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물을 깨운 대가

별빛 문 너머
리라는 발을 내디딘 직후, 자신이 어디로 떨어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래가 없어진 듯한 감각이 먼저 왔다. 그다음에는 귀를 찢는 침묵이 왔다. 세상이 조용해진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잠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 것 같았다. 피가 흐르는 소리,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 멀고 먼 곳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낯선 목소리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심장별의 박동만이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쿵.
쿵.
쿵.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엎드려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먼지 냄새와 오래된 향 냄새가 함께 들어왔다. 눈을 뜨니 천장은 높고 둥글었다. 갈라진 돔 천장 틈으로 새벽 전의 희미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벽에는 별자리 같은 문양이 빼곡했고, 가운데에는 검은 돌로 만든 제단이 있었다. 누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래 버려진 장소였다.
리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입 안에서는 피맛이 났다.
"여긴 또 어디야…"
대답은 없었다. 대신 제단 아래 새겨진 글자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리라는 순간 얼어붙었다. 분명 왕실 글자와는 달랐다. 하층가에서 자란 그녀가 알 리 없는, 훨씬 오래되고 꼬인 문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뜻이 읽혔다.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바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제삼 봉인실 개방.
심장별 반응 확인.
그릇 선정 절차 개시.
리라는 욕설을 삼켰다.
"아니, 잠깐. 누가 뭘 선정해?"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심장별을 꺼내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리라는 굳은 얼굴로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빛이 손등 아래에서 느리게 흘렀다. 혈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별자리처럼 점과 선을 이루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빛은 손목을 지나 팔을 타고 올라가 쇄골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심장별은 더는 주머니 속 물건이 아니었다.
그건 그녀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것
리라는 비틀거리며 제단으로 달려갔다. 혹시 이곳이 봉인실이라면, 다시 봉인하는 방법도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도둑은 늘 믿고 싶은 것부터 믿는다. 현실을 먼저 보면 겁이 나니까.
제단 위에는 얕은 홈이 파여 있었다. 구체 하나가 딱 들어갈 크기였다.
"좋아. 들어갔으면 다시 나오겠지."
그녀는 두 손으로 가슴팍을 눌렀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바보 같은 짓이라도 해야 했다. 심장별의 박동은 분명 그녀 갈비뼈 안쪽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 바로 옆, 아니 거의 겹쳐진 자리에서.
쿵.
리라의 심장이 뛰었다.
쿵.
심장별이 따라 뛰었다.
두 박동이 점점 구별되지 않았다.
갑자기 통증이 밀려왔다. 누군가 갈비뼈 사이에 얼음칼을 밀어 넣은 것 같았다. 리라는 신음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 낯선 장면들이 그녀 눈앞을 스쳤다.
높은 탑이 있었다. 탑 꼭대기에는 불이 아니라 별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탑 아래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무릎 꿇고 있었고, 그 앞에 선 여자는 손바닥에서 푸른 불꽃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사람이 아니라 밤하늘 같았다.
그 여자가 말했다.
그릇은 문을 연다.
문은 왕을 삼킨다.
리라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환영은 사라졌지만, 통증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제단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손끝에 닿은 돌이 다시 빛났다.
심장별은 보관하는 유물이 아니다.
심장별은 깨어나면 그릇을 만든다.
선정 완료.
"싫어."
리라는 거의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가 원한 건 돈이지, 그릇이 아니야."
벽면의 별문양이 한꺼번에 켜졌다. 방 안 공기가 확 달라졌다.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눈을 뜨는 순간처럼, 차갑고 묵직한 기운이 사방에서 몸을 눌렀다.
제단 뒤에 서 있던 석상이 움직였다.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돌조각상이었다. 별무늬 망토를 두른 왕 같은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반쯤 닳아 있었다.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지며 놈의 눈구멍에 푸른 불이 켜졌다.
"승인되지 않은 각성 확인."
목소리는 쇳소리 같았다.
"그릇의 안정 절차를 진행한다."
"안정? 그 소리 하는 것치곤 전혀 안정적이지 않거든."
리라는 뒤로 물러섰다. 도둑의 장점 하나는 위험한 걸 보면 빨리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눈앞의 저것은 대화가 통할 종류가 아니었다.
석상이 손을 들자 바닥 문양이 번쩍였다. 푸른 선들이 뱀처럼 달려와 리라의 발목을 감쌌다. 그녀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그 순간, 심장별이 거칠게 뛰었다.
쿵!
