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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장문인

사라진 장문인

백로암의 새벽

산길의 새벽은 늘 사람을 속였다.

멀리서 보면 맑고 고요한데, 막상 발을 들이면 돌마다 물기가 차 있었고 안개는 발목에 감기듯 따라붙었다. 서문진과 남소월이 백로암으로 향한 것도 그런 새벽이었다.

밤새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숨은 무거웠지만, 두 사람 모두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장터에서 얻은 암호문은 짧았으나, 짧은 만큼 오히려 섬뜩했다.

백로암으로 옮긴다. 장문의 행방은 입을 다물 것.

그 말은 누군가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입을 다물라는 말은,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적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로암은 천학문 본산에서 반나절쯤 떨어진 절벽 중턱에 있었다. 한때는 향불이 끊이지 않던 작은 암자였다고 했지만, 십여 년 전 산사태가 한 번 난 뒤로는 찾아오는 이가 드물어졌다. 지금은 길 잃은 나그네나 비를 피하는 짐승들이나 들를 법한 곳이었다.

"이런 데 사람을 숨기기엔 딱이네요."

남소월이 낮게 말했다.

서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눈은 적고, 길목은 좁습니다. 매복하기도 좋고요."

"그 말은 우리도 들키면 곤란하다는 뜻이죠."

"예."

그는 대답하며 허리춤의 잔검을 한 번 만졌다. 창해의 잔검은 여전히 짧았지만, 이제는 그 짧음이 전처럼 불안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면, 검은 닿아야 할 곳을 스스로 찾는다는 걸 조금은 배웠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무너진 석담 뒤로 돌아 절벽 쪽 협로를 타고 올라갔다. 백로암 뒤편은 잡목과 바위가 엉켜 있어 사람이 다니기 어렵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감시가 헐거울 수 있었다.

과연 그랬다.

뒤편 담장 밑에는 발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오래된 승려의 신발 자국이 아니라, 밑창이 단단한 무인들의 발자국이었다. 마른 흙 위에 눌린 깊이로 보아 짐까지 들고 오르내린 흔적도 있었다.

남소월이 쪼그려 앉아 흙을 만져 보았다.

"하루는 안 넘었어요."

"방금 전까지 있었다는 뜻이군요."

"혹은 아직 안에 있거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서문진이 먼저 담장을 넘었다. 벽 너머 마당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무너진 석등 하나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마른 대나무 잎이 바람에 밀려 굴러갔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빈 곳은 이상하게 더 조용한 법이었다.

서문진은 발끝으로 마당의 모래를 쓸어 보았다. 방금 지운 듯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새벽녘에 급히 흔적을 감추려 한 모양이었다.

"소월."

남소월은 이미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저기."

그녀가 가리킨 건 법당 옆 작은 선방이었다. 문짝은 닫혀 있었는데, 자물쇠가 달린 자리가 유난히 새것처럼 반질거렸다. 오래 버려진 암자에 달린 것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서문진이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그는 힘으로 부수지 않았다. 대신 귀를 가까이 대고 한 호흡 들었다. 안쪽은 고요했다. 숨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남소월이 소매 속에서 얇은 쇠조각을 꺼내 틈에 밀어 넣었다.

딸깍.

문이 열렸다.

방 안에서는 향내가 먼저 났다.

그런데 그 향은 절간의 맑은 향이 아니었다. 약한 향으로 다른 냄새를 덮으려 한 흔적이었다. 피 냄새, 습기, 그리고 오래 묶인 사람 몸에서 배어 나오는 쓴 냄새.

방 중앙에는 작은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기둥에는 쇠고리가 박혀 있었다. 쇠고리에는 끊어진 밧줄 끝이 남아 있었다. 벽 쪽 바닥에는 약탕기를 닦다 만 자국이 있었고, 창호 밑에는 마른 핏자국이 검게 번져 있었다.

남소월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숨긴 정도가 아니네요."

서문진은 말없이 평상 곁으로 다가갔다. 나무판에는 날카로운 것이 스치고 간 깊은 흠집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칼이나 검이 아니면 생길 수 없는 자국이었다.

누군가 여기에 갇혀 있었고, 얌전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기둥에 손을 얹었다.

