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별을 먹는 용

낮인데 별이 줄었다
혁명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됐다.
현실은 늘 낭만이 없어서, 반란의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자유를 노래하기보다 빵자루를 셌고, 창끝을 갈았고, 우물물을 나눴다. 밤새 왕실 창고를 턴 사람들은 영웅처럼 박수받기보다 새벽부터 자루를 옮겼고, 다친 사람들은 영광 대신 붕대를 감았다.
리라는 처형광장 옆 반쯤 무너진 시계탑 꼭대기에 앉아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도시는 자신을 삼키는 미로였다.
오늘은 그 미로가 이를 드러낸 짐승 같았다.
바리케이드는 밤새 두 배로 늘어났고, 골목마다 그늘망 표식이 새로 그려졌다. 아이들은 심부름꾼이 되었고, 노인들은 감시자가 되었고, 한때 소매치기였던 놈들은 이제 왕실 보급로를 끊는 일을 너무 성실하게 하고 있었다.
벨크는 아래에서 누군가를 쥐 잡듯 혼내고 있었다.
"식량 자루 위에 앉지 마! 혁명한다고 엉덩이가 귀족 되는 거 아니야!"
누군가가 대꾸했다.
"의자 없잖아!"
"그럼 서서 혁명해!"
리라는 피식 웃었다.
카엘이 뒤에서 올라왔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지만, 검을 든 자세는 여전히 똑바랐다.
"동쪽 병영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리라가 하품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겠지?"
"왕실이 수비선을 다시 짜고 있다. 오늘 안에 밀고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역시 왕실은 근면하네. 사람 괴롭히는 데만."
카엘은 대꾸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리라도 무심코 그쪽을 봤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인데 하늘이 이상했다.
해는 떠 있었지만 밝지가 않았다.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탄 수도의 하늘은 원래 탁했지만, 오늘은 그 탁함 아래에 설명하기 어려운 비어 있음이 있었다. 무언가가 위쪽에서 색을 조금씩 긁어낸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어야 할 새벽별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리라의 심장별이 작게 뛰었다.
쿵.
그녀는 즉시 가슴께를 눌렀다.
별잠핀의 차가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전보다 얇았다. 얼음 밑으로 뜨거운 물이 흐르는 것처럼, 억눌린 박동이 조금씩 더 세게 올라오고 있었다.
카엘이 그녀의 손동작을 보았다.
"또 반응하나."
"응."
"왕궁 쪽 때문인가?"
리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그녀는 말을 멈췄다.
이번 감각은 왕궁 아래에서 느꼈던 것과 달랐다. 그건 아래로 끌어당기는 박동이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건 위였다. 아주 멀고, 아주 차갑고, 아주 오래 굶은 것이 하늘에서 몸을 뒤척이는 느낌.
"위에서 보고 있어."
카엘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왕 말고?"
"왕보다 배고픈 쪽."
그 순간, 시계탑 아래 골목에서 아이 하나가 소리쳤다.
"저것 봐!"
사람들이 하나둘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기 사이로, 해 바로 옆에서 아주 작은 흰 점 하나가 툭 꺼졌다.
별이었다.
한낮의 별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애초에 보여서는 안 되는 별이었고, 보여도 저렇게 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분명히 사라졌다.
누군가 십자 부호를 그었고, 누군가는 술이 덜 깼다며 자기 뺨을 때렸다.
벨크가 광장 한복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짜증 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이쯤 되면 그냥 날씨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리라의 등골을 식은 손이 쓸고 내려갔다.
불타는 수도, 죽지 않는 왕, 반란, 심장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데, 세상은 항상 더 큰 나쁨을 숨겨 두고 있다가 꼭 이런 날 꺼내 놓는다.
흰 깃발보다 먼저 내려온 그림자
정오 무렵, 왕실이 사자를 보냈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서쪽 구역 바깥 큰길로 흰 깃발이 보였고, 그 뒤로 갑옷 입은 병사 열 명이 간격 맞춰 걸어왔다. 창끝은 아래를 향해 있었지만, 그건 평화라기보다 '지금은 찌르지 않겠다'는 오만에 가까웠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즉시 술렁였다.
네르가 석궁을 겨누며 물었다.
"쏠까?"
벨크가 말했다.
"말은 듣고 쏘자. 귀족들은 보통 입부터 털거든."
리라와 카엘, 다비가 앞으로 나갔다. 바리케이드 위아래로 긴장이 팽팽하게 걸렸다.
