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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라지망

천라지망

흑송령 아래의 오래된 도관

흑송령의 밤은 검었다.

달빛조차 소나무 가지에 걸려 산 아래까지 내려오지 못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검은 솔잎이 서로 스치며 쉿,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산 전체가 입 다물고 비밀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서문진은 맨 앞에서 걸었다.

뒤로는 남소월, 진청허, 당연화, 유한성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악청란과 혜명은 화산 쪽 움직임을 막아 시간을 벌어 주고 있었다. 일곱이 맹약을 맺었지만, 첫 시험은 벌써 시작된 셈이었다.

유한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틀면 옛 참배길이 있소. 지금은 잡초에 덮였지만, 예전엔 제법 이름난 도관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지."

남소월이 소매 끝으로 나뭇가지를 밀어내며 물었다.

"이런 데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개방이오. 배고픈 사람은 길을 잘 기억하지."

진청허가 웃는 듯 말했다.

"낭만적인 대답이군. 내가 들은 개방 이야기는 대개 냄새나는 이야기뿐이었는데."

"무당 도사 입에서 그런 말 들으니 괜히 더 기분 나쁘네."

티격태격하는 말이 오갔지만,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바람 사이로 쇳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기 때문이다.

도관은 정말로 그 자리에 있었다.

허물어진 담장, 반쯤 기울어진 편액, 이끼 낀 돌계단. 그러나 폐허인 척하고 있을 뿐, 죽은 곳은 아니었다. 담장 안팎으로 숨을 죽인 기척이 너무 많았다. 등불은 꺼져 있었지만, 사람을 숨긴 어둠은 오히려 더 또렷했다.

당연화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흙을 만졌다.

"방금 지나간 발자국이에요. 적어도 스무 명. 아니, 서른은 넘겠네요."

그녀가 손가락을 비벼 냄새를 맡고는 미간을 좁혔다.

"기름도 발랐어요. 검집이든 쇠사슬이든 소리가 덜 나게 하려고."

서문진의 시선이 어둠을 훑었다.

"우릴 기다리고 있군."

남소월이 빙그레 웃었다.

"요즘 다들 우리를 너무 좋아하네요."

진청허가 소매를 털며 말했다.

"좋아. 그럼 예의를 갖추자고. 먼저 인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

서문진이 짧게 답했다.

"장문인이 안에 있다면, 저쪽도 시간을 끌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허리춤의 잔검을 천천히 뽑았다. 짧고 낡은 검이었다. 그러나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봉인된 동굴에서 이 검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그랬다. 길지 않은 검인데도, 마음을 세우는 소리는 누구의 장검보다 무거웠다.

"정면으로 들어갑니다."

남소월이 고개를 갸웃했다.

"함정인 걸 알면서요?"

"예."

"멋은 있네요."

"멋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서문진이 앞을 보며 말했다.

"저쪽이 우릴 이 자리에 오게 한 이유를 확인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담장 위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밤하늘에서 검은 비가 떨어진 듯했다.

유한성이 욕을 뱉으며 몸을 굴렸고, 진청허의 검이 원을 그리며 세 발의 화살을 비껴냈다. 당연화의 은침은 빛도 없이 날아가 담장 위 궁수 둘의 손등을 꿰뚫었다. 남소월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앞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비도 두 자루가 동시에 날아가고, 곧바로 둔탁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환영이 아주 뜨겁네!"

서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계단을 밟고 도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물을 치는 사람들

첫 번째 마당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함정이었다.

기둥 뒤, 처마 위, 마른 우물 곁 그림자 속에서 복면인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손에 든 병장기는 제각각이었다. 화산의 검, 무당의 장검, 소림의 철봉, 개방의 단봉. 겉으로만 보면 각 문파의 합동 추격대 같았지만, 서문진의 눈에는 이미 보였다.

호흡이 안 맞았다.

모양은 흉내 냈어도, 손끝에 밴 습관은 속일 수 없었다.

"또 문파 흉내군."

진청허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쯤 되니 기분이 묘하네. 내 검이 저렇게 형편없어 보일 줄은 몰랐어."

