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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남은 한 자루

마음에 남은 한 자루

피 냄새가 식어 가는 새벽

도룡대의 밤이 꺾인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그것이 정말 끝났다고 믿지 못했다.

횃불은 절반쯤 꺼져 있었고, 들판에는 아직 연기와 피 냄새가 엉겨 붙어 있었다. 북은 멎었지만 사람들의 귀에는 여전히 두둥거리는 울림이 남아 있었다. 전장이란 원래 그렇다. 칼이 멈춘 뒤에도 한참 동안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서문진은 해가 뜨기도 전에 가장 먼저 검을 거두었다.

그는 금이 간 잔검을 칼집에 넣은 채, 쓰러진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정파의 제자든, 돈에 팔려 온 낭인이든, 붉고 검은 깃발 아래 섰던 자든 먼저 숨이 붙어 있는지부터 살폈다. 혜명은 벌써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상자들의 상처를 눌러 막고 있었고, 당연화는 피와 독이 섞였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며 약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유한성은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가장 무거운 부상자 둘을 한꺼번에 들쳐 업고 옮겼고, 진청허는 멀찍이 서서 도망치려는 복면인보다 몰래 칼을 꺼내는 자를 먼저 골라냈다.

혼란은 끝났지만, 원한은 아직 뜨거웠다.

화산 소속의 젊은 제자 하나가 포박된 복면인을 향해 이를 갈며 검을 빼 들었다.

"이놈들이 우리 사형제를 죽였습니다. 지금 여기서 목을 베어야—"

딱.

그 검은 끝내 내려가지 못했다.

서문진의 칼집이 먼저 젊은 제자의 손목을 가볍게 쳤기 때문이다. 세게 친 것도 아니었는데, 제자는 손이 저린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놓칠 뻔했다.

"전장은 끝났소."

서문진이 조용히 말했다.

"묶인 사람을 베는 건 검이 아니라 화풀이요."

젊은 제자는 눈을 부릅떴다.

"저자가 적입니다!"

"아니."

서문진은 포박된 복면인을 한 번, 그 제자를 한 번 바라보았다.

"지금 저자는 증언할 사람이고, 자네는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오."

한마디는 짧았지만, 그 속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마침 그때 장문인의 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도룡대의 밤은 여기서 끝낸다. 포박된 자를 함부로 죽이는 자는 천라지망의 뜻을 이어받는 것으로 알겠다."

그 말에 사방이 잠잠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이 밤의 승부는 누가 더 많이 베었느냐로 갈린 것이 아니었다. 끝내 누가 먼저 칼을 멈췄느냐가, 더 긴 싸움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아주 느리게 밝아 왔다.

붉은빛은 피처럼 짙지 않았다. 다행히도 새벽의 빛은 늘 피보다 엷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승패보다 무거운 것

해가 산등성이 위로 걸릴 무렵, 도룡대 아래 무너진 누각 앞에는 살아남은 각 문파의 인물들이 모였다.

누군가는 아직 핏자국도 닦지 못한 채 서 있었고, 누군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장문인은 상처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끝내 자리에 나왔고, 악청란은 화산 제자들 맨 앞에 서서 흔들림 없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름난 중소문파의 장로였다.

"이번 일의 뿌리를 뽑으려면, 붉은 깃발 아래 섰던 자들을 모조리 추려야 합니다. 의심 가는 자는 선제적으로 처단해야—"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요."

진청허가 비웃듯 말을 잘랐다.

장로의 얼굴이 굳었지만, 반박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악청란이 차갑게 한 걸음 나섰다.

"가짜 명령에 속아 칼을 뽑은 자들이 있다. 그 죄는 가볍지 않다. 하지만 확인도 없이 죄를 뒤집어씌우는 짓은 오늘 밤 우리가 막아 낸 바로 그 방식이다."

그녀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화산의 이름이 악용된 밤이었다. 그러니 그 이름을 바로 세우는 일도 화산 사람이 먼저 해야 했다.

장문인이 힘겹게 숨을 고른 뒤 서문진을 바라보았다.

"문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 쏠렸다.

도룡기를 쓰러뜨린 검객, 거짓 전장의 흐름을 끊은 자, 진무백의 제자. 밤이 끝나고 나면 강호는 언제나 누군가를 앞에 세우려 든다. 영웅이든, 기수든, 새 깃발이든 하나는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문진은 그 시선을 받아도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이긴 게 아닙니다."

몇몇 눈썹이 꿈틀했다.

서문진은 말을 이었다.

