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소리가 강호를 끌어당기다
흑송령을 벗어날 때부터 북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멀리서 우는 천둥 같았다. 그러나 산 하나를 넘고 메마른 계류를 건너는 동안,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고 또렷해졌다. 두둥, 두두둥. 사람 가슴을 밖으로 꺼내어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유한성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시작했소."
서문진은 말없이 산허리 끝에 섰다.
그 아래로 도룡대가 보였다.
강을 내려다보는 오래된 돌대와 무너진 누각, 반쯤 부서진 성벽, 그리고 그 폐허를 가득 메운 횃불들. 정파 연맹의 깃발이 동쪽 언덕에 줄지어 섰고, 서쪽 벌판에는 붉고 검은 천을 아무렇게나 꿰맨 깃발들이 요란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교의 대군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가까이 볼수록 이상했다.
깃발은 제각각이었고, 전열도 어설펐다. 마차꾼 차림의 사내, 낭인, 검은 복면인, 심지어 상단 호위무사 복장의 자들까지 뒤섞여 있었다. 잘 짜인 군세가 아니라, 여러 얼굴을 억지로 한 깃발 아래 몰아넣은 전장이었다.
거짓은 멀리서 볼수록 더 그럴듯했다.
남소월이 숨을 삼켰다.
"저 정도면 누가 봐도 진짜 전쟁이겠네요."
진청허가 낮게 답했다.
"전쟁은 원래 그렇지. 시작이 거짓이어도 피가 흐르면 다들 진짜라고 믿게 된다."
그때 뒤에서 짧은 신음이 들렸다.
포박된 채 끌려오던 공야진의 몸이 크게 떨렸다. 당연화가 번개처럼 달려가 목덜미를 짚었다. 그녀의 손끝에 피가 묻었다.
"침이에요."
공야진의 목 뒤에는 손가락 길이만 한 가는 철침 하나가 박혀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날아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노인은 꺼져 가는 눈으로 도룡대를 올려다보다가 피 섞인 숨을 뱉었다.
"늦었소… 도룡기가… 올랐으니…"
그 말과 함께 그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남소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죽는 순간까지 사람 기분 나쁘게 하네."
악청란이 차갑게 말했다.
"침묵시킨 거다. 저 정도 판이면 버릴 패 하나쯤은 아깝지도 않겠지."
장문인은 말 위에서 겨우 몸을 바로 세우며 전장을 보았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더 선명해져 있었다.
"들어가야 한다."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북과 깃발이 전장의 눈과 귀다. 누각을 끊고, 망루를 무너뜨려라.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보여 줘라. 아직 날 알아보는 자들이 있다."
서문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집시다."
유한성이 곧장 물었다.
"어떻게?"
서문진의 시선이 전장 전체를 훑었다.
"유 형은 남소월과 함께 서쪽 망루로 가서 북을 끊어 주십시오. 당 소저는 불화살과 연기를 막아 주세요. 진 도장과 장문인께서는 동쪽 언덕으로 가십시오. 정파 쪽이 장문인의 얼굴을 먼저 봐야 칼을 거둘 사람도 생깁니다."
혜명이 물었다.
"그럼 너는?"
서문진은 누각 꼭대기에 걸린 검은 깃발을 바라보았다.
금실로 비틀린 용 문양이 달빛과 횃불 사이에서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저 깃발 아래로 갑니다."
악청란이 한 걸음 나섰다.
"혼자 보내진 않겠다."
"아니."
서문진이 고개를 저었다.
"화산 검이 이 밤에 해야 할 일은 더 분명합니다. 화산의 검법을 흉내 낸 놈들이 있다면, 진짜와 가짜를 가장 잘 가를 사람은 당신입니다."
악청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검 손잡이를 쥐었다.
"좋다. 대신 죽지 마라."
남소월이 피식 웃었다.
"다들 이상하게 말은 차갑게 하는데 걱정은 하네요."
"입 다물고 뛰어."
유한성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다음 순간, 일곱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어둠 속을 갈랐다.
그리고 도룡대의 밤은 그들을 삼키듯 집어삼켰다.
거짓 깃발 아래의 진짜 피
전장 가까이 이르렀을 때, 소리는 더 이상 북소리만이 아니었다.
창과 칼이 부딪치는 쇳소리, 사람의 비명, 말 울음, 타는 기름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도룡대 아래 들판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정파 쪽 선봉은 붉고 검은 깃발을 보고 달려들었고, 반대편에서는 누군가가 미리 몰아넣은 낭인들과 복면인들이 죽기 살기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중 절반쯤은 누가 누구 편인지 자기들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떤 자는 진짜 원한 때문에 칼을 들었고, 어떤 자는 돈 때문에 섰고, 어떤 자는 그저 먼저 공격받았다고 믿고 있었다.