복면인 다섯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서문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잔검이 짧게 떨리더니, 가장 앞의 사내 검끝을 옆으로 흘려 버렸다. 이어 한 걸음 들어간 몸이 두 번째 사내의 팔꿈치를 꺾고, 세 번째 사내의 발목을 차 올렸다. 검이 길지 않으니 몸이 더 가까워졌다. 칼날이 닿기 전, 사람의 중심부터 무너뜨리는 움직임이었다.

검심결은 칼끝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 법을 가르쳤다.

어디로 찌를지보다, 상대가 무엇을 믿고 서 있는지를 먼저 보게 만드는 검법이었다.

저들은 숫자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 서문진은 숫자가 힘을 쓰기 전에 빈틈을 찢었다.

남소월은 그 틈으로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그녀의 비도는 늘 살짝 엇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건드렸다. 검집 끈, 소매, 손목, 복면 매듭. 사람이 아니라 전열을 벴다.

"얼굴부터 보여요!"

그녀가 외쳤다.

"숨어서 정의를 말하는 놈 치고 괜찮은 놈 못 봤거든요!"

당연화는 뒤에서 조용히 손가락을 튕겼다. 은침 몇 점이 허공을 가로지르자 복면인 넷이 거의 동시에 무기를 놓쳤다.

"세게 안 쐈어요."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대신 오늘 밤은 손가락이 남의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유한성은 담장 아래를 낮게 달리며 아예 사람의 다리만 노렸다. 넘어뜨리고, 걸고, 밀고, 박았다. 가난한 막대 하나가 생각보다 훨씬 성가신 무기라는 사실을 복면인들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진청허는 가장 느긋해 보였지만, 실은 가장 무서웠다.

그는 한 발 늦게 서는 듯하다가 늘 반 치 먼저 있었다. 상대 칼이 닿을 자리에 이미 없었고,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그의 검등이 턱이나 갈비, 손목을 두드렸다. 사람을 죽이는 검이라기보다, 싸울 마음부터 꺾는 검이었다.

짧지만 거센 교전 끝에 첫 마당이 비었다.

남은 건 신음과 피 냄새, 그리고 도망치지 못한 복면인 하나였다. 유한성이 발목을 걸어 넘긴 사내가 기둥 밑에 처박혀 있었다.

당연화가 다가가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또 독환 물었나 보네요."

"이번엔 늦지 마."

서문진이 말하자, 당연화는 웃으며 사내의 턱밑 혈도를 눌렀다. 검은 환약이 톡 튀어나와 돌바닥에 굴렀다.

남소월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진짜 꼼꼼해."

서문진이 사내의 가슴섶을 뒤졌다.

은패 하나가 나왔다.

얇은 금속판 위에 실선들이 촘촘히 얽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 같았다. 연검대에서 얻은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다만 이번 것은 뒷면에 글자가 하나 더 새겨져 있었다.

천.

진청허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하늘 천인가."

유한성이 뱉듯 말했다.

"그럼 연검대에서 나온 건 그냥 말단이었군. 문양만 같고 글자가 없었잖소."

서문진은 은패를 손안에서 뒤집어 보았다.

선들은 모두 가운데로 모이고 있었다.

그 중심점 하나를 향해.

그물을 던지는 손은 늘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패는 반대였다. 바깥으로 퍼지는 줄이 아니라, 안으로 모이는 줄이었다.

누군가 강호 전체의 사건을 한 점으로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때 안쪽 전각에서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진은 고개를 들었다.

"장문인입니다."

쇠사슬에 묶인 증인

안쪽 전각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남소월이 비도를 꺼내 들었으나, 서문진은 손으로 막았다. 그는 문고리의 자물쇠를 한 번 보더니 잔검으로 옆 판자를 찔렀다. 낡은 나무가 우지끈 갈라졌다. 두 번째 찌르기에 빗장이 부러졌고, 문짝이 안으로 밀려 열렸다.

전각 안은 눅눅한 약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한가운데 기둥에 사람이 묶여 있었다.

천학문 장문인이었다.

백발이 부쩍 늘었고, 옷은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으며, 양 손목에는 쇠사슬 자국이 벌겋게 패여 있었다. 그러나 무너진 얼굴은 아니었다. 눈만은 아직 살아 있었다. 오래 버틴 사람의 눈이었다.