리라의 몸 아래에서 빛이 폭발하듯 퍼졌다. 발목을 감싼 선들이 역으로 튕겨 나가더니 석상의 다리를 휘감았다.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석상은 한쪽 무릎을 찍으며 비틀거렸다.
리라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푸른 불티 같은 것이 흩어지고 있었다.
"진짜로 내가 한 거야?"
석상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더 빨랐다.
리라는 그대로 제단 밑으로 몸을 굴렸다. 바로 위로 돌주먹이 떨어지며 바닥을 박살 냈다. 파편이 뺨을 스쳤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옆문 쪽으로 달렸다. 닫혀 있던 돌문 앞에 다다랐을 때, 심장별이 또 한 번 뛰었다.
쿵.
철컥.
문이 저절로 열렸다.
리라는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석상이 으르렁거렸지만, 그녀는 좁은 계단으로 몸을 던지듯 올라갔다. 도둑질이 인생을 망친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빠르게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꿔버린 적은 처음이었다.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심장별은 훔친 물건이 아니었다.
그건 자기 주인을 직접 골라붙는 종류의 재앙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날 밤, 그 재앙이 리라를 골랐다.
왕의 사냥이 시작되다
계단 끝 문을 밀고 나오자, 서늘한 새벽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리라는 무너진 예배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지붕은 절반쯤 주저앉아 있었고, 스테인드글라스 자리는 오래전에 깨져 빈 구멍만 남아 있었다. 예배당 너머로는 오래된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었다. 비석들은 이끼에 잠겨 있었고, 까마귀들이 제 멋대로 앉아 날개를 다듬고 있었다.
도시는 멀지 않았다. 언덕 아래로 하층가의 지붕들이 보였고, 그 너머 왕성이 새벽빛 속에 창백하게 떠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왕성 가장 높은 탑에서 푸른 불기둥이 솟아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 봉화였다. 그리고 잠시 뒤, 동쪽 성벽 위 탑에서도 같은 푸른 봉화가 올랐다. 그다음은 남쪽. 그다음은 서쪽. 마치 누군가 도시 전체의 맥박을 한꺼번에 깨운 것 같았다.
리라는 얼굴이 굳었다.
왕실의 봉화는 색마다 뜻이 있었다. 붉은 봉화는 전쟁, 검은 봉화는 역병, 흰 봉화는 왕실 장례. 푸른 봉화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금지된 마법.
혹은 왕국 전역 추적 명령.
"설마… 나 하나 때문에?"
언덕 아래 큰길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전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퍼졌다.
"왕명이다! 왕실 금고를 침탈하고 금지 성유물을 탈취한 반역자를 찾는다!"
리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용의자는 하층가 출신의 젊은 여자. 검은 머리, 회색 눈, 신장 보통. 푸른 빛의 이상 현상을 동반할 수 있음!"
전령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범인을 숨기거나 돕는 자는 반역 공모로 처형한다! 각 도시와 영지, 관문과 항구에 즉시 통보하라!"
왕성이 쏘아 올린 푸른 봉화는 그 말을 증명하듯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먼 성벽 위에 있던 불빛 하나가 다시 더 먼 감시탑으로 옮겨붙는 것이 보였다. 저 불은 오늘 안에 인근 영지들로 번질 것이다. 내일이면 국경 근처 초소도 알게 될 것이다.
리라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기가 막혀서 나온 웃음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녀는 빵을 훔치고 경비병한테 욕하는 하층가 도둑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그녀는 왕국 전체가 쫓는 이름 없는 재앙이 되어 있었다.
배 속이 싸늘해졌다.
왕성 경비만 피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세관원도, 현상금 사냥꾼도, 배고픈 농부도, 빚쟁이도, 술집 주인도 그녀를 팔아넘길 수 있었다. 왕국은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지만, 현상금에는 꽤 친절했다.
그녀는 예배당 그림자 아래에서 외투 깃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손이 다시 멈췄다.
외투 천 아래, 가슴팍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또 왜 이래."
빛은 피부 아래에서 맥을 쳤다. 누가 봐도 평범한 상태는 아니었다. 숨긴다고 숨겨질 종류도 아니었다.
리라는 이를 악물고 언덕을 내려갔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하층가에서 도망치는 법을 가르쳐 준 늙은 도둑, 벨크를.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기도 했다.
도둑의 집에 사냥개가 오다
하층가는 해가 떠도 늘 해 지기 직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젖은 벽, 비뚤어진 굴뚝, 밤새 술 냄새를 토한 골목, 그리고 사람보다 먼저 눈치를 보는 개들. 리라는 익숙한 길을 익숙하지 않은 기분으로 지나갔다. 모든 문이 오늘따라 더 단단해 보였다. 모든 창문이 안쪽에서 그녀를 훔쳐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미 소문을 들은 뒤였다.