서문진은 그 혼란이야말로 천라지망의 마지막 독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고, 오해가 피를 부르고, 피가 다시 오해를 증명하는 밤.
그때 서쪽에서 갑자기 세 번의 짧은 파열음이 터졌다.
남소월의 비도였다.
곧이어 망루 위 북소리 하나가 툭 끊겼다. 유한성의 욕설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북 치는 놈들 발부터 꺾어 버려!"
거의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르던 불화살 다섯 발이 허공에서 힘없이 꺾여 떨어졌다. 당연화의 은침이 활 쥔 손목을 먼저 찾아간 것이다.
전장 전체가 아주 잠깐, 반 박자쯤 늦어졌다.
서문진은 그 틈을 타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정면에서 달려든 붉은 복면인이 장도를 내리쳤다. 잔검이 짧게 흔들렸다. 칼날은 부딪치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손목을 흘리고, 팔꿈치 안쪽을 밀고, 어깨로 몸의 중심을 틀었다. 장도는 허공을 베었고 사내의 몸은 제 힘에 스스로 무너졌다.
서문진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의 검은 사람을 베기보다 먼저 전장의 흐름을 끊었다. 앞줄의 속도, 뒤줄의 호흡, 옆에서 끼어드는 발걸음. 누구를 먼저 쓰러뜨리느냐보다 어느 틈을 먼저 막아야 더 많은 피를 줄일 수 있는지를 보고 움직였다.
검심결은 원래 일대일 싸움을 위한 검법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밤 서문진은 처음 깨달았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한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백 사람의 두려움이 어디서 시작되고, 천 사람의 살기가 어느 깃발 하나에 기대고 있는지를 읽는 것 또한 같은 일이었다.
그때 동쪽 언덕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칼을 거두어라! 나는 천학문 장문인이다!"
장문인이었다.
진청허와 혜명이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혜명의 철봉이 앞으로 밀려드는 자들을 막아 세우고, 진청허의 검이 장문인을 향하는 화살을 허공에서 비틀어 버렸다.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장문인을 알아본 몇몇 천학문 제자들이 얼어붙은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뒤이어 다른 문파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장문인이라고?"
"그럼 화산에서 내려온 명령은 뭐지?"
"가짜였단 말인가?"
의심은 칼보다 빨리 번졌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그 의심을 짓밟으려는 듯 중앙 누각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긴 흑포, 반쯤 가린 얼굴, 그리고 손에는 길고 좁은 검.
그자는 누각 난간 위에 가볍게 내려서더니 내력을 실어 외쳤다.
"속지 마라! 저 늙은이는 이미 마교에 넘어간 간세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이상하게 잘 들렸다.
전장의 소음 위를 미끄러지듯 타고 흘러가,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헤집었다.
서문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자다.
공야진 같은 늙은 그물장이 아니라, 오늘 밤 실제로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움직이는 손.
누각의 사내도 서문진을 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검끝을 들어 보였다.
"오고 있었군, 진무백의 제자."
천면검객
서문진이 누각 아래에 이르렀을 때, 사내는 이미 뛰어내리고 있었다.
검은 옷자락이 밤바람에 퍼졌고, 얇은 장검은 달빛도 없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첫 일격은 화산 검법처럼 곧고 날카로웠다. 두 번째는 무당의 태극 검로처럼 둥글었고, 세 번째는 뱀이 물듯 음험하게 파고들었다.
서문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남의 검을 주워 모아 만든 칼.
그 자체가 천라지망 같았다.
"이름이 뭐지?"
서문진이 검을 받아 내며 물었다.
사내가 웃었다.
"강호에선 한무결이라 불렀다. 오늘 밤엔 도룡기주라 불러도 좋고."
쨍.
두 검이 허공에서 갈렸다.
한무결의 검은 눈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문파마다 가장 보기 좋은 초식만 뽑아 이어 붙인 듯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백가의 절학을 두루 익힌 기재라 감탄할 만했다.
하지만 서문진은 알았다.
겉은 번듯해도, 그 안에는 한 줄의 마음이 없었다.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 검인지, 왜 이 초식 다음에 저 초식이 나와야 하는지, 그 사람만의 뼈대가 없었다.
한무결은 마치 사람의 얼굴을 수십 개쯤 훔쳐 쓰는 자처럼 싸웠다.
"네 사부는 끝내 세상을 몰랐지."
