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첫 번째 왕의 유언

유언은 종이보다 오래 버티는 방식으로 남는다
리라의 손바닥이 검은 석함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금속이 먼저 그녀를 알아봤다.
딸깍,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는 이상하게도 탑 전체를 흔들 만큼 또렷했다. 벽에 새겨진 이름들이 희미하게 빛났고, 천장 어딘가를 돌던 빛의 강이 한순간 느려졌다. 마치 탑이 숨을 참고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보통 안 좋은 게 튀어나오지 않나?" 다비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카엘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대답했다.
"좋은 것도 튀어나올 수 있다."
다비가 코웃음을 쳤다.
"고대 탑에서? 기사님은 생각보다 낭만적이네."
리라는 둘의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석함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이었다.
푸른빛도, 검푸른빛도 아니었다.
그건 별빛에서 색만 걷어 낸 것 같은 빛이었다. 너무 맑아서 차갑고, 너무 차가워서 도리어 뜨거운 종류의 광채. 석함 뚜껑이 천천히 열리자 안에는 종이도, 왕의 반지도, 금괴도 없었다.
대신 세 가지가 놓여 있었다.
첫째는 검은 금속판 하나였다. 얇고 길쭉했으며, 표면에는 아주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둘째는 손바닥만 한 수정 구슬이었다. 안쪽에 하늘을 잘라 넣은 것처럼 옅은 금빛 안개가 떠다녔다. 셋째는 열쇠처럼 보이지만 열쇠라고 부르기엔 너무 낯선 물건이었다. 금속 고리의 가운데가 텅 비어 있었고, 빈자리에는 작은 별자리 모양의 홈들이 파여 있었다.
리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셋 중 하나는 분명 날 귀찮게 만들겠지?"
다비가 바로 말했다.
"셋 다겠지. 고대인들은 늘 세트 상품을 좋아했어."
카엘은 검은 금속판을 들어 표면의 문자를 읽으려 했다. 하지만 글자는 일반적인 고어가 아니었다. 읽히는 척하다가 슬쩍 모양을 바꾸고, 의미를 잡으려 하면 다음 줄이 달라졌다. 보는 사람을 시험하는 문자였다.
그때 리라의 심장별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쿵.
석함 안의 수정 구슬이 그 박동에 답하듯 빛났다.
다음 순간 홀 중앙의 공기가 접히며, 사람 하나가 서 있는 형상이 나타났다.
왕관을 쓴 노인이 아니었다.
피 묻은 외투를 걸친 젊은 남자였다. 왕이기보다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보였다. 얼굴에는 칼자국이 있었고, 눈 밑에는 며칠째 잠들지 못한 사람의 그늘이 깊었다. 그런데도 그의 등은 꺾이지 않았다. 오래 버틴 사람의 자세였다.
그 남자는 리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언젠가 나타날 누군가를 향해 만들어 둔 시선이었다.
"내 말을 듣는 자가 있다면," 형상이 말했다. "너는 내 후손이 아니고, 내 기사도 아니며, 내 허가를 받은 자도 아닐 것이다. 다행이다. 그 셋은 너무 쉽게 거짓말을 배운다."
다비가 작게 감탄했다.
"오. 시작이 꽤 마음에 드네."
형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첫 번째 왕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왕의 명령이 아니라, 한 죄인의 유언이다."
홀 안의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리라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첫 번째 왕의 형상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아주 피곤하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훔친 것은 왕관이 아니라 별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키려 한 것은 왕국이 아니라 세계였다."
왕이 처음 훔친 것은 하늘의 불이 아니었다
수정 구슬 안의 금빛 안개가 퍼지며 형상 뒤로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지금의 수도가 생기기 전, 궁전이 세워지기 전, 왕국이 왕국이라 불리기 전의 땅이었다.
검은 평원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덩이가 뚫려 있었다. 땅이 무너진 모양이 아니라, 누군가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리다 실패한 흔적 같았다. 구덩이 안쪽에는 별빛이 아니라 어둠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 어둠은 그냥 검은색이 아니었다. 너무 깊어서 색을 삼켜 버리는 종류의 검음이었다.