사자 한가운데 선 남자는 창백할 정도로 정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실 문장이 달린 검은 외투, 흰 장갑, 그리고 이런 골목에서는 오히려 목숨을 줄이는 향수 냄새까지.
그는 코를 아주 조금만 찡그렸다. 하층가 냄새가 불쾌하다는 걸 숨길 만큼 똑똑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폐하의 명으로 왔다."
벨크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벌써 재수 없어."
남자는 리라를 똑바로 보았다.
"도둑 리라. 금지 유물의 숙주. 그대가 자진하여 왕궁으로 돌아오면, 서쪽 구역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중지하겠다."
광장 전체에서 욕설이 터졌다.
다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릴 태워 놓고 이제 와서 거래?"
사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폐하는 자비를 보이시는 것이다."
리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자비?"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왕궁 지하에 사람 묶어 두고, 골목에 불 질러 놓고, 아이들한테 화살 쏴 놓고, 이제 와서 나 혼자 가면 그만두겠다고?"
사자는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도시는 한 사람 때문에 위험해졌다."
그 말이 끝나자 광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석궁 시위가 당겨지고, 창끝이 일제히 들렸다. 카엘의 손도 검자루를 눌렀다.
리라는 오히려 웃었다. 피곤하고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아니. 도시는 오래전부터 위험했어. 내가 훔친 건 금고고, 네 왕이 훔친 건 사람들 목숨이지."
사자가 뭐라 답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늘이 내려왔다.
처음에는 구름인 줄 알았다.
다음에는 연기인 줄 알았다.
세 번째에야 사람들은 그게 움직인다는 걸 알았다.
빛이 광장 위에서부터 천천히 사라졌다. 누가 거대한 손바닥으로 하늘을 덮는 것처럼, 한낮의 색이 위쪽부터 눌려 어두워졌다. 왕실 사자의 얼굴에서 오만이 벗겨졌다. 그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말들이 먼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마차를 묶어 둔 밧줄이 한꺼번에 끊어졌고, 새들이 지붕에서 일제히 떨어졌다.
소리는 한 박자 늦게 왔다.
아니, 정확히는 소리가 사라졌다.
거대한 것이 공중을 가르며 지나갔는데도 바람 소리도, 날갯짓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소리가 통째로 먹혀 버린 듯했다. 사람들의 비명조차 반쯤 끊겨 허공에서 사라졌다.
리라는 심장별이 갈비뼈를 세게 두드리는 걸 느꼈다.
쿵!
하늘 한가운데, 너무 커서 형태가 한 번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림자가 몸을 틀었다.
그리고 누군가, 정확히는 아주 늙은 누군가가 군중 뒤에서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식성룡…"
그 말은 광장에 기름처럼 번졌다.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굴색이 먼저 죽었다.
어린애 재우려고 하는 옛이야기 속 괴물.
별을 너무 오래 붙잡은 왕국 위로 내려온다는 하늘의 청소부.
욕심 많은 왕이든, 마법사든, 성자든, 손에 별을 쥔 채 오래 버티면 결국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 재앙.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그래서 더 무서워했다.
전설이 실제로 눈앞에 오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건 그동안 비웃은 자기 입이다.
식성룡
그것이 다시 한 번 도시 위를 선회했을 때, 리라는 마침내 전부를 보았다.
사람들이 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걸 달리 뭐라고 부를 말이 없어서였다.
몸은 길고 컸다. 너무 커서 탑 두 개를 포개도 등뼈 절반도 닿지 않을 만큼. 그러나 비늘은 보통 용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검은 것도, 푸른 것도 아니었다. 밤하늘이 굳어서 조각난 것 같은 표면 위에 별자리처럼 금 간 선들이 퍼져 있었다. 날개는 가죽이 아니라 찢어진 어둠 같았고, 가장자리마다 얇은 빛이 흘렀다. 그런데 그 빛은 비추는 빛이 아니라, 어디선가 훔쳐 온 빛처럼 보였다.
가장 끔찍한 건 입이었다.
머리 앞쪽에 달린 입 하나가 아니었다.
목 비늘 사이사이, 날개 접히는 관절 아래, 가슴뼈 틈, 심지어 꼬리 아래쪽 갈라진 선마다 얇고 긴 입들이 붙어 있었다. 평소에는 닫힌 상처처럼 보이다가, 별빛이 스치면 한꺼번에 벌어졌다. 그 안은 이빨 대신 검은 빛으로 차 있었다.
도시 위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식성룡은 불길을 먹지 않았다.
