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불타는 수도와 도둑들의 반란

잿빛 골목으로 돌아온 도둑
수도 서쪽은 원래도 깨끗한 곳이 아니었다.
비가 오면 진흙이 무릎까지 튀었고, 비가 오지 않으면 검댕이 사람 목구멍까지 들어왔다. 그런데 그날 밤의 하층가는 진흙도 검댕도 아니었다. 잿가루였다. 공기 자체가 한 번 타고 남은 것처럼 입안에서 바스러졌다.
리라는 무너진 돌담 뒤에 몸을 낮춘 채 고향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이 동네가 세상에서 제일 컸다. 굴뚝이 숲보다 높아 보였고, 세탁줄은 하늘보다 복잡했다. 골목 하나하나가 미로였고, 모든 지붕이 도망칠 길이었다. 그런데 멀리 떠나고, 더 나쁜 것들을 보고, 왕궁 아래의 미친 어둠까지 보고 돌아온 지금도 하층가는 여전히 컸다.
다만 다른 의미로 컸다.
사람이 너무 많이 살고, 너무 많이 굶고, 너무 오래 참은 곳은 언제나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처럼 커 보인다.
멀리서 병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서쪽 구역 봉쇄!"
"지붕 위도 쏴!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다!"
리라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시 왕실은 늘 한결같네."
카엘이 옆에서 검은 연기 사이를 살폈다.
"정면으로 들어가면 포위된다."
"누가 정문으로 들어가재?"
리라는 자동으로 지붕선을 훑었다. 무너진 굴뚝 하나, 기와가 빠진 경사면 둘, 빨랫줄 세 줄, 그리고 검게 그을린 벽에 짧게 그어진 분필 자국 하나.
물고기 꼬리를 반쯤 베어낸 모양.
리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직 살아 있네."
카엘이 그녀를 봤다.
"뭔데."
"벨크 표시."
"그 늙은 소매치기?"
"늙었다고 자꾸 말하지 마. 그 인간은 칭찬으로 알아듣고 더 안 죽을 거야."
리라는 낮은 담을 타고 올라갔다. 발밑에서 벽돌이 조금 무너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동네 벽은 원래 절반쯤 무너져 있어야 제맛이었다. 그녀는 굴뚝 사이를 세 번 꺾고, 타다 만 염색공장 지붕을 넘어, 한때 공중목욕탕이었던 낡은 건물 뒤편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문은 겉에서 보면 이미 반쯤 탄 판잣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리라가 손을 넣은 틈은 정확히 손바닥 하나 반 넓이였고, 안쪽에는 오래된 걸쇠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딸깍.
문이 열리자 뜨거운 증기 대신 사람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땀 냄새, 약초 냄새, 피 냄새, 빵 굽는 냄새, 젖은 가죽 냄새. 살아남은 사람들이 한곳에 몰리면 나는 냄새였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개의 칼끝이 그녀를 향했다.
"멈춰."
"손 보여."
"얼굴부터 보여, 이 쥐새끼야."
리라는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인사가 아주 따뜻하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다음 순간, 방 구석에서 누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친… 진짜 리라잖아."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짝.
리라는 피하지 않았다.
맞은 뺨이 화끈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통증이 조금 반가웠다. 살아 있는 고향은 원래 사람을 예쁘게 반기지 않았다.
그녀를 때린 여자는 리라보다 반 뼘쯤 컸고, 오른쪽 눈썹 위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재투성이였고, 팔에는 노끈과 칼집이 엉켜 있었다.
다비였다.
지붕 위를 제일 빨리 달리던 아이. 리라보다 먼저 주먹질을 배운 아이. 그리고 리라가 떠나던 날 끝까지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던 아이.
다비가 이를 악물었다.
"너 진짜 살아 있었네."
리라는 맞은 쪽 뺨을 손등으로 쓱 문질렀다.
"보자마자 때리는 걸 보니 너도 건강하고."
"건강? 네 덕분에 우리 동네에 군대가 들어왔어."
그 말이 방 안 공기를 잠깐 식혔다.