"우린 겨우 속지 않으려 애쓴 것뿐이오. 이 밤이 남긴 것은 승리보다 수치요. 누가 강했는지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분노와 깃발에 끌려갔는지가 더 무겁습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지금 필요한 건 새 칼부림이 아니오. 누가 명령을 꾸몄는지 밝히고, 누가 거짓으로 문파의 이름을 팔았는지 드러내고, 억지로 끌려온 자와 제 욕심으로 사람을 몰아넣은 자를 가르는 일이 먼저요. 그걸 하지 않고 의심 나는 자부터 베기 시작하면, 오늘 밤의 도룡기만 다른 이름으로 다시 올라갈 뿐이오."

유한성이 팔짱을 낀 채 툭 웃었다.

"듣고 보니 속은 시원한데, 아주 골치 아픈 말만 골라 하는군."

남소월이 작게 킥 웃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주인공 같은 거죠."

당연화는 피 묻은 손을 닦으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맞는 말이에요. 독이 남았는데 상처만 꿰매면 결국 다시 터지죠."

장문인은 오래도록 서문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피로도 있었고, 미안함도 있었고, 늦게나마 제자를 바로 본 안도도 있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천학문은 이번 사태를 숨기지 않겠다. 정파의 체면보다 진실을 먼저 세우겠다."

그 한마디는 가벼운 선언이 아니었다.

체면을 먼저 세우는 강호에서, 진실을 먼저 입에 올리는 일은 새 적을 만드는 일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더욱 값이 있었다.

그날 아침, 장문인은 공개적으로 명했다. 포박된 자들을 함부로 베지 말 것. 가짜 명령과 위조된 문서, 숨은 자금줄과 연결망을 모두 조사할 것. 그리고 붉고 검은 깃발 아래 섰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몰아세우지 말 것.

그 말이 모든 원한을 당장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칼이 다시 너무 쉽게 뽑히는 일은 막았다.

서문진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충분하지 않더라도 시작은 이런 식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금 간 잔검

정오가 가까워지자 도룡대의 바람은 한결 또렷해졌다.

서문진은 무너진 성벽 아래에 앉아 잔검을 꺼내 보았다. 칼등 가까이 간 금은 밤보다 더 선명해져 있었다. 햇빛을 받자 가느다란 상처가 오히려 밝게 빛났다.

남소월이 옆으로 와 털썩 앉았다.

"그 검, 이제 진짜 은퇴할 때 된 거 아닌가요?"

"검에도 은퇴가 있소?"

"왜 없어요. 잘 싸웠습니다, 이제 쉬십시오, 이런 거요."

서문진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남소월은 그런 그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조금 안심한 듯 어깨를 풀었다.

"아침부터 너무 무거운 표정만 하고 있길래요. 혹시 또 혼자 세상 다 짊어진 얼굴 하면 어쩌나 했죠."

"그렇게까지 심했소?"

"꽤요. 멀리서 보면 장례식 주관하는 승려 같았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혜명이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빈말도 정도껏 해라. 저 얼굴로는 시주도 못 받는다."

그 한마디에 유한성이 크게 웃었고, 잠깐이지만 들판의 공기가 풀렸다.

남소월이 다시 잔검을 가리켰다.

"정말로요. 더 좋은 검을 구할 수도 있잖아요. 이제 강호에선 당신한테 검 한 자루 바치겠다는 사람도 줄 설 텐데."

서문진은 손안의 금을 엄지로 천천히 훑었다.

"좋은 검은 많겠지."

"그럼요."

"하지만 내게 지금 필요한 건 더 좋은 쇠가 아니오."

그는 낮게 말했다.

"어젯밤을 잊지 않는 마음이오."

남소월이 장난기 섞인 얼굴을 조금 거두었다.

서문진의 시선은 검에 닿아 있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한무결의 화려한 검, 도룡기의 검은 깃발, 명분을 핑계로 사람을 몰아붙이던 수많은 칼.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신이 왜 검을 쥐고 있는지를 겨우 놓치지 않았던 그 한순간.

강해지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정확히 찌르면 된다. 하지만 강해진 힘을 어디에 멈출지를 아는 일은 훨씬 어려웠다. 그걸 모르면 결국 검은 사람보다 앞서 나가고, 사람은 자기 검의 핑계를 대며 살아가게 된다.

그는 그런 강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진무백은 오래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검이 빠른 것은 자랑이 아니다. 더 늦게 뽑을 수 있는 것이 더 어렵다.

그때는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늦게 뽑는 검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검을 늦게 뽑는다는 건 겁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검 말고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남소월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예요?"

"어떻게?"

"이기고도, 이긴 얼굴 안 하고. 사람부터 살피고. 귀찮은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고."