"장문인!"

서문진이 다가가자 장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초점이 흔들리더니, 마침내 서문진을 알아보았다.

"네가… 왔구나."

그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또렷했다.

남소월이 재빨리 물을 건넸고, 당연화가 상처를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죽이진 않았지만, 편하게 살려 둔 것도 아니네요. 손목 힘줄은 안 건드렸어요. 글씨를 쓰게 하려고."

장문인이 쓰게 웃었다.

"그래. 몇 번은 가짜 문서에 내 인장을 찍히게 하려 했지."

그는 물을 조금 마신 뒤 숨을 골랐다.

"내가 거부할 때마다… 강호가 불타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하더구나."

서문진의 턱선이 굳어졌다.

"범인이 누구입니까."

장문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대신 떨리는 손으로 품 안쪽을 가리켰다. 쇠사슬을 풀어 주자, 그는 옷 속에서 천으로 감싼 작은 물건을 꺼냈다.

부서진 옥패였다.

서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비 오는 날 객잔에서부터 시작된 그 조각, 낙명곡의 추격과 백로암의 피, 동굴의 잔검까지 이어졌던 그 부서진 옥패와 딱 맞아떨어질 나머지 반쪽이었다.

남소월이 숨을 삼켰다.

"설마…"

서문진은 품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반쪽을 꺼냈다. 두 조각을 맞대자 끊어진 무늬가 완전히 이어졌다.

옥패에는 검도 아니고 불꽃도 아닌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실처럼 가는 선들이 원을 그리며 겹치고, 그 중심에 작은 점 하나가 놓인 그림.

은패의 거미줄 문양과 같은 뿌리였다.

장문인이 낮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천라지망의 옛 표식이다."

순간 전각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진청허가 평소답지 않게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처음 들어야 정상이다."

장문인이 거칠게 기침했다.

"천라지망은 문파가 아니다. 상단도, 살수조직도 아니다. 더 교활한 것이다. 각 문파의 장로, 상단의 주인, 표국의 총관, 심지어 조정의 몇몇 관리까지…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채 한 줄로 묶인 비밀 결사였다."

유한성이 욕설을 삼켰다.

"강호 바닥에 퍼진 소문들이 죄다 저 그물 타고 움직였다는 말이오?"

"소문만이 아니지."

장문인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전쟁도, 화재도, 습격도."

서문진은 손안의 옥패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조각이었다.

그런데 강호의 수십 년이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이십오 년 전의 혈겁

장문인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치 오래 봉인한 문을 여는 사람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십오 년 전, 서쪽 염로와 상단이 불타던 그 밤을 강호는 '마교혈겁'이라 불렀다. 너희 또래는 다 그렇게 배웠겠지. 명화교가 미쳐 날뛰어 수백 명을 죽였고, 정파가 피로써 세상을 바로잡았다고."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피가 흐른 건 사실이니까."

전각 안은 조용했다.

바깥에서 바람이 문짝을 흔드는 소리만 들렸다.

"시작은 명화교가 아니었다."

장문인의 시선은 멀리 과거를 보고 있었다.

"당시 서쪽에는 기근이 심했고, 여러 문파의 세금과 상단의 횡포에 밀려 떠도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명화교는 그 사람들을 모아 밥을 나눠 주고, 일자리를 만들고, 문파에 기대지 않는 길을 열었지. 처음엔 다들 비웃었다. 금세 무너질 거라고."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런데 무너지지 않았어. 오히려 사람들의 신망이 모였고, 몇몇 작은 문파와 표국, 상단까지 그들과 손을 잡으려 했다. 그때 천라지망이 움직였다."

남소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요? 사람 살리는 쪽이 커지는 게 그렇게 무서웠나요?"

"무서웠겠지."

장문인이 담담히 답했다.

"강호의 오래된 질서는 칼로만 서는 게 아니다. 밥줄, 길목, 세금, 보호비, 인맥. 그런 것들이 얽혀 서지. 명화교는 그 질서 바깥에서 사람을 모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이들에겐 죄였다."

진청허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적을 만들었다."