"왕실 유물을 훔쳤대."
"유물이 아니라 재앙이래."
"푸른 불을 쓰는 도둑이라던데."
"잡아가면 금화 오십 닢이래."
"오십? 지금 백 닢으로 올랐어."
리라는 모자를 눌러쓰고 어깨를 낮췄다. 소문은 늘 물가보다 빨리 뛰었다.
벨크의 은신처는 버려진 양조장 지하에 있었다. 술은 오래전에 바닥났지만, 냄새만은 벽돌 사이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리라는 잘 아는 깨진 창틀로 몸을 밀어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벨크."
대답이 없었다.
"벨크, 나야."
어둠 속에서 무언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뒤, 삐죽한 코와 삭은 수염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벨크는 원래도 놀란 쥐처럼 생겼지만, 오늘은 정말 쥐보다 더 놀란 얼굴이었다.
"미친 애야."
그의 시선이 곧바로 리라의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넌 대체 뭘 훔친 거냐?"
"나도 그걸 물으러 왔어."
리라는 외투를 열어 보였다. 쇄골 아래 피부에 푸른 문양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별처럼 점이 찍히고, 선이 이어지고, 작은 원이 맥박에 맞춰 열리고 닫혔다.
벨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안 돼."
"뭐가 안 돼?"
"그건 돈 되는 물건이 아니야."
그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사람을 물건으로 바꾸는 쪽이지."
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듣기 싫은 말일수록 이상하게 정확하게 꽂혔다.
벨크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리라를 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지하 저장고 한쪽 벽에는 오래된 낙서들이 있었는데, 그중 몇몇은 별 모양과 원무늬였다. 리라는 전에는 그게 아이들 장난인 줄 알았다. 오늘 보니 아니었다.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벨크가 말했다. "첫 번째 왕들이 아직 왕이 아니던 시절,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주운 자들이 있었다더라. 그 별은 검보다 날카롭고, 불보다 오래 타고, 문이 닫힌 곳을 열 수 있었대. 대신 그냥 쓰는 건 안 됐지."
그는 리라의 가슴을 턱짓했다.
"사람 몸이 필요했어. 별을 담을 그릇."
리라는 썩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항아리라도 됐다는 거야?"
"항아리보다 나쁘지."
벨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항아리는 깨져도 안 비명을 지르잖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리라는 처음으로 진짜 겁이 났다. 경비병에게 쫓길 때의 겁과는 달랐다. 그건 칼을 피하면 되는 종류였다. 지금은 자기 몸 안에 칼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빼낼 수는 없어?"
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답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양조장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많았다. 너무 많았다.
장화가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 쇠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낮고 차가운 명령이 이어졌다.
"출입구 봉쇄."
"별반응이 이 근처에서 멈췄습니다."
"살아 있는 상태로 확보하라."
리라와 벨크가 동시에 굳었다.
"별반응?" 리라가 입술만 움직여 물었다.
벨크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추적당하는 모양이다."
리라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정말 기가 막힐 때 사람은 웃음하고 욕설 중 하나를 고르게 되는데, 오늘은 둘 다 아까웠다.
문짝이 걷어차이는 소리가 났다.
"왕실 수색대다! 안에 있는 자는 무기를 버리고 나와라!"
벨크는 리라를 향해 작게 욕을 했다. 그 말 속에는 이상하게 애정이 섞여 있었다.
"지붕으로 가."
"같이 가."
"난 늙었고 넌 가벼워. 이런 날엔 가벼운 게 이겨."
그는 리라 손에 작은 천주머니를 쥐여줬다. 자물쇠 따개와 은화 몇 닢, 그리고 그녀가 처음 도둑질 배울 때 쓰던 얇은 칼이 들어 있었다.
"벨크."
"살고 나면 미안해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반대쪽 통로에 기름병을 던졌다. 불이 확 붙으며 저장고 안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벨크가 일부러 쇠통들을 쓰러뜨렸다. 요란한 소리가 사방으로 터졌다.
"이쪽이다, 멍청이들아!"
경비들이 그쪽으로 몰려갔다.
리라는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하층가의 규칙은 단순했다. 망설이는 아이는 잡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벽을 타고 올라갔다. 무너진 배관을 짚고, 썩은 들보를 딛고, 손끝 하나로 몸을 끌어올렸다. 지붕 틈으로 빠져나왔을 때, 아래에서 벨크의 고함과 병사들의 욕설이 한꺼번에 터졌다.