사람도 함부로 씹지 않았다.
대신 불빛을 먹었다.
왕실 경비탑 위의 청금석 등불이 먼저 꺼졌다. 마법으로 켜 두던 방어등이 줄지어 어둠에 빨려 들어갔다. 성벽에 박아 둔 봉인석들이 탁한 유리처럼 변했고, 귀족가의 창문마다 걸린 보호 부적이 종잇장처럼 말라 구겨졌다.
식성룡이 지나간 자리마다 '빛나는 것'이 먼저 사라졌다.
왕실 사자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벨크가 냉정하게 답했다.
"오늘은 네가 모르는 일만 생기나 보다."
그 순간 식성룡의 고개가 멈췄다.
수도 전체를 훑던 수십 개의 입이 아주 천천히, 동시에 한 방향으로 향했다.
리라 쪽이었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별잠핀 아래에서 심장별이 마치 잡아당겨지듯 뛰었다.
쿵! 쿵!
카엘이 즉시 그녀 앞을 막아섰다.
"뒤로 가."
"네가 앞에 선다고 저게 예의 차릴 것 같아?"
"아니. 그래도 선다."
다비가 거칠게 욕을 뱉으며 리라의 팔을 붙잡았다.
"좋아, 지금은 영웅 흉내 내지 마. 뛰자."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식성룡이 입을 벌렸다.
포효는 없었다.
대신 하늘에서 별 하나가 또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붕 위에 세워 둔 유리 등잔들이 전부 산산조각 났다. 왕실 사자의 허리춤에 달린 문장석이 검게 변하며 부서졌고, 리라 옷 안쪽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을 본 광장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리라는 그 반응을 알아봤다.
방금 전까지는 다들 왕실을 증오하는 쪽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런데 하늘의 괴물이 정말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본 순간, 사람 마음은 훨씬 더 간단한 질문으로 줄어든다.
저게 우리 때문인가.
아니면 저 애 때문인가.
리라는 그 질문이 퍼지는 속도를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군중 뒤편에서 낯익은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다 비켜!"
모렌이었다.
왕실 장의사는 검은 장례복 자락을 찢어 먹은 사람처럼 엉망이 된 채 광장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얼굴은 창백했고, 오른쪽 소매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 눈빛만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전설이 아니라 기록이다. 식성룡은… 떨어진 별을 찾아오는 포식자다. 별이 땅에 오래 박혀 있을수록, 더 크게 깨어난다."
카엘이 물었다.
"왕도 알고 있었나?"
모렌이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도 버텼겠지. 수백 년 동안."
그는 리라와 왕궁 쪽을 번갈아 보았다.
"네 안의 심장별. 그리고 왕 가슴의 검푸른 별. 둘이 동시에 깨어난 순간, 저것도 냄새를 맡은 거다."
리라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좋네. 세상은 늘 나쁜 소식을 묶음 할인으로 주네."
모렌은 그녀의 농담에 웃지도 못했다.
"더 나쁜 건 따로 있다. 저건 단순히 별을 먹는 게 아니다. 별이 묶고 있던 것까지 함께 뜯어 간다."
카엘의 얼굴이 굳었다.
"왕의 별을 먹으면…"
모렌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 끝나고, 왕이 막고 있던 아래의 문도 흔들린다."
광장이 얼어붙었다.
이제 선택지는 더 끔찍해졌다.
왕을 그냥 죽여도 안 된다.
그런데 하늘의 괴물이 먼저 왕을 먹어도 역시 안 된다.
혁명이고 반란이고 도둑질이고 다 좋았지만,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도시 하나 훔친 걸로는 택도 없다.
왕도 올려다본 하늘
왕궁 쪽에서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낮고 느린 경보가 아니라, 왕실 전체가 공포에 질렸을 때만 치는 긴박한 종이었다. 검은 탑 위쪽 창문들이 차례로 열리고, 봉인 기사단이 옥상 난간마다 나타났다. 그들의 창과 방패에는 푸른 문양이 켜졌지만, 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식성룡이 한 번 더 선회하자 문양 절반이 그대로 바래 버렸다.
"저러다 아무것도 못 막아." 모렌이 중얼거렸다.
벨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왕궁이 망하는 건 나쁘지 않은데, 같이 망하는 건 싫군."
그때 검은 탑 가장 높은 발코니에 누군가 걸어 나왔다.
왕이었다.