리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방 안쪽에서 낯익은 쉰웃음이 들렸다.
"둘 다 그만해라. 다시 만난 첫날에 코뼈부터 부러뜨리면 감동이 너무 빨라."
구석 의자에 반쯤 누운 채 앉아 있는 늙은이가 있었다. 턱수염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코는 여전히 삐뚤었고, 눈은 여전히 남의 주머니 속 동전 개수를 셀 수 있을 만큼 빠르게 굴러갔다.
벨크였다.
그는 리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얘야, 내가 분명 말했지. 왕실 금고 털기는 도둑질이 아니라 전설이라고."
리라가 피곤하게 웃었다.
"응. 그래서 시작해 봤지."
벨크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결과는 아주 훌륭하구나. 전설이 아니라 재앙이 왔네."
떠나온 사람들의 얼굴
목욕탕 안쪽 큰 탕 자리는 이제 회합장이 되어 있었다. 물 대신 지도가 깔려 있었고, 비누 대신 화살과 칼과 붕대가 쌓여 있었다. 증기 구멍에서는 연기가 빠져나갔고, 천장 틈새로는 지붕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리라는 그제야 방 안 사람들을 제대로 보았다.
세탁집의 마로 아주머니는 팔 걷은 채 창끝에 천을 감고 있었고, 늘 코를 훌쩍이던 굴뚝 청소부 네르는 어느새 어른 키만큼 자라 석궁을 들고 있었다. 과자 훔치다 손가락 두 개를 잃었던 파즈는 지도 위에 엎드려 병사 이동 경로를 그리고 있었다. 다들 살아남았다.
살아남는 데 성공했는데도, 얼굴들은 하나같이 더 나빠져 있었다.
굶주림과 분노는 사람을 말리거나 부풀린다. 하층가 사람들은 둘 다 잘했다.
벨크가 카엘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저 칼처럼 생긴 건 뭐냐."
리라가 무심하게 답했다.
"기사."
"사형수 기사?"
카엘이 담담하게 고쳤다.
"전직 사형수다."
벨크는 진심으로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우리 모임 수준이 계속 이상해져서 마음에 든다."
다비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리라를 노려봤다.
"농담할 시간 없어. 왕실 병사들이 세 곡물창고를 불태웠고, 서쪽 우물 둘을 막았어. 지금 사람들은 굶어 죽기 전에 타 죽게 생겼다고."
리라가 낮게 물었다.
"그런데도 여긴 아직 안 털렸네."
"우리가 바보가 아니니까."
대답은 벨크가 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탕 가장자리로 걸어왔다. 지도 위에는 수도 서쪽 구역 전체가 손으로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지붕길, 하수도, 폐창고, 세금창고, 병영, 경비초소, 종탑, 그리고 왕실 운송로까지.
리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걸 누가 만들었어?"
"다 같이." 벨크가 말했다. "삼 년 전 세금 세 배 올렸을 때부터, 오 년 전 아이들 징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리고 일곱 해 전 왕실 밀정들이 골목마다 귀를 심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비가 거칠게 말을 이었다.
"넌 떠났지만 우린 남았어. 빵이 사라지면 어디서 훔쳐 올지, 사람이 잡혀가면 어느 지하창으로 빠질지, 시체를 숨길지 사람을 숨길지, 그런 걸 다 정리한 거야."
벨크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름도 있다."
리라가 그를 보았다.
"설마 네가 지었어?"
"내가 지었으면 좀 더 멋없었겠지."
벨크가 탕 바닥에 그어진 검은 선을 발끝으로 톡 건드렸다.
"우린 그늘망이다."
리라는 그 이름을 천천히 굴려 보았다.
그늘망.
햇빛이 드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도시가 너무 뜨거워지면 오히려 더 잘 드러나는 것.
벨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왕실 기록에는 아마 그림자 조직이라고 적히겠지. 좋다. 좀 무섭고, 좀 대단해 보이니까."
카엘이 지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직이라기보다는 도시 전체의 신경줄 같군."