"그래."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라지망은 먼저 상단 몇 곳을 습격하고, 염로를 태우고, 호송대를 죽였다. 그 현장에 명화교 깃발과 흔적을 남겼지. 동시에 각 문파에 서로 다른 정보가 돌았다. 명화교가 병장기를 모은다, 비밀리에 독을 비축한다, 대규모 봉기를 준비한다… 다 조금씩 다르게, 그러나 결론은 같게."

유한성이 이를 갈았다.

"소문장사꾼들이 제일 먼저 벌어먹었겠군."

장문인은 대답 대신 쓴 웃음을 지었다.

"소문은 사람 입으로 퍼지지만, 시작은 늘 누군가의 손에서 나온다. 천라지망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각 문파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마지막엔 모두가 같은 적을 향해 칼을 들게 했지."

서문진의 머릿속에서 여러 장면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가짜 명령서.

각 문파를 흉내 낸 복면인들.

혈우야행단의 습격.

정파 연맹 제철법이 남은 화살촉.

모든 조각이 하나의 무늬로 이어지고 있었다.

천라지망.

정파와 사파, 상단과 표국, 조정과 강호 사이에 숨어 줄을 잡아당기던 보이지 않는 손.

장문인이 말을 이었다.

"혈겁의 밤, 정파 연맹은 명화교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병력을 움직였다. 하지만 실제 목표는 둘이었다. 하나는 명화교의 기반을 완전히 쓸어 버리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각 문파를 자기들 그물 안에 묶는 것."

남소월이 물었다.

"각 문파를요?"

"공통의 적을 만들면 맹약이 쉬워지니까."

장문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그 안에 분노가 있었다.

"그리고 피를 같이 묻히면 다들 더 쉽게 침묵한다. 누가 먼저 속았든, 누가 뒤늦게 눈치챘든 상관없다. 손에 피가 묻는 순간, 진실은 입 밖으로 나오기 어려워지지."

서문진은 문득 화산 정상의 늙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엄숙한 목소리, 정의라는 말, 그럴듯한 명분.

그 아래 감춰진 침묵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그걸 누가 주도했습니까."

서문진의 질문에 장문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전각 바깥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울리는 박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오래 준비한 연극이 마음에 든다는 듯한 박수였다.

그물의 중심

"역시 여기까지 오게 되는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문틀 너머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회색 장포를 단정히 입은 노인이었다. 머리와 수염은 희었고, 손에는 검도 창도 없이 평범한 죽장 하나만 쥐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면 학식 있는 은자나, 혹은 문파의 온화한 원로쯤으로 보였을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복면인들의 인기척이 사방에서 다시 살아났다. 숨죽였던 살기들이 전각 바깥을 둘러쌌다.

장문인의 얼굴이 굳었다.

"과연… 직접 나설 줄은 몰랐군."

노인이 미소 지었다.

"이만한 밤에 직접 나서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않겠소, 천학문 장문인."

진청허가 낮게 물었다.

"아는 얼굴인가?"

장문인이 이를 악물었다.

"강호연맹의 조정사… 공야진."

그 이름에 유한성이 욕을 내뱉었다.

강호에 발을 걸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이었다. 직접 패를 잡는 장문인은 아니지만, 문파 간 분쟁을 조정하고 상단과 표국의 분쟁을 매만지며, 필요할 때는 조정과 강호 사이에서 말을 이어 주는 인물. 칼보다 혀가 강하다는 평을 듣는 노회한 원로.

언제나 중립처럼 보이던 얼굴.

그래서 더 의심받지 않던 사람.

공야진은 죽장을 두 손으로 가볍게 짚으며 전각 안을 둘러보았다.

"젊은 얼굴들이 참 많이 모였군. 화산의 계집애는 없고, 소림의 어린 중 하나도 빠졌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해. 이것이야말로 내가 오래 기다린 그림이오."

남소월이 코웃음을 쳤다.

"기다렸다고요? 우리 잡아 죽이려고요?"

"아니."

공야진이 빙긋 웃었다.

"오히려 반대지. 젊은 피는 늘 필요하거든. 오래된 질서를 갈아 끼울 때 특히 그렇소."

서문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천라지망의 주인이 당신인가."