나무결 사이에 손톱으로 긁은 듯한 흔적이 있었다.

서문진이 먼지를 털어 내자 희미한 글자 두 개가 드러났다.

천… 학.

글자는 끝까지 적히지 못한 채 끊겨 있었다.

남소월이 숨을 낮췄다.

"천학문?"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서문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천학문 장문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천학문과 깊이 연관된 누군가가 여기 붙들려 있었다. 그런데 장터에서 얻은 암호문에 적힌 장문이라는 말까지 겹치면, 가능성은 하나로 좁혀졌다.

그 순간이었다.

문밖 마당에서 작은 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남소월이 즉시 손을 들었다. 둘은 동시에 숨을 죽였다.

발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둘, 넷, 여섯.

누군가 백로암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빈 방에 남은 문파의 그림자

두 사람은 선방 안쪽 들보 위로 몸을 숨겼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 셋이 들어왔다. 나머지 둘은 문밖에 남은 듯했다. 사내들 가운데 가장 키 큰 자가 방 안을 한 번 훑더니 낮게 욕설을 뱉었다.

"향 냄새가 아직 남았군. 제대로 지우라고 했잖아."

다른 놈이 대꾸했다.

"급히 옮기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여기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으니—"

철썩.

말 끝나기도 전에 뺨 맞는 소리가 났다.

"변명하지 마라. 위에서 발각되면 네 목도 내 목도 날아간다."

서문진은 들보 위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위에서.

그 말 하나에 불길한 냄새가 짙어졌다. 저들은 단순히 돈 받고 움직이는 살수들이 아니었다. 분명 지시를 내리는 더 큰 손이 있었다.

키 큰 사내가 평상을 발로 걷어찼다.

"어차피 장문은 이미 산문 밖으로 빠졌다. 이곳 흔적만 없애면 된다."

남소월의 시선이 번쩍했다.

장문은 이미 산문 밖으로 빠졌다.

그 말은, 장문인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과 동시에 누군가 그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런데 다음 말이 더 날카롭게 박혔다.

"천학문 안쪽에서도 입단속은 끝났다. 괜히 겁먹지 마."

서문진의 손가락이 잔검 자루 위에서 멈췄다.

천학문 안쪽에서도.

그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내 하나가 기둥의 밧줄을 풀어 불에 태우려 몸을 숙인 순간, 서문진이 들보에서 뛰어내렸다. 낙하의 힘을 실은 잔검이 사내 손목 앞을 번쩍 스쳤다.

후두둑.

불쏘시개와 밧줄이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남소월도 반대편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문을 막아 섰다.

"들어오기는 쉬운데 나가기는 좀 어렵겠네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검은 천을 쓴 자들이 순간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제일 앞의 사내가 곧장 칼을 뽑아 들었다.

"잡아!"

좁은 방은 긴 검에 유리할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한 사람이 크게 휘두르면 동료와 부딪히기 쉬웠고, 발을 잘못 놓으면 평상과 기둥에 걸렸다. 서문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첫 번째 칼이 비스듬히 떨어져 오자, 그는 검날이 아니라 어깨의 방향을 먼저 보았다. 칼이 올 자리에서 반 치 비켜난 몸이 곧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잔검은 짧고 가벼운 섬광처럼 손목과 손목 사이를 스쳤다.

사내의 칼이 힘을 잃고 아래로 처졌다.

둘째 놈은 뒤에서 찔러 들어왔다. 서문진은 돌아서지 않고 기둥을 밟아 몸을 틀었다. 상대 검끝이 그가 있던 자리를 허망하게 지나쳤고, 잔검의 검등이 놈의 턱 밑을 후려쳤다.

남소월 쪽은 더 빠르고 더 요란했다. 그녀는 아예 평상을 발판 삼아 몸을 띄운 뒤, 비도를 던지는 척하며 손목만 튕겼다. 사내 하나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순간, 그녀의 발끝이 그의 무릎 안쪽을 찍었다.

"아프죠? 그거 일부러예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사내는 무릎을 꺾고 쓰러졌다.

그러나 키 큰 사내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갑자기 검을 버리고 품속에서 짧은 철통 하나를 꺼냈다.