"맞아." 다비가 말했다. "빵집 견습생, 검댕 치우는 애들, 장의사 조수, 염색공, 마차꾼, 창녀, 하수도 잠수부, 도둑, 소매치기, 밀수꾼. 이름은 다르지만 배고픈 건 똑같지."
리라는 지도 위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오래 알고 있던 골목이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도시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묶었다. 그녀 혼자만 모험을 한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이 조금 쓰렸다.
다비가 그 쓰라림을 정확히 찔렀다.
"넌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리라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은 쉬웠다. 길을 잃었다고 할 수도 있었고, 죽을 뻔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맞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말 같았다.
"나도 그럴 줄 알았어."
다비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리라는 낮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살아남으려고 떠났어. 그런데 살아남는 게 생각보다 더 멀리 가더라. 돌아오는 길도 이상하게 길었고."
"그래서?"
"그래서 결국 왔지."
다비가 콧김을 짧게 뿜었다.
"늦었어."
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도 지금은 있어."
그 말은 용서해 달라는 말도, 이해해 달라는 말도 아니었다. 단지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층가 사람들은 화려한 맹세보다 그런 사실을 더 잘 믿었다.
왕은 골목을 태웠고, 골목은 이를 드러냈다
벨크가 탕바닥 지도 위에 쇠못을 몇 개 세웠다. 빨간 머리 못은 왕실 병영, 검은 못은 봉쇄된 길, 흰 못은 남은 식량 창고였다.
상황은 보기보다 더 나빴다.
병사들은 단순히 리라를 찾는 게 아니었다. 서쪽 구역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빵 창고를 태워 굶기고, 우물을 막아 나오게 하고, 도망치는 사람은 반역자로 몰아 잡고, 저항하는 골목은 본보기로 불태웠다.
왕은 리라 한 사람을 잡으려는 척하면서, 사실은 수도 서쪽 전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카엘이 모렌에게 받은 종이 묶음을 펼쳤다.
"이건 왕궁 지하 기록이다. 왕실이 이미 하층가 사람들을 '불온한 인구'로 분류하고 있었다는 흔적이 있어. 오늘 밤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이쪽은 정리 대상이 됐을 거다."
네르가 이를 드러냈다.
"그럼 더 빨리 죽이러 가면 되잖아."
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왕은 그냥 찔러 죽이면 끝나는 상대가 아니다."
"그건 또 무슨 귀족 같은 소리야."
"귀족 같은 소리라서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리라가 카엘 말을 받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그녀는 잠깐 숨을 골랐다.
왕궁 아래에서 본 것, 왕의 가슴에 박힌 검푸른 별, 그 아래의 어둠, 그리고 '다른 심장을 가져와라'라고 속삭이던 소리까지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층가 사람들은 무서운 이야기에 익숙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공포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그래서 리라는 핵심만 골랐다.
"왕은 오래전부터 자기 몸에 괴물 같은 뭔가를 박아 넣고 버틴 거야. 그걸 끊어낼 방법도 모르고 달려들면, 왕만 죽는 게 아니라 도시 전체가 더 큰 구멍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벨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좋지 않군. 난 도시가 구멍으로 떨어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나도 그래."
리라는 지도 위 왕궁 쪽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러니까 오늘 밤 목표는 왕 죽이기가 아니야."
다비가 물었다.
"그럼 뭐야."
리라의 눈빛이 서쪽 구역 전체를 훑었다.
"왕이 우리를 한 골목씩 태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도시를 왕 손에서 훔치는 거지."
방 안이 조용해졌다.
파즈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도시를 훔친다고?"
리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왜, 금고보다 어렵다고 겁나?"
벨크가 킬킬 웃었다.
"좋아. 이제야 내 제자다운 소릴 하네."
그 뒤부터는 말이 빨라졌다.
도둑들이 계획을 세울 때는 군인들처럼 땅 위만 보지 않는다. 지붕을 보고, 배수로를 보고, 굴뚝 안을 보고, 빨랫줄의 방향까지 본다. 어느 길이 넓으냐보다 어느 길이 안 들키느냐가 중요하고, 누가 강하냐보다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중요하다.