공야진은 그 질문을 즐기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주인이라."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물엔 주인이 없소. 줄을 잡는 손만 있을 뿐. 다만 지금 이 손이 가장 안쪽에 있다는 말은 맞겠지."

당연화의 손끝에 은침이 서너 점 더 걸렸다.

"수십 년 전 혈겁도, 장문인 납치도, 혈우야행단도 전부 당신 작품인가요?"

"작품이라 부르니 지나치게 낭만적이군."

공야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난 단지 사람의 본성을 조금 이용했을 뿐이오. 두려움, 탐욕, 체면, 복수심. 그런 건 원래 누구에게나 있지. 나는 그것들을 적당한 자리에 놓았을 뿐이오."

그 말투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그는 정말로 죄책감을 모르고 있었다.

"명화교는 살아남아선 안 됐소."

공야진이 말했다.

"그들은 선했을지 모르지. 하지만 선한 것만으로 세상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어. 강호는 칼과 계약과 공포 위에 서는 법이오. 그들이 백성의 마음을 더 모으고, 작은 문파들의 의탁처가 되면 어떻게 되겠소? 수십 갈래로 흩어진 강호가 예측 불가능해지지. 그러면 상단도, 표국도, 문파도, 조정도 함께 흔들린다."

진청허의 눈썹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수백 명을 죽였군."

"수백 명이 죽지 않았다면 수만 명이 죽었을지도 모르지."

공야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큰 판을 모르는 자는 늘 눈앞의 피만 보오."

장문인이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말하는 큰 판이란 결국 네가 줄을 잡은 세상일 뿐이다."

"맞소."

공야진은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다.

"질서는 누군가 잡고 있어야 하오. 문제는 대부분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거지."

서문진은 그를 보며 문득 깨달았다.

이 자는 강호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움직이는 판을 사랑할 뿐이다. 돌이 제멋대로 걸어 다니지 않도록, 미리 부숴 놓는 손.

그런 자가 가장 무서웠다.

부서진 옥패와 잔검의 주인

공야진은 서문진 손안의 옥패를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까지 맞췄군."

그는 조금 감탄한 듯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오."

서문진이 옥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건 누구의 것이지."

"네 사부에게 묻는 편이 더 빠를 텐데."

전각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서문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내 사부는 오래전에 죽었다."

"그래. 천학문 외원의 이름 없는 검객으로 살다 죽었지. 강호는 그렇게 알고 있소."

공야진의 미소가 아주 조금 짙어졌다.

"하지만 그의 본래 이름은 진무백이었소. 혈겁의 밤에 명화교 토벌군에 섞여 들어갔다가, 현장에서 진실을 본 사람이지."

서문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부.

말수 적고, 허름한 방에서 늘 낡은 검만 닦던 노인.

쓸모없는 검법이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 느린 동작들.

검심결을 남기고, 짧은 잔검의 주인이었을 가능성을 끝끝내 말해 주지 않던 사람.

그 퍼즐이 갑자기 뒤늦게 자리를 찾아갔다.

장문인이 거칠게 숨을 삼켰다.

"진무백… 그가 살아 있었다고?"

"살아 있었지. 아니, 살아남았다고 해야겠군."

공야진이 말했다.

"그는 혈겁 현장에서 천라지망의 본표를 손에 넣었소. 바로 그 옥패 말이오. 그리고 명화교를 베는 대신, 그날 밤 불길 속에서 몇몇 아이들을 빼돌렸다. 그중 하나가…"

그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서문진에게.

남소월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공야진은 끝내 말하지 않았지만, 장문인의 떨리는 눈이 먼저 답을 알고 있다는 듯 흔들렸다.

서문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장이 크게 한 번 울렸다.

자신의 기억에는 없다. 너무 어릴 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 없이 익숙했던 불 냄새, 알 수 없던 악몽, 윤설화의 골짜기에서 본 아이들의 얼굴이 주던 낯선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공야진이 덧붙였다.

"진무백은 강호에 진실을 밝히려 했소. 하지만 현명했지. 정면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 그래서 본표를 깨뜨려 반쪽은 숨기고, 반쪽은 다른 손에 맡겼소. 잔검을 봉인한 동굴도 그가 만든 마지막 보험이었고."

진청허가 낮게 말했다.