그 위 하늘에는 금이 가 있었다.
리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하늘이 찢어진다는 말은 그동안 비유로만 들었다. 그런데 눈앞의 기록 속 하늘은 정말 갈라져 있었다. 푸른 창공 뒤에 또 다른 하늘이 있었다. 낯설고,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아래를 향해 떨어지는 별무리의 바다.
카엘이 낮게 말했다.
"저게…"
첫 번째 왕이 그의 말을 대신 이었다.
"문이다. 땅 아래에 잠긴 하늘, 세상 바깥의 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 장소. 오래전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심연, 바깥, 뒤집힌 창공. 나는 가장 쉬운 이름 하나만 남기겠다. 다른 세계다."
기록 속 젊은 왕은 아직 왕이 아니었다. 그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갑옷은 깨지고, 깃발은 타고, 얼굴에는 공포가 있었다. 그 공포는 적군을 보는 병사의 표정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 구덩이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손도, 발도, 날개도 분명하지 않은 그림자들. 형체가 잡히려 하면 풀어지고, 짐승처럼 보이다가 사람의 얼굴을 닮고, 다시 성문만 한 입처럼 벌어지는 것들. 기록은 세부를 선명하게 보여 주지 않았다. 아마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너무 정확히 보면 보는 사람까지 기억해 버릴 종류의 괴물이었으니까.
다비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꿈에서 나오면 그냥 평생 잠 안 자고 살겠다."
첫 번째 왕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
"그날 밤,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적국의 군대를 무너뜨렸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우리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봉인이 약해진 틈을 타, 문 아래의 것들이 우리 세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록 속 젊은 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떨어지는 별 하나가 금 간 하늘 틈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불길처럼 보였지만 불은 아니었다. 너무 밝아서 도리어 형태가 없는 빛이었다.
"나는 그 별을 훔쳤다."
그 말과 함께 기록 속 젊은 왕이 절벽 끝으로 달렸다.
누군가가 막으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떨어지는 별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고 팔 전체에 푸른 금이 번졌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별은 그의 몸을 부수려 했고, 그는 별을 꺾으려 했다.
둘 중 누가 먼저 포기할지 겨루는 싸움 같았다.
결국 포기한 것은 별이 아니었다.
인간 쪽이 더 미쳤던 것이다.
리라는 이상한 전율을 느꼈다. 처음 심장별을 훔쳤던 밤, 자기 손안에 떨어진 푸른 불덩이와 눈앞의 기록이 겹쳐졌다. 닮은 점이 있었다.
허락받지 않고 잡는 손.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놓지 않는 손.
도둑의 손이었다.
심장별은 보물이 아니라 자물쇠의 혀였다
기록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구덩이 위에 거대한 장치가 세워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탑의 원형이었다. 둥근 고리들, 별자리처럼 정교한 톱니, 빛을 모으는 검은 돌기둥들.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무너지는 동안, 첫 번째 왕은 손에 넣은 별을 그 장치 가운데에 박아 넣었다.
하지만 별 하나로는 문이 닫히지 않았다.
문은 하늘보다 컸고, 인간은 하늘보다 작았다.
그래서 첫 번째 왕은 별을 둘로 갈랐다.
형상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자기 죄를 설명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가장 어리석고 잔인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지는 세계의 멸망뿐이었다. 나는 별의 심장을 떼어 내 문을 닫는 열쇠로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불을 내 피와 왕좌에 묶어, 봉인이 깨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수정 속 장면이 또렷해졌다.
별의 가장 밝은 중심부가 뽑혀 나왔다. 작은 푸른 맥동, 살아 있는 심장 같은 별 조각. 그것이 장치의 한복판에서 천천히 식으며 지금 리라의 가슴 안에 있는 심장별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리라는 본능적으로 자기 가슴을 눌렀다.
심장별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저게… 나라고?" 리라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 안에 있는 그것의 처음이지." 카엘이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기록 속 첫 번째 왕은 자기 가슴에 남은 검푸른 불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그의 혈관이 어둡게 빛났고, 왕관 없는 이마 위로 검은 문양이 번졌다.