남소월이 외쳤다.

"독연!"

서문진은 즉시 바닥의 깔개를 걷어 올려 던졌다. 푸른 연기가 퍼지기 직전, 두꺼운 천이 철통과 사내 얼굴을 한꺼번에 덮었다.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허우적대는 사이, 서문진의 잔검이 그의 손등을 때려 철통을 떨어뜨렸다.

그는 곧장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누가 시켰지?"

사내는 대답 대신 침을 뱉으려 했다. 서문진이 팔목을 비틀자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학문 안쪽 누구냐."

놈은 한순간 눈빛을 번뜩였다.

그건 놀람이 아니라, 들킨 자의 반응이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문진이 더 몰아붙이려는 찰나, 문밖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사내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퇴각!"

남은 자 둘이 창문을 깨고 몸을 던졌다. 남소월이 뒤쫓으려 했으나, 키 큰 사내가 갑자기 숨겨 둔 단검을 꺼내 자기 가슴팍 아래를 찔러 버렸다.

피가 솟구쳤다.

남소월이 이를 갈았다.

"미친…"

사내는 피를 토하면서도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가 늦었다. 산문 안의 문은 이미 열렸어."

그 말을 끝으로 고개가 툭 꺾였다.

방 안에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문진은 죽은 자를 내려다보았다.

산문 안의 문은 이미 열렸다.

외부의 적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안에 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어디가 바깥이고 어디가 안인지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남소월이 시체의 옷깃과 소매를 뒤졌다.

"이거 봐요."

그녀가 꺼낸 건 작은 패 하나였다. 겉면은 평범한 나무패였지만, 뒤집자 안쪽에 붉은 칠이 벗겨진 자국이 드러났다. 거기엔 아주 희미하게 천학문의 운문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외문 제자에게 주는 패가 아니었다. 내원 출입 허가를 받은 자들만 쓸 수 있는 종류였다.

서문진의 표정이 굳었다.

이제는 의심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누군가 천학문 안에서 길을 열어 주었고, 그 누군가는 단순한 말단이 아니었다.

천학문으로 돌아오다

백로암을 떠날 때, 산 아래로 불길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뒤늦게 암자 전체를 태워 증거를 없애려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흔적은 사라져도 냄새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서문진과 남소월의 머릿속에 남은 말들은 불로 태워지지 않았다.

둘은 쉬지 않고 천학문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서문진은 거의 말이 없었다. 백로암에서 본 평상, 기둥에 남은 글자, 천학문 안쪽에서도 입단속이 끝났다는 사내의 말. 각각은 조각에 불과했지만, 이상하게도 하나의 그림으로 모여 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 그림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두 사람은 천학문 산문에 도착했다.

그런데 산문 앞 분위기부터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외원 제자들이 물동이를 나르고 잡역제자들이 분주히 뛰어다녔을 시간인데, 이날은 이상할 만큼 정돈되어 있었다. 정돈되었다기보다 억지로 누른 듯한 고요라고 해야 맞았다. 사람들은 말을 아꼈고, 눈을 마주치면 금세 시선을 피했다.

문을 지키던 제자가 서문진을 보자 잠시 굳었다.

"서… 서사형?"

"무슨 일 있었나?"

제자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사이 남소월이 옆에서 물었다.

"장문인께선 어디 계시죠?"

그 한마디에 제자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장문인께서는 폐관 중이십니다."

서문진이 천천히 되물었다.

"폐관?"

"예. 사흘 전부터요. 누구도 뵐 수 없습니다."

사흘 전.

바로 백로암의 흔적과 겹치는 시점이었다.

서문진은 제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폐관에 들어가신 분이 어째서 산문 밖으로 옮겨졌다는 말이 도는 거지?"

제자가 움찔했다.

"저, 저는 그런 말 모릅니다."

"누가 입단속을 시켰나."

"저는—"

그때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회색 수염을 단정히 다듬은 중년인. 집법당의 장로 한백림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웃음기가 적은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산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누구인가 했더니, 외원 제자가 돌아왔군."

그의 시선이 서문진과 남소월을 차례로 훑었다.

