이치며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리라는 무릎을 꿇은 채 겨우 고개를 들었다.
성공한 건가.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봉인대 중앙의 심장별 위로 검푸른 형체 하나가 떠올랐다.
왕이었다.
정확히는, 왕의 몸이 아니라 왕 안에 박혀 있던 별의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가슴 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에는 끝없이 깊은 금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금은 왕관도 심장도 향하지 않았다.
목을 향해 뻗어 있었다.
카엘도 그것을 봤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게 약점인가?"
봉인대가 대답했다.
문자가 빛으로 떠올랐다.
왕의 별은 심장이 아니다.
왕의 별은 맹세의 목에 박힌 못이다.
침묵을 끊는 자, 왕을 끝낸다.
다비가 가장 먼저 이해했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서 안 죽었던 거네. 가슴을 몇 번을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소용없었겠지. 별이 목에 박혀 있으면."
카엘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그는 누구보다 왕의 전투 방식을 잘 안다. 왕은 늘 목을 가리는 높은 깃과 금속 보호대를 하고 싸웠다. 위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왕가의 상징이니까.
아니었다.
그건 약점을 숨기기 위한 갑옷이었다.
리라는 아직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골랐다. 가슴은 비어 있었고, 동시에 묘하게 가벼웠다. 심장별이 봉인대 안에서 뛰는 박동이, 이제는 자신의 몸 바깥에서 들려왔다.
쿵.
쿵.
그때 왕궁 위쪽 어딘가에서,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검푸른 빛이 한순간 사방으로 폭발했다가 급격히 약해졌다.
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쐐기가 빠졌다. 왕의 별이 더는 봉인을 붙들고 있지 않아."
다비가 짧게 내뱉었다.
"좋아. 그럼 이제 저 인간은 드디어 죽을 수 있다는 거지."
"아니." 리라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그녀 자신도 말한 뒤에야 알았다.
봉인대 뒤편의 어둠에서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느리고, 무겁고, 익숙한 발소리.
카엘은 즉시 몸을 돌려 검을 들었다. 다비도 단검을 뽑았다.
어둠 끝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왕이었다.
왕은 무너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너질 차례를 미뤄 온 사람 같았다
리라가 마지막으로 왕을 봤을 때보다, 그는 더 늙어 있었다.
아니, 늙었다기보다 오래 버틴 흔적이 겉으로 터져 나온 모습에 가까웠다. 왕의 검푸른 예복은 여러 군데 찢겨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피부에는 검은 금이 번져 있었다. 마치 몸 안쪽에서 유리가 깨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눈 밑은 깊게 꺼졌고, 금빛이던 눈동자 가장자리에는 검푸른 빛이 번쩍였다.
그런데도 그는 서 있었다.
왕은 봉인대 위의 심장별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분노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먼저 알아보는 사람의 피로가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갈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 쇳조각을 삼키며 말해 온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카엘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폐하."
왕은 그를 보더니, 아주 짧게 웃었다. 비웃음도 아니고 반가움도 아닌, 오래전에 버린 감정을 흉내 내는 웃음이었다.
"너는 끝내 내 앞에 다시 서는군. 기사로도, 반역자로도 아닌 얼굴로."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왕의 시선이 리라에게 옮겨졌다. 봉인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도둑, 가슴에서 별을 꺼내 세계의 문을 닫아 버린 사람. 그 시선은 기묘하게 차분했다.
"네가 돌려놨구나."
리라는 입가의 피를 닦았다.
"네가 훔치게 만든 걸, 내가 제자리에 둔 거지."
왕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위엄 있는 침묵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지키던 짐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 빈 무게를 이해하려는 침묵이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하군."
그 말은 이상할 만큼 쓸쓸했다.
리라는 그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
오랫동안 그의 몸 안에서 울리고 있었을 검푸른 별의 압력, 문을 붙들던 소음, 끝없는 속삭임과 통증이 방금 사라진 것이다. 왕은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니 왕이 된 뒤 처음으로, 자기 머릿속이 조용해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 사실은 조금도 그를 불쌍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더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일 수 있다.