"검심결은 그가 남긴 것이군."

"그래."

공야진의 눈빛이 잠시 서늘해졌다.

"참 성가신 검법이오. 사람의 손보다 마음을 먼저 보게 만들지. 그래서 너 같은 놈이 살아남았다."

서문진은 마침내 알았다.

왜 사부가 늘 말했는지.

검이 빠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고.

사람을 잘못 보면 천 번 이겨도 결국 진다고.

그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큰 패배를 보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문진에게 검보다 먼저 사람을 가르쳤다.

오래된 거짓의 마지막 고리

장문인은 공야진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이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이냐. 수십 년을 속여 놓고도 아직 부족한가."

공야진은 조용히 죽장을 돌렸다.

"부족하지. 아주 중요한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화산의 맹약은 시작에 불과하오. 강호 전체를 하나의 적 아래 묶고, 각 문파의 병력과 상권과 정보를 하나의 줄로 엮으면, 그다음엔 반대편 얼굴이 필요하지. 그래야 줄이 더 단단히 조여지거든."

남소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반대편 얼굴?"

"진짜 마교."

공야진이 웃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전각 안 모두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공야진은 너무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혈우야행단은 단지 전주곡이었소. 각지의 불씨를 키워 두었고, 명화교의 잔당이건 굶주린 낭인이건 원한 품은 자들이건, 쓸 만한 자들은 이미 곳곳에 심어 두었지. 화산의 맹약이 굳어지면 그들을 한 깃발 아래 모을 거요. 강호는 그 깃발을 보고 스스로 공포에 질리겠지. 그다음은 쉽소. 모두가 내가 정한 전쟁터로 들어올 테니까."

"도룡…"

장문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야진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그래. 아직 기억하는군."

서문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도룡이 무엇입니까."

공야진은 이번에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재미있는 문제를 낸 노사처럼 서문진을 바라보았다.

"강호에서 가장 오래된 전설이 뭔지 아오? 세상을 가를 칼 하나, 혹은 칼에 숨은 비결 하나가 난세를 끝낸다는 이야기. 다들 허황된 전설이라 웃지만, 웃는 자들조차 그 전설이 던지는 힘은 안다. 사람은 하나의 이름 아래 쉽게 모이니까."

장문인이 이를 악물었다.

"네놈은 전설까지 이용할 셈이로군."

"이미 절반은 성공했소."

공야진의 시선이 서문진의 잔검에 내려앉았다.

"그 잔검도, 검심결도, 혈겁에서 살아남은 아이도, 명화교의 잔당도. 전부 한 전장으로 모이고 있지 않소?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판을 짠 것처럼."

남소월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자기 자랑은 됐고요. 결국 당신은 거짓 전쟁을 만들겠다는 거네요."

"거짓이라고?"

공야진이 웃었다.

"수만 명이 칼을 들면 그건 진짜 전쟁이오. 시작이 거짓이든 아니든."

그 말은 역겨울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천라지망이 무서운 이유는 사람을 속이는 데 있지 않았다.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거짓을, 결국 진짜 피로 완성시키는 데 있었다.

마음으로 베는 검

공야진이 죽장을 바닥에 가볍게 찍자 전각 바깥의 복면인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마당과 지붕과 담장 위를 가득 메운 그림자들.

아까까지의 매복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진짜 그물은 지금 내려오고 있었다.

"살아서 나갈 생각은 마시오."

공야진이 조용히 말했다.

"특히 너는."

그 마지막 말은 서문진을 향했다.

다음 순간, 죽장이 번쩍였다.

평범한 막대처럼 보였던 죽장 끝에서 가느다란 검날이 튀어나왔다. 얇고 길며 빛이 거의 없는 검이었다. 독사 혀처럼 조용한 칼날이었다.

서문진은 본능적으로 잔검을 세웠다.

쨍.

짧은 금속음이 터졌다.

그 한 번의 부딪힘만으로 그는 알았다. 강하다. 노인의 기혈은 쇠했을지 몰라도, 움직임은 전혀 늙지 않았다. 불필요한 힘이 한 점도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만 다듬어진 검로였다.

