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끝으로 다시 만난 얼굴들
화산은 멀리서 볼 때보다 가까이에서 더 날카로운 산이었다.
밤새 산길을 타고 올라온 서문진은 새벽 안개 너머로 솟은 봉우리들을 올려다보았다. 바위는 마치 하늘을 향해 뽑아 든 검날 같았고, 소나무는 그 칼집을 감싼 오래된 손가락 같았다. 아래로는 구름이 깔리고, 위로는 희미한 종소리가 번졌다.
정상에서는 이미 회동이 시작될 준비가 한창인 듯했다.
각 문파의 깃발이 바람에 흔들렸고, 멀리서도 인영이 분주히 오가는 것이 보였다. 겉으로는 강호의 안녕을 의논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서문진은 알고 있었다. 저 위에서 맺어지려는 것은 안녕이 아니라, 거짓을 강호의 이름으로 굳히려는 맹약이라는 것을.
남소월이 바위턱에 손을 짚고 올라서며 투덜거렸다.
"산이 왜 이렇게 높아요? 정의는 꼭 높은 데서만 이야기해야 하나요?"
"사람들이 올려다보게 만들기 쉽기 때문이겠죠."
"그럼 전 여전히 낮은 데가 좋네요.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말이 더 잘 들린다고 착각하거든요."
서문진은 짧게 웃고 앞을 보았다.
윤설화가 알려 준 뒷길은 험했지만, 덕분에 정문을 지키는 화산 제자들의 눈은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정상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낡은 연검대 앞에 이르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칼집에서 검이 반쯤 빠져나오는 소리가 겹쳤다.
맨 앞에 선 것은 화산의 여검수 악청란이었다. 매끈한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녀는 서문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이 검처럼 가늘고 곧았다.
그 오른편에는 푸른 도포를 입은 무당의 진청허가 서 있었다. 웃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방심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 뒤로는 젊은 소림승 혜명, 누더기 옷차림이지만 눈빛만은 매서운 개방의 유한성, 그리고 손끝에 은빛 침을 돌리고 있는 당문의 당연화가 있었다.
누가 봐도 한자리에 곱게 모일 얼굴들은 아니었다.
남소월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와, 이건 정말 재밌겠는데요. 강호의 젊은 괴물들이 다 모였네요."
악청란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갔다.
"한 걸음만 더 오면 베겠다."
"인사는 참 따뜻하네요."
서문진이 앞으로 나섰다.
"우릴 부른 것이 당신들인가."
진청허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 말을 우리가 먼저 묻고 싶군. 도망자 주제에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날 줄은 몰랐어."
"우린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그 말과 함께 유한성이 품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냈다. 남루한 옷차림과 달리 손놀림은 무척 재빨랐다.
"다들 같은 걸 받았을 거요. 내용도 비슷하고."
그는 쪽지를 펼쳤다.
짧은 문장이었다.
눈으로 본 것이 귀로 들은 것과 다르다고 느낀 자는, 해 뜨기 전 연검대로 오라.
남소월도 소매 안에서 같은 종이를 꺼냈다.
"글씨체까지 똑같네요. 참 친절한 함정이다."
혜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오지 않을 수는 없었소."
"그래서 다들 왔군요."
당연화가 얇게 웃었다.
"자기 문파의 어른들 말을 곧이곧대로 못 믿게 된 착한 제자들이요."
악청란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말을 조심해라."
"조심은 늘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 살아 있죠."
검끝과 말끝이 함께 부딪혔다.
연검대 위 공기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했다. 서문진은 그 얼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누군가는 자신을 잡아야 할 도망자로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눈앞의 상황보다 더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적과 아군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런 얼굴들이 가장 위험했다.
동시에, 가장 믿을 만하기도 했다.
믿지 못하는 자들의 이야기
먼저 검을 거둔 것은 뜻밖에도 악청란이었다.
칼날이 칼집으로 들어가는 짧은 소리가 울렸다.
"여기서 싸우면 밑에서 다 올라올 거다."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리고 난 아직 네놈이 정말 마교와 한패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입막음 대상인지 결론 내리지 못했다."