"장문인의 폐관은 문내 일이니,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남소월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문내 일인데 왜 산문 지키는 제자 얼굴이 저렇게 질려 있죠?"

한백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외인이 끼어들 일은 아니다."

서문진은 장로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한백림은 폐관을 말하면서도 장문인의 안위를 한 번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문내 일, 입단속, 소란 금지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을 숨기는 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었다.

"장로님."

서문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폐관 중이신 장문인의 거처엔 누구나 드나들 수 없지요?"

"당연하다."

"그런데 왜 내원 쪽 경계 인원이 평소의 두 배입니까."

한백림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문진은 그 작은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산문에 들어오며 그는 이미 봤다. 내원 쪽 길목마다 평소 보지 못한 무인들이 서 있었고, 그중 둘은 천학문의 정식 검식을 쓰는 손이 아니었다. 몸놀림은 외부 낭인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들이 문내 경계에 섞여 있었다.

한백림이 냉랭하게 말했다.

"요즘 강호가 어수선하니 경계를 강화한 것뿐이다."

"외부 사람들까지 들여서 말입니까?"

주변 공기가 순간 싸늘하게 얼었다.

문지기 제자가 숨을 들이켰다. 남소월은 아무 말 없이 서문진 쪽으로 반 보 다가섰다.

한백림은 한참 동안 서문진을 내려다보았다. 외원의 잡역제자가 이런 식으로 맞받아 말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더구나 그 눈빛이 예전처럼 위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더 불편하게 만든 듯했다.

마침내 장로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문진. 네가 요즘 바깥일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그는구나."

"안에서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깥일이 아닙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 제자들의 눈이 커졌다.

한백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소매를 털며 돌아섰다.

"외원 제자가 헛소문을 퍼뜨리면, 그 죄가 가볍지 않을 것이다. 방에 들어가 자숙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등 뒤를 보는 순간, 서문진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장로의 허리춤에 걸린 열쇠 꾸러미였다.

내원 서고와 장문인 처소 뒤편 문을 여는 열쇠가 섞여 있는 모양새였다. 집법당 장로가 그 열쇠를 갖고 있는 일 자체가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 그것을 굳이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건 무엇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권한인가.

아니면, 서둘러 감추고 있는 무언가인가.

닫힌 문, 열려 버린 의심

날이 완전히 저물자 외원 숙소 쪽은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안쪽의 숨은 몹시 거칠었다.

잡역제자들은 밥그릇을 들고도 서로 눈치를 봤고, 입이 가벼운 녀석들조차 오늘만큼은 헛소리를 삼켰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뭔가 알고 있었다. 혹은 적어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서문진은 예전 자신이 쓰던 작은 방에 앉아 있었다. 남소월은 창가에 기대 밖을 살폈다.

"이상하죠?" 그녀가 먼저 말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겁먹은 사람은 대개 말을 많이 해요. 괜히 상관없는 얘기까지 꺼내고, 웃지도 못할 농담도 던지죠. 그런데 여긴 너무 조용해요."

서문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미 입을 막았습니다."

"장로 한 사람 힘만으론 이 정도는 어려워요."

"압니다."

그는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책상을 바라보았다.

천학문은 큰 문파였다. 장로들이 있고, 내원 제자들이 있고, 외원과 집법당, 전공당, 약방과 무고까지 각각 제 역할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장문인 한 사람이 사라졌는데도 문파 전체가 이렇게 빠르게 침묵할 수는 없다. 누군가 오랫동안 준비했거나, 적어도 여러 자리를 동시에 움켜쥔 게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남소월이 조용히 물었다.

"누구라고 봐요?"

서문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습니다."

"뭔데요?"

"상대는 장문인 한 사람만 노린 게 아닙니다."

그는 백로암에서 본 평상을 떠올렸다. 가둠, 이송, 입단속, 증거 인멸. 그건 순간의 납치가 아니었다. 문파를 흔들기 위해 꼭 필요한 고리를 먼저 뽑아 내는 방식이었다.

"장문인이 사라지면, 다음은 장문인의 인장입니다. 그다음은 명령이고요. 명령이 바뀌면 문파의 칼이 누구를 향할지도 바뀝니다."