멀리서도 창백함이 보였다. 그는 왕관도 쓰지 않았고, 예복도 걸치지 않았다. 검은 속옷 위에 금실이 엉킨 긴 겉옷만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잠도 못 잔 사람의 얼굴, 아니 수백 년 동안 제대로 쉰 적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한가운데에서는 검푸른 빛이 분명히 타오르고 있었다.
왕이 식성룡을 올려다봤다.
그 시선에는 분노보다 오래된 피로가 먼저 있었다.
"결국 왔군."
멀어서 들리지도 않아야 할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광장까지 닿았다. 마치 식성룡과 왕 사이에서 오간 말이 도시 전체를 울린 것처럼.
식성룡이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리라가 아니라 왕 쪽을 보았다.
수도 위를 덮고 있던 어둠이 한순간 더 짙어졌다. 하늘에서 사라지는 별은 이제 하나씩이 아니었다. 낮인데도, 보이지도 않던 별들이 어딘가에서 연달아 꺼지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아주 멀리서부터 비어 가는 느낌이었다.
왕이 두 팔을 벌렸다.
그의 가슴에서 검푸른 빛줄기들이 갈비뼈 아래로 퍼지더니, 왕궁 위 하늘에 거대한 문양 하나를 그렸다. 별 모양이면서 족쇄 같고, 방패 같으면서 무덤 뚜껑 같은 문양이었다.
카엘이 이를 악물었다.
"저게 왕을 붙잡고 있는 힘이군."
모렌이 낮게 답했다.
"아니. 저건 왕을 붙잡는 동시에 뭔가를 붙잡고 있는 힘이지."
식성룡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포효라고 부르기엔 너무 이상했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뼈 안쪽으로 스며드는 소리였다. 배고픔이 형태를 가지면 저런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원망도 분노도 없이, 그저 오래 굶은 존재만이 낼 수 있는 순수한 탐욕.
그리고 놈이 내리꽂혔다.
도시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식성룡은 검은 탑 꼭대기를 향해 떨어졌다. 왕실 기사들이 창을 던졌고, 봉인술사들이 빛 고리를 펼쳤다. 그러나 창은 닿기도 전에 녹슨 것처럼 바스러졌고, 빛 고리는 식성룡의 날개 가장자리 입들에 닿자마자 가볍게 삼켜졌다.
놈은 불을 뿜지 않았다.
그 대신 탑 위의 빛을 한 입에 물어뜯었다.
검은 탑 꼭대기 절반이 폭발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터진 건 돌이 아니라 그 안에 박혀 있던 왕실의 모든 별석과 봉인 문양이었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축적한 왕실 마법이 한 번에 하얗게 번쩍였다가 통째로 사라졌다.
그 후에야 돌이 무너졌다.
사람들은 그 광경 앞에서 자기 편도, 원수도 잠깐 잊었다.
왕궁이 무너지는 모습은 통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아니었다.
저건 승리가 아니라, 인간이 쌓아 올린 것들이 하늘의 식욕 앞에서 얼마나 가벼운지를 보여 주는 구경거리였다.
왕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발코니 가장자리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채, 자기 가슴에 손을 꽂듯 눌렀다. 검푸른 별빛이 거칠게 뻗어나와 식성룡의 턱 아래를 후려쳤다.
식성룡의 몸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별을 먹는 괴물이 뒤로 밀렸다.
광장 곳곳에서 경악 섞인 숨소리가 터졌다.
리라는 그 광경을 보고도 조금도 안심되지 않았다.
왕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저건 서로를 오래 알아 온 자들의 싸움 같았다.
처음 만난 적이 아니라, 언젠가 이미 한 번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엉켜 본 적 있는 것들.
그리고 그런 적은 대개 인간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다.
심장별의 냄새
식성룡이 탑에서 물러난 순간, 수도 전체가 아주 잠깐 숨을 쉬었다.
정말 잠깐뿐이었다.
놈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이번엔 더 정확하게, 더 집요하게.
리라를 향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별잠핀 아래에서 심장별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슴 속에 별이 들어 있다는 말을 그동안 몇 번이나 들었지만, 지금처럼 '먹히기 좋은 것'이 되었다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모렌이 욕처럼 말했다.
"왕의 별은 깊이 박혀 있어서 쉽게 못 뜯는다. 하지만 네 별은 아직 자라고 있다. 저놈에겐 네 쪽이 더 쉬운 먹이다."
"좋아." 리라가 떨리는 숨으로 말했다. "내 인생에서 듣기 싫은 말 순위가 방금 바뀌었어."
카엘이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로 이동해야 한다."