리라는 탕바닥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달리며 말했다.
"병사들은 불길 때문에 이 세 골목을 우회할 거야. 그럼 무두장이 거리랑 염색공장 뒤편이 비어. 네르, 너희 굴뚝 애들은 거기로 올라가. 종탑 밧줄부터 잘라."
"오랜만에 듣네, 굴뚝 애들." 네르가 씨익 웃었다. "이제 우린 어른인데."
"어른이면 더 잘 자르겠지."
리라는 다른 쪽을 짚었다.
"마로 아주머니, 세탁집 사람들은 잿물 준비해. 갑옷 틈으로 들어가면 병사들 오늘 밤 아주 우아하게 울 거야."
마로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평생 잘하던 일이지."
"다비, 넌 나랑 같이 동쪽 세금창고 열어. 거기 식량이랑 몰수품이 다 쌓여 있어."
다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명령하는 척하지 마."
"척이 아니라 진짜야."
잠깐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리고 다비가 웃었다. 아주 짧고 사나운 웃음이었다.
"좋아.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네 다리 걸 거야."
벨크가 마지막으로 지도를 툭 쳤다.
"카엘. 넌?"
카엘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병사들을 상대하지."
"혼자?"
"혼자는 아니다."
카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군복을 벗은 지 오래된 얼굴들이 몇 있었다. 왕실 보급마차를 몰다가 쫓겨난 병사, 국경에서 손가락을 잃고 버려진 창병, 감옥에서 풀려난 경비병. 카엘은 그런 얼굴을 잘 알아봤다.
"칼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나를 따라와. 정면을 막는 게 아니라, 정면인 척 보이게 만든다."
벨크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아주 좋아. 도둑과 기사라. 세상이 오래가긴 했다."
리라는 한 번 더 모두를 바라보았다.
떠나온 사람들.
남아 있던 사람들.
자기가 모르던 동안 버텨 낸 사람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혼자 살아남는 데는 재주가 필요하지만, 도시를 살려내려면 서로를 믿는 쪽의 용기가 더 많이 든다.
그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그래서 리라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좋아, 다들 잘 들어. 오늘 밤은 전쟁이 아니야."
네르가 물었다.
"그럼?"
리라가 씩 웃었다.
"아주 큰 도둑질이지."
도둑들은 길이 아니라 틈으로 싸운다
반란은 북소리와 함께 시작되지 않았다.
먼저 꺼진 것은 등불이었다.
서쪽 구역 큰길의 가스등이 하나둘 어두워졌다. 병사들은 화재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지붕 위를 기어 다니던 굴뚝 청소부들이 밸브를 잠그고 있었다. 어둠은 하층가 사람들의 오래된 친구였다.
그다음에는 종이 멈췄다.
비상 종탑 밧줄이 동시에 잘려 나가며 세 곳의 종이 모두 허공에서 멍청하게 흔들리기만 했다. 경보는 울리다 말았고, 명령은 골목 끝까지 닿지 못했다.
세 번째는 길이었다.
염색공장 뒤 저장고 문이 열리며 검은 염료가 돌바닥을 타고 쏟아졌다. 물처럼 보였지만 물보다 끈적하고, 기름보다 미끄러웠다. 그 위로 돌진한 왕실 병사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위쪽 창문에서는 세탁집 여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잿물을 들이부었다.
비명이 났다.
하층가 사람들은 그 비명을 듣고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리라는 다비와 함께 세금창고 지붕을 타고 달렸다. 아래에는 왕실 문장이 찍힌 곡물 자루와 몰수한 담요 더미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물건들 대부분은 원래 하층가에서 빼앗은 것이었다.
리라가 중얼거렸다.
"도둑놈들."
다비가 코웃음 쳤다.
"드디어 누가 더 큰 도둑인지 비교하게 됐네."
창고 문은 커다란 철자물쇠 셋으로 봉해져 있었다. 예전 리라였다면 철심을 넣고 하나씩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안에서는 심장별이 조용히 뛰고 있었다.
쿵.
