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별의 탑으로 가는 길

북쪽으로 도망치는 법
도시는 아직 타고 있었고, 하늘은 아직 씹히고 있었다.
리라는 수도의 북문 밖 무너진 급수탑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조금 의심했다. 남쪽 하늘은 불에 물든 주홍색이었고, 그 위로는 식성룡의 그림자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멀리서 검푸른 번개가 한 번씩 솟구쳤다. 왕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뜻이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왕이 버티면 문도 버틴다.
왕이 무너지면 문도 흔들린다.
그리고 그 문이 열리면, 지금까지의 모든 불행은 차라리 소박한 편이었다.
리라는 부러진 별잠핀 대신 카엘이 급하게 감아 준 검은 천을 가슴께에 눌렀다. 그 아래에서 심장별은 여전히 거칠게 뛰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푸른 맥동이 번졌다. 이제는 감춘다고 해서 완전히 숨겨질 것도 아니었다. 별은 한 번 세상에 냄새를 들키면 전보다 더 집요하게 존재를 주장했다.
카엘이 급수탑 입구를 지키며 바깥을 살폈다. 다비는 말없이 자루를 뒤졌다. 빵, 말린 고기, 염분 덩어리, 부싯돌, 가는 밧줄, 작은 쇠못, 두툼한 장갑, 접는 냄비, 바느질 바늘, 약초, 훔쳐 온 왕실 나침반까지, 인간 하나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온갖 사소한 것들이 나왔다.
리라가 눈을 깜빡였다.
"너 이걸 다 언제 챙겼어?"
다비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네가 하늘 괴물한테 미끼 선언하던 동안."
"그걸 보고도 짐 챙길 생각이 났다고?"
"안 챙기면 죽으니까. 그리고 넌 원래 입으로 사고 치고, 내가 뒤에서 수습하잖아."
카엘이 낮게 말했다.
"그건 부정하기 어렵군."
리라는 피곤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봤다.
"좋아. 두 사람이 아주 합심해서 사람 모욕하는 재주가 늘었네."
그때 급수탑 그림자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모렌이었다.
왕실 장의사는 전보다 더 늙어 보였다. 장례복 소매는 찢어져 있었고,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그래도 눈빛만은 희미하지 않았다. 그는 품 안에서 길고 납작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검게 마른 뼈를 깎아 만든 상자였다.
"살아 있군."
리라가 말했다.
"지금은 그 말이 칭찬처럼 안 들려."
모렌은 리라 앞에 상자를 내밀었다.
"별의 탑으로 가라."
다비가 즉시 얼굴을 굳혔다.
"설마 진짜 있는 곳이야?"
"있다. 문제는 길이 매번 달라진다는 거지."
모렌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얇은 은판 여러 장이 포개져 있었다. 별자리처럼 구멍이 뚫린 판들이었고, 가장 아래에는 북쪽 대륙 끝 얼음 협곡이 기묘하게 새겨져 있었다. 협곡 너머는 지도라기보다 흠집에 가까웠다. 그 빈 자리 한복판에 탑 하나가 선 모양만 아주 작게 남아 있었다.
카엘이 물었다.
"왜 하필 거기지?"
모렌은 남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푸른 빛과 먹빛 그림자가 멀리서 다시 한번 부딪쳤다.
"첫 번째 왕이 별을 훔친 곳이 거기다. 정확히는, 훔친 별을 자기 피와 왕국에 묶은 곳. 지금 왕의 검푸른 별도, 네 심장 안의 푸른 별도, 전부 그 매듭에서 시작됐다."
리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매듭이면 풀 수 있다는 소리야?"
"잘 풀면."
"못 풀면?"
모렌이 잠깐 침묵했다.
"세상 끝 얼음 협곡 아래가 왜 그렇게 깊은지 알게 되겠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카엘은 그래도 핵심만 붙잡았다.
"별의 탑에 가면 왕과 식성룡을 동시에 막을 방법이 있나?"
"방법은 있다." 모렌이 말했다. "왕을 죽이지 않고도 별을 떼어낼 틀이 있다. 식성룡에게는 먹잇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두는 오래된 천문 장치도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탑은 왕의 피를 반기지 않는다. 기사도 믿지 않는다. 정당한 계승도 싫어한다."