진청허가 어깨를 으쓱했다.
"화산의 검이 먼저 물러나는 걸 보니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악청란이 그를 노려보았다.
"입 다물지 않으면 네가 먼저 굴러떨어질 거다."
유한성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좋소, 좋소. 다들 칼부터 넣읍시다. 어차피 다들 속이 뒤집혀서 온 거 아니오?"
그 말은 이상하게 잘 먹혔다.
다섯 명의 젊은 고수와 서문진, 남소월은 낡은 연검대 한가운데 둥글게 섰다. 바닥에는 오래전 검흔이 거미줄처럼 남아 있었고, 가장자리 너머로는 끝없는 절벽이 내려다보였다.
맨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연화였다.
"전 삼 주 전부터 이상했어요. 사천 쪽 상단이 습격당했는데, 현장에 당문의 독흔이 남아 있었거든요. 다들 우리 집 독이라더군요. 그런데 웃기게도 독을 섞는 순서가 엉망이었어요. 진짜 당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만들면 사흘도 못 버티고 자기 손가락부터 썩죠."
진청허가 뒤이어 말했다.
"무당도 비슷했다. 마교 척결 협조문이라는 게 왔는데, 문장 몇 줄이 너무 서둘러 적힌 티가 났어. 겉은 그럴듯했지만, 내원에서 쓰는 인장의 압인이 아주 미세하게 틀렸지. 평소라면 눈치채기 어려웠을 거다."
혜명이 두 손을 모았다.
"소림 관할 아래 마을 하나가 불탔소. 범인들은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더군. 하지만 죽은 이들보다 다친 이들이 많았고, 아이들은 먼저 빼냈다고 했소. 살수의 짓이라기엔 칼이 너무 망설였소."
유한성은 콧등을 긁적이며 씩 웃었다.
"개방은 듣는 귀가 많지. 요즘 혈우야행단 놈들이 움직이는 길목마다 이상하게도 정파 쪽 창고 물건이 먼저 빠져나간다는 말이 있었소. 무기든 약재든 말이오. 우연치곤 너무 꾸준해."
마지막으로 악청란이 입을 열었다.
"화산 검법을 흉내 낸 자를 봤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끝동작만 그럴듯했다. 발은 엉뚱했고, 호흡도 맞지 않았지. 그런데 멀리서 보면 충분히 속을 만했다. 누군가 일부러 우리 이름을 빌리고 있다."
그녀는 서문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네 차례다."
서문진은 잠시 침묵했다.
이 자리에서 명화교의 골짜기와 윤설화의 존재를 어느 정도까지 털어놓아야 할지, 그 경계는 얇고도 위험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이 만남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는 품에서 화살촉과 동패를 꺼내 연검대 바닥에 내려놓았다.
"천학문 장문인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납치되었습니다."
바람이 한순간 멎은 듯했다.
"그를 노린 자들은 장문인의 이름과 인장을 이용해 거짓 명령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모두 마교라는 이름 아래 덮으려 합니다."
진청허의 시선이 바닥의 화살촉에 닿았다.
"그건…"
"정파 연맹 쪽 제철법입니다.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어도 흔적은 숨기지 못합니다."
혜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문인은 지금 어디에 있소?"
"흑송령 아래 옛 도관에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남소월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화산에서 맺어질 맹약은, 진실을 찾기 위한 회동이 아니라 누군가의 거짓을 강호 전체에 덮어씌우기 위한 시작일 가능성이 높아요."
당연화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동패를 집어 들었다.
"문양이 낯서네요."
"백로암에서도 비슷한 것을 봤습니다."
서문진이 답했다.
"한두 문파의 일이 아닐 겁니다."
악청란의 눈빛이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네 말을 믿는다고는 하지 않겠다."
"믿지 않아도 됩니다."
서문진이 담담히 말했다.
"다만 당신들도 이미 자기 눈을 믿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 한마디에 연검대가 조용해졌다.
조용한 순간은 대개 오래 가지 않는다.
특히 강호에서는.