한무결이 비웃듯 말했다.
"검 하나, 마음 하나로 강호를 바꿀 수 있다고 여겼으니."
"사부는 세상을 모른 게 아닙니다."
서문진이 낮게 답했다.
"너희 같은 자를 너무 늦게 봤을 뿐이지."
한무결의 눈빛이 번뜩였다.
검세가 갑자기 빨라졌다.
화산의 날카로움, 무당의 원, 사천 비수의 짧은 찌르기, 심지어 소림 계열 장법 비슷한 것까지 섞여 들어왔다. 그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훔쳐다 쓸 수 있는 자였다.
그 와중에도 전장 아래에서는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서문진이 한무결의 검을 흘려낸 순간, 왼편에서 세 명의 복면인이 정파 진영 뒤를 찌르려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한무결이 웃었다.
"봤지? 이게 네 한계다. 전장에선 모두를 보려는 놈이 가장 먼저 죽어."
검끝이 서문진의 옆구리를 스쳤다.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서문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자는 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북과 깃발, 숨겨 둔 궁수, 불 붙일 마차, 패주하는 척하며 사람을 유인하는 놈들까지. 한무결의 진짜 검은 저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검 하나만 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서문진이 숨을 고르며 뒤로 반 걸음 빠졌다.
한무결이 비웃었다.
"도망치나?"
"아니."
서문진의 눈빛이 바뀌었다.
"드디어 보이는군."
마음으로 본 전장
그 말과 함께 서문진이 몸을 틀었다.
한무결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비스듬히 옆으로 빠졌다. 누각 아래 묶여 있던 기름 마차 한 대를 향해 검을 뻗은 것이다. 잔검이 마차를 잡아 둔 밧줄을 끊었다. 바퀴가 기울며 내리막으로 굴러갔다.
한무결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그 마차는 분명 어느 순간 전장 한가운데로 밀어 넣어 양쪽을 함께 불태울 용도였을 것이다.
"남소월!"
서문진이 외쳤다.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듣고 있어요!"
은빛 비도 두 자루가 날아와 굴러가는 마차의 바퀴축을 부쉈다. 마차는 비탈 아래 돌무더기에 처박혀 뒤집혔고, 기름은 불 대신 진흙과 먼지 속으로 쏟아졌다.
"유 형, 북은?"
"벌써 반쯤 끝냈소!"
서쪽에서 유한성의 씩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뒤이어 둔중한 북 하나가 처참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당 소저, 동쪽 망루!"
"알고 있어요."
당연화의 대답과 함께 바람 속에 은침이 번졌다. 망루 위 궁수 셋이 동시에 활을 놓쳤다.
전장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한무결이 이를 악물었다.
"검객이 아니라 장수가 되려는 거냐?"
서문진은 검을 비껴 세웠다.
"사람을 보는 검은, 전장에서도 사람부터 봅니다."
그는 더 이상 한무결의 초식 하나하나에 휘둘리지 않았다.
상대의 검로와 동시에 그가 어디를 믿고 서 있는지를 보았다. 북이 살아 있기에 버티는 곳, 깃발이 펄럭여서 아직 무너지지 않는 곳, 숨은 화살이 있어 기세를 부리는 곳. 한무결의 검은 화려했지만, 그 마음은 늘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통제.
사람을 칼이 아니라 줄로 보는 마음.
그래서 서문진은 그 줄부터 하나씩 잘랐다.
그가 한무결의 정면 찌르기를 비켜 내며 검자루 끝으로 팔꿈치를 쳤다. 상대의 중심이 순간 흔들렸다. 동시에 왼발로 누각 기둥을 걷어차자, 위쪽에 매달린 신호등 하나가 기울며 아래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던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어긋났다.
그 틈을 놓칠 악청란이 아니었다.
화산 검이 번개처럼 그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적 둘의 병장기를 연달아 날려 버린 뒤 차갑게 외쳤다.
"화산의 이름을 함부로 붙이지 마라!"
검법을 흉내 낸 자 하나가 그녀에게 덤볐다. 발은 어설프고, 검끝은 보기 좋게만 치켜든 가짜였다. 악청란의 검이 한 바퀴 짧게 돌았다. 상대의 검은 두 동강 났고, 사내의 복면도 반으로 갈라져 얼굴이 드러났다.
화산 제자들 가운데 몇이 그 얼굴을 보고 숨을 삼켰다.
"저자는… 화산 사람이 아니야!"
그 한마디가 전열 하나를 무너뜨렸다.