금속 속의 선들이 눈에 보였다. 잠금장치 안의 길이 푸르게 떠올랐다.
리라는 손끝으로 허공을 한 번 긋듯 움직였다.
철컥. 철커덕. 쾅.
문이 열렸다.
다비가 잠깐 그녀를 보았다.
"그거 볼 때마다 기분 이상해."
"나도 그래."
"좋아. 그럼 이상한 건 나중에 고민하고 지금은 털자."
둘은 동시에 문짝을 밀어젖혔다.
안쪽의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그늘망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쏟아져 들어가 식량 자루를 날랐고, 담요를 나눴고, 압수된 칼과 쇠망치까지 전부 빼냈다. 어떤 아이는 왕실 세금 장부를 들고 나와 활활 타는 화로에 집어넣었다.
장부가 타는 냄새는 이상하게도 달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는 카엘이 병사들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광장처럼 넓은 곳으로 싸우지 않았다. 일부러 골목 입구, 계단 중간, 벽과 벽 사이 같은 좁은 자리만 골랐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없는 길에서는 숫자가 힘이 안 됐다. 병사 하나가 쓰러지면 뒤가 막혔고, 그 잠깐 사이 위층 창문에서 벽돌이 떨어지고, 옆 지붕에서 창대가 튀어나오고, 바닥 아래 하수구 뚜껑이 열리며 누군가 발목을 잡았다.
병사들은 길을 알고 싸웠다.
도둑들은 길이 되어서 싸웠다.
서쪽 구역 전체가 살아 있는 함정처럼 움직였다.
어느 집 할머니는 병사들에게 울면서 문을 열어 주는 척하다가, 안으로 들인 뒤 뒷문으로 가출한 돼지를 풀어 버렸다. 겁먹은 돼지가 갑옷 사이를 들이받으며 날뛰는 동안 지붕 위 아이들이 창을 훔쳐 갔다. 어떤 마차꾼은 불붙은 수레를 일부러 굴려 병영 쪽 길을 막았고, 어떤 장의사 조수는 시체 운반포에 산 사람 넷을 숨겨 검문을 통과시켰다.
벨크는 그 한가운데서 누구보다 바빴다. 늙은 몸으로 골목마다 나타나 사람을 욕하고, 방향을 바꾸고, 주머니를 털고, 지시를 던졌다.
"그 자루는 저기로!"
"야, 그 칼 훔친 김에 제대로 써!"
"누가 내 비상금 상자 가져갔어? 아, 됐다. 지금은 혁명 중이지."
혁명이라는 단어는 벨크 입에서 나올 때조차 우스웠다. 그런데 그 밤만큼은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리라는 숨이 차오를 때마다 도시가 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비명과 경보뿐이었다.
그다음에는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빼앗겼던 창고가 열리고, 봉쇄됐던 골목이 열리고, 사람들이 숨어 있던 다락방이 열렸다. 마침내는 목소리가 열렸다.
"이쪽이다!"
"아이들 먼저 빼!"
"왕실 마차를 뒤집어!"
"우물 뚜껑 다시 열어!"
누군가는 이름을 불렀고, 누군가는 처음 보는 사람 손을 잡아 끌었다. 반란은 검보다 그렇게 퍼졌다.
리라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무서우면서도 좋았다.
혼자 달릴 때는 자기 발소리만 들린다.
수백 명이 함께 달리기 시작하면, 그건 더 이상 도망이 아니다.
불타는 수도 위로 올라선 이름
동틀 무렵, 서쪽 처형광장은 왕실 것이 아니었다.
원래 그곳은 죄인을 매달고 세금을 공포처럼 보여 주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날 아침, 교수대 밧줄에는 왕실 깃발이 거꾸로 매달려 불타고 있었다. 광장 바닥에는 몰수품 창고에서 풀려난 식량 자루가 줄지어 놓였고, 굶주린 사람들이 처음으로 서로 밀치지 않고 줄을 섰다.
그것만으로도 기적 같았다.