"왕의 별은 문을 붙드는 쐐기였다. 심장별은 문을 닫고 여는 열쇠였다. 둘은 같은 별에서 태어났으나, 역할은 다르다."
다비가 입을 벌렸다.
"잠깐. 그럼 우리가 여태 보물이라고 쫓고, 왕이 빼앗으려 들고, 용이 먹으려 드는 게…"
리라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열쇠였다는 거네."
첫 번째 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그렇다. 심장별은 힘의 원천이 아니다. 원래 그것은 문을 여는 손잡이이자, 문을 완전히 닫는 마지막 혀다. 잘못 쓰이면 봉인을 찢고, 바르게 쓰이면 세계를 잠근다."
리라의 속이 서늘해졌다.
자기가 훔친 게 왕국의 귀한 보석이 아니라, 세상을 닫는 자물쇠의 핵심이었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늘 값비싼 물건을 훔쳐 왔지만, 보통은 들키면 감옥이나 목숨 정도가 문제였다.
이번에는 세계였다.
"왜 하필 도둑한테만 남긴 건데?" 리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왕이면 자기 후손한테 넘기면 되잖아. 기사든 사제든, 아무튼 좀 더 멀쩡한 쪽에."
형상의 시선이 잠깐 깊어졌다.
"후손은 물려받은 것을 자기 것이라 착각한다. 기사는 명령에 복종하고, 사제는 뜻을 포장한다. 그러나 도둑은 안다. 손에 쥔 것은 자기 것이 아니며, 훔친 것은 언젠가 값을 치른다는 걸. 문을 열 자와 문을 닫을 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정의가 아니라, 대가를 아는 감각이었다."
다비가 작게 툭 내뱉었다.
"재수 없게 맞는 말이네."
리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처음 별을 잡던 날 느꼈던 설명 못 할 감각을 이해했다.
심장별이 자기를 고른 게 아니었다.
자물쇠가, 자물쇠를 억지로 열 줄 아는 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지 않는 왕은 욕심만으로 버틴 것이 아니었다
형상은 손을 들어 벽면의 이름들을 가리켰다.
빛이 스르르 움직이며 수백 개의 이름을 훑었다. 어떤 이름은 또렷했고, 어떤 이름은 칼로 긁힌 듯 지워져 있었다.
"나는 왕가에 축복을 남긴 것이 아니다. 형벌을 남겼다."
그 한마디에 카엘의 표정이 굳었다.
첫 번째 왕의 목소리는 조금도 자기연민이 없었다. 그래서 더 무겁게 들렸다.
"문은 완전히 잠기지 않았다. 내가 훔친 별은 위대했으나 불완전했고, 인간의 피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래서 이후의 왕들은 대를 이어 내 몫을 물려받았다. 검푸른 별은 그들의 몸을 살렸지만, 살아남게 했을 뿐 사람답게 남겨 두지는 않았다. 오래 버틸수록 왕은 죽지 않는 자가 되고, 죽지 않는 자는 점점 왕국과 문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기록이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여러 시대의 왕들이 스쳐 갔다. 젊은 얼굴이 늙지 않고 버티는 동안 주위 사람들만 시들어 갔다. 어떤 왕은 선량해 보였고, 어떤 왕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눈에는 공통점이 생겼다.
너무 오래 깨어 있는 사람의 눈.
세상을 지킨다는 목적과 세상을 소유한다는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눈.
첫 번째 왕이 말했다.
"네가 만난 지금의 왕도 처음에는 수호자였을 것이다. 나처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푸른 별은 인간을 버티게 만들고, 버티는 동안 조금씩 비틀어 놓는다. 그는 나라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왕좌를 지키려 했고, 마침내 자기만이 문을 붙들 수 있다고 믿게 되었겠지."
리라의 목 안쪽이 타들어 갔다.
수도의 불길, 왕실 추적대, 피투성이 골목, 잡혀간 사람들, 무너진 집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분명 괴물 같은 짓을 했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그가 처음부터 단지 잔인해서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진실이 눈앞에 놓였다.