동쪽에서는 혜명이 철봉을 세워 두 무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치기보다 밀어냈다. 넘어지는 자를 다시 밟지 못하게 막고, 다친 자를 뒤로 끌어냈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양쪽에서 전투를 멈춘 이들이 조금씩 모이고 있었다.
진청허는 그 틈 사이를 유령처럼 누비며 정말 위험한 자들만 골라 쓰러뜨렸다. 겉으로는 정파 무사처럼 보였지만 눈빛이 너무 매서운 자들, 멈추는 척하다 뒤에서 칼을 꽂으려는 자들. 그의 검은 그들의 손목과 턱을 정확히 찾아갔다.
"이 밤에 가장 시끄러운 건 정의를 외치는 입이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룡대 위 마지막 북이 멈췄다.
전장의 박자가 끊어졌다.
사람들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 틈에서 장문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속지 마라! 너희가 베는 상대들 중 절반은 누군가에게 떠밀려 이 자리에 선 자들이다! 진짜 적은 깃발 뒤에 숨어 있다!"
이제 그 말을 듣는 이들이 생겨났다.
칼끝이 아주 조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룡기를 베는 검
한무결은 마침내 웃음을 거두었다.
그의 검세가 확 바뀌었다.
아까까지는 각 문파의 초식을 뽐내듯 이어 붙였다면, 이제는 오직 죽이기 위한 검만 남았다. 군더더기 없이 낮고 짧았고, 무엇보다 집요했다. 허세를 벗겨 내니 오히려 더 위험했다.
쨍, 쨍, 쨍.
잔검과 장검이 세 번 연달아 부딪쳤다.
서문진의 손끝이 저렸다. 한무결은 강했다. 특히 마음이 어지러워질수록 더 무서운 종류의 강자였다. 남을 믿지 않는 자라 스스로 흔들리지 않았고, 자기 검이 더러워지는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네놈도 알겠지."
한무결이 낮게 말했다.
"사람은 진실보다 깃발을 더 빨리 믿는다."
그의 검이 사선으로 파고들었다. 서문진은 아슬아슬하게 흘려냈지만, 소매가 길게 찢어졌다.
"그래서 우린 늘 이긴다. 정의를 만든 적은 없지. 다만 사람들이 믿고 싶은 걸 준비해 줬을 뿐이다."
서문진은 한무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저자는 끝까지 사람을 얕본다.
그러니 모른다.
사람이 속는 것만큼, 깨닫는 순간도 빠를 수 있다는 것을.
멀리서 누군가 외쳤다.
"칼을 거둬! 저기 진짜 장문인이 계시다!"
"복면인들이 우리 뒤를 찔렀다!"
"저 붉은 깃발 놈들이 아까까진 우리 편이었잖아!"
의심은 이제 한무결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급해졌다.
그 순간 서문진은 알았다.
빈틈이다.
사람을 줄로만 보던 자가, 처음으로 줄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은 얼굴.
서문진은 일부러 한 발 깊이 들어갔다. 한무결의 검끝이 기다렸다는 듯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너무 정직한 찌르기였다. 마치 여기서 끝내겠다고 확신하는 자의 검.
서문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몸을 반 치 비워 냈다.
검심결.
막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 닿으려는 자리를 먼저 비우는 검.
한무결의 검끝이 서문진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순간, 잔검이 아래에서 위로 아주 짧게 솟아올랐다. 칼날은 상대 목을 향하지 않았다. 손목도 아니었다.
장검과 손의 연결.
그 미세한 중심 하나를 쳤다.
딱.
작은 소리 하나로 한무결의 검이 크게 어긋났다.
서문진은 그 틈에 몸을 돌려 누각 기둥을 박차고 올랐다. 놀란 한무결이 뒤쫓았으나 반 박자 늦었다. 서문진의 잔검이 누각 꼭대기에서 펄럭이던 도룡기의 깃대를 베었다.
금속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깃발이 허공에서 크게 뒤집혔다.
도룡기가 무너졌다.
전장 전체가 숨을 멈춘 듯했다.
누군가는 그 깃발을 보고 싸웠고, 누군가는 저 깃발이 자기 편을 지켜 준다고 믿었다. 그 상징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기 눈앞의 피를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한무결이 짐승 같은 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숨겨 둔 단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품격도, 체면도 버린 마지막 발악이었다.
서문진은 착지와 동시에 돌아섰다.
잔검과 단도가 부딪치는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짧은 잔검에 금 하나가 길게 갔다.
그러나 그 검은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서문진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한무결은 단도에 내력을 몰아 다시 찔러 들어왔다. 서문진은 이번엔 막지 않았다. 반보 옆으로 스치듯 비키며 그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틀었다. 상대의 돌진력을 그대로 돌려 세운 것이다.