모렌의 시선이 리라에게 향했다.
"훔친 자만 문을 연다."
리라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이 끝장나도 결국 도둑 일이네."
"네가 훔친 게 빵 자루였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이제 와서 그 말 하면 좀 억울한데."
다비가 은판 지도와 식량 자루를 한 번씩 보더니 짧게 숨을 뱉었다.
"좋아. 누군가는 가야 해."
카엘이 곧장 말했다.
"내가 간다."
"그건 당연하고." 다비가 말을 잘랐다. "문제는 누가 같이 가느냐지."
리라는 그녀를 봤다.
"다비. 넌 남아야 해. 벨크도 있고, 골목 사람들도 네 손 많이 탈 거야."
다비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너 북쪽 황야를 지도 한 장 들고 건널 수 있을 것 같아? 기사님은 얼음 위에서 멋있게 죽는 법쯤은 알겠지만, 얼지 않고 자는 법은 모를걸."
카엘은 묵묵히 인정했다.
"그건 맞다."
"봐."
리라는 잠깐 버티다가 결국 졌다. 애초에 다비는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모렌은 은판 맨 위에 올린 작은 수정침을 돌려 보였다. 바늘은 북쪽이 아니라 리라 쪽을 향해 떨렸다.
"이건 나침반이 아니다. 별침이다. 길을 찾는 게 아니라, 별과 가장 가까운 방향을 물어본다. 협곡 앞까지는 이게 안내할 거다. 그 뒤는 네 심장별이 알아서 반응할 거고."
그는 상자를 닫아 리라 손에 쥐여 주었다.
"기억해라. 별의 탑으로 가는 길은 똑바로 걷는 사람보다, 틀린 길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열린다."
리라가 중얼거렸다.
"말을 꼭 묘하게 하지."
"오래된 비밀은 대개 그렇게 말한다."
급수탑 밖 바람이 강해졌다. 남쪽에서 울리는 진동이 땅을 아주 약하게 떨었다. 식성룡이 다시 한 번 내려온 모양이었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리라는 상자를 허리춤에 묶었다. 카엘은 검과 밧줄, 다비는 식량과 도구를 챙겼다. 세 사람은 북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시는 뒤에 남았고, 불은 계속 탔다.
이상하게도 떠나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
살아서 돌아오면, 따뜻한 수프를 한 솥 비우고 싶다.
그 정도였다.
인간은 세계가 망하려는 날에도 생각보다 소박하다.
얼음은 사람보다 먼저 거짓말을 배운다
수도를 벗어난 지 이틀째 되던 날, 땅의 색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불에 그을린 갈색이었다. 그다음엔 바람에 씻긴 회색이 나왔고, 사흘째에는 흰색이 나타났다. 눈이라기보다 오래 죽어 있던 빛의 시체 같았다. 북쪽 벌판은 넓고 조용했고, 너무 조용해서 발소리조차 제 것 같지 않았다.
낮에는 차가운 햇빛이 눈을 찔렀고, 밤에는 하늘이 비어 보였다.
식성룡이 별을 먹고 있다는 소문은 수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북쪽으로 갈수록 사람들은 하늘을 더 오래 보지 않았다. 작은 마을에 들를 때마다 창문은 이른 저녁에 닫혔고, 아이들은 별 이야기 대신 입 다문 법부터 배웠다.
그 와중에도 다비는 대단했다. 그녀는 눈을 집어 들고도 그 아래 땅이 단단한지 아닌지 알아냈고, 발자국 한 줄만 보고도 사흘 전 지나간 사냥꾼과 오늘 새벽에 지나간 굶주린 짐승을 구별했다. 한 번은 리라가 얼어붙은 개울 위를 성큼성큼 건너려다가 다비에게 멱살 잡혀 뒤로 끌려왔다.
다비는 눈을 발끝으로 걷어 냈다. 그 아래 얼음이 아니라 얇은 서리만 덮인 검은 물이 나타났다.
"봐. 넌 원래 바닥을 너무 믿어."
리라가 투덜거렸다.
"도둑은 원래 지붕 위를 다녀서 그래."
카엘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젠 지붕도 없다. 적응해라."
"오늘은 정말 둘이 작정했지?"