다비가 즉시 받았다.
"지붕길로 빼면 돼."
모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저건 하늘에서 본다. 길이 아니라 별의 냄새를 따라온다."
벨크가 짜증 섞인 얼굴로 손을 들었다.
"잠깐만. 그럼 선택지는 뭐냐. 왕을 넘기기도 싫고, 리라를 넘기기는 더 싫고, 하늘 도마뱀은 둘 다 먹고 싶어 한다. 아주 훌륭하군."
모렌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둘을 한곳에 두면 더 빨리 내려온다."
리라와 카엘이 동시에 그를 봤다.
모렌은 입술을 핥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멀리 떼어 놓으면, 잠시나마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카엘이 즉시 이해했다.
"왕궁과 반대 방향으로 리라를 빼야 한다는 건가."
"그래야 도시 전체가 한 번에 찍히는 건 막을 수 있다."
다비가 발끈했다.
"지금 우리더러 리라를 버리라는 거야?"
"아니." 모렌이 차갑게 말했다. "도시를 살리려면, 제일 밝게 빛나는 미끼를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그 말은 잔인했지만 틀리지 않았다.
리라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어제까지 자신과 함께 웃고 뛰고 왕실 창고를 털던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들 위에는 새로운 공포가 얹혀 있었다. 어떤 이는 미안해했고, 어떤 이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고, 어떤 이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리라가 여기 남으면 저 괴물이 다시 내려온다.
그럼 이번엔 왕궁이 아니라 이쪽을 뜯어 먹을 것이다.
리라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좋아."
카엘이 즉시 그녀를 봤다.
"안 된다."
"왜 안 돼? 어차피 저건 나 냄새 맡고 있잖아."
"그래도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리라가 짧게 웃었다.
"오랜만에 기사다운 소리 하네."
카엘은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칭찬으로 듣겠다."
식성룡이 다시 선회했다.
이번에는 더 낮게.
하늘에서 내려온 그림자가 지붕과 탑을 스치자, 창문에 남아 있던 유리의 빛이 모조리 바랬다. 어떤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호신부를 놓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종잇조각이 순식간에 재처럼 부스러졌다.
리라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다비, 서쪽 지붕길 열어. 벨크, 사람들 최대한 아래로 숨겨. 모렌, 왕궁 쪽 계속 보면서 저놈 방향 읽어. 카엘—"
"같이 간다."
"끝까지 말도 안 듣네."
"도둑한테 배웠다."
그 짧은 말다툼 끝에, 리라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이런 순간에도 웃는 건 미친 짓 같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살 만해졌다.
그때 왕궁 쪽에서 새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식성룡이 다시 탑 꼭대기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왕의 검푸른 별빛이 놈의 턱을 밀어내는 동안, 리라의 심장별도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푸른빛이 별잠핀 틈으로 새어 나왔다.
두 빛이 멀리 떨어진 하늘 위에서 잠깐 엮였다.
쿵.
수도 전체가 진동했다.
리라의 눈앞에 아주 짧은 환상이 스쳤다.
끝없는 밤하늘.
그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수많은 별.
그 별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떠오르는 검은 거대한 것.
그리고 누군가, 왕관을 쓴 아주 오래된 사람이 피 묻은 손으로 별 하나를 자기 가슴에 박아 넣는 장면.
리라는 숨을 들이켰다.
그 환상은 한순간이었지만, 온몸이 얼어붙기엔 충분했다.
식성룡은 단순히 오늘 처음 나타난 괴물이 아니었다.
왕가와 훨씬 오래된 방식으로 얽혀 있었다.
아주 옛날 누군가가 저것을 피하려고, 혹은 붙잡아 두려고, 별을 자기 피 속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지금까지 왕의 가슴에서 썩고 있는 것이다.
"리라!"
카엘의 목소리에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식성룡이 이미 내려오고 있었다.
이번 목표는 분명히 이쪽이었다.
인간들의 전쟁은 여기서부터 작아졌다
그 뒤의 움직임은 정신없이 빨랐다.
리라와 카엘은 서쪽 지붕길로 뛰었고, 다비와 네르가 앞쪽 길을 열었다. 바리케이드는 일부러 무너뜨려 사람들을 골목 아래로 흘려보냈다. 세탁집 사람들은 하얀 천을 펄럭여 가짜 방향을 만들었고, 굴뚝 청소부들은 지붕마다 기름을 뿌려 햇빛 반사를 엉망으로 흩트렸다.