사람을 더 화나게 만드는 종류의 진실이었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리라가 마침내 터뜨렸다. "그가 세계를 지키려 했든 말든,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를 태운 건 사실이잖아."
"그렇다." 첫 번째 왕은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세계를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왕의 의무는 세계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세계 안의 사람들도 함께 지켜야 했다. 그러지 못한 순간, 그는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재앙이 되었다."
카엘이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왕에게 충성했던 기사였다. 배신했고, 등을 돌렸고, 이제는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들은 말은 그의 검보다 더 아프게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가 물었다.
첫 번째 왕의 시선이 그에게, 다비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라에게 닿았다.
"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왕이 붙들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유언의 마지막 문장은 칼보다 차가웠다
검은 금속판 위의 문자들이 마침내 또렷하게 고정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리라도 읽을 수 있었다. 글자는 마치 심장별의 박동에 맞춰 의미를 드러냈다.
첫 번째 왕의 유언은 길지 않았다.
짧고, 잔인할 만큼 정확했다.
형상이 한 줄씩 읽었다.
"심장별을 가진 자는 들어라.
왕을 먼저 죽이지 마라.
쐐기가 빠진 문은 열리고, 열쇠가 비어 있는 문도 열린다.
두 재앙 중 더 빠른 재앙은 늘 인간이 고른다."
리라는 식은땀을 느꼈다.
카엘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즉, 왕을 지금 죽이면…"
"문이 열린다." 첫 번째 왕이 말했다. "왕의 검푸른 별은 봉인의 마지막 쐐기다. 심장별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 쐐기부터 부러뜨리면, 문 아래의 하늘이 다시 열린다."
다비가 욕을 삼켰다.
"아주 좋네. 왕을 안 죽이면 도시가 망하고, 죽이면 세계가 망한다는 거잖아."
"대체로 오래된 비밀은 늘 이런 식이지." 리라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유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은 금속판 마지막 문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왕궁 아래, 첫 문이 열렸던 자리에 남은 하늘이 있다. 그 하늘 밑의 봉인대에 심장별을 걸어라. 그러면 문은 다시 잠기고, 왕의 별은 더는 필요 없어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왕은 죽을 수 있다."
홀 바닥이 낮게 울렸다.
탑 중앙의 돌판들이 저절로 갈라지며 아래층의 별지도가 드러났다. 수도의 윤곽, 무너진 성벽, 불타는 지구들, 그리고 왕궁 깊숙한 아래를 향해 내려가는 좁은 선 하나가 푸르게 빛났다.
선 끝에는 작은 문양이 찍혀 있었다.
하늘이었다.
땅 아래에 그려진 하늘.
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왕궁 아래의 하늘…"
카엘이 지도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이군. 수도로 돌아가서 왕궁 아래로 내려가야 해. 심장별을 봉인대에 걸고, 그 뒤에야 왕을 끝낼 수 있다."
다비가 바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수도가 아직 멀고, 중간에 왕실 추적대가 있고, 남쪽 하늘엔 굶주린 용이 돌고 있고, 왕궁은 아마 반쯤 무너졌을 거라는 거네."
리라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상하다. 하나도 쉬운 부분이 없네."
다비도 마주 웃었다.
"그게 네 인생이잖아."
짧은 농담이었지만, 셋은 그걸 듣고 잠깐 숨을 돌렸다.
그러나 리라는 웃음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유언의 마지막 의미가 뒤늦게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다.
왕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괴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몸으로 세상 문을 붙들고 있던 쐐기이기도 했다.
그를 쓰러뜨리는 일은 복수이자 구원이 될 수 있었다.
잘못하면 멸망도.
선악이 칼로 자른 듯 나뉘는 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옳은 선택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치러야 할 대가를 고르는 문제였다.
왕의 죄와 왕의 역할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왕의 형상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리라는 이상하게도 그가 사라지기 전에 꼭 하나를 묻고 싶었다.
"당신은 후회했어?"
형상이 잠시 멈췄다.
"별을 훔친 걸?"