카엘은 광장 가장자리에서 피 묻은 검을 닦고 있었다. 다치긴 했지만 서 있었다. 네르와 굴뚝 애들은 종탑 꼭대기에서 훔쳐 온 나팔을 마구 불어 대고 있었고, 마로 아주머니는 병사 헬멧을 양동이로 써서 물을 나르고 있었다.
벨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미 광장 한복판 상자 위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줄 서! 빵은 싸우는 순서가 아니라 굶은 순서로 가져가!"
"그 구호 멋없어!" 누군가 위에서 외쳤다.
"멋있으려고 사는 게 아니야!" 벨크가 받아쳤다. "살려고 사는 거지!"
그 말에 광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죽을 뻔한 밤 끝에 터지는 웃음은 대개 거칠고, 약간 미쳤고, 그래서 더 사람답다.
리라는 상자 더미 뒤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손끝은 여전히 떨렸고, 심장별은 불길 가까이 있을수록 더 자주 반응했다. 왕궁 쪽에서 올려다보는 어떤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쪽을 볼 시간이 아니었다.
다비가 그녀 앞으로 와서 물병을 던졌다.
리라가 받아 마시자 다비가 말했다.
"네가 떠난 뒤에도 우린 계속 버텼어."
리라는 물병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네가 돌아와서 우리가 움직인 거 아니야."
"그것도 알아."
다비는 잠깐 침묵했다가, 턱으로 광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네가 돌아와서 더 크게 움직인 건 맞아."
리라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칭찬이면 좀 더 예쁘게 해."
"아직 안 끝났거든."
"그건 네가 항상 맞는 말만 해서 싫어."
다비의 시선이 잠깐 부드러워졌다. 아주 잠깐이라 리라가 본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또 도망갈 거야?"
질문은 짧았지만 오래된 것이었다.
리라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빵을 나르는 아이들, 피를 닦는 여자들, 빼앗은 창을 쥔 노동자들, 불탄 집에서 구해 낸 새장과 냄비와 담요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여전히 욕을 하며 사람을 살리고 있는 벨크까지.
어릴 때 그녀는 이곳을 탈출해야 할 미로로만 봤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다비가 눈썹을 올렸다.
"진짜?"
"응." 리라가 물병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오늘은."
"오늘만?"
리라가 씨익 웃었다.
"내일은 네가 발목 잡으면 되지."
다비는 이번엔 진짜로 웃었다. 짧고, 사납고, 살아 있는 웃음이었다.
그때 광장 끝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서쪽 구역 바깥 골목들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굶주린 얼굴, 지친 얼굴, 화난 얼굴, 아직 상황을 못 믿는 얼굴들. 누군가는 리라를 알아봤고, 누군가는 카엘을 알아봤고, 누군가는 그냥 왕실 깃발이 불타는 광경만 보고도 발걸음을 멈췄다.
이럴 때 도시에는 얼굴이 필요했다.
벨크가 상자 위에서 리라를 보더니 손짓했다.
"얘야. 네 차례다."
리라는 질색했다.
"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재주 없어."
"거짓말." 벨크가 말했다. "넌 항상 큰일 직전에 제일 시끄러웠어."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였다.
리라는 속으로 욕을 한 번 하고 상자 위로 올라갔다. 높은 곳은 익숙했다. 지붕이든 창틀이든, 자기 목숨이 걸린 곳이 대개 높은 자리였으니까.
광장 전체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리라는 잠깐 목이 탔다. 대단한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원래 대단한 사람보다 빠른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자기 식으로 했다.
"좋아, 다들 잘 들어."
웅성거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왕은 나 하나 잡겠다고 이 구역에 불을 질렀어."
누군가 욕설을 뱉었다. 누군가는 주먹을 쥐었다.
리라는 말을 이었다.
"근데 다들 알잖아. 저놈이 진짜 원하는 건 나 하나가 아니야. 우리지. 우리 굴뚝, 우리 우물, 우리 빵, 우리 이름. 오래전부터 하나씩 빼앗다가 오늘 밤엔 그냥 통째로 태워 버리려고 든 거야."
광장 저편에서 누군가 "맞아!" 하고 외쳤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계산을 바꾸자."