그래도 입씨름은 도움이 됐다. 사람은 춥고 지칠수록 자꾸 어두운 생각을 오래 붙든다. 그럴 때 누군가 한마디 얄밉게 해 주면 차라리 살기 편했다.
나흘째 밤, 첫 번째 추적자가 왔다.
말발굽 소리가 아니라 종소리였다.
아주 작고 멀게 울리는 쇳소리. 카엘이 가장 먼저 칼집을 잡았다. 다비는 모닥불 위 냄비를 걷어 눈 속에 묻었다. 리라는 숨을 죽였다.
언덕 너머로 검은 등불 셋이 보였다. 불꽃이 아니라 푸른 연기 같은 빛이었다. 왕실 추적대가 쓰는 봉인등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 냄새가 아니라 별 냄새를 쫓는 등불.
리라는 이를 악물었다.
"벌써 따라왔네."
카엘이 짧게 말했다.
"불을 끄고 계곡 아래로 빠진다."
다비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등불은 아래로 숨는 쪽을 먼저 읽어."
"그럼?"
다비가 리라를 봤다.
"네 심장별, 잠깐만 드러낼 수 있어?"
리라는 얼굴을 구겼다.
"그 질문은 보통 좋은 계획 앞에 안 붙는데."
"좋은 계획은 아니야. 살아남는 계획이지."
다비는 자기 자루에서 작은 은거울 여섯 장을 꺼냈다. 왕실 사절 마차에서 떼어 온 장식 거울이었다. 그녀는 거울을 눈밭 여기저기에 꽂고 각도를 바꿨다. 카엘이 그 의도를 읽고 곧바로 망토 두 장을 펼쳐 눈 언덕 위에 세웠다.
리라는 마지못해 가슴께의 검은 천을 조금 풀었다. 푸른 맥동이 새어 나왔다.
심장별이 차갑게 숨을 쉬었다.
그 빛이 거울마다 튕기자, 눈밭 위에는 리라가 여섯 명쯤 흩어진 것 같은 흔적이 생겼다.
다비가 씨익 웃었다.
"도둑 잡으러 온 놈들한텐 도둑답게 굴어야지."
잠시 뒤 검은 등불 셋이 갈라졌다.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하나는 한참 뒤늦게 엉뚱한 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카엘이 낮게 말했다.
"가자. 지금이다."
세 사람은 눈과 바람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뒤에서 왕실 종소리가 한동안 허공을 헤맸다.
그 밤 이후 리라는 깨달았다. 북쪽은 단지 춥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
여기는 살아남으려면 몸보다 판단이 먼저 버텨야 하는 땅이었다.
그리고 얼음은 늘 먼저 거짓말을 배운다.
멀쩡해 보이는 눈밭 아래가 텅 비어 있기도 하고, 죽은 줄 알았던 강이 한밤중에 다시 흐르기도 하고, 저 멀리 등대처럼 보이던 불빛이 사실은 길 잃은 사람들을 낭떠러지로 부르는 망령불이기도 했다.
리라는 여섯째 날 새벽, 세상 끝 얼음 협곡을 처음 보았다.
대륙이 누군가에게 한 번 잘려 나간 상처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흰 절벽이 좌우로 이어졌고, 그 사이로 검은 틈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람이 그 아래에서 올라왔는데, 차갑다기보다 오래된 냄새가 났다. 눈과 소금과 돌,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본 것들의 냄새.
다비가 작게 욕했다.
"이걸 협곡이라고 부른 놈은 벼랑에 대한 예의가 없네."
카엘은 아무 말 없이 난간처럼 솟은 얼음 능선을 살폈다.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은 없었다. 짐승 발자국도 없었다.
그저 세상 끝이라는 이름만큼 정직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리라는 허리춤의 별침 상자를 꺼냈다. 수정침이 미친 듯이 떨더니, 협곡 절벽을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이 있대."
다비가 빈정거렸다.
"그래? 그럼 길이 직접 좀 걸어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세 사람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반나절 넘게 걸었다. 해는 낮게 기울었고, 바람은 자꾸 뺨의 감각을 훔쳐 갔다. 그러다 리라가 먼저 멈췄다.