누가 우리를 한자리에 모았는가
처음 날아온 것은 화살이 아니라 쇳소리였다.
절벽 아래쪽 바위 틈에서 쇠사슬이 튀어 오르더니 연검대 기둥 하나를 감아 버렸다. 동시에 사방의 소나무 위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졌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렸고, 손에는 각기 다른 문파의 흔적을 흉내 낸 병장기가 들려 있었다.
유한성이 욕을 뱉었다.
"젠장, 편지 보낸 놈들이 손님맞이도 준비했군."
남소월이 웃었다.
"이 정도면 환대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도가 번뜩였다.
첫 번째로 뛰어든 복면인의 손목에서 칼이 날아갔다. 그러나 나머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죽이러 온 자들이었다. 그것도 눈앞의 누구 하나 살아 돌아가선 안 된다는 듯한 기세로.
악청란이 검을 뽑았다.
화산 검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피었다.
단정하고도 매서운 검광이 연달아 뻗어나가자 복면인 둘의 어깨와 허벅지가 동시에 터졌다. 베는 자는 악청란이었지만, 검끝은 지나치게 깊지 않았다. 죽이기보다 전열을 끊는 검이었다.
진청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그는 한 발 늦게 나서는 것처럼 보이다가, 상대의 칼이 닿기 직전 옆으로 반 치 비틀었다. 그 짧은 어긋남 속에서 그의 검은 원을 그리며 상대 병장기를 바깥으로 흘려 보냈고, 이어진 검등이 턱과 갈비를 차례로 쳤다.
혜명은 아예 정면으로 받아 냈다.
쇠봉이 허공을 가르자 무거운 파공음이 울렸다. 복면인 셋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그의 한 걸음은 산처럼 묵직했다. 막는 것 같으면서도 밀어내고, 밀어내는 것 같으면서도 눌렀다. 연검대 끝까지 밀린 적 둘이 그대로 바닥을 구르며 떨어졌다.
당연화는 가장 뒤에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튕겼다.
은침 몇 점이 빛도 없이 스쳤다. 복면인 하나가 검을 놓치고 손등을 붙잡았고, 다른 하나는 발목을 접질린 듯 주저앉았다.
"안 죽어요."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대신 당분간 젓가락질은 힘들겠네요."
유한성은 누더기 자락을 휘날리며 바닥을 미끄러졌다. 대나무 막대 하나가 복면인의 무릎 뒤를 파고들더니, 그대로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강호에서 제일 무서운 건 가난한 놈의 발재간이오!"
남소월은 그들 틈을 바람처럼 누볐다. 오른손 비도가 상대의 시선을 끊고, 왼손 비도가 그 틈을 찔렀다. 비도는 늘 사람을 먼저 베지 않았다. 손등, 검집끈, 무기, 소매. 상대가 가장 믿는 것을 먼저 무너뜨렸다.
"다들 성격이 참 다르네요!"
그녀가 외쳤다.
"그래서 더 볼 만하고!"
서문진은 마지막까지 움직이지 않고 적의 흐름을 보았다.
복면인들은 수가 많았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쪽의 합이 맞기 전에 틈을 쪼개려 하고 있었다. 악청란과 진청허를 갈라놓고, 혜명의 무게를 절벽 쪽으로 끌고 가고, 뒤쪽의 당연화부터 지우려 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은 우연한 습격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 자리에 모일 얼굴들을 알고 있었다.
"왼쪽 아래!"
서문진이 외쳤다.
악청란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짧은 창 하나가 꿰뚫고 지나갔다.
"명령하지 마라."
그녀가 쏘아붙였다.
"명령 아닙니다."
서문진이 잔검을 뽑으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들어야 하는 말입니다."
그는 곧장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바위 밑 그늘에 숨어 있던 자가 드러났다. 활시위를 당긴 채 다음 화살을 노리던 복면인이었다. 서문진의 잔검은 짧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번개보다 빨랐다. 칼날이 아니라 검자루 끝이 손목을 때렸고, 이어진 발차기가 사내를 바위에 박았다.