남소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문파 자체를 손에 넣겠다는 거네요."

"예. 그리고 천학문 하나로 끝날 일 같지도 않습니다."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장터의 회색 옷들, 혈우야행단의 움직임, 봉인된 동굴의 잔검, 창해의 흔적, 그리고 이제는 천학문 장문인의 실종까지. 조각은 달랐지만 방향은 하나였다. 누군가 강호의 오래된 질서를 바깥에서 두드리는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썩히고 있었다.

그때 창밖에서 아주 짧은 휘파람 소리가 났다.

서문진과 남소월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 창틀 아래로 종이 뭉치 하나가 툭 던져졌다.

남소월이 재빨리 집어 펼쳤다.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장문인의 거처는 비어 있다. 믿지 말 것. 자정, 후원 우물.

익명의 경고였다.

남소월이 종이를 흔들었다.

"이런 건 대개 함정인데요."

"압니다."

"그래도 갈 거죠?"

서문진은 웃지 않았다.

"예."

자정의 후원은 달빛마저 희미했다.

두 사람은 그림자를 밟듯 움직여 우물가에 닿았다. 인기척은 없었다. 대신 우물 두레박 밑에 작은 기름종이 꾸러미가 숨겨져 있었다.

그 안에는 얇은 장부 한 장과 부러진 밀납 인영이 들어 있었다.

장부에는 지난 닷새 동안 내원으로 반입된 물품이 적혀 있었다. 특이한 것은 약재 목록이었다. 기혈을 억누르고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약재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폐관 수련하는 사람이 쓸 약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친 사람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거나, 포로를 약하게 만드는 데 가까운 것들이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밀납 인영이었다.

장문인의 개인 인장 일부가 찍힌 것이었는데, 가장자리가 부자연스럽게 깨져 있었다. 누군가 서둘러 인장을 떠서 문서를 봉했다가, 남은 찌꺼기를 부러뜨린 모양새였다.

서문진은 그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가짜 명령서."

남소월이 중얼거렸다.

"혹은 진짜 인장을 빼앗아 찍은 명령서."

그 순간, 우물 맞은편 어둠 속에서 누군가 기침했다.

둘은 재빨리 몸을 돌렸지만, 나타난 이는 칼 든 적이 아니었다. 허리가 굽은 노복 하나였다. 그는 천학문 후원을 오래 쓸던 노인으로, 외원 제자들은 다들 얼굴쯤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길게 말할 시간 없습니다."

서문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누구의 심부름이지요?"

"심부름 아닙니다. 그냥… 더는 못 보겠어서 왔습니다."

노인의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사흘 전 밤, 장문인 처소 뒤문으로 가마가 하나 나갔습니다. 겉으론 약재를 실은 것처럼 꾸몄지만, 가마를 메던 자들이 너무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은 사람들 가운데… 천학문 검식을 쓰지 않는 자가 있었습니다."

남소월이 숨을 죽였다.

노인은 계속했다.

"저는 못 본 척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장문인께서 폐관이라 하고, 시중들던 아이 둘이 갑자기 다른 전각으로 보내졌습니다. 약방 장부도 뜯겨 나갔고요."

서문진이 낮게 물었다.

"누가 지휘했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을 다 보진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말이 끊겼다.

늦었다.

어둠 속에서 쇠붙이 번뜩이는 소리가 났다. 서문진이 노인을 밀쳐 내는 동시에 잔검을 올렸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암기가 튕겨 나갔다.

"엎드리세요!"

남소월이 외쳤다.

담장 위로 검은 그림자 셋이 솟구쳤다. 그들은 말을 섞지 않고 곧장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입막음이었다.

이번에는 서문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노인을 지키는 자리를 기준으로 발을 밟았다. 공격이 아니라 방어의 원이 먼저 마음속에 그려졌다. 첫 번째 사내의 칼이 위에서 떨어져 오자, 잔검이 짧고 빠르게 그 길을 끊었다. 두 번째는 옆으로 파고들었지만, 서문진은 몸을 돌리며 놈의 진로 자체를 막아 버렸다.

짧은 검은 길게 휘두를 수 없었다.

대신 지켜야 할 곳 가까이에 있을 때는, 오히려 군더더기가 없었다.