절벽 벽면에 얼음이 아니라 돌이 드러난 곳이 있었다. 눈을 걷어 내자 오래된 문양이 나타났다. 원과 선, 별과 사슬이 얽힌 새김이었다. 그 앞에 검은 기둥 넷이 반쯤 얼음에 묻혀 서 있었다.
별의 탑으로 가는 문이었다.
협곡이 요구한 대답
기둥 넷은 모두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째 기둥에는 왕관을 쓴 사람이 새겨져 있었다. 둘째에는 날개를 편 괴물, 셋째에는 눈을 가린 기사, 넷째에는 주머니를 든 작은 그림자.
리라는 넷째를 보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왜 도둑은 꼭 이렇게 작고 수상하게 그려 놓지?"
다비가 말했다.
"직업 이미지가 있잖아."
카엘이 더 가까이 다가가 기둥 아래 글자를 읽었다. 얼음 아래 묻힌 고어였지만, 기사 교육을 받은 그는 천천히 뜻을 짚어 냈다.
"왕은 곧은 길을 택해 되돌아온다. 용은 깊은 길을 택해 굶주린다. 기사는 바른 길을 택해 얼어 죽는다."
리라가 눈썹을 올렸다.
"좋은 안내문은 아니네."
"마지막 줄이 남았다."
카엘이 넷째 기둥의 얼음을 칼끝으로 긁어 냈다.
"도둑은 닫힌 길을 택해 문을 연다."
잠깐, 셋 다 입을 다물었다.
다비가 먼저 말했다.
"난 이런 고대인들이 싫어. 꼭 수수께끼를 내고 죽더라."
기둥들 사이 바닥에는 둥근 홈 네 개가 있었다. 그 옆에는 별자리 판 세 장이 얼음 속에 박혀 있었다. 은판 지도와 비슷했지만 훨씬 컸고, 별 구멍의 배열이 서로 달랐다.
리라는 무릎을 꿇고 판을 만져 보았다. 차가운 금속 아래에서 심장별이 반응했다. 쿵. 쿵. 쿵.
마치 이 자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녀의 눈앞에 첫 밤의 장면이 잠깐 스쳤다. 왕성 지붕, 손안에 떨어진 별,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잡아챘던 순간. 그때 중요한 건 별을 제대로 갖는 일이 아니었다. 남보다 먼저, 규칙보다 먼저, 허락보다 먼저 손을 뻗는 일이었다.
리라는 천천히 일어섰다.
"정답이 보인다."
다비가 바로 물었다.
"뭔데?"
"올바르게 맞추는 게 아니야."
카엘이 기둥과 판을 번갈아 보더니 이해했다.
"닫힌 길을 택한다…"
"응. 왕은 제자리를 찾으려 하고, 기사는 정답을 찾으려 하고, 용은 제일 큰 빛을 향해 내려오겠지. 그런데 도둑은 아니야. 도둑은 잠긴 걸 보면 열 생각부터 하거든."
리라는 세 개의 별자리 판을 홈 위에 올렸다. 첫째와 둘째 판은 맞물리게 돌렸지만, 셋째 판은 일부러 한 칸 어긋나게 걸었다.
다비가 눈을 크게 떴다.
"야, 그거 틀렸잖아."
"맞아. 그래서 열릴 거야."
심장별이 세게 뛰었다.
리라는 마지막으로 자기 손바닥을 틀어진 별 구멍 위에 눌렀다. 푸른빛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기둥 넷이 한꺼번에 울렸다.
쿵.
협곡 아래에서 아주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얼음 벽면 곳곳에 금 같은 푸른 선이 번졌다. 눈과 서리가 떨어지고, 절벽 사이 검은 틈 한가운데서 좁고 긴 길이 떠올랐다. 얼음다리였다.
하지만 평범한 다리가 아니었다.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고래의 등뼈처럼, 길은 군데군데만 드러났고 그 사이사이는 투명한 얼음이었다. 얼핏 보면 빈 공간과 구분도 되지 않았다. 잘못 디디면 바로 아래 검은 심연으로 떨어질 구조였다.
다비가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정말 문이 열리긴 하네."
리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나도 막상 될 줄은 반쯤만 믿었어."
카엘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는 다리 위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는 실수하면 죽는다."