그 순간 뒤쪽에서 살기가 번쩍 일었다.
진청허를 노린 검이었다.
서문진이 돌아설 틈도 없이, 악청란의 검이 먼저 그 궤적을 잘라 냈다.
"빚 하나다."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진청허는 옷자락을 털며 웃었다.
"오늘 안에 갚긴 어렵겠군."
싸움은 짧고도 거칠었다.
젊은 고수들이 서로를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의 빈틈을 메우는 데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자기 문파의 이름으로 싸우지 않았다. 살아남고, 눈앞의 진실을 붙잡기 위해 싸웠다.
마침내 마지막 복면인 하나가 연검대 난간을 넘어 달아나려는 순간, 남소월의 비도가 그의 허리띠를 끊었고 유한성의 막대가 발목을 후려쳤다. 사내가 구르며 쓰러졌다.
당연화가 재빨리 다가가 턱을 들어 올렸다.
"입 안에 독 있나 봐요."
혜명이 손가락 두 개로 사내의 턱관절을 눌렀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이 벌어졌다. 검은 독환 하나가 돌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유한성이 혀를 찼다.
"준비도 철저하군."
복면인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품 안에서 금속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당연화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얇은 은패였다.
겉면에는 실선들이 빽빽하게 얽혀 있었다. 마치 거미줄처럼, 혹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친 그물처럼.
진청허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건 처음 보는 문양이군."
서문진은 그 은패를 보며 말없이 눈을 좁혔다.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줄을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줄은 생각보다 훨씬 넓게 퍼져 있었다.
거짓 맹약 위에 세운 진짜 맹약
싸움이 끝났을 때, 정상 쪽에서 종이 세 번 울렸다.
거짓 맹약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엄숙한 낭독이 희미하게 흘러왔다. 마교 토벌, 강호 수호, 정기 바로세움. 그럴듯한 말은 언제나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러나 연검대에 선 일곱 사람의 옷자락에는 방금 튄 먼지와 피가 남아 있었다.
그 더러운 흔적이 오히려 더 진실해 보였다.
악청란이 가장 먼저 정상 쪽을 돌아보았다.
"저기 올라가 지금 이걸 들이밀어도 소용없을 거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증거는 아직 부족하고, 어른들 가운데 누가 우리 편인지도 모른다."
"맞아요."
당연화가 은패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오히려 우릴 한꺼번에 미친놈으로 만들겠죠. 혹은 방금 저 사람들처럼 조용히 죽이거나."
혜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분명하오. 장문인을 먼저 구하고, 이 문양의 주인을 찾아야 하오."
유한성이 서문진을 보았다.
"흑송령이라 했지? 길은 내가 알겠소. 정면으로 가면 죽기 딱 좋지만, 산짐승 다니는 옆길이 하나 있소."
진청허가 팔짱을 꼈다.
"흥미롭군. 서로 믿지도 못하는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게 되다니."
남소월이 웃었다.
"강호의 젊은 고수들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싸우기 직전 얼굴로 동맹을 맺네요?"
"일시적일 뿐이다."
악청란이 잘라 말했다.
그녀는 서문진 앞으로 걸어와 멈춰 섰다.
"착각하지 마라. 나는 아직 네가 완전히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괜찮습니다."
서문진이 답했다.
"저도 당신들이 모두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남소월이 작게 터뜨렸다.
"와, 분위기 참 좋아."
이상하게도 그 말에 진청허가 웃었고, 유한성도 피식 웃었다. 혜명조차 입가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악청란만 끝까지 무표정했지만, 검에 얹힌 손에는 더 이상 방금 전의 살기가 없었다.
서문진이 연검대 한가운데로 나섰다.
"좋습니다. 그럼 분명히 합시다."
그는 바닥의 오래된 검흔 위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장문인을 구하고 진짜 적의 정체를 밝힐 때까지, 우리는 각자 문파의 명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입니다."
진청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듣기엔 거창한데, 결국 임시 동맹이군."
"예. 임시입니다."