도둑들은 아직도 자기 재주를 버리지 않았다.
문제는 이번 상대가 병사가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뿐이었다.
식성룡이 서쪽 구역 위로 내려오자, 그 거대한 몸 아래 있는 공기부터 달라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생기가 빠지는 느낌이었다. 등불은 물론이고 사람 눈빛까지 잠깐 흐려졌다. 누군가는 무릎을 꿇었고, 누군가는 자기 이름을 잊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리라는 이를 악물고 지붕 끝을 박찼다.
"저건 빛만 먹는 게 아니야."
카엘이 옆에서 말했다.
"별이 깃든 것부터 지운다."
"그럼 우리 다음은 왕이고, 그 다음은 도시겠네."
"아마."
"정말 위로 안 되는 말 잘한다."
뒤에서 벨크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얘야, 나중에 연애는 하지 마라! 말로 사람 넷쯤 말려 죽이겠다!"
카엘이 처음으로 아주 잠깐 입꼬리를 움직였다.
그때 하늘이 찢기듯 흔들렸다.
식성룡이 곧장 리라에게 내려오던 도중, 왕궁에서 검푸른 쇳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왕이 마지막 남은 힘으로 놈을 붙잡은 것이었다. 검은 탑 절반이 이미 날아간 채였지만, 왕은 무너진 난간 위에 서서 양손으로 허공을 찢듯 별빛 사슬을 뻗어 올리고 있었다.
식성룡의 날개와 왕의 사슬이 하늘 한가운데서 엉켰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올려다보며 깨달았다.
이제 반란군과 왕실군이 싸우는 중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냥 같은 도시 안에 갇힌 먹잇감이었다.
리라는 지붕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왕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봤다.
거리가 멀었는데도 이상하게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오만도 분노도 아니었다.
공포였다.
그리고 경고였다.
도망쳐라.
그 한순간, 리라는 왕이 왜 죽지 못했는지 아주 조금 이해했다.
그는 살고 싶어서만 버틴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풀려나는 걸 두려워해 버텨 온 것이다. 끔찍한 인간인 건 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두려움까지 거짓은 아니었다.
다음 순간, 식성룡이 왕의 사슬을 한 입에 씹어 삼켰다.
검푸른 빛이 놈의 목 안에서 번쩍였다.
왕이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리라의 심장별이 거칠게 끌려 나가려 했다.
"악—!"
리라는 가슴을 움켜쥐고 지붕 위에 주저앉았다. 별잠핀이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금 간 소리와 함께 한쪽 날개가 부러졌다.
카엘이 그녀를 붙잡았다.
"리라!"
옷 안쪽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피부 아래에서 별이 실제로 심장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늘의 식성룡이 모든 입을 벌렸다.
수도 전체가 그 입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압박이 덮쳤다.
그리고 그 순간, 리라는 본능적으로 선택했다.
숨는 건 끝났다.
그녀는 고통에 떨리는 손으로 별잠핀의 부러진 조각을 뜯어 던졌다.
푸른빛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광장보다 밝고, 화재보다 차갑고, 새벽별보다 날카로운 빛.
식성룡의 수십 개 입이 동시에 그녀를 향해 열렸다.
카엘이 욕설과 함께 검을 빼 들었다.
다비가 반대쪽 지붕에서 소리쳤다.
"미쳤어?!"
리라는 이를 악문 채 웃었다.
"응. 근데 이제 저놈도 확실히 알겠지."
그녀는 하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먹고 싶으면 따라와."
식성룡이 몸을 접었다.
도시 전체가 그 그림자 아래 떨렸다.
그리고 리라는 깨달았다.
왕과 귀족과 도둑과 반란군이 몇 년, 몇십 년을 물고 뜯어도 결국 인간들끼리의 싸움은 인간 크기였다.
하지만 지금 수도 위에 떠 있는 것은 왕국보다 오래됐고, 왕관보다 배고팠고, 권력보다 단순했다.
먹는다.
그것 하나를 위해 깨어난 존재.
인간들의 전쟁은 여기서부터 갑자기 작아졌다.
너무 작아져서, 누구 편인지조차 의미가 희미해질 만큼.
식성룡이 내려왔다.
왕궁은 부서지고, 반란의 깃발은 찢기고, 수도의 하늘은 한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어둠 한가운데서, 푸른 심장별을 드러낸 리라를 향해 고대의 재앙이 정확히 입을 벌렸다.
다음 순간 무엇이 배신하고, 무엇이 남을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었다.
이제 누구도 원래 판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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