"왕이 된 걸. 아니면, 이런 식으로 세상을 지킨 걸."
첫 번째 왕은 아주 오래된 사람답게, 대답하기 전에 잠깐 생각했다.
"둘 다 후회했다. 그러나 더 크게 후회한 것은, 내가 남긴 형벌이 결국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들을 왕좌에 묶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는 천천히 리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 뒤를 용서하지 마라. 이해하되, 용서하지는 마라. 그리고 왕을 죽여야 한다면, 그가 처음 왜 검을 들었는지만 기억해라. 마지막에는 그것조차 잊었을 테니까."
카엘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한 문장은 그에게 칼보다 무거웠다.
다비는 괜히 자루 끈을 고쳐 묶었다. 그녀답지 않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와 현실 계산이 동시에 머릿속을 차지할 때, 다비는 오히려 더 조용해졌다.
리라는 형상이 흐려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별로인 유산이네."
그러자 첫 번째 왕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너라면 훔친 걸 끝까지 책임질 것 같더군. 그래서 남겼다."
"누가 책임진대? 난 원래 들키기 전에 튀는 쪽인데."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
형상이 사라졌다.
홀 안에는 다시 차가운 정적만 남았다.
하지만 이제 그 정적은 비어 있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생긴 정적이었다.
돌아가야 할 곳은 가장 불타는 곳이다
탑 바닥의 별지도가 더 밝게 빛나더니, 수도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겹쳐졌다.
식성룡이었다.
용의 그림자가 왕궁 위를 맴돌 때마다 궁전 아래의 작은 하늘 문양이 불안하게 떨렸다. 왕의 검푸른 별도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봉인은 흔들리고 있었다.
카엘이 먼저 일어섰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다비가 즉시 석함 안의 물건들을 챙겼다. 검은 금속판은 천으로 감쌌고, 수정 구슬은 두툼한 가죽주머니에 넣었다. 별 모양의 빈 열쇠는 리라에게 던졌다.
리라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이건 또 뭐야?"
카엘이 금속판의 글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봉인대의 손잡이. 심장별이 제자리에 걸릴 때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다비가 말했다.
"쉽게 말하면, 또 네 일이네."
리라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이 정말 끝장나도 결국 도둑 일로 돌아오네."
"넌 그게 주특기잖아."
"내 주특기는 원래 지갑이었어. 세계는 아니었다고."
그 말에 다비가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카엘도 아주 작게 입꼬리를 움직였다.
리라는 지도 위 수도를 바라보았다.
불타는 지붕들, 무너지는 탑들, 그 아래 숨어 있을 또 하나의 하늘.
그리고 그 위에서 아직 버티고 있을 왕.
그는 악인이었다. 분명히.
그러나 이제 리라는 안다.
그가 단지 왕좌를 탐한 괴물이라서 저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세상을 구하려고 만든 형벌이, 대를 건너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죄를 씻지는 못한다.
다만 칼을 드는 손을 망설이게 만들 뿐이다.
그 망설임은 약함이 아니었다.
진실을 알게 된 사람의 무게였다.
리라는 별 모양의 열쇠를 허리춤에 걸고, 가슴께를 눌렀다. 심장별이 그 아래에서 불안하게 떨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수도로 돌아가자. 왕을 살리러 가는 것도 아니고, 죽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다비가 물었다.
"그럼 뭘 하러?"
리라는 탑 입구 쪽 어둠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문부터 잠그러."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별의 탑을 빠져나왔다.
밖의 하늘은 북쪽인데도 붉었다. 남쪽에서 번진 불빛이 구름 밑을 물들이고 있었다. 멀리, 아주 멀리서 땅이 한 번 더 울렸다.
왕이 아직 살아 있다.
오래는 아닐 것이다.
리라는 협곡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별의 탑은 말이 없었다. 할 말은 전부 끝낸 건물처럼 검고 조용했다.
대신 그녀의 가슴 안에서 심장별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돌아가라고.
늦기 전에.
리라는 이를 악물고 눈 덮인 경사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둑은 원래 닫힌 문을 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이번에는 세상이 다시 닫혀야 했다.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