다비가 툭 받아쳤다.
"지금까지는 뭐, 실수해도 우아하게 살았냐?"
그 말이 오히려 긴장을 조금 풀었다.
세 사람은 허리를 밧줄로 묶고, 간격을 맞춰 얼음다리 위에 발을 올렸다.
바로 그때 남쪽 하늘이 아주 멀리서 번쩍였다.
검푸른 빛이었다.
왕이 아직 버틴다.
하지만 오래는 아닐 것이다.
리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한 걸음씩만 생각해야 했다.
말하면 부러지는 다리
얼음다리 위의 바람은 이상했다.
귀를 때리는 소리는 큰데, 정작 발밑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눈이 날리지도 않았고, 밑바닥에서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소리라는 소리를 누군가 미리 걷어 간 뒤 남은 자리 같았다.
리라는 세 번째 걸음에서 이유를 알아챘다.
다리가 소리를 먹고 있었다.
카엘의 부츠가 얼음을 밟을 때마다 아주 미세한 금빛 파문이 번지고 사라졌다. 다비가 밧줄 매듭을 고쳐 잡는 작은 마찰음도 얼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리라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조차 오래 남지 않았다.
이런 다리에서 제일 위험한 건 침묵이 아니었다.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는 순간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중간쯤 갔을 때, 다비 발밑 얼음이 갑자기 내려앉았다.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울며 허공으로 쏠렸다. 리라는 본능적으로 이름을 부르려 했고, 카엘이 거의 동시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심장별이 리라의 갈비뼈 안쪽을 세게 쳤다.
말하지 마.
목소리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리라는 비명을 이를 악물고 삼켰다. 카엘이 밧줄을 몸으로 버티고, 다비가 한 손으로 얼음 턱을 붙잡았다. 균열이 번졌다. 얇고 날카로운 금들이 거미줄처럼 퍼졌다.
다비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래도 그녀는 웃으려고 했다.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이 표정 봐라, 나 아직 안 죽었어."
작게 속삭인 그 말마저 얼음이 거의 다 먹어 치웠다.
카엘은 말 대신 힘으로 대답했다. 그는 한 발, 또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다비를 끌어올렸다. 리라도 밧줄을 함께 당겼다. 손바닥이 얼음에 쓸려 찢어졌지만 지금은 아플 틈도 없었다.
다비가 다시 다리 위에 올라왔을 때 셋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침묵이 생존법이라는 걸 세 사람 모두 배웠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발끝과 손짓만으로 움직였다. 오른쪽, 멈춤, 낮게, 틈, 균열, 괜찮음. 말 한마디 대신 눈빛 열 번이 오갔다. 이상하게도 그게 더 정확했다.
한참 뒤, 다리 끝이 가까워질 무렵 하늘이 흐려졌다. 눈보라가 아니라 검은 그림자였다. 너무 멀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리라는 본능으로 알았다.
식성룡이 남쪽 하늘만 맴도는 단계는 끝났다.
이제 놈은 굶주림을 따라 북쪽까지 시선을 뻗고 있었다.
심장별이 불쾌하게 뛰었다.
쿵.
얼음다리도 그 박동에 응답하듯 희미하게 떨렸다.
리라는 마지막 힘을 짜내 앞으로 달렸다. 카엘과 다비도 뒤따랐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마침내 반대편 절벽 위로 넘어오는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길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다리가 무너졌다.
얼음 등뼈가 한 마디씩 부서져 아래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소리는 거의 없었고,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눈앞에서 거대한 길이 사라지는데도 협곡은 끝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다비가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좋아. 다시는 이런 다리 안 건넌다."
리라도 같이 털썩 앉았다.
"동의. 다음엔 그냥 용 입으로 들어가자. 그게 더 편하겠어."
카엘은 둘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두 방법 다 추천하고 싶진 않군."
잠깐뿐이었지만, 세 사람은 정말로 웃었다.
협곡 너머의 바람은 전과 달랐다.
차갑기는 더 차가운데, 이상하게도 방향 감각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별침 상자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리라의 심장별이 앞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린 문 앞에 선 것처럼, 맥동이 일정하고 또렷했다.
그들은 마지막 경사를 올랐다.
그리고 세상 끝의 풍경이 열렸다.