왕의 손이 천천히 목으로 올라갔다. 높은 깃 아래를 누르는 손끝이 아주 약하게 떨렸다. 그도 느낀 것이다. 자기 안의 별이 이제 더는 세상을 붙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카엘이 검을 고쳐 쥐었다.
왕은 그 움직임을 보고 시선을 들었다.
"그래. 이제야 가능하겠지." 그가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의 눈이 리라에게 닿았다.
"도둑. 너는 문을 닫았고, 기사는 칼을 들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아주 오래 미뤄 둔 일 하나뿐이군."
다비가 날카롭게 말했다.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이 있으면 감동받을 텐데."
왕은 처음으로 다비를 보았다. 그리고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얌전히 살았던 적도 없다."
바닥이 울렸다.
봉인대에서 퍼진 푸른 빛과 왕의 몸에 남은 검푸른 균열이 서로 반발하듯 부딪혔다. 신전 위아래의 하늘이 동시에 흔들렸고, 멀리 어딘가에서 용의 울음 같은 굉음이 내려왔다. 왕궁 위에서조차 무언가가 이 변화를 느낀 것이다.
카엘은 낮게 말했다.
"리라. 물러서."
리라는 일어나려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다비가 그녀를 붙잡았다.
"서 있을 수 있겠어?"
"죽지만 않으면 돼."
"아주 훌륭한 기준이네."
왕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 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너무 오래 쓰여 아름다움이 저주처럼 남은 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라도 볼 수 있었다. 칼을 쥔 그의 손목보다, 높은 깃 아래 목의 오른쪽이 더 어둡게 빛난다는 것을.
거기였다.
왕의 별.
왕을 살게 만든 못.
침묵을 끊는 자리.
리라는 숨을 고르며 그 광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상의 비밀은 생각보다 우아하지 않았다.
하늘 아래 또 다른 하늘이 있고, 왕궁은 그 위에 올려진 뚜껑이며, 왕은 세상을 붙들기 위해 자기 목에 별을 박은 사람의 후예였다.
그리고 이제 그 못을 빼야만 한다.
너무 오래 늦춰 온 끝을, 드디어 끝내야 한다.
왕이 검끝을 들었다.
카엘도 자세를 낮췄다.
봉인대 위 심장별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리라는 그 박동을 들으며, 왕을 죽이는 방법을 마침내 정확히 이해했다.
심장을 찌르는 게 아니다.
왕좌를 부수는 것도 아니다.
그를 왕으로 묶어 둔 맹세의 못, 목에 박힌 별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충성했던 기사만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리라는 카엘을 바라봤다.
카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왕이 움직였다.
오래 미뤄 둔 죽음은 가장 날카로운 얼굴로 돌아온다
검푸른 번개 같은 일격이 다리 위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카엘이 정면에서 받아냈고, 금속 충돌음이 신전의 위아래 하늘에 동시에 울렸다. 충격이 너무 커서 바닥의 별들이 한순간 파문처럼 흔들렸다. 다비는 리라를 끌어 제단 뒤편으로 물렸고, 왕과 카엘의 검은 중앙 다리 위에서 다시 한번 맞부딪혔다.
한때 같은 편이었던 두 사람의 칼길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막고, 읽고, 비틀고, 다시 찌르는 동작 하나하나에 오래된 습관과 배신과 이해가 겹쳐 있었다.
왕의 몸은 이미 균열투성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무너질 것을 아는 사람은 망설임이 적다.
카엘의 어깨를 스쳐 피가 튀었다.
왕의 목깃도 반쯤 찢어졌다.
그 틈에서 검푸른 빛이 번쩍였다.
리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약점이 드러났다.
동시에 너무 위험한 자리라는 것도 분명해졌다.
왕은 그것을 눈치채고 입꼬리를 올렸다. 피곤하고 서늘한 미소였다.
"그래. 이제 보이는가."
카엘은 숨을 몰아쉬며 검을 들었다.
왕이 낮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와라. 네가 내 목에 맹세를 세웠던 그날처럼. 이번에는 끝까지."
신전 위의 하늘에서 별 하나가 길게 떨어졌다.
리라는 제단 난간을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왕궁 아래의 하늘은 이제 닫히고 있었다.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세상을 붙들던 왕의 시대를 끝내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은, 이미 그들의 눈앞에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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