진청허와 유한성이 바깥 복면인들을 막아섰고, 남소월과 당연화는 장문인을 부축해 뒤로 물렸다.

전각 안은 순식간에 서문진과 공야진 둘의 싸움터가 되었다.

공야진의 검은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늦지도 않았다. 마치 서문진이 피할 자리에 이미 와 있는 검 같았다. 수십 년 동안 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느 순간에 망설이는지를 본 사람의 칼이었다.

"네 사부가 마지막에 잘못 가르친 게 하나 있소."

공야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사람을 믿으라 했겠지. 하지만 세상은 믿는 놈부터 죽는 법이오."

검끝이 서문진의 어깨를 스쳤다. 피가 번졌다.

그러나 서문진은 물러나지 않았다.

사부의 느린 검법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마음을 먼저 본다.

칼끝은 그다음이다.

공야진의 검은 완벽했다. 하지만 완벽한 검은 늘 한 가지를 숨긴다. 그 완벽을 유지하려는 집착이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늘 상대가 결국은 두려워하고, 흔들리고, 스스로 무너질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야말로 그의 빈틈이었다.

서문진은 일부러 한 걸음 크게 물러섰다. 중심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공야진의 검끝이 지체 없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서문진의 눈빛이 바뀌었다.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비운 것이었다.

검심결의 기세가 손목에서 아니라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짧은 잔검은 정면으로 맞부딪치지 않고, 사선으로 아주 작게 돌아 들어갔다. 칼을 막는 게 아니라 마음이 향한 자리를 비켜 서는 검.

공야진의 눈에 처음으로 놀람이 스쳤다.

잔검이 그의 검등을 타고 미끄러지더니, 죽장 속 숨은 검의 중심을 정확히 쳤다.

딱.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작은 어긋남 하나로 공야진의 검세 전체가 무너졌다.

서문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검끝은 목을 향하지 않았다.

손목도 아니었다.

가슴 한복판,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가장 방심하는 자리.

잔검의 검자루 끝이 정확히 그곳을 박았다.

공야진이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입가에 피가 맺혔다.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진짜 감정이 떠올랐다.

분노도 아니고 경멸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

자기가 짠 판에서, 자기가 읽은 사람에게 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서문진이 낮게 말했다.

"사부는 사람을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잔검을 바로 세웠다.

"먼저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제대로 보면, 믿을 사람과 베어야 할 사람이 보인다고."

무너지는 그물, 남는 줄

공야진은 비틀거리면서도 웃었다.

"하… 과연 진무백의 제자군."

그는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남소월이 즉시 외쳤다.

"독환!"

하지만 공야진이 꺼낸 것은 환약이 아니었다.

작은 청동 피리였다.

그가 입에 대려는 순간, 당연화의 은침이 날아가 손등에 박혔다. 피리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주 짧은 음 하나가 새어 나갔다.

바깥에서 갑자기 불길이 올랐다.

도관의 곳곳에 숨겨 둔 기름이 한꺼번에 타기 시작한 것이다.

유한성이 욕을 퍼부었다.

"미친 늙은이! 증거까지 다 태우려는군!"

공야진은 무너진 기둥에 몸을 기대고 웃었다.

"그물이 찢어진다고 생각하오? 어리석군. 줄 몇 가닥 끊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오. 천라지망은 이미 문파 안에, 상단 안에, 네가 믿는 얼굴들 안에 스며들었어."

장문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오늘 밤 네 정체는 드러났다."

"드러나?"

공야진이 피 묻은 입으로 웃었다.

"누가 믿어 주지?"

그 말이 칼처럼 박혔다.

정말 그랬다.

공야진 하나를 잡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심은 소문과 빚과 약점과 공포가 강호 곳곳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물의 중심은 쓰러져도, 그물 자체는 남는다.

서문진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여기서 끝낼 수 없었다.

공야진이 마지막 힘을 짜내며 다시 검을 들려는 순간, 진청허의 검등이 그의 손목을 쳐 떨어뜨렸다. 동시에 유한성의 막대가 노인의 무릎을 꺾었고, 남소월의 비도가 그의 옷깃을 기둥에 박아 버렸다.

공야진은 무릎을 꿇었다.