리라는 왕궁이 있는 언덕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린 더 이상 쫓기는 쥐가 아니야. 쥐가 너무 많으면 곳간 주인이 먼저 겁먹는 법이지."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좀 더 컸다.
리라는 그 웃음을 딛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은 우리가 열고, 식량은 우리가 나누고, 길은 우리가 정한다. 왕이 우리를 반역자라고 부르면, 좋아. 그럼 반역이 뭔지 제대로 보여 주자."
광장 안의 공기가 변했다.
그건 함성 직전의 공기였다.
리라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오늘 밤부터 이 도시는 왕 명령이 아니라 그림자로 움직인다! 불태운 만큼 돌려주고, 빼앗은 만큼 빼앗아 오자! 살아남으려고 숨어 살던 손들 전부 꺼내! 이제 우리가 수도를 훔친다!"
이번엔 진짜 함성이 터졌다.
벽이 울리고, 깨진 창이 떨리고, 남아 있던 종 하나가 누가 친 것도 아닌데 흔들렸다.
도시가 대답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밤
그날 해가 떠오를 때, 수도는 두 조각으로 나뉘어 보였다.
언덕 위 왕궁은 여전히 검고 차갑고 닫혀 있었다.
하지만 언덕 아래 서쪽 구역은 더 이상 무릎 꿇고 있지 않았다. 지붕마다 신호천이 걸렸고, 빼앗은 마차가 바리케이드가 되었고, 빵과 물이 돌기 시작했다. 그늘망의 표식이 골목마다 새로 그어졌다. 물고기 꼬리, 세 갈래 선, 뒤집힌 종, 끊어진 사슬.
왕실 입장에서는 전부 범죄 표시일 것이다.
하층가 입장에서는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카엘이 광장 쪽으로 다가왔다.
"동쪽 병영이 재정비 중이다. 오래 버티진 못한다."
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도 이제 우린 도망치기만 하진 않아."
카엘이 그녀를 잠깐 바라봤다.
"네가 이런 걸 이끌게 될 줄은 몰랐다."
리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랐어. 난 원래 빵 두 덩이 훔치던 사람이거든."
"이젠 도시를 훔치고 있군."
"그러네."
그 말이 이상하게 웃겨서 리라는 짧게 웃었다. 하지만 곧 웃음이 가셨다. 왕궁 쪽 하늘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기 너머, 아직 아침이 완전히 밝지도 않았는데 별 몇 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별빛 가운데 하나가, 누가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운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리라의 심장별이 즉시 반응했다.
쿵.
그 박동은 전에 없던 종류였다. 문이 열릴 때의 떨림도, 자물쇠가 풀릴 때의 예민함도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먼 하늘에서 몸을 돌리는 것 같은 감각.
리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연기 위로, 너무 커서 처음에는 구름인 줄 알았던 그림자 하나가 아주 멀리 스쳐 지나갔다.
카엘도 그것을 보았는지 손이 저절로 검으로 갔다.
광장의 사람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빵을 나르고, 부상자를 돌보고, 다음 바리케이드를 세우느라 바빴다. 반란은 겨우 첫 숨을 쉬기 시작한 참이었다.
리라는 왕궁과 하늘, 그리고 불타는 수도를 번갈아 보았다.
개인의 목숨을 건 도둑질은 오래전에 끝났다.
이제 그녀가 가진 것은 자기 목숨 하나가 아니었다. 사람들, 골목, 굶주린 도시, 왕의 비밀, 아래의 어둠, 그리고 아직 이름도 모르는 하늘의 거대한 그림자까지 전부 한 줄로 엮이기 시작했다.
벨크가 아래에서 외쳤다.
"얘야! 멍 때릴 시간 있으면 내려와! 혁명도 배고프다!"
리라는 피식 웃었다.
"지금 간다!"
그녀는 상자 위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광장 바닥과 도시 전체가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
쿵.
왕은 아직 죽지 않았다.
도시는 이제 막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별빛을 하나씩 삼키는 무언가가 수도를 향해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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