서문진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끝나면 다시 칼을 겨눠도 됩니다. 의심도, 원한도 그때까지 미루죠. 하지만 그 전까지는 누구도 등을 찌르지 않습니다."
당연화가 손을 들었다.
"조건 하나. 거짓말이 들키면 그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 받을게요."
"전부는 아니네요?"
남소월이 물었다.
"전 아직 관대하거든요."
혜명이 말했다.
"소승도 동의하겠소. 다만 사람을 살릴 수 있을 때는 반드시 먼저 살리는 걸 원칙으로 하오."
유한성이 씩 웃었다.
"난 손해 보는 장사는 싫지만, 이번엔 해 볼 만하오. 누군가 강호 전체를 판돈으로 놀고 있다면 엎어 버려야지."
진청허가 소매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좋아. 어차피 지루한 정의놀음보단 이쪽이 훨씬 솔직하군."
모든 시선이 마지막으로 악청란에게 향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산의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쳤다.
마침내 그녀가 검을 뽑아 연검대 바닥에 가볍게 꽂았다.
칼끝이 돌에 닿으며 맑은 소리를 냈다.
"화산의 이름으로는 아니다."
그녀가 말했다.
"악청란 개인의 판단으로, 이 동맹에 선다."
그 말은 짧았지만 무게가 있었다.
진청허도 검을 옆에 내려놓았다.
혜명은 쇠봉을, 유한성은 대나무 막대를, 당연화는 은침 하나를, 남소월은 비도 한 자루를 바닥에 놓았다.
잠시 후, 서문진도 잔검을 검흔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일곱 개의 무기가 둥글게 놓였다.
문파도 출신도 성정도 다른 일곱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어제의 적이었고, 누군가는 오늘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원 안에서는 이상하게도 같은 방향의 바람이 불었다.
서문진이 낮게 말했다.
"그럼 맹약합시다."
누구도 허세 섞인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대신 각자의 목소리로, 각자의 이름을 걸었다.
배신하지 않겠다.
등을 내주면 지키겠다.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칼을 안으로 돌리지 않겠다.
연검대 위로 아침 해가 완전히 솟았다.
저 위 대전에서는 늙은 손들이 거짓 문서를 붙잡고 강호의 운명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산의 바람은 그보다 조금 아래, 낡고 갈라진 돌바닥 위에 모인 젊은 칼들의 맹약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명분으로 꾸민 회맹이 아니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자들이 끝내 같은 적을 바라보기로 한, 훨씬 서툴고 훨씬 진짜인 맹약이었다.
남소월이 비도를 다시 허리춤에 꽂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동지인가요?"
진청허가 슬쩍 웃었다.
"사흘짜리 정도로 해 두지."
유한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사흘이면 충분하오. 강호가 뒤집히는 데도 긴 시간이지."
악청란은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정상 경계는 내가 맡겠다.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채기 전에 한 시진은 벌 수 있어."
혜명이 그녀 옆에 섰다.
"소승도 함께하리다."
당연화는 은패를 품에 넣었다.
"전 이 문양을 더 보겠어요. 독도, 쇠도, 사람도 흔적을 남기거든요."
진청허가 서문진을 향해 턱을 까딱했다.
"흑송령으로 가자. 장문인을 구하지 못하면 오늘 맹약은 산바람에 날린 농담이 될 뿐이니까."
서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사람은 더 이상 말로 다짐하지 않았다.
말보다 먼저 발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정상으로, 누군가는 산허리로, 누군가는 그림자 속 길을 탔다. 화산의 봉우리들은 여전히 칼날처럼 서 있었지만, 그 사이를 가르는 젊은 발걸음에는 전과 다른 결이 실려 있었다.
라이벌과 동지, 의심과 신뢰, 칼끝과 등짝이 뒤엉킨 이상한 인연.
강호의 어른들이 보았다면 고개를 저을 법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대개 세상을 뒤집는 것은, 가장 그럴듯한 얼굴들이 아니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얼굴들이 한자리에 섰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의 서문진은 아직 몰랐다.
화산에서 맺은 이 작은 맹약을, 누군가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그물은 이미 한 겹 더 내려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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