남소월도 우물 두레박 줄을 잡아당겨 사내 하나의 발을 얽었다. 놈이 중심을 잃자 그녀의 비도가 소매 끝을 꿰뚫어 벽에 박았다.

"밤바람 맞고 싶으면 혼자 맞지, 왜 남의 입을 막아요?"

그러나 상대는 끝까지 버티지 않았다. 붙잡힐 것 같자 곧장 연막탄을 터뜨리고 담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서문진이 뒤쫓으려 했지만, 노인이 팔을 붙잡았다.

"쫓지 마십시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이제 그들도 압니다. 안에서 새는 물이 있다는 걸."

노인은 서문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하십시오. 장문인을 데려간 것도 무서운 일이지만, 더 무서운 건 그걸 감춘 사람들이 문파의 명령을 쥐고 있다는 겁니다."

말을 마친 노인은 더 머물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소월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쯤 되면 대놓고 전쟁이네요."

서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손안의 밀납 조각에 머물러 있었다.

장문인은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하지만 더 큰일은, 장문인이 없는 자리를 누군가 너무 빠르고 자연스럽게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파 위에 드리운 더 큰 그물

새벽이 오기 전, 서문진과 남소월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보다 생각이 더 많았다. 이제는 단순히 누가 쫓아오고, 어디로 도망치고, 누구 손에서 살아남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천학문이라는 문파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흔들림은 분명 다른 곳과도 이어져 있었다.

서문진은 책상 위에 장부와 밀납 조각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소월."

"네."

"백로암의 사내가 말했습니다. 천학문 안쪽에서도 입단속은 끝났다고."

"예."

"장로 한백림은 장문인의 안위를 묻는 말에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폐관이라는 말만 되풀이했지요."

남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원 경계엔 외부 무인들이 섞여 있었고요."

"거기에 약방 장부까지."

서문진은 손가락으로 장부의 약재명을 짚었다.

"이건 우연으로 겹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누군가 천학문 안에서 길을 열어 주었고, 외부 세력이 그 길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장문인을 옮기는 데 문내 권한이 필요했고, 인장을 쓰는 데도 내부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동굴의 잔검과 반옥을 쫓아온 놈들이 우리 행적을 알았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소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릴 계속 먼저 기다리고 있었죠."

"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창밖 아직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분노가 먼저 치밀었을지도 모른다. 외원의 잡역제자였던 자신을 업신여기던 시선들, 답답한 벽, 뒤늦게 깨닫는 진실에 대한 조급함이 가슴을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검심결이 알려 준 것은 단순히 싸움의 요령이 아니었다. 마음이 먼저 서야 검끝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한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조금씩 알아 가고 있었다.

천학문이 무너지면 외원과 내원의 경계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

장문인의 실종이 감춰진 채 가짜 명령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문파의 칼은 틀림없이 누군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휘둘러질 것이다.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은 라이벌 문파일 수도 있고, 구파일방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강호 전체일 수도 있다.

서문진이 천천히 말했다.

"이제는 저 하나 살아남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소월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장문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연 자가 누구인지 밝혀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죠."

"원래 쉬운 길은 우리 차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남소월이 피식 웃었다.

"그건 좀 서글픈데요."

"대신 재미는 있습니다."

"이 와중에 그런 말이 나와요?"

"겁먹는 것보단 낫습니다."

남소월은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쫓기는 쪽이 아니라 쫓는 쪽이 되는 거네요."

"예."

서문진은 장부와 밀납 조각을 품에 넣었다.

창밖 동쪽 하늘이 아주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밤이 끝난다는 뜻이었지만, 동시에 더 큰 어둠이 시작된다는 뜻 같기도 했다.

천학문의 장문인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노리는 자들은 이미 안과 밖에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서문진은 마침내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자신이 뛰어든 것은 더 이상 객잔의 칼부림도, 산길의 추격전도 아니었다.

문파 하나의 운명과, 강호 전체를 뒤집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음모의 한복판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새벽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짧은 잔검은 허리춤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그러나 그 짧은 쇠끝이 이제 겨누는 곳은, 예전보다 훨씬 멀고 훨씬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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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룡대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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