탑은 하늘을 찌르지 않았다
리라는 별의 탑이 높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높고, 오래되고, 차갑고, 대체로 재수 없는 건물.
틀린 건 아니었지만 충분하지도 않았다.
탑은 하늘을 찌르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이 탑을 중심으로 내려와 있었다.
협곡 너머에는 거대한 분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검은 탑 하나가 서 있었다. 돌로 지은 것 같은데 돌이 아니었다. 밤을 깎아 만든 기둥에 별빛을 얇게 입힌 것 같은 표면이었다. 탑 주위로는 쓰러진 원형 고리들이 층층이 누워 있었고, 그 고리마다 죽은 별자리의 모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구름이 아니라 느리게 도는 빛의 강이 탑 둘레를 흐르고 있었다.
세상 모든 방향이 여기로 수렴하는 느낌이었다.
다비가 중얼거렸다.
"저걸 지은 놈들은 성격이 분명 안 좋았을 거야."
카엘은 탑을 보며 낮게 말했다.
"아니면 너무 오래 세상을 지켜본 놈들이겠지."
리라는 대꾸하지 못했다.
가슴속 별이 그 탑을 보자 이상할 정도로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불안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향을 알아본 짐승처럼 조용해졌다. 이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귀환에 가까웠다.
세 사람은 분지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가까워질수록 탑 주위의 돌들은 무덤처럼 보였다. 왕들의 묘가 아니었다. 이름 없는 수호자들, 별을 지키다가 실패했거나 성공하고도 잊힌 자들의 빈 자리 같았다.
탑 정문 앞에는 문이 없었다.
대신 검은 돌벽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홈이 하나 있었다. 너무 익숙한 크기였다.
리라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끝까지 단순하네."
그녀는 손을 들었다. 잠깐 망설였다. 여기서부터는 되돌아가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왕도, 용도, 수도도, 자기 몸 안의 별도, 전부 이 문 너머에서 더 큰 진실과 맞부딪칠 가능성이 컸다.
카엘이 조용히 말했다.
"겁나면 겁난다고 해도 된다."
리라는 피식 웃었다.
"지금?"
"그래도 된다."
다비도 옆에서 말했다.
"대신 손은 떨지 마. 이런 문은 이상하게 사람 약 올리다가 피 뽑아 먹는 취미가 있더라."
리라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좋아. 둘 다 전혀 도움 안 되네."
그녀는 손바닥을 홈에 올렸다.
푸른빛이 손금 사이로 번졌다.
쿵.
탑 전체가 심장처럼 한 번 뛰었다.
검은 돌벽이 안쪽으로 갈라지며 조용히 열렸다. 먼지 냄새는 없었다. 대신 아주 오래 잠들어 있던 겨울밤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안쪽 홀은 비어 있었다.
천장은 너무 높아 횃불 없이도 어둠이 끝까지 보이지 않았고, 벽면에는 수백 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이름은 왕의 것이었고, 어떤 이름은 아니었다. 그중 절반은 칼로 지운 것처럼 긁혀 있었다.
홀 한가운데, 낮은 받침돌 위에 검은 석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석함 뚜껑에는 아주 오래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왕관도, 검도, 용도 아니었다.
별 하나와, 그 별을 집어 드는 손.
도둑의 표식이었다.
리라가 천천히 다가갔다. 심장별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뛰었다.
뚜껑 앞에는 한 줄의 글이 있었다.
카엘이 먼저 읽고 숨을 멈췄다.
다비가 그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옆으로 와서 글자를 훑었다. 그녀도 곧 입을 다물었다.
리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둘 다 그런 얼굴이야? 뭐라고 적혔는데?"
카엘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첫 번째 왕의 유언."
리라는 심장이 한 번 내려앉는 걸 느꼈다.
카엘은 그 아래 새겨진 나머지 문장까지 읽었다.
"왕의 후손에게 남기지 않는다. 별을 훔친 자에게만 연다."
홀 안의 어둠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멀리 남쪽 어디선가, 세상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왕과 용이 아직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도 리라는 석함 앞에서 한순간 움직이지 못했다.
자기가 훔친 것이 결국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첫날 지붕 위의 그 도둑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검은 석함의 자물쇠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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