리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한 번은 돌아봤다.
연기 사이로 벨크가 두 병사에게 붙들려 무릎 꿇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투성이 얼굴로도 리라 쪽은 보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시선을 주면, 그게 길이 되니까.
리라는 입안이 쓰게 마르는 걸 느꼈다.
심장별이 조용히 뛰었다.
쿵.
마치 말 없는 경고 같았다.
네 곁에 있는 것들은 망가질 것이다.
열쇠가 된 소녀
리라는 지붕 위를 미친 듯이 달렸다.
하층가의 지붕은 언제나 그녀 편이었다. 낡고, 삐걱거리고, 비가 새고, 사람 사는 꼴처럼 엉망이었지만, 적어도 비싼 장화를 신은 병사들보다는 그녀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붕마저 낯설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선들이 도시 위에 떠 있었다. 굴뚝과 탑, 성문과 우물, 오래된 신전 잔해와 다리 밑 석상들이 푸른 실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거대한 자물쇠였고, 누군가 그 안쪽 구조를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리라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깜빡였다. 선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제발… 내가 굶어서 환각 보는 거면 차라리 좋겠는데."
심장별은 그녀 농담에 대꾸라도 하듯 한 번 더 뛰었다.
쿵.
바로 아래 골목에서 철문 수십 개가 동시에 열렸다. 창고 문, 뒷문, 자물쇠 채운 울타리, 심지어 오래 잠겨 있던 우물 덮개까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놀란 상인 하나가 비명을 질렀고, 개들이 미친 듯 짖기 시작했다.
리라는 지붕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한 거라고 하지 마."
그러나 세상은 늘 가장 싫은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마도사 복장을 한 자 둘이 골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반응이 이동한다!"
"그릇이다! 근처에 있다!"
그릇.
그 한마디가 칼처럼 들어왔다.
도둑, 범인, 반역자보다 더 싫은 이름이었다. 도둑은 그래도 사람이다. 반역자도 선택은 한다. 하지만 그릇은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의 목적을 담는 빈 물건이었다.
왕실은 지금 그녀를 붙잡아 사람으로 다루려는 게 아니었다.
열쇠로 다루려는 것이었다.
리라는 이를 갈았다.
"난 빈 통 아니야."
하지만 세상은 그녀 항의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북소리는 더 가까워졌고, 성문 쪽에서는 또 다른 전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정오, 반역 기사 라우렌 폰 에단의 공개 처형을 집행한다!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의 말로를 보라!"
리라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동쪽 광장 쪽이었다. 그곳은 보통 세금 공고나 공개 매질 같은 것들이 열리는 곳인데, 오늘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병사들이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검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 바퀴 달린 철창이 하나 보였다.
그 안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 망가진 갑옷, 손목과 목에 무거운 사슬. 얼굴은 반쯤 피투성이였지만, 이상하게도 등을 구부리지 않고 앉아 있었다. 마치 사형대도 귀찮은 약속 하나쯤 되는 것처럼.
리라의 숨이 순간 멎었다.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본 적이 있었다.
어젯밤 심장별이 보여 준 환영 속에서.
사형대 아래 무릎 꿇고 있던 기사.
그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멀고 시끄러운 광장 한복판인데도, 마치 정확히 그녀를 본 것처럼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회색 눈이었다.
그의 시선이 리라의 외투 아래, 빛이 새어 나오는 가슴께에 잠깐 머물렀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입 모양이 움직였다.
심장별.
리라는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광장 아래에서는 군중이 웅성거렸고, 병사들은 창을 세웠고, 왕국은 여전히 그녀를 쫓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잡혀갔고, 숨어들 집은 사라졌고, 자기 몸은 점점 자기 것이 아니게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형을 기다리는 저 기사가, 왕국 전체보다 먼저 그녀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아봤다.
그 사실 하나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아주 위험한 생각도 떠오르게 했다.
살고 싶다면 도둑은 문을 찾는다.
문이 없으면 창문을 찾고, 창문도 없으면 벽에 구멍을 낸다.
그리고 오늘 리라 앞에 남은 유일한 구멍은, 곧 죽을 기사 하나뿐인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낮췄다. 광장 아래에서 처형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검은 깃발이 펄럭이고, 북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리라는 외투 속에서 미친 듯이 뛰는 두 개의 심장을 느꼈다.
자기 것 하나.
별의 것 하나.
둘 다 살아남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리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좋아."
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사람을 훔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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