서문진은 대답 대신 검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짧은 금속음이 맑게 울렸다.

"아마도."

남소월이 웃었다.

"좋네요. 그건 꽤 성가신 길이겠지만."

"당신은?"

"전 원래 성가신 일 좋아해요."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가볍지 않았다.

서문진은 문득 깨달았다. 어젯밤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전장 한가운데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강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길은 늘 느리고, 귀찮고, 덜 화려하다. 그래서 혼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마음에 남은 한 자루

그날 해질 무렵, 도룡대 아래에는 이름이 확인된 시신과 끝내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시신이 나란히 놓였다.

누구는 정파였고, 누구는 낭인이었고, 누구는 그저 밥값을 벌러 왔다가 깃발 아래 선 사람이었다. 죽고 나면 구분은 금세 흐려졌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날카롭던 이름과 명분도, 마지막에는 천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문파의 검을 거두어 갔다.

하지만 주인 잃은 칼도 많이 남았다.

서문진은 그 검들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긴 검, 짧은 검, 허리에 차는 연검, 한 번도 제대로 뽑지 못하고 쓰러진 새 칼까지. 그 수가 너무 많아, 오히려 모두 비슷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장문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강호는 분명 너를 원할 것이다."

서문진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영웅으로든, 기수로든, 혹은 새 질서의 중심으로든."

장문인은 잠시 기침을 누른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무엇을 택할지는 이미 정해 둔 얼굴이구나."

서문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대단한 걸 택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럴수록 더 어렵지."

장문인은 천천히 검들 쪽을 바라보았다.

"강호는 늘 사람에게 검이 되라고 요구한다. 깃발이 되라고도 하고. 그런데 검이나 깃발이 되는 순간,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문진은 무너진 누각 위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깃발의 찢어진 천을 떠올렸다.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달려들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믿고 죽었다. 결국 사람을 움직인 것은 검의 날이 아니라 마음속에 꽂힌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로소 제목 없는 답을 얻었다.

강호에 진짜 오래 남는 검은 손에 쥔 칼이 아니다.

사람 마음에 남아, 다음 번에 칼을 뽑을지 거둘지 정하게 만드는 한 자루다.

그는 허리의 잔검을 가볍게 눌렀다.

금이 간 검이었다. 이름난 보검도 아니고, 세상을 뒤흔들 전설의 신병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검과 함께 지나온 길은 분명했다. 사람을 베는 법보다, 사람을 놓치지 않는 법을 조금씩 배워 온 길이었다.

서문진이 낮게 말했다.

"저는 강호를 이기고 싶지 않습니다."

장문인이 조용히 눈을 들었다.

"그럼?"

"버려두지도 않을 겁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앞으로 걸어갈 길이 다 들어 있었다.

강호는 본래 완전히 깨끗해질 수 없는 곳이었다. 야심도 있고, 원한도 있고, 체면 때문에 눈을 감는 자도 있고, 정의를 팔아 배를 불리는 자도 있다. 그렇다고 등을 돌리면 가장 약한 사람이 먼저 밟힌다. 그렇다고 힘으로만 누르면 또 다른 도룡기가 세워진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거짓이 칼을 쥐기 전에 먼저 보고, 분노가 깃발을 찾기 전에 먼저 막고, 검을 쥐더라도 사람을 잊지 않는 것.

세상을 한 번에 바꾸는 길은 아니었다. 무림맹주가 되는 길보다 훨씬 덜 화려했고, 전설이 되는 길보다 훨씬 귀찮았다. 하지만 서문진은 그런 길이야말로 자기 검이 끝내 가야 할 자리라고 느꼈다.

멀리서 남소월이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또 혼자 멋있는 생각만 하지 말고 와요! 유한성 대협이 부상자 셋 업고 짜증 내고 있어요!"

곧이어 유한성의 목소리가 터졌다.

"왜 꼭 이런 건 내가 하오!"

혜명이 태연하게 받았다.

"네가 제일 튼튼하니까."

당연화는 이미 다음 상처를 살피러 걸어가고 있었고, 악청란은 화산 제자들에게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진청허는 해 질 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결국 제일 먼저 걸음을 옮기는 것도 그였다.

서문진은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검들 사이를 지나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결국 그의 손에 남은 것은 금 간 잔검 하나뿐이었지만, 마음에는 그보다 분명한 한 자루가 남아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만 휘두르는 검이 아니라, 누군가가 더는 억울하게 칼 아래 놓이지 않도록 지키는 검.

도룡대의 밤은 끝났고, 강호는 아직 멀리 어지러웠다.

그래도 서문진은 이제 알았다.

자기가 왜 강해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강호를 마주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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