한무결의 몸이 앞으로 크게 쏠렸다.
그리고 그 정면에는, 서문진의 검자루 끝이 기다리고 있었다.
퍽.
가슴 한가운데.
숨이 가장 방심하는 자리.
한무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두 걸음 비틀거리더니 무릎을 꿇었다.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네 검은…"
그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왜… 사람을 안 죽이고도…"
서문진이 조용히 답했다.
"죽이는 것보다 무너뜨리는 게 먼저일 때가 있으니까."
한무결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밤이 꺾이는 자리
도룡기가 쓰러지고 기주까지 무너지자, 전장은 마침내 갈라졌다.
끝까지 날뛰는 것은 복면인들과 숨은 세력뿐이었다. 반면 정파 쪽 무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칼을 멈췄고, 붉고 검은 깃발 아래 있던 자들 중에도 달아나거나 무기를 버리는 이들이 속출했다.
악청란의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화산 제자들은 상처 입은 자를 뒤로 빼라! 가짜 명령에 더는 따르지 마라!"
그 말에 망설이던 젊은 화산 제자 몇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움직이자, 다른 문파의 젊은 무사들도 하나둘 따라 했다.
혜명은 이미 부상자들 사이에서 피범벅이 된 손으로 사람을 끌어내고 있었다.
"살릴 수 있는 자부터 옮겨라! 죽일 놈은 나중에도 있다!"
유한성은 도망치는 복면인 둘을 후려치며 씨익 웃었다.
"오늘은 진짜 맞는 놈들만 맞는군."
남소월은 무너진 누각 아래 서문진 옆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녀는 한무결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와. 저런 놈까지 혼자 잡으면 반칙 아닌가요?"
서문진이 짧게 숨을 골랐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소월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다.
"그 말, 꽤 좋네요."
진청허도 피 묻은 검을 툭 털며 다가왔다.
"동의하긴 싫지만, 이번엔 네 말이 맞군."
장문인은 전장 한가운데까지 나와 섰다. 상처로 비틀거리면서도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늘 밤 본 것을 잊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쉰 채로 퍼졌다.
"너희는 마교와 싸운 것이 아니라, 거짓과 싸운 것이다! 누가 너희 칼을 쥐게 했는지 반드시 기억해라!"
그 말에 누구도 즉시 환호하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피가 이미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분노가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밤하늘에 걸린 연기가 천천히 찢어지며, 먼 동쪽이 아주 엷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아직 새벽이라고 부르기엔 이른 빛이었다.
서문진은 손안의 잔검을 내려다보았다.
칼등 가까이에 길고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다. 오늘 밤 마지막 충돌에서 생긴 상처였다.
남소월도 그것을 보았다.
"괜찮아요?"
서문진은 검을 조용히 쥐어 넣었다.
"아직은."
악청란이 그 곁에 섰다. 그녀의 검에도 피와 흙이 묻어 있었다.
"오늘 밤, 네 검을 봤다."
늘 차갑던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는 날이 조금 달랐다.
"이젠 왜 그 잔검이 살아남았는지 알겠다."
서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밤 그의 검은 한 사람을 꺾었고, 동시에 전장의 흐름을 바꾸었다.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검이었지만, 처음으로 강호의 수많은 눈앞에서 자기 길을 증명했다.
검심결.
마음으로 보고, 마음이 기대는 거짓부터 베는 검.
그러나 승리의 끝맛은 조금도 달지 않았다.
도룡대 아래에는 아직도 신음이 남아 있었고, 꺼져 가는 횃불 사이로 쓰러진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거짓 깃발은 무너졌지만, 그 깃발 하나로만 이 밤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강호 곳곳에 남은 줄들이 아직 다 끊긴 것도 아니었다.
진청허가 멀어지는 어둠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겼는데도, 겨우 한 고비를 넘은 기분이군."
유한성이 코웃음을 쳤다.
"원래 진짜 골칫거리는 살아남은 뒤에 시작하오."
장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오늘 밤은 끝이 아니라 증언의 시작이다."
서문진은 도룡대 위에서 떨어진 검은 깃발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저 깃발 아래 강호를 몰아넣으려 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그 거짓보다 먼저 움직인 칼들이 있었다.
서문진은 허리춤에 금 간 잔검을 다시 꽂았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오지 않은 새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룡대전의 밤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밤이 각자의 마음에 남긴 한 자루의 검은, 이제부터 더 오래 남게 될 것이었다.
이 노트는 보도·비평·교육·연구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