더는 싸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젊은 놈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너희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오. 화산에서 맺은 거짓 맹약은 이미 퍼졌고, 각지의 불씨도 이미 타오르고 있소. 곧 강호는 진짜 전쟁을 원하게 될 거다."

그는 피를 토하듯 웃었다.

"사람들은 늘 자기들이 속았다는 사실보다, 이미 뽑은 칼이 옳았다고 믿는 편을 택하니까."

그 말은 마지막까지 비열했지만, 그래서 더 무서운 진실이었다.

당연화가 장문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럼 더더욱 서둘러야겠네요."

진청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노인의 입만으로는 부족하다. 남아 있는 줄을 끊을 증거가 더 필요해."

장문인이 힘겹게 품에서 얇은 서책 하나를 꺼냈다.

타다 남은 장부였다.

"내가 서고에서 찾은 것들이다. 천라지망이 각 문파와 상단에 뿌린 자금과 인장 기록 일부가 적혀 있다. 완전하진 않지만… 시작은 될 것이다."

공야진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그걸 아직 갖고 있었나."

장문인이 차갑게 웃었다.

"네가 사람을 너무 얕봤기 때문이다."

전각의 불길이 점점 커졌다.

천장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한성이 소리쳤다.

"나가야 하오! 이러다 다 구워지겠소!"

아직 끝나지 않은 밤

도관을 빠져나올 때, 흑송령의 밤은 이미 불빛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복면인들 가운데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쓰러졌으며, 일부는 불길 속에서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못했다. 공야진은 포박되었지만, 서문진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거대한 퍼즐 하나가 맞춰졌다.

그러나 동시에 알게 되었다.

퍼즐의 끝이 아직 멀었다는 것도.

흑송령 아래 바람이 세게 불어 불길을 뒤흔들었다. 붉은 빛 사이로 검은 연기가 하늘로 길게 치솟았다. 마치 누군가 강호 전체를 향해 봉화를 올리는 듯했다.

남소월이 그 연기를 보며 작게 말했다.

"이제 진짜 난리 나겠네요."

"예."

서문진이 답했다.

그의 눈은 멀리 화산 쪽이 아니라,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강호 전체를 향해 있었다.

천라지망.

이십오 년 전 혈겁은 우발적인 참극이 아니었다.

명화교가 악해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공포를 만들고, 정의를 빌려 칼을 모으고, 피를 통해 침묵을 강요한 계획된 학살이었다.

그리고 그 거짓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야진은 잡혔지만, 그가 깔아 둔 줄은 강호 곳곳에 살아 있다. 화산의 맹약은 이미 퍼졌고, 명화교의 이름은 또 한 번 피바람의 깃발로 쓰일 준비를 하고 있다.

장문인이 떨리는 숨으로 말했다.

"서문진… 네가 가야 한다."

서문진이 돌아보았다.

장문인의 손에는 타다 남은 장부와 맞춰진 옥패가 들려 있었다.

"혈겁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고, 저들이 만들 전쟁을 막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멀어지는 불빛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강호는 또 한 번 같은 밤을 맞게 될 것이다."

서문진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받아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객잔에서 시작된 작은 조각 하나가, 이제 강호의 운명을 가리키는 열쇠가 되어 있었다.

진청허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화산에서 사흘짜리 동맹을 맺었지."

유한성이 씩 웃었다.

"사흘로는 택도 없겠는데."

당연화도 옅게 미소 지었다.

"이쯤 되면 손가락 하나로 끝낼 일이 아니네요."

남소월이 비도를 돌리며 서문진 옆에 섰다.

"좋아요. 이제 어디로 갈까요?"

서문진은 불타는 도관과 포박된 공야진, 그리고 손안의 옥패를 차례로 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놈들이 준비한 전쟁터로 갑니다."

그 말은 크지 않았지만, 밤공기 속에서 또렷했다.

천라지망의 중심은 드러났다.

혈겁의 진실도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누군가 수십 년 동안 거짓으로 빚어 온 강호의 밤과, 그 밤을 진짜 전쟁으로 완성하려는 마지막 칼끝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

흑송령 위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저 멀리 어디선가 둔중한 북소리 같은 바람이 울었다.

도룡대전의 밤이, 이미